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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사설] 누가 누구를 ‘친일파’라고 욕하는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0-23일자 사설 '[사설] 누가 누구를 ‘친일파’라고 욕하는가'를 퍼왔습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주변 사람들은 부일장학회 창설자인 고 김지태씨를 몇 차례 죽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강압으로 재산을 빼앗아 그의 가슴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 후보는 그를 “부정부패로 많은 지탄을 받았던 분”이라고 비난했고, 박 후보의 측근인 이정현 공보단장은 ‘친일파’라고까지 매도했다.김지태씨는 5·16 쿠데타 후 서슬 퍼렇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손에 수갑을 찬 채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부일장학회 등의 재산을 포기한다는 각서에 날인했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박 후보는 가해자 쪽이고, 김지태씨와 유족들은 피해자들이다. 박 후보가 엎드려 잘못을 빌어도 시원치 않을 형편인데도 오히려 고인을 모욕하고 있으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모든 것을 떠나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다.그중에서도 압권은 박 후보의 ‘입’을 자처하는 이정현 공보단장의 친일파 발언이다. 이 단장은 김지태씨가 고등학교 졸업 후 일제의 수탈기구인 동양척식회사에 입사한 것 등을 들어 그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이 단장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일본에 충성하겠다’는 혈서까지 써가며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고,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 이름)는 뭐라고 불러야 옳은가. 친일 부역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면 박 전 대통령은 당연히 특A급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친일파의 딸’이 재산을 강탈당한 피해자를 친일파로 몰고 있는 물구나무선 풍경이다.박 후보 쪽이 사실관계도 맞지 않는 주장을 잇달아 내세워 정수장학회 문제의 본질을 흐리려는 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에서 김지태씨가 헌납한 돈은 전체의 5.8%에 불과하다”는 등의 주장도 숫자 장난을 통한 진실 흐리기일 뿐이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위가 밝힌 5·16장학회 재산 내역을 봐도 김지태씨 재산은 부산일보·문화방송 주식 3억4800여만환에 토지 10만147평으로 김씨 재산이 외부 성금보다 훨씬 많았다.이정현 단장이 뜬금없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연차씨 등을 들먹이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정부가 공개적으로 헌납을 받은 반면, 노 전 대통령 쪽은 사적으로 돈을 수수했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도 전형적인 물귀신 작전이다. 엉뚱한 논쟁을 일으켜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 정수장학회 문제의 초점을 흐리려는 유치한 술책이다. 하지만 박 후보 쪽이 이런 치사한 작전으로 정수장학회 문제의 덫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2012년 7월 22일 일요일

정말 좋은 이 집, 하지만 절대 살고 싶지 않다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7-21일자 기사 '정말 좋은 이 집, 하지만 절대 살고 싶지 않다'를 퍼왔습니다.
[전통가옥의 숨은 멋 엿보기 119] 친일 매국노 송병준 가옥

▲ 용인집 구한말의 친일 매국노 송병준의 집 ⓒ 하주성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은 '송병준'을 친일매국노 제1호로 꼽았다.
  
송병준은 한말에 현감, 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통감부 권력을 등에 업고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 자리에 올랐다. 또한 합병 후에는 일본의 백작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전류에는 그의 행각과는 걸맞지 않게 단편적이고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1857년(1858년이라고도 하나 실제는 1857년이다) 8월 20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났다(태어난 곳도 장진이 아니라 서울의 기생집에서 태어난 뒤 아버지가 장진으로 데려갔다 한다). 아버지는 장진군의 속사인 송문수이고, 생모는 기생으로 덕산 홍씨라고 한다.
  
부친 송문수와 본처(제주 고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나, 너댓명의 첩을 두었기 때문에 송병준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송병준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송문수는 일가를 이끌고 경상도 추풍령 부근에 내려와 정착했다. 서자로 태어난 송병준은 적모 밑에서 심하게 구박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여덟 살 때 어머니로부터 도둑질 혐의를 받고 쫓겨나게 되었다.

▲ 중문 사랑채와 행랑채를 잇는 중문 ⓒ 하주성
▲ 사랑채 매국노 송병준의 집 사랑 ⓒ 하주성

이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집에서 쫓겨난 송병준은 동학교도(송병준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났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믿어지지 않는다)라 칭하는 일단의 도적떼에게 구출되어 3개월 가량 쫓아다니다 헤어진 후, 도둑질과 문전걸식으로 연명하였다. 하루는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밭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도리어 주인이 불쌍하게 여겨 함께 살게 되었다.
  
얼마 후 주인이 참외를 팔러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가게 된 송병준은 우연히 민씨 세도가인 민태호(고종의 외숙, 민영환의 양부)의 눈에 띄어, 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일 송병준은 이 홍씨를 자기의 생모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자기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 낸 거짓말이었다. (인터넷 검색자료)

▲ 누정 사랑채 끝에 한 칸을 돌출시켜 조성한 누정 ⓒ 하주성

강 교수의 글 에서 첫 단락 '배신과 사기의 배후'에 소개한 글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하여 그의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하여서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와 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하늘과 역사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뒤의 그의 행적은 일일이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 송병준이 용인 양지에 살 던 집이 현재는 남양주시 평내동 궁집 옆에 자리를 하고 있다. 원래 용인에 있었던 집을 후손들의 몰락으로 매각한 것이다. 이 집을 그대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하여 이곳에서는 이 집을 '용인집'이라고 부른다.

▲ 행랑채 중문에 붙여 길게 지은 행랑채와 광 ⓒ 하주성
▲ 사랑채 안 안채에서 바라다 본 사랑채의 안 ⓒ 하주성
▲ 행랑채 안마당에서 본 행랑채. 광과 방 부엌의 순으로 조성하였다 ⓒ 하주성

용인에 이 집이 있었을 때는 그 세도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그 세도가의 몰락은 결국 집까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몰락한 세도가의 상징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남양주로 이건하었다. 참으로 세상을 살면서, 왜 인간이 올곧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집이다.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용인집은 구한말의 가옥이다. ㄴ자로 꾸며진 사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ㄱ자로 꾸민 안채가 합해 튼 ㅁ자형으로 조성하였다. 집 앞에 놓인 석물들도 모두 용인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집의 세도를 알 만하다. 이 집은 아마도 송병준이 용인 양지현감을 지낼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 안채 구한말 대가집의 형태로 꾸며진 안채 ⓒ 하주성

한편에 중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꺾인 행랑채와 우측의 사랑채가 ㄴ자 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 우측 끝에는 한 칸을 앞으로 덧달아 누정을 만들었다. 창문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는 것을 보아, 당시 세도가들의 집 꾸밈을 알 수 있다. 구한말에 지은 집들에서 이런 유리문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안채는 안마당을 지나 ㄱ자 집이다. 8칸 팔작지붕으로 지은 안채는 잘 조형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올렸다. 방과 대청, 부엌 등을 고르게 배치한 것이나, 치목과 석재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당대의 재능이 뛰어난 장인들이 지은 집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 석물 용인에 있는 송병준의 집에서 옮겨왔다는 석조물 ⓒ 하주성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동안 만난 200여 채의 고택. 그 중에서 용인집은 집 그 자체로는 정말로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절대로 살고 싶지가 않다. 이 집에서는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한 매국의 냄새가 짙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냄새가 난다. 그래도 이 집을 돌아보는 것은, 역사는 준엄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헌절인 7월17일에 돌아보았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갚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경기리포트와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7월 17일에 다녀왔습니다

하주성(tradition)

정말 좋은 이 집, 하지만 절대 살고 싶지 않다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7-21일자 기사 '정말 좋은 이 집, 하지만 절대 살고 싶지 않다'를 퍼왔습니다.
[전통가옥의 숨은 멋 엿보기 119] 친일 매국노 송병준 가옥

▲ 용인집 구한말의 친일 매국노 송병준의 집 ⓒ 하주성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은 '송병준'을 친일매국노 제1호로 꼽았다.
  
송병준은 한말에 현감, 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통감부 권력을 등에 업고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 자리에 올랐다. 또한 합병 후에는 일본의 백작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전류에는 그의 행각과는 걸맞지 않게 단편적이고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1857년(1858년이라고도 하나 실제는 1857년이다) 8월 20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났다(태어난 곳도 장진이 아니라 서울의 기생집에서 태어난 뒤 아버지가 장진으로 데려갔다 한다). 아버지는 장진군의 속사인 송문수이고, 생모는 기생으로 덕산 홍씨라고 한다.
  
부친 송문수와 본처(제주 고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나, 너댓명의 첩을 두었기 때문에 송병준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송병준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송문수는 일가를 이끌고 경상도 추풍령 부근에 내려와 정착했다. 서자로 태어난 송병준은 적모 밑에서 심하게 구박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여덟 살 때 어머니로부터 도둑질 혐의를 받고 쫓겨나게 되었다.

▲ 중문 사랑채와 행랑채를 잇는 중문 ⓒ 하주성
▲ 사랑채 매국노 송병준의 집 사랑 ⓒ 하주성

이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집에서 쫓겨난 송병준은 동학교도(송병준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났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믿어지지 않는다)라 칭하는 일단의 도적떼에게 구출되어 3개월 가량 쫓아다니다 헤어진 후, 도둑질과 문전걸식으로 연명하였다. 하루는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밭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도리어 주인이 불쌍하게 여겨 함께 살게 되었다.
  
얼마 후 주인이 참외를 팔러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가게 된 송병준은 우연히 민씨 세도가인 민태호(고종의 외숙, 민영환의 양부)의 눈에 띄어, 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일 송병준은 이 홍씨를 자기의 생모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자기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 낸 거짓말이었다. (인터넷 검색자료)

▲ 누정 사랑채 끝에 한 칸을 돌출시켜 조성한 누정 ⓒ 하주성

강 교수의 글 에서 첫 단락 '배신과 사기의 배후'에 소개한 글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하여 그의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하여서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와 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하늘과 역사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뒤의 그의 행적은 일일이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 송병준이 용인 양지에 살 던 집이 현재는 남양주시 평내동 궁집 옆에 자리를 하고 있다. 원래 용인에 있었던 집을 후손들의 몰락으로 매각한 것이다. 이 집을 그대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하여 이곳에서는 이 집을 '용인집'이라고 부른다.

▲ 행랑채 중문에 붙여 길게 지은 행랑채와 광 ⓒ 하주성
▲ 사랑채 안 안채에서 바라다 본 사랑채의 안 ⓒ 하주성
▲ 행랑채 안마당에서 본 행랑채. 광과 방 부엌의 순으로 조성하였다 ⓒ 하주성

용인에 이 집이 있었을 때는 그 세도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그 세도가의 몰락은 결국 집까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몰락한 세도가의 상징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남양주로 이건하었다. 참으로 세상을 살면서, 왜 인간이 올곧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집이다.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용인집은 구한말의 가옥이다. ㄴ자로 꾸며진 사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ㄱ자로 꾸민 안채가 합해 튼 ㅁ자형으로 조성하였다. 집 앞에 놓인 석물들도 모두 용인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집의 세도를 알 만하다. 이 집은 아마도 송병준이 용인 양지현감을 지낼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 안채 구한말 대가집의 형태로 꾸며진 안채 ⓒ 하주성

한편에 중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꺾인 행랑채와 우측의 사랑채가 ㄴ자 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 우측 끝에는 한 칸을 앞으로 덧달아 누정을 만들었다. 창문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는 것을 보아, 당시 세도가들의 집 꾸밈을 알 수 있다. 구한말에 지은 집들에서 이런 유리문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안채는 안마당을 지나 ㄱ자 집이다. 8칸 팔작지붕으로 지은 안채는 잘 조형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올렸다. 방과 대청, 부엌 등을 고르게 배치한 것이나, 치목과 석재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당대의 재능이 뛰어난 장인들이 지은 집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 석물 용인에 있는 송병준의 집에서 옮겨왔다는 석조물 ⓒ 하주성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동안 만난 200여 채의 고택. 그 중에서 용인집은 집 그 자체로는 정말로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절대로 살고 싶지가 않다. 이 집에서는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한 매국의 냄새가 짙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냄새가 난다. 그래도 이 집을 돌아보는 것은, 역사는 준엄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헌절인 7월17일에 돌아보았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갚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경기리포트와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7월 17일에 다녀왔습니다

하주성(tradition)

정말 좋은 이 집, 하지만 절대 살고 싶지 않다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7-21일자 기사 '정말 좋은 이 집, 하지만 절대 살고 싶지 않다'를 퍼왔습니다.
[전통가옥의 숨은 멋 엿보기 119] 친일 매국노 송병준 가옥

▲ 용인집 구한말의 친일 매국노 송병준의 집 ⓒ 하주성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은 '송병준'을 친일매국노 제1호로 꼽았다.
  
송병준은 한말에 현감, 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통감부 권력을 등에 업고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 자리에 올랐다. 또한 합병 후에는 일본의 백작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전류에는 그의 행각과는 걸맞지 않게 단편적이고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1857년(1858년이라고도 하나 실제는 1857년이다) 8월 20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났다(태어난 곳도 장진이 아니라 서울의 기생집에서 태어난 뒤 아버지가 장진으로 데려갔다 한다). 아버지는 장진군의 속사인 송문수이고, 생모는 기생으로 덕산 홍씨라고 한다.
  
부친 송문수와 본처(제주 고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나, 너댓명의 첩을 두었기 때문에 송병준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송병준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송문수는 일가를 이끌고 경상도 추풍령 부근에 내려와 정착했다. 서자로 태어난 송병준은 적모 밑에서 심하게 구박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여덟 살 때 어머니로부터 도둑질 혐의를 받고 쫓겨나게 되었다.

▲ 중문 사랑채와 행랑채를 잇는 중문 ⓒ 하주성
▲ 사랑채 매국노 송병준의 집 사랑 ⓒ 하주성

이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집에서 쫓겨난 송병준은 동학교도(송병준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났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믿어지지 않는다)라 칭하는 일단의 도적떼에게 구출되어 3개월 가량 쫓아다니다 헤어진 후, 도둑질과 문전걸식으로 연명하였다. 하루는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밭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도리어 주인이 불쌍하게 여겨 함께 살게 되었다.
  
얼마 후 주인이 참외를 팔러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가게 된 송병준은 우연히 민씨 세도가인 민태호(고종의 외숙, 민영환의 양부)의 눈에 띄어, 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일 송병준은 이 홍씨를 자기의 생모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자기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 낸 거짓말이었다. (인터넷 검색자료)

▲ 누정 사랑채 끝에 한 칸을 돌출시켜 조성한 누정 ⓒ 하주성

강 교수의 글 에서 첫 단락 '배신과 사기의 배후'에 소개한 글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하여 그의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하여서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와 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하늘과 역사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뒤의 그의 행적은 일일이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 송병준이 용인 양지에 살 던 집이 현재는 남양주시 평내동 궁집 옆에 자리를 하고 있다. 원래 용인에 있었던 집을 후손들의 몰락으로 매각한 것이다. 이 집을 그대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하여 이곳에서는 이 집을 '용인집'이라고 부른다.

▲ 행랑채 중문에 붙여 길게 지은 행랑채와 광 ⓒ 하주성
▲ 사랑채 안 안채에서 바라다 본 사랑채의 안 ⓒ 하주성
▲ 행랑채 안마당에서 본 행랑채. 광과 방 부엌의 순으로 조성하였다 ⓒ 하주성

용인에 이 집이 있었을 때는 그 세도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그 세도가의 몰락은 결국 집까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몰락한 세도가의 상징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남양주로 이건하었다. 참으로 세상을 살면서, 왜 인간이 올곧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집이다.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용인집은 구한말의 가옥이다. ㄴ자로 꾸며진 사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ㄱ자로 꾸민 안채가 합해 튼 ㅁ자형으로 조성하였다. 집 앞에 놓인 석물들도 모두 용인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집의 세도를 알 만하다. 이 집은 아마도 송병준이 용인 양지현감을 지낼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 안채 구한말 대가집의 형태로 꾸며진 안채 ⓒ 하주성

한편에 중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꺾인 행랑채와 우측의 사랑채가 ㄴ자 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 우측 끝에는 한 칸을 앞으로 덧달아 누정을 만들었다. 창문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는 것을 보아, 당시 세도가들의 집 꾸밈을 알 수 있다. 구한말에 지은 집들에서 이런 유리문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안채는 안마당을 지나 ㄱ자 집이다. 8칸 팔작지붕으로 지은 안채는 잘 조형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올렸다. 방과 대청, 부엌 등을 고르게 배치한 것이나, 치목과 석재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당대의 재능이 뛰어난 장인들이 지은 집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 석물 용인에 있는 송병준의 집에서 옮겨왔다는 석조물 ⓒ 하주성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동안 만난 200여 채의 고택. 그 중에서 용인집은 집 그 자체로는 정말로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절대로 살고 싶지가 않다. 이 집에서는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한 매국의 냄새가 짙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냄새가 난다. 그래도 이 집을 돌아보는 것은, 역사는 준엄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헌절인 7월17일에 돌아보았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갚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경기리포트와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7월 17일에 다녀왔습니다

하주성(tradition)

정말 좋은 이 집, 하지만 절대 살고 싶지 않다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2-07-21일자 기사 '정말 좋은 이 집, 하지만 절대 살고 싶지 않다'를 퍼왔습니다.
[전통가옥의 숨은 멋 엿보기 119] 친일 매국노 송병준 가옥

▲ 용인집 구한말의 친일 매국노 송병준의 집 ⓒ 하주성

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은 '송병준'을 친일매국노 제1호로 꼽았다.
  
송병준은 한말에 현감, 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통감부 권력을 등에 업고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 자리에 올랐다. 또한 합병 후에는 일본의 백작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전류에는 그의 행각과는 걸맞지 않게 단편적이고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1857년(1858년이라고도 하나 실제는 1857년이다) 8월 20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났다(태어난 곳도 장진이 아니라 서울의 기생집에서 태어난 뒤 아버지가 장진으로 데려갔다 한다). 아버지는 장진군의 속사인 송문수이고, 생모는 기생으로 덕산 홍씨라고 한다.
  
부친 송문수와 본처(제주 고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나, 너댓명의 첩을 두었기 때문에 송병준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송병준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송문수는 일가를 이끌고 경상도 추풍령 부근에 내려와 정착했다. 서자로 태어난 송병준은 적모 밑에서 심하게 구박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여덟 살 때 어머니로부터 도둑질 혐의를 받고 쫓겨나게 되었다.

▲ 중문 사랑채와 행랑채를 잇는 중문 ⓒ 하주성
▲ 사랑채 매국노 송병준의 집 사랑 ⓒ 하주성

이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집에서 쫓겨난 송병준은 동학교도(송병준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났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믿어지지 않는다)라 칭하는 일단의 도적떼에게 구출되어 3개월 가량 쫓아다니다 헤어진 후, 도둑질과 문전걸식으로 연명하였다. 하루는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밭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도리어 주인이 불쌍하게 여겨 함께 살게 되었다.
  
얼마 후 주인이 참외를 팔러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가게 된 송병준은 우연히 민씨 세도가인 민태호(고종의 외숙, 민영환의 양부)의 눈에 띄어, 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일 송병준은 이 홍씨를 자기의 생모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자기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 낸 거짓말이었다. (인터넷 검색자료)

▲ 누정 사랑채 끝에 한 칸을 돌출시켜 조성한 누정 ⓒ 하주성

강 교수의 글 에서 첫 단락 '배신과 사기의 배후'에 소개한 글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하여 그의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하여서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와 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하늘과 역사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뒤의 그의 행적은 일일이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 송병준이 용인 양지에 살 던 집이 현재는 남양주시 평내동 궁집 옆에 자리를 하고 있다. 원래 용인에 있었던 집을 후손들의 몰락으로 매각한 것이다. 이 집을 그대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하여 이곳에서는 이 집을 '용인집'이라고 부른다.

▲ 행랑채 중문에 붙여 길게 지은 행랑채와 광 ⓒ 하주성
▲ 사랑채 안 안채에서 바라다 본 사랑채의 안 ⓒ 하주성
▲ 행랑채 안마당에서 본 행랑채. 광과 방 부엌의 순으로 조성하였다 ⓒ 하주성

용인에 이 집이 있었을 때는 그 세도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그 세도가의 몰락은 결국 집까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몰락한 세도가의 상징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남양주로 이건하었다. 참으로 세상을 살면서, 왜 인간이 올곧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집이다.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용인집은 구한말의 가옥이다. ㄴ자로 꾸며진 사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ㄱ자로 꾸민 안채가 합해 튼 ㅁ자형으로 조성하였다. 집 앞에 놓인 석물들도 모두 용인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집의 세도를 알 만하다. 이 집은 아마도 송병준이 용인 양지현감을 지낼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 안채 구한말 대가집의 형태로 꾸며진 안채 ⓒ 하주성

한편에 중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꺾인 행랑채와 우측의 사랑채가 ㄴ자 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 우측 끝에는 한 칸을 앞으로 덧달아 누정을 만들었다. 창문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는 것을 보아, 당시 세도가들의 집 꾸밈을 알 수 있다. 구한말에 지은 집들에서 이런 유리문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안채는 안마당을 지나 ㄱ자 집이다. 8칸 팔작지붕으로 지은 안채는 잘 조형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올렸다. 방과 대청, 부엌 등을 고르게 배치한 것이나, 치목과 석재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당대의 재능이 뛰어난 장인들이 지은 집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 석물 용인에 있는 송병준의 집에서 옮겨왔다는 석조물 ⓒ 하주성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동안 만난 200여 채의 고택. 그 중에서 용인집은 집 그 자체로는 정말로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절대로 살고 싶지가 않다. 이 집에서는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한 매국의 냄새가 짙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냄새가 난다. 그래도 이 집을 돌아보는 것은, 역사는 준엄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헌절인 7월17일에 돌아보았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갚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경기리포트와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7월 17일에 다녀왔습니다

하주성(tradition)

2012년 7월 2일 월요일

친일파 후손 현병철 인권위원장, 그가 연임돼선 안될 진짜 이유


이글은 미디어스 2012-07-02일자 기사 '친일파 후손 현병철 인권위원장, 그가 연임돼선 안될 진짜 이유'를 퍼왔습니다.
[인터뷰]현병철 체제 인권위 뛰쳐나온 인권정책연구소 김형완 소장

현병철 체제의 국가인권위에서 쫓겨난 건 아니다.  ‘양심’상 버티지 못해 뛰쳐나왔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김형완. 그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과장이었으며 지금은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이다. 4개월만 더 채우면 20년 근속으로 공무원연금 대상자가 돼 노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던 2010년 9월, 그는 모든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던졌다.

 ▲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연임 소식. 2010년 9월 현 위원장 체제에서 자진 퇴사한 인권정책연구소 김형완 소장을 찾아갔다. 6월 29일 오전 인터뷰가 진행됐다ⓒ미디어스

이명박 정부 아래 대통령직속기구화 시도 등 국가인권위 독립성은 크게 훼손돼 왔다. 특히, 국가인권위법에 “위원장은 위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인권위원도 아닌 현병철 씨를 위원장으로 임명해 ‘무자격자’ 논란이 뜨거웠다. 그 후, 국가인권위는 후퇴했다. 

김형완 소장은 “보좌하면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평생 나는 신문, 뉴스도 안 보고 산 사람이다”, “청와대로부터 내정받고 KBS 9시뉴스를 보기 시작했고 구독도 신청했다”며 “개인교사나 다름없이 가르쳐달라”는 서슴없는 말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이야기를 서슴없이 이야기하니 괜찮은 분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는 얘기다.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제 1덕목을 “인권에 대한 전문성이 없더라도 권력에 쓴 소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꼽는 그이기 때문에 가능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측은 안타깝게도 빗나갔다. 김형완 소장은 “새빨간 위장전술이었던 것”이라고 비판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사회적으로 혼란스런 사안에 대해서는 입장 표명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현병철 위원장이 그 기대를 무너뜨렸다.
김형완 소장은 현병철 위원장의 ‘공’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충실해 국민의 기본권을 외면하고 눈감아 정권으로 하여금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도록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가인권위는 개라고 생각한다”며 국가인권위에 대한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한마디로 국가인권위는 개라고 생각한다. 도둑이 집에 들어왔을 때 짖지 않으면 개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이 잡아먹거나 버리거나 팔아치운다. 국민이 도둑을 지키라고 국가인권위라는 개를 집안에 들여오고 집도 지워주고 1년에 220억 원이라는 돈을 쏟아 붓는다. 그런데 이 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잡아먹거나 아니면 버리거나 내다 팔 것이다. 국가인권위는 이런 사태의 엄중성을 알아야 한다”
김형완 소장은 국가인권위를 사직 한 후, 지난해 4월 국내 첫 민간 인권전담 전문기구인 ‘인권정책연구소’를 개소했다.
현병철 위원장의 연임소식과 함께 는 29일 영등포구에 위치한 인권정책연구소를 찾았다. 김 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국가인권위에 있을 당시 날로 후퇴하고 있으나 국가인권정책과장으로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해 직무유기하는 것 같아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지금은 덜 받는 편”이라며 본 기자를 맞아줬다.
아래는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국가인권위를 떠나고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 김형완 소장ⓒ미디어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국내 인권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가인권위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직무유기였다고 생각하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은 스트레스는 덜 받는 편이다…인권정책연구소가 지난해 4월에 만들어진 이후 인권교육교재 개발에 집중해왔다. 인권 관련 저작물이나 번역서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가 제기하는 인권적 쟁점이 예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계가 있어서 인권과 관련해 강조 또는 이해되어야할 점들이 무엇인지 담았다. 예컨대, 법치주의라고 하면 국가권력이 법을 통해서 국민들을 통치하는 것으로 왜곡돼 왔는데 사실 원 개념은 법을 통해 공권력의 자의적인 오남용을 막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법치주의이다. 이런 오해와 왜곡들이 횡행해 바로 잡고자 한다. 학생인권조례와 집회시위의 자유를 이야기하면 상대측에서는 교사의 인권과 경찰의 인권을 들고 나오는데 ‘인권’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권은 기본적으로 권력관계를 전제로 성립된다. 학생인권이 신장되고 시민들의 집회시위자유가 신장되면 교사와 경찰관의 ‘직권’이 침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인권’이 아니다. 그들이 인권을 주장하려면 주장 대상은 학생과 시위대가 아닌 그들과 권력관계에 있는 이들이 돼야 한다. 사장이 노동자들을 향해 인권을 보장하라는 주장이 어딨나”
MBC 사태에도 적용이 될까? J씨와 관련해 노동자들의 폭로를 사측에서는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이야기한다면?
“MBC 사태는 공영방송의 핵심가치인 공정보도의 문제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간다. 국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노조가 파업을 하는 것이고 사장에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마치 MBC 내부 이해관계자들이 쌈박질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공정방송’에 관한 것임을 의도적으로 가리기 위한 주장이다. 사장이 프라이버시침해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렇게 봐야 한다. 국민의 알권리와 공직자의 사생활 침해 문제는 항상 대립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것을 우선할 것이냐. 일정 권한을 부여받고 공적 지위를 가진 사람은 그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프라이버시보다는 국민 봉사와 복무의 가치가 우선하기 때문에 국민의 알권리가 우선이다. 그래서 청문회 과정에서 고위공직자들의 위장전입, 병역, 성적표 등 다 뒤지는 게 아니냐. 프라이버시를 보호받고자 한다면 공직을 하지 않으면 된다“
현병철 연임 소식 때문에 온 것인데 사설이 길었다
“황당하고 착잡했다. 황당할 것으로 치면 이 분은 인권위원장 직으로 연임은커녕 임명된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도 불행일 것이다. 노년에 불명예를 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고, 국가와 사회적으로도 불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권위원장 직으로도 부적절하다?
“일제 시절 참의원을 했던 현준호라는 대표적인 친일파가 있었다. 그의 자손이 현병철 위원장이다. 친일세력의 자손이라면 선대의 과오에 대해서 국가와 사회공동체 앞에 자숙하는 모습이 온당한 처신이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서 중요한 공직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부적절하고 그런 사람을 임용한 인사는 부당하다…두 번째는 불법성이다. 국가인권위법에 보면 ‘위원장은 위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당시 현병철 위원장은 인권위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원장 자격이 없었던 ‘무자격자’였던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전효숙 씨가 헌법재판소장으로 내정됐다가 낙마하는 사건이 있었다. 헌법 제111조 제4항 ‘헌법재판소장은 현직 헌법재판관 중에서 임명한다’는 규정에 어긋난다는 게 새누리당의 주장이었다. 애시 당초 이명박 대통령이 불법적인 인사를 한 것이다. 청와대가 연임을 결정한 이유도 터무니없다”
“중립적이고 균형된 시각을 가졌다”, “북한인권문제를 공론화하는데 기여했다”라는 등의 이유로 연임이 결정됐다
“첫째,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 품격을 높이기는커녕 실추시킨 장본인이 현병철 위원장이다. 언론의 자유는 급격히 하락했다. 프랑크 라 뤼 유엔 특별보고관이 한국에 파견됐고 그는 한국의 표현의 자유가 심각히 위축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 전세계 국가위원회협의회인 ICC 의장국으로 내정된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둘째, 균형적인 인권 정책을 추진했다는데 그 전제는 그 이전까지는 국가인권위가 편향됐다는 얘기다. 편향됐었다면 국제인권사회에서 모범적으로 평가됐을지 되묻고 싶다. 그런 평가로 ICC 의장국으로 추대됐던 것이다. 이는 달리 보면, 청와대가 이야기하는 균형이라는 것은 대통령 코드에 충실하고 권력의 눈치를 보는 인권위로 전락했다는 반어적 표현이다. 셋째, 현병철 위원장이 추진한 북한인권도 실효성이 없는 전시성 사업이었다는 점이다. 현병철 위원장은 직접 독려활동을 하면서 탈북자들로 하여금 인권침해사례를 진정 받았다. 600여건 정도로 알고 있는데, 전부 조사중지 결정을 하거나 아니면 각하시켜야할 처지에 봉착했다. 애당초 주변에서는 북한인권침해 관련해서 진정을 ‘할 수 없다’고 만류했었다. 인권을 정치적 퍼포먼스로 오용한 것이다. 인권의 문제를 정치적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한 파렴치한 짓을 한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탈북자들이 남한 정착을 위한 차별금지라거나 실질적은 인권 보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는데…. 탈북자들의 신원조회 과정도 불투명하다. 탈북자들은 신분 자체가 불안정한 사람이다. 주소가 노출됐을 때 당할 수 있는 불이익들이 있다. 아주 엄격히 보안을 지켜줬어야 할 부분인데 현병철 위원장은 그들의 주소를 어떤 경로를 통해 입수됐는지 공식적으로 확인이 안 된다”
그렇다면 김형완 소장이 생각하는 북한 인권이 궁금해진다
“북한인권이 심각하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다. 문제는 이를 풀기 위한 방법론의 차이다. 나는 방법론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고려사항은 실효성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북한 주민의 인권을 향상시킬 수 있나. 탈북자들의 인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우선순위가 매겨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위 북한붕괴를 내세우는 주장들은 필연적으로 북한체제를 긴장하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본다. 외부의 위협요인은 북한체제에서 이데올로기적 동원으로 정권이 마음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인권향상에는 반드시 물질적 토대가 구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때 인권의 실효성도 고양된다. 북한 주민들이 하루 3끼를 먹지 못해 굶어 죽고 있는데 ‘3대세습반대’, ‘공개처형반대’, ‘정치범 수용소 폐쇄’ 주장이 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 사업은 북한 주민의 접촉면을 확장하고 그들의 물질적 토대를 구축하도록 작용된다는 점에서 북한인권 개선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북한인권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 전제는 인권 실현 주체가 타인이 아닌 북한 주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들고 일어설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마련하는 정도에서 그쳐야지 그 역할까지 치고 들어가는 것은 안된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북한 주민들이 물질적 풍요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풍요로운 만큼 욕구 수준이 급상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병철 위원장 3년간의 평가는 어떠한가?

 ▲ 김형완 소장ⓒ미디어스
“현병철 위원장은 시작과 함께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사회적으로 혼란스런 사안에 대해서는 입장 표명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었다. 정치적 논란과 사회적 파장이 예상된다고 해서 안한다면 인권위가 개점휴업하겠다는 것과 다름아니다. 현 위원장은 기본적인 합의제 기관에서 ‘독재라도 할 수 없다’는 말로 회의를 폐회시키고, 코드인사, 설립 역사상 최대 징계를 남발하거나 인권위를 행정기관의 하나로 본다는 등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인한 인물이다. 또, 국제인권사회에서도 폐지해야한다고 하는 국가보안법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깜둥이 발언도 논란이 됐다. 그런데 사실은 ‘평생 나는 신문, 뉴스도 안보고 산 사람이다’, ‘청와대로부터 내정받고 부랴부랴 그때부터 KBS 9시뉴스를 보기 시작했고 동아일보 구독신청을 했다’고 이야기했었다. 처음에는 ‘개인교사나 다름없이 가르쳐달라’고 했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기에 괜찮은 분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좌만 하면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새빨간 위장전술이었다”
현병철 위원장의 공은 없다는 얘기인가?
“공 있다. 임명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에게 충실해 국민의 인권에 대해 눈감아 정권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도록 한 것이 그렇다. 국민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권력의 편에 섰다. 그럼으로 국민들로 하여금 인권위 신뢰를 실추시키게 했다. 나는 한마디로 국가인권위는 개라고 생각한다. 도둑이 들어왔을 때 짓지 않으면 개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이 잡아먹거나 버리거나 팔아치운다. 국민이 도둑 지키라고 국가인권위라는 개를 집안에 들여와 개집도 짓고, 1년 220억을 쓰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잡아먹거나 버리거나 내다 팔 것이다. 이런 사태의 엄중성을 관계자들이 알았으면 한다”
국가인권위의 후퇴, 현병철 위원장만의 문제일까?

“오늘날의 국가인권위 문제에 있어 현병철 위원장과 이명박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 인권 시민사회 역량의 부족도 이 사태를 초래하게 했다고 본다. 인권 시민적 토대 허약성이 건강한 발전을 담보하지 못한 꼴이 됐다”
“깜둥이”, “독재라도 어쩔 수 없다”, “아직도 여성차별이 존재하냐”는 등의 발언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의 제 1덕목은 뭐라고 보나.
“‘에이즈 때문에 공중목욕탕 가기 꺼려진다’는 말도 했다. 본인은 우스갯소리라고 하지만 인권위원장으로서는 부적절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제1덕목은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견제할 수 있는 결연한 의지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인권에 대한 전문성이 없더라도 권력에 쓴소리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나머지 전문적 영역은 집단지성으로 커버가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전문성이 있고 유능하더라도 권력에 눈치 보는 사람은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부적절하다. 이것은 장관이나 타 공공기관의 장과 다른 점이다”
- 국가인권위를 그만둘 때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몇 개월만 더 채우면 20년 근속으로 공무원연금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고도 알고 있는데….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쥐 죽은 듯 눈감고 그냥 버티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4달만 버티면 제가 죽을 때까지 혹여는 제가 죽더라도 한 달에 170~180만원을 가족들이 받도록 돼 있었다. 계산도 해봤다. 그야말로 눈 감으면 안정된 노년을 보장받을 수 있었는데…. 양심이나 염치가 견딜 수 없었다. 인권위 내부에 남아 싸워야했다는 비판도 인정하고 스스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잘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인권위에 있다면 그에 걸맞은 밥값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만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나와서는 그런 문제의식을 담고 인권위 10년사를 자료집을 내려고 생각하고 있다”
김형완 소장이 생각하는 ‘인권’이란?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은 ‘인권에는 좌도 우도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이영희 선생님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그 말을 응용해서 저의 표현대로 바꾼다면 새는 온 몸으로 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 온 몸에는 날개도 있지만 똥이나 세균, 바이러스도 있다. 불필요한 지방도 있고 잉여도 있다. 마찬가지로 인권에는 이 모든 것이 통합돼 있는 것이라고 본다. 이른바 진영간의 비무장지대라고 이야기를 한다. 합의의 영토인 것이다. 극단적인 의견이 충돌할 때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합의의 영토는 인권이다. 인권 앞에서는 누구나 승복하지 않던가. 이 인권이라는 영토는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주장도 나올 수 있는데 그것도 관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만, 이것을 미래지향적으로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

권순택 기자  |  nanan@mediaus.co.kr

2012년 4월 10일 화요일

[사설]야당후보 비방 조선일보 무료 살포 배후 밝혀라


이글은 경향신문 2012-04-09일자 사설 '[사설]야당후보 비방 조선일보 무료 살포 배후 밝혀라'를 퍼왔습니다.
16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 2002년 12월19일 조선일보는 한국언론사에 남을 사설 한 편을 남겼다.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는 사설이 바로 그것으로서 요지는 ‘정몽준이 후보단일화 파기로 노무현을 버렸듯이 유권자들도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강력한 권고’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 사설은 편파보도의 상징처럼 돼버렸다. 

10년 전의 일을 새삼스레 언급하는 까닭은 선거철만 되면 더욱 평상심을 잃어버리는 이 신문의 고질병이 이번 4·11 총선을 맞아 또다시 도지고 있기 때문이다. 7일 아침 인천 부평지역 일부 아파트 입구에는 조선일보 20~30부가 놓여 있었고, “이 신문은 오늘 하루만 주민 홍보용으로 드리는 것이며, 부디 지나치지 말고 가져가서 인천지역 쪽 기사를 꼭 읽어달라”는 안내문까지 현관문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이날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는 민주통합당 김용민 후보의 여성·노인 폄훼발언을 비난하는 ‘한국정치가 창피하다’였다. 또 인천지역면에는 이 신문의 기자로 재직했던 새누리당 김연광 후보를 띄우고 경쟁자인 민주통합당 홍영표 후보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것으로 의심되는 ‘홍영표 친일파 손자’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부평지역뿐만 아니다. 서구의 청라·검단 지역, 연수·계양·남구의 일부 아파트 단지는 물론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문학구장 등 인천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각각 수백부에서 수천부에 이르는 신문이 대량으로 뿌려졌다고 한다. 조선일보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를 돕기 위해 편파·왜곡보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거법까지 어기면서 민의를 왜곡한다는 비난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선거법 95조는 특정 정당·후보자에게 유·불리한 기사를 게재한 간행물을 통상방법 외의 방법으로 배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가 이 신문의 지국장 등을 불러 조사하고 있다지만 거대 언론사가 개입됐다고 해서 눈치를 보거나 유야무야 넘어가서는 안된다. 특히 문학구장에서는 차량까지 동원된 점 등으로 미뤄볼 때 무료살포가 치밀한 사전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실행됐을 가능성이 높다. 당국은 철저한 수사를 통해 불법행위를 발본색원하고 법에 따라 엄정조처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선일보는 김용민 후보의 발언을 겨냥해 ‘한국정치가 창피하다’고 썼다. 신문이 제 할 일을 팽개치고 특정 정파의 행동대처럼 처신하는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한국언론이 창피하다.

2012년 2월 14일 화요일

친일파 응징 실패한 한국의 반면교사②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2-14일자 기사 '친일파 응징 실패한 한국의 반면교사②'를 퍼왔습니다.
[김종철의 언론과 권력(7)] 프랑스의 나치 청산(2)

드골의 임시정부는 나치 점령군과 비시 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언론사에 대해 일체의 발행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신문의 소유주나 회장 또는 사장이 나치에 협력한 혐의로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 받으면 그 언론사는 바로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에 신문을 발행한 언론사는 그 제호를 어떤 경우에도 계속 쓸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치 점령군과 비시 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신문사의 소유주나 회장 또는 사장’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천황을 찬양하고 대동아전쟁을 성전이라고 미화한 조선의 신문 소유주나 회장 또는 사장’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김성수는 조선총독부가 1940년 8월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하기까지 그런 논조를 끊임없이 펼쳐온 신문의 사주였다. 그는 폐간 이후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천황 폐하께 충성하기 위해 성전에 나가라’고 권유하는 글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쓰는가 하면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등 전쟁협력단체에 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순회강연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김성수가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 실은 글(‘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대의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현하 우리가 당면한 의무라고 하면 제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여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 만일 제군이 금차 대동아성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 우리의 참가 없이 완수된 날을 예상하여 보라. (···)
동양에서는 고래(古來)로부터 의무를 다하는 데 필연적으로 권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황민화를 고창하여 온 이래 제군이 자주 자신의 황민으로서의 권리를 일반사회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일본은 3천년이라는 오랫동안 금일의 제국의 광영을 빛내는 데 온갖 의무를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그동안 30년밖에 안 된다. 30년과 3천년의 차를 가지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을 요구할 수 있을까. (···)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안 될 것을 나는 확언한다. 제군이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반도의 장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사 사주 방응모는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상업적 경쟁에 몰두하면서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바치는 데는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조선일보가 폐간되기 전인 1938년부터 동아일보사 사장 백관수와 함께 ‘시국강연’을 다니고, 1929년 5월에는 ‘조선춘추회’가 주최한 ‘배영(排英) 궐기대회’에서 ‘황군 만세’를 선창했다. 그는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잡지 을 독립시켜 사장을 맡고 김활란, 주요한, 박흥식 등 ‘명사’를 등장시켜 친일 논조를 펼쳤다.
친일을 넘어 부일이라고 할 만한 방응모의 행적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1943년 11월 14일 ‘출진학도 격려대회’를 연 뒤 거액을 들여 일본군 사령관에게 고사포를 기증했다. 그런 뒤 방응모는 비행기를 제조하는 전쟁협력회사인 조선항공공업회사의 중역이 되었다. 그는 1944년 8월 ‘황민화 정신과 일본 정신 체득’을 위해 국어(일본어)를 상용하자고 주장하는 글을 조광에 실으면서 극단적 부일로 치달았다.
해방된 조선에 ‘일제협력자 숙청재판소’가 설치되었다면 김성수와 방응모를 비롯해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부역한 언론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감 2003년 판은 나치협력자 숙청에 관련된 프랑스인이 150만~200만 명이라고 기록했다. 비시 정권 지도층을 심리한 최고재판소는 108건을 재판해서 18명에게 사형을 선고(그 가운데 사형 집행은 총리 라발 등 3명)하고 25명에게는 종신강제노동형과 징역형을 선고했다. 각 지방재판소는 모두 14만여 건을 재판해서 4만1천여 명을 무혐의로 석방하고 4만1천여 건을 시민법정에 넘겼다. 재판 결과 6,763명에게 사형(그 가운데 779명 집행), 2,777명에게 종신강제노동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 가운데는 신문 사장 쉬아레즈, 신문 편집국장 브라지야크, 신문 사장 장 뤼세르, 방송 사장 장 파키가 들어 있었다.(, 339~340쪽)
의 지은이 주섭일(언론인)은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는 드골과 반나치저항운동세력이 단결함으로써 나치협력 민족반역세력을 완전히 숙청할 수 있었다. 이것이 새 프랑스 건설을 성공시킨 동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우파인 드골의 임시정부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중심인 반나치저항세력이 단결해 나치협력세력을 완전히 숙청함으로써 해방 후 드골의 우파와 좌파세력을 통합하는 민족해방세력을 중심으로 새 프랑스 건설의 주체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
드골의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단순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도덕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반역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세에 중대한 교훈을 남겨준 사실에서도 큰 의미를 찾는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잘 반영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어떤가? 김성수가 부일과 친일의 도구이자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하던 동아일보는 그의 아들과 손자를 거쳐 증손자에게 ‘세습’되어 있다. 김성수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그의 민족반역행위를 부인해 왔다. 조선일보 역시 그의 아들들을 거쳐 손자에게 대를 이어 물려졌다. 조선일보사를 경영하던 방응모의 아들은 독재정권 시절에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사장인 그의 손자가 ‘여성 연기자와의 성추문’에 시달리던 때 조선일보는 ‘총력’을 기울여 그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선조가 공인으로서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을 경우, 후손들은 그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죄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가 남긴 사회적 자산을 물려받아야 한다. 그러나 동아와 조선의 족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오늘도 정반대 길을 가고 있다. 이 해묵은 악덕을 누가 어떻게 척결할 것인가?

2012년 2월 13일 월요일

친일파 응징 실패한 한국의 반면교사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2-12일자 기사 '친일파 응징 실패한 한국의 반면교사'를 퍼왔습니다.
[김종철의 언론과 권력(6)] 프랑스의 나치 청산 (1)

1940년 8월 10일에 폐간되었던 조선일보는 해방 뒤인 1945년 11월 23일, 동아일보는 12월 1일에 복간되었다. 복간된 뒤 한 동안 조선일보는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의 민족주의 노선에 동조하는 논조를 펼쳤다. 동아일보는 사주인 김성수가 주도하는 한민당의 대변지나 다름없는 기사와 논설을 실으면서, 국내 정치적 기반이 약해 보수세력인 한민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을 지지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일제강점기에 부일(附日)이나 친일 행위를 한 자들을 처벌하거나 응징하는 법적 절차가 당연히 있어야 했다. 그래서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구성된 뒤 소장파 의원 김광준의 주도로 친일파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규정이 헌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해 8월 5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원 김웅진이 ‘반민법안’을 기초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 재적의원 155명 가운데 105명 찬성, 16명 반대로 동의안이 가결되어 ‘특별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기초위원회는 미군정기 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특별조례법을 바탕 삼아 전문위원들이 만든 초안을 중심으로 일본의 ‘공직자 추방령’, 중국 장개석 정부의 ‘전범처리법’,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관련 법안들을 참조해서 8월 6일 ‘반민족행위 처벌법(약칭 반민법)’ 초안을 상정했다.


부일이나 친일 전력이 있는 의원이 많은 한민당과 이승만 추종세력을 중심으로 반민법 제정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치열하게 벌어졌으나 국회는 9월 7일 찬성 103명, 반대 6명으로 반민법안을 의결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참여하거나 협력한 자들을 응징하고 오욕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었다.


1948년 11월 26일 반민법 제8조를 근거로 도별로 한 명씩 조사위원을 선출한 뒤 10월 23일 10명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에는 김상덕(경북), 부위원장에는 김상돈(서울)이 선출되었다. 반민특위는 조사를 맡을 특별조사위원회, 기소와 송치 업무를 담당할 특별검찰, 재판을 진행할 특별재판소를 국회 안에 설치했다. 당시 경찰과 검찰, 법원의 주요 직책 대부분을 친일파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8일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에 이어, 일제 헌병 앞잡이로 2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혐의로 대한일보사 사장 이종형,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최린 등을 체포했다.


1949년 5월 20일 검찰은 반민특위에서 일하던 소장파 국회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를 체포했다.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로 일했다는 것이었다.(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 23일 열린 임시국회는 구속된 의원들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두고 찬반토론을 벌였는데 찬성 88 대 반대 95로 부결되었다. 의원들이 결의안에 관한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 서울 시내에서는‘국회 안의 빨갱이들을 추방하라’는 관제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6월 3일에는 3백여 명의 군중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가서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고 외치다가 특별조사위원회 정문까지 치고 들어갔다. 반민특위가 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등을 반민법 제7조 해당자로 체포하자 내무차관 장경근, 치안국장 이호, 서울시경국장 김태선의 주도로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이끄는 경찰관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서 특경대원 35명을 폭행한 뒤 연행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6월 9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공언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22일 국회에서 폐지안이 통과됨으로써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반민특위는 출발 당시 반민자 7천여 명을 파악해 놓고 있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조사건수는 682건에 그쳤다. 이 가운데 체포 305건, 미체포 173건, 자수 61건, 영장 취소 30건, 검찰 송치가 559건이었다. 이 중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것은 221건이고, 특별재판부가 재판을 종결한 것은 38건에 지나지 않았다. 불기소된 사람들은 대부분 무죄로 풀려났으며, 기소된 사람들 중에서도 실제 처벌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강준만,


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제대로 응징하거나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것을 방해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한국이 1970년대 말까지 부일 또는 친일세력의 지배를 받게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특히 동아·조선·중앙 같은 족벌언론에서는 지금도 친일파의 후손들이 경영권과 인사권을 장악한 채 보수정권과 결탁해서 온갖 특혜를 누리고 있다.


1944년 8월 25일 연합군과 자유프랑스군이 파리를 해방할 때까지 4년 2개월 동안 프랑스에서는 나치와 맞서 용감하게 싸운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적지 않았지만 점령국에게 부역하거나 친독행위를 한 정치인과 지식인이 수두룩했다. 영국 런던에 망명정부인 ‘자유프랑스’를 창설한 뒤 4년 동안 국내의 반나치 레지스탕스를 지휘한 샤를 드골은 연합군과 함께 파리에 입성하기 오래 전부터 나치 청산 계획을 구체화했다.


“드골의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나치 독일이 패배하기 시작하면서 페탱의 비시 정권을 중심으로 하는 나치협력세력을 프랑스가 해방된 뒤 응징하고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드골이 직접 구상하고 집행한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1943년부터 전쟁 진전과 함께 서서히 막을 올렸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수 년 간 매우 가혹하게 집행되었다.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프랑스의 각계 각 분야에 걸쳐 총체적으로 광범위하고 복잡하게 진행됨으로써 겉보기에 어지러운 양상을 보였지만, ‘민족반역자는 반드시 법에 따라 처벌되어야 하고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드골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과 실천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드골의 훈령(프랑스 임시정부 대통령의 이름으로 발령된)이라는 임시적 법에 따라 집행되었다.” (주섭일, , 21~22쪽)


드골이 규정한 나치협력 민족반역 범죄자는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나치의 꼭두각시 정부인 비시 정권의 고위공직자들과 그 추종자들, 그리고 나치 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인들이었다. 8·15 이후 3년 동안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한국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해방의 날’인 1944년 8월 25일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앙리 페탱의 꼭두각시 정부 수도이던 비시에서 650명, 지방도시 크레르 몽페랑 인근 4개 현에서 2,980명이 체포되었다.


거물급 나치협력자들의 재판은 파리숙청재판소가 맡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의 인물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는데, 가장 먼저 재판정에 끌려나온 피고인들은 언론인이었다.


“민족반역 언론인들은 사설과 칼럼으로 나치 독일과 비시 정권을 찬양하고, 연합군과 드골의 망명정부를 적으로 지목해 비난하고 욕하는 글을 썼기 때문에 나치협력행위의 증거들이 쉽게 수집될 수 있었다. (···)


이들 자신이 나치 독일이 전쟁에 이길 것으로 착각해 쓴 글들이 모두 부메랑이 되어 필자 자신들에게 규탄의 소리가 되어 되돌아오는 형국이었다. 변호사들조차도 이 언론인들을 ‘나치협력 선전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나치 독일 점령 기간에 미쳐 날뛰었던 ‘히틀러의 나팔수들’이었다. 드골은 ‘정의의 심판’을 위해 숙청의 칼을 빼든 것이다.” (위의 책, 372~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