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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4일 일요일

'천안함재조사' 민주당, 3년만에 "폭침" 커밍아웃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3-03-23일자 기사 ''천안함재조사' 민주당, 3년만에 "폭침" 커밍아웃'을 퍼왔습니다.
[천안함 침몰 3주기 기획]쏟아진 의문 있어도 의혹 해소 노력 없어… “집단지성이 나서 진상규명 필요”

천안함 침몰 사건은 오는 26일로 사고발생 3주기를 맞이한다. 지난 3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정부의 입장은 진상조사단의 북한 어뢰에 의한 ‘폭침’이라는 발표 이후 그 어떤 의문이 제기돼도 요지부동이다. 정부는 지난 3년간 해마다 기념식을 개최하고 ‘북한’을 규탄해오고 있다. 북한 역시 천안함 사건은 남한 정부에 의한 날조극이라고 주장해왔다. 남북한 당국 모두 천안함 사건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며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3년이 지나고 새정부가 들어선 지금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변화는 진실규명을 위해 국정조사 또는 재조사를 촉구하던 민주통합당의 입장이다. 지난해 총선·대선을 거치면서 국민들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없이 슬그머니 ‘폭침’으로 입장을 바꿨다.
박근혜 정권이 시작된 지금 시점에도 민주당이 바라보는 천안함 사고경위는 북한 어뢰에 의한 ‘폭침’으로 굳혀가고 있는 모양새다. 대선의 패배와 함께 제1야당의 입에서도 더 이상 합리적 의심조차 숨어버린 정치환경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조사결과를 발표한 이후 쏟아진 의혹이 여전히 해소돼 못했으며, 법정에서의 진실규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과 언론, 학자 그룹이 진실을 밝히는 데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문재인 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지난해 10월 오전 평택 해군 2함대에 거치된 천안함을 방문해 헌화한뒤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통합당 “국정조사·재조사→침묵→폭침”=“이명박 정부가 안보를 강조하지만 실제로 보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안보에 구멍이 뚫렸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해 12월 5일 TV토론에 나와 ‘천안함 폭침을 침몰이라 한다’는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의 비난에 이같이 답변했다. 민주당에서 천안함을 ‘폭침’으로 규정하고 공식 브리핑에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 26일 진성준 당시 문재인 캠프 대변인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피격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으로”라며 이명박 정부의 안보무능을 질타하면서였다. 이후 민주당은 박용진 대변인(11월 22일) 진성준 대변인(11월 27일, 12월 9일), 김관영 의원(12월 4일), 박광온 캠프 대변인 및 김혁 부대변인(12월 13일), 정세균 상임고문(12월 14일) 등이 대선을 앞두고 브리핑 및 원내대책회의, 논평을 통해 천안함 사건을 ‘폭침’으로 표현했다. 문 전 후보 역시 11월 28일 대전역앞 유세, 12월 13일 방송연설, 12월 18일 기자회견에서 천안함 폭침이라고 언급했다. 
새누리당에서 문제를 삼자 박용진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4일 “2010년 5월 20일 정부조사결과 발표 다음날 박지원 원내대표가 ‘정부 발표대로 북한 소행이라면 북한도 국제사회에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동영 공동선대위원장도 ‘북한이 국제사회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는 정상국가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국제사회와 전문가들은  여전히 정부발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민주당은 ‘정부 발표를 믿겠다, 다만 이런 의혹에 대해 차근히 해명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박 대변인이 말할 당시까지도 정부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해명은 하지 않고 조사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국민들을 향해 수차례 비난을 가했다.
민주당의 이 같은 태도변화는 일종의 ‘커밍아웃’이라 할 만하다는 지적이다. 천안함 사건 발생 이후 가장 적극적인 진실규명에 나섰던 집단 가운데 하나는 민주당이었기 때문이다. “천안함 특위활동 연장과 국정조사 요구를 한나라당이 무시했다”(홍영표 의원 2010년 9월 3일), “특위 재가동을 강력히 촉구한다”(박영선 최고위원 9월 13일), “정부는 수많은 의혹에 대해 설득력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이춘석 당시 대변인, 2011년 3월 26일 천안함 2주기 논평) 등의 표현이 공식적으로 나온 목소리였다.
이랬던 민주당이 천안함 사고원인에 대한 입장을 바꾼 배경에는 선거일정이 크게 작용됐다. 1주기까지만 해도 소리높여 의혹을 제기했던 민주당이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천안함 3주기 때부터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심지어 이해찬 상임고문이 민주당 총선공약 발표 기자회견에서 “천안함 정부발표를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언급하자 이용섭 의원이 황급히 말을 막았던 일도 연출됐다. 천안함 정부조사에 확신하지는 못하겠다고 했던 조용환 변호사가 헌법재판관에서 낙마한 문제도 민주당의 입장변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조사 뒤집을 만한 근거가 없다?=이처럼 입장이 변한 이유에 대해 민주당에서는 정부발표를 뒤집을 만한 근거가 없다고 해명했다. 천안함 사건이 터진 이후 천안함 진상조사특별위원회 민주당 간사를 맡았던 홍영표 의원은 19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국민들의 의혹 제기에 정부가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미흡함은 남아있지만, 정부 발표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정부 발표를 뒤엎을 만한 증거나 명백한 과학적 근거가 필요한데, 그것 없이 계속 이끌고 가긴 어렵다”고 밝혔다. 과거 요구했던 천안함 재조사에 대해서도 홍 의원은 “새로운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현재로서 재조사 요구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최근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천안함 사건을 아예 ‘폭침’으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의 각종 논평과 브리핑, 국방부장관 인사청문회, 박기춘 원내대표 발언 등에서는 이미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시켰다는 정부발표가 기정사실로 굳혀져 있다.

▷“납득할 설명없이 입장돌변, 무책임”=문제는 왜 이렇게 입장이 변했는지에 대해 국민들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는 데에 있다. 특히 3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조단 민간위원(현 서프라이즈 대표)의 명예훼손 관련 재판에서 군 조사 때와 다른 증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직전까지 쏟아진 의문점 만으로도 정부 조사결과의 신뢰도가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고위치 문제, 존재하지 않은 물기둥, 1번 어뢰 설계도 조작, 온전한 시신의 상태, 흡착물질 데이터 조작의혹, 폭발흔적 없는 선체, 파편조각 한 점도 못찾은 것, 1번 글씨에 쓰인 잉크 한국에서도 생산 등 의혹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조차 정부의 최종조사결과 보고서가 발표된 다음날인 2010년 9월 14일자 사설에서 “천안함 특위 재가동과 재조사 실시도 고려해볼 만 하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천안함 언론검증위원회 책임연구위원을 맡았던 노종면 전 YTN 노조위원장은 19일 “민주당은 천안함 침몰의 진실에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했던 정치집단이었는데 이제 와서 ‘이를 뒤엎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의지가 없는 것”이라며 “차라리 조사활동을 제대로 못한데다 국민여론을 의식했다고 얘기하는 편이 솔직하다”고 지적했다. 노 전 위원장은 “이미 2010년 당시 정부조사결과의 모든 논리가 다 깨졌는데 책임 있는 공당이 이것도 판단할 능력이 없겠느냐”며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특위 위원과 함께 백령도 사고해역 공동조사를 했던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도 이날 “민주당이 어떻게 천안함 사건을 폭침이라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지 놀랍다”며 “지금 야당은 너무나 무력하고 제1야당으로서의 위상에 걸맞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집단지성이 나서야”=천안함이 침몰된지 3년이 흐르면서 이처럼 민주당조차도 스스로 위축되고 자기검열하는 처지에 놓인 정치환경에서도 집단지성의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는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다. 노종면 전 위원장은 “정부가 아직 문제가 많은 조사결과를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면적인 재조사는 불가피하다”며 “원인이 뭔지 단정할 수 없어도 잘못된 근거는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어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지성과 양심의  문제”라며 “근거를 보지 못하면서 믿기만 해서는 안된다. 우리사회 집단지성인 언론과 정치인, 학자들이 규명 노력을 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안함 사건, 3년동안 책임진 사람 한 명도 없어 

젊은 장병 46명 희생… 원인 문제 의혹들 남긴 채 3년 흘러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젊은 해군 장병 46명이 희생된지 3년을 맞았으나 사건의 원인 문제 뿐 아니라 그 책임자에 대한 추궁조차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지난 2010년 감사원의 천안함 직무감사결과 징계통보 및 사법처리 권고를 받은 이들에 대해 모두 면죄부가 주어졌다. 군검찰 내사결과 4명이 입건됐으나 최종 수사결과에서 군검찰은 최종적으로 군의 사기를 고려해 불기소했다. 당시 지휘라인에 있던 인물 가운데 징계대상자도 9명으로 줄었으나 당사자가 모두 불복해 실제 징계를 받은 이는 김동식  전 2함대사령관(정직3월), 박정화 전 해군작전사령관(감봉) 정도만 감봉 이상의 징계를 받았을 뿐, 박동선 전 2함대사령부 작전참모(견책), 이원보 2함대 22전대장(근신) 등은 징계가 감경됐다. 나머지 4명은 모두 징계가 취소됐다.

특히 김학주 당시 합참 작전참모부장은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김동식 소장은 정직 3월을 받은 뒤 해작서 부사령관 보직을 받았다. 징계대상이었던 김기수 합참 전력기획본부장은 전역했다가 다시 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장으로 복귀해 현재까지 재임하고 있다.

기자들에 당시 상황 설명을 했던 이기식 전 합참 정보작전처장은 징계대상으로 분류됐으나 소장으로 진급해 지난해 10월 말까지 2함대사령관을 맡았다. 이밖에 류제승, 최병로, 전병훈  등 당시 징계가 취소된 장성들도 모두 일계급씩 진급했다.

이를 두고 홍영표 민주당 의원은 19일 “사고원인 뿐 아니라 군의 사고 대처능력과 후속조치 등 모든 부분에 대해 군의 무능함이 드러났는데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으며, 책임조차 진 사람이 없었다”며 “진급까지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반해 천안함 침몰원인에 의혹을 제기했던 민간인이자 조사과정에 참여했던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군 명예훼손으로 기소돼 3년 가까이 재판을 받고 있다. 신 대표를 비롯한 변호인단은 오히려 정부와 정치권, 언론에서 하지 않는 천안함 진실규명을 법정에서 벌이겠다며 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다. 핵심증인이 출석한 지난 2011년 7월부터 열린 공판에서는 △천안함 초기보고상황의 의문(사고직후 해경, 해작사, 합참 모두 좌초 보고) △천안함 사고해역 수심이 정부발표와 다르다는 천안함 장교들의 증언(천안함장, 작전관) △천안함 최종보고서에 실린 CCTV 장면에 생존자가 등장한다는 사실 △사고직전 CCTV 영상에서 아무런 흔들림없이 운동하던 장병 모습이 등장하는 내용 등 그동안 정부가 발표한 내용과 상이한 증언들이 나왔다. 

천안함 재판은 대선 이후 한차례 개최됐으나 증인 불참으로 새정부 하에서 본격 진실규명이 시작되지는 않았다. 다음 공판은 4월중에 열릴 예정이다.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장준하 의문사 진상규명을 두려워하는 보수언론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10-24일자 기사 '장준하 의문사 진상규명을 두려워하는 보수언론'을 퍼왔습니다.
[장행훈 칼럼] '박정희에 의한 타살' 동의하기 싫은가? 그건 오만이자 독단

지난 8월15일자 한겨레신문에서 37년 만에 처음으로 장준하 선생에 대한 검시가 이뤄졌고 그 결과 머리 뒤쪽에 인위적인 상처로 보이는 6cm 크기의 구멍과 머리뼈 금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고 마음이 착잡했다. 역시 장준하 선생은 추락사 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생각을 회상했다. 그러나 아직 의문사의 의혹이 깨끗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앞으로의 숙제다.

한겨레에 이어 경향신문이 장준하 의문사의 의혹을 상기시키고 그 진상 규명의 필요성을 제기했을 때 곧 모든 언론이 장준하 사망의 의혹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겠구나 하는 기대가 부풀었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주투사이며 민족의 지도자인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원인을 규명하고 배후를 찾아내 고인의 신원(伸寃)을 풀어드리는 것이 살아남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라고 모두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산이었다.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의 방송 모니터에 의하면 한겨레가 장준하 선생의 유골 검시 사실을 보도한 다음날 16일까지 “방송3사는 ‘장준하 의문사’와 관련한 사실을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민언련 모니터는 “이날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유해 사진, 검시 소견 등 구체적인 근거를 내놓은 데 이어, 야권에서도 진상조사위를 구성하겠다는 입장을 냈는데도 방송 3사가 보도하지 않은 것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언론 본연의 임무를 망각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고 논평했다.

민언련의 지난 8월 17일자 신문 모니터에 의하면 "조선일보는 보도하는 시늉을 내는 데 그쳤다. 17일 12면 하단 오른쪽에 2단기사로 를 내놨다... 기념사업회 등이 제기한 타살 의혹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민주통합당의 ‘공세’로 몰았다. 

17일 는 “민주통합당은 장준하 선생의 타살의혹이 다시 불거진 것을 계기로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에 대한 공세를 펼쳤다”면서 “박정희 정권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박 의원은 즉각 석고대죄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라”는 등 민주통합당 대선 주자들의 발언을 나열했다.

간단히 말해서 조중동과 방송 3사는 “장준하 의문사”가 언론에 쟁점화되면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기에 묵살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장준하 의문사의 배후에 박정희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국민의 인식이기 때문에 대선 정국에서 민감한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언론으로서도 신중히 다뤄야 할 문제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대선에서 어느 한쪽에 불리할 수 있는 문제는 언론에 보도해서는 안 되는가? 새누리당은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노무현-김정일 비밀대화록을  들먹이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우리의 NLL 관할권을 포기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고 있는데 조중동은 새누리당의 입장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인상이다. 

조중동이 문재인 후보는 공격하고 박근혜후보에게는 호의적이고 편파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특정 후보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대다수 국민이 존중하는 장준하선생의 의문사 규명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만약 보수언론과 방송이 장준하 의문사를 무시하는 동기가 장준하의 사인이 (박정희의)에 의한 타살이 라는 의혹에 동의할 수 없어 그런 것이라면 다수 국민이 박정희 정권의 타살로 보고 있는 사건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독단이며 오만이다. 아니면  이들 신문 방송이 박정희에 대해서 품고 있는 편파적인 지지 성향을 지면과 전파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언론은 보도 뿐 아니라 보도하지 않는 행동으로 그들의 호불호(好不好)를 나타낸다.

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유신정권 치하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과 배후를 규명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족들도 고인의 부검을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장준하 의문사의 진상 규명 정도는 가능한 사회가 됐다. 장준하는 일생을 조국의 광복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애국자다. 그런 애국자가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 출신,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말살한 독재자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비극의 배후를 규명하지 않고 방관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용인하지 않는다. 박정희가 장준하를 타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박정희의 명예를 위해서도 의문사의 원인 규명은 필요하다. 장준하의 피살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진상규명이 불가결하다. 조중동이나 방송도 이 사실을 규명하자는데는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 hap36jang@hanmail.net 

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쌍용차 생산설비가 고철덩어리라니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0-20일자 기사 '쌍용차 생산설비가 고철덩어리라니'를 퍼왔습니다.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은 “쌍용차 정리해고는 회계부정을 통해 기획된 것이었으며, 정부는 이를 알고도 묵과했다”는 연구보고서를 지난 5월에 발표했다. 지난 9월20일 국회 쌍용차 청문회에서 그의 주장에 상당한 근거가 있음이 드러났다. 박승화 기자

‘기획부도’ 밝혀낸 보고서 쓴 노동자운동연구소의 한지원 연구실장 
“국정조사로 진상규명해 책임자 처벌해야” 

23번째 죽음이 끝내 찾아왔다. 10월8일 새벽 4시, 2009년 5월 쌍용자동차를 희망퇴직한 한아무개(55)씨가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숨졌다.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18년간 일하던 그는 해고 대상자 명단에 올라가자 스스로 퇴직했다. 한씨의 형과 동생도 같은 길을 걸었다. 형은 2005년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인수한 직후에, 동생은 한씨와 함께 쌍용차를 떠났다. 2009년 쌍용차가 노동자 2646명을 공장 밖으로 쫓아낸 뒤 그 노동자와 가족들의 죽음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은 “또다시 상복 입고 살아가기가 너무나 버겁다”며 지난 10월10일부터 단식을 시작했다. “국회 쌍용차 청문회는 추악한 외투를 걸친 쌍용차 자본의 첫 단추만 벗겼을 뿐이다. 이제 국정조사는 늦출 수 없는 문제다. 노동 문제와 일자리 문제의 압축판인 쌍용차 문제야말로 지금 정치가 필요한 곳이며, 해결해야 할 정치 사안이다.”

“당기순손실 7097억원이 탁 걸렸다”

지난 9월2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열린 ‘쌍용차 청문회’로 국정조사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대주주였던 상하이차가 기술 유출 뒤 자본을 철수할 수 있도록 쌍용차가 회계를 조작해 기획 부도를 냈다는 점을 여야 의원 가릴 것 없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노동자운동연구소가 지난 5월에 발표한 연구보고서 덕분이었다. ‘22명을 죽음으로 내몬 회계부정과 기획된 정리해고’(부제: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의 원상회복을 위한 보고서). 이 보고서를 작성한 한지원(35) 연구실장은 “쌍용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는 회계조작을 통해 기획된 것이었으며, 정부는 이를 알고도 묵과했다”고 당시 주장했다. 쌍용차 청문회에서 한 연구실장의 주장은 상당히 근거가 있음이 밝혀졌다.

보고서는 어떻게 쓰게 됐는가.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로 GM대우 등 초국적 기업 문제를 다뤄왔다. 2009년 쌍용차 해고 사태 때 금속노조가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하며 쌍용차 회계자료를 봤다. 언뜻 보는데 당기순손실 7097억원이 탁 걸렸다. 글로벌 금융위기라지만 너무 심하다 싶었다. 그 뒤 쌍용차 지부에서 끊임없이 회계조작 문제를 제기해왔다. 하지만 회계가 워낙 어려운 문제인데다 단발성 이슈로 끝나니까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지난 3월 서울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에 찾아갔다가 시작부터 끝까지 파헤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맥락을 보여주는 보고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조합원들은 투쟁하느라 바쁘고, 회계자료를 다루는 데 익숙지 않으니까. 3년간 쌓여 있던 수천 장의 자료를 2개월간 팠다.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한지원 연구실장은 사회진보연대 노동국장을 거쳐 2010년부터 노동자운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의 뿌리는 기업의 회계·경영문제·구조조정 등을 10여 년간 다뤄온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다.

회계조작이 자주 발생하는가.

공장에서 노동자가 느끼는 게 있다. 물량이 넘쳐 야근을 많이 하면 ‘회사가 잘 돌아가는구나’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경우 회계자료에 그 이유가 나타난다. 노동자가 느끼는 것을 생산, 수입, 자본, 부채 등으로 표현했을 뿐이니까. 문제는 회사가 얼마든지 꼼수를 부릴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4대 회계법인이 시장의 90%를 차지한다. 이들은 회사와 공모해서 회계기준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회사의 입맛에 맞도록 잔꾀를 낸다. 한국 회계기준이 워낙 엉성하기 때문이다.

렉스턴 등 모두 단종한다며 사용가치 감액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가 발생하기 6개월 전인, 2008년 말 쌍용차의 부채비율은 168%에서 561%로 급등했다. 쌍용차의 의뢰를 받은 안진회계법인이 갑자기 쌍용차의 건물·기계장치 등 유형자산 평가액을 전년보다 5177억원이나 감액했기 때문이다. 유형자산 평가액은 1조3346억원에서 8678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쌍용차의 회계조작은 어떻게 이뤄졌나.

크게 두 가지 단계다. 첫째, 순매각가를 무시했다. 기업회계기준에는 유형자산을 평가할 때 그 자산을 이용해 벌어들일 수 있는 미래의 현금(사용가치)과 그 자산을 매각해 벌 수 있는 현금(순매각가) 중 큰 액수를 사용하도록 돼 있다. 통상 순매각가는 한국감정원의 감정가액을, 사용가치는 회사가 예상하는 미래 매출액과 비용을 사용한다. 그런데 안진회계법인은 쌍용차의 생산설비는 매각시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기에 굳이 계산할 필요가 없다며 0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2009년 3월 한국감정평가원 보고서를 보면, 유형자산 감정액이 6700억원에 이른다. (쌍용차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최종석 회계사는 “생산설비를 고철로 평가하는 순간 계속기업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이렇게 상대적으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순매각가를 0원으로 가정한 뒤 둘째 단계에 들어갔다. 회사 경영진의 재량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리고 줄일 수 있는 사용가치를 마구잡이로 감액한 것이다. 우선 액티언·카이런·렉스턴 등의 차종을 2010년 12월까지 모두 단종한다는 계획을 세워서 미래에 벌 수 있는 돈을 대폭 줄였다. 그러나 이 차종들은 현재도 생산되고 있다. 이런 회계부정이 없었다면 2009년 쌍용차의 재무구조는 우리가 알던 것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더 큰 부정은 그다음이다.

2646명의 해고로 이어졌다.

구조조정안은 또 다른 회계법인인 삼정KPMG가 만들었는데, 그 과정이 어처구니가 없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생산 부분 ‘잉여 인력’(2185명)은 쌍용차의 생산성지수(HPV·차 1대를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를 동종 업체와 비교해 산정됐다. 삼정은 HPV의 출처를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성 비교 보고서인 ‘하버리포트’라고 밝혔는데, 사실은 쌍용차가 건넨 지수라는 게 청문회에서 드러났다. 게다가 김경협 민주통합당 의원이 추가 확인해보니, 쌍용차는 2009년 당시에는 물론 현재도 HPV를 아예 관리하지 않고 있었다. 맨아워지수(M/Hㆍ1시간 동안 차 생산에 투입된 사람 수)를 HPV로 둔갑시켰고, 삼정이 이를 토대로 2646명을 해고하는 구조조정안을 완성한 것이다. 한국의 정리해고 제도가 얼마나 사용자에 의해 막무가내로 악용될 수 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쌍용차 자료를 ‘하버리포트’라 거짓 주장앞으로 해결 방안은.

쌍용차 사태는 2009년 공장 밖으로 내밀린 정리해고자, 무급휴직자만의 일이 아니다. 외국인 투자자의 ‘먹튀’로 인한 피해를 정부와 자본이 어떻게 노동자에게 떠넘기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일 뿐이다. 오늘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쌍용차를 인수한 인도 마힌드라도, 상하이차처럼 인수대금 이외에는 한국에 1원도 투자하지 않은 채 쌍용차 기술만 공유하고 있다. 국회 국정조사를 통해 쌍용차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개선해나갈 수 있다. 이것이 대선 후보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경제민주화의 첫걸음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2012년 10월 8일 월요일

“장준하 의문사 진상규명 없이 과거사 사과 명분 없다”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10-07일자 기사 '“장준하 의문사 진상규명 없이 과거사 사과 명분 없다”'를 퍼왔습니다.
장준하 선생 천도재 열려...참가자들 “진상규명 꼭 해야”

ⓒ양지웅 기자 6일 오후 경기도 포천 약사계곡 고 장준하 선생 의문사로 발견되었던 현장에서 '고 장준하 선생 천도재 및 의문사 진상 규명 촉구 법회' 참가자들이 추모재를 올리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를 발전한다는 명분으로 한일 역사문제를 팔아 먹었다. 박근혜 후보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로 가자고 한다. 그들의 논리라면 우리는 일본의 만행에 대해 입도 뻥긋할 수 없고 일본에게 배상하라는 소리도 못한다. 잘못한 사람들이 와서 무릎꿇고 용서를 구해야 피해자도 용서해 줄수 있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진실은 감출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명진 스님

2012년 10월 6일. 37년 전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를 당했던 곳과 불과 3km가량 떨어진 포천시 백운산 흥룡사에서 장 선생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천도재가 열렸다. 

천도재는 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불교의식이지만, 정작 이날 흥룡사에 모인 400여명의 참가자들은 평생 동안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장 선생의 정신을 더 뚜렷하게 가슴에 새기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양지웅 기자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 씨가 6일 오전 경기도 포천 백운산 흥룡사에서 열린 '고 장준하 선생 천도재 및 의문사 진상 규명 촉구 법회'에서 유족 인사말을 하고 있다.

같은 시대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았던 장준하와 박정희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씨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아버지의 넋을 편안하게 해드리려고 오신 점에 대해 너무 감사하다”면서도 “아직 아버지는 할 일이 남아 있으시기 때문에 당분간 이승에 머물고 계실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대선에서 국민들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아버지도 그 때서야 편안하게 쉬실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는 추도사를 통해 “일제의 악재가 극에 달았을 때 이 땅의 한 젊은이는 혈서를 쓰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다른 젊은이는 강제징병으로 끌려갔지만 탈출해 조국회복을 위한 광복군이 됐다”며 “장준하 선생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너무나 달랐던 선택이 우리 근대사를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 땅의 진정한 화해와 통합을 위해서는 진상규명이 돼야 한다”며 “장준하 선생님께서 국민들 앞에 구멍 뚫린 백골을 보여 준 것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라는 계시”라고 주장했다. 

ⓒ양지웅 기자 명진스님이 6일 오전 경기도 포천 백운산 흥룡사에서 열린 '고 장준하 선생 천도재 및 의문사 진상 규명 촉구 법회'에서 장준하 선생의 제단에 분향하고 있다.

“장준하 의문사 관련 보고서는 70년 비공개”

이날 천도재 참가자들은 장준하 선생에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03~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이었던 고상만 씨는 “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님 의문사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이라고 결정한 것은 결코 실족사를 인정한 것이 아니다”라며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차후 조사를 위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씨에 따르면 진상규명위원회는 7명의 표결로 인해 결과가 결정된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의 경우 4명이 ‘진상규명 불능’에 손을 들었고, 3명이 인용(공권력에 의한 타살을 인정)에 손을 들어 결국 ‘진상규명 불능’이 됐던 것. 이후 진실화해위원회의 추가조사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진상조사 불능 결과를 내렸다는 것이 고씨의 설명이다. 

고씨는 또 “조사를 하는 동안 당시 조난자료 등을 해당 부서로부터 협조받지 못했다”며 “왜 이 사건이 벌어졌고 어떤 경위로 진행 됐는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통합당 임수경 의원 역시 “국정감사에서 고상만 전 조사관을 비롯해 유족들과 김용환(장준하 선생 시체 최초 목격자)씨를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새누리당 의원들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며 “장준하 선생님 의문사에 대해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특별기구 설치와 특별법을 만들어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설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양지웅 기자 고상만 전 장준하의문사위원회 담당조사관과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등이 6일 오후 경기도 포천 약사계곡에서 고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로 발견되었던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이곳은 지난 1975년 추락사고를 당한 고 장준하 선생을 목격자 김용환 씨가 발견한 곳 알려져 있다.

“현장 와보니 타살이라는 확신이 든다”

점심 공양을 마친 참가자들이 발걸음을 분주하게 옮긴 곳은 바로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백운산 약사계곡이었다. 약사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은 밧줄에 의지해 지나가야 할 정도로 좁고 험난했다.

30여분의 산행길 끝에 마침내 장준하 선생의 시체가 놓여져 있던 바위가 눈 앞에 나타났고, 그 옆에는 ‘장준하 선생님 원통히 숨지다’라는 나무 푯말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고상무씨는 “장 선생의 시신을 최초로 목격했다는 김용환씨의 주장과는 달리 저는 장 선생이 산행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며 “장 선생이 일행들과 헤어진 시간이 낮 12시였고 시체로 발견된 시간이 오후 1시였는데, 당시 몸이 좋지 않았던 장 선생이 1시간 만에 군인 2명과 샌드위치를 먹고 정상에 도착했다가 등산로도 아닌 곳으로 내려오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전문산악인도 시험을 해봤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명진 스님 역시 “이 현장에 와보니 타살이라는 확신이 든다”며 “장 선생님이 우리에게 진실을 밝히라는 역사적 소명을 짊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행정안전부는 지난 4일 유족들이 요청한 장준하 의문사 재조사에 대해 "재조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가진 기구가 없다" 며 재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양지웅 기자 명진 스님이 6일 오후 경기도 포천 약사계곡의 고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로 발견되었던 현장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이 6일 오후 경기도 포천 약사계곡의 고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로 발견되었던 현장에서 장준하 선생을 추모하며 제단에 술을 올리고 있다.

ⓒ양지웅 기자 장준하 선생의 장남이 장호권 씨가 6일 오전 경기도 포천 백운산 흥룡사에서 열린 '고 장준하 선생 천도재 및 의문사 진상 규명 촉구 법회'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양지웅 기자 고상만 전 장준하의문사위원회 담당조사관이 6일 오전 경기도 포천 백운산 흥룡사에서 열린 '고 장준하 선생 천도재 및 의문사 진상 규명 촉구 법회'에서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에 대한 진사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김대현 기자 kdh@vop.co.kr

2012년 8월 31일 금요일

[사설] 새누리당, ‘내곡동 특검’ 하지 말자는 것인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8-30일자 기사 '[사설] 새누리당, ‘내곡동 특검’ 하지 말자는 것인가'를 퍼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터 구입 의혹은 우리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다. 현직 대통령이 부정비리 의혹의 피의자 신분이 된 것 자체가 검찰 수사로는 진상규명을 기대할 수 없는 숙명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여야가 어렵사리 도입한 특별검사 법안마저 새누리당의 약속 파기로 물건너갈 상황에 처했다.새누리당의 법사위 간사인 권성동 의원이 앞장서 제기하는 주장의 요체는 ‘민주당이 특검 후보의 추천권을 행사하는 것은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야당에 특검 후보 추천권을 줘서는 특검의 정치적 중립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이는 마치 고발인이 검사를 마음대로 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법리적·현실적 측면에서 허점투성이다.첫째, 특검의 수사 대상이 현직 대통령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수사의 중립성 원칙을 굳이 따진다면 ‘피의자’인 이 대통령이 특검 임명권을 행사하는 것부터가 난센스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특검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아도 국민적 신뢰를 받기 어렵다. 그나마 야당이 특검 후보자를 추천하게 되면 수사의 독립성이나 공정성에 대한 기대를 하게 하는 보완 효과가 있다. 특검의 자격도 정치권에 몸담은 적이 없는 사람으로 국한했고, 특검 후보를 복수로 추천해 대통령이 한 명을 선택하게 했다.둘째, 특검 제도의 삼권분립 위배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이 위헌 문제를 들고나온 것은 특검을 무산시키기 위한 트집잡기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사실 특별검사가 임명돼도 실제로 수사로 진행하는 사람들은 기존 검찰에서 파견되는 검사와 수사관들이다. 현 정권 들어 검찰의 태도를 볼 때 이들이 제대로 수사를 할지도 의문인 상황에서 정치적 편향성을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셋째, 여야의 정치적 합의를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겉으로는 특검법안의 표류 원인을 권 의원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내심 권 의원을 은근히 응원하는 모습이다. 엄청난 폭발성을 안고 있는 내곡동 사건의 특검 수사 결과가 자칫 박근혜 후보의 대선 가도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음을 우려하는 태도가 역력하다. 지금의 새누리당 분위기에서 지도부가 마음만 먹으면 권 의원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권 의원 등 뒤에 숨어 특검을 피할 궁리를 하지 말고 여야 합의를 지키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2012년 8월 25일 토요일

[심층인터뷰]고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씨 “밤에 몰래 쌀·김치 넣어준 걸로 끼니 해결… 이사만 30차례 넘어”


이글은 경향신문 2012-08-25일자 기사 '[심층인터뷰]고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씨 “밤에 몰래 쌀·김치 넣어준 걸로 끼니 해결… 이사만 30차례 넘어”'를 퍼왔습니다.

지난 21일 오후 4시30분 김희숙씨(86)가 살고 있는 서울 일원동의 임대아파트를 찾았다. 맨 꼭대기 18층에 있는 집은 방충망이 쳐져 있고 문은 열려 있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바람길을 터놓은 것이다. 오면서 본 옆집도 그 옆집도 문이 열려 있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20만원. 22평의 허름한 아파트에는 방 2개와 화장실이 있었다. 작은 거실에 오래 쓴 듯한 식탁과 세간 몇 가지가 보였다. 2인용 소파에 앉았다. 거실 맞은편 벽에 장준하 선생(1918~1975)의 생전 사진을 담은 액자와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돌아가신 후 매일 기도했어요.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신께 빌고 또 빌었지요. 이렇게 남편의 유골에서 타살의 결정적 단서가 나왔다니,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 싶어요. 37년의 모진 세월이 바로 엊그제 같아요.”

남몰래 삭였던 피울음과 신산했던 삶이 주마등처럼 스친 것일까.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부인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1일 파주 통일동산으로 이장하며 검안한 남편 유골에서 지름 6~7㎝의 원형 상흔이 발견된 흥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추락사했다는 남편의 유골에서 새롭게 타살 정황이 공개된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씨가 지난 21일 서울 일원동 자택에서 37년 전 남편이 의문 속에 죽고 3남2녀와 함께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회상하다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어린 막내가 배고프고 힘들다고 할 때아버지가 큰 유산 남겼다고 하면그 유산 지금 먹으면 안되냐고 하기도

▲ 억울한 죽음 진실 밝혀달라 매일 기도타살 단서에 하늘도 무심치 않구나 싶어이번에야말로 진상 규명되면 좋겠어

“그날은 남편이 산에 가려던 날도 아니었어요.”

김씨는 김용덕씨(호림산악회 회장)와 김용환씨(현장 목격자)의 강권으로 남편이 등산을 했다가 변을 당했다고 했다. 평소 백기완·이철우씨나 재야동지들과 자주 산을 다녔던 남편이 그날은 더워서 집에서 쉬기로 했으나, 세 번이나 전화를 건 김용환씨의 권유에 못 이겨 산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오후 1시쯤 누군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장 선생님이 크게 다쳤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네?’ 하고 물으니까 ‘산에서 다쳤습니다’ 해요. 어딘지 모르니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요. 겨우 포천의 이동파출소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예요. 상황을 모르고 있던 순경과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추측되는 곳에 내려 부랴부랴 산을 올라가 보니 남편이 큰 바위 평평한 곳에 누워 계셨어요. 산에서 떨어진 분 같지 않았어요. 귀 뒤쪽에서만 피가 나왔고 모습이 너무도 멀쩡했어요. 타살이라는 직감과 함께, 올 것이 왔구나 싶었어요.”

80을 훌쩍 넘긴 김씨의 얼굴은 세파에 시달린 사람답지 않게 곱고 온화해 보였다. 어지럼증과 심장병이 있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에 쌓인 얘기가 많으시죠?” 

함께 사는 장남 호권씨(63·아래 사진 왼쪽)는 기자에게 “조금 크게 물어달라”고 말했다. 김씨는 곧 남편을 처음 만났던 1938년 얘기부터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평북 정주가 고향이고 남편은 평북 의주 출신이에요. 외삼촌이 정주에 ‘신안소학교’를 설립했는데 남편이 교사로 왔어요. 나는 학생이었고 남편은 우리 집에서 하숙을 했어요. 당시 부자였던 외가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궂은 날이면 거지 행색의 남자들이 찾아오곤 해 이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독립군들이었어요. 시댁도 말을 타고 1주일 돌아야 다 밟을 만큼 큰 땅(117만평)이 있었지요.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올 때는 양가 모두 가진 게 없었어요.”

김씨는 “만난 지 3년 후에 남편이 일본 유학길(도쿄대 철학과-일본신학교)을 떠났고 43년 겨울 학도병 징집 통지서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했다”며 “내가 17살 때였다”고 말했다. 일본이 처녀들을 위안부로 마구 잡아가자 어른들이 서둘러 결혼시켰다는 것이다.

혼인한 지 일주일 만에 중국에 끌려간 남편은 1944년 7월 일본군에서 탈출해 김준엽씨(전 고려대 총장) 등과 함께 2400㎞를 걸어 충칭에 있는 광복군 본대에 합류했다.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 정보기관(OSS)의 특수게릴라 훈련을 받다가 해방을 맞았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뒤 김구 선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김씨는 “서울에 도착한 남편의 전갈을 받고 김활란 박사 어머니와 함께 소를 타고 의주에서 내려왔다”고 말했다.

부부의 삶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면서라고 했다. 이승만 정권을 규탄한 ‘사상계’는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원고 청탁·교정·제작·배본을 도맡았던 남편은 급할 때는 아내의 손도 빌렸다.

“사무실도 없어 저는 당시 영도다리 밑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무실의 망가진 책상을 빌려 쓰고 다방이나 공원에 앉아서도 원고 교정을 봤어요. 동판 찍는 것은 외상이 안돼 제 겨울코트를 팔아 찍기도 했지요. 그렇게 나온 잡지를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끌고 저는 밀면서 광복동 동아서적에 도매로 넘겼어요.” 

1958년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이 필화사건에 휘말렸다.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다. 남편의 펜 끝은 그 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을 향했다. 한·일 수교협상, 베트남 국군 파병을 통렬히 비판했다. 군사정부는 국가원수 모독죄 등 혐의를 씌워 1966년과 1967년 남편을 구속시켰다. 그러나 남편은 굴하지 않고 1967년 6월 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출마해 압도적 지지로 옥중 당선됐다. 군사정부는 결국 부정부패를 폭로한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은 빌미로 1970년 ‘사상계’를 폐간시켰다.


“아들 셋에 딸 둘. 집에는 먹는 입이 많았지만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아본 기억이 없어요.”

김씨는 ‘사상계’가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절에도, 남편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던 시절에도 항상 생활은 궁핍했다고 했다. 1962년 남편이 서울 신촌에 집을 지어 석 달간 살아본 게 ‘내 집’의 전부였다. 군사정부가 ‘사상계’에 세금을 퍼부으면서 빚을 지고 그 집에서 쫓겨난 뒤로는 월세를 전전했다(15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임대아파트는 1991년 정부가 장 선생에게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면서 입주권을 받게 됐다).

“한번은 저도 가계부라는 것을 써보고 싶다고 하니, 얼마 후 생활비라며 봉투를 줬어요. 너무 좋아서 가계부를 만들었는데 이튿날 남편이 돈을 꿔달라는 거예요. 없다고 했더니 ‘어제 준 것 있잖아요’ 해요. 남편은 그 돈을 친구 아들의 등록금으로 줬어요. 결혼식 주례를 서고 받은 양복지도 어느 날 찾아보면 사라지고 없어요. 남편이 저 모르게 형무소에서 나온 제자나 어려운 이웃에게 준 거예요. 제가 바느질집에 가서 일하고 외상도 하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터라 서운해하면, 남편은 ‘내가 밥은 굶기지 않을게. 미안해요’라고 했어요.”

남편은 집에서는 정치와 바깥 얘기를 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말을 하면 “몰라도 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은 집의 대통령이니까 아이들을 잘 돌보세요”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 일을 품고 살던 남편은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나와 재야세력 결집에 힘쓰던 중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경찰은 실족사로 처리했고 유신독재의 서슬에 언론도 입을 다물었다.

시련은 길고 모질었다.

“아버지 죽음의 의혹을 밝히겠다고 동분서주하던 큰애(호권씨)는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조각나 석 달간 병원 신세를 졌고, 집 주변에는 기관원들이 깔려 있었어요. 8년간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지요. 집주인이 ‘제발 나가달라’고 했을 정도예요. 아이들이 해코지당할까봐 늘 조마조마하면서 산 탓에 심장병까지 생겼지요.”

옆에 있던 호권씨가 입을 열었다.

“취직도 원천봉쇄당했어요. 아는 분들을 찾아가서 취직을 부탁한 다음날이면 정보기관에서 그 회사에 압력을 가했어요. 아는 사람이 보다 못해 자신의 서점에서 일하도록 해줬지만 석 달 만에 저 스스로 나왔어요. 기관원들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주인에게 ‘세금은 잘 내느냐’는 식으로 괴롭히는데 도저히 미안해서 못 있겠더라고요.”

수입이 없으니 연탄 살 돈이 없어 겨울에는 냉방에서 떨었다. 그보다도 끼니 해결조차 어려운 날이 많았다. “힘들었던 시절, 그래도 몰래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야밤에 누군가 몰래 담장 너머로 던져놓고 간 쌀이나 고기 한 덩어리가 있기도 했고, 우릴 감시하던 형사가 보기 딱했던지 김치 한 포기를 놓고 간 적도 있었지요.”

김씨는 “사람을 시켜 쌀 한 가마니를 몰래 보내준 김옥길 당시 이대 총장은 이튿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며 “기관 사람들은 김 총장에게 ‘장준하의 집에 쌀을 준 것은 곧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폈다”고 회고했다.

“나중에는 흉가를 찾아 세들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기피하니 월세도 싸고 주인 타박도 적을 테니까요. 자주 쫓겨나는 바람에 이사만 서른 번 넘게 다녔지요. 나중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며느리는 친정집에서 살기로 하고 여섯 식구가 남산 밑 여관의 방 한 칸에서 6개월간 살았어요. 라면만 먹었지요. 그러다가 살기 위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호권씨는 1979년 홀로 말레이시아로 야반도주했다. 한국에 있으면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도 언젠가 파헤칠 생각이었다고 했다. 막노동을 하며 버티다 1982년 정권이 바뀌어 ‘이젠 괜찮겠지’ 하고 귀국했다. 오산이었다. 그를 체포한 안기부는 재야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의 은신처를 대라고 추궁했다. 협조하는 척하다 감시가 느슨해진 틈에 그는 다시 싱가포르로 도주했다. 그렇게 24년을 해외에서 떠돈 후 2003년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동생들이 걸은 길도 험난했다. 둘째 호성씨는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쫓겨난 후 여러 직장을 전전했고, 셋째 호경씨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불법체류자로 살아왔다. 넷째 호연씨는 결혼 후 제주도에서 살았으며 고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던 막내 호준씨는 호권씨 권유로 뒤늦게 신학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유족에게까지 군사정부의 핍박은 길고 잔인했던 것이다. 호권씨의 생각은 날이 서 있었다.

“5·16 쿠데타 직후 ‘사상계’ 사무실에 박정희가 군인을 보낸 적이 있어요. 장 선생(그는 아버지를 장 선생으로 불렀다)은 박정희가 졸개를 통해 전달하려 한 수표를 눈앞에서 찢어버리고는 뺨을 후려쳤어요. 일본군 장교 출신인 것을 경멸했죠. 박정희는 김대중·김영삼씨는 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장 선생은 정통성과 사상까지 박정희의 가장 아픈 치부를 꿰뚫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어요. 장 선생의 뿌리까지 없애버리고 싶었겠죠.”

대화는 진상규명 문제로 이어졌다. 유족과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지난 20일 장 선생의 타살 의혹 재조사를 청와대에 촉구했다. 김씨는 호권씨에게 남편의 유골 검안 결과를 처음 듣고 “이제부터는 싸움이다. 시작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단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씨에게 개인적인 사과를 받거나 책임을 추궁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모든 백성의 아픔을 아우르고 진상규명이 필요할 땐 솔선수범해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는 자세와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아버지 대(代)에 일어난 일을 국민들에게 자연스럽게 사과하는 것이고요.” 호권씨가 말하고, 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인터뷰한 지 4시간이 지났다. 어두워진 창밖으로 비가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김씨가 거실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눈으로 쓰다듬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제 평생 가장 미안하고 마음 아픈 건 우리 애들이에요. 배 많이 곯게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게 하고 고생만 시켰으니까요. 남편에게 몹쓸 짓 했던 군사정부의 핍박이 아이들에게까지 오랜 기간 계속된 것이지요. 어린 막내가 배고프고 힘들다고 할 때 아버지가 큰 유산을 남겼다고 하면 그 유산 지금 먹으면 안되냐고 했어요. 저는 그 유산은 대대손손 쓰는 거라고 말해줬지요. 남편은 생전에 못다 이룬 민주주의를 완성하라고 지금 이 시점에 다시 나타나신 거예요. 이번에야말로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면 좋겠어요.”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2012년 8월 12일 일요일

새누리당 향한 노동자들의 분노 "12월 19일 두고보자!"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8-11일자 기사 '새누리당 향한 노동자들의 분노 "12월 19일 두고보자!"'를 퍼왔습니다.
[기사 추가:오후 07:30]

ⓒ김철수 기자 11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쌍차문제 해결! 용역깡패 폭력 규타! 총파업 승리 노동자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국노동자대회 참가자들이 최근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국책자문위원으로 영입한 새누리당을 규탄하기 위해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조 전 청장은 지난 2009년 쌍용차 옥쇄파업 당시 폭력적인 강제 해산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이날 집회에 모인 4천여명의 참가자들은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 해결, 용역폭력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며 국회 앞까지 행진한 후, 새누리당사 앞으로 향했다.

이미 ‘쌍용차 범대위’에서 집회신고를 한 상태였지만 경찰은 집회인원이 더 많다는 이유로 새누리당사 앞 골목을 차와 병력으로 막았다. 이에 참가자들은 “정당한 집회를 경찰이 불법적으로 방해하고 있다”며 격렬하게 항의했며 새누리당사 앞으로 진입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30여분의 실랑이 끝에 결국 참가자들은 대오를 정리하고 마무리 집회를 진행했다. 

연단에 오른 김정우 쌍용차지부장은 “지난 8일부터 새누리당사 앞에 집회신고를 했지만 경찰은 합법적인 집회공간을 막무가내로 막고있다”며 “더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힘을 더 모아야 한다”며 “우리 모두 함께 모여 정리해고 노동자들을 현장으로 돌려 보내자”고 호소했다.

정의헌 쌍용차 범대위원장은 “그동안 새누리당과 만나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해 만나고자 했으나 어떤 대답도 없었다”며 “오히려 이들은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소위원회 구성’을 방해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국회 환노위의 야당 간사인 홍영표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계의 중요 현안인 쌍용차와 삼성 백형병 관련 산재소위 구성을 촉구하고 있지만 새누리당 반대로 합의되지 못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이날 참가자들은 전국노동자대회를 끝낸 후 8.15를 기념하는 '노동자 골든벨' 등 행사에 참가하기 이해 발걸음을 옮겼다. 

ⓒ김철수 기자 11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쌍차문제 해결! 용역깡패 폭력 규타! 총파업 승리 노동자대회를마친 참가자들이 국회로 진출 국회 사랑채 옆 한강공원 길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김철수 기자 11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쌍차문제 해결! 용역깡패 폭력 규타! 총파업 승리 노동자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백기완 선생, 김영환 위원장등 지도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철수 기자 11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쌍차문제 해결! 용역깡패 폭력 규타! 총파업 승리 노동자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붉은 머리띠를 하고 있다.

ⓒ김철수 기자 11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쌍차문제 해결! 용역깡패 폭력 규타! 총파업 승리 노동자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철수 기자 11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쌍차문제 해결! 용역깡패 폭력 규타! 총파업 승리 노동자대회를마친 참가자들이 국회로 진출 국회 헌정기념관 옆 한강공원 길에서 경찰과 대치 경찰이 최루액을 발사하고 있다.

[기사대체:오후 04:30]

지난달 27일 안산 SJM 공장에서 일어난 용역 폭력 사건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1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 모인 4천여명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철폐와 쌍용차 문제 해결 용역 폭력을 규탄하며 전국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불과 4개월 전 여야 정당 모두는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며 투표를 호소했다”며 “그러나 이제 와서 노동자와 민중에게 한 약속을 헌신짝 처럼 버렸다”고 지적했다. 이어 “심지어 용역깡패 문제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이 무책임한 국회를 방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금속노조 박상철 위원장은 “27일 이땅의 법은 없었다”며 “이제 우리가 분노한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단한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양 갈래로 나뉘어 국회로 행진을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행진을 하며 “비정규직 철폐하라. 용역 깡패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행진은 국회 후문 한강시민공원 방향으로 향했고 한강 시민공원에서 합류한 참가자들은 국회 진입을 시도했다. 

경찰은 국회 진입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을 막아섰고 이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국회 후문 앞 도로 위로 진입을 수차례 시도했다. 언덕길에 있던 노동자들이 경찰의 방패에 밀려 난간 아래로 떨어지는 아찔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경찰과 노동자들의 충돌 과정을 취재하던 기자들도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충돌 과정에서 경찰은 참가자들이 들고 있는 깃발을 빼앗았고 노동자들은 이에 더욱 흥분해 “깃발을 돌려 달라”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수차례 크고 작은 충돌 끝에 결국 참가자들은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의 마무리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김철수 기자 11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쌍차문제 해결! 용역깡패 폭력 규타! 총파업 승리 노동자대회를마친 참가자들이 국회로 진출 국회 사랑채 옆 한강공원 길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김철수 기자 11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쌍차문제 해결! 용역깡패 폭력 규타! 총파업 승리 노동자대회를마친 참가자들이 국회로 진출 국회 사랑채 옆 한강공원 길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김철수 기자 11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쌍차문제 해결! 용역깡패 폭력 규타! 총파업 승리 노동자대회를마친 참가자들이 국회로 진출 국회 사랑채 옆 한강공원 길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김대현 기자

2012년 7월 28일 토요일

[사설]중국의 한국민 가혹행위 반드시 진상 규명해야


이글은 경향신문 2012-07-27일자 사설 '[사설]중국의 한국민 가혹행위 반드시 진상 규명해야'를 퍼왔습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국민을 보호하지 않거나, 보호하는 시늉만 한다면 국가로서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 중국에 114일 동안 구금됐다가 풀려난 북한 인권 운동가 김영환씨가 중국 공안당국으로부터 전기고문을 비롯한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정부의 대응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어제 국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중국 측에 재조사를 요구한 상태지만, ‘가혹행위는 없었다’는 입장을 전해왔다”고 말했다. 정부가 김씨로부터 고문사실을 인지한 시점은 지난달 11일 2차 영사면담 자리였다. 이후 한달여 동안 문제 제기를 했지만 중국 측이 부인하자 아무런 추가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다. 김씨가 가혹행위를 당했을 개연성은 이미 지난 4월26일 1차 영사면담 당시 김씨가 관련 질문을 받고 “이 자리에서 그런(가혹행위)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을 때 충분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여론이 악화된 뒤에야 재조사를 요청하겠다는 게 과연 재외국민 보호의 막중한 책임을 맡은 외교부 장관이 취할 태도인가 묻고 싶다. 

애당초 중국 측이 김씨 일행을 체포한 이유도 석연찮기는 매일반이다. ‘국가안전 위해죄’로 알려졌지만 외교부는 위법사실의 내용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김씨 역시 체포이유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불분명한 이유로 석달 가까이 갇혀 가혹행위까지 당한 셈이다. 김씨처럼 꽤 유명한 인사에 대한 대우가 이럴진대 중국 공안당국이 평범한 북한 인권 운동가들은 어떻게 취급했겠는가. 지난해만 해도 한국민 418만명이 중국을 방문하고, 65만여명이 장기체류하고 있다. 이번 사안을 분명히 아퀴짓지 않는 한 제2, 제3의 가혹행위 피해자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외교부는 그때마다 “중국 측에 진상확인을 요청했지만 확인이 안되고 있다”는 맥빠진 말로 소나기를 피할 참인가.

중국 역시 이번 사안의 엄중함을 인식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권위주의 체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셈이다. 중국은 탈북자 인권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국내법과 국제법,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해왔다. 김씨에 대한 가혹행위는 과연 국제법과 인도주의 원칙 중 어디에 해당한다는 말인가. 중국이 끝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방기한다면 정부는 차제에 중국의 인권탄압 문제를 적극적으로 국제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