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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3일 금요일

"문재인과 안철수, DJ-YS가 될 것인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2-11-23일자 기사 '"문재인과 안철수, DJ-YS가 될 것인가?"'를 퍼왔습니다.
"문재인과 안철수, DJ-YS가 될 것인가?"'를 퍼왔습니다.

되풀이되는 분신과 투신의 역사

1987년 12월 5일 대통령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대전역 광장에서는 영세가구점 노동자였던 박응수(당시 29세)씨가 '군부독재 종식과 단일화 쟁취'를 외치며 분신하여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정확히 25년이 흐른 어제(11월 22일) 전북 완주의 50대 남성이 단일화를 요구하는 유서와 플랜카드를 남기고 투신하였다는 비보는 단일화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1987년 6.29 선언으로 대선 국면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단일화에 대한 '순진한 낙관론'이 우세하였다. 직선제만 되면 '저마다 중앙청의 문지기가 되어도 좋다. 요리사가 되어도 좋다'고 말했던 양김의 공언이 계속되었고, 실제 DJ는 복권되자마자 YS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는 절차를 밟기도 하였다. DJ는 대통령직선제 관철을 조건으로 대통령 불출마를 선언(1986.11.5)하였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YS가 망명 직후 "당신이 나이도 위이고 하니 사면복권이 되면 대통령후보로 지지 하겠다"고 예기하곤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단일화를 외치며 양당 당사를 점거하였던 대학생들의 간절한 염원도,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원로들의 중재도, 심지어는 노동자의 목숨을 건 분신도 양김의 권력욕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았다.

같은 것과 다른 것

그때나 지금이나 정권교체의 유일한 카드로서 단일화를 바라는 여망은 간절하였지만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당시 실시되었던 전화면접 여론조사에서는 양김의 단일화는 필요(69%)하지만 실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응답(30.4%)보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40%)이 다소 높게 나타났다(. 1987.9.25).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단일화에 대한 찬성 견해는 64.2%(박근혜 지지층 포함)에서 84.7%(박근혜 지지층 제외)에 달하고 있다(. 2012.11.13).

같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양김의 탐욕이나 야망과 같은 '유해한 열정'을 다스릴 수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의 모색은 턱 없이 부재하다. 여야 없이 정치권은 후보단일화를 위한 민주적인 경선 제도도, 4년 중임제와 결선투표제와 같은 합의제 헌정체제를 진지하게 모색하지 않은 채 25년 동안 손 놓고 앉아 있었다.

ⓒ뉴시스

그러나 희망을 갖게 만드는 중대한 차이도 있다. 혹자는 노회한 양김보다는 문재인과 안철수의 인품이 출중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비교와 검증이 어려운 인상주의적 평가이다. 희망의 유력한 근거는 '새정치 공동선언'과 같은 정책협약의 성과이다. 정치뿐만 아니라 외교ㆍ안보와 경제 분야에서 양측의 공동선언문이 성사된다면 공동정부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내가 단일화를 낙관하는 강력한 근거는 역사적 교훈의 엄숙함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양김은 결국 각각 집권에는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양김의 동시 출마는 지역주의의 악화뿐만 아니라 훗날 3당 합당의 간접적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영남의 야당 및 민주화 세력의 결정적 약화를 가져왔다. 'YS의 욕심과 DJ의 고집'으로 인한 정치적 결별로 그들은 군부와 야합하거나 아니면 유신 잔당과 손잡음으로써 집권의 정당성에 결정적 손상을 당하였다. 또한 민통련의 해체에서 드러나듯 '정치권은 물론 민주화세력에 대한 국민적 신뢰의 완전한 상실'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국민들의 희생과 소모적인 분열을 낳았다. 두 정부 모두 집권 과정에서 입은 지지 기반의 분열과 도덕성의 실추로 '성공한 정부'를 창출하지는 못하였다.

최초의 성공한 정부와 최초의 4년 중임 대통령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분담하라

한국 현대사에서 꼭 필요한, 그러나 아직 갖지 못한 것 중 하나가 성공한 정부이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성장이라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와 남북화해협력이라는 진전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치유하는데 실패하였다는 점에서 성공한 정부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안철수 정부이든 문재인 정부이든 차기 정권의 첫 번째 과제는 경제민주화와 평화ㆍ복지국가의 건설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중도 자유주의 세력을 대변하는 안철수나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문재인의 민주당 없이는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없다. 나아가 진보정의당이나 녹색당, 그리고 개혁적 시민단체와 같은 진보세력과의 우호적 협력이 필수적이다. 즉,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성공한 정부라는 위대한 비전은 개혁과 진보세력의 지혜로운 연대와 소통 속에서만 가능하다.

진정 우리가 이 시점에서 꿈꾸어야 하는 것은 후보자들의 결단에 의한 '아름다운 단일화'가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집권에는 성공하였으나 통치에는 실패한 단일화의 역설적 비극을 수차례 경험하였다. 단일화가 성공한 이후에도 안철수와 문재인이 함께 진심으로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또 다시 실패한 정부가 되지 않기 위해 '공동정부의 비전과 내용을 담보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최초의 성공한 정부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박근혜 후보야말로 이번 단일화가 성공한다면 최고의 숨어있는 조력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박근혜 후보가 지난 11월 6일 제안한 '4년 중임 개헌'은 향후 권력의 공존과 연합을 가능하게 할 제도적 매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우리 선거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 후보와 제1 야당 후보 모두 '4년 중임 개헌'을 정치공약으로 제시하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결정되든 차기 정부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개헌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전망할 수 있다.

단일화가 된다면 한 사람은 최초의 성공한 정부의 마지막 5년 단임 대통령이 될 것이다. 물론 성공한 정부는 앞서 설명한 대로 중도에서 진보를 아우르는 역사적 블록을 형성할 지혜와 능력의 결과로 주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새정치 공동선언에서 그동안 정치학계와 시민단체가 줄곧 제기해 온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누락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단일화가 어렵게 성사된다면 해야 할 일은 문재인과 안철수가 함께 손잡고 전국의 유세장을 누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고 복지와 조세, 생태와 평화로 정책협약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선거법 개정과 개헌의 방향을 당당하게 공약으로 내세워야 한다.

지금 두 후보와 측근들이 버려야 할 것은 단기적ㆍ정략적 셈법이며, 가져야 할 것은 역사적 교훈이 주는 중장기적 관점이다. 최초의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인가? 아니면 최초의 연임에 성공한 8년짜리 대통령이 될 것인가? 연이은 개혁정부의 13년 집권을 통해 역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굳건한 생태ㆍ평화ㆍ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꿈, 멋지지 아니한가? 87년으로 돌아가 역사의 수인(囚人)이 될 것인가, 아니면 '새시대의 맏이'가 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더 없이 필요한 것은 헌신과 양보를 강조하는 주관적 결단이 아니라 공존을 가능케 할 지혜로운 역사적 안목이다.


 /정상호 서원대학교 교수 

2012년 6월 22일 금요일

일본의 경거망동 막은 DJ, 경거망동 부추긴 MB


이글은 프레시안 2012-06-21일자 기사 '일본의 경거망동 막은 DJ, 경거망동 부추긴 MB'를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오, 평화'] MB와 MD, 그리고 한-미-일 삼각동맹

전편 보기: 미국은 왜 한일 군사협정에 집착하나?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의 최대 분수령은 2009년 4월 북한의 소형 인공위성 광명성 2호 발사였다. 북한의 발사체를 '대포동 2호'로 규정한 오바마 행정부는 강경 대응을 선택했고, 이후 한반도 정세는 부시 행정부 때보다 질적으로 더 나빠지고 말았다.

주목할 점은 당시 이명박 정부의 과잉 대응이 오늘날 한일 군사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미일동맹과 이에 반대하는 국내 여론 사이의 '샌드위치' 신세를 자초했다는 점이다. '북한의 로켓 발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미 관계는 물론이고 한-미-일 3자 관계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북한이 발사한 것이 위성이라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면 보다 유연한 대응이 가능했었다.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강화되는 상황은 외교적으로 제어가 가능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북한의 발사체를 탄도미사일로 '해석'하면 대북정책만 강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미사일방어체제(MD)를 비롯한 한-미-일 군사협력의 빌미가 되고 만다.

그런데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해 가장 강경한 태도를 보인 당사자는 바로 MB 정부였다. 이와 관련해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9년 3월 5일자 주한 미국대사관 외교 전문에는 미국측보다 한국측이 더 강경한 입장을 보인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3월 2일에 서울에서 열린 21차 안보정책구상회의(SPI) 회의 결과를 정리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전제국 국방부 정책실장은 한국 정부는 (북한의) 어떤 미사일이나 로켓 발사도 군사 도발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전 실장은 한미동맹이 정보와 감시 태세 강화, 로켓 발사 공동 모니터링, 합동 대응을 준비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전에 미국과 한국 정부는 가능하다면 유엔 안보리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원태호 합참 전략기획부장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탄도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된 기술적 요소 때문에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미국측 수석대표 데이비드 세드니 국방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로켓 발사가 (안보리 결의안) 위반이라는 미국의 입장은 결의안 1718호에 대한 미국 정부의 법리 해석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로켓 발사 자체를 안보리 결의안 위반한 것이라고 본 반면에, 오바마 행정부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데니스 블레어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북한이 발사하려는 것은 우주발사체(space-launch vehicle)"라고 답변했다. 그는 또 "나는 북한이 우주 발사를 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믿으려 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내 판단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당시 미국 정부 내에서 북한의 발사체에 대한 성격 규정이 명확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한국 정부가 차분하고 위기 예방형 대응을 선택했다면, 2009년의 파국은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2009년 광명성 2호 발사 장면. ⓒ연합뉴스

BDA식 제재가 추가 도발 억제?

또 다른 외교 전문에 따르면, MB 정부가 오바마 행정부에게 대북 제재 강화를 주문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2009년 3월 초 SPI 회의 참석차 방한한 세드니를 만난 김성환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현 외교통상부 장관)은 "미국 정부가 BDA(방코델타아시아)와 같은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북한이 여긴다면, 북한은 감히 추가적인 대포동 미사일 발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세드니가 "한국 정부가 대북 제재를 요청하는 것이냐"고 묻자, 김 수석은 "한국 정부에게는 6자회담과 남북관계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BDA식 대북 제재가 북한의 추가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는 김 수석의 주장은 사실관계에 대한 몰이해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은 2005년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 채택과 동시에 BDA를 통한 대북 금융제재를 가했는데,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뿌리치고 금융제재를 해제하지 않자 북한은 2006년 7월 탄도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다. 이에 대한 제재로 유엔 안보리는 규탄 성명을 채택했고 노무현 정부는 대북 식량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자 북한은 2006년 10월 핵실험으로 응수했다. 반면 북한은 2007년 들어 미국이 BDA 제재 해제를 약속하고 이를 이행하자, 영변 핵시설 동결ㆍ폐쇄 및 불능화 등 부분적인 비핵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관계마저 곡해한 MB 정부는 북한의 로켓 발사 이후 대북 제재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통해 MB 정부는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북미관계와 6자회담이 급진전될 수 있다는 우려를 덜 수 있었지만, 그 대가는 남북관계와 6자회담의 동시적 파탄 및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강화였다. .

미국, "좋은 기회"가 왔다!

2009년 4월 북한의 로켓 발사와 이에 대한 MB 정부의 강경책은 미일동맹의 오랜 숙원인 한-미-일 3각 동맹 구축의 절호의 기회로 간주됐다. 북한의 로켓 발사 8일 후 주일 미국대사관은 한국과 일본의 관료들과 학자들을 초청해 비공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평가한 미국 외교전문은 "최근 북한의 대포동 2호 탄도미사일 발사 전후의 전개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 정부가 보여준 긴밀한 협력은 양국 사이의 장벽이 깨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한국 및 일본과 함께 3자 안보 및 국방 대화는 두 정부에 대한 미국의 면밀한 감독과 능동적 개입을 요한다"고 강조했다.

2009년 7월 16-17일 도쿄에서 열린 차관보급 한-미-일 3자 국방회담(U.S.-Japan-ROK Defense Trilateral Talks)에서 미국의 의도는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회담에서 마이클 쉬퍼 국방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는 북한의 로켓 발사 및 핵실험 강행으로 한반도 정세가 "변곡점(inflection point, 變曲點)"에 와 있다며, "미국의 대북정책은 동맹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는데 맞춰져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변곡점이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갖춘 핵보유국이 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3각 동맹 구축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에드워드 라이스(Edward Rice) 주일미군 사령관은 "북한의 대포동 2호 발사에 대한 대처는 3자 협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3국 정부는 정보공유, 합동 기획 및 작전을 포함한 정책 및 작전 협력을 위한 필요한 구조를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경거망동 막은 DJ, 경거망동 부추긴 MB

주지하다시피, '북한위협론'은 미국의 MD를 비롯한 군사력과 동맹 강화는 물론이고 일본의 군사대국화의 가장 강력한 구실로 활용되어왔다. 한국의 외교 능력이 강조되는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으로는 한미동맹을 통해 북한의 위협을 억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주도함으로써 '북한위협론'이 악용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안목과 자질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의 외교는 오늘날 MB 정부와 너무나도 비교된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광명성 1호를 발사하자, 한반도 위기는 또 다시 고조되는 듯 했다. 북한의 로켓 발사 2주 전에는 금창리 핵의혹 시설 논란까지 터진 상태였다.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선제공격론이 불거졌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금창리 핵의혹 시설 논란과 관련해 미국에게 현장 방문을 요청했고 이를 수락한 미국은 '텅빈 동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 로켓 문제 역시 북미 미사일 대화를 적극 중재해 1999-2000년 북미관계의 황금기를 여는데 기여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DJ 정부는 MD에 참여해달라는 클린턴 행정부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고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ㆍ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으며 한반도 전장 특성상 MD는 북한 미사일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 방안이 아니라는 국익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동시에 일본의 경거망동에도 강한 견제구를 던졌다. 당시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이유로 미국과 MD 구축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북한 미사일 기지에 대한 선제공격론까지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천용택 국방장관은 "우리로서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 억제도 중요하지만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한-미-일 3개국의 정책조율 없는 선제공격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도 선제공격 계획이 없다며 꼬리를 내렸다. 대신 김대중 정부는 북일대화를 적극 권유했다.

이에 반해 MB 정부는 DJ 정부와 정반대의 선택을 하고 있다. 사사건건 북미ㆍ북일 대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북한의 핵과 로켓 문제에 가장 강력한 대응을 주문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MD 및 한-미-일 3각 동맹에 한국이 편입되는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한일 군사협력, 한-미-일 합동군사훈련, 일본 이지스함의 서해 배치 찬성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군사대국화에 적극 호응해주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DJ의 선택과 오늘날 MB의 선택을 비교해보면 또 한 가지 중요한 결과의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DJ의 '전화위복의 외교'를 거치면서 북한의 미사일 위협은 크게 줄어들었었다. 부시 행정부의 '역선택'이 아니었다면, 북한 미사일 문제도 10년 전에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MB 정부 5년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꾸준히 강화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안보도 그만큼 불안해졌다. 북한의 위협이 커졌다는 이유로 MD 편입과 한-미-일 3각 동맹이라는 금지선마저 넘나들고 있다.

* 필자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 바로가기* 필자가 에 연재한 글을 엮어 만든 책 가 발간되었습니다. ☞ 책 소개 바로가기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2012년 6월 9일 토요일

김두관 "DJ-盧때 서민 삶 오히려 나빠졌다"


이글은 뷰스엔뉴스(Views&News) 2012-06-08일자 기사 '김두관 "DJ-盧때 서민 삶 오히려 나빠졌다"'를 퍼왔습니다.
"중요한 건 선거 승리 아니라 집권해서 성공하는 것"

"큰 누나는 생선 장수, 큰 형은 서독 광부 출신, 농사짓던 둘째 형은 회사 경비원, 셋째 형은 중동 건설노동자 출신이고 장모님은 지금도 시장에서 야채를 팔고 있다."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김두관 경남지사가 오는 11일 출간할 자신의 정치철학과 비전을 담은 저서 '아래에서부터'(부제 '신자유주의 시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에서 밝힌 가족 이야기다.

김 지사가 행정자치부 장관직에서 물러나 서울생활을 정리한 2007년 봄 '희망대장정'에 나서 태백 장성탄광에서 지하 600m 내려갔다가 다시 3천m를 이동, 7시간의 '막장 체험'을 하고 나서 형님 생각에 많이 울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8일 연합뉴스가 미리 입수한 저서를 보면 5남1녀 가운데 다섯째인 김 지사는 정치를 하는 동생을 빼고 형과 누나들은 '대한민국 서민'이라고 말한다.

자신도 '직위를 빼고 나면 지금도 서민'이라는 그는 '서민 출신 대통령'이 아니라 '서민(노동자) 대통령'인 브라질 룰라 전 대통령을 롤 모델로 꼽고 있다.

그는 또 브라질 국민과 룰라에게서 '양극화의 최대 피해자인 서민이 정치의 주체로 전면에 나설 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서민 대통령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러면서 "시장의 강자가 자금력과 정보력으로 막대한 이윤을 취하는 걸 보고만 있는 정부는 왜 존재하는가"라고 물으며 '시장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지사는 요즘 이틀에 한 번 꼴로 지지자와 시민단체, 야권 관계자들과 만나며 자신의 진로와 관련한 의견을 듣고 있다.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선 "7월중 밝히겠다"고만 수차례 이야기했다. 여러가지 주변 정황을 볼 때 내달 중에 지사직을 사퇴하고 출마를 선언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 지사는 저서 곳곳에서 야권 주자인 민주당 문재인 고문, 서울대 안철수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물론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29세에 '민중의 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한 것을 시작으로 51세에 경남지사에 당선되기까지 22년간 선거에 8차례 출마했다. 당 대표 선거 3회, 대선 당내 경선까지 포함하면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공명심과 출세욕이 지나치다'는 비난도 들었지만 "권력이나 사익을 위해 출마한 것은 한 번도 없었고 다만 좋은 일을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었고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이 권력의지라면 나는 권력의지에 충만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책 '여는 글'에서도 김 지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다 많은 국민을 변화하고 진보된 세상, 구체적 사안이 진일보하는 사회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며 "이 점에서 심각한 정치권 불신에도 불구하고 직업 정치인이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기에 따라 상대적으로 권력의지가 약하다고 평가받고 있거나 직업 정치인이 아닌 야권내 주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김 지사는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두 분을 뛰어넘어 서민과 중산층이 주인되는 세상, 신자유주의 정부에서 서민정부로 가야한다"고 새로운 비전을 강조했다.

두 대통령이 집권했던 10년에 대해선 "참으로 많은 일을 했지만 정작 서민의 삶이 크게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나빠졌기 때문에 50%의 성공이었다"며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집권해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가 룰라 대통령을 만나게 된 것은 2006년부터 3년여에 걸쳐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시고 '백수' 신세로 방황할 때였다.

룰라를 '발견'한 순간을 그는 박범신의 소설 '촐라체'의 주인공이 깎아지른 듯한 해발 6천440m의 봉우리인 촐라체 북벽과 첫 대면했던 순간처럼 "강렬하고 짜릿했다"고 회고했다.

권력의지를 불태우던 김 지사가 주목한 부분은 룰라가 당선자의 후광을 활용해 분열된 개혁진영을 하나로 만들고 동시에 불안감에 떨고 있는 기득권층을 포용했다는 점이다.

지지세력을 배신하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았고 이를 위해 듣고 또 들었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는 점을 높이 샀다.

룰라의 '브라질 국민이라면 하루 세 끼 밥은 먹어야한다'는 대선 구호와 '가난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모든 정책의 최우선'이란 취임 일성도 김 지사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룰라의 성공은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브라질에서 과감한 복지정책을 통해 중산층을 크게 늘리는 대신 빈곤층을 줄이고 국가부채까지 해결, 세계 8위의 경제대국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에서 김 지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 참여정부 공과에 대한 평가, 이장에서 출발해 군수ㆍ도지사에 이른 정치역정, 여소야대 도정을 이끌면서 도의회를 설득해 복지정책을 관철시킨 과정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1부는 '리틀 노무현'에서 '한국의 룰라', 2부는 '성공한 서민정부'를 위한 리더십이란 소제목을 달았다.

리더십으로는 서민, 연대, 혁신, 경청, 원칙 등 5가지를 꼽았다.

연대를 언급한 부분에서 김 지사는 "한반도에서 가장 최상위의 연대는 남북간 연대며 이는 한반도 통합으로 동북아시아의 번영을 이끄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선 "야권연대의 기반을 허물 수도 있는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야권연대를 포기할 수는 없으며 국민의 눈높이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거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또 그는 "진보당은 사회적 약자에 가장 가까운 당으로,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의 정책을 진보적인 쪽으로 견인하는 소금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하고 "검찰의 정당 탄압에는 전 야권이 단결해서 대처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지사는 "프레스에 잘려나간 룰라의 새끼 손가락을 항상 생각하며 특권과 기득권에 맞서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서민정치를 하고 싶다"며 책을 마무리했다.

대선 주자로서 김지사 지지율은 1%대에 머물다가 최근 민주당 당 대표 경선에서 김한길 후보가 예상을 깨고 선두를 달리면서 조사기관에 따라 5∼8%까지 상승하고 있다.

그렇지만 '야권단일 후보 김두관'을 만든 경남의 야권이 여전히 김 지사의 대선 출마나 도지사직 사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한편으로 그의 대선 행보 관련 화법이 최근 전제를 단 가정법에서 직설법으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오는 12일 창원에서 여는 출판기념회가 사실상 김 지사의 대선 출정식이 될 것이란 추정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최종 입장을 밝혀야 할 시간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

연합뉴스

2012년 2월 24일 금요일

대선판세 가르는 ‘4·11 낙동강 전투’


이글은 대자보 2012-02-23일자 기사 '대선판세 가르는 ‘4·11 낙동강 전투’'를 퍼왔습니다.
[김영호 칼럼] 부산경남 민심 이반, 민주당 교만하면 민심 표변 알아야

1990년 3당합당 이후 지역주의가 고착화되어 연고지역 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영남-호남에서는 당선이 보장되었다. 공천이 곧 당선이었다. 그 까닭에 양대 정당이 영남-호남지역을 양분해 완전히 석권해 왔다. 그런데 4·11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의 텃밭인 영남지역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20년간의 정치적 연대인 PK+TK에 균열양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역대 선거에서 수도권이 격전지였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PK가 최대의 격전지로 떠올라 전운이 감돌고 있다. 역대 대선을 보면 PK의 향방이 대선의 판세를 가른다는 점에서 ‘낙동강 전투’로 비유될 정도이다. 

PK는 전통적인 야성지역이다. 1960년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봉화도 마산에서 먼저 들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종언을 고하는 1979년 부마항쟁도 부산-마산이 진앙지였다. PK는 신군부에 치명타를 준 신당 돌풍의 주역이기도 하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YS-DJ가 주도한 신한민주당의 후보 5명을 모두 당선시켰던 것이다. 관권과 금품이 난무한 부정선거였지만 신군부의 민주정의당은 2석을 얻는데 불과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13대 총선에서는 YS의 통일민주당이 15석 중 14석을 석권했다. 

1990년 YS의 민주통일당이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JP의 자유민주연합과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태어났다. 이른바 3당합당이다. YS의 연고지역인 PK가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연고지역인 TK와 정치적 연대를 맺은 것이다. 이후 PK는 줄곧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의 확고한 지지기반이었다. 노무현은 PK출신이다. 그럼에도 PK에서 그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호남당’이란 간판이 패인이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그는 새천년민주당의 후보로 입후보했다. 그런데 PK에서 그의 득표율은 29.4%에 그쳤다. 반면에 지역연고가 없는 한나라당의 이회창은 65.3%의 득표율을 올렸다. 호남의 지지가 노무현을 당선시켰던 것이다. 

MB정권 들어 그 철옹성 같던 PK가 영남지역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0년 6·2 지방선거가 그 시발점이다. 무소속 김두관의 경남지사 당선은 예상 밖의 승리였다. 그는 2003년 노무현 정권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후 2004년 총선, 2006년 경남지사, 2008년 총선에 출마했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이 점에서 그의 당선은 이변이다. 그와 함께 부산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김정길이 45%란 높은 득표율로 약진했다. 기초단체장 10명, 광역의원 23명, 기초의원 174명의 당선됐다. 한나라당의 아성 PK에서 일어난 파란이다. 서울시장 선거패배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날치기의 후폭풍이 MB정권의 권력누수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여기에 꼬리를 물고 터지는 MB 친인척-측근 비리가 MB정권을 혼수상태에 빠뜨렸다. 그 틈을 타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접수하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친이계의 무저항이 그것을 말한다. 그 배경에는 PK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PK의 이탈은 곧 대선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불만은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이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불통-강압통치와 TK우대-PK박대 인사에 대한 저항이 깔려있다. 

2007년 12월 대선의 승패는 노무현 심판론이 결정했다. MB의 압승은 친노세력에게 동면의 세월을 안겨줬다. 하지만 MB의 실정은 4년만에 그들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줬다. 노무현의 비서실장 문재인을 부산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그 선봉장으로 문성근이 나섰고 김정길이 가세했다. 친노세력이 화려하게 부활하여 민주통합당의 지도부를 장악했다. 부산 공략을 통해 대권까지 간다는 전략이다. 여기에 조심스럽게 무소속으로 관망하던 김두관이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이라 기치를 들고 통합대열에 가세했다. 다분히 호남을 의식한 대목이라 대권 도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총선 이후 상황전개에 따라 결행하겠다는 뜻이다. 

TK와 PK가 합세한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1992년 김영삼, 2007년 이명박 당선이 그것이다. 하지만 두 지역이 분열한 1997년, 2002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노무현한테 실패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간판을 바꾸고 탈색작업을 하느라 분주하다. 같은 이유로 민주통합당이 PK에 공을 들인다. 4·11 총선에서 문재인의 부산, 김두관의 경남이란 거점공략이 승기를 잡으면 대권쟁취의 열쇠를 쥘 수도 있다. 하지만 유동성이 너무 크다. PK는 항구도시, 공업지대가 포진해 있어 외지인, 노동자가 많아 역동성이 높다. 민주통합당이 교만한 표정을 짓는 순간 민심도 표변한다는 점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언론광장 공동대표 시사평론가 <건달정치 개혁실패>의 저자 본지 고문

2012년 2월 18일 토요일

"MBC보도국장 황헌, DJ서거 뉴스 축소했던 인물"


이글은 미디어스 2012-02-17일자 기사 '"MBC보도국장 황헌, DJ서거 뉴스 축소했던 인물"'을 퍼왔습니다.
MBC기자회 "어느 자리에 가든 편파시비…기자들 우롱하나?"

MBC기자들은 황헌 MBC 논설위원실장이 MBC 신임 보도국장으로 기용된 것에 대해 "공정방송을 염원하는 '기자들의 절규'를 외면하는 선을 넘어 철저하게 우롱한 처사"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 16일 MBC 신임 보도국장으로 임명된 황헌 MBC <100분 토론> 진행자

MBC기자회 비상대책위원회는 17일 입장을 내어 황헌 신임 보도국장에 대해 "논설위원실장을 지내면서 권력을 비판하는 논평에는 숱한 수정을 요구해 논설위원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던 인물"이라며 " 진행자로서 시청자들에게도 여권 편향적 인물로 평가돼 왔다"고 지적했다.
비대위는 "(황헌 국장이) 에서 FTA 논란을 다루면서 시종일관 한나라당 편을 들자 당시 시청자게시판에는 '김종훈은 청문회로, 황헌은 한나라당으로'라는 야유가 오를 정도였다"며 "부국장 시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관련 뉴스를 축소하는 데 앞장서는 등 어느 자리에 가든 편파 시비를 일으켰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철호 보도국장이 베이징지사장으로 발령난 것에 대해서는 "기존에 없던 자리까지 만들어 영전시켰다. 기자들의 퇴진요구를 철저하게 외면한 국장을 챙겨준 셈"이라고 꼬집었다.
비대위는 "예산을 아껴야 한다며 임기가 한참 남은 2명의 영상취재 특파원을 느닷없이 소환한다고 발표한 게 바로 엊그제인데, 이 무슨 '충성파'에 대한 논공행상이며 보은인사를 위한 '위인설관'인가"라며 "김 사장이 회사에는 나타나지 않고 외부에서 숨어, 질서 문란행위를 중단하지 않고 있다. 그가 MBC를 떠나야할 이유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비대위는 "김 사장은 제작거부나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일부 기자들에게 해외 연수라는 특혜를 줌으로써 기자 사회의 편가르기도 서슴치 않으며 조직 분위기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며 "앞으로 있을 3명의 특파원 선발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식의 편가르기와 '떡고물' 인사가 재연된다면 우리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민병우 사회1부장, 정형일 문화과학부장, 한정우 국제부장은 16일 "이번 보도국장 인사를 통해 김재철 사장이 회사에 대한 손톱만큼의 애정도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며 보직 사퇴 의사를 밝히고 MBC 파업 행렬에 동참하고 나섰다. 보직 부장들이 파업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MBC 사측은 17일 오정환 기자를 사회1부장으로 임명했으며, 문화과학부장과 국제부장 자리에는 각각 정용준 기자와 조상휘 기자를 발령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