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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4일 목요일

오락가락 민주당, 말 바꾼 당선자


이글은 시사IN 2013-02-13일자 기사 '오락가락 민주당, 말 바꾼 당선자'를 퍼왔습니다.
제주해군기지는 정부가 갈등 조정에 실패한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정치권은 숱한 말 바꾸기로 불신만 조장했고 정부는 주민의 의견을 모으는 절차적 정당성 없이 밀어붙이기만 했다. 해법은 없을까.

제주해군기지 예산을 놓고 막판 진통이 한창이던 지난해 12월31일 밤,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김기현 원내수석부대표, 민주통합당 박기춘 원내대표·우원식 원내수석부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그러나 끝내 ‘공사 중단’이라는 문구를 부대조건에 넣을 수는 없었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새누리당 쪽에서 당장 대선 패배 얘기부터 하더라. 전체 결과는 차치하더라도 제주도 표심만 보자는 거다. 제주의 가장 큰 이슈가 해군기지 문제였는데, (박근혜 우세로 나온 대선 결과를 보면) 도민들이 이미 표로 심판한 거 아니냐는 거였다. 어쨌든 박근혜 당선자도 해군기지 문제에 있어서는 이명박 정부와 입장 차이가 없으니… 새 정부 ‘발목잡기’로 비칠 수도 있어 마냥 고집할 수만은 없었다.” 

ⓒ시사IN 자료 강정마을을 지나가는 제주올레 7코스.

그렇게 해를 넘겨 2013년 1월1일 제주해군기지 예산 2009억원은 단 1원도 삭감되지 않고 전액 통과됐다. 물론 ‘70일 동안 민·군 복합항임을 확인하는 철저한 검증을 거친 뒤 예산 집행’이라는 부대조건이 붙었다. 하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는 이 조건은 보란 듯이 무시된 채, 공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여·야가 합의한 ‘선검증, 후예산집행’을 국방부(해군)는 ‘선공사, 후예산집행’ 논리로 돌파하며 공사를 강행 중이다. 

70일을 둘러싼 여·야 간의 공방 역시 이어지고 있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1월2일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부대조건이 공사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원식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1월4일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예산을 집행하지 않으면 공사가 중단되는 게 당연한 일이라며 ‘공사 중단’ 이라는 용어를 빼자고 한 게 이한구 원내대표다”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싸움이 벌써 7년째 이어진다. 1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비용이 투입되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은 지난 7년간 끊임없이 소란스러웠다. 제주해군기지는 국책사업 시행에서 정부가 갈등 조정에 실패한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왜, 강정마을은 이처럼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게 됐을까. 천혜의 자연환경과 지역을 둘러싼 안보 이슈도 중요하지만,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사업을 둘러싼 ‘거짓말’이다. 정부와 군, 그리고 정치권은 지난 7년간 문제 해결은커녕 불신만 조장해왔다.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 갈등 중재는 불가능하다. 법과 절차는 번번이 무시됐고, 정치권은 제주해군기지를 이슈화해 표를 얻는 데만 골몰했다. 

ⓒ뉴시스 1월10일 강정마을 주민들이 제주 서귀포시 제주민군복합항건설사업단 정문을 막고 있다.

오락가락 민주당, 말 바꾼 당선자

2007년 2월 “해양대군을 육성하고, 남방 해상 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제주해군기지 건설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했던 한명숙 전 총리는 5년 뒤인 2012년 3월, 강정마을을 방문해 “여러분과 손잡고 강정마을을 지켜내겠다”라고 약속한다. 참여정부 당시 제주해군기지를 찬성했던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 전 장관, 그리고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전 민주당 대선후보도 이 ‘말바꾸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참여정부의 ‘원죄’는 당장 새누리당의 공격 포인트가 된다. 민주당은 이에 대항할 논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거치며, 한·미 FTA와 함께 제주해군기지 문제는 ‘참여정부발 쟁점’으로 떠올랐다. 선거기간 내내 민주당은 ‘공사 중단 후 재검토’를 당론으로 유지해왔다. 그러나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은 1월15일 한 보수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제주해군기지 문제에 관한 당론 변경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일각에서 민주당의 ‘좌클릭’을 선거 패배의 이유로 제기한 탓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정권심판론’이라는 정략적 차원에서 제주해군기지를 이용했다는 비난은 불가피하게 됐다. 민주당 역시 근본적 해결보다는, 표를 얻기 위해 강정마을을 활용한 셈이다. 

원칙과 신뢰를 자신의 브랜드로 내세우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 또한 제주해군기지와 관련된 말 바꾸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2007년 6월 “도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한 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라고 말했던 박 당선자는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제주해군기지 반대세력을 ‘100%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되는 세력’으로 규정한다. 

박 당선자는 2012년 10월 제주를 방문해 “민·군 복합 관광미항 건설은 제주 도약을 이끌 수 있는 중차대한 과제로 안보와 제주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크루즈 관광허브로 확실히 키워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제주를 하와이처럼, 해군기지를 진주만처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공약이다. 그러나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하와이의 진주만 해군기지가 골치 아픈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절차적 정당성’은 어디로? 

제주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라고 비판한다. 문제의 시작인 7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2007년 4월 당시 강정마을 총회 회의록에 따르면 마을 전체 주민 1900여 명 중 단 87명이 모여 한 시간 만에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를 가결해 해군기지 건설 후보지로 신청한다. 형식적으로는 주민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주민 동의를 받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숫자다. 설명회와 공청회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강정마을은 애당초 해군기지 후보군에도 없었던 지역이다. 

2002년에는 화순에서, 2005년에는 위미에서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해군기지 유치에 실패한 해군과 제주도는 이후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제주시 ‘제주해군기지 영향조사 연구팀’은 찬반 결정 방식으로 주민투표, 설문조사, 시민 배심원 제도, 제주도의회 결정, 제주 도지사 결정 등 5가지 방법을 제시했고, 도는 이 중 ‘조사결과에 대해 반대 측의 수용성이 가장 낮은’ 여론조사로 사업지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려했던 대로 졸속과 오류가 있었다. 2007년 7월24일 KBS제주 보도에 따르면 표본 추출이 부실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예를 들면, 20대 이상 표본이 199명이라고 기록된 대천동의 경우, KBS제주가 전문기관 두 곳에 분석 의뢰한 결과 79명에 불과한 식이었다. 반대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젊은 층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여론조사는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하는 ‘유일하고 객관적인 근거’가 된다. 

결국 2007년 8월, 강정마을회는 주민 재투표를 실시한다. 725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이중 680명(94%)이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더 많은 주민이 참여한 이 재투표는 주민 의견으로 반영되지 않았다. 2011년 8월 야 5당 제주해군기지 진상조사단이 펴낸 조사보고서를 보면 “대다수 마을 주민이 해군기지 사업을 정확히 이해하거나 숙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유치결정 과정에서 마을 주민의 참여와 의견 수렴이 충분하게 보장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적혀 있다. 

국책사업을 이유로 강정마을 절대보전지역 지정을 도의회가 ‘날치기’로 해제한 것도 도마에 올랐다. 절대보전지역 제도는 제주도개발특별법(1991.12.31. 법률 제4485호로 제정)이 제정될 당시 무절제한 개발로 훼손되어가는 자연을 보전하고 제주도 고유의 자연적 특성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지역을 ‘영구히’ 보전하기 위해 도입됐다. 강정마을은 2004년 10월27일 절대보전지역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해군은 절대보전지역 해제를 신청하면서 “주민들의 동의를 득하여 선정된 입지이므로” 따로 주민 동의를 구하지 않았고, 해제 면적 역시 절대보전지역 면적(82만6000m²) 대비 12.7%(약 10만5000m²)에 불과한 ‘경미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2009년 12월17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는 절대보전지역 지정 해제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그러나 제주시가 펴낸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건설예정지 내 절대보전지역 변경(축소) 조사 검토서’에 따르면 “2004년과 2009년 환경여건이 변화되지 않았음”이라고 적혀 있다. 해제의 명분이 전혀 없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로써 법률에 지정된 절대보전지역 제도는 무력해졌다. 

김태환 전 도지사의 ‘이중 체결’도 도민의 분노를 샀다. 제주도는 2009년 4월27일 국방부 및 국토해양부와 제주해군기지 건설 관련 기본협약서(MOU)를 체결하면서, 눈속임을 위해 ‘이중 협약서’를 만들었다. 서명은 ‘해군기지’ 제목의 협약서에 하고, 도민들에게는 ‘관광미항’이라는 제목의 협약서를 공개한 것이다. 

민항이냐, 군항이냐…계속되는 논란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제주해군기지가 민항을 중심으로 하고, 군용 선박은 기항만 하는 ‘민·군 복합형 기항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해왔다. 민항을 주된 기능으로 하되, 필요 시 해군이 정박하는 시설로 쓴다는 의미였다. 

정권이 바뀌면서 제주해군기지의 이름도 ‘살짝’ 바뀌었다.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제주해군기지에 15만t 크루즈 두 척이 동시 기항할 수 있는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으로 건설하겠다”라고 공약한다. 그렇게 2008년 9월, 제주해군기지의 공식 명칭은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으로 확정된다. 중요한 것은 이름보다 정부 투자계획이다. 크루즈항은 534억원, 해군기지에는 9770억원으로 군항 예산의 규모가 민항 예산의 18배가 넘는다. 예산은 군항 위주 건설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셈이다. 

2011년 국회 예결위원회는 이 같은 이유로 2012년 예산 422억원의 대부분을 삭감했다. 국회가 문제 제기했던 ‘설계 오류’ 역시 확인됐다. 김황식 국무총리는 2012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공약한 15만t 크루즈가 전 세계에 6~7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한 해군 내부 자료에 따르면 제주해군기지는 설계상 15만t 크루즈 두 척의 동시 접안이 불가능했다. 같은 해 2월17일 총리실이 주관하는 ‘크루즈선박 입출항 기술검증위원회(기술검증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러나 민주당 장하나 의원실이 입수한 기술검증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이 기술검증위원회는 해군기지 공사 강행을 위한 ‘들러리’였음이 드러난다. 1차 회의(2012년 1월26일)와 2차 회의(2012년 1월30일)에서는 15만t 크루즈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군항으로 픽스해놓고 크루즈 부두 한다고 하다보니…” “(이명박 대통령이) 왜 화끈하게 15만t을 불렀는지 모르겠다” “충분히 검토했다면 15만t은 안 나왔을 것”. 

4차 회의(2012년 2월14일) 회의록에서는 “총리실에서는 검증문제가 조기 매듭지어지고 국책사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 방침이다. 그런 방침으로 검증위원회도 구성한 것이고, 그 점을 고려해 종합 결론을 도출해주셨으면 좋겠다” “어떤 방법으로도 설계 변경이 일어나지 않는 방법에서 기술적 대안을 찾아달라”라는 ‘당부’가 발견된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검증위원회 참석 인사의 발언이 있었지만, 결국 검증위원회는 ‘항만설계를 크게 변경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박 시뮬레이션을 하라’는 보고서를 채택한다. 

2월19일 국방부는 해명자료를 통해 “설계에 근본 오류가 있다거나 입출항이 불가능하지 않다”라며 검증위원회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항만 내부와 항로 설계 일부를 변경한다(변경된 설계 역시 기술적·법적 논란이 있다). 그리고 2월22일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 제주해군기지 공사 강행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했다. 여러 정황이 ‘민항’이 불가능함을 시사하고 있고, 우근민 제주도지사 역시 “해군기지에 민간 선박은 입출항을 할 수 없다”라며 무늬만 ‘민·군 복합항’임을 인정했지만 정부 내부의 ‘다른 목소리’들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해 3월, 구럼비 바위는 폭파되기 시작했다. 

2012년 예산 통과 후 ‘70일 부대조건’에 따라 정부는 1월17일과 18일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역시 “총리실 주최라는 비독립적 검증 주체, 불완전한 전제조건, 부족한 검증기간 등 문제점을 안고 있다”라고 시민단체와 강정마을회는 문제를 제기한다.  

누구를 위한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인가?

민주당 장하나 의원은 지난해 9월 대정부 질의에서 문서 하나를 공개한다. 해군본부가 2010년 발행한 ‘08-301-1 시설공사 공사시방서’였다. ‘설계적용’ 난에는 ‘CNFK(주한 미해군사령관) 요구조건(DL(-) 15.20m)을 만족하는 DL(-) 17.40m로 계획’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주한 미해군사령관이 요구한 계획 수심은 핵추진 항공모함(CVN 65급)에 적용되는 수심이었다. “미군 항모의 제주해군기지 입항 가능성이 없다”라는 국방부 주장과 배치되는 문서였다. 

장 의원은 “한국에는 있지도 않은 항공모함을 시뮬레이션의 대상 선박으로 설정한 이유는 제주해군기지가 미군의 상시적 활용을 전제로 한 기지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다. 국방부가 해군기지 건설의 경제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항모의 입항을 전제로 했다. ‘키티호크호 승조원 5200명, 구축함 등 군함에서 800명 등 6000명의 인원이 제주해군기지에 입항할 것으로 추산’한 것이다. 국방부는 미군이 하루 300달러씩 소비할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이유를 경제효과의 근거로 제시했다. ‘접점’은 없을까? 

반대 세력과의 ‘대화’는 없었다. 공권력의 폭력과 탄압이 있었을 뿐이다. KBS제주는 2009년 1월29일 단독 보도를 통해 정부 주요 기관이 반대 세력 진압을 위해 조직적으로 개입했음을 폭로했다. 보도에 따르면 제주도·해군·국가정보원·제주지방경찰청·환경부 등 관계자 15명이 제주시 전복요리 전문점 ‘산호전복’ 회동에서 “고소·고발을 해줘야 경찰도 조처가 가능하다” “인신 구속 등이 있어야 반대 수위가 낮아진다” 따위로 제주해군기지 반대 여론을 제압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가졌다. 

강정인권침해조사단이 2012년 10월 펴낸 ‘제주해군기지 건설과정에서의 강정마을 인권침해 조사보고서’와 장하나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7년간 업무방해와 공무집행방해 따위 이유로 연행된 사람만 700명이 넘고, 이 중 22명은 구속, 480명은 기소 상태다. 법과 공권력을 통해 갈등을 ‘종료’시키려고 한 결과다. 군(해군)이 민간인을 폭행하는, 군복무에 어긋난 사례들도 보고됐다. 군사시설을 짓는 단순 사업장에서 해군이 ‘군사작전’을 펼친 것이다. 

정부는 갈등 조정자 구실을 방기했다. 청와대(사회통합수석 및 외교안보수석), 대통령 소속 사회통합위원회, 국무총리실, 특임장관실, 국방부, 국민권익위원회 등 제주해군기지로 인한 갈등을 해결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여러 기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 시행자인 해군 측에만 책임을 떠맡긴 채 ‘적극적 구실’을 거부하고 있다. 

2011년 6월21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임태희 당시 대통령실장은 청와대의 적극적 구실을 요구하는 민주당 김재윤 의원에게 “제주도의 문제는 제주도에서…” “도민 대다수는 찬성”이라는 기존 방침만 되풀이했다. 같은 해 6월2일 대정부질의에 출석한 김황식 국무총리도 마찬가지였다. “적법 절차에 따라 이뤄졌고, 국가를 위해 주민의 일부 반대가 있다고 해도 할 것은 해야 하는 것이 국가 의무다.” 

사업진행률 22%, 정부와 군은 같은 방침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 이처럼 갈등을 방치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정부가 적절한 방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반대 세력이 ‘제풀에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치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처럼 ‘선심성’ 선거 공약으로 시작하는 대규모 국책사업의 경우 사업의 필요성과 타당성, 국민적 공감대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추진되기 십상이다. 졸속 추진의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주무부처와 공공기관은 갈등 상황에서도 사업을 지속하려는 속성을 보인다. 열린우리당 당시 한 당직자는 “참여정부의 최대 실책이 있다면 관료에게 포섭당한 것이다. 당시에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봤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끌려다니면 안 된다’는 관료들의 말을 더 신뢰한 게 패착이었다”라고 말했다. 

갈등 해결의 실마리는 있다. ‘공공기관의 갈등 예방과 해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따라 사업 주무장관인 국방부 장관이 ‘민관갈등조정협의회’를 구성·운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 또한 거부해왔다.  

제주해군기지에 대해 이명박 정부와 비슷한 기조를 보이는 박근혜 당선자는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법과 공권력으로 ‘진압’되는 갈등은 필연적으로 재앙의 씨앗을 품게 되어 있다. 여러 언론에서 인용하는 강정마을 주민 대상 ‘정신건강 실태조사’의 결과 역시 그렇다. 적대감·우울·불안·강박 등 정신적 이상 소견이 있는 사람이 전체 주민 중 75.5%,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전체 주민의 43.9%로 제주도민 평균 (8.1%)에 비해 5배 이상 높다. 

장일호 기자  |  ilhostyle@sisain.co.kr

2013년 2월 7일 목요일

박 ‘만만디 인사’ 스타일… 검증시간 줄여 청문회 통과 노리나


이글은 경향신문 2013-02-06일자 기사 '박 ‘만만디 인사’ 스타일… 검증시간 줄여 청문회 통과 노리나'를 퍼왔습니다.

ㆍ박 당선인 인사원칙 여권 수뇌부·측근도 몰라ㆍ국정운영 불신 커져… 설 연휴 전 발표 전망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인사 침묵’이 길어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김용준 전 국무총리 지명자 낙마 이후 일주일이 넘도록 후임 총리 후보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내각과 청와대 인선도 줄줄이 미뤄지고 있다. 심지어 인사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언제쯤 이뤄질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장기화하고 있는 ‘깜깜이’ 인사 스타일이 정치의 예측 가능성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 당선인은 6일 당초 예상됐던 총리 후보 등 내각과 청와대 인선안을 발표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출범(25일)을 19일 남겨두고, 새 정부의 주축이 될 총리와 장관 후보가 단 한 명도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구체적 인선 발표는 고사하고, 새 정부 조각(組閣)이 어떤 콘셉트와 방향으로 진행될지조차 보여주지 않고 있다. 새 정부의 정상적인 출범에 대한 기대감은 멀어지고, ‘인사의 덫’에 걸려 비틀거리는 모습만 부각되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6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박 당선인은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 참석해서도 인선에 대해선 함구했다. 박 당선인은 오히려 “개인의 인격을 과도하게 상처내지 않아야 한다”며 인사청문회의 문제점만 재론했다.

새누리당과 인수위 주변에선 “인사 문제는 박 당선인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여권 수뇌부와 박 당선인 측근들도 인사 내용을 모른다는 것이다. 

인선이 계속 늦춰지는 것을 두고 박 당선인이 여전히 ‘나홀로’ ‘깜깜이’ 인사 스타일을 고수하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김 전 지명자 낙마 이후 이 같은 인사 스타일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면서 변화가 예상됐지만 오히려 더 심해졌다. “이번만은 흠집 없는 최선의 카드를 찾겠다”는 자세가 늑장 인선으로도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인사 스타일 때문에 인선이 더 난관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나홀로 권력을 독점하다보니 힘이 버거운 것”이라며 “인력풀을 넓히고 시스템을 이용하는 일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후보로 거론됐던 일부 인사가 사전검증에서 결격사유가 드러나 후보군에서 배제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만만디’ ‘깜깜이’ 인사 스타일은 권위적 리더십에 기대고 있는 것이고, 정치의 예측 가능성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사가 차기 정부의 방향을 보여주고 새 정부의 비정상적 출범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인선 콘셉트와 방향, 단행 시점이라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인사가 ‘깜깜이’로 이뤄지다보니 인사원칙이 뭔지 알 수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인선이 미뤄지면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 불신이 커질 수도 있다. 이 소장은 “박 당선인이 인사청문회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것은 핑계”라며 “인사를 커뮤니케이션(소통) 행위로 봐야지, 임명권자의 권한행사로만 생각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박 당선인 측에서 초기 검증을 피하기 위해 인선을 늦추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내놓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시간 끌기를 하는 것은 검증시간을 줄이겠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막판에 (인선) 물량을 쏟아냈는데 다수가 불량품이면 망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만 원칙과 절차를 중시하는 박 당선인이 인선을 마냥 미룰 수는 없는 만큼 설 전 인선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설 연휴 직전인 8일 인선을 발표할 경우 언론검증을 최대한 비켜가려는 ‘꼼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만큼 7일 발표가 유력하다는 관측들이 나온다.

김진우·강병한 기자 jwkim@kyunghyang.com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민주당, 학계까지 모두가 개표 부정 가담자?


이글은 시사IN 2013-01-14일자 기사 '민주당, 학계까지 모두가 개표 부정 가담자?'를 퍼왔습니다.
개표부정설은 집계 프로그램 조작설로 시작해 선관위·민주당·방송사까지 개입된 초대형 음모론으로 확장됐다. 음모론은 국가기관을 불신할 때 왕성하게 성장한다. 형사 고발 등 강경책은 오히려 불신을 증폭시킨다

음모론에는 철칙이 하나 있다. 두세 명의 작당으로 가능한 음모는 실현 가능성이 제법 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수십 명이 가담해야 하는 음모론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 국가기구는 물론 야당과 학계와 언론까지 가담해야 성립하는 초대형 음모론은, 이미 과대망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모론은 대체로 “두세 명 만으로도 실현 가능하다”라는 주장으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반박이 힘든 반론이 들어오면, 음모의 규모를 확장한다. “그들도 음모 가담자다”라고 재반론한다. 이 과정이 거듭될수록 음모론이 지목하는 가담자는 늘어나고 신뢰도는 떨어진다. 대선 이후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불붙은 개표 부정 음모론은 정확히 이런 궤적을 따랐다.

ⓒ뉴시스 2012년 12월19일 서울의 한 개표소에서 투표함이 개봉되고 있다.

대선 직후에는 선거 결과를 못 믿겠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는 했으나 산발적이었고 근거도 취약했다. 결정적 변곡점은 12월25일이었다. 아이디 ‘그루터기추억’은 다음 아고라에 “대선 개표 그래프가 정확히 로지스틱곡선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토록 매끈한 곡선이 나올 수 없다. 인위적인 결과물이다”라는 주장을 올린다. SNS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울대 장덕진 교수(사회학)는 “이 로지스틱함수 가설이 부정선거 여론에 결정적인 논리를 제공했다. 여론 결집이 일어났다. 일단 시동이 걸린 다음에는, 우호적인 증거를 선택적으로 수집해 나갔다”라고 분석했다.

로지스틱함수 가설이 강력했던 이유는, 개표 부정 음모론을 ‘소수의 가담’만으로 설명하는 논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가설은 간단히 말해 “실제 개표 결과와 관계없이, 집계 프로그램에 접근이 가능한 한두 명이 선관위가 발표하는 개표 결과를 인공적 함수에 따라 조작했다”라는 암묵적 주장을 깔고 있다. 

문제가 있었다. 민주당은 전국 252개 개표소에 참관인 1776명을 파견했다. 선관위의 개표 현황과 별개로 민주당도 현장 개표 결과를 실시간으로 본다. 만약 선관위 집계 결과를 조작했다면, 민주당 개표 참관인의 눈에 띄지 않을 방법이 없다. 개표소 252곳 중 그런 보고가 올라온 곳은 전혀 없다. 극소수 가담자가 선관위 집계 결과만 조작했다는 음모론이 무력해졌다. 또한 학계에서도 로지스틱곡선이 실제 개표 상황에서도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왔다(22쪽 상자 기사).

음모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계 이전에 개표소의 개표부터 조작됐다는 주장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정확히 그렇게 됐다. 전자개표기 부정 의혹, 개표소의 표섞임 의혹 등이 등장했다. 여기서부터는 10년 전 보수 진영의 주장과 판박이다(20~22쪽 기사 참조). 

이 버전의 문제는 ‘음모 가담자’가 순식간에 너무 많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먼저 선관위 전체가 가담자가 된다. 많은 음모론이 청와대·정부·정당 등을 마치 한 몸처럼 취급하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다르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까놓고 말해 선관위에도 ‘여당 사람’ ‘야당 사람’이 다 있다. 선관위 전체가 동원될 음모가 있었다면 우리가 모를 리가 있나”라고 되물었다.

오류 입증돼도 신념 더 강해져

더 큰 모순도 있다. 민주당은 252개 개표소에서 조직적인 개표 부정 사례를 접수한 것이 없다. 시장바닥같이 완전히 공개된 개표 현장에서 수백만 표를 바꿔치기하며 참관인 1776명의 눈을 모두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음모론은 필연적으로 민주당을 음모 가담자로 집어넣는다. SNS에서는 민주당이 개표 부정 음모론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두고 “그들도 기득권이기 때문에 친노의 대선 승리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대규모 부정이 있었다면, 박근혜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던 대선 당일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가 말이 되지 않는다. 출구조사는 투표장 밖에서 따로 조사한 결과이므로, 개표 결과가 조작되었다고 해도 출구조사는 정확한 표심(음모론의 전제를 따르면, 문재인 후보 승리)을 반영해야 한다. 

그래서 출구조사 조작설도 등장했다. ‘음모 가담자’는 또다시 늘어났다. 이번에는 조사기관과 방송 3사다. SBS 개표방송을 진행한 김성준 앵커는 트위터에서 “출구조사와 개표방송 조작을 양심선언하라”는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음모론 진영은 ‘명백한 개표 부정’을 보도하지 않는 진보 성향 언론들 역시 권력에 굴복한 ‘음모 가담자’로 간주했다. 논란이 그치지 않자 (한겨레) 온라인판은 개표 부정 의혹을 정리하는 기사를 1월3일 내보냈다. 기사는 음모론의 핵심인 로지스틱함수 의혹에 대한 학계의 회의적인 반응을 소개했다. 어용학자라는 비난이 즉각 등장했다. 학계도 ‘음모 가담자’가 되었다. 사실상 온 세상이 음모 가담자라는 초대형 음모론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반론과 재반론을 거치며 지나치게 몸집을 불린 음모론은 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가장 곤혹스러운 곳은 민주당이다. 재검표를 주장할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음모론의 성화가 하도 거세어 답하지 않을 도리도 없다. 민주당은 담당 상임위인 행정안전위 소속 의원들이 이 문제를 검토 중이라지만, 실제로는 맡겠다고 나서는 의원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표 부정이 없다고 하면 지지자에 죽고, 있다고 하면 입증을 못해 죽는 자리”(행안위 관계자)를 맡을 의원이 없는 것이다.

개표 부정 음모론은 왜 사그라지지 않을까. 학자들은 ‘집단 극단화’ 현상에 주목한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의견을 나누다보면 집단 전체가 더 극단적이고 모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개표 부정 음모론은 수작업 재개표를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걸었는데, 이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문재인 전 후보와 민주당에 대단한 정치적 부담(‘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세력’)을 지운다. 하지만 음모론 진영은 이 부담을 과소평가하는 전형적인 모험주의를 보여준다.

법학자이자 인간행동 연구자인 캐스 선스타인 교수([넛지] 공저자)는 최근작 (루머)에서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부시 정부의 주장(사실은 없었다)을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보여줬더니, 이들은 신념을 바로잡기는커녕 더욱 강화했다. 이들은 반대 의견을 일종의 ‘공격’으로 간주했고, 확신을 강화해 ‘방어’했다. 또 선스타인 교수는, 보수주의자는 보수 매체(폭스 뉴스), 진보주의자는 진보 매체([뉴욕 타임스])가 자신의 신념이 틀렸다고 지적해야 그나마 수용 가능성이 높다고 썼다.

음모론 진영에서만 원인을 찾을 일도 아니다. 음모론은 국가기관을 불신할 때 가장 왕성하게 성장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선관위는 선거 관리와 선거법 적용의 형평성을 둘러싸고 수도 없는 논란에 휩싸였다([시사IN] 제239호 커버스토리 참조). 음모론이 유행할 토양을 깔아준 셈이다.

새누리당 심재철 최고위원은 1월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허위사실 유포자는 선관위가 형사 고발하라” 하고 주문했다. 이런 태도 역시 국가기관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고, 주기적으로 음모론이 발호할 토양을 만든다. 서울대 장덕진 교수는 “SNS에서는 음모론이 점화됨과 거의 동시에 ‘자정작용’도 강하게 일어났다”라고 말했다. 음모론은 자유로운 의견 교환 과정에서 정리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지적이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임대아파트의 겨울, 가난은 이웃도 원수로 만든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11-06일자 기사 '임대아파트의 겨울, 가난은 이웃도 원수로 만든다'를 퍼왔습니다.
[도시 속 외딴섬, 임대아파트·②] 겨울이 두려운 주민들

진보신당 서울시당이 영구임대아파트 주민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이미 2009년 12월에 임대아파트 주민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지금까지도 꾸준히 공공임대주택에 관심을 두고 관련한 논평을 발표해왔다.

실태조사는 9월과 10월에 걸쳐 강서구의 한 영구임대아파트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단순한 설문조사 방식이 아닌 직접 대면을 통한 인터뷰를 진행했고, 총 25명의 주민을 취재했다.  - 도시 속 외딴섬, 임대아파트①도박집에 가출한 아내…오갈데 없는 부녀에게 "방 빼"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주민의 불만은 무엇일까.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미흡한 아파트 시설 관리'가 아니었다.

삶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양상은 다양했지만 출발점은 하나로 모였다. 바로 '고정된 저 수입' 구조이다. 조사 대상 주민의 대부분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당연히 소득도 없다. 인터뷰에 응한 25명의 주민 중 20명(80%)이 소득이 없는 상태였다. 나머지 5명 중에서도 1명(정규직)을 제외하고는 아르바이트와 공공근로를 단기적으로 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사에 응한 주민의 평균 월수입은 51만8000원이고, 월수입이 50만 원 미만인 가구(차상위라 소득이 아예 없는 가구 포함)가 20가구(80%)나 되었다. 이들은 기초생활수급비나 기초노령연금, 장애급여, 참전명예수당으로 겨우 생활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저축하는 가구는 위에서 언급한 직업이 있는 1명뿐이었고, 나머지 24명(96%)은 '저축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초수급비 등으로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에만 지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금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진보신당 서울시당

부담되는 겨울철 난방비

이러한 저 수입은 가계 지출의 작은 변화에도 큰 부담을 준다. 하지만 주민에게 임대료 자체는 사실상 큰 부담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표준임대료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국토해양부 고시 제 2009-679호 '영구임대주택의 표준임대보증금 및 표준임대료' 고시를 보면, 서울시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법정영세인의 표준임대료는 ㎡당 1568원이다. 대부분 주민은 평균 3만4000원, 최대 5만 원의 임대료로 내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관리비다. 주민들은 관리비를 얼마나 내냐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름과 겨울의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이었다. 여름은 1~2만 원이라고 대답한 주민들이 많았다. 그럼 겨울은 어떨까. 5만 원 이상이 대부분이었으면, 10만 원 이상이라는 응답도 상당수였다. 10만 원에 달하는 난방비는 앞에서 언급한 월 평균 수입의 20%에 달한다.

주민들은 입을 모아 겨울철 난방비가 부담된다고 했다. 심지어 겨울철 난방비가 부담돼 보일러를 켜지 않고 겨울을 난다는 주민도 있었다. 영구임대아파트의 특성상 대부분 주민이 장애와 고령으로 건강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높은 난방비 때문에 찬방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난방비만 문제가 아니다. 저 수입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장애 요소로도 작용한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1차적인 지출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단지 밖으로 나간다면 2차적인 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그래서 저 수입으로 인한 사회적 배제가 일어나고 있다.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주민 간의 불신도 문제

저 수입도 문제지만 '주민 간 불신'도 임대아파트 주민의 큰 문제다. 인터뷰에 응한 주민 중 9명(36%)이 '단지 내 범죄 및 소란행위'를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사항으로 꼽았다. 이는 주민이 20년 가까이 이웃으로 살면서 생긴 다양한 문제들 때문에 상호불신이 누적된 결과로 보인다. 또한, 주민 스스로 단지 내에 퍼져있는 가난·장애·고령화 등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진보신당 서울시당

그 결과 법적으로 보장된 임차인대표회의와 선거에 관한 불신이 굉장히 높았다. 임차인대표회의는 임대주택법 제29조에 보장된 것으로 '1. 임대주택 관리규약의 제정 및 개정, 2. 관리비, 3. 임대주택의 공용부분·부대시설 및 복리시설의 유지·보수, 4. 그 밖에 임대주택의 관리에 관한 사항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을 임대사업자와 협의할 수 있는 기구이다.

하지만 동 대표 선출 과정에서 이해관계를 둘러싼 여러 잡음이 나오면서 선거에 대한 불신마저 팽배한 상황이었다. 이웃에 대한 불신, 동 대표 선거를 둘러싼 갈등이 많아 대의기구에 대한 불신도 매우 높은 상태였다. 게다가 앞에서 살펴본 저 수입 구조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꺼리는 상황에서 임차인대표회의에 참여할 유인이 매우 낮아 보인다.

박원순 시장이 해야 할 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9월 13일 서울시 강서구 가양아파트를 찾았다. 1박 2일간 주민의 고충 및 지역 현안, 민원 등을 청취하는 현장회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위 실무진과의 '후기 간담회' 자리에서 임대주택 종합대책을 주문했다고 한다.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목소리를 듣고, 종합대책을 주문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겨울은 다가오고 있다. 아니, 이미 겨울은 시작됐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영구임대아파트 주민에게 겨울은 잔인한 계절이다. 월수입의 많은 부분을 난방비로 지출하게 되면, 당연하게 다른 곳의 지출을 줄여야 한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1일 오후 서울 은평뉴타운 우물골의 한 미분양아파트에 마련한 현장시장실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과 같은 고정된 저 수입으로는 대응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울시는 종합대책은 종합대책대로 준비하되, 그와 별개로 영구임대아파트 주민에게 겨울 난방비를 시급하게 지원할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서울시가 의욕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마을 만들기가 가장 필요한 지역은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 사는 영구임대아파트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후기 간담회'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주거, 복지 제공이란 두 축에서 (벗어나) 일자리 등의 경제정책과 자조적 주민조직도 필요하다"고 했다. 적극 동의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주민의 대다수는 일자리도 소득도 없다. 저 수입으로 인해 단지 밖, 아니 방 밖으로도 쉽게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주민에게 기초생활수급비를 늘리는 것 이외에도 주민이 일자리 매개형 커뮤니티를 구성할 수 있도록 서울시 차원의 계획과 지원이 필요하다. 낮은 수입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배제를 막아야 한다.


 /황종섭 진보신당 서울시당 조직부장

2012년 5월 3일 목요일

“MBC·KBS기자 파업이나 하지 여기 왜 왔나”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5-03일자 기사 '“MBC·KBS기자 파업이나 하지 여기 왜 왔나”'를 퍼왔습니다.
[4년만의 광우병 촛불] “광우병 미국 주장 그대로 옮기는 썩은 기자들…촛불이 언론”

“가서 파업해, 여기서 뭐하고 있어. 파업이나 하지 뭐하러 나왔어”(50대 여성)
2일 저녁 광우병 촛불시위 4년 만에 청계광장으로 모인 시민들에게 언론과 기자들은 불신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이날 저녁 7시를 전후로 청계광장 왼쪽 인도변에 설치된 ‘광우병 미국 쇠고기 수입중단을 위한 국민촛불집회’ 무대 앞에 취재기자와 카메라기자 및 사진기자 등 수십여명이 서서 참가자 촬영을 하자 50대로 보이는 한 여성과 남성이 돌아다니면서 방송사 카메라를 막고 나섰다.
이 여성은 ‘수입중단’이 적힌 손팻말로 KBS와 MBC, YTN 카메라기자의 카메라를 막고 “찍지마, 내려가. 여기서 뭐하는거야. 제대로 보도도 않고 또 왜곡할지 몰라. 안돼”라며 “가서 파업하지 여기 뭐하러 왔냐”라고 거친 불만을 표시했다.


지난 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광우병 촛불집회에 한 여성이 KBS 취재진의 촬영을 저지하고 있다. ⓒ조현호 기자

4년 만에 열린 광우병 국민촛불집회에서 일부 참가자의 저지로 KBS MBC 기자들이 취재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촬영저지를 뚫고 취재중인 MBC 취재진. ⓒ조현호 기자

다른 한 남성도 이데일리 머니투데이 영상카메라 기자들을 막으며 “찍지말라”고 제지했다.
집회 첫 순서였던 가수 손병희씨와 이정렬씨도 기자들의 과열 취재경쟁을 비난했다. 손병희씨는 노래 시작 전부터 “여러분의 취재권리도 중요하지만 집회를 즐길 권리도 있다”며 “계속 취재권리만 내세울 것이냐, 앞에 좀 앉아달라”고 비판했다. 옆에 있던 이정렬씨도 “어차피 찍는다고 나오지도 않는데”라며 “완전히 쇠귀에 경읽기구만”이라고 비판했다.
집회 사회를 맡은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공정보도하지 않아 열받지만 그래도 기자들이 취재하는데 협조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의 방송·언론에 대한 이런 거친 거부감은 최근까지 나타나고 있는 친정부 편향 보도 때문이다. 이강택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지금 TV에 나오는자들은 미국 농무부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하고 있고, 이는 다시 조중동과 MBC, KBS의 썩은 기자들을 통해 전파되고 있다”며 “오늘의 허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4년만에 열린 광우병 촛불집회에서 취재경쟁에 나선 취재진들. ⓒ조현호 기자

이 위원장은 “언론이 장악돼있는 한 진실도, 국민의 안전과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며 “지금 파업을 하고 있는 언론노동자가 정말 이겨야 한다. 그래야 언론이 바로잡히고, 국민주권과 민주주의를 보장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라고 강조했고, 이렇게 호소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를 지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이날 촛불집회는 광우병 수입중단을 위한 자리였지만 이명박 정권 동안 나타난 온갖 대한민국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성토장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진짜 언론은 이런 목소리들이라는 자성도 나왔다.
자유발언에 나선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도 광우병 소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거짓말을 낱낱이 폭로했다. 박 국장은 “촛불과 국민, PD수첩이 옳았고, 이명박이 틀렸다”며 “정부는 국민이 알기 어려운 ‘비정형’, ‘검역강화’ 등을 운운하며 국민을 호도하면서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일 오후 8시께 서울 청계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중단'을 외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박 국장은 젖소라 미국 광우병 소 발병은 괜찮다는 정부와 일부 언론의 주장에 대해 “2003년 발견된 광우병 소도 젖소이고, 이후 미국에서 발생한 4건의 광우병 소 가운데 2마리가 젖소였다. 일본 광우병 소 36건 중 32건이 젖소였고, 캐나다 18건 중 10건이 젖소였다. 젖소가 오래살기 때문에 광우병에 더 취약하다는 뜻”이라며 “젖소 수입을 안한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30개월 미만의 미국소는 다 수입하는데, 고기에 딱지 붙이는 것도 아닌데 알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30개월 미만만 수입해서 괜찮다’는 주장도 “거짓말”이라며 “30개월이라는 것 역시 애초에 모든 쇠고기를 수입하려다 국민들의 촛불로 30개월이나마 제한하게 된 것인데, 정부가 이를 근거로 안전하다고 할 자격이 있느냐. 사죄와 반성이나 할 일”이라고 비판했다.
정부 조사단의 방문 일정에 대해서도 박 국장은 첫날 워싱턴DC(동부), 둘째날 아이오와(중부), 셋째날 캘리포니아 데이브캠퍼스 방문을 한다는데 이것이 관광코스이지 조사일정이라 볼 수 있느냐며 광우병 발생 농장도 방문하지 못하면서 무슨 조사를 하느냐고 비판했다.
전날 농림수산식품부 기자실 브리핑을 통해 이아무개 교수가 사료로 감염되는 ‘정형성’ 광우병이 사라졌다고 한 것에 대해 박 국장은 “다 거짓말”이라며 “지난해 발생 광우병 29건 가운데 26건이 ‘정형’이었고, 3건이 비정형이었으며, 올해는 3건 가운데 2건이 정형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기가찰 일”이라며 “전문가 대신 개나 고양이를 데려다 의견을 듣는 게 낫다. 한심한 정부”라고 성토했다.
이밖에도 한 환경운동연합 회원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끔찍한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지난해 사고이후 엄청난 양의 방사성물질이 공기와 토양(바다)으로 흘러나갔다”며 “우리 정부는 후쿠시마현 생산물을 수입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일부만 제한했을 뿐 무려 100톤 분량이 수입됐고, 급식과 밥상에 올라왔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2일 광우병 촛불집회에 참가한 파업중인 MBC 조합원들이 '김재철 사장퇴진' 피켓을 들고 있다.

그는 “중국과 대만, 쿠웨이트조차 일본산 채소 등을 수입하고, 중국조차 수입금지를 하는데 왜 우리만 하지 않는가”라고 지적했다.
지하철 9호선을 자주 이용한다는 한 부천시민은 “혈세 거둬 맥쿼리 배만 불리는 민자사업을 진행한 담당공무원은 업무상 배임”이라며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각하 역시 업무상 배임으로 고소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이와 함께 반값등록금집회 때문에 벌금폭탄을 맞은 한국대학생연합 학생들, 4·11총선 강남갑 투표함 불법선거 대책위원회 간부, 미국산 쇠고기를 판매하는 마트에서 판매중지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는 아줌마들, 한우 농가 주인, 전국여성농민회장 등 우리사회에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분야의 서민들이 나와 현 정부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KBS 새노조는 이런 목소리를 지켜보면서 부끄러움을 나타냈다. 새노조는 트위터를 통해 “광우병뿐 아니라 원전, 언론, 맥커리 등 모든 이야기가 터져나오네요”라며 “촛불이 진정한 언론입니다”라고 밝혔다.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2012년 2월 5일 일요일

사법 불신의 ‘인계철선’을 건드리다


이글은 한겨레21 [2012.02.06 제896호] 기사 ' 사법 불신의 ‘인계철선’을 건드리다'를 퍼왔습니다.
의 흥행 돌풍이 드러낸 사법 불신의 현실… 전관예우·유전무죄 등 신념화된 ‘불신’ 넘는 첩경은 국민과의 소통과 교감뿐


»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로비에 법원 마크 모양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을 계기로 ‘사법 불신’의 그림자도 깊어지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석궁 사건’을 다룬 영화 이 2012년 벽두, 사법부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은 2007~2008년 석궁 사건의 ‘진실’을 캐는 기사를 여러 차례 내보냈다. 재판과 마찬가지로 기사에도 예단은 없어야 한다. 이번호에는 영화를 계기로 4년여 만에 다시 불거진 석궁 사건과 사법 불신을 둘러싼 여러 층위의 시각을 담았다. 법조계와 시민단체, 법대생들, 석궁 사건 당사자들의 주장이 난마처럼 얽힌다. 활은 시위를 떠났지만 과녁에는 아직 닿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과녁’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_편집자
한국 사회에서 법원과 검찰은 불신의 대상이자 개혁의 대상이다. 더욱 앙상한 현실은,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갈등을 깔때기처럼 수렴하고 최종적으로 해결하는(혹은 어떻게든 봉합해버리는) 통로가 법원과 검찰이라는 사실이다. 그쪽 동네 사람들은 깔때기 대신 스스로를 ‘수챗구멍’ ‘하수구’라고 칭하기도 한다. 뒤치다꺼리를 한다는 자조가 섞여 있지만, 최고 권력까지 빨아들이는 강력한 수챗구멍이자 하수구다.
판단하는 판사 vs ‘진실’ 안다는 당사자

2007년 1월15일, 교수 재임용 선고를 기대한 재판에서 패소한 김명호 교수(영화에서는 김경호)는 석궁을 들고 교수지위 확인소송 항소심 재판장인 박홍우 판사(영화에서는 박봉주)의 집을 찾아간다. 영화 도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현직에 있는 한 고위 법관은 이 개봉하기 전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건 판결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밤늦게까지 고민하고 고민한다. 그런데 이런 영화가 나오면 그동안 쌓아온 노력들이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니 미칠 노릇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매미 날개처럼 가벼운 것들이 쌓이고 쌓이더니 결국 큰 거 한 방에 무너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겠다”고 했다. 서울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자동반사적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푸념했다. 사법부는 이 장애인 학교에서의 성폭행 사실을 다뤄 재수사와 관련자 처벌까지 이끌어낸 영화 처럼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고 한다.
김 교수를 둘러싼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 재임용 탈락이 수학 입시문제 오류를 지적한 괘씸죄 때문인지 아니면 교수로서의 자질 부족 때문인지를 두고 다툰다. 영화는 이 부분을 ‘괘씸죄’로 판단하고 시작하지만 교수지위 확인소송의 쟁점과 실제 재판 과정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둘째는 김 교수가 석궁을 의도적으로 발사했는지, 실제로 박 판사가 활을 맞았는지다. 마지막으로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라는 김 교수의 주장처럼, 석궁 사건 재판 진행(특히 항소심)이 공정성을 잃지 않고 적절히 진행됐는지다. 101분짜리 영화의 대부분이 여기에 집중하고,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 대부분은 이 부분에서 사법부에 공분한다. 이 환기한 문제의식이 단지 교수 구명운동이나 유무죄만을 다투는 걸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은 사법 불신이라는 ‘인계철선’을 건드렸다.
“말 끊지 마세요.” “끝까지 들으세요.” “이게 재판입니까? 독재입니다.”(김경호 교수)
김 교수는 “당연히 법대로 합니다”라고 답했던 재판장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교수가 형사소송법의 법리보다는 자구와 조문에 ‘집착’했다는 비판도 있다. 법리는 법률 전문가나 법 기술자의 몫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법 조문을 지키라는 시민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은 없다. 영화 속 교수의 싸움은 증인·증거 신청이 필요 없다는 석궁 사건 항소심 재판장의 거듭된 ‘기각’ 결정에서 촉발됐다. 그 자리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안도 미루기를 반복한다. 증거조사는 기본적으로 ‘사실심’인 1심에서 이뤄진다. 항소심 역시 사실심이라는 틀 안에 있지만 재판 진행은 기본적으로 1심에서 드러나고 인정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영화에서는 항소심만 잘라서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재판은 3심제다. 재판에는 흐름이 있고 항소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사실관계의 범위라는 게 있다”고 했다. 와이셔츠의 혈흔 감정 신청을 기각하고 박홍우 부장판사를 다시 증인으로 세우지 않은 데는 영화에서 나오지 않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제출된 증거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판사와 ‘진실’을 알고 있다는 당사자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한다’고 하지만 유독 약한 고리가 있다. 재벌 등 대기업과 사학재단이다. 간혹 단호한 판결이나 의미 있는 판례가 나오기는 하지만 상급심에서 곧바로 뒤집히기 일쑤다. 수백억원대 횡령이나 배임을 저지르고도 대기업 회장들은 기껏해야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명령을 달고 나온다.
당시 항소심 재판장, “부끄럽지 않은 판결”
그러나 법관이 생각하는 이런 식의 ‘합리적 판단’은 사법 불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해 윤아무개씨는 ‘사법부를 포기했다’. 민사소송 과정에서 재판부는 윤씨에게 입증책임을 요구했지만 정작 자신이 제출한 입증자료들을 모두 배척해버렸기 때문이다. 윤씨는 소송 상대방이 인정한 자료까지도 재판부가 부인한 것을 몹시 억울해했다. 그는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졌다. 그는 “1심에서 한번 죽이고 항소심에서 확인사살했다”는 격한 표현을 썼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 사법기관이 아닌 행정기관에 불과하다”며 상고를 포기했다.
“재판의 본질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법관과 소송관계인 간의 적절한 의사소통입니다. 법관은 법정에서 성의를 다해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함은 물론, 당사자의 주장과 입증을 어떻게,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까지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사소통을 통하여 당사자를 적극 설득하고, 재판 결과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며, 법관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법관 역시 소송관계인들과 원활한 소통을 통해 자신의 오류와 편견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석궁 사건 석 달 뒤인 2007년 4월2일, 신임 법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이 한 말이다. 석궁 사건 항소심 3차 공판이 열린 날이었다. 이 대법원장은 “국민의 법관에 대한 불신이 급기야 법관에 대한 물리적 테러까지 벌어지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이같은 소통을 강조했다. 때늦은 반성일 수도, 아니면 새내기 법관들을 앞에 둔 의례적인 훈시였을 수도 있다. 대법원장의 ‘간곡한’ 요청이 있은 뒤에도 영화에 등장한 석궁 사건 항소심 재판부가 소송 당사자인 교수와의 소통에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의심스럽다. 실제 항소심 재판장을 맡았던 신태길 변호사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동료 판사의 피해에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합리’ 하나를 20년 넘게 추구했다.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라고 했다.
법관윤리강령은 ‘신속하고 능률적이면서도 충실한 재판’을 규정한다. 양립하기 힘든 조건들이지만 그 최대치를 법관에게 요구한다. 소송관계인에게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할 것도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 설명에 따르면 “소송관계인과 일반 국민은 일차적으로 법정에서 법관의 재판 진행 태도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법관의 불공정한 발언이나 태도만으로도 재판이 불공정하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니 조심하라는 취지다.
사법부의 약한 고리, 재벌과 사학재단
과거보다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체감으로 느끼는 법정 현실은 다를 수 있다. “원심이 유죄를 선고했다고 하여 선입견을 갖고 검사의 증거신청은 입증 취지도 묻지 않고 받아주면서 변호인이 제출한 증거는 모두 필요 없다면서 배척하여 사실상 심리를 거부함.” 의 한 장면이 아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 제출된 ‘2011년 법관 평가’ 자료 가운데 하나다. 어느 변호사는 증거신청을 했다가 재판장으로부터 “피고 대리인, 지금 여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참고 있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사학재단과 사법부의 짜웅.” “이거 2천만원짜리 전화다.”(영화 속 박준 변호사)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한다’고 하지만 유독 약한 고리가 있다. 재벌 등 대기업과 사학재단이다. 간혹 단호한 판결이나 의미 있는 판례가 나오기는 하지만 상급심에서 곧바로 뒤집히기 일쑤다. 수백억원대 횡령이나 배임을 저지르고도 대기업 회장들은 기껏해야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명령을 달고 나온다. 판사들은 법과 양심 이외에 “한국 경제에 대한 기여”라는 모호한 단서를 든다. 시장 질서를 황폐하게 한 이들에 대한 ‘봐주기 판결’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에도 의연하다. 지난 1월19일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담 회장은 회삿돈으로 미술품을 사들이는 등 3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됐다. “피해액 변제, 향후 윤리경영과 사회공헌활동 다짐 등 개전의 정이 보인다”는 이유로 형이 줄었다. 1심에서 인정된 사실관계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법관의 판단만 달라진 셈이다.
사학비리도 마찬가지다. 비리재단은 잘못된 법과 교육관료, 사법부가 키웠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법원은 2007년 판례를 바꿔 대표적 비리재단인 상지대 김문기 전 이사 쪽이 학교에 다시 발을 딛게 해주는 판결을 내놨다. 형식적 해임 절차 등을 근거로 사립학교에서 부당하게 해임된 이들의 손을 번번이 꺾어버린 것도 사법부였다. 김 교수가 교수지위 확인소송에서 패소한 것을 “사법부와 사학재단의 짜웅”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과거 사학재단 손을 숱하게 들어줬던 사법부에 대한 불신까지 국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힘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풀려난다는 ‘유전무죄’ 신화는 사법 불신을 떠받드는 기둥이 된다.
전관이나 로비가 통한다는 ‘불신’
또 다른 기둥은 전관예우와 법조 인맥이다. 에서 박준 변호사는 “초등학교 친구라 친하다”는 판사에게 배당된 사건을 맡기로 하고 착수금 500만원을 받는다. 잘만 되면 “2천만원”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수사 단계에서는 검찰 출신 변호사를, 기소가 돼 재판이 시작되면 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기본이다. 경찰 단계 수사에서는 경찰 출신 변호사를 붙이기도 한다. 같은 건물이나 방에서 일했거나, 사법연수원 동기이거나, 고향이 같거나, 출신 대학은 물론 출신 초·중·고교까지 찾아서 엮는다. 검사는 검사가 알고, 판사는 판사가 잘 안다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판단을 받아낼 수 있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2010년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2005년 이후 법원을 떠난 퇴직 판사 520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273명이 로펌행을 택했다. 이 가운데 김앤장·광장·태평양 등 상위 10대 로펌으로 자리를 옮긴 판사는 168명이었다. 양질의 법률 서비스라는 측면에서 법관들의 로펌행을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대형 로펌들이다 보니 일반인들보다는 대기업·재력가 등과 관련한 송무·자문 일을 주로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이용훈 대법원장, 이홍훈·박시환·김지형·김영란 대법관이 퇴임 뒤 변호사 개업이나 로펌행 대신 강단 등을 택하기는 했지만, 현직에서 물러난 고위 법관들이 거액을 받고 대형 로펌으로 옮겨가는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2005년 이후로 사법부 최고 수장인 대법원장을 포함해 퇴임 대법관 9명이 로펌에 들어갔다. 서울 서초동의 한 법조인은 “재판 결과를 뒤집는 식의 전관예우는 이제 없다”고 말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전관이나 로비는 통한다’는 일반인들의 ‘사법 불신’은 도처에 만연하다. 지난 1월26일 대법원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판검사에게 로비를 해 구속 피고인을 석방시켜주겠다고 속여 피고인 가족에게서 6억원을 가로챈 장아무개 변호사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법조계 전반에 국민의 불신을 야기했다”고 설명했다. 불신 제공자는 누구일까.


»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사법부는 “법관도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 법관은 신과 같은 ‘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전치 3주에 징역 4년은 과했다”
“판단은 재판장이 합니다.”(박봉주 판사)
지난 1월19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대법관 13명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합의체 선고가 있었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의 자리가 간만에 꽉 찼다. 국회 동의가 늦어져 대법관 자리 두 석이 한동안 공석이었는데, 최근 김용덕·박보영 대법관이 뒤늦게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대법관석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오른쪽에서 네 번째, 신영철 대법관의 자리다. 대법관이 되기 전, 그러니까 서울중앙지법원장으로 있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사건의 재판을 맡은 판사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났다. 어영부영 대법관 자리를 보전하기는 했지만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사법부 독립을 믿고자 하는 ‘소박한 기대’는 뿌리부터 흔들렸다. “재판을 윗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하는군요?” 부장판사 출신으로 오래전부터 사법개혁을 주장해온 문흥수 변호사는 자신의 책 에서 신 대법관 사건 직후 사건 의뢰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썼다. 법관의 신분은 법으로 보장된다. 권력에 흔들리지 말고 제대로 재판하라는 취지인데, 이는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스스로 물러나지 않고 버틴 신 대법관을 내칠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고 해도, 신 대법관 사건은 사법부가 사법부 스스로를 ‘징치’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피해자가 고법부장이었던 석궁 사건에서도 사법부는 사법부 스스로를 다루는 데 미숙함을 드러냈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중론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당시에는 아직 국민참여재판 제도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지금이었다면 국민참여재판으로 석궁 사건을 다뤘을 것이다. 사법부가 사법부를 판단하는 문제는 조심했어야 한다. 당시에도 좀더 세심하게 재판을 진행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김 교수에게 확정된 징역 4년도 ‘감히’ 사법부를 공격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 부장판사는 “사법 테러라는 점에서 사안이 심각하긴 하지만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전치 3주에 징역을 4년이나 때린 것은 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지난 1월26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게 벌금 3천만원을 선고한 김형두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집 앞으로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려가 “법복을 벗겨라”는 현수막을 들고 집으로 달걀을 던졌다. “국민 저항권 차원”이었다는 석궁도, 이념에 따른 달걀 세례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김일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은 “이른바 ‘분노사회’에서 대중이 찾는 분노의 대상은 MB가 될 수도, 검찰이 될 수도 있다. 이번에는 사법부 차례”라고 했다. 그는 “사법부의 권위도 신성한 법전 속에서 세속의 차원으로 내려왔다고 봐야 한다. 공정성을 통해 국민을 설득하고 섬기지 않으면 권위를 확립하기 어렵게 됐다”며 “한 개인, 하나의 사건에서는 억울할 수 있겠지만 사법은 사회질서를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메커니즘이다.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켜야 한다”고 했다.
김일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은 “이른바 ‘분노사회’에서 대중이 찾는 분노의 대상은 MB가 될 수도, 검찰이 될 수도 있다. 이번에는 사법부 차례”라고 했다. 그는 “사법부의 권위도 신성한 법전 속에서 세속의 차원으로 내려왔다고 봐야 한다. 공정성을 통해 국민을 설득하고 섬기지 않으면 권위를 확립하기 어렵게 됐다”고 했다.
당신이 심판받기 원하는 방법으로 심판하라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법조일원화, 양형기준 마련, 지법-고법판사 이원화 등을 통해 사법개혁 요구에 응해온 대법원은 최근 전관예우를 막으려고 평생법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은 결국 국민과의 소통, 교감의 문제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1월27일 오후 법원행정처장 명의로 김형두 부장판사에 대한 보수단체 회원들의 집단행동 및 영화 과 관련한 공식 견해를 한데 묶어 발표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재판 당사자가 재판장에게 가한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이러한 사태는 재판의 독립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특히 해당 영화는 기본적으로 흥행을 염두에 둔 예술적 허구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법 테러를 미화하고 근거 없는 사법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어서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화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차마 못하고 있었는데 뺨 때려줘서 고맙다는 꼴이다.
일본 법정영화 (2006)는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인권법)의 말을 빌리면 “교과서 같은 영화”다. 억울한 피고인이 나오고 판사는 증거신청을 기각한다. 사법 피해자들이 등장하고 피고인의 주변인들은 어느덧 형소법 절차 전문가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부디 당신이 심판받기를 원하는 그 방법으로 나를 심판해주시기를.”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