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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0일 수요일

‘죽음으로 입증한’ 반도체 백혈병 산재


이글은 시사IN 2013-04-09일자 기사 '‘죽음으로 입증한’ 반도체 백혈병 산재'를 퍼왔습니다.
반도체 노동자 고 김진기씨가 산재를 인정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이 반도체 사업장에서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그가 남긴 자료가 결정적인 증거였다.

2013년 3월14일 오후 3시30분 대전시 둔산동 대전질병판정위원회 사무실. 이은숙씨(가명·40)는 다섯 살배기 아들 정민(가명)이를 데리고 출석했다. 이씨와 함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소속 이종란 노무사도 두툼한 자료를 챙겨 동행했다. 이씨의 남편 김진기씨는 2011년 5월28일 밤 10시47분 강남성모병원 백혈병동 중환자실에서 숨졌다. 서른여덟 살이던 아빠는 아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종란 노무사는 두툼한 자료를 위원 여섯 명에게 나눠줬다. 삼성 백혈병 사례와 법원의 판례, 해외 자료 등을 근거로, 매그나칩 반도체 청주사업장에서 일한 김씨의 백혈병 발병이 작업환경과 관련이 깊다고 호소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숱하게 산재 신청을 했지만 김씨만큼 자신이 직접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 적이 없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상황은 불리했다. 위원들이 산재 판정을 내릴 때 주요 근거로 삼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 작업환경과 백혈병 발병 상관관계가 낮게 나왔다.

삼성 반도체 문제 뒤 설비 교체

그로부터 8일 뒤인 3월22일 오후 이씨는 운전을 하던 중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남편의 산재 인정 통보를 받았다. 대전질병판정위원회가 간발의 차로 김진기씨를 산재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반도체 사업장에서 발병한 백혈병 노동자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첫 산재 인정이었다. 삼성 백혈병의 경우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인정하지 않아, 소송 끝에 행정법원 1심에서 산재 판결이 났다(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해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항소심에서도 삼성은 피고 보조 참가인 자격으로 역시 재판에 참여하고 있다). 청주노동인권센터 조광복 노무사는 “산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김씨가 눈을 감으면서도 지켜낸 ‘증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2010년 7월1일 서울 강남성모병원 로비 카페. 반올림 소속 공유정옥 산업보건전문의는 김진기씨를 만났다. 김씨가 먼저 반올림에 연락을 했다. 그해 6월22일 김씨는 백혈병 중에서도 가장 악성인 ‘만성 골수 단핵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3월31일 삼성전자 소속 박지연씨가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삼성 백혈병’ 논란이 한창일 때였다. 김씨는 혹시 자신도 작업환경과 백혈병이 관련된 건 아닌지 의심했고, 인터넷을 뒤져 반올림에 연락했다. 이날 김씨는 공유정옥씨와 처음이자 마지막 상담을 했다.

ⓒ시사IN 고제규 고 김진기씨의 아내 이은숙씨가 남편과 아이가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들고 있다.


김씨 가족 가운데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는 없다. 3남 1녀 중 막내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하사관으로 5년간 복무할 만큼 건강했다. 하사관 복무를 마치고 1997년 입사한 첫 직장이 청주에 있는 LG 반도체였다. LG 반도체가 하이닉스 반도체로 인수·합병되었고, 2005년 매그나칩 반도체로 주인이 바뀌었다. 회사 이름은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김씨의 업무는 14년 동안 똑같았다. 반도체 공정 가운데 전리방사선이 주로 발생하는 임플란트 공정의 예방 정비 업무(Preventive Mainten-ance)를 하는 PM 업무였다. 발병 당시 그와 함께 일한 PM 업무 담당자는 20명이었고 4개 조로 3교대 근무를 했다. 아침 7시, 오후 3시, 밤 11시 세 조로 나뉘어 각 조가 6일씩 근무한 뒤 이틀을 쉬는 근무형태였다. 직업군인 출신이어서인지, 김씨는 회사 생활도 ‘FM(Field Manual)’대로 했다. 한 동료는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한 친구였다. 노조 같은 데 아예 관심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2005년 10월 김씨는 동갑 이은숙씨와 결혼했다. 결혼한 지 3년 만인 2008년 3월 아들 정민이를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김씨는 ‘아들바보’ 아빠였다. 회식이 있어도 밥만 먹고 곧장 집으로 갔고, 집 앞 슈퍼마켓에 갈 때도 아내와 아들 둘만 내보내지 않았다. 위험하다며 꼭 동행했다. 예방접종을 하러 병원에 갈 때면 자기가 직접 운전을 해서 함께 갔다. 야간 근무를 하고 돌아온 날에도 아이와 놀아주었다. 아내 이씨는 “평생 줄 정을 한꺼번에 주고 떠나려고 그랬는지, 아이밖에 몰랐다”라고 회상했다. 

김씨는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이상을 느꼈다.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2008년 5월 회사 정기검진에서 갑상샘 질환(갑상샘기능저하증)이 발견되었다. 평생 갑상샘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개인 질병으로 여긴 김씨는 약을 복용하며 근무했다. 하지만 2010년 4월30일 회사 정기 건강검진 때 백혈구 수치에 이상이 발견되었다. 혈액 1㎕당 4000~1만 개가 정상 수치인데, 김씨의 백혈구 수치는 무려 6만4000개였다. 그해 5월24일 강남성모병원 혈액내과에서 정밀 골수 조직검사를 받았고, 6월22일 백혈병 확진을 받았다. 

2010년 7월1일 그렇게 확진 열흘 만에 강남성모병원에서 처음 만난 공유정옥씨에게 김씨는 “반올림이 지속적으로 활동한 덕분인지, 2008~2009년께 회사가 설비를 바꾸는 등 작업환경이 그나마 나아졌다”라고 말했다. 공유정옥씨가 산재 신청을 할 것인지 묻자, 김씨는 “회사가 산재처리 대신 치료비 전액과 휴직을 제안했다.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라고 말했다. 헤어지며 공유정옥씨는 “혹시 나중에 산재 신청을 할 때 필요할지 모르니, 설비 교체 전후가 담긴 회사 자료가 있으면 챙겨두는 게 나을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공유정옥씨는 그날 반올림에 돌아와 상담일지를 작성했다. 그 뒤 두 사람 사이 연락은 없었다. 한두 번 공유정옥씨 휴대전화 벨이 울리기는 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울리고 아무 말 없이 끊기자, 공유정옥씨가 김씨에게 전화를 했다. 김씨는 “아이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다가 번호를 눌렀나보다. 잘 지낸다”라고 답했다. 정민이가 메신저 노릇을 한 것이다. 
ⓒ시사IN 윤무영 근무 중인 반도체 노동자.


김씨의 인사치레와 달리 백혈병은 악화되었다. 치료약이 듣지 않아 골수 이식 외에 방법이 없었다. 확진 다섯 달 만에 골수단핵구성 백혈병의 특징인 유전자 변이가 진행되었다. 그때까지 김씨는 청주와 서울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했다. 회사는 약속과 달리 치료비 전액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김씨는 골수 이식을 위해 입원하기 직전인 2011년 3월까지 회사에 다녔다. 그해 3월28일 휴직하고 4월3일 강남성모병원에 골수 이식을 위해 입원했다.  

2011년 3월 휴직 일주일 전 김씨는 출근길에 아내에게 두꺼운 겨울 파카를 챙겨 달라고 했다. 퇴근한 뒤 그는 파카 속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아내에게 건넸다. 김씨는 “잊어버리지 말고 보관 잘해둬. 혹시 내가 잘못되면 이것을 꼭 반올림 소속 공유정옥 선생에게 줘”라고 말했다. 아내는 별소리 다 한다며 서류를 열어보지도 않고 서재에 끼워두었다. 

2011년 4월27일 강남성모병원 백혈병 병동 중환자실. 아내 이씨는 의료진으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일주일 전 골수 이식을 받았는데, 부작용인 이식편대숙주반응(이식된 조직이 환자를 공격하는 현상)이 심했다. 부작용을 줄이는 약도 듣지 않았다. 심장·간·위 등 내부 장기뿐 아니라 얼굴 피부마저 녹아내렸다. 5월21일 김씨는 심장이 한차례 멈췄다. 응급조치로 되살렸지만 뇌 쇼크로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정민이를 급하게 청주에서 데려왔다. 하지만 세 살 정민이는 피부마저 녹아내린 아빠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 바보’ 아빠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이를 못 알아봤다. 아이가 다녀가고 나흘 뒤 5월25일 기적처럼 딱 한번 김씨는 정신이 돌아왔다. 아내를 알아본 그는 사력을 다해 입을 달싹거렸다. 이씨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반복했다. 두 단어 같았다. 귀를 가까이 대고서야 “서류”라는 말을 알아들었다. “무슨 서류?”라고 물어도 김씨는 “서류”만 겨우 반복했다. “지난번에 공유정옥씨 주라고 말한 그 서류?”라고 이씨가 묻자, 김씨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것이 김씨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이씨는 곧장 김씨의 휴대전화에서 공유정옥씨 연락처를 찾아 연락을 했다. 공유정옥씨는 병원으로 달려와 임종을 함께했다. 사흘 뒤인 5월28일 김씨는, 1년 전 삼성 백혈병을 앓다 강남성모병원에서 숨진 박지연씨가 마지막 호흡을 내쉬었던 그 침상에서 눈을 감았다. 

김진기씨의 마지막 말 “서류…”

공유정옥씨와 이종란 노무사는 장례식 첫날 김씨가 남긴 서류를 받았다. 서류를 받아든 공유정옥씨는 깜짝 놀랐다. 2년 전 그녀가 조언한 바로 그 증거 서류였다. 작업 환경 전후 사진과 설명, 위험 등이 담긴 회사 내부 자료였다(아래 사진). 삼성 백혈병 산재 신청과 소송을 할 때마다 벽에 부딪혔던 게 증거 자료 부족이었다. 회사는 반대 자료를 많이 내놓았지만, 산재 신청인들은 본인의 경험담 외에 자료가 없었다. 삼성 백혈병을 공론화시킨 고 황유미씨도 기껏해야 일기장이 전부였다. 그에 비하면 김씨가 건넨 자료는 완벽했다. 사망진단서에도 의료진은 “혈액암이 직업적 노출과 관련이 높음을 시사한다”라고 밝혔다. 
김진기씨가 반올림에 건넨 회사 자료. 작업환경 개선 전후 비교 내용이 담겼다.


2011년 9월 아내 이씨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를 신청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유족이 추천하는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역학조사를 실시할 것을 근로복지공단에 제안해, 삼성 백혈병 관련 논문을 쓴 김현주 단국대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 3명이 자문위원 성격으로 결합했다. 그러자 회사도 자신들이 추천한 인사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성이 백혈병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든, 삼성전자건강연구소 부소장 김수근 교수 등 두 명이 회사 쪽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매그나칩 반도체 백혈병 산재 다툼이었지만, 이면에는 삼성 백혈병 문제를 다룬 양쪽 전문가들이 포진했다. 두세 차례 역학조사에서 방사선 노출이 정상치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역학조사의 결과를 뒤집는 데는 김씨의 증거자료뿐 아니라 결정적인 증언도 한몫했다. 삼성 백혈병 산재 신청이나 소송과정에서는 증언자로 나서는 동료가 한 명도 없었지만, 매그나칩에서는 김씨의 동료가 나섰다. 작업 매뉴얼과 달리 현장에서 이뤄지는 작업환경과 위험을 고스란히 증언해주었다. 이 동료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증언 때문에 회사로부터 불이익은 없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해서 증언했다”라고 말했다. 

아빠를 알아보지 못했던 여섯 살 정민이는지금도 죽음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정민이는 살가운 아빠를 잃은 탓에 한동안 실어증에 걸리고 불안감에 시달렸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네 시간씩 심리치료를 받는다. 많이 나아졌지만, 한번은 어린이집에서 역할극 놀이를 할 때 “난 아빠가 없어”라며 소리 내 울기도 했다. 그런 정민이도 ‘산재’의 뜻을 안다. 엄마 이씨가 “산재를 인정하게 해주세요”라고 밤마다 소리 내 기도를 올리자, “산재가 뭐야”라고 정민이가 물었다. 이씨는 “아빠가 산재를 인정받아야 우리 정민이가 공부도 할 수 있고, 학교도 다닐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대뜸 정민이는 “와!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네”라며 그 나름으로 이해했다. 

2013년 3월23일
 청주 목련공원. 산재 인정 통보를 받은 다음 날 이은숙씨는 정민이 손을 잡고 남편이 있는 납골당을 찾았다. “여보, 고마워. 이제 남은 소송도 잘할게.” 이씨는 남편의 사례가 삼성 백혈병 환자나 다른 반도체 사업장의 직업병에 시달리는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회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손해배상)도 할 작정이다.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정민이는 “산재 인정되면 아빠 온다고 했는데 언제 와?”라고 물었다. 이씨는 정민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빠가 멀리 일하러 가서 정민이가 스무 살 되면 돌아오신다.” 로보카 폴리를 손에 쥔 정민이는 “내가 스무 살이 되려면 며칠 밤을 더 자면 돼?”라고 다시 물었다. 납골당에 안치된 김씨는 아이와 함께 있다. 사진 속 김씨는 정민이를 안고 활짝 웃고 있다. 

고제규 기자  |  unjusa@sisain.co.kr

2012년 9월 14일 금요일

“보조출연자 산재 인정 하청노동자 권리보장 초석”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9-13일자 기사 '“보조출연자 산재 인정 하청노동자 권리보장 초석”'을 퍼왔습니다.
민주노총·진보신당 논평 “연예산업 노동자 처지 열악하기 짝이 없어”

근로복지공단이 KBS 드라마 (각시탈) 보조출연자 고 박희석씨에 대해 산재를 인정한 것과 관련해 노동계에서 하청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초석이 돼야 할 결정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박은지 진보신당 창립준비위원회 대변인은 13일 논평에서 “보조출연자가 법적 소송 없이 산재로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번 공단의 결정은 보조출연자 등 문화예술산업 내 엄연히 존재하지만 제대로 존중되지 않았던 하청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초석이 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 대변인은 “주목할 점은 사고 직후 KBS와 제작사, 기획사 등은 용역의 용역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드라마 제작환경을 핑계 삼아 직접계약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으려했다는 점”이라며 “유족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버스회사의 사망보험금으로 마무리하려 했다니 ‘보조출연자는 인간이 아니라 소품이냐’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진보신당은 이어 “고 박희석씨의 사고 후속조치는 한류 등 화려한 한국 드라마 산업의 어두운 진실인 하청노동자로서 보조출연자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라며 “방송사와 제작사 등 원청의 책임성을 강화하고 문화예술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위한 고용노동부의 철저한 관리 감독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민주노총도 이날 논평을 내어 “고 박희석씨의 유가족이 산재를 신청한 지 4개월 만에 법적 소송 없이 산재로 인정된 것은 늦었지만 다행”이라며 “보조출연노동자를 사업자로 보는 기막힌 관행을 이제는 확실히 바꾸자”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화려하게 비춰지는 모습과 달리 연예산업 종사 노동자들의 처지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며 “하청에 재하청이 이어지는 다단계 착취구조의 말단에 위치한 보조출연자와 비정규직 스텝들의 처지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고 우려했다.
민주노총은 “이 같은 처지를 호소하는 종사자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며 “연예산업종사자,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4월 18일 촬영 장소로 이동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고 박희석씨의 산재를 승인했다. 유가족이 산재를 신청한 지 4개월 만에 나온 결정으로, 보조출연자가 법적 소송 없이 산재를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현미 기자 | ssal@mediatoday.co.kr 

2012년 7월 23일 월요일

"삼성에서 하혈하다 죽어간 딸, 이건희 자식이었다면…"


이글은 프레시안 2012-07-22일자 기사 '"삼성에서 하혈하다 죽어간 딸, 이건희 자식이었다면…"'을 퍼왔습니다.
[현장] 삼성전자 56번째 사망자 故 윤슬기 씨 산재 신청

근로복지공단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뒤를 경찰들이 둘러쌌다. 영정사진을 든 유족들이 체념한 듯 철문 밖에 섰다. 삼성전자에서 일했던 고(故) 윤슬기 씨(32)의 어머니 신정옥 씨가 따져 물었다. "산재 신청하러 왔는데 경찰까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잖아요."

윤슬기 씨의 49재를 맞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유가족들은 2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윤슬기 씨의 산재를 신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고인은 삼성전자에서 일했다가 백혈병 등 각종 희귀병에 걸려 숨을 거둔 56번째 노동자였다.

 
▲ 반올림이 고(故) 윤슬기 씨의 49재인 지난 20일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산재 신청 기자회견을 열었다. 닫힌 철문 뒤로 경찰이 배치됐다. ⓒ프레시안(김윤나영)

19살에 '재생불량성빈혈' 판정…13년째 수혈 연명하다 사망 

윤슬기 씨는 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9년 6월 삼성전자 LCD 공장에 입사했다. 그러다 화학물질이 묻은 LCD 패널을 자르는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공장에서 일하던 도중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희귀병인 '재생불량성빈혈' 진단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만 18세였다.

윤 씨는 검정색 유리 재질의 LCD 패널을 자르는 일을 맡았다. 바로 앞 공정에서 화학물질을 고온에서 처리해 LCD 패널에 발라서 넘기면, 면장갑만 끼고 패널을 손으로 잘랐다. 그는 검정 패널을 고온에 처리하면 독한 냄새가 진동했고, 자를 때는 미세한 검정 유릿가루가 날렸다고 증언했다. 신정옥 씨가 뜻 없이 한 말이 의미심장했다. "슬기가 죽기 전에 사경을 헤매면서 '검정색 무서워'라고 헛소리를 했어요. 난 지금도 검정색이 뭔지 모르겠어요."

재생불량성빈혈 판정을 받은 뒤로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이뤄지는 수혈에 의존해 살았다. 골수이식을 해야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렵고 맞는 골수도 없어서 연명치료를 했다. 지난 5월부터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양쪽 대퇴부 고관절이 70% 괴사했고, 온몸에 검붉은 반점과 멍이 들었다. 하혈이 멈추지 않았고, 산소마스크를 제대로 끼울 수 없을 정도로 입에서 피를 토했다. 방광은 물론이고 폐에까지 피가 들어찼다.

공단, 삼성전자 재생불량성빈혈 노동자 최초 직업병 인정


13년의 투병생활 끝에 윤 씨는 지난달 2일 숨을 거뒀다. 외동딸의 49재를 맞은 어머니 신정옥 씨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아픈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은 안 당해보면 몰라요. 차라리 내가 아프고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러나 신 씨는 산재는 꿈도 못 꿨다고 덧붙였다.

"얘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두세 달에 한 번씩 헌혈한 애에요. 혈액 관련 질병이나 암 관련 가족력도 없고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건강했거든요. 그런데 아프고 1~2년쯤 후에 공단에다가 '산재 신청 돼요?'라고 물어봤더니, 공단이 '안 돼요'라고 했어요."

12년 간 산재를 단념했던 윤 씨 모녀가 다시 용기를 낸 계기는 고(故) 김지숙 씨의 산재 승인이었다. 1999년 4월까지 5년 4개월간 삼성전자 기흥공장과 온양공장에서 일했던 김지숙 씨는 2008년 11월 병원에서 재생불량성빈혈 진단을 받았다. 윤슬기 씨와 같은 희귀병이었다.

지난 4월 근로복지공단은 김지숙 씨가 "발암물질인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에 간접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최초로 삼성전자에서 생긴 직업병을 인정했다. 그러자 삼성전자는 공식 홈페이지에 "과거와 달리 산업재해 판정기준을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에 따라 보상 범위를 넓힌 것 같다"며 "공단의 결정을 겸허히 수용한다"고 밝혔다.

게다가 지난 2월 고용노동부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반도체 제조 사업장 정밀 작업환경평가 연구'를 실시한 결과 "반도체 사업장에서 벤젠 등 1급 발암성물질이 부산물로 발생했다"고 밝혔다. 화학물질에 고온의 열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화학작용으로 발암물질이 생길 수 있다는 정부 연구가 발표된 것이다.

"그 전에는 슬기가 대기업을 어떻게 이기냐고 했어요. 그런데 올해 4월에 재생불량성빈혈로 산재 승인이 났을 때는 슬기도 적극적으로 신청하자고 했어요. 자기랑 똑같은 병이 산재 승인됐다고. '나도 산재 신청되겠네?' 그렇게 간 게 너무 억울하잖아. 한은 풀어줘야겠다…."

▲ 고(故) 윤슬기 씨. ⓒ신정옥

"이건희 자식들이 일하는 곳이면 그런 환경으로 만들었겠나"

기자회견이 끝나고 경찰과 공단 직원들은 철문 일부를 터줬다. 산재를 접수하는 길에 복도 양쪽에 일렬로 서 있는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을 향해 유족들이 울분을 쏟아냈다.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다가 뇌종양 진단을 받은 한혜경(34) 씨의 어머니 김시녀 씨는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언제까지 불승인을 남발할 거냐"며 "병 들어도 치료 받으면 덜 죽을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를 만들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고(故) 황유미(23)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불승인은) 이건희가 사람 죽이는 거 도와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신정옥 씨는 "슬기가 죽기 전까지는 삼성전자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프고 죽는 줄 몰랐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삼성전자가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들(삼성전자)이 다 이런 환경을 만들어놨잖아. 세상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애들이 그 젊은 나이에 병 걸려서 죽어나갔잖아요. 자기 자식들이 일하는 곳이라면 그런 환경으로 만들었겠어요? 노동자를 기계 만지는 노예로 생각하는 거죠. 짐승도 그렇게 생각은 안 해요."

윤슬기 씨의 죽음에 대해 삼성그룹 관계자는 "산재에 대해서 회사가 결정할 권한이 없다"면서 "근로복지공단이 방침을 정하면 따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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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뼈가 녹는 느낌에 삼성에 문의했더니 답은…"

☞97일만의 장례식, 끝내 삼성의 조문은 없었다
☞"유족들 시위는 잘도 막아내면서, 삼성 직원 자살은 왜?"
☞이 청년, 왜 죽었을까?
☞삼성전자와 구로공단 영세업체의 공통점은?
☞내팽겨쳐진 영정 사진, "그날, 삼성 본관에선…"
☞"삼성 본사 앞 1인시위 현장, 검은 점퍼 20여 명이…"
☞"삼성 취업규칙이 영업기밀인가?"
☞故 김주현 누나 "동생을 비난하는 악플에 가슴이 아픕니다"
☞"반도체 클린룸은 생지옥…얼마나 더 죽어야 삼성 노조 생길까"
☞"방진복 벗으니 온통 붉은 반점, 문드러진 살"
☞"故 김주현씨, 4번 투신 시도…막을 수 있었다"
☞천안노동지청, 삼성 노동자 자살 사건 조사 벌이기로

☞"자식이 삼성 다닌다고, 그저 좋아만 했던 저는 죄인입니다"
☞삼성LCD 자살 노동자 유가족, 1인 시위 시작
☞"아들이 회사에서 죽었는데, 삼성은 돈 얘기만…"
☞업무 스트레스 받아온 삼성 LCD 노동자 자살

☞흔들리는 반도체 신화, 한국 경제 '알몸' 드러나나? 
 ☞"반도체 산업, 언제까지 '아오지 탄광' 방식인가?" 
 ☞"IBM부터 폭스콘·삼성까지…'죽음의 행진'을 멈춰라"

☞법원 "'삼성 백혈병' 산재 맞다…유해물질 지속 노출 탓"
☞"법원이 말하지 않은 '삼성 백혈병'의 진짜 이유는?"

☞정부 "삼성전자 등 반도체 공장서 1급 발암물질 발견" 첫 인정
☞반도체 공장 발암물질 정부 공인, '삼성 백혈병' 소송 영향은?

 /김윤나영 기자

2012년 7월 6일 금요일

“근로복지공단 구상권 청구는 용역깡패 폭력의 면죄부”


이글은 미디어스 2012-07-06일자 기사 '“근로복지공단 구상권 청구는 용역깡패 폭력의 면죄부”'를 퍼왔습니다.
근로복지공단,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3억 4천여만 원 구상금청구소송 제기

용역과 사측의 구사대에게 지급한 산재보험금 3억 4천여만 원에 대하여 쌍용차 노동자 58명에게 구상금청구소송을 제기한 근로복지공단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6일 오전 11시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이번 기자회견은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국회의원모임,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쌍용차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주최했다.

▲ 근로복지공단의 구상금청구소송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6일 오전 11시 국회 정론관에서 열렸다.ⓒ미디어스

이날 참석자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이번 소송의 핵심은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용역깡패의 폭력성에 면죄부를 발부하고 폭력의 잔인성을 가리는 구실을 하고 있다”며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며 다쳤어도 산재는커녕 치료조차 받지 못했지만, 불법 고용된 용역과 회사측 구사대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자리에서 심상정 통합진보당 의원은 “근로복지공단은 사실상 범법자인 용역과 구사대는 산재를 인정하면서 쌍용차 조합원들은 다시 범법자, 신용불량자 이중 삼중의 채무자로 만들고 있다”며 “근로복지공단의 구상금 청구는 법률적으로도 허용되기 어려우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본적 배려조차 없는 반인권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은수미 민주통합당 의원은 “구상권은 제3자에게 청구하는 것이지만 쌍용차 노동자들은 제3자가 아니라서 구상권 청구대상이 될 수 없다”며 “근로복지공단은 구상금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은수미 의원은 “근로복지공단이 조속한 시일 내에 (구상권 행사를 취소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국민과 헌법이 준 모든 권한과 능력을 다 동원해 근로복지공단에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청문회장에서 뵙지 않을 수 있도록 근로복지공단 스스로 사과하고 결정을 취소하라”고 경고했다.

윤다정 수습기자  |  lindalmemory@gmail.com

2012년 6월 2일 토요일

"각시탈 사망사고, 최종 책임은 '슈퍼갑' KBS에 있다"


이글은 미디어스 2012-06-01일자 기사 '"각시탈 사망사고, 최종 책임은 '슈퍼갑' KBS에 있다"'를 퍼왔습니다.
보조출연자 유족, KBS 앞 침묵시위…"KBS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

"KBS 각시탈, 지금 방송되고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20대 시민)
"아이의 아빠가 죽었지만 KBS는 사과 한 마디 안합니다. 제발 각시탈을 보지 말아주세요."(각시탈 보조출연자 故 박희석씨 아내 윤아무개씨)

▲ 6월 1일 정오,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에서 침묵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고 박희석씨 부인 윤아무개씨. ⓒ곽상아

뙤약볕이 내리쬐는 6월 1일 정오,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에 한 모녀가 피켓을 들고 나타났다. 4월 18일 경남 합천에서 KBS (각시탈) 보조출연자를 단체로 태운 버스가 전복되면서 숨진 보조출연자 고 박희석씨의 가족들이다. 모녀는 지난달 22일부터 KBS 앞에서 침묵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같은날 포털사이트에 넘쳐나는 (각시탈, 수목극 시청률 1위) (수목극 1위 '각시탈' 치명적 매력 '베스트 신 3') ('각시탈' 신현준, 바보와 영웅 오가는 '반전연기' 호평) 등의 기사와는 선명히 대조되는 풍경이다.
모녀가 매일 KBS 앞을 찾아오는 이유는 (각시탈)의 방영 주체인 KBS와 외주제작사 팬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보조출연업체 태양기획 등이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KBS와 외주사인 팬엔터테인먼트는 입장을 내어 "깊은 위로와 함께 사태수습에 최선을 다하겠다. 장례와 치료 및 보상 등이 원만하고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KBS) "향후 조치에 사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팬엔터테인먼트)라고 하는 등 '공식적'으로는 신속하게 대응했으나 4월 19일 "KBS, 팬엔터테인먼트, 태양기획, 동백관광 등 4개사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장례를 지원하겠다"며 장례비용으로 2천만원을 준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공식 발표 외에 유족들에게 사과의 말을 건넨적도 없다. 특히, 유족은 KBS가 지난달 18일 발표한 '보조출연자 사고에 대한 KBS의 입장'에 분노했다.
"'깊은 위로와 함께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한 것 외에 도대체 KBS가 실제로 한 게 무엇입니까? 그 입장은 '대국민 사기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용역을 거쳤다고 하지만 KBS의 이름으로 각시탈이 방영되고 있지 않나요? 당연히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고 박희석씨의 딸도 엄마를 따라 지난달 22일부터 KBS 앞 침묵시위를 해오고 있다. ⓒ곽상아

모녀가 시위에 돌입하자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시위에 돌입한 지난달 22일 KBS, 팬엔터테인먼트, 태양기획, 동백관광 등 이번 사건에 관련된 4개 회사에서 모녀를 찾았다. 윤씨는 "저희를 보고 '도대체 왜 시위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며 "지난달 29일에 찾아와서는 '돈 더 받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라고 하는데 기가 막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각시탈 첫 방송됐던 지난달 30일, 윤씨의 감정은 더욱 격해져 KBS 앞에서 시위를 진행한 뒤 고영탁 KBS 드라마 국장을 찾아갔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KBS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들어갔는데, 청경들이 제지하더군요. 고영탁 국장을 만나서 '당신들이 공식 입장을 내놓은 것 외에 한 게 뭐가 있느냐'고 따져물었더니 '우리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전에 KBS의 한 관계자도 섬에서 촬영하는 도중 아들이 죽었지만 1주일동안 섬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했어요. '국민과의 약속이라 각시탈은 방영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런데 저희는 국민이 아닌가요?"

▲ 5월 23일 열렸던 KBS <각시탈> 제작발표회 모습.

숨진 박씨는 지난 2월부터 보조출연업체 '이중기획'에 소속되어 출연료를 지급받아왔다. 그러나 박씨 출연료와 관련한 세금을 원청회사인 '태양기획'에서 납부하는 등 '이중기획'이 사실상 '태양기획'에 소속되어 운영돼 왔기 때문에 박씨의 진짜 고용주는 '태양기획'이라는 것이 유족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태양기획은 "이중기획에서 출연자를 모집했고, 박씨는 이중기획에서 출연료를 받아갔다"고 하고, 이중기획은 "사실상 태양기획이 박씨를 모집했기 때문에, 태양기획이 처리해야 한다"며 서로 책임을 미루는 탓에, 유족들은 출연료 지급 관련 서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지난달 15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제기해야 했다.  그동안 근로복지공단은 보조출연자의 산재 신청에 대해 한 번도 곧바로 받아들인 적이 없어, 이번 산재신청의 전망도 어둡다.
2008년 11월 서울행정법원은 보조출연자 A씨가 제기한 소송에서 "촬영현장에 일용직의 형태로 고용되어 제작사나 용역공급업체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노무를 제공하고 그러한 노무제공에 대한 대가로 시간급 보수를 받는 보조출연자는 근로자로 봄이 상당하다"며 보조출연자가 '개인사업자'가 아닌 '근로자'라고 판결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국 보조출연자 노동조합의 이규석 사무국장은 "2008년 법원 판결이 있었음에도 근로복지공단은 보조출연자들의 산재신청을 단 한 번도 곧바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늘 '산재를 신청한 보조출연자가 근로자라는 근거를 가져오라'고 하기 때문에, 재판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며 "물론 앞선 판결이 있기 때문에 재판에서는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지만 시간이 꽤 걸리니까 대다수가 제풀에 지쳐서 포기한다"고 전했다.
2008년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한국노총 중앙법률원의 김형동 변호사도 "법원이 보조출연자를 이미 근로자로 인정한지 오래됐는데 행정관청들은 법원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박씨의 경우, 회사 측에서 제공한 차량을 타고 단체로 촬영지에 가다가 당한 사고이기 때문에 당연히 산재로 인정돼야 한다"며 "보조출연자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인 노동자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공영방송이 '이름없는 영혼의 통쾌한 액션활극'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한 드라마를 촬영하는 도중 벌어진 '사망사고'이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방송사→외주제작사→기획사→보조출연자'의 연쇄고리 속에서 계약서 한 장 없이 낮은 임금을 감내하며 묵묵히 일해야 하는 현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언제든 또다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전국 보조출연자 노동조합의 이규석 사무국장은 "근본적으로는 불합리한 방송제작 구조 관행이 문제"라며 "제작비의 40~50%를 주연급 연기자들이 가져가고 있는데, 보조출연자들은 똑같은 시간 일하고도 일당 4만원 정도를 가져갈 뿐이다. '보조출연자들에게 지금보다 10%만 더 써라'고 해도 방송사들은 들은 척도 안 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이규석 국장은 '방송사→외주제작사→기획사→보조출연자'의 고리 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슈퍼갑' 방송사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번 사건에서 보조출연자 박씨와 KBS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은 맞지만 KBS는 현 구조에서 '슈퍼갑'으로서 관리감독하는 위치에 있지 않느냐"며 "KBS는 용역계약을 준 것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당사자가 아니라고 발뺌하지만 최종적 책임은 KBS에게 있다. 지금의 침묵은 큰 '횡포'"라는 것.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풀어가야 하는데, 사실 현 상황에서 KBS를 상대로 '보조출연자들의 근무여건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해봤자 통할지 착잡합니다. 매년 방송사들은 보조출연업체인 기획사들과 계약을 하는데 연장, 야간, 철야 수당을 (방송사 측에서) 모두 지급하도록 돼 있지만 실제로는 안 줍니다.
작년에도 저희가 기획사를 상대로 '체불임금 청구소송'을 제기했었는데 방송사와의 계약금액, 거래명세서, 법인카드로 돈 들어온 내역 등을 다 확인해보니 방송사가 안 준 게 맞더군요. 보조출연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획사를 상대로 요구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어서 이제는 방송사를 상대로 직접 싸우려고 합니다.
어차피 기획사는 방송사 앞에서 철저한 '을'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만약 KBS한테 사태수습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면, 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정말 큰 문제예요…."

곽상아 기자  |  nell@mediaus.co.kr

2012년 5월 10일 목요일

[사설]노동자 두 번 죽이는 까다로운 산재 기준


이글은 경향신문 2012-05-09일자 사설 '[사설]노동자 두 번 죽이는 까다로운 산재 기준'을 퍼왔습니다.
나라 전체를 병영처럼 운영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은 흔히 ‘산업전사’로 통했다. 정부와 기업주는 이들에게 용맹하게 싸울 것만을 독려했을 뿐 정작 이들이 ‘전사(戰死)’했을 때는 나몰라라 하기 일쑤였다.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6년간 일하던 중 악성 뇌종양에 걸려 투병하던 이윤정씨가 엊그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씨를 포함해 뇌종양, 백혈병, 유방암 등 업무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이 삼성반도체에서만 32명, 삼성의 다른 계열사까지 합치면 무려 55명에 이른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삼성 외에도 전국 곳곳의 사업장에서 병을 얻거나, 죽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운위하는 21세기 초반에도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작업 환경은 군사정권 시절에서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 사망한 이윤정씨는 서울행정법원에 산재 불승인 취소 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온갖 까다로운 조항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산재 인정 기준을 내세우며 이씨의 산재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도 지난해 9월 단 한 차례 열린 이후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고 하니 설령 나중에 법원으로부터 산재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이미 망자(亡者)가 된 이씨에게는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직업병 중에서도 암환자로 인정받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전국의 사업장에서 매년 20만명 안팎의 암환자가 발생하지만 업무관련성을 인정받은 노동자는 2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이 인정하고 있는 직업성 암은 방사선 피폭에 의한 혈액암, 벤젠에 의한 조혈기계암 등 7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린 노동자가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풍비박산나기 십상이다. 이런 불행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산재보험법이 규정하고 있는 산재 인정 기준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 치밀한 역학조사도 실시해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질병을 직업병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진폐증의 경우 수십년 동안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985년 진폐의 예방과 진폐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환자들에게 빛을 던졌다. 사업주들도 작업환경 유해물질을 사전에 제거하는 등 직업병 방지에 힘을 쏟아야 한다. 제2, 제3의 이윤정이 속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2012년 4월 15일 일요일

재생불량성 빈혈 산재인정, 의미 축소해서는 안 된다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4-14일자 기사 '재생불량성 빈혈 산재인정, 의미 축소해서는 안 된다'를 퍼왔습니다.
[기고] 문웅·노무법인 산재 대표노무사

최근 근로복지공단이 삼성반도체 근로자가 신청한 "혈소판 감소증 및 재생불량성 빈혈"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위의 질병은 반도체공정에서 유발될 수 있는 벤젠(유기용제), 포름알데이드, 전리방사선 등에 의해 발병될 수 있다고 의학적으로 인정되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법’)상 업무상 질병중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물론 산재법에서는 이에 대한 인정기준으로 일정농도 및 근무기간 등을 명시하고 있다.


한편, 산업의학계에서는 유해물질에 의한 직업병의 경우 반드시 법에서 정한 일정농도 또는 근무기간 이상을 미달하더라도 충분히 직업병에 이환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문웅·노무법인 산재 대표노무사

그러나, 유해물질 피폭 가능성이 추정되는 사업장 근로자들이 최초에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법에서 정한 엄격한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은 행정심판 또는 행정소송 등 산재 불승인 이후 이의신청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근로복지공단 스스로 최초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 것이라 그 의미가 크다.


판례는 2007년 6월에 이미 직업병과 관련하여 최초 결정기관보다 진일보한 판결을 한 바 있다.


“10여년 전 공사도중 노출된 석면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되었거나 자연적인 진행 경과 이상으로 악화되었다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판결(대법2005두517, 2007.06.01)이 그것이다.


즉, 판례는 업무상 질병에 있어 근로복지공단보다 폭넓게 인정하였으며, 그 결과, 근로자들은 소송에 가서야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사회·경제적 약자인 근로자들에게 시간과 경제적 비용을 전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삼성은 "공단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라고 하면서 "공단이 명확한 발병 원인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영향 가능성만으로 산재를 인정한 것으로 보상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에 따른 판정"이라며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업무상 질병에 대한 판정절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업무상 질병의 경우,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등 전문기관이 역학조사 및 작업환경 측정 등을 통해 현재 및 과거에 노출되었거나 노출될 수 있는 유해물질의 존재여부를 조사한다. 이 과정에서 산업의학적 측면의 '과학적 추정‘이 수반되며, 대법원 또한 이러한 기조에 의해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이번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은 그동안 지나치게 엄격했던 업무상 질병에 대한 기준에 대해 공단 스스로 유연성과 합리성을 더한 것 같아 진심으로 환영한다.


더불어, 이번 결정이 앞으로의 결정에도 영향을 미쳐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 하고자 하는 산재법 본연의 목적을 이루는데 초석이 되길 바란다.

문웅·노무법인 산재 대표노무사

2012년 4월 11일 수요일

삼성반도체 노동자, 사상 첫 산재승인.."삼성 사과해야"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4-10일자 기사 '삼성반도체 노동자, 사상 첫 산재승인.."삼성 사과해야"'를 퍼왔습니다.
근로복지공단, 김지숙씨 '재생불량성 빈혈' 산재 인정


ⓒ김철수 기자 지난해 삼성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집단 백혈병에 대한 일부 산재인정 판결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산재인정에 불복하고 항소장을 접수한 것에 대해 유족들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근무했던 노동자의 산업재해 신청이 처음으로 받아들여졌다. 

근로복지공단은 10일 지난 1993년 12월부터 1999년까지 삼성전자 기흥 공장과 온양 공장에서 총 5년5개월여간 근무했던 김지숙(37) 씨에 대해 '혈소판감소증 및 재생불량성 빈혈' 증세를 산재로 승인했다고 밝혔다.

재생불량성빈혈은 골수 손상으로 조혈 기능에 장애가 생겨 백혈구, 혈소판 등이 감소하는 질병으로 증상이 악화되면 백혈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김지숙 씨가 삼성전자 근무 과정에서 벤젠이 포함된 유기용제와 포름알데히드 등에 간접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고, 1999년 퇴사 당시부터 빈혈과 혈소판 감소 소견이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해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 인과 관계를 인정했다.

그동안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이나 재생불량성 빈혈 등으로 노동자는 22명이 산재를 신청했지만 산재 판정이 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은 성명을 통해 이번 결정이 "그동안 근로복지공단이 내려온 불승인 처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근로복지공단 스스로 인정을 한 셈"이라며 "김지숙씨의 산재승인을 통해 공단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앞서 근로복지공단은 그동안 김지숙 씨와 동일한 작업환경에서 발병한 동일계통의 질환을 겪고 있는 송창호, 김은경, 유명화, 고 황유미, 고 이숙영, 고 황민웅씨 등에 대해서는 역학조사 결과 벤젠 등 발암물질은 발견되지 않았다며 번번히 불승인 판정을 내려왔다. 

반올림은 "똑같은 직업병 피해를 당하고도 과거 산재신청이 모두 불승인 되고, 이후 힘겨운 행정소송 중에 있는 삼성반도체 다른 피해자들에 대하여도 이번 결정으로 인해 산재인정의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반올림은 "삼성은 계속 발암물질은 없고 직업병은 아니라고 속이기만 할 게 아니라 이번 김지숙씨의 산재승인 결정을 통해 다시한번 반도체공장의 작업환경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직업병 피해자들 및 국민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며 "그것의 첫 출발은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재인정을 위한 행정소송에 삼성의 개입(소송보조참가신청) 철회"라고 강조했다. 

'반올림'의 공유정옥 활동가(산업의학 전문의)는 '민중의소리'와의 전화통화에서 근로복지공단의 결정 배경에 대해 "처음에 비해 아무래도 삼성반도체 산재에 관한 많은 진실들이 알려졌다. 특히 지난 2월에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발표도 있어서 산재판정위원회 전문가들도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18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삼성전자 산재 노동자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온 이미경 민주통합당 의원도 이날 보도자료를 내어 "지난 2월 발표된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연구결과에서도 삼성 반도체 공정 등에서 벤젠 등 발암물질이 검출된 만큼 산재 인정은 마땅하다"며 "뒤늦은 감이 있지만 환영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미경 의원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 등은 행정법원에서 산재를 인정받고도 근로복지공단의 항소로 2심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며 “하루 빨리 나머지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도 산재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이 의원은 “무엇보다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는 작업환경 개선이 시급하고, 직업성 암의 산재 인정 기준이 합리적으로 조정돼서 억울한 직업성 암 피해자들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결정에 대해 삼성전자 측은 "이번 판정은 명확한 발병 원인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영향 가능성만으로 산재를 인정한 것"이라면서도 "근로자들의 보상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에 따른 판정으로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을 겸허히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공유정옥 활동가는 "절대다수의 질병이 명확한 원인이나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게 예외적인 게 아니다"라며 " 명확한 발병원인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흠을 잡는다면 질병을 갖고 산재인정을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라고 지적했다. 공유정옥 활동가는 "생존과 인권을 보장하려는 것이 산재보험의 취지"라며 "국가가 노동자의 산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가 살 만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태근 기자 taegun@vop.co.kr

2012년 2월 8일 수요일

거짓 드러난 삼성.근로복지공단, 끝까지 발뺌하나?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2-08일자 기사 '거짓 드러난 삼성.근로복지공단, 끝까지 발뺌하나?'를 퍼왔습니다.
발암물질 발견 연구결과에도 "극미량 인체 영향없다" 강조...산재소송은?



ⓒ민중의소리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정부가 무려 3년간에 걸친 연구결과 삼성전자 등 3개 반도체회사에서 백혈병 등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발견됐다고 발표함으로써 그동안 작업환경과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근로복지공단이나 삼성전자의 주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그러나 정작 삼성전자와 정부는 연구결과를 축소해석하면서 이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앞서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6일 발표한 연구결과는 삼성전자 등 3개 회사의 반도체 제조 사업장에서 벤젠, 포름알데히드, 비소, 전리방사선 등 1급 발암물질이 발생했다고 확인했다. 

그런데 정작 연구결과에 대해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스스로도 "이번에 검출된 발암물질의 양은 노출 기준치 보다 낮아 인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니"라고 내세웠다. 연구원은 보고서 원문은 공개하지 않은 채 '반도체 사업장 일부 공정에서,벤젠 등 발암성물질이 극미량 부산물로 발생'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뿌렸다. 

삼성전자 역시 입을 맞춘 듯 "이번에 측정된 양은 모두 노출기준보다 낮아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니라고 보여지지만 앞으로 임직원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관리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정작 이번 발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점은 정부와 삼성이 그동안 거짓말을 해왔다는 점이다. 

지난 2007년 부터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온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산재인정을 위해 싸워온 삼성반도체 산재 피해 노동자들이 산재승인을 요구할 때마다 삼성전자와 근로복지공단은 작업환경과 백혈병 등 암 발병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고 강변해 왔다. 심지어 삼성전자는 해외컨설팅 업체인 '인바이런'에 용역을 통해 데이터 제시도 없이 백혈병과 업무와의 관련성이 없다는 조사한 결과를 지난해 발표하기도 했다. 근로복지공단과 삼성전자는 산재 피해노동자들이 제기한 산재불승인 취소 소송에서도 이같은 입장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고용노동부 고용노동부가 6일 발표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삼성전자 등 3개 반도체 회사의 작업환경 연구 결과.
그런데 이번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연구결과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과정에서 사용되는 물질 뿐만 아니라 공정진행(웨이퍼 가공라인/조립라인)과정에서 그 부산물로 벤젠, 포름알데히드, 전리방사선, 비소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위한 모임'('반올림')이 7일 성명을 통해 "과거 열악한 작업환경속에서는 더욱 많은 양의 벤젠등 발암물질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산업재해로 인정해야할 유력한 근거가 이번 연구결과를 통해 확인됐다"고 지적한 것은 이때문이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과 삼성전자는 발암물질이 노출기준치 이하로 발견돼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니"라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산업안전과 관련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미국산업위생전문가협의회(ACGIH)가 정의한 '노출기준'이란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반복적으로 노출되어도 건강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농도"로 규정돼 있는데, 이는 "안전농도와 위험농도의 경계치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ACGIH에서는 발암물질의 경우 독성의 역치(threshold: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가 없어 극히 낮은 수준의 노출로도 암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한분자의 유전독성 발암물질이 유전적 변이를 유발할 수 있으며 종양발생도 증가시킬 수 있다.

노출기준보다 아무리 낮아도 인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 없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이 1990년대와 2000년 초중반에 근무를 하다가 백혈병과 림프종이 발병한 피해당사자들이기 때문에, 개선된 작업환경에 대한 이번 연구의 조사시점(2009~2011)을 감안하면 피해자들이 근무했을 당시에는 합리적으로 추론했을 때 훨씬 더 위험한 수준의 발암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반올림'은 삼성전자와 근로복지공단이 피해 노동자들의 산재를 즉각 인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재 5명의 노동자가 삼성반도체 산재 관련 소송을 진행중이며,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6월 고 황유미씨와 고 이숙영씨 등 2명에 대해서만 업무상 질환의 가능성을 인정해 산재를 승인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원고인 근로복지공단은 곧바로 항소했다. 

이들이 생전에 근무하던 공장은 이번에 발암물질이 발견된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웨이퍼 가공라인이었다. 

ⓒ김철수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장 산재 피해자들이 지난해 6월 법원의 산재승인 판결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항소장을 접수한 것에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