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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6일 일요일

회사를 증오한다 가진 자의 횡포에 졌다 5년 더… 어떻게…


이글은 한겨레21 2013-01-07일자 제943호 기사 '회사를 증오한다 가진 자의 횡포에 졌다 5년 더… 어떻게…'를 퍼왔습니다.
[표지이야기] 한진중공업 지회 조직차장 최강서씨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 노동자 이운남씨외대 노동조합 지부장 이호일씨…노동자로서 길고 지루한 싸움 겪다, 강자의 편인 시간 앞에 결국 무릎 꿇다

 
» 2012년 12월23일 부산 영도구 대교동 영도구민 장례식장에 마련된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씨의 빈소를 찾은 한 조문객이 벽을 짚고 오열하고 있다. 최씨는 12월21일 노조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겨레 박종식

2005년 5월, 부산 영도조선소 안에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 사무실이 마련됐다. 1987년 노조가 설립되고 12년 만이었다. 2003년 85호 크레인에서 129일을 버티던 김주익 당시 지회장이 절망 끝에 목숨을 끊는 비극을 딛고서야 현실화된 일이었다. 김 전 지회장이 요구한 것은 회사가 노조에 청구한 손해배상과 재산 가압류, 구조조정안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2012년 12월21일 아침, 노조 사무실에서 지회 조직차장 최강서(34)씨가 목을 매 숨졌다. 회사는 12월26일까지 노조 사무실을 다시 회사 밖으로 옮기라고 통보했다.

김주익 전 지회장이 목숨을 끊었던 그해, 울산에 살던 32살의 노동자 이운남씨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발기인에 참여했다. ‘비정규직도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소박한 일념에서였다. 어렵게 만들어진 노조에서 그가 맡은 직책은 조직부장이었다. 9년이 흘러 41살의 택시 기사가 된 이씨는 최강서씨가 숨진 다음날인 12월22일, 울산 방어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등졌다.

12월25일 오후, 부산역에서 영도로 향하는 길목은 나들이 차량으로 북적거렸다. 영도구민 장례식장 4층에 마련된 최강서씨 빈소에는 아내 이선화(36)씨 등 넋이 반쯤 나간 유가족과 조합원 10여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침묵이 흐르던 빈소에 또 다른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호일(47) 전국대학노조 한국외국어대 지부장이 용인캠퍼스 노조 사무실에서 목을 맸다는 소식이었다. 이튿날엔 이 지부장의 빈소를 지키던 이기연(49) 수석부지부장이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그도 결국 지부장 뒤를 따랐다.

2012년 겨울은 유난히 춥고 잔인했던 계절로 기억될 것 같다. 생때같은 30~40대 젊은 노동자들은 왜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했을까. 최강서·이운남·이호일씨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며 그들을 극단의 선택으로 몰아붙인 고통과 불안, 절망의 실체와 대면하고자 했다. _편집자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닌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 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지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최강서씨 유서 중)

따뜻한 두유를 주머니에 넣어주던 사람

최강서씨는 영도에서 나고 자란 부산 토박이다. 23살 되던 해인 2001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했다. 번듯한 곳에서 일한다고 그는 늘 자랑스러워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2002년, 회사는 나이가 많은 노동자 650명에게서 희망퇴직원을 받아냈다. 말이 좋아 희망이지 사실상 강압이었다. 퇴직자 대부분은 하청업체 노동자가 돼 회사로 돌아왔다. 신분이 바뀌니 노동조건은 열악해지고 일은 더 어려워졌다. 이듬해 노조 지회장 김주익, 조합원 곽재규가 연이어 목숨을 끊었다. 당시 파업 대열에는 최씨도 있었다.
노동자 2명의 죽음 이후 2008년 말 금융위기 전까지 회사는 호황이었다. 임금이 오르고 조합원 복지도 개선됐다. 그사이 최씨는 가정을 꾸려 두 아들(5살·6살)의 아빠가 됐다. 회사는 2006년 7천여억원을 단계적으로 투자해 필리핀 수비크에 231만4천㎡(70만 평) 규모의 조선소 건설을 시작했고, 2007년 1단계 공정을 완료해 수주를 받았다. 회사는 고용불안을 우려하는 노조와 ‘국외 공장이 운영되는한 정리해고 등 단체협약상 정년을 보장하지 못할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2009년 경기가 나빠지자 회사는 다시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2010년 겨울, 회사는 400명에 대한 희망퇴직 계획을 노조에 통보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최씨를 처음 본 것도 그 무렵이었다. “크레인에 오르기 전, 이른 아침 회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을 때 강서가 두유를 주머니에 넣어주고 갔다. 그게 그렇게 따뜻했다.”
2011년 1월 김진숙 지도위원은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회사는 직장폐쇄 신고를 내고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해고자 명단에 최씨 이름이 있었다. 충격이었다. 예전엔 한 번도 구조조정 명단에 올라본 적이 없는 그였다. 아무도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노조 대의원 활동이 빌미가 됐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회사가 생존하려면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는 사 쪽 주장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활달하던 최씨의 성격이 조금씩 변했다. 건드리면 언제든 폭발할 뇌관 같았다고 아내 이선화씨는 회고했다.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시민들과 정치권·노동계·시민사회의 노력으로 2011년 11월, 김진숙 지도위원이 땅으로 내려왔다. 정치권의 중재로 정리해고자 94명(1명은 정년퇴직)의 1년 내 재취업, 해고 기간 중 생계비 지급, 노사 간 민형사상 고소·고발 최소화 등의 내용을 담은 합의안에 노사가 서명했다.
그러나 회사는 노조를 상대로 ‘파업으로 인한 재산 손실을 변상하라’며 158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한진중공업은 합의 직후인 2011년 12월부터 순환휴직제를 시행했다. 작업 물량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파업이 끝났지만 조합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2년 1월 새노조가 설립됐다. 기존 노조를 탈퇴하는 조합원이 늘어났다. 입사 동기인 이아무개(38) 조합원은 최씨가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잔뜩 기대를 품고 출근을 했는데, 회사가 무기한 휴직을 시켰다.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집에 왔다.
그 실망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최강서씨의 아내

이력서의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파업이 끝난 뒤 최씨는 누나와 작은 가게를 꾸려 일하며 복직을 기다렸다. 아내 이씨는 복직하던 날 남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잔뜩 기대를 품고 출근을 했는데, 회사가 무기한 휴직을 시켰다.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집에 왔다. 그 실망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복직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지자, 그는 더 이상 분노를 지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11월 말부터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대선 개표가 있던 12월19일 밤, 그는 스마트폰 메신저로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스스로에게 되뇌는 다짐 같았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자나. 뭐든지 열심히 할게. 더 열심히 끝까지 덤벼보지 뭐.” 대선 결과에 대한 실망감을 비치기도 했다. “대선마저 날 배신해. 노동은 없다. 속이 속이 아니게 됐다. 힘든 5년 다시 시작.”
복직을 위해 찍은 이력서용 증명사진은 결국 영정사진이 됐다. 밤이 깊어지자 빈소를 지키던 조합원들은 하나둘 탁자 밑으로 들어가 눈을 붙였다. 한쪽 구석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던 김지훈(32)씨는 “그렇게 힘든 것도 모르고 형 앞에서 내 이야기만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12월26일 아침 7시, 수은주가 영하 6℃를 가리켰다. 차해도 지회장 등 상복 차림의 조합원 20여 명이 영도조선소 앞에 길게 늘어섰다. “동지들, 최강서의 죽음을 돌아보십시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공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노동자들 등 뒤로 조합원들의 목소리가 맵찬 바닷바람에 흩어졌다. 동료의 죽음을 내놓고 함께 슬퍼하기엔 일자리가 급했기 때문일까, 차마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어서였을까. 출근하는 노동자들은 또 다른 노동자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비슷한 시각, 울산 동구 전하동 현대 중공업 정문 앞에서도 필사적인 외침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4만여 명의 정규직·사내하청업체 직원들이 일터로 향하는 길목이다. 정문 건너편에서 100여명의 사내들이 ‘해고는 살인이다’ ‘비정규직 철폐’ 등의 글귀가 적힌 20여 개의 만장을 펼쳐들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노동자인 이운남씨의 영결식에 참석한 조합원들이었다. 이씨의 17년 지기인 강창원(41)씨가 단상에 올라 추모글을 읽어 내려갔다. “미안하다 운남아. 부디 편히 잘 가라. 결코 네 잘못이 아니야. 사랑한다 친구야.” 북받쳐오르는 설움을 애써 삼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남 영암 출신인 이씨는 중학교를 마치고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1990년 서울 성수동의 한 업체 노동자가 됐을 때 그는 19살이었다. 당시 학생운동권 출신 노동자였던 박성식(43) 민주노총 부대변인은 야학 교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여린 후배였다. 특히 시 쓰는 걸 좋아했다.” 1년 뒤 그는 박 부대변인과 함께 울산에 내려가 현대차 사내하청업체에 취직했다. 생계도 꾸리고 노동운동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심한 폭행당하며 끌려와 구속돼

» 2012년 12월26일 울산 동구 전하동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열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초대 조직부장 이운남씨의 영결식. 탁기형

그는 4공장 트럭 공정에서 용접 일을 했다. 다른 라인에서 일하던 박 부대변인과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 사는 이야기를 했다. “정규직이 돼 야학에서 만난 여자친구를 울산에 데려오는 게 그때 운남이의 꿈이었다.” 그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6년 뒤 현대중공업 직업훈련원에 들어간 그는 용접 일을 배워 정규직 입사 시험을 봤다. 함께 시험을 본 친구 강창원씨는 합격했지만, 그는 ‘허리뼈 탈골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을 이유로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그렇게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이씨가 마음의 병을 얻은 건 그 무렵이었다. 2003년 그는 사내하청 노조 결성에 앞장섰다가 해고를 당했다. 그와 함께 해고된 박일수(당시 50살)씨는 2004년 2월15일 회사 안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박씨가 남긴 유서에는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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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이씨는 다른 사내 하청업체 노조 조합원과 함께 선박건조장 1독 앞 크레인에 올라 사 쪽에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진압에 나선 현대중공업 경비대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 뒤 5시간 만에 끌려 내려와 구속됐다. 그날의 지옥 같은 경험은 이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병원에서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했다. 그는 크레인에 올랐던 기억 속에 갇혀 살아야 했다. 늘 노조를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노조에 남아 복직 투쟁을 벌일까도 생각해봤지만 생계가 막막했다. 택배회사를 다니다 택시회사로 일터를 옮겼다. 노동자 출자 회사였던 택시회사 생활은 만족스러웠지만 곧 시련이 찾아왔다. 노동자들이 만든 회사에서도 부당 해고가 벌어지고, 복직 소송에서 이겨 복귀한 해고자를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상황을 목격하고 일할 의욕을 상실한 것이다. 결국 사표를 냈다. 그의 자책감은 쌍용차·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며 더욱 심해졌다. “예전에 내가 열심히 싸우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다. 내 탓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2011년 한진중공업으로가는 희망버스에 오르며 마음의 빚을 덜고자 했다. 하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동료 윤종길(44)씨는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운남이는 가끔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노래를 부르다 울부짖곤 했다”고 전했다.
폭력의 상처도 갈수록 악화됐다. 이씨가 목숨을 끊기 하루 전인 12월21일, 그의 스마트폰 메신저에는 이날 현대차 사내하청 노조가 용역 직원들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올라왔다. 2004년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힘들어 죽겠어. 손 떨려서 도저히 운전을 못하겠어.” 친구 강씨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하며 “내가 이 사람들을 사지로 몰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씨의 머릿속에선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었다. 나아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절망이 현재의 시간 지평으로 암울한 과거를 거듭해 불러들인 것이다. 강씨와 통화하고 1시간이 지난 뒤 이씨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났다.
이호일 전국대학노조 한국외대 지부장은 부당 해고의 덫에 걸렸다. 1992년 모교인 외대 행정지원처에서 근무를 시작한 그는 1998년 노조에 가입했다. 2006년 한국외대 노조는 대학 쪽이 단체협약을 해지하고 교섭을 거부하자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당시 그는 노조 정책국장이었다. 파업에 대응하는 대학의 태도는 강경했다. 7개월간 이어진 파업 기간 동안 임금은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끝까지 함께 버틴 조합원 160여 명이 대부분 3천만~4천만원의 빚을 질 만큼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언론에서는 노조를 ‘철밥통 파렴치 집단’으로 몰고 갔다.

“이호일 지부장은 부당한 원거리 발령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일했다. 결과가 뻔해 보이는 소송을 끝까지 이어가는 대학의 대응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시간과 돈은 강자의 편이란 점을 과시하자는 것인지?” -김선수 변호사

대법원 판결로 복직 뒤 엉뚱한 곳 발령

» 대선 이후 연이어 세상을 등진 노동자·활동가들을 위로하는 추모제가 2012년 12월26일 서울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렸다. 추모제 참여자들은 고인들의 영정 앞에 국화꽃을 놓았다. 한겨레 이종근

대학은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이 지부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 9명을 해고했다. 노조는 해고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2007년 4월 소송을 냈고, 재판부는 그해 11월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대학은 불복했다. 2009년 2월 해고가 무효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다. 그것으로 지루한 싸움이 끝난 게 아니었다. 학교에 돌아간 그는 정규직이 한 번도 배치된 적 없던 대천수련원으로 발령나 일하기도 했다. 소송 대리인이었던 김선수 변호사는 페이스북 글을 통해 그의 죽음을 비통해했다. “이 지부장은 부당한 원거리 발령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일했다. 결과가 뻔해 보이는 소송을 끝까지 이어가는 대학의 대응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간과 돈은 강자의 편이란 점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일까.”
12월 대선은 꺼져가던 등불에 찬바람이 불어닥친 격이었다. 3명의 노동자가 고단한 삶을 극단적 방식으로 정리하는 분기점이 돼버렸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진단했다. “탈진할 대로 탈진한 현장 투쟁 노동자들은, 약자에게 혹독했던 새누리당의 재집권을 지켜보며 더 이상 버틸 기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노동자들은 떠났다. 그러나 그들을 아득한 절망으로 내몰았던 손해배상 소송과 비정규직 차별, 무분별한 해고 행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금도 누군가의 몸뚱이를 천근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꿈쩍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무거운 바윗돌이다.

부산=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울산=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뒤늦게 발견된 자살 노동자 유서엔…


이글은 프레시안 2012-12-24일자 기사 '뒤늦게 발견된 자살 노동자 유서엔…'을 퍼왔습니다.
"양심이 허물어진 삶은 의미 없어",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지난 22일 오후 5시 30분경 울산광역시 동구 자신의 아파트 19층에서 뛰어내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직노동자 이운남(42) 씨가 '동지들에게'라는 제목의 짧은 유서를 남긴 사실이 확인됐다. 이 씨는 유서를 통해 "양심이 허물어진 삶은 의미 없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회사 폭력의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아왔지만, 그래도 자신의 원칙을 잃지 않고 살아왔습니다"라고 밝혔다.

이 씨는 "이제 더 이상 좁은 방에서 갇혀서 흐느끼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동지들 가는 길에 희망만이 가득하길 바랍니다"라고 썼다.

이 유서는 사건 발생 당시 발견하지 못했으나 경찰과 이 씨의 동료들이 뒤늦게 찾아냈다.

전남 영암에서 태어난 이 씨는 26살인 1997년에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업체인 영호산업에 입사했다. 이후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 2001년부터 사내하청 노조 설립 준비에 참여하고 2003년 노조 출범 때엔 발기인을 맡아 초대 조직부장도 지냈다.

소속 하청업체는 노조설립을 이유로 이 씨를 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2월 14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 인터기업 전 근로자 박일수(50) 씨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이 일로 이 씨는 현대중공업 대형크레인에 올라가 사측에 항의하는 고공 농성을 하다 회사 용역경비들에게 끌려 내려오며 심한 폭행을 당했다. 이 때문에 8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

5시간여 만에 끝난 이 고공 농성 때문에 이 씨는 약 2달간 구속수사를 받은 뒤 법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출소 후 사내하청지회 노조간부로 활동했으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으로 노조업무를 중단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택배 일을 했다. 이후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근 10년간 이 씨를 옆에서 지켜봐 온 조성웅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 초대위원장은 과 한 통화에서 "(이 씨와) 죽기 전날 오후에 통화했었다. (이 씨가) 그날 오전에 현대 자동차 비정규직 투쟁 상황을 카카오 스토리를 통해 파악했다더라"고 밝혔다.

조 씨는 "이 씨가 용역이 투입돼서 폭력 행사가 있었던 사진을 보면서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전화로 손이 떨려서 운전을 못 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조 씨는 "최근 현대차 비정규직과 쌍용차 투쟁을 보면서 이 씨가 과거 싸움을 다시 떠올렸던 것 같다. 이와 동시에 저들은 싸우는데 같이 싸울 수는 없고 생계 전선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특히 힘들어했다"고 덧붙였다.

 
▲ 현대중공업 본사 ⓒ뉴시스

/남빛나라 기자

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사설]박 당선인은 노동자들의 절규를 듣고 있나


이글은 경향신문 2012-12-24일자 기사 '[사설]박 당선인은 노동자들의 절규를 듣고 있나'를 퍼왔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노동계의 기류가 심상찮다. 지난 21일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모씨가 사무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다음날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 노동자 이모씨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같은 날 민권연대 활동가인 또 다른 최모씨가 자취방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배경에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극심한 생활고, 외상 후 스트레스, 대선 결과에 따른 절망감 등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5년을 또… 못하겠다” “양심이 허물어진 삶은 의미 없다”는 그들의 마지막 말이 예리하게 가슴을 저민다.

이런 죽음의 행렬을 바라보며 애석함보다 더한 것은 산 사람들의 자괴감이다. 사지로 내몰린 그들의 절규에 귀를 막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지난 10월8일 23번째 쌍용자동차 사태 희생자가 발생한 데 이어 지난 4일에는 노조파괴 사업장으로 알려진 유성기업에서 유모씨가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등 노동자의 죽음이 최근까지도 이어졌지만 노동 현실의 개선은 지지부진했다. 지금도 최병승씨 등 현대자동차 노동자가 70일째, 홍종인씨 등 유성기업 노동자가 66일째, 한상균씨 등 쌍용차 노동자가 36일째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 잘 말해준다. 

노동자들의 절규에 누구보다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라고 본다. 그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힘이 박 당선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에 드실 수 있도록 국민 한 분 한 분의 생활을 챙기겠다”는 것은 대선 후 박 당선인이 국민에게 한 첫 약속이기도 하다. 진정 국민통합을 원한다면 박 당선인에 대해 가장 절망하는 계층부터 먼저 보듬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지금 노동자들은 선거 결과에 절망하면서도 박 당선인의 입만 쳐다봐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한번이라도 그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는 데서 국민통합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시급한 노동현안에 대해서는 대선 전이라도 정치권이 진정성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여러 차례 촉구한 바 있다. 새누리당도 쌍용차 국정조사의 대선 직후 실시를 약속한 바 있다. 이제 대선도 끝난 만큼 정치권은 노동현안 해결을 위한 긴급 행동에 나서야 한다. 정치권을 움직일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박 당선인에게 있다고 본다. 말 한마디가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새 정부 준비에 여념이 없겠지만 노동자들의 절망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대선 직후 잇따른 노동자 자살…이번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자


이글은 프레시안 2012-12-23일자 기사 '대선 직후 잇따른 노동자 자살…이번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자'를 퍼왔습니다.
"대선 결과와 현대차 비정규직 폭력 진압에 낙담"…아파트 투신자살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자 이모(42) 씨가 22일 자신의 아파트 19층에서 투신해 숨졌다. 이 씨는 최근 연이은 노동자 투쟁 패배와 대선 결과에 고통을 호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관계자에 따르면, 이 씨는 이날 오후 6시경 울산 동구 방어동 자신의 아파트 19층에서 뛰어내렸다. 오전에는 오세일 전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과 정규직 활동가의 안내로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은 상태였다. 주말이 지난 후 입원하기로 대화를 나누고 4시 30분께 노조 관계자들과 헤어진 뒤 그는 한 시간가량 뒤 결국 투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에 따르면, 이 씨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에 깊이 몰입했고 최근 며칠 간 정신불안을 호소했다. 오 전 지회장은 고인이 "대선 결과와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폭력적으로 진압되는 것을 보고 본인이 받았던 과거 폭력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고, 그 결과가 모두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이 씨는 2003년 현대중공업에서 노조를 만든 뒤 해고됐다. 2004년 고(故) 박일수 씨가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유서를 남긴 채 분신했을 당시 고인은 비정규직 철폐 등을 주장하며 울산 동구 전하동 현대중공업 선박 건조장 1도크 앞 크레인을 점거했다가 폭력적으로 진압된 바 있다. 이후 복직에 성공하지 못하고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려온 그는 7년 가까이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대선 직후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앞서 21일 한진중공업 복직 노동자인 최모(35) 씨는 부산 영도구 봉래동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4층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 사무실에서 완강기에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 관련 기사 : 한진중공업 복직 노동자, 목매고 숨져)

최 씨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남긴 유서에서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158억 철회하라. 박근혜가 대통령되고 5년을 또…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지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김윤나영 기자

2012년 1월 6일 금요일

"15톤 강판에 깔려 장 파열, 그래도 구급차 못 부른 이유"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06일자 기사 '"15톤 강판에 깔려 장 파열, 그래도 구급차 못 부른 이유"'를 퍼왔습니다.
[현장] 조선소 산업재해, 왜 하청 노동자에게만 집중되나

울산시 남구에 있는 울산병원 가는 길. 지난달 30일 세진중공업 대형 선박 블록에서 발생한 화재로 사망한 현욱일(37) 씨 시신이 안치돼 있다. 사망한 지 7일이 지났지만, 그의 시신은 아직 차가운 영안실에 있다.

길을 알려준다며 함께 병원으로 가던 세진중공업 하청 노동자 김인식(가명·50) 씨는 "현장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는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사고 속에서 오늘도 다치지 않고 일한 것에 감사하며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 씨의 죽음은 자신의 미래 모습일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래도 일이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산단다. 김 씨는 새해 들어 딱 하루 일했다. 일하고 싶어도 '오야지'가 일감을 주지 않아 발만 동동거리고 있다. 20년을 넘게 조선소 하청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위험하다는 거야 늘 알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다.대학을 다니는 자식이 두 명이나 된다.

"우리가 바라는 건 딱 하나입니다"

7일 오후 3시께 현욱일 씨 유가족을 만났다. 함께 왔던 김인식 씨는 같이 만나지 못했다.회사에서 보낸 사람이 영안실을 찾는 하청 노동자를 체크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에 찍히면 생계가 곤란해진다.

현욱일 씨의 이름이 적힌 영안실 입구 전광판에는 발인 날짜가 없었다. 현 씨와 함께 사고를 당한 3명의 하청 노동자 유가족은 회사와 합의를 마쳤다. 오롯이 현욱일 씨만 남았다. 왜 현욱일 씨만 회사와 합의를 하지 못했을까.



▲ 현욱일 씨 시신이 안치된 울산병원 장례식장. ⓒ프레시안(허환주)

현욱일 씨 여동생 인영(가명) 씨는 "우리가 바라는 건 오빠 영정에 세진중공업 관계자가 와서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영 씨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유가족에게도 세진중공업은 아무런 사과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며 "버티기 힘들어 다른 유가족은 사과를 받지 않고 그냥 장례식을 치렀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현 씨와 계약관계에 있는 회사는 명성테크. 명성테크는 세진중공업에서 만든 조선 블록을 용접하는 일을 한다. 하청업체다. 세진중공업은 이번에 발생한 사고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이유다.

장례식장 복도 좌우를 빼곡히 채운 화환 중에는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 송영길 인천시장 등 정치인 화환을 비롯해 사망한 노동자 회사인 명성테크와 아주테크 화환도 보였다. 하지만 세진중공업 화환은 없었다.

김 씨는 "하청에 있는 소장과 직원들이 어제도 찾아와 조문을 했다"며 "이들은 우리에게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사죄했지만 사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나 싶다"고 말했다. 김 씨는 "우리 오빠가 아니라 이들이 현장에 있었다면 똑같이 죽었을 것"이라며 "구조적문제가 있음을 세진중공업도 알고 있지만 계약상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만 한다"고눈물을 글썽였다.

김 씨는 "세진중공업에서 사죄를 하지 않는 이상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며 "최소한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췄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닦았다. 현 씨의 시신이 아직 땅에 묻히지 못한 이유다. 현 씨의 초등학교 4학년과 7살 아이는 아직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외할머니 집에서 아버지가 선물을 사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원청의 공정기일 압박이 사고를 일으켰다"

경찰과 소방당국 발표를 보면 지난달 30일 오전 8시50분께 울산시 울주군 온산읍 원산리 세진중공업에서 대형 선박 블록 제조 작업 도중에 폭발사고가 발생해 김영도(52), 유동훈(32), 현욱일(37), 유지훈(27)씨 등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 4명이 숨졌다.

이날 폭발사고로 일어난 화재는 30여분 만에 진화됐다. 밀폐된 공간에서 여러 명이 작업했고 전날 용접작업이 끝난 뒤 세진중공업 안전팀이 점검해야 했지만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화재 원인을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원청의 관리부재로 전날 남아 있던 가스가 이날 그라인딩 작업(블록 면을 기계로 가는 작업)과 동시에 불꽃과 결합, 폭발을 일으켰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조선소에서는 이런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사고는 블록 안에서 그라인더 작업과 용접 작업을 진행하다 발생했다. 하지만 정작 사고현장에는 페인트통, 붓과 호스, 유압펌프 등이 흩어져 있었다. 주목할 점은 붓은 도장(블록에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을 마친 뒤, 미처 칠하지 못한 구석부분을 페인트로 마무리하는 데 쓰인다는 점이다. 사실상 최종 마무리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 용접을 하고 있는 조선소 하청 노동자. ⓒ조선하청노동자연대

하지만 정작 사고는 그라인드, 즉 도장 공정 전에 진행하는 블록 깎는 작업을 하다 발생했다. 이는 여러 작업을 블록 안에서 동시에 진행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도장작업이 선행됐다면 현장에 시너 등 인화성물질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폭발에 이은 화재로 연결돼, 사망확률이 더 높아졌을 것으로 조선업 관계자들은 분석한다.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원청에서 정한 공정 기일을 지키려 혼재작업, 즉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시킨 걸로 추측된다"며 "무리한 혼재작업이 결국 이런 사고를 빚어냈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해진 공정 기일을 맞추기 위해 애쓴 흔적이 곳곳에 있다. 피해자들은 사고 전날 밤 11시까지 작업을 한 뒤, 사고 당일 아침 8시에 또다시 일을 해야 했다. 유족에 따르면 현욱일 씨는 몸살 기운 때문에 쉬고 싶다고 했지만 현장관리자는 무조건 나와야 한다고 반강제적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다. 고인은 죽기 일주일 전부터 쉼 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더구나 사고 발생 이후 울산고용노동지청은 사고가 난 블록의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세진중공업은 "1월 3일까지 배가 나가야 하니 작업 중지를 풀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만큼 공정 기일 압박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혼재작업이 진행됐다면 원청 책임은 더욱 커진다. 혼재작업 관리를 하청업체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동일한 장소에서 원,하청이 작업을 할 때 산업재해예방의 의무는 원청 사업주에게 있다. 또 현실적으로도 세진중공업 안에 30여 개 하청업체가 공정별 또는 혼재된 상태에서 작업할 때, 기본적인 안전조치와 업무지시는 원청 사업주가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선실 내 배기시설 설치나 통풍 환기조치 등도 원청에서 관리할 수밖에 없다. 하청업체가 할 수 있는 건 잔류가스 점검, 산소측정, 작업 후 뒷정리 등이다. 그나마도 작업 공정 기일이 급하면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세진중공업이 안전보건시스템 인증(KOSHA 18001)을 받는 모범 기업이라도 지속적으로 안전관리를 하지 않으면 대형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 지난 30일 화재 사고가 발생한 블록. ⓒ연합뉴스

일하다 다쳐도 산재 인정은 꿈도 못 꿔

조선하청노동자연대에 따르면 조선소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90% 이상은 하청 노동자에게 일어난다. 중공업 현장에서 일하는 3만 명의 노동자 중 정규직의 숫자가 1만 명이지만 사고는 비정규직, 즉 하청 노동자에게만 일어나는 셈.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관계자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장에서도 쉬운 일, 편한 일을 한다"며 "어렵고, 위험한 도장 작업이나 용접 작업 등은 모두 하청 노동자의 몫"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정규직이야 고용이 보장됐고, 노조도 있으니 회사에서도 이들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며 "하지만 비정규직은 언제든 해고할 수 있을 뿐더러, 여차하면 하청업체와 계약해지를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라고 말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 신청은 꿈도 못 꾼다. 산재를 신청하면 원청에서 곧바로 해당 하청업체와 계약을 해지하기 때문이다. 사내하청 관계자는 "얼마 전에는 공장 내에서 일하던 하청 노동자 한 명이 15톤짜리 강판에 깔려 골반이 부러지고 장이 파열됐다"며 "하지만 업체 관리자는 구급차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사고가 난 걸 알게 되면 하청 업체와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친 노동자는 트럭 짐칸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혹시 문제가 될까 우려한 업체 관리자는 다친 노동자를 담요로 덮는 주도면밀한 모습까지 보였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업체 관리자는 병원에 와서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하라"고 협박까지 했다. 상황이 이러니 산재 인정은 엄두도 못 낸다. 사내하청 관계자는 "이런 일은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부산지방고용노동청은 13일 세진중공업 특별안전감독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세진중공업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비단 세진중공업의 문제만이 아닌 한국 조선업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지난 11월 4일에는 현대미포조선 장생포공장에서 하청노동자 1명이 추락해 사망했다. 12월 16일에는 삼호중공업 하청노동자 1명이 역시 추락해 사망했다. 알려지지 않은 죽음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선소 하청 노동자는 일하다 소리 소문없이 죽고 있다.



/허환주 기자(=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