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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6일 금요일

“KBS MBC 다 없어져도 되겠다…뉴스타파만”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10-25일자 기사 '“KBS MBC 다 없어져도 되겠다…뉴스타파만”'을 퍼왔습니다.
동아투위 38주년 안종필 언론상 수상…"자유언론의 봄 되찾아올 것"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내려간 '자유언론실천선언' 38주년 기념식이 24일 오후 6시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올해가 유신 40주년이자 대량 해고·징계 사태 등 박정희 정권 못지않은 언론탄압이 일어났던 탓인지 다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명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은 기념사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을 포함해 모든 독재체제가 다 그러했지만 유신체제의 언론통제와 비판언론 탄압 역시 무척 집요하고 강력했다"며 "유신선포 2주년에 즈음해 동아일보 언론인들이 '10·24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계기로 자유언론운동의 조짐이 전 언론계에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유신체제는 초강수의 반격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이어 "동아일보 광고주들을 협박해 신문광고면이 하루 아침에 백지로 변하는 기상천외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 이 무렵의 일"이라며 "한걸음 나아가 독재권력은 동아일보 경영진을 겁박해 동아일보 및 동아방송의 자유언론운동 중심세력을 대량 무기정직 및 해고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또한 "국격이 하급수준인 나라가 아니라면 지난날의 대국민 범죄행위를 무작정 깔아뭉개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우리는 지금 당장 정부가 나서서 유신시대에 일어난 국가가해행위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피해에 대해 전면적이고 종합적인 조사작업을 벌일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이강택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유신 시절을 연상케 하는 이명박 정권의 언론탄압에 대한 언론인들의 의지를 선포했다. 이 위원장은 "극악한 검열과 언론통제가 자행됐고 그에 맞서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파업과 저항이 이어졌다"며 "오늘 이 자리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모든 것을, 피와 땀과 눈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부으리라는 것을, 그 힘으로 반드시 자유언론·통일언론의 봄을 반드시 되찾아오리라는 것을 새로이 다짐하는 자리"라고 밝혔다. 

이날 수여된 통일언론상 특별상은 (EBS 다큐프라임-탈북, 그 후)를 제작한 안재혁 EBS PD, 김달해 미디어천지 PD 등 4명에게 돌아갔다. 방송독립포럼 대표인 고승우 심사위원장은 "EBS 출품작은 탈북자에 대한 끈끈한 감정, 애증과 함게 극한상황 심리 상태를 전달한 것이 돋보였다는 점 등이 지적됐다"고 심사경위를 밝혔다.
심사위원회는 올해 통일언론상에는 KBS 3편, EBS 1편 등 단 4편 만 출품됐고 모두 탈북자에 대한 주제으며 대상이 아닌 특별상 명목으로 수여한다고 밝혔다. 고 위원장은 "우선 대상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난 한 해 동안 이명박 정부의 북한 옥죄기 속에 탈북자 인권 문제가 크게 부각된 현실을 언론이 가감 없이 받아드리는데 그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고 설명했다. 
동아투위 2대 위원장으로 자유언론을 위해 싸우다 간암으로 작고한 안종필 선생의 뜻을 기리는 '안종필 자유언론상' 수상의 영예는 뉴스타파 제작진들에게 돌아갔다.
문영희 심사위원장은 "1975년에는 상상도 못한 매체인데 우리 때 이런 정도의 기술이 사회적으로 일반화 됐으면 박정희 정권을 우리 손으로 무너뜨렸을 것"이라며 "KBS, MBC 다 없어져도 되겠다. 뉴스타파 하나로 세상 볼 수 있다"고 호평했다.
동아투위는 앞서 낸 보도자료에서 "뉴스타파 제작진은 엄격한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주류 언론이 의도적으로 외면하거자 축소·왜곡하는 주요 사건과 쟁점을 심층적으로 보도하고 논평했다"며 "안종필 자유언론상 심사위원들은 뉴스타파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총체적으로 짚어보면서 1978년 10월 24일 안종필 위원장 주도로 동아투위가 발표한 '민권일지'를 연상했다"고 심사경위를 밝혔다.
MBC 해직 언론인이자 뉴스타파 제작인 이근행 PD는 "역대 유신시대 못지 않은 언론 탄압 싸움에서 대 투쟁을 해온 현장에 있는 수많은 여러 선후배 언론인들을 대신해 우리가 받고 국민들이 주셨다고 본다"며 "새로운 시대 독립 언론으로 성장해나가기 위해 더 경주하겠다"고 밝혔다.

조수경 기자 | jsk@mediatoday.co.kr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거리로 쫓겨난 동아의 ‘자유언론’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7-13일자 기사 '거리로 쫓겨난 동아의 ‘자유언론’'을 퍼왔습니다.
언론과 권력 (44)

동아일보사에서 제작거부 농성이 시작된 지 엿새째인 3월 17일 자정이 넘은 시각에 편집국 창밖을 내다본 기자 몇 명이 황급히 외쳤다. 수상한 남자들이 회사 건물을 에워싼 가운데 무교동 쪽 큰길에 누군가가 대형 탐조등을 설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편집국과 4층 방송국에서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누워 눈을 붙이려던 사원들에게 비상한 상황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달려갔다.
새벽 3시 15분께 편집국 남쪽 길 건너편에서 탐조등 불빛이 켜지는 것을 신호 삼아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든 200여 명의 폭도들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2층 공무국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겨우 5분도 되지 않아 망치로 2층 공무국의 철문과 벽을 부수고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물만 마시면서 엿새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던 23 명의 기자들 가운데 최연장자가 “소란을 피우면 활자판이 쏟아질 테니 우리 스스로 조용히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침입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기자 한 명에 3,4 명씩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주먹질을 해댔다. 기진맥진한 기자들은 양쪽 겨드랑이를 폭도들에게 잡힌 채 회사 차고로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정연주의 안경이 두 동강이 나고 임채정, 심재택, 성유보가 다쳤다. 기자 23 명을 태운 동아일보사 업무용 지프 다섯 대는 통행금지로 인적이 끊긴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혜화동 우석병원으로 달려갔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폭도들의 일부는 동아일보사의 영업직 사원과 가판원이었고 나머지는 정체불명의 무술 유단자들이었다.
3층 편집국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살피고 있던 기자들은 새벽 3시 50분쯤 폭도들이 공격을 시작하는 소리를 듣고 농성을 하던 사원들에게 ‘경보’를 발했다. 쇠줄로 굳게 걸어 잠근 남쪽 출입문을 망치와 도끼로 부수는 소리가 편집국 안으로 울려 퍼졌다. 고막을 뚫을 듯이 소름이 끼치는 그 굉음은 자유언론을 난도질하는 ‘망나니들의 칼춤’ 소리 같았다.
철문이 휑하니 뚫리자 대형 손전등을 든 폭도 몇 명의 뒤를 따라 150 명이 넘는 괴한들이 편집국으로 밀려들었다. 젊은 기자들이 맨 주먹으로 달려가서 앞을 막아서자 그들은 소화기로 가스를 뿜어대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폭도들 사이에는 동아일보사 판매부와 통신과 직원, 그리고 임시로 고용된 경비원들이 섞여 있었다. 폭도들은 농성하는 사원들에게 ‘당장 나가라’고 위협했다. 그러자 기협 임시분회장 안종필(편집부 차장)을 비롯한 기자 몇 사람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 1974년 10월 24일 오전부터 편집국 한가운데 기둥에 걸려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떼어냈다.
안종필의 사회로 마지막 기자총회가 열렸다. 농성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 낭독에 이어 당시 민주화운동권에서 많이 부르던 ‘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했다. 이어서 ‘자유언론 만세’ ‘민주회복 만세’와 애국가를 부른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오전부터 편집국 한가운데 기둥에 걸려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떼어냈다. 기자들은 침통한 얼굴로 각자 책상에 든 물건들을 챙겼다. 사물함을 정리한 뒤 편집국을 나서는 기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3층부터 회사 정문까지 계단을 내려오는데 폭도들이 ‘빨리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괴한들이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농성장을 기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재야인사들은 통행금지가 해제된 새벽 4시가 지나자 회사 정문 앞으로 달려와 분노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신새벽에 내리는 부슬비를 맞으면서 동아일보사 건물을 나서는 기자들을 얼싸안은 그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함석헌, 천관우, 이희호, 정일형, 이태영을 비롯한 재야의 어른들이었다.
2층 공무국의 단식농성팀과 3층 편집국의 기자들이 폭력에 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4층의 방송국팀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자행되고 있는 추악한 ‘민중 배신극’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날이 밝기까지 지연작전을 펴기로 했다. 특히 방송국은 시설의 특수성 때문에 보안장치가 되어 있어서 4층 셔터를 내리고 문을 잠근 뒤 책걸상을 비롯한 집기로 출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방송국 사원들은 공무국과 편집국이 폭도들에게 점거 당한 뒤 1시간 40분이나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아침 6시께 각목과 소화기, 소방호스로 무장한 폭도들이 방송국 셔터를 부수고 밀려들어 왔다. 무술유단자로 보이는 자가 폭도들을 꾸짖던 프로듀서 김학천의 옆구리를 발길로 차서 실신시킨 뒤 병원으로 보내는가 하면 여성 아나운서의 머리채를 낚아채기도 했다. 폭도들은 4층부터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 사원들의 치맛자락을 들치면서 상소리를 퍼붓고 남자 사원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먼저 회사 밖으로 쫓겨난 기자들은 방송국 사원들을 부둥켜안으면서 눈물을 쏟았다.
바로 그 무렵 동아일보사 남쪽 길 건너편의 중부소방서 앞에 모여 있던 사복경찰관 150여 명이 동아일보사 정문 앞으로 달려와 폭력에 밀려 쫓겨난 사원들과 재야인사들을 광화문 지하도로 내몰기 시작했다. 그때가 1975년 3월 17일 아침 6시 30분께였다. 당시 쫓겨난 사원 160여 명 가운데 113 명 (고인이 된 18 명 포함)은 그 이후 37년이 지난 2012년 7월 현재까지 동아일보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동아일보사 부근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기자들이 오전 9시쯤 회사 정문 앞으로 가서 보니 임시로 채용된 경비원들과 사복경찰관들이 출근하는 사원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검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회사가 미리 나누어준 ‘빨간 신분증’을 지니고 있었다.
쫓겨난 동아일보사 사원들은 그날 오전 10시께 신문회관(현재 프레스센터 자리)에 모여 ‘폭력에 밀려 동아일보를 떠나며’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유언론의 마지막 보루 ‘동아’를 지키기 위해 신명을 바쳐온 우리는 17일 새벽 동아일보사 사원 아닌, 산소용접기와 각목을 휘두르는 폭도들에 끌려 밤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뜨거운 국민적 성원과 온 세계 양심의 격려에 힘입어 빈사의 상태에서 기적처럼 회생한 ‘동아’는 이제 권력의 강압과 경영주의 마비된 이성으로 끝내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비극적 파국 앞에서 우리는 국민적 열망을 배반한 괴로움에 비통해 할 겨를마저 없다.
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 폭력을 서슴지 않는 언론이 어찌 민족의 소리를 대변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몸은 비록 ‘동아’의 사옥을 떠나지만 ‘동아’의 정통성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의 영원한 기본권인 자유언론은 산소용접기와 각목으로 말살될 수 없다. ‘동아’의 정통성은 폭도를 고용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사수하는 우리들에게 있다.”(, 36쪽)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2012년 4월 24일 화요일

“어떤 언론을 원하는가… 독자들이 답을 해야 할 차례다”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4-24일자 기사 '“어떤 언론을 원하는가… 독자들이 답을 해야 할 차례다”'를 퍼왔습니다.
[인터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언론사 파업, 장기전을 대비해야”

한홍후 성공회대 교수는 언론사 파업이 시작된 이후 각 사업장을 돌면서 파업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벌였다. 현대사인 자신의 전공에 맞춰 그동안 정권의 언론장악과 이에 대한 언론인들의 저항의 역사를 소개하고 파업 언론인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한 교수는 이번 언론파업이 “이명박 정권 언론장악의 결과물”로 이는 70년대 동아투위 등 자유언론을 위한 언론저항을 계승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 교수는 “보수세력이 정권을 빼앗긴 이후부터 언론과 교육을 장악하려 했다”는 점과 함께 “언론인 지위 향상과 수익구조의 변화”로 언론인들이 스스로 부역한 측면도 있음을 강조했다.

한 교수는 “총선이 좋은 결과를 빚었으면 쉽게 해결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제는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며 “시청자·독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와는 23일 오전 평화박물관 교육장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정상근 기자 dal@

- 5개 언론사가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번투쟁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70년대 상황이 생각난다. 유신치하에서 언론환경이 극악해지니 언론인들이 견딜 수 없어 들고 일어났고 이는 언론노조 결성 계기가 됐다. 노조가 있어야 교섭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즉 한국의 언론노조는 언론자유화를 위해 태어난 것이었다. 당시 기자들은 근무 처우가 형편없었음에도 그 주된 관심은 자유언론이었다.

지금 젊은 기자들의 파업도 이와 유사하다. 이명박 정권이 벌인 언론장악의 결과물인 것이다. 언론장악이 이어지면서 자유언론 환경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언론의 본령인데 이것이 허물어졌다. 기본적으로 지식인인 언론인들로서는 그 모멸감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이렇게 한꺼번에 파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민주화 이후 상식적 수준의 민주주의는 자리 잡았다 생각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처음 한 것이 비민주적 언론장악이다. 그 역사적 맥락은 무엇인가?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캠프에 줄 선 언론인만 200여명이었다 하더라.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에게 자리 하나씩 챙겨주려다 물꼬가 안 트이니 (전 정권에서 임명된)사장을 몰아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보다보니 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왜 저럴까 생각해보니 보수세력이 자기들이 어떻게 정권을 유지했고 빼앗겼는지, 나름 반성과 평가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말 안 듣는 비판적 지식인을 잡아 두들겨 패고, 가두는 한편 언론과 교육을 쌍포로 장악하고 일반대중을 욕망의 정치로 끌고 나갔다. 그런데 민주화 과정은 이를 털어버리는 과정이다. 당장 박종철 사건을 거치면서 잡아놓고 두들겨 패는 일이 없어지지 않았나.

언론도 장악하기 어려워졌다. 언론노조가 만들어졌고 언론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한겨레가 탄생하기도 하고 방송보도도 점차 개선되었다. 여기에 인터넷이 생기면서 언론환경이 변했다. 교육도 전교조가 생기면서 마음대로 하기 어려워졌다. 수구세력은 이 때문에 정권을 내줬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보수세력은 6월 항쟁에도 불구하고 정권유지는 성공했지만 곧 위기를 맞았다. 일본 자민당보다 오래가는 100년 정당이라며 3당 합당을 통해 민자당을 만들었지만 불과 7년 만에 정권을 내줬다. 그 사이 공포정치는 먹히지 않게 되었고 언론·교육은 놓쳤다는 것이 패인분석이었을 거다.

그나마 97년에는 저들도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살림이 거덜나 IMF가 터졌고 이인제 효과에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문제, 김현철 스캔들이 터졌다. DJP연합도 있었다. 사실 김현철 스캔들로만 정권이 교체된다 해도 아무 이상할 게 없었다.

문제는 2002년 선거다. 여기서 또 지니 ‘멘붕’이 된 것이다. 그 상태에서 한 것이 탄핵이다. 여기서 수구세력은 언론과 교육을 되찾아야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뉴타운 같은 욕망의 정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만약 민주정권 10년 동안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으면 괜찮았을 것이나 민주정권에서도 재벌만 살맛났다. 이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한데 그 반성 없이 민주당이 저러고 있으니 돌아버릴 지경인거다.

어쨌든 수구세력은 탈환과 유지를 위해 교육에서는 전교조를 치기 시작했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선생님을 치고, 정치참여에 유죄판결을 내리고, 교과서 고쳤다. 그리고 이와 함께 방송은 쭉 장악해 들어간 것이다.”

- 정권 뿐 아니라 이에 부역한 언론인도 문제다. 불과 몇십년 전에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던 언론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인가?

“미묘한 부분이다. 우선 70년대 투쟁 중 많은 좋은 언론인들이 쫓겨났다. 광주의 경우 남은자의 슬픔은 긍정적인 힘이 되었고 이것이 6월 항쟁까지 만들어냈지만 언론은 그렇지 않았다. 동아일보에서 당시 250명이 파업을 했는데 절반의 강성이 쫓겨나고 절반의 약이 남은 거다. 당시는 아주 작은 차이었다. 어머니가 아프고 아들이 아파 외면할 수 없어 들어갔던 사람들이다. ‘형 미안해’ 하면서 들어가고 ‘빨리 들어가’라고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해직자들이 매일 출근 투쟁을 벌이자 처음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가던 사람들이 짜증이 나기 시작한 거다. 미안하다가 부담스럽다가, 짜증나는 과정. 그러면서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또 하나. 80년대 들어오면서 언론인 지위와 역할이 달라졌다. 전두환 정권이 언론탄압도 많이 했지만 급여수준을 엄청나게 높였다. 독일에서는 기자들이 노동자의 평균임금 조금 아래를 받는 것이 언론이 가장 건강해질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한국 언론인들의 급여가 뛰면서 사라진 것이 연탄, 버스, 지하철 기사다. 대신 아파트나 마이카 같은 기사가 나오는 것이다. 기자들 눈이 높아졌기 때문에.

앞서 박정희가 유정회를 만들면서 각 신문마다 1명씩 국회의원 자리를 줬다. 언론사 정치부장, 논설위원 하다가 국회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국회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은 알아서 기는 거다. 그럼 성과가 있어야지? 그래서 젊은 기자들의 기사를 자르고 못쓰게 한다. 이걸 각 언론사에서 경쟁적으로 했다. 지금은 유정회가 없어졌지만 국회의원 제도는 여전히 개판이다. 우리나라처럼 언론인, 검찰 출신 정치인이 많은 나라는 세상에 없다. 감시해야 고쳐야 할 인간들이 그리로 가니 개판되는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언론 내부의 분리다. 50년대 까지만 해도 권력이 언론을 탄압하면 신문사가 하나가 되어 싸웠다. 그런데 언론이 자본화 되면서 60년대부터 이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 신문사에 투여하면서 신문사가 기업처럼 커졌다. 수익구조는 구독료의 비중이 줄어들고 광고료가 늘어난다. 그러니 언론이 독자보다 광고주 눈치를 더 살피고 보수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로 싸우던 신문사는 발행인과 편집인, 기자로 따로 나눠졌다. 60년대 중반에도 박정희에 충성하는 언론인들이 생긴다. 백성이 싸우는데 성주가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미 60년대부터 언론자유 최대의 적은 권력이 아닌 사주가 될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동아일보 싸움만 해도 사주가 깡패 동원해 기자들을 몰아내지 않았나?”

- 파업언론이 보도공정성 문제로 제기하고 있지만 선배들은 대체로 사측 편에 서 있다.

“언론이 힘을 갖는 것은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김제동 개인이 무슨 힘이 있겠나? 김제동을 사랑하는 팬이 있기 때문에 힘이 생기는 거다. 기자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사주를 당하겠나? 독자들이 성원해줘야 한다. 내 신문이 권력에 굴복하는 신문이 되길 원하는가? 비판적인 신문을 원하는가? 그걸 생각해야 한다.

국민일보는 순복음교회가 밥줄인데, 독자들 중 기독교인도 많을 것 아닌가? 한국 기독교에 국민일보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바라면 그들을 응원해야 한다. 문제는 관심을 갖는 독자가 아니면 파업 전후 신문이 어떻게 바뀌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외형상 차이가 안 나기 때문에. 그 구조를 뚫어야 한다. 독자들이 ‘신문 왜 이래?’라고 느끼게 하는 것. 그게 관건이다.

아마 총선 이후 새 국면이 만들어지면 쉽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사주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언론정책에 압력을 넣으면 되는데 당장 그것이 어려워졌다. 그러니 바로 KBS가 기자를 짜르고 MBC는 조직개편을 밀어붙인다. 이제 장기화 될 수밖에 없다. 파업에 종사하시는 분들 특히 국민일보는 130일이 넘었다. 많이 어려울텐데…. 더 힘을 내고 길게 가야 한다.”

- 총선결과로 언론자유화 세력이 국회에 많이 입성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나 역으로 언론이 파업을 함으로서 유권자들의 선택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아쉬움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파업을 접고 돌아갈 논리는 안 된다. 물론 내가 언론인이 아니기에 그 결정에 관여할 수 없지만 역사적 전례를 볼 때 파업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대로 그냥 돌아갔을 때의 좌절감과 패배감은 역사로 증명된다.

동아일보에서 싸운 사람 100명이 이후에도 남았는데 왜 동아일보가 저렇게 되었겠나? 패배감과 열패감으로 다신 파업 안한다는 생각을 한 거다. 더욱이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 5개 언론사가 동시 파업하고 있다. 그 상황을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유야무야 할 수 없다. 개별 사업장과 언론노조 지도부가 용기와 지혜를 짜내야 한다.”

-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의 부산일보 사태 대처를 보면서 박 위원장의 언론관에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

“꽝이다. 본인이 딸이니 아버지를 비판하긴 힘들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도 그게 아니다. 다만 아버지 시대에서 일어난 잘못된 것들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면 털고 가야 한다. 정수장학회 문제만 해도 김지태가 본인의 의사에 반해 재산을 빼앗겼다면 원상회복을 하는 것이 맞다. 그런 원칙적인 말 한마디는 해줘야 한다. 유신시대 때 언론인들이 많은 불행을 겪었는데 ‘다신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얘기는 해야 한다.

설령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을 하면 어떤가? 민주주의만 제대로 한다면, 그런데 과연 저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무책임한 사람이 국가를 맡을 수 있을까? 아버지 일이라며 방치하고 자신도 수십억을 챙겼다.나도 언론에 관심이 많은 한명의 시민이자 역사학자로서 그 얘기를 듣고 싶다. 박근혜가 답변을 할 때 까지 정수장학회나 경향신문, 박정희의 언론탄압 문제를 매일 트위터를 통해 제기할 것이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정상근 기자 dal@
- 그나마 이명박 보다는 낫지 않을까?

“박근혜는 최소한의 함부로 움직이거나 천박하게 행동하진 않는다. 공주답게 행동하는 부분이 있다. 이명박은 그야말로 생양아치 아닌가? 이렇게 나라를 운영하고 체면이고 뭐고 없이 먹튀 정권이 될 것이다. 아마 선거가 끝났으니 지난 4년 동안 팔아치운 것 보다 남은 1년 간 팔아치울게 더 많을 것이다. KTX만 봐도 그렇지 않나?”

- 모두 정치권력의 교체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은데, 또 다른 활로나 출구는 없을까?

“장기화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체력안배도 하고, 독자나 시청자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야 한다. 그 새로운 시도가 뉴스타파 등이다. 그나마 팟캐스트 환경이 주어지면서 과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유쾌하게 가자. 권력에 엄숙함을 조롱하고 서로 상처받지 않게 다독여야 한다. 결국은 우리가 이길 것이다.”

- 연합뉴스 사원 추천으로 사장추천위원회에 들어갔지만 박정찬 사장 연임을 막지 못했다.

“뭐 들러리가 된거다.(웃음)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노조 추천이라고 해야 5명의 추천위원 중 1표일 뿐이다. 그리고 후보군을 복수추천 하기로 되어 있는데 2명밖에 지원을 안했더라. 복수 추천해야 하니 그 두 명을 추천한거다. 나도 그런 곳을 처음 가봤는데 무력감을 느꼈다. 물론 구조적으로 노조 추천위원이 들어가는 것이 100배는 낫지만.

보다 구성원들의 의사가 강력하게 반영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입법화해야 할 것 같다. 그걸 하려면 국회 다수를 차지해야 했다. 하지만 당장 어려워졌어도 문제제기는 해야 한다. 노조가 실질적으로 사장 선임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일단은 선출권이 없어도 비토권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내부 구성원들이 비토하는 사람은 안 되야 한다. 권력층에서 내려오더라도 내부를 합리적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낫지 않겠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보내 매일같이 출근거부 투쟁하고, 그런 식으로 피차간에 모멸감을 느끼면 다닐 수 없는 것 아닌가?”

- 최근 언론파업 현장을 다니며 강연을 했는데 젊은 기자들을 보며 느낀 생각은? 

“젊은 기자들이 아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현장의 이야기를 썼으면 좋겠다. 너무 구조적이거나 사회과학적인 것 말고 숨소리가 들리고 살 냄새가 나는 기사를 썼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 비정규직이 몇%인지 볼 수 있는 기사도 필요하지만 비정규직 누군가의 하루, 쌍용차 노동자의 문제, 그 아이들의 삶 이런 기사를 생생하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언론사 가면 국장급 나이다.(웃음)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기자들도 있고, 아마 파업하는 기자들 중에 자기가 파업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래도 옛 언론투쟁 얘기를 하면서 예전보다는 지금이 낫다는 말을 하곤 한다.”

정상근 기자 | dal@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