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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장준하 의문사 진상규명을 두려워하는 보수언론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10-24일자 기사 '장준하 의문사 진상규명을 두려워하는 보수언론'을 퍼왔습니다.
[장행훈 칼럼] '박정희에 의한 타살' 동의하기 싫은가? 그건 오만이자 독단

지난 8월15일자 한겨레신문에서 37년 만에 처음으로 장준하 선생에 대한 검시가 이뤄졌고 그 결과 머리 뒤쪽에 인위적인 상처로 보이는 6cm 크기의 구멍과 머리뼈 금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고 마음이 착잡했다. 역시 장준하 선생은 추락사 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생각을 회상했다. 그러나 아직 의문사의 의혹이 깨끗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앞으로의 숙제다.

한겨레에 이어 경향신문이 장준하 의문사의 의혹을 상기시키고 그 진상 규명의 필요성을 제기했을 때 곧 모든 언론이 장준하 사망의 의혹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겠구나 하는 기대가 부풀었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주투사이며 민족의 지도자인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원인을 규명하고 배후를 찾아내 고인의 신원(伸寃)을 풀어드리는 것이 살아남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라고 모두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산이었다.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의 방송 모니터에 의하면 한겨레가 장준하 선생의 유골 검시 사실을 보도한 다음날 16일까지 “방송3사는 ‘장준하 의문사’와 관련한 사실을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민언련 모니터는 “이날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유해 사진, 검시 소견 등 구체적인 근거를 내놓은 데 이어, 야권에서도 진상조사위를 구성하겠다는 입장을 냈는데도 방송 3사가 보도하지 않은 것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언론 본연의 임무를 망각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고 논평했다.

민언련의 지난 8월 17일자 신문 모니터에 의하면 "조선일보는 보도하는 시늉을 내는 데 그쳤다. 17일 12면 하단 오른쪽에 2단기사로 를 내놨다... 기념사업회 등이 제기한 타살 의혹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민주통합당의 ‘공세’로 몰았다. 

17일 는 “민주통합당은 장준하 선생의 타살의혹이 다시 불거진 것을 계기로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에 대한 공세를 펼쳤다”면서 “박정희 정권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박 의원은 즉각 석고대죄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라”는 등 민주통합당 대선 주자들의 발언을 나열했다.

간단히 말해서 조중동과 방송 3사는 “장준하 의문사”가 언론에 쟁점화되면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기에 묵살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장준하 의문사의 배후에 박정희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국민의 인식이기 때문에 대선 정국에서 민감한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언론으로서도 신중히 다뤄야 할 문제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대선에서 어느 한쪽에 불리할 수 있는 문제는 언론에 보도해서는 안 되는가? 새누리당은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노무현-김정일 비밀대화록을  들먹이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우리의 NLL 관할권을 포기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고 있는데 조중동은 새누리당의 입장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인상이다. 

조중동이 문재인 후보는 공격하고 박근혜후보에게는 호의적이고 편파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특정 후보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대다수 국민이 존중하는 장준하선생의 의문사 규명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만약 보수언론과 방송이 장준하 의문사를 무시하는 동기가 장준하의 사인이 (박정희의)에 의한 타살이 라는 의혹에 동의할 수 없어 그런 것이라면 다수 국민이 박정희 정권의 타살로 보고 있는 사건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독단이며 오만이다. 아니면  이들 신문 방송이 박정희에 대해서 품고 있는 편파적인 지지 성향을 지면과 전파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언론은 보도 뿐 아니라 보도하지 않는 행동으로 그들의 호불호(好不好)를 나타낸다.

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유신정권 치하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과 배후를 규명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족들도 고인의 부검을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장준하 의문사의 진상 규명 정도는 가능한 사회가 됐다. 장준하는 일생을 조국의 광복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애국자다. 그런 애국자가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 출신,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말살한 독재자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비극의 배후를 규명하지 않고 방관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용인하지 않는다. 박정희가 장준하를 타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박정희의 명예를 위해서도 의문사의 원인 규명은 필요하다. 장준하의 피살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진상규명이 불가결하다. 조중동이나 방송도 이 사실을 규명하자는데는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 hap36jang@hanmail.net 

2012년 8월 27일 월요일

‘뼛속까지 항일’ 집안의 젊은 신학도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8-27일자 기사 '‘뼛속까지 항일’ 집안의 젊은 신학도'를 퍼왔습니다.
[새 연재] 장준하는 누구인가 (1)

▲ 장준하 선생.

내가 장준하 선생을 처음으로 만난 때는 1974년이 저물어가던 어느날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사 기자로 일하던 나는 서울 종로1가의 조광현 내과에 입원해 있던 그를 취재하려고 병실을 찾아갔다. 문 앞에는 눈매가 날카로운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당시 ‘기관원’이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장 선생에 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사상계)라는 잡지를 통해 치열하게 민주화운동을 해왔고,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체포와 투옥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반독재투쟁을 펼쳤으며, 1973년 말부터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근자에 행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는 사실 정도였다.
내가 등에 꽂히는 수상한 사내의 눈길에 섬뜩함을 느끼면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동아일보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장 선생은 병상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장 선생이 협심증과 간경화 증세가 악화되어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젊은이보다 억센 힘으로 내 손을 잡고 한참 동안이나 놓지 않는 바람에 팔뚝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가 죽은지 37년 '타살' 짙은 유골 공개  

그 무렵 동아일보사는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광고 탄압’을 겪고 있었다.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조사와 사법부의 재판에서 드러났듯이, 광고 탄압은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무산시키려고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을 동원해서 저지른 사건이었다.
장준하 선생이 병실에 입원해 있을 무렵 박 정권이 광고 탄압의 강도를 높여가자 재야단체들과 종교계는 물론이고 뜻있는 시민들이 텅 빈 동아일보의 지면을 채우기 위해 ‘격려광고’를 열성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동아일보사 언론인 여러분 덕분에 박정희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13년 동안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용기가 치솟고 희망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눈동자에서는 강렬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장 선생이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뒤 겪은 일들을 자세히 들었다.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장시간 잠을 재우지 않거나 육체적 고통을 주는 고문을 당한 끝에 "헌법 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2월 1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3월 2일 비상고등군법회의가 같은 형량을 선고한 뒤 대법원 형사부는 8월 20일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형을 확정했다.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장 선생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정보기관에서 당한 고문과 감방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심신이 피폐해진데다 모든 신문과 방송이 긴급조치 관련 양심수들과 가족의 참혹한 실상을 하나같이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으나 200명이 넘는 민청학련·인혁당 관련 정치범들은 아직도 차디찬 감방에 갇혀 있었다.
두 시간이 넘게 장준하 선생을 취재하고 병실을 나서려는 나의 손을 그가 다시 굳게 잡고 말했다. “동아일보사 여러분이 가장 큰 희망입니다. 이제 민중이 떨쳐 일어나 유신독재를 무너뜨리는 싸움에 나설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일하세요.”
그는 결국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나 붕괴를 보지 못한 채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아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날부터 37년이 지난 2012년 8월 15일, 광복 기념일에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 의혹’이 짙은 유골을 통해 역사의 현장에 되살아났다.
오는 12월 19일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기까지 박정희 정권이 그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공권력에 의한 ‘타살’로 확정될 경우 1975년 8월 당시 청와대에서 퍼스트레이디로서 공적 업무를 수행했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어떤 견해를 밝히고 박 정권의 책임에 대한 언급을 할는지 유권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책들이 적지 않은데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20대부터 50대 초반까지의 청·장년층 가운데 대다수는 그를 자세히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대통령선거라는 중대한 행사와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다.

항일의식이 투철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장준하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장윤희(1864~1950)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장로님’ ‘학자 어른’ ‘동의보감 할아버지’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선각한 계몽주의자’인 동시에 철저한 ‘배일사상가’였다. 할아버지는 의주에 양성학교라는 사학을 세워 스스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장석인(1901~1966)은 기독교 계열 학교인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를 거쳐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숭실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장석인은 1938년에 일제가 강요하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사직에서 쫓겨난 뒤 삭주의 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그는 6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남한에서 장로회신학대학 강사로 시작해서 서울 연희동교회 목사와 당회장을 지냈다.
장석인의 5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난 장준하는 형이 어릴 적에 숨지자 장남이 되었다. 1933년 15세의 나이에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들어갔다. 1934년 아버지가 선천 신성중학교로 옮겨갔기 때문에 그 학교 2학년으로 전학한 장준하는 졸업반(5학년)이던 1937년 5월 생애 처음으로 항일운동의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일제 경찰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교장 장이욱을 체포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격분한 장준하는 전교생을 이끌고 동맹시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시위 방법이 특이했다. 우선 그는 각 학년의 대표를 불러놓고 전교생 모두가 각자의 책가방에 든 일본어로 된 책을 모두 꺼내 찢어버리도록 한 뒤에 시위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몰려나와 대열을 짓자 장준하가 그 선두에 서서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구호는 “장이욱 교장 선생님을 석방하라!”였다. 그러나 시위 대열은 얼마를 가지 못하여 급히 출동한 일경에 부딪혀 차이고 두들겨 맞으면서 진로가 막혔다.
대열은 무너지고 되밀려 흩어지며 여기저기서 고함과 비명이 터졌다. 장준하는 후퇴하여 쫓기는 대열을 그대로 대목산으로 몰고 올라가 산상의 농성을 폈다. 그리고 일제히 목이 터져라 교가와 아리랑을 번갈아 부르며 발 아래 선천 읍내가 진동하도록 교장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외쳐댔다.(박경수 지음 돌베개, 2007, 57~58쪽)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서 총개머리로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치고 때리면서 주모자를 대라고 압박하자 장준하는 ‘내가 주모자’라고 나섰다. 아래 학년 대표들도 ‘내가 주모자’라고 주장하자 경찰은 장준하와 그들을 연행했다. 유치장에 갇혔다 풀려난 그들의 첫번째 항일투쟁은 패배로 끝났지만 그때부터 장준하는 일제 침략자들과 더욱 치열하게 싸우리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1938년 3월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장준하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그 학교가 곧 폐교되자 정주의 신안소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그는 창고건물이나 다름없이 허술한 학교에서 실질적으로 ‘교장 대행’ 구실을 하면서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다. 5학년 여학생들의 긴 머리채를 가위로 잘라 단발이나 갈래머리로 만드는가 하면 펄럭거리는 치마대신에 블라우스와 통치마를 입게 했다. 보수적인 정주의 어른들이 펄쩍 뛰었지만 그는 ‘학교 근대화’를 꿋꿋하게 밀고나갔다. 그는 6학년 남녀 학생들과 함께 과수원을 뒤엎어 새 교사를 짓기도 했다.
장준하는 태평양전쟁이 터진 1941년 봄 신안소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도쿄에서 곧바로 동양대학 철학과(예과)에 입학한 그는 한 해 동안 거기서 공부한 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일본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때 그 신학교 3년 과정의 본과에는 박영출, 황재경, 오택환 등이, 2년 과정의 예과에는 전택부, 문익환, 문동환, 김관석, 박봉랑 등이 있었다. 예과 학생인 문익환, 동환 형제와 김관석은 1970년대에 장준하와 함께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지가 된다.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2012년 8월 25일 토요일

[심층인터뷰]고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씨 “밤에 몰래 쌀·김치 넣어준 걸로 끼니 해결… 이사만 30차례 넘어”


이글은 경향신문 2012-08-25일자 기사 '[심층인터뷰]고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씨 “밤에 몰래 쌀·김치 넣어준 걸로 끼니 해결… 이사만 30차례 넘어”'를 퍼왔습니다.

지난 21일 오후 4시30분 김희숙씨(86)가 살고 있는 서울 일원동의 임대아파트를 찾았다. 맨 꼭대기 18층에 있는 집은 방충망이 쳐져 있고 문은 열려 있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바람길을 터놓은 것이다. 오면서 본 옆집도 그 옆집도 문이 열려 있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20만원. 22평의 허름한 아파트에는 방 2개와 화장실이 있었다. 작은 거실에 오래 쓴 듯한 식탁과 세간 몇 가지가 보였다. 2인용 소파에 앉았다. 거실 맞은편 벽에 장준하 선생(1918~1975)의 생전 사진을 담은 액자와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돌아가신 후 매일 기도했어요.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신께 빌고 또 빌었지요. 이렇게 남편의 유골에서 타살의 결정적 단서가 나왔다니, 하늘이 무심치 않구나 싶어요. 37년의 모진 세월이 바로 엊그제 같아요.”

남몰래 삭였던 피울음과 신산했던 삶이 주마등처럼 스친 것일까.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부인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1일 파주 통일동산으로 이장하며 검안한 남편 유골에서 지름 6~7㎝의 원형 상흔이 발견된 흥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추락사했다는 남편의 유골에서 새롭게 타살 정황이 공개된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씨가 지난 21일 서울 일원동 자택에서 37년 전 남편이 의문 속에 죽고 3남2녀와 함께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회상하다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어린 막내가 배고프고 힘들다고 할 때아버지가 큰 유산 남겼다고 하면그 유산 지금 먹으면 안되냐고 하기도

▲ 억울한 죽음 진실 밝혀달라 매일 기도타살 단서에 하늘도 무심치 않구나 싶어이번에야말로 진상 규명되면 좋겠어

“그날은 남편이 산에 가려던 날도 아니었어요.”

김씨는 김용덕씨(호림산악회 회장)와 김용환씨(현장 목격자)의 강권으로 남편이 등산을 했다가 변을 당했다고 했다. 평소 백기완·이철우씨나 재야동지들과 자주 산을 다녔던 남편이 그날은 더워서 집에서 쉬기로 했으나, 세 번이나 전화를 건 김용환씨의 권유에 못 이겨 산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오후 1시쯤 누군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장 선생님이 크게 다쳤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네?’ 하고 물으니까 ‘산에서 다쳤습니다’ 해요. 어딘지 모르니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요. 겨우 포천의 이동파출소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예요. 상황을 모르고 있던 순경과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추측되는 곳에 내려 부랴부랴 산을 올라가 보니 남편이 큰 바위 평평한 곳에 누워 계셨어요. 산에서 떨어진 분 같지 않았어요. 귀 뒤쪽에서만 피가 나왔고 모습이 너무도 멀쩡했어요. 타살이라는 직감과 함께, 올 것이 왔구나 싶었어요.”

80을 훌쩍 넘긴 김씨의 얼굴은 세파에 시달린 사람답지 않게 곱고 온화해 보였다. 어지럼증과 심장병이 있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에 쌓인 얘기가 많으시죠?” 

함께 사는 장남 호권씨(63·아래 사진 왼쪽)는 기자에게 “조금 크게 물어달라”고 말했다. 김씨는 곧 남편을 처음 만났던 1938년 얘기부터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평북 정주가 고향이고 남편은 평북 의주 출신이에요. 외삼촌이 정주에 ‘신안소학교’를 설립했는데 남편이 교사로 왔어요. 나는 학생이었고 남편은 우리 집에서 하숙을 했어요. 당시 부자였던 외가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궂은 날이면 거지 행색의 남자들이 찾아오곤 해 이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독립군들이었어요. 시댁도 말을 타고 1주일 돌아야 다 밟을 만큼 큰 땅(117만평)이 있었지요.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올 때는 양가 모두 가진 게 없었어요.”

김씨는 “만난 지 3년 후에 남편이 일본 유학길(도쿄대 철학과-일본신학교)을 떠났고 43년 겨울 학도병 징집 통지서를 받고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했다”며 “내가 17살 때였다”고 말했다. 일본이 처녀들을 위안부로 마구 잡아가자 어른들이 서둘러 결혼시켰다는 것이다.

혼인한 지 일주일 만에 중국에 끌려간 남편은 1944년 7월 일본군에서 탈출해 김준엽씨(전 고려대 총장) 등과 함께 2400㎞를 걸어 충칭에 있는 광복군 본대에 합류했다.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 정보기관(OSS)의 특수게릴라 훈련을 받다가 해방을 맞았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뒤 김구 선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김씨는 “서울에 도착한 남편의 전갈을 받고 김활란 박사 어머니와 함께 소를 타고 의주에서 내려왔다”고 말했다.

부부의 삶이 전환점을 맞은 것은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면서라고 했다. 이승만 정권을 규탄한 ‘사상계’는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원고 청탁·교정·제작·배본을 도맡았던 남편은 급할 때는 아내의 손도 빌렸다.

“사무실도 없어 저는 당시 영도다리 밑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무실의 망가진 책상을 빌려 쓰고 다방이나 공원에 앉아서도 원고 교정을 봤어요. 동판 찍는 것은 외상이 안돼 제 겨울코트를 팔아 찍기도 했지요. 그렇게 나온 잡지를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끌고 저는 밀면서 광복동 동아서적에 도매로 넘겼어요.” 

1958년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이 필화사건에 휘말렸다.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다. 남편의 펜 끝은 그 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을 향했다. 한·일 수교협상, 베트남 국군 파병을 통렬히 비판했다. 군사정부는 국가원수 모독죄 등 혐의를 씌워 1966년과 1967년 남편을 구속시켰다. 그러나 남편은 굴하지 않고 1967년 6월 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출마해 압도적 지지로 옥중 당선됐다. 군사정부는 결국 부정부패를 폭로한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은 빌미로 1970년 ‘사상계’를 폐간시켰다.


“아들 셋에 딸 둘. 집에는 먹는 입이 많았지만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아본 기억이 없어요.”

김씨는 ‘사상계’가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절에도, 남편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던 시절에도 항상 생활은 궁핍했다고 했다. 1962년 남편이 서울 신촌에 집을 지어 석 달간 살아본 게 ‘내 집’의 전부였다. 군사정부가 ‘사상계’에 세금을 퍼부으면서 빚을 지고 그 집에서 쫓겨난 뒤로는 월세를 전전했다(15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임대아파트는 1991년 정부가 장 선생에게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면서 입주권을 받게 됐다).

“한번은 저도 가계부라는 것을 써보고 싶다고 하니, 얼마 후 생활비라며 봉투를 줬어요. 너무 좋아서 가계부를 만들었는데 이튿날 남편이 돈을 꿔달라는 거예요. 없다고 했더니 ‘어제 준 것 있잖아요’ 해요. 남편은 그 돈을 친구 아들의 등록금으로 줬어요. 결혼식 주례를 서고 받은 양복지도 어느 날 찾아보면 사라지고 없어요. 남편이 저 모르게 형무소에서 나온 제자나 어려운 이웃에게 준 거예요. 제가 바느질집에 가서 일하고 외상도 하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터라 서운해하면, 남편은 ‘내가 밥은 굶기지 않을게. 미안해요’라고 했어요.”

남편은 집에서는 정치와 바깥 얘기를 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말을 하면 “몰라도 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은 집의 대통령이니까 아이들을 잘 돌보세요”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 일을 품고 살던 남편은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나와 재야세력 결집에 힘쓰던 중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경찰은 실족사로 처리했고 유신독재의 서슬에 언론도 입을 다물었다.

시련은 길고 모질었다.

“아버지 죽음의 의혹을 밝히겠다고 동분서주하던 큰애(호권씨)는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해 턱뼈가 조각나 석 달간 병원 신세를 졌고, 집 주변에는 기관원들이 깔려 있었어요. 8년간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지요. 집주인이 ‘제발 나가달라’고 했을 정도예요. 아이들이 해코지당할까봐 늘 조마조마하면서 산 탓에 심장병까지 생겼지요.”

옆에 있던 호권씨가 입을 열었다.

“취직도 원천봉쇄당했어요. 아는 분들을 찾아가서 취직을 부탁한 다음날이면 정보기관에서 그 회사에 압력을 가했어요. 아는 사람이 보다 못해 자신의 서점에서 일하도록 해줬지만 석 달 만에 저 스스로 나왔어요. 기관원들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주인에게 ‘세금은 잘 내느냐’는 식으로 괴롭히는데 도저히 미안해서 못 있겠더라고요.”

수입이 없으니 연탄 살 돈이 없어 겨울에는 냉방에서 떨었다. 그보다도 끼니 해결조차 어려운 날이 많았다. “힘들었던 시절, 그래도 몰래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야밤에 누군가 몰래 담장 너머로 던져놓고 간 쌀이나 고기 한 덩어리가 있기도 했고, 우릴 감시하던 형사가 보기 딱했던지 김치 한 포기를 놓고 간 적도 있었지요.”

김씨는 “사람을 시켜 쌀 한 가마니를 몰래 보내준 김옥길 당시 이대 총장은 이튿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며 “기관 사람들은 김 총장에게 ‘장준하의 집에 쌀을 준 것은 곧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폈다”고 회고했다.

“나중에는 흉가를 찾아 세들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기피하니 월세도 싸고 주인 타박도 적을 테니까요. 자주 쫓겨나는 바람에 이사만 서른 번 넘게 다녔지요. 나중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며느리는 친정집에서 살기로 하고 여섯 식구가 남산 밑 여관의 방 한 칸에서 6개월간 살았어요. 라면만 먹었지요. 그러다가 살기 위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호권씨는 1979년 홀로 말레이시아로 야반도주했다. 한국에 있으면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아버지의 죽음도 언젠가 파헤칠 생각이었다고 했다. 막노동을 하며 버티다 1982년 정권이 바뀌어 ‘이젠 괜찮겠지’ 하고 귀국했다. 오산이었다. 그를 체포한 안기부는 재야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의 은신처를 대라고 추궁했다. 협조하는 척하다 감시가 느슨해진 틈에 그는 다시 싱가포르로 도주했다. 그렇게 24년을 해외에서 떠돈 후 2003년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동생들이 걸은 길도 험난했다. 둘째 호성씨는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쫓겨난 후 여러 직장을 전전했고, 셋째 호경씨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불법체류자로 살아왔다. 넷째 호연씨는 결혼 후 제주도에서 살았으며 고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던 막내 호준씨는 호권씨 권유로 뒤늦게 신학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유족에게까지 군사정부의 핍박은 길고 잔인했던 것이다. 호권씨의 생각은 날이 서 있었다.

“5·16 쿠데타 직후 ‘사상계’ 사무실에 박정희가 군인을 보낸 적이 있어요. 장 선생(그는 아버지를 장 선생으로 불렀다)은 박정희가 졸개를 통해 전달하려 한 수표를 눈앞에서 찢어버리고는 뺨을 후려쳤어요. 일본군 장교 출신인 것을 경멸했죠. 박정희는 김대중·김영삼씨는 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장 선생은 정통성과 사상까지 박정희의 가장 아픈 치부를 꿰뚫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어요. 장 선생의 뿌리까지 없애버리고 싶었겠죠.”

대화는 진상규명 문제로 이어졌다. 유족과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지난 20일 장 선생의 타살 의혹 재조사를 청와대에 촉구했다. 김씨는 호권씨에게 남편의 유골 검안 결과를 처음 듣고 “이제부터는 싸움이다. 시작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단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씨에게 개인적인 사과를 받거나 책임을 추궁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모든 백성의 아픔을 아우르고 진상규명이 필요할 땐 솔선수범해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는 자세와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아버지 대(代)에 일어난 일을 국민들에게 자연스럽게 사과하는 것이고요.” 호권씨가 말하고, 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인터뷰한 지 4시간이 지났다. 어두워진 창밖으로 비가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김씨가 거실 벽에 걸린 남편의 사진을 눈으로 쓰다듬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제 평생 가장 미안하고 마음 아픈 건 우리 애들이에요. 배 많이 곯게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게 하고 고생만 시켰으니까요. 남편에게 몹쓸 짓 했던 군사정부의 핍박이 아이들에게까지 오랜 기간 계속된 것이지요. 어린 막내가 배고프고 힘들다고 할 때 아버지가 큰 유산을 남겼다고 하면 그 유산 지금 먹으면 안되냐고 했어요. 저는 그 유산은 대대손손 쓰는 거라고 말해줬지요. 남편은 생전에 못다 이룬 민주주의를 완성하라고 지금 이 시점에 다시 나타나신 거예요. 이번에야말로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면 좋겠어요.”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2012년 8월 17일 금요일

[사설]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정부가 재조사해야


이글은 경향신문 2012-08-16일자 사설 '[사설]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정부가 재조사해야'를 퍼왔습니다.

독립운동가로, 반독재 투쟁가로 파란 많은 삶을 살았던 고 장준하 선생이 타살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발견됐다. 지난 1일 경기 파주시 광탄면 나사렛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된 장 선생의 유골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에 조성 중인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오른쪽 귀 뒷부분에 지름 6㎝가량 뻥 뚫린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검시에 참여한 전문의는 이것이 ‘인위적 상처로 보인다’는 의견을 냈다. 장 선생이 의문사한 지 실로 37년 만의 일이다. 그가 1975년 8월17일 경기 포천 약사봉을 올랐다가 하산하던 중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될 당시부터 타살 의혹이 제기됐지만 서둘러 매장됐다. 검찰은 실족에 의한 단순 추락사라는 결론을 내렸고, 사인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검시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37년 동안 ‘의문사’로 남아있었던 것은 군사독재·10월유신이라는 엄혹한 시대가 1차적 원인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 기간 37번 체포되고 9번 투옥되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그가 사망하자 부인은 군사독재 아래서 사인이 제대로 밝혀질 리 없다며 부검에 반대했다. 1993년 문민정부에서 민주당이 진상조사위를 만들어 공론화했으나 역시 결정적 증거가 안 나왔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진상규명 불능 판정을 내리면서도 “과거 수사 결과는 대단히 신뢰하기 어렵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 떠밀려 37년 만에야 처음 검시가 이뤄졌고 이를 통해 인위적인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 함몰 흔적이 나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부터라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적극적으로 풀어야 한다. 정부가 나서 고인에 대한 정밀 유골감식 등을 통한 사인 규명과 생존목격자 재조사, 중앙정보부 등 정부기관의 개입 여부 등을 밝혀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과거 정권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듯 미온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다가는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미 민주당은 당 차원의 의문사 조사위를 구성해 사인을 규명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경선 후보도 이 문제를 외면해선 안된다. 박 후보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장 선생의 부인 김희숙씨를 만나 위로의 말을 전한 적이 있다. 그것이 진심이라면 장 선생의 의문사에 관해 밝혀진 새로운 사실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에 힘써야 한다. 이것 역시 흘러간 과거사라고 치부해버리면 끝이 아니다. 과거는 현재, 미래와 촘촘히 연결돼 있다.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장준하 아들 "박근혜, 타살로 밝혀지면 정치적 책임 져야"


이글은 뷰스앤뉴스(Views&News) 2012-08-16일자 기사 '장준하 아들 "박근혜, 타살로 밝혀지면 정치적 책임 져야"'를 퍼왔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잘못,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고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을 제기한 아들 장호권씨는 16일 박근혜 새누리당 경선후보에 대해 "그분이 정치를 해서 이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이 되는 경우가 될 때는, 분명히 정치적 책임을, 그 당시와 연결해서 져야겠다"라고 밝혔다.

장호권씨는 이날 YTN라디오 '김갑수의 출발 새아침'과의 인터뷰에서 장준하 선생이 정치적 암살을 당한 것으로 밝혀질 경우 "정치적 책임을 박근혜 씨에게 물을 수 없겠다. 개인적으로는 그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딸이래도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 딸에게 책임을 묻겠나, 연좌제도 아니고. 저는 그것은 반대한다"면서도 이같이 말했다.

진행자가 이에 '대선 후보로서 책임을 져야하는 차원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묻자, 장씨는 "그렇게 볼 수 있겠다"고 답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얘기겠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를 해줘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모든 국민에게 이것은 박정희 시대 때 이러한 일을 해서 정치적으로 이런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공식적인 태도를 표명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5년전 한나라당 대선경선에 나섰던 박근혜 후보와 자신의 모친이 회동했던 사실을 거론하며 "5년이 지난 이때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 진정성을 갖고 과거와 단절할 수 없는 그런 삶인데 참 어려운 일을 한다,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며 우회적으로 박 후보의 대선 출마에 반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이번에 타살 의혹을 다시 제기함에 따라 대선에 미칠 영향에 대해선 "이번에 이상하게도 37년이 지난 이 시점에 묘가 붕괴가 돼서 이장을 하게 됐는데, 올해 이장이 결정이 나왔을 때 마침 대선이 걸려있다 보니 정치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 될 수밖에 없겠죠. 저를 비롯해서 저희 집안이나 기념사업회도 상당히 조심히 다뤄야겠다, 정치적으로"이라고 신중한 입장을 보이면서도 "선거와 결부가 돼서 이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덮어놓고 있을 수 없는 것 아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타살로 밝혀질 경우 대응에 대해선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한다든가 여러 가지 얘기가 있겠죠, 그렇지만 저희 집안에서는 배상보다는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 다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치를 지망하는 위정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다. 이런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진실을 역사에 기록해 놓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최병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