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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4일 월요일

김지하 시인, 말년 행보 논란…잘 늙기의 어려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3-02-03일자 기사 '김지하 시인, 말년 행보 논란…잘 늙기의 어려움'을 퍼왔습니다.

갈 곳 없는 노인 중엔 버릇 없는 ‘젊은 것들’과 자신을 방치하는 사회를 향해 울분을 쏟아내다 극우의 행동 전위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2011년 7월 극우 노인단체인 대한민국어버이연합 관계자가 서울 대한문 앞에서 진보단체가 설치한 농성천막을 강제로 철거하려다 이에 항의하는 한 여성의 목을 조르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원로와 퇴물은 ‘한 끗’ 차이 ‘늙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분별 없는 탐욕과 인정 욕구 내려놓고 아름답게 저무는 비결은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초’ 중에서)  말년의 행보가 논란을 빚은 경우는 비단 김지하뿐만이 아니다. 널찍한 사무실과 기사 딸린 관용차가 나오는 ‘한자리’를 노리고, 있는 인연 없는 연줄 다 동원해 이력서를 밀어넣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일부 ‘진보 원로들’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원로와 퇴물은 ‘한 끗’ 차이

민망한 일이다. ‘원로’라 불리던 이들이 속절없이 추락한다. 원로란 본디 “나이나 지위, 덕망이 높은 벼슬아치”를 일컫는 말이었다. 굳이 관직이 아니어도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오르는 게 가능해진 현대에 이르러선, 원뜻의 계급적·윤리적 차원이 탈각되고 개념의 외연도 확장됐다.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쯤을 이르는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이제 법조인, 정치인, 교수 등 전통적 엘리트뿐 아니라 상공인, 교사 같은 통상의 직명 앞에도 원로라는 말이 붙는 게 어색하지 않다. 존숭받던 원로가 쉰내 나는 퇴물로 추락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원로와 퇴물은 말 그대로 ‘한 끗’ 차이다.김지하(72). 총칼 든 박정희와 맞짱 뜨며 저항의 1970년대를 선도했던 한 시절의 영웅이, 돌연 연민과 안타까움을 부르는 ‘보통 노인’으로 주저앉아버렸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그가 야당의 대선주자와 거물급 지식인을 겨냥해 쏟아낸 언어의 신랄함은 과거 ‘오적’에서 보여준 치열한 풍자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그것은 ‘대한민국어버이연합’으로 상징되는 동년배 우익들의 저잣거리 언어에 가까웠다.여기저기 “비가 새는” 조짐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래서 “새 지붕을 얹듯” 그 또한 “사랑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나날이 희미해지는 세간의 인정(認定)을 회복하기 위해, 지금의 김지하를 만든 실존의 지반을 스스로 허문 꼴이 돼버렸다. 언론인 고종석은 “마음이 망가진 사람의 허튼소리”라 일축했지만, 몇몇 평론가들에게 이 사건은 “김지하의 평범화”(이택광)이자 “영웅주의의 무구한 타락”(황호덕)을 드러내는 비범한 표지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오죽하면 (조선일보) 선임기자 최보식조차 “선거와 정치판에서 잘 싸우는 역할은 그와 같은 시인이 아니어도 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고 안타까워했을까.그러나 말년의 행보가 논란을 빚은 경우는 비단 김지하뿐만이 아니다. 널찍한 사무실과 기사 딸린 관용차가 나오는 ‘한자리’를 노리고, 있는 인연 없는 연줄 다 동원해 이력서를 밀어넣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일부 ‘진보 원로들’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시민사회 원로’라는 이름으로 정치권 외곽에 자리를 잡고 중요한 국면마다 발언권과 영향력을 행사한다.지난해 두 차례의 선거 국면에서 보여준 ‘시민사회 원로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정파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쉽지 않은 때일수록, 난마같이 얽힌 상황을 정리하고 중재할 ‘어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진영 내 다수 의견이었다. 하지만 양보를 압박받는 쪽에선 ‘권리만 누리고 책임은 안 지려는 훈수정치’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시민사회 원로들로 구성된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가 안철수 후보의 독자 행보에 거듭 제동을 걸자 친안철수 성향 트위터 이용자들 사이에선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교체되지도 않는 권력인 소위 ‘원로’라는 무리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kongheejun)는 격한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하는 문제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박정희와 맞짱 뜨던 한 시절의 영웅이 연민과 안타까움을 부르는 ‘보통 노인’으로 주저앉아버렸다. 지난해 12월13일 시인 김지하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화관을 찾아온 박근혜 대통령 후보와 환담을 나누었다(위). 1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지난해 12월19일 서울 종로보건소에 마련된 투표소 앞에 유권자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유독 노인들이 눈에 많이 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겨레 김봉규 기자

진보에 ‘원로’라는 집단이 존재하는 사실부터 난센스라는 지적도 있다. 현존 질서와 전통의 권위를 부단히 의심하고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진정한 전통(‘반전통의 전통’)이라 여기는 문화적 전위주의의 영향력이 여전한 탓이다. 실제 ‘축적된 지혜’의 역사적 집적물로 간주되는 ‘전통’이나, 그것의 인격적 구현체로 여겨지는 ‘원로’의 존재에 대해 적극적으로 그 가치를 평가해온 쪽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였다. 이 점은 ‘원로회의’ 성격의 자문(의결) 기구가 대체로 신분제적 질서가 잔존해 있거나 보수세력의 영향력이 뿌리 깊은 곳에서 발달해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반면 진보에게 ‘나이듦’이란 질병과 빈곤, 고독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사회적 약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이 노년이 된 뒤에도 인간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사회적 보호망을 제공하는 일은 진보 정치세력의 중요한 임무였다. 노년층을 위한 보편적 연금과 의료, 돌봄 서비스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부 아래서 발달해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 나라에서 노인 인구비의 증가는 산업구조 및 가족제도의 변화와 맞물려 20세기 중반부터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어떻게 늙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한국에서도 노년 세대뿐 아니라 모든 연령집단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어느 나라보다 빠르고, 나이듦을 대하는 태도 역시 가파르게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의 강도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물론 경제적 문제다. 국가의 복지 체계는 걸음마 단계인데, 가족의 돌봄과 부조 기능은 급격히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빈곤문제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보면, 노인 가구 10가구 가운데 6가구가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2012년 6월 기준).노년기의 내리막이 가파르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경제적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는 막막함,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은 노년의 일상을 한층 황폐하게 만든다. 게다가 노년의 삶을 어떻게 가꿔갈지에 대해 별다른 학습이나 고민도 없이 황혼을 맞이했으니, 부딪히는 상황마다 실패와 난감함의 연속이다. 이런 어려움의 강도는 현역 시절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일수록 더하다. 어딜 가도 자신을 알아보고 대접해주는 환경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스스로 일상을 챙기는 일에 너무도 미숙한 탓이다.이들 중엔 ‘왕년의 끗발’에 기대거나, 검증 안 된 ‘경륜’을 앞세워 한번 물러나온 무대를 기어이 다시 오르려는 이도 있다. 그러나 분별 없는 탐욕은 민폐를 낳는다.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여의도와 광화문의 유력 캠프에 줄을 대고 호시탐탐 입조(立朝) 기회를 노리는 ‘전직’들, 정권 교체기마다 공기업이나 정부투자기관 감사 자리 하나 얻어보려 이리저리 이력서를 들이미는 정·관·언론계 퇴직자들의 모습은 딱하고 처연하다. 요행히 몇몇은 중심가 사무실의 회전의자를 차지하고 2~3년쯤 풍족한 급여를 받으며 우아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위신을 지켜주느라 지출되는 비용은 공공부문에 20~30대를 위한 신규 일자리를 여럿 만들고도 남는 규모다.

속물성이 생물학적 늙음과 결합하면 노추

그나마 대부분의 노년은 이런 자리에 접근하지도 못한다. 정년을 맞아 직업 전선에서 쓸쓸히 퇴역했지만, 집에만 눌러 있자니 가족들 눈치 보이고 나가자니 딱히 갈 곳도 없다. 이들 중엔 서푼어치 권위의식으로 가족들 위에 군림하려다 왕따를 당하거나, 드물게는 버릇 없는 ‘젊은 것들’과 자신을 방치하는 사회를 향해 울분을 쏟아내다 극우의 행동 전위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물론 거개의 노인들은 집 안에서 TV를 끼고 외로움을 달래거나 무료 전철을 타고 도심 공원에 나가 또래 노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분별 없는 탐욕의 또 다른 귀착지는 노추(老醜)다. 김지하로 다시 돌아가면, 평론가 황호덕(성균관대 교수)은 그의 변신이 “노년의 외로움의 징표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는 묻는다. “젊음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노년이란 무엇일까.” 그에게 김지하 같은 “한때의 젊은 재능들”이 보여주는 납득할 수 없는 노년은 “오직 커다란 삶의 변곡과 전향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존재를 환기시킬 수밖에 없었을 그들의 사정”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극적이다. 이어지는 고백은 이 뒤늦은 깨달음에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노년에 대한 사유가 그간 얼마나 부재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그런데 사람들이 정작 두려워하는 건 누구라도 김지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외로움과, 그 외로움의 근원에 자리잡은 인정 욕구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말한다. “그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확신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미래의 어느 시점엔가 자신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란 믿음 없이는 당대의 고독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은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데, 이런 인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자들을 일러 ‘속물’이라 한다. 속물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과정에서 과시와 협잡과 기만도 마다 않는다. 이런 행태의 속물성이 생물학적 늙음과 만나면 노추가 된다.1990년대 초 황지우가 남긴 ‘성요한병원’이란 시는 인정에 대한 사람들의 병적인 집착을 경쾌하게 조소한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처남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 이 시를 썼다. “결국, 사람이란 자기 알아달라는 건데/ 그렇지 못하니까 미쳐버린 거다/ 권력도/ 부부싸움도 그렇다/ 자기 알아달라는 치정이다/ …/ 여자만 보면 자기의 자지를 꺼내 보인다는 목수 김씨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웃지 않고/ 나는 웃었다/ 병원을 나올 때에야/ 문 앞에 흰 석고 성자가 서 있었다”노인과 약자에게 불친절한 이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뒤바뀔 리 만무하니, 당장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적절한 양생술(養生術)과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부단한 수행밖에 없는 것일까. (노인혁명)을 쓴 사회학자 홍승표(계명대 교수)는 “그렇다”고 말한다. 문화인류학자 김찬호(성공회대 교수)가 제안하는 노년의 삶도 비슷하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반쯤은 저 세상에 이미 가서 살고 있는 영혼, 현실의 속물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공정하고 투명하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 영욕의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생애의 고결하고도 황홀한 기쁨을 빚어내는 내공…. 그러한 위상에서 노인의 권위도 되살아날 수 있다.”(김찬호 ‘노년, 무를 향한 정진’ 중에서)

처자들 앞에서 바지춤 풀어헤치는 짓만은

이쯤이면 군자를 넘어 성자의 경지다. 여기저기 비 새는 범부들 처지에선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아무나 노력해 도달할 수 있으면 그것이 왜 군자의 도, 성자의 삶이겠나. 그러니 지레 겁먹거나 낙담하진 말 일이다. 군자나 성자가 못 되어도, 외롭다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목수 김씨처럼 애먼 처자들 앞에서 바지춤 풀어헤치는 짓만은 피할 일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초라한 변절, 김지하는 없다


이글은 대자보 2013-01-14일자 기사 '초라한 변절, 김지하는 없다'를 퍼왔습니다.
[정문순 칼럼] 수구 이데올로그로 등극한 김지하를 작별하다

김지하의 이력으로 볼 때 그가 박근혜를 지지했다고 하여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죽음의 굿판’ 발언을 포함하여 1990년대 이후 사이비 신흥 종교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사상이라는 것을 봐도 그가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다. 실은 그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변절했다. 단지 한때의 저항 시인 이력이 그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을 만큼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가 문재인을 지지한다면 그게 오히려 욕된 일이었다. 조갑제가 야당 후보를 지지할 경우의 참상을 생각하면 된다. 

김지하는 박정희가 죽었을 때 그에게 당한 것을 모두 용서했다고 했다. 몸을 숨긴 아들을 내놓으라며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기고문을 가하여 ‘반편이’로 만든 짓도 용서했다고 했다. 대단한 자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지하가 자신을 수 년 동안 감옥에 가두어 가시 면류관을 씌워주고 아버지까지 고문한 야수적인 독재자를 용서했노라고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다닐 이유는 없다. 용서했으니 어쩌란 말인가. 극악한 탄압을 받았던 자신도 용서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박정희를 그만 놓아주자는 말인가. 참혹한 탄압을 받은 자신도 독재자를 용서했는데, 별 피해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왜 미워죽으려고 난리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용서나 화해는 사회적 차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김지하보다 덜 고생하지도 않았던 고 김근태 전 의원은 고문기술자를 용서했노라고 떠들지 않았다. 그는 국회의원이 된 자신에게 잘못했다고 비는 옥중의 이근안이 가진 진정성을 의심했다. 설령 이근안이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고 확신했어도 김근태라면 누구를 용서했다느니 하는 가당찮은 말은 하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김지하가 독재자를 용서했다고 요란하게 말할 때의 강조점은 자신이 나쁜 독재자를 용서했다는 액면 그대로의 주장에 있지 않다. 그것은 독재자를 지지했다는 뜻으로, 박정희 독재에 대해 투항하여 자신의 내면에 오롯이 독재를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새길 수밖에 없다. 

저항 시인 김지하는 독재자를 용서했을 때 수명이 끝난 것이다.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을 모독하는 글을 써갈길 때까지 저항 시인의 잔명을 보존할 이유도 없었다. 독재자에 대한 증오를 깨끗이 비워냈다고 하는 자가 사회적 타살을 함부로 모욕하는 것은 자신의 심리 구조상 별스러울 것이 아니며 모순되지도 않는다. 그가 진작에 변절했음을 안다면 저항 시인이 죽음을 모독했다며 세상이 흥분할 일도 아니었다. 그의 변절은 이미 오래 전 독재자의 죽음과 함께 완료된 것이었다. 

김지하는 혼자 힘으로는 부족했는지 아내까지 끌어와서 박근혜 지지를 합리화하고자 한다. 평소에는 무시하다가 불리할 때 여자를 써먹는 것은 마초주의의 습성이다. 그는 아내가, 박근혜가 신산한 세월을 살았다고 동정하더라고 했다.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느라 친정어머니 박경리와 함께 감옥 밖에서 영어나 다름없는 세월을 감당해야 했던 아내였다. 자신의 고통이 아닌 가해자 가족의 고통을 살필 마음의 여유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차원 높은 아량이지만, 김지하와 그의 아내가 독재자와 가족을 용서하든 말든 동정이나 연민은 철저히 개인적인 자유에 머무를 뿐이다. 한 인간의 삶이 기막히다는 이유로 그를 일국의 대통령 감으로 추어올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독재자의 딸을 지지하면서 김지하는 어느새 부끄러움도 잊었다. 김지하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보상금을 타고 싶다고 누차 강조하는 모습은 누추하고 초라하다. 돈을 드러내놓고 밝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는 왜 자신의 이력에 당당하지 못하고 돈을 받는 데만 당당한가. 그 돈을 받는다고 자신의 과거가 온전히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 경력을 가진 인사들 중에는 보상금 수령조차 구차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가 간절히 바라는 보상금이 나올 수 있게 한 데는 그가 빨갱이로 부를지도 모를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과거사 규명 작업과 민주화 유공자 명예회복 제도에 오로지 빚진 것이다. 박근혜는 거기에 딴죽을 걸었을망정 한 줌의 공헌도 한 바 없다. 박정희를 용서했다는 마음 자세라면 그에게 당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이 깃들기는 어렵다. 김지하가 보상금의 크기에 과거 치유에 대한 능력이 있다고 믿을 정도면 자신의 빛나는 한때의 이력마저 스스로 모욕하는 것이다. 김지하는 피해의식에 몸부림치는 초라한 노인으로밖에 남아있지 않다. 

사상가로서 김지하가 내놓은 율려 운동이니, 까마득한 상고사 추켜세우기니 하는 것도 극우 민족주의의 변종에 불과하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어 급조한 ‘DNA 모성주의’는 또 뭐란 말인가. 그런데도 그의 과거 이력을 들어 차마 극우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그를 한국의 사상가로 받들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분신 정국을 모독하고 저주했어도 생명 사상의 발로라고 아부했다. 출판계나 문단은 사상범 출신 시인의 명성에 기대어 김지하가 쓴 책을 팔아먹을 궁리만 하였다. 형편없이 수준 낮은 시를 내놓아도 무조건 걸작이었다. 평론가니 교수니 하는 자들도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강사로 모시기 바빴다. 어렵사리 강연 초청을 수락할 경우, 대중 앞에서 반말을 섞어 말하는 그에게 모시게 돼 영광이라고 엎드렸다. 1991년 분신 정국 이후 그와 틀어졌던 진보 진영 문학가 집단이 세월이 지났다고 그와 화해한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대접을 받아봤자 남의 죽음을 모독한 자는 정작 한 줌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결국 더 큰 사고를 쳤고 변호해 줄래야 해줄 수 없는 막장으로 자신을 몰고 갔다. 

그의 48% ‘빨갱이’ 발언은 그동안 그에 대한 의심이나 의혹이 뒤엉킨 모든 것을 명쾌하게 씻어주었다. 김지하는 40년 넘게 자신을 옭아맸던 빨갱이 족쇄를 남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속이 후련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한국의 지식계에서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할지는 이로써 분명해졌다. 히틀러에 가까운 사고방식의 소유자를 한국의 사상가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언어도에 불과하다. 수구 이데올로그 이문열의 확고한 자리를 위협하게 된 그는 더 이상 김지하가 아니다. 세상은 김지하를 당당히 버려도 좋을 때가 되었다. 정도는 덜하지만 ‘겨울공화국’의 양성우도 오래 전에 이탈하여 MB의 문화계 인맥으로 넘어갔고, 또 누가 남았지? 

대선 때 문재인 지지를 통해 자신의 일관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한때 MB의 대북 정책을 지지했던 황석영의 행적도 살얼음을 디딘 듯 조심스럽다. 사실 황석영이 자신의 표절 행각을 책임지지 않았을 때부터 그에게서도 기대를 접게 했다. 2000년대 이후 작품 이력을 보더라도 그가 신나게 썼던 여성 수난사의 소설들은 수구 퇴행의 가부장제적 여성관이 철저히 배인 것이었다. 시인 고은의 경우도, 가만히 있어도 대가로 대접받을 수 있는 거인이 ‘일개’ 노벨상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비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주옥과도 같은 이력을 스스로 무참히 난도질하는 지식인을 보는 것은 슬프다. 그가 정상일 때 남겼던 언어마저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괴로움이 남는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대상의 핵심을 그대로 육박해 가는 그 명쾌했고 날이 서렸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그저 사람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인간은 고정 불변의 존재가 아니며 상황이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자위하고 싶을 뿐이다. 한 사람의 시인이 자존심을 지키고 품위 있는 원로로 늙어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 사회는 무서운 곳인가. 어쨌든 김지하는 죽었다. 그의 시가 한 사람의 영욕을 두고두고 증명할 것임을 생각하면 죽은 시인이 측은하기만 하다. 그의 단순명료한 시들은, 군사정권의 야만적인 폭력성이 뒤덮던 세상과의 처절한 응전이었기에 더욱 안타깝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

2013년 1월 13일 일요일

"서글픈 자기분열" 장정일, 김지하 시인에 직격탄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3-01-12일자 기사 '"서글픈 자기분열" 장정일, 김지하 시인에 직격탄'을 퍼왔습니다.
"사소한 거짓말 모여 신화… 돈 없어 자식 대학 못보냈단 말도 허풍"

장정일 소설가가 김지하 시인의 책을 인용해 직격탄을 날리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장정일 소설가는 12일자 한겨레에 기고한 "글 밖의 김지하, 서글픈 자기분열"이라는 글에서 김지하 시인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김지하 소설가의 세계 기행기인 (김지하의 예감), (옹치격) 등을 인용해 최근 김지하 시인의 행보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장 소설가는 "지겹다. 지난 4일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행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돈이 없어서 두 아들을 대학에도 보내지 못했다고 푸념했다"고 운을 띄웠다.
그러면서 장 소설가는 "장남은 모 예술전문대학교를 일찌감치 졸업했으며, 2003년에 출간된 그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학고재)에는 영국 런던의 명문 미술 학교에 재학중인 차남에 대한 자랑이 번히 나와 있다"고 썼다. 한마디로 김지하 시인이 자신의 망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장 소설가는 "글쟁이들은 돈이 없으면 출판사를 방문해 목돈이나 급전을 마련한다"면서 "김지하 같이 ‘특에이(A)급’ 필자는 ‘글빚’을 지기로만 하면, 순식간에 자식들의 학비를 마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시인이 박경리 여사의 사위라는 점에서 "아끼는 손주들이 돈이 없어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것을 장모였던 박경리 여사가 수수방관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어 장 소설가는 "아무 글이나 뚤뚤 뭉쳐 (조선일보)에 갖다 던지기만 해도 등록금 정도는 너끈히 나온다. 그런데 왜 이런 거짓말을 밥 먹듯 할까?"라고 반문했다.
그는 또한 "김지하가 고문후유증으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경제생활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면서 사실과 다르다고 얘기했다.
그는 "(흰 그늘의 길)에 따르면, 그는 큰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던데다가, 글로 폭로가 가능한 작가였던 때문이다. 경제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탓"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행기인 (김지하의 예감) 중 "나는 7년 동안 독방에 있었다"는 대목에 대해서도 "허풍을 떨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고 강도높게 비난했다.
그는 "내리 7년 동안 독방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저 말도 사실이 아니다. 그는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4개월, 1970년 ‘오적’ 사건으로 100일, 1975년 민청사건으로 1년간의 영어 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에 재수감되어 5년 9개월을 보냈다. 그가 있었던 독방이 면회나 운동이 허용되지 않는 ‘먹방’이라면 모를까, 1인용 독방은 거물에게만 주어지는 대접"이라고 지적했다.

▲ 한겨레 21면

(김지하의 예감) 중 김 시인이 미국 강연을 계기로 하여 하버드대학교에서 (진달래)(Azalea)라는 한국문학 전문 잡지를 창간하게 되었다는 구절에 대해서도 "사정이 궁금해서 그 잡지를 만든 한국인 편집자 이영준 교수에게 문의해 보니,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의 망상이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저런 사소한 거짓말을 방치하면 그게 모여서 신화가 된다"고 거듭 비판했다.
여성 대통령이 등극하면 일시에 모권(母權)이 회복되고 후천개벽 세상이 된다는 김 시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영웅사관의 복창"이라며 "주민들의 풀뿌리 조직이 중앙 권력(청와대·국회·법원)을 포위하는 것이 후천개벽이요, 생명과 모심의 모권 정치다. 여성 대통령으로 후천개벽이 된다는 그의 주장은 서글픈 자기분열"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자신부터 “쥐새끼 같은 년”이니 뭐니 해 가면서 법률로 정해진 권리를 행사한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를 도적 취급하는 억지와 박근혜를 찍지 않은 48%를 가리켜 공산화를 좇는 세력으로 매도하는 폭력을 중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정일 소설가의 강도높은 직격탄에 많은 누리꾼들은 공감을 표하면서 장정일 소설가의 글을 리트윗하고 있다.
한 누리꾼은 "장정일의 김지하 비판. 그의 거짓말들을 콕콕 잡아낸다"고 했고, 또다른 누리꾼은 "김지하의 '망상적 자기중심주의와 서글픈 자기부정'에 대해 소설가 장정일씨가 일갈을 했다"고 평했다.

이재진 기자 | jinpress@mediatoday.co.kr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이택광의 왜?]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린 김지하


이글은 경향신문 2013-01-10일자 기사 '[이택광의 왜?]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린 김지하'를 퍼왔습니다.

문재인 후보와 이정희 후보에 대한 시인 김지하의 발언이 화제다. 거의 ‘막말’ 수준이라는 평가다. 의 ‘막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보수언론이 김지하의 표현을 여과 없이 내보낸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나에게 김지하의 ‘막말’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민청학련 무죄 판결에 대한 인터뷰에서 나왔던 “돈이나 많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경우에 따라서 이 말은 최근 김지하의 행보를 설명해주는 근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김지하가 ‘돈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을 옹호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표현수위는 높았지만, 그의 인터뷰에 등장한 여러 문제의식들은 비슷한 연령대의 ‘어른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이런 소리들은 시인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긴 했지만, 결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일 뿐이라는 것이 적절한 판단이다.

시인도 그냥 시인이 아니고, 민주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김지하가 그 나이 또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통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만감이 교차하게 만든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돈이나 많이 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신산했던 과거의 삶을 화폐라는 교환가치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전제가 이 한마디에 들어 있다. 시가 교환되지 않는 것에 대한 송가이며, 그 자체가 교환체계를 벗어남으로써 존립할 수 있다는 시학이 이 지점에서 무너진다. 그는 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린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단순하게 자본가를 나쁘다고 말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절대화하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는 모순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지 밝히고자 했다. 당시에 자본가를 ‘놀고먹는 집단’으로 묘사하면서 사회악으로 규정했던 사상가들은 많이 있었다. 요즘 시장자유주의자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애덤 스미스 같은 이들에게 자본가들은 일하지 않고 부당한 특권을 누리는 대표적인 ‘도둑의 무리’였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의 문제는 화폐의 작동에 있었다. 상품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팔지 못하면 이윤을 남길 수 없다. 이렇게 사고파는 행위가 교환 관계를 형성한다. 보통 노동자라고 하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력을 파는 존재이다. 이 경우에 노동력이야말로 상품이다. 최근 들어 유행하고 있는 ‘스펙’이라는 말은 노동력의 가치를 높여서 팔아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용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팔 수 있는 노동력의 가치에 따라 능력이 판명나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시인 김지하는 ‘아들들’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공부를 시켜야 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는 ‘아들들’에게 적절한 ‘스펙’을 만들어주지 못한 ‘나쁜 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일상생활에 스며든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인간 자본’의 확충을 위해 부모의 역할을 강조한다. 훌륭한 설비를 갖추는 것 못지않게 인재의 창조성을 발양해야 생산력이 높아진다는 ‘경제학적 근거들’이 제시되면서, 자기 자식들의 능력치에 따라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로 나뉘게 된다. 이런 논리가 장삼이사들의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김지하의 ‘평범화’는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과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일갈할 때만 해도 그는 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당시에 그는 ‘젊은 벗들’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그것과 한참 거리가 멀다. 이런 김지하의 모습에 비추어 지난 대선 당시 50대 이상 유권자들의 심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참여정부를 지지했다가 돌아선 이들 또한 비슷한 논리를 마음에 품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역사의 굽이에서 도드라졌던 시인마저 ‘평범한 아버지’로 만들어버린 것은 자기계발을 삶의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위력이다.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정치구도는 이제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됐다. 생활세계는 보수주의로 장악되어 버렸다. 물론 이 상황이 과거에 연연하는 보수에게도 유리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붕괴해 버린 진보의 유령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냉전이데올로기의 무덤을 파헤치면서 ‘종북논쟁’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새로운 이념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때 유토피아의 표상이었던 시인이 더 이상 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상황이 정확하게 이를 말해준다.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산소가 떨어지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는 토끼 말이다. 저항시인으로서 의미를 가졌던 김지하의 상징성이 끝났다는 것은 진보와 보수를 지탱해왔던 구조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야흐로 새로운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2013년 1월 5일 토요일

김지하, 39년 만에 무죄…검찰, 긴급조치 이중 잣대?


이글은 프레시안 2013-01-04일자 기사 '김지하, 39년 만에 무죄…검찰, 긴급조치 이중 잣대?'를 퍼왔습니다.
검찰, 긴급조치 재심 관련 오락가락 행보

2010년 12월 대법원이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 판단'을 내린 이후, 유신 시절인 1974년 긴급조치 제4호 위반 등(세칭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던 시인 김지하 씨가 39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1부(이원범 부장)는 4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김 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김 씨가 1970년에 발표한 담시 '오적'과 관련된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취지로 선고를 유예했다(징역 1월 선고 유예).

김 씨는 지난 2010년 11월 서울중앙지법에 관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11개월 후인 지난해 10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선고 직전 "법과 원칙에 따라 현명하게 판단해 달라"며 별도의 구형을 하지 않았다. 검찰이 재심 결정 과정 및 재심 절차 진행에 순순히 응한 것이다.

과거사 재심 사건에 사사건건 항소 또는 항고를 해 피해자 배상을 지연시켜왔던 검찰이 태도를 갑자기 바꾼 것일까?

  
▲ 김지하 시인 ⓒ연합뉴스

김지하, 39년 만에 '긴급조치 위반' 무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직전 사과를 한 '유신 피해자' 김지하 씨를 옭아맨 것은 유신 시절을 상징하는 대통령 긴급조치다. 긴급조치는 유신 헌법에 규정된 53조의 대통령긴급조치권에 따라 1호에서 9호까지 선포됐다. 이 중 긴급조치 1호, 2호, 4호, 7호, 9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위헌적 요소를 담고 있다. 나머지 3호, 5호, 6호, 8호는 앞서 선포됐던 긴급조치를 해제하는 내용이거나 민생 조치를 담고 있다.

특히 1호, 4호, 9호는 많은 시국 사범을 양산했다. 긴급조치 1호는 지난 1974년 1월 선포됐는데, 유신 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비방만 해도, 또 유신헌법 개정을 제안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구속돼 처벌을 받도록 돼 있다. 심지어 이 조치를 비방하기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구속됐다.

김 씨는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이어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4월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박 대통령은 이 조치 1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제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동 또는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 그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 물건, 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김 씨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같은 해, 제2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8명은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았고, 선고 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처형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후보 시절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한 것 중 '첫 번째' 판결이었다.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했던 인사들은 지난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지었다. 당시 검찰도 항고를 하지 않았다.

또 긴급조치 4호(민청학련 사건)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박형규 목사에 대해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검 공판2부 임은정 검사는 '무죄'를 구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임 검사가 당시 낸 논고문 마지막 문단이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 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는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 교체를 넘어 국헌 문란의 목적으로 폭동을 선동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검찰 조직이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를테면 임 검사는 최근 박정희 정부 시절 간첩 사건 재심 도중 구형 과정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를 해달라고 구형 의견을 내라"고 주문한 검찰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무죄를 구형했다가 징계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연합뉴스

검찰, 긴급조치 관련 이중 잣대?

언뜻 보면 검찰 내부에서 과거사 사건을 다루는 것과 관련해 모종의 변화가 생긴 것 같지만 실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번 '김지하 재심 판결'이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깔끔하게 무죄 판결을 받은 김지하 시인은 일찌감치 박근혜 당선인 지지 선언을 한 인물이다.

과거 검찰은 '박정희 독재의 첨병'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용공 사건 등을 기소할 때 '소신 검사'가 간혹 기소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하면 기소 검사를 바꿔서라도 '그림'을 만들어냈던 게 검찰 조직이었다. "검찰은 한 몸이며, 과거의 검찰도 지금의 검찰이다"라는 식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검사동일체 원칙이나 검사무결점주의 등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지난해 6월 긴급조치 4호 위반 사건 재심이 무죄로 결론이 나자, 검찰은 항소를 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박 모 검사는 항소이유서를 통해 "유신헌법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제정되었고, 유신체제 철폐를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긴급조치 위반과 내란예비음모죄로 중형을 선고한 비상군법회의의 판결은 옳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긴급조치의 종합판'으로 불리며 1975년 5월 선포돼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까지 4년 이상 수천 명의 '범법자'를 만들어낸 긴급조치 9호와 관련된 법원의 재심 결정 4건에 대해 지난해 12월 27일 검찰은 줄줄이 항고를 했다. 재심 결정을 번복해달라는 취지다. 박형규 목사와 김지하 시인 사건에서 검찰이 보인 태도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검찰의 항고로 인해 재심 결정이 늦어지면 대부분 고령인 피해자가 국가 배상을 받아낼 길이 더 멀어지게 된다. 이는 결국 '긴급조치는 위헌'이라는 법원의 판단에 검찰이 불복하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긴급조치의 근거가 된 유신헌법 제53조와 긴급조치에 대해 헌법재판소에서 명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회 법사위 소속 민주통합당 박지원 의원은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 국정감사에서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에게 "지난 2010년 2월 유신헌법 제53조와 긴급조치 1호, 2호 등에 대해 민변에서 헌법소원을 청구한 사실이 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2년 8개월이 넘도록 결정이 안 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대법원은 2010년 12월 전원합의체 판결로 '긴급조치 1호는 발동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였다'며 위헌 결정을 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아직도 결정하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었다.

바통은 '보수 편향' 논란을 빚은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게 일단 넘어갔다.


 /박세열 기자

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지하여, 그 휘황한 ‘구라’여


이글은 시사IN 2012-12-28일자 기사 '지하여, 그 휘황한 ‘구라’여'를 퍼왔습니다.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김지하를 이해하는 데는 (흰 그늘의 길)이 최상이다. 그의 여성 대통령 대망론은 변절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파탄이다. 그의 독설은 ‘좀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빚어낸 말장난이었는

뛰어난 문학 작품이 자신도 모르는 충동을 드러내는 반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해명의 욕망에 겨누어진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상당히 정제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흰 그늘의 길)(학고재, 2003)은 김지하를 이해하는 최상의 텍스트다. 

그의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가르쳤다. “너는 앞으로 글을 쓸 아이다. 이 말을 잊지 마라. 사람이 글을 쓰려거든 똑 요렇게 써야 헌다. 한 놈이 백두산에서 방귀를 냅다 뀌면 또 한 놈이 한라산에서 ‘어이 쿠려’ 코를 틀어막고, 영광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펄쩍 뛰어 강릉 경포대 앞바다에 쾅 떨어진다. 요렇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놀라서 눈을 크게 치떴던 아이는 “이 말씀을 잊지 않고 내 문학의 중요한 규범으로 깊이 간직”했다가, 자신의 이름을 최초로 떨치게 만든 장편 담시 ‘오적’의 첫 줄을 이렇게 내갈겼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독자들은 이 문단을 통째 기억해 두시라.   

 
ⓒ이지영 그림

1974년 민주청년학생연합(민청학련)의 배후 주동자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곧 무기형으로 감형된 다음, 10개월 만에 석방됐다. 이듬해인 1975년, 감옥에 있을 때 알게 된 인혁당 조작 사건을 폭로한 그는 다시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다. 독방에서 폐소공포증을 얻은 시인은 감옥의 쇠창살과 시멘트 벽의 먼지구덩이를 토양 삼아 자라나는 풀씨를 보고 일종의 개안을 했으니, ‘생명’의 존귀함과 그것을 ‘모셔야’ 한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온갖 서구 합리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그가 풀씨를 통해 영성과 동양 사상에 입문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1991년 5월, (조선일보) 기고문의 배경

1979년 가을 박정희가 죽고 1980년 3월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시국 사범 대부분이 석방되었으나 김지하는 제외됐다. 그가 버거웠던 신군부는 언제라도 그를 창피 줄 수 있는 각서를 받아놓고자 했다. 고민 끝에 김지하는 장자(莊子)풍의 각서를 중앙정보부에 제출하고 그해 12월에 석방된다. “내가 지금 조물주를 벗 삼다가 싫어져 또 허무의 기운을 타고 육극(六極) 밖에 내달아 우주를 들며 나며 태허(太虛)의 광야에서 노닐고 있는데 네가 지금 나에게 와서 옹색스럽게 천하 다스리는 정치 따위 문제로 나를 괴롭힌단 말이냐?” 

옥고에서 풀려난 김지하는 동지와 후배들로부터 투쟁의 선봉에 서줄 것을 강요받았으나, 그의 관심은 정치나 경제 결정론적 변혁 운동보다 한 차원 높다는 생명운동과 영성운동으로 옮아가 있었다. 이때부터 ‘구도자’를 자처하는 그와 운동권 사이에 반목이 싹텄다. 김지하의 전향 기점을 ‘분신 정국’이라 불리는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기고문에서 찾는 사람이 많은데, 여기에는 두 가지 숙고 사항이 있다. 첫째는 생명을 모셔야 한다는 그의 시각에서 ‘자살 행진’을 방관할 수 없었다는 점. 둘째는 (흰 그늘의 길)에서는 귀띔만 한 채, 각종 보수 매체와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가 꺼내놓은 ‘김지하 번제(燔祭:제물로 바침)설’. 

<흰 그늘의 길>김지하 지음학고재 펴냄

김지하와 그의 가족들은 유신 시절, 극좌 인사들이 어떤 식으로든 김지하로 하여금 더 공격적인 글을 쓰게 하여 사형을 받도록 하거나, 그를 암살해 정권을 타도하는 지렛대(희생양)로 이용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문제의 기고문은 1991년의 분신 정국을 김지하 자신의 경험 내지 망상(妄想) 구조 아래서 파악하려고 했던 글로, 시인은 변죽만 울릴 게 아니라 번제설의 배후를 아는 대로 밝혀야 한다.

동학·동양사상·선불교에 매진한 시인은 심신의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자기 분열과 불면의 고통 속에서 ‘헛것’을 보기도 했다. 1987년부터 정신과를 찾게 된 그는 그것을 ‘영적 체험’으로 설명하고자 하며, 실제로 저명한 정신과 의사로부터 ‘종교적 환상’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애정 결핍과 그것을 상쇄해준 엄청난 명성의 퇴색 과정을 보면 그가 앓은 병이 갖은 상실과 연관된 우울증이며, 그것의 합병증이 한때 알코올중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것을 회고록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우울증이란 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좀스러우니까.  

지난 11월26일 시인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를 지지했다. 이후에 쏟아낸 여러 차례의 언사를 종합해보면, ‘후천개벽에는 여자가 왕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우주의 정세’란다. 뛰어난 명문으로 기록될 1991년 5월5일치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정치란 ‘환상적 전망’이 아니라 “도덕적 확신에 기초한 엄밀한 이성과 수학의 세계”라고 일갈했던 그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논리이지만, 이제는 독자들도 이게 웬 ‘구라’인지 알리라.      

김지하의 여성 대통령 대망론은 변절이 아니라 그보다 더 뼈아픈, 이론과 실천의 파탄이다. 생명을 받들어 모시는 여성성에 대한 희구는 세 권으로 이루어진 이 회고록에도 그들먹하지만, 일찍이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동광출판사, 1984)에서부터 천명되었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이 제 생각과도 같습니다. 즉 여성적인 덕성이 앞으로의 세계에 있어서의 평화, 관용, 화해에 중요한 몫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0년 가까이 그 어떤 여성 정치인도 ‘서포트’한 적이 없었던 시인이 아버지의 신원 말고는 정치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독재자의 딸을,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지지한다? 그는 회고록 2권 어디에 자신은 “원리주의자, 근본주의자, 도그마 신봉자”와는 잘 어울릴 수 없었기에 극좌는 물론이고 “극우적 반공주의자들과도 어울리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현재의 그는 도그마 신봉자일 뿐 아니라, 요즘은 극우 반공주의자들과도 잘 지낸다.

아이엠에프도 박정희 때 시작됐다더니…

회고록 1권 어디에는 2001년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일인 시위를 하는 시인의 사진과 함께 “그린벨트로 산림을 보호한 것 이외에는 박정희가 한 일은 하나도 없다” “아이엠에프는 박정희 때 시작된 환란이다”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런 독설도 모두 외할아버지가 조급히 가르친 허장성세와 ‘좀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시인의 강박이 빚어낸 휘황한 말장난이었던가? 본디 4·19를 마뜩해하지 않았던 김지하에게는 그것을 부정하는 향후 행로만 남았고, 우리에게는 이문열이 그를 모델로 쓴 소설을 읽어야 하는 구차한 즐거움만 남았다. 

장정일 (소설가)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개 똥구멍' 타령 김지하, '변절의 굿판' 걷어 치워라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12-05일자 기사 ''개 똥구멍' 타령 김지하, '변절의 굿판' 걷어 치워라'를 퍼왔습니다.
[게릴라칼럼] 리영희·백낙청 '깡통'에 비유... 박근혜 지지 서글퍼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12월 4일 <조선일보>에 실린 김지하 시인의 특별기고 '한류-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 ⓒ 조선일보

칠순 넘은 시인의 독설이 거침없다. '늙고 외로워지면 보수화된다'는 통념을 몸소 실천하며 일깨워 주기로 작심한 듯하다. 자기 몸 하나도, 생각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서슬 퍼런 1970년대.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가 운영체제의 기반이던 박정희 유신 독재시절에 저항 시로 맞섰던 그가 유치한 언행을 일삼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다. 

김지하 시인이 4일 (조선일보)에 쓴 '한류-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란 제목의 칼럼을 보면 한때나마 그의 시 '오적'을 읊조리며 저항정신을 흠모했던 한 사람으로써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김지하가 (조선일보) 통해 쏟아낸 궤변 

김지하 시인은 칼럼을 통해 "못된 쑥부쟁이가 한류-르네상스를 가로막고 있다"면서 못된 쑥부쟁이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실명 비판했다. 열가지 이유를 들어 백 교수를 '사기꾼', '깡통 빨갱이' 등으로 비유하면서 인신공격성 독설을 퍼부었다. 

특히 고 리영희 선생을 깡통 저널리스트라고 표현한 대목은 압권이다.   

"그(백낙청 교수)의 사상적 스승이라는 '리영희'는 과연 사상가인가? 깡통 저널리스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리영희를 앞세워 좌파 신문에서 얄팍한 담론으로 사기행각을 일삼았다." 

1991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랐을 때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직과 회원자격 정지 결정을 당한 김지하 시인이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보수신문을 통해 후안무치의 궤변을 쏟아냈다. 그동안 그가 이곳저곳을 돌며 열변을 토했던 '사상과 정치의 대변혁 필요성'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모습이다. 대선을 앞두고 왜 그는 무절제한 독설로 세간의 주목을 끌려는 것일까.   

그는 실천적 비평과 민족문학 운동을 일관되게 펼쳐온 백 교수를 향해 뜬금없이 "북한 깡통들의 '신파조'를 제일로 떠받들고 있다"는 둥, "전혀 무식하다"는 둥, 심지어 그의 평론 행위 대해 "그것은 공연한 '시비'에 불과하다"고 멸시하기까지 했다.

그는 고인이 된 박경리 소설가의 작품평까지 언급하면서 백 교수의 문학평을 "너절하고 더러운 방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했다. 참으로 민망하고 듣기 거북한 궤변이다.  더욱이 이 같은 상식밖의 그의 행보가 최근 대선을 앞두고 자주 목격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활동한 그가 지난달 26일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혀 충격을 주었다. 범시민사회단체연합이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한 그는 "이제 여자가 세상일 하는 시대가 왔고 나는 여성들의 현실통어 능력을 인정한다"며 "여자에게 현실적인 일을 맡기고 남자는 이를 도와야 하는 때가 왔다"고 작심한 듯 말했다.

▲ 지난 11월 26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김지하 선생 초청 시국강연회'가 열리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박근혜 후보 지지 발언을 했다. ⓒ 권우성

그가 이날 지지하며 추켜세운 박근혜 후보는 한때 그를 감옥에 투옥시킨 독자재의 딸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새누리당이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다음날 브리핑에서 "박 후보가 (김지하 시인의) 진솔한 말씀에 감동을 느꼈다"며 "진심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반긴 대목 또한 가관이다.

유신독재 저항시인의 '독재자의 딸' 지지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김지하'라는 사람이 '박정희의 딸'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험악한 시대를 만들어 그의 육신을 영어에 가두며 심신을 고문했던 세력의 품으로 돌아간 까닭을 알 수 없다. 

엄혹한 독재시절, 그의 시를 몰래 읽고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 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한때 그의 생명사상과 후천개벽 사상이 민주화운동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자괴감마저 느껴진다. "부끄러울 줄 알아야 큰일을 할 수 있다"던 그의 말이 더 없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늘 깨어 있던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을 포함해 진보적 지식인 백낙청을 '깡통'으로 표현하고, 야권 단일화를 빗대 '개수작'이라고 표현한 부분에는 노망기가 가득 묻어난다. 그리고도 그는 민청학련 사건과 오적 필화 사건으로 7년간 수감생활을 한 지난 세월의 명예회복을 위해 38년 만에 법정에 섰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원범)는 지난 3일 대통령긴급조치제1호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김씨에 대한 재심 결심공판을 진행했다. 

이날 법정에 출석한 김 시인은 "세월이 흐르는 바 역사의 변경 과정에 따라 판결해야 하는데도 항구적인 판결로 고정시켰다"며 "세월이 갈수록 타당한 법적 판결이라고 느껴지지 않으니 다시 판단해 달라"고 주장했다. 그의 변호인은 "당시 김씨는 개개의 정부를 타도하려 했을 뿐 기본 정치체계를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며 "국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을 뿐 반국가 단체를 조직한 바도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1970년 (사상계)에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시 '오적'을 게재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100일간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구속돼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이후 국제적인 구명운동으로 10개월 만에 풀려난 그는 유신독재의 진상을 알리는 글을 쓰고 재수감 돼 6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그토록 모질고 힘들게 했던 유신독재자의 딸을 이 나라 대통령감으로 지지하고 나서는가 하면 보수신문 (조선일보)에 기고글을 통해 진보적 지식인을 노골적으로 비난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변절의 굿판, 걷어 치워라 

유신시대 지하의 영웅이었던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그가, 저항적 문인이었던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는 뭘까. 변절일까? 오판일까? 대선을 앞두고 온갖 추악한 변절이 판을 치고 있지만 '저항 시인 김지하' 만큼은 변절이 아닌 오판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조선일보)에 쓴 칼럼에서 김 시인은 "이번 선거의 개 똥구멍 같은 온갖 개수작들이 역설적으로, 과거가 끝났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려는 과거는 어느 누구의 과거를 얘기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기억하기 싫은 오욕의 과거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선거가 아무리 '개 똥구멍' 같다고 할지라도 그건 유권자들이 표로 심판할 일이다. 제발 변절의 굿판이라면 걷어 치워라.   

박주현(parkjh)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김지하의 변신 혹은 변절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2-04일자 기사 '김지하의 변신 혹은 변절'을 퍼왔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세대의 영웅이고 나의 영웅이었다. 그의 감동적이고 해학적인 시와 글이 있었기에 20대의 우리는 지하 골방에 앉아서 마음껏 박정희 체제를 비웃을 수 있었고, 민주화 투쟁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그의 생명사상과 후천개벽 사상이 당시로서는 좀 뜨악하기는 했으나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 혜안이 있었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을 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때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보편적 담론을 펼쳤지만, 그것을 91년이라는 신공안정국의 국면에, 그것도 (조선일보) 지면에 실어서 보수에 큰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의 변신 혹은 전향은 시작된 것 같다. “인간은 후를 보아야 한다”고 하니 아직 인생 후반부가 남은 나도 큰소리는 못 치겠지만, 그의 변신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지식인은 자신을 알아보는 주군이나 군주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옛말이 있듯이, 그는 자신을 버린 옛 운동진영을 비판해왔고, 자신을 찾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 보수세력의 품에 안겼다. 보수세력이 돈과 권력과 위세와 여유, 모든 것을 쥐고 있는 한국 땅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똑똑한 지식인의 변신은 87년 이후 지금의 뉴라이트에 이르기까지 계속 있어왔고, 그의 변신도 그 흐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페이스북에 그의 행동을 ‘전향’이라고 했더니 어떤 페친(페이스북 친구)은 “지식인이라면 적어도 사상적 ‘전향’을 해야 하는데… 변절이라는 생각만 듭니다”라고 댓글을 달았고, 다른 친구는 “썩은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머리를 조아리는 법… 공자는 이를 ‘소인배’라 했죠”라고 일갈했다.그렇다. 늙고 외로워지면 사람은 보수화된다. 특히 어려웠던 시절의 동료들이 자신을 따돌린 채 자기들끼리만 한자리씩 해먹으면, 명성도 잃고 지위도 갖지 못한 지식인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변절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이 힘들다고, 자신이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모든 사람이, 모든 노인들이 과거의 적에게 안기지는 않는다. “지초와 난초는 매우 깊은 수풀에서 자라지만,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의 향을 풍긴다. 군자가 도를 닦고 덕을 세우는데 곤궁하다고 해서 절개를 꺾어서는 안 된다”(芝蘭生於深林 不以無人而不芳 君子修道入德 不以困窮而改節)는 공자의 말씀이 기억난다. 남이 알아주지 않고 경제적으로 곤궁하다고 변절하는 것은 글 읽는 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의 기본 교육과 인격도야가 중요하다는 경고로 들린다.70~80년대는 참으로 험악한 시대였고, 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소수의 잘나가는 운동권 출신 외에 대다수 과거 운동세력은 여전히 힘겹게 살아간다. 김지하를 고문했던 세력은 과거의 운동권 명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여유와 아량을 과시하지만, 여전히 날을 세워야 하는 운동세력은 민주화 이후 지난 20여년 동안 자기편의 약간의 차이를 참지 못하고 거친 공격을 해댔고, 결국 상처를 안은 수많은 동료를 적의 품으로 쫓아냈다.가버린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비난만큼이나, 그가 죽도록 고생하고 출옥했을 때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 운동세력의 좁은 품이 한탄스럽다. 그리고 늙어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 한 사람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의 척박한 정치현실을 한탄한다. 민주화운동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이렇게 취약했던가 되돌아보게 된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2년 9월 30일 일요일

"김지하, 박근혜 캠프설에 진노 '거부 의사 분명히 밝혔는데'"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90-29일자 기사 '"김지하, 박근혜 캠프설에 진노 '거부 의사 분명히 밝혔는데'"'를 퍼왔습니다.
언론 확인없이 영입설만 흘려… 박근혜 국민대통합 연일 삐걱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대선 캠프를 확장하기 위해 김지하 시인을 국민대통합위원장으로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이 28~29일 각 언론을 통해 보도됐지만, 정작 김지하 시인은 박근혜 후보 측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으로 확인됐다.

장하준 캐임브리지대 교수와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위한연구원장 영입설이 언론에 먼저 보도되었다가 두 사람 모두 “갈 생각 없다”는 입장을 밝힌지 채 한 달이 안돼 또 다시 박근혜 캠프에서 당사자 의사와는 무관하게 언론에 영입명단이 노출되고, 언론은 확인 없이 이를 받아쓰는 행태가 또 나타난 것이다.

특히 김지하 시인은 자신이 박근혜 캠프 영입명단에 올랐음을 언론보도를 통해 접하고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시인과 가까운 한 후배는 29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김지하 선생을 아는 (박근혜 캠프 쪽)한 분이, 김지하 선생을 찾아왔다고 한다”며 “그때 김 선생은 그를 안 만날 이유는 없지만 박근혜 캠프 얘기라면 만나기 싫다고 분명히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정치적 의도라면 만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을 했는데, 이것이 보도되면서 김지하 선생이 크게 진노했다고 한다”며 “김 선생은 민감한 일, 정치에 얽매이는 말을 하기 싫어하고, 본인의 이름 자체가 나오는 것을 싫어한다. 지금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박근혜 캠프에서 왜 김지하 선생을 끌어들이는지 모르겠다”며 “역사인식이 무지한 사람이 전태일 재단을 찾고 인혁당 유가족을 언급하더니 이제 시인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왜 그러는지 언론이 취재해야지, (확인없이 캠프에 합류한다는)보도가 나와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 김지하 시인 ©연합뉴스

한편 주요 일간지들은 28일 박근혜 캠프가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 김지하 시인을 각각 선대위원장과 국민통합위원장으로 영입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이중 동아일보에 따르면 송호근 교수는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고, 김지하 시인도 거부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박 후보의 ‘국민대통합’ 프로젝트도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지하 시인의 경우 유신시대 ‘오적’ 등 저항시를 발표해 박정희 시대 대표적 저항시인으로 꼽혀와 영입여부에 촉각이 곤두섰다. 만약 박근혜 후보가 김지하 시인 영입에 성공했다면 역사관과 인혁당 발언 사과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박 후보 캠프에서 본인 동의 없이 이름이 새 나감으로서 박 후보의 계획은 역효과만 날 것으로 보인다. 장하준, 정태인, 송호근, 김지하 등 외부인사 영입에 줄줄이 실패한 박근혜 후보가 추석 연휴 동안 ‘안철수 옆 이헌재’와 ‘문재인 옆 윤여준’과 같은 논란의 파격인사를 선보일 것인지 주목된다.

정상근 기자 | dal@mediatoday.co.kr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전향 권하는 사회


이글은 레디앙 2011-12-16일자 기사 '전향 권하는 사회'를 퍼왔습니다.
박정희, 김영삼, 김지하, 김문수, 황석영, 진중권…그들은 왜?

제가 잘 아는 어떤 현명한 이가 한번은 "자만보다 자학이 훨씬 낫다. 자학에는 병폐도 있지만, 적어도 자학하는 자에게 미래가 있는 반면, 자만하는 이에게는 현재만 있지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반박하기 어려운 명언 같은데, 북조선에 대해서 남한 주민의 절대 다수는 확실히 '미래가 없는 자만'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남한 주민의 북조선에 대한 자만
공개적으로야 '꼴통'의 딱지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북조선에 대한 논평을 삼가하곤 하지만, 사석에서는 대다수가 북조선을 "배울 게 없는 나라", "실패작"으로 보는 모양입니다. 약 5년 전인가, 제가 그 당시에 관계를 맺었던 한 진보적인 잡지의 발행인을 인사동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세상만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행을 많이 하고 견문이 넓은 제 상대방은 저에게 그가 말했습니다.

"북한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는 우리 민족의 하나의 수치다. 우리와 같은 한민족인데,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한 우상을 받들고 그 획일주의에 하등의 저항도 못하는 것은 정말 최악의 민족적 수치다. 아니, 한국학 하는 입장에서, 도대체 한민족의 어떤 특성 때문에 이러한 괴물 같은 사회가 한반도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좀 분석해달라." 

진보를 지향하는 분이신지라 당연히 북조선의 강제적 '민주화'(?)나 대립의 악화 등등을 절대 바라지 않으시고 햇볕 정책을 적극 지지하셨는데, 북조선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이라고는 이 정도였습니다. 저는 남한에서 이런 분들을 무수히 많이 봤는데, 이러한 대중화된 대북 자만심에 대한 제 생각을 성경책에서 나오는 말, 즉 "남의 눈에 티끌을 보기 전에 자기 눈에 대들보를 보라"는 말로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꽤나 다원적이었던 1940~50년대의 북조선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가 그 뒤로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삼아 대대적으로 획일화된 것은 역사적 비극이었다면 비극입니다. 한데 획일화 차원에서는 남한이 북조선보다 더 하면 더 하지 절대 덜하지 않습니다. 단, 우리가 이 부분에 익숙해져 신경 안쓸 뿐입니다. 

북조선에서의 (외피적인) 획일성은, 북조선보다 수천 배의 경제력과 수백 배 더 많은 핵탄두를 가진 미-일-한 이라는 세계 주요 제국주의적/아류제국주의적 야수들의 블록과의 투쟁을 배경으로 한 정권의 강제에 의해서 유지되는 측면은 있습니다.
가진 자의 여유?
자국의 노동자와 중국, 월남, 필리핀 등 수많은 나라 민초들의 피땀을 빨아 지금과 같은 규모가 있는 괴물이 된 남한의 경우에는, 1990년대 초반부터 북조선에 대한 '우월성'에 안주한 통치배들은 더이상 피치자들에게 그 이데올로기를 꼭 강제하지 않아도 될 여유를 즐깁니다.
학생과 같은 미천한(?) 신분으로 감히(?)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자본주의 연구회'를 만들거나, 한진중공업과 같은 이 사회의 큰 오야붕들에게 성공적으로 대들면 물론 감옥행은 어느 정도 보장돼 있지만, 이 체제는 더이상 노동운동가나 사회주의자, 반군사주의자/평화주의자 등을 "완전하게 박멸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예컨대 반군사주의 투사, 즉 병역거부자 같은 경우에는 전과자로 만들어서 평생 이등시민이라는 신분으로 묶어 차별대우하면 하지, 1970년대처럼 강제 입대를 시켜놓고 거기에서 집총거부할 경우에는 때려 죽이지는 않거든요. 덩치가 훨씬 더 큰 인도나 호주 만큼의 총국민생산액을 자랑하는 세계 14위 경제대국인데, 몇 명의 보잘것없는(?) 반체제 투사들을 때려죽이지 않고 "그냥" 평생 괴롭힐 만큼의 아량(?)을 베풀 만합니다. 

한데, 이렇게도 좋아진 세상에 과연 5천만 명 인구의 대한민국에서는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은 그 역사상 몇 명 정도 될까요? 넉넉 잡아 예비거부자까지 포함해도 40~50명 정도 될까 말까 합니다.
병영에 끌려가면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는 절대 복종 체계 속에서 인격이 망가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한국 군대란 국토 지킴이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유사시에 미-일-한 블록의 지배자들이 북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면서 대량으로 소모시켜야 할 총알받이에 불과하다는 점도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알지만, 반군사주의적 의지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이 '자유 대한'(?)에서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전향을 모르면 한국사회 이해할 수 없어
아니면,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 등을 보십시오. 실제 거기에서 활약하는 활동가의 수는, 1990년대 초반에 비해서 줄었으면 줄었지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덜 탄압적으로 되지만, 오히려 '골수' 체제 반대자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거죠.
그리고 상층 활동가들을 보면, 20년 내지 25년 전에 운동판에서 뛰었던 사람들의 상당수를 그 자리에서 더이상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국회의사당에 보수정당 의원으로도 가 있고, 도지사 사무실, 청와대 등에 가 있고, 각종 대학의 교수로도 재직돼 있고 보수언론에서 문호 대접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위 '전향'을 한 것이죠. 전향이라는 정치문화적 코드를 빼고서 한국 사회를 아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향, 즉 일정한 거래를 전제로 하는 획일화된, 자발성이 강한 주류에의 '귀환'은, 극도로 보수적 사회인 한국에서는 하나의 '문화'라면 문화입니다. 

그 수많은 당쟁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약을 받아마시면 받아마시지 '전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근대화는 전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조선 땅에 이식시켰습니다. 조선 토착 사회 지도층의 협력 없이 효율적 통치를 할 수 없었던 일제 지배자들은, 온갖 당근들을 제시하면서 보수적인 양반귀족(민병석, 민영휘와 같은 민씨 척족 출신의 갑부들부터 시작해서)부터 신흥 민족주의자나 온건 사회주의자까지 열심히 자기 편에 끌어들이려 노력했습니다.
보수적 양반들은 물론이거니와 민족주의자나 온건 사회주의 활동가까지도 주로 유산층 출신 아니면 유식층, 도일/도미 유학생층 출신들이었기에, '가진 자' 모두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켰던 일제로서 그들을 포섭하는 게 그리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민족지도자 33인의 그 이후
비참하게도 일제 말기에 이르러 1919년의 그 유명한 '민족지도자 33인' 중에서는 영양실조로 죽어도 배신을 하지 않은 한용운만 제외하고서 다들 전향하거나 적어도 민족진영에서 이탈했습니다. 인정식, 백남운 등 엘리트 온건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끝내 전향하지 않은 박헌영이나 이현상, 이관술, 김상룡, 이주하와 같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을, 나중에 남한이나 북조선 권력자들은 물론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자기 배신과 획일적 주류에의 합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구조에, 지조를 지킨 공산주의자들이 도대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향 거부자들을 거의 모조리 죽이거나 주변화시킨 사회는, 그 다음에 전향자들을 아주 전면에 배치시켜놓았습니다. 남로당 동료들을 배신해 그 명단을 형리들에게 넘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부터 3당 합당으로 야당 정치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배신한 김영삼이나, 반노동 입법으로 노동변호사라는 자신의 경력을 배신한 노무현, 1965년 한일수교 반대 데모했다가 전향한 아키히로(明博)까지, 대부분의 남한 최고 권력자들은 전향자 출신들입니다.
이재오/김문수/손학규부터 신지호까지 1970~80년대 사회주의 혁명가나 노동운동가들의 기나긴 전향사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알지만, 가장 놀랍고 안타까운 전향은 지식인들이나 문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의 저항의 상징이었다가 전두환 정권의 어용 지식인이 된 천관우 같은 경우들은 하나의 효시이었지만, 황석영이나 김지하의 전향은 그들의 문학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쳐 저처럼 한국문학을 외국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진중권 전향 과정 심층적 고찰 필요
황석영이나 김지하보다 강도는 훨씬 더 약하지만, 실제로 2000년대에 접어든 박노해의 변신도 일종의 '준(準)전향'으로 볼 여지가 큽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경우지만, 전 진보신당 당원인 진중권씨의 점차적 전향을 우리가 바로 지금, 그의 각종 사회참여적 발언들을 통해 여실히 잘 지켜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향이라는 과정의 연구자 분들께, 트위터와 블로그 글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전향의 과정을 심층적으로 고찰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도 많은 우수한 대한민국의 두뇌들은 사회주의 등등의 '위험 사상'을 철저하게 버리고 우리 위대한 경제대국의 순량한 국민들의 즐거운 대오에 이렇게도 잘 합류하는가요? 사형을 피해 대신 남로당 동료들의 목숨이라는 대가를 치른 다카키의 케이스는 오히려 인간적으로 이해라도 됩니다. 잘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과거 '전진'그룹 등 좌파 운동가들을 맹비난하고, 귀족화된 예술인 정명훈을 옹호하는 진중권을, 그 누구도 죽이려 하지 않지 않습니까? 1990년대에 이루어진 김지하의 전향과 2000년대에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황석영의 전향도 그 어떤 강제도 개입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에서는 주류에 속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춥고 배고픈 측면도 있지만, 일단 같은 학력자본을 소유하는 선후배들의 동정적 시선부터 참기가 힘들죠. 그런데 과거 저항이라는 경력을 성공적으로 팔아서 주류에 합류하기만 하면, 세상은 당장 바뀝니다.
문인 같으면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천하가 열리는 거죠. 국가의 여러 기관에서 외국어 번역 알선부터 노벨상 은근한 로비까지 다 도맡아주고, 외국 투어도 보내주고, 국내에서는 가장 우수한 언론들이 높은 가격으로 글을 사주고...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의 성공한 엘리트의 대열에 들어가는 입신출세의 극적인 경우죠.
피와 잉크
그 입신출세를 위해서 딱 한 가지 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철저하게 죽여, 획일화된 대한민국의 '상식/통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민주화를 자랑하는 '자유 대한'에서 절대 다수의 유명지식인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그 공적인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상의 수치가 아닌가요? 

소련 시절의 저항 시인 알렉산드르 갈리치의 유명한 노래 "악마와의 대화"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어 체제에 영혼을 팔려는 자는 그 계약의 종이를 보면서 "이게 피로 쓰여진 것이냐"고 묻습니다. 악마의 답은 "잉크일 뿐"입니다. 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피가 거의 보이지 않네요. 잉크밖에 안보입니다. 

2011년 12월 16일 (금) 08:37:33                                                                         

                    박노자 / 오슬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