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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5일 토요일

초고압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또 폭행사건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14일자 기사 '초고압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또 폭행사건'을 퍼왔습니다.
굴착기 막으며 농성 벌이자 공사장 인부들이 강제로 주민들 끌어내

초고압 송전탑 건설을 두고 이를 막으려는 지역 주민을 공사업체가 폭행하는 사건이 지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밀양에서 시의원이 공사업체에 폭행을 당한 것에 이어 이번엔 경북 청도군 지역 주민이 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심평 1리 주민대책위원회가 밝힌 내용을 보면 34만5000볼트 초고압 송전탑이 건설되는 경북 청도군 각북면 심평1리 주민들은 14일 오후께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굴착기 등이 진입하는 걸 막으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이번 주부터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릴레이 단식 농성을 진행했다. 그럼에도 공사가 강행되자 물리적 행동에 나선 것.

이를 막기 위해 공사현장 인부는 김미화 목사와 노약자 등을 강제로 공사현장 밖으로 끌어냈고 이 과정에서 몇몇 주민은 타박상을 입고 팔 인대가 늘어나는 등 부상을 입었다. 현재 김미화 목사는 인근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다. 또한 당시 상황을 촬영하던 푸른영상 활동가가 공사업체(서광 이엔씨) 현장 소장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청도군 각북면 삼평1리는 초고압 송전철탑 7개가 들어서는 곳이다. 하지만 사업추진과정에서 주민의견서 위조 의혹이 제기됐고 '전원개발촉진법'에 규정된 주민의견수렴 절차조차 제대로 밟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는 지역이다.

전원개발촉진법에 따르면 송전선로 건설 사업은 미리 주민들에게 통지하고 도면 등을 열람시키게 돼 있다. 하지만 건설업체는 그런 절차를 무시한 것. 뒤늦게 이를 인지한 주민들은 공무원을 직무유기로 고발했다.

그럼에도 한전은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지역주민은 절차상 하자에 관해 문제제기하며 지난 7월부터 공사현장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현재 지역 주민은 공사를 중단하고 사업승인과정에서 저질러진 불법ㆍ편법행위에 관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전은 절차상 아무 문제가 없다며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삼평1리 부녀회장 이은주 씨(45)는 "사람을 이렇게 취급할 수는 없다"면서 "평화롭고 조용하던 마을이 송전탑공사로 인해 망가지고 있다. 일단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삼평1리 주민대책위원회

/허환주 기자

2012년 8월 21일 화요일

현대차 비정규직, 소화기 맞으며 울산공장 농성한 이유는?


이글은 프레시안 2012-08-21일자 기사 '현대차 비정규직, 소화기 맞으며 울산공장 농성한 이유는?'를 퍼왔습니다.
현대차 신규채용 수정안 반대…노조간부 폭행·납치사건은 기폭제

현대자동차 보안팀의 비정규직노조 간부 '집단폭행·납치'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는 가운데, 20일 저녁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 400~500여 명과 사측 경비 천여 명이 대치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날 오후 9시30분께 죽도를 들고 1공장 진입을 시도했고, 사측과 용역경비직원들은 1공장 입구에 소화기를 난사했다. 이 때문에 야간근무를 하던 정규직마저 급하게 피신하면서 공장 라인이 정지됐다.

현대차 정규직노조 임원이 긴급히 중재에 나섰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측이 비정규직 관련 안을 폐기하지 않으면 여기서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며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동자들은 21일 새벽까지 공장 문 앞을 지켰고 대치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 20일 저녁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사측이 대치했다.

비정규직노조, 현대차 신규 채용안에 반발

이번 충돌은 '비정규직노조 간부 집단폭행·감금납치 사건'과 현대차의 신규 채용안을 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한 결과로 풀이된다.

앞서 현대차는 이날 오후 4시경 정규직노조와 재개된 교섭에서 당초 2016년까지 3000명을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하겠다는 안의 기한을 2015년으로 앞당기는 수정안을 냈다. 아울러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일하는 공정을 재배치해 불법파견 논란을 잠재우겠다는 의지도 확고히 했다.

정규직과 섞여 일해 '불법파견'을 인정받을 개연성이 높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비정규직노조에 따르면 현대차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8000여 명에 달한다. 설사 이들 가운데 3000명이 선별돼 정규직으로 채용되더라도, 이에 따른 비정규직 결원은 또 다른 비정규직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최병승 조합원 소송 7년째…소송 결과 기다리다 정년퇴직할 판"

비정규직노조는 신규 채용 대신 '불법파견 인정에 따른 정규직 전환'을 요구해왔지만, 현대차는 이날 제시한 수정안에서 "사내협력업체 관련 인원의 소송은 최종(대법원) 판결 결과에 따라 적용한다"고 못 박았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2월 사내하청 노동자인 최병승 씨를 무려 6년간의 소송 끝에 '현대차 정규직'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중앙노동위원회가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최 씨의 복직을 명령하자, 현대차는 이에 불복해 또 다시 수년이 걸리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최 씨 이후로 현대차에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소송을 건 사내하청 노동자는 1900여 명에 달하지만, 이들 사이에서 '소송 결과만 기다리다가는 정년퇴직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현대차는 최 씨의 대법원 판결을 두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80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면 260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며 난색을 표한 바 있다. 현대차가 제시한 정규직 전환 비용은 지난해 현대차 순이익인 8조1000억 원의 3.2%에 해당한다.

'비정규직노조 간부 집단폭행·납치' 논란이 기름 부어

이러한 상황에서 18일에는 현대차 보안팀·용역경비직원이 하루 두 차례나 비정규직노조 간부를 폭행·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비정규직노조 관계자는 "현대차가 불법파견을 무마하기 위해 제시한 안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비정규직들을 납치해서 위협하고 있다"며 "노조 지도부를 납치해 노조가 못 굴러가게 한 뒤 노조를 말살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울산·아산·전주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이날 '집단폭행, 감금납치 현대차 규탄과 비정규직관련 제시안 폐기'를 촉구하며 주야간 4시간 부분 파업을 벌였고(울산 야간조는 전면 파업), 울산 비정규직노조는 공장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비정규직노조와의 충돌이 있고 난 뒤 현대차 사측은 정규직노조에 마라톤협상을 제시했으나, 문용문 정규직노조 위원장은 "지금까지 제시된 안으로는 조합원을 납득시킬 수 없다"며 거절했다. 다음 교섭은 21일 오전 10시에 시작될 예정이다.

 /김윤나영 기자

2012년 8월 3일 금요일

인권위원장이 인권위 조사받아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8-03일자 기사 '인권위원장이 인권위 조사받아'를 퍼왔습니다.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소속기관인 인권위의 조사를 받게 됐다.
인권위는 2일 침해구제위원회를 열고 장하나 의원 등 민주통합당 의원 5명과 시민 80여명으로 구성된 진정인단이 제기한 현 위원장의 중증 장애인 인권 침해 진정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현 위원장은 2010년 12월초 인권위 건물 11층에서 중증장애인이 농성할 때 전기를 끊고 엘리베이터 가동을 중단하는 등 인권침해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위 관계자는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어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라며 단전이 실제 있었는지를 조사할 예정이다.
"2010년 겨울, 인권위에서 중증장애인들 농성할 때 전기-난방 끊고 엘리베이터 가동 중단시켜, 장애인 인권활동가 우동민씨 폐렴 걸려 사망...'현병철 장애인 인권침해' 진상 조사 - 이런 자가 인권을?" (불**@jang***)
"현병철, 대화엔 입닫아…인권적 태도 보인 적 없어 / 문경란 전 인권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걸 본 적이 없다 .. 국가기구의 수장으로서 민주적인 절차를 존중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분이다" (da**,@leo***)

이계덕 기자  |  dlrpejr@hanmail.net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거리로 쫓겨난 동아의 ‘자유언론’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7-13일자 기사 '거리로 쫓겨난 동아의 ‘자유언론’'을 퍼왔습니다.
언론과 권력 (44)

동아일보사에서 제작거부 농성이 시작된 지 엿새째인 3월 17일 자정이 넘은 시각에 편집국 창밖을 내다본 기자 몇 명이 황급히 외쳤다. 수상한 남자들이 회사 건물을 에워싼 가운데 무교동 쪽 큰길에 누군가가 대형 탐조등을 설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편집국과 4층 방송국에서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누워 눈을 붙이려던 사원들에게 비상한 상황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달려갔다.
새벽 3시 15분께 편집국 남쪽 길 건너편에서 탐조등 불빛이 켜지는 것을 신호 삼아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든 200여 명의 폭도들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2층 공무국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겨우 5분도 되지 않아 망치로 2층 공무국의 철문과 벽을 부수고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물만 마시면서 엿새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던 23 명의 기자들 가운데 최연장자가 “소란을 피우면 활자판이 쏟아질 테니 우리 스스로 조용히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침입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기자 한 명에 3,4 명씩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주먹질을 해댔다. 기진맥진한 기자들은 양쪽 겨드랑이를 폭도들에게 잡힌 채 회사 차고로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정연주의 안경이 두 동강이 나고 임채정, 심재택, 성유보가 다쳤다. 기자 23 명을 태운 동아일보사 업무용 지프 다섯 대는 통행금지로 인적이 끊긴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혜화동 우석병원으로 달려갔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폭도들의 일부는 동아일보사의 영업직 사원과 가판원이었고 나머지는 정체불명의 무술 유단자들이었다.
3층 편집국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살피고 있던 기자들은 새벽 3시 50분쯤 폭도들이 공격을 시작하는 소리를 듣고 농성을 하던 사원들에게 ‘경보’를 발했다. 쇠줄로 굳게 걸어 잠근 남쪽 출입문을 망치와 도끼로 부수는 소리가 편집국 안으로 울려 퍼졌다. 고막을 뚫을 듯이 소름이 끼치는 그 굉음은 자유언론을 난도질하는 ‘망나니들의 칼춤’ 소리 같았다.
철문이 휑하니 뚫리자 대형 손전등을 든 폭도 몇 명의 뒤를 따라 150 명이 넘는 괴한들이 편집국으로 밀려들었다. 젊은 기자들이 맨 주먹으로 달려가서 앞을 막아서자 그들은 소화기로 가스를 뿜어대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폭도들 사이에는 동아일보사 판매부와 통신과 직원, 그리고 임시로 고용된 경비원들이 섞여 있었다. 폭도들은 농성하는 사원들에게 ‘당장 나가라’고 위협했다. 그러자 기협 임시분회장 안종필(편집부 차장)을 비롯한 기자 몇 사람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 1974년 10월 24일 오전부터 편집국 한가운데 기둥에 걸려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떼어냈다.
안종필의 사회로 마지막 기자총회가 열렸다. 농성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 낭독에 이어 당시 민주화운동권에서 많이 부르던 ‘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했다. 이어서 ‘자유언론 만세’ ‘민주회복 만세’와 애국가를 부른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오전부터 편집국 한가운데 기둥에 걸려 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떼어냈다. 기자들은 침통한 얼굴로 각자 책상에 든 물건들을 챙겼다. 사물함을 정리한 뒤 편집국을 나서는 기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3층부터 회사 정문까지 계단을 내려오는데 폭도들이 ‘빨리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괴한들이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농성장을 기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재야인사들은 통행금지가 해제된 새벽 4시가 지나자 회사 정문 앞으로 달려와 분노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신새벽에 내리는 부슬비를 맞으면서 동아일보사 건물을 나서는 기자들을 얼싸안은 그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함석헌, 천관우, 이희호, 정일형, 이태영을 비롯한 재야의 어른들이었다.
2층 공무국의 단식농성팀과 3층 편집국의 기자들이 폭력에 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4층의 방송국팀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자행되고 있는 추악한 ‘민중 배신극’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날이 밝기까지 지연작전을 펴기로 했다. 특히 방송국은 시설의 특수성 때문에 보안장치가 되어 있어서 4층 셔터를 내리고 문을 잠근 뒤 책걸상을 비롯한 집기로 출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방송국 사원들은 공무국과 편집국이 폭도들에게 점거 당한 뒤 1시간 40분이나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아침 6시께 각목과 소화기, 소방호스로 무장한 폭도들이 방송국 셔터를 부수고 밀려들어 왔다. 무술유단자로 보이는 자가 폭도들을 꾸짖던 프로듀서 김학천의 옆구리를 발길로 차서 실신시킨 뒤 병원으로 보내는가 하면 여성 아나운서의 머리채를 낚아채기도 했다. 폭도들은 4층부터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 사원들의 치맛자락을 들치면서 상소리를 퍼붓고 남자 사원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먼저 회사 밖으로 쫓겨난 기자들은 방송국 사원들을 부둥켜안으면서 눈물을 쏟았다.
바로 그 무렵 동아일보사 남쪽 길 건너편의 중부소방서 앞에 모여 있던 사복경찰관 150여 명이 동아일보사 정문 앞으로 달려와 폭력에 밀려 쫓겨난 사원들과 재야인사들을 광화문 지하도로 내몰기 시작했다. 그때가 1975년 3월 17일 아침 6시 30분께였다. 당시 쫓겨난 사원 160여 명 가운데 113 명 (고인이 된 18 명 포함)은 그 이후 37년이 지난 2012년 7월 현재까지 동아일보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동아일보사 부근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기자들이 오전 9시쯤 회사 정문 앞으로 가서 보니 임시로 채용된 경비원들과 사복경찰관들이 출근하는 사원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검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회사가 미리 나누어준 ‘빨간 신분증’을 지니고 있었다.
쫓겨난 동아일보사 사원들은 그날 오전 10시께 신문회관(현재 프레스센터 자리)에 모여 ‘폭력에 밀려 동아일보를 떠나며’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유언론의 마지막 보루 ‘동아’를 지키기 위해 신명을 바쳐온 우리는 17일 새벽 동아일보사 사원 아닌, 산소용접기와 각목을 휘두르는 폭도들에 끌려 밤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뜨거운 국민적 성원과 온 세계 양심의 격려에 힘입어 빈사의 상태에서 기적처럼 회생한 ‘동아’는 이제 권력의 강압과 경영주의 마비된 이성으로 끝내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비극적 파국 앞에서 우리는 국민적 열망을 배반한 괴로움에 비통해 할 겨를마저 없다.
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 폭력을 서슴지 않는 언론이 어찌 민족의 소리를 대변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몸은 비록 ‘동아’의 사옥을 떠나지만 ‘동아’의 정통성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의 영원한 기본권인 자유언론은 산소용접기와 각목으로 말살될 수 없다. ‘동아’의 정통성은 폭도를 고용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사수하는 우리들에게 있다.”(, 36쪽)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