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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0일 토요일

학술단체들 “유신헌법은 불법…무효화해야”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0-19일자 기사 '학술단체들 “유신헌법은 불법…무효화해야”'를 퍼왔습니다.

유신 40년 맞아 심포지엄서 주장
긴급조치 피해자 재심 ‘무죄’에도
‘유신헌법을 기준으로 판단’ 여전
“국민자유·권리 제한 등 부당” 비판

‘유신 40년’을 맞아 유신체제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학계의 비판과 성찰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유신헌법 자체가 ‘불법적 헌법’이므로 이를 법률적으로 무효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오동석 아주대 교수(법학)는 19일 학술단체협의회 주관으로 열린 ‘2012년 오늘, 유신을 말하다’ 심포지엄(서울 운니동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유신헌법의 불법성과 반민중성’이란 발표문을 통해 “유신헌법은 ‘불법적 헌법’”이며, “적어도 긴급조치에 관한 조항만큼은 원천적으로 무효화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유신헌법의 불법성 청산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그동안 꾸준히 제기돼 왔다. 최근 몇년 사이 유신헌법에 따른 긴급조치 위반(1·4·9호)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사람들이 ‘긴급조치는 위헌’이라는 법원의 판단에 근거해 재심에서 무죄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 쪽이 유신헌법에 의거한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밝히기 위해 당시 헌법인 유신헌법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등 여전히 유신헌법은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오 교수가 주목한 것은 독일의 법 철학자 구스타프 라트부르흐(1878~1949)의 ‘법률적 불법’이란 개념이다. 그는 “극도로 부정의한 실정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라트부르흐의 공식 등을 참조해 유신헌법을 어떻게 ‘불법적 헌법’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고찰했다. 실제로 유신헌법은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와 1969년 3선개헌 등 이미 헌정질서를 파괴한 행위들이 모태가 됐고, 1972년 선포된 유신헌법 자체도 10월17일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발령한 ‘비상조치’라는 불법 행위에 근거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내용을 보더라도 국가안전보장을 이유로 들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권력분립의 원리를 침해하는 등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오 교수는 따라서 “유신헌법은 ‘불법’이라 볼 수 있으며, 적어도 유신헌법 가운데 긴급조치에 관한 조항만큼은 ‘라트부르흐 공식’에 입각해 원천적으로 무효화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특히 긴급조치 조항을 무효화하기 위해 “현행헌법에 근거해 위헌 판단을 내리거나 초헌법적인 기준으로부터 ‘유신헌법의 불법’ 판단을 추론하는 것이 좋다”고 그는 주장했다. ‘신헌법 우선’의 원칙에 따른다면, “이 헌법 시행 당시의 법령과 조약은 이 헌법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한 그 효력을 지속한다”는 헌법 부칙 5조에 의거해 현행헌법에 위배되는 긴급조치 조항을 위헌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 주장대로라면, 헌법재판소는 위헌법률심판으로 유신헌법의 긴급조치에 대해 무효 결정을 할 수 있고, 법원 또한 헌법상 부칙조항에 따라 긴급조치에 대해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앞으로 학계·법조계의 후속 논의가 주목된다.이밖에 심포지엄에서는 유신체제의 자본축적 메카니즘과 지배이데올로기, 새마을 운동과 동원체제, 박정희의 리더십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이뤄졌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2012년 9월 30일 일요일

정청래, 유신헌법 무효 결의안 발의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9-29일자 기사 '정청래, 유신헌법 무효 결의안 발의'를 퍼왔습니다.

민주통합당 정청래 의원은 29일 유신헌법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는 내용의 '유신헌법 무효 결의안'을 발의했다.

결의안은 5.16이 4.19 혁명 정신을 유린한 군사쿠데타임을 명확히 밝히고, 1972년 제정된 유신헌법의 내용과 형식이 무효라는 것을 천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신정권의 반인권적, 반민주적 과오들을 바로잡기 위한 피해자 구제.명예회복을 위한 후속입법을 조속히 추진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결의안에는 민주당 의원 20명과 최근 통합진보당을 탈당한 무소속 강동원 의원 등 총 21명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이와 관련, 정 의원은 조만간 '유신헌법 치하 부당한 피해에 대한 원상복구 조치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벌법'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정 의원은 "5.16과 유신독재의 잔재가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만큼 이제는 이를 둘러싼 소모적 논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며 "이번 결의안이 통과되면 40년만에 국회 스스로 유신헌법이 무효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어서 대한민국 헌정사에 큰 의미를 남길 것"이라고 말했다.

강경훈 기자 qwereer@vop.co.kr

2012년 9월 15일 토요일

박정희·김일성과 짜고 유신헌법 만들었다.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9-14일자 기사 '박정희·김일성과 짜고 유신헌법 만들었다.'를 퍼왔습니다.
서울대 한인섭 교수 주장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와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13일 트위터를 통해 박 후보의 '유신'과 관련된 역사인식을 비판하고 나섰다.
한 교수는 "남한은 유신헌법 제정사실을 북한에 알려줬고, 북한도 그에 발맞춰 주체헌법을 제정했다. 심지어 발효일자도 같다"며 "한마디로 박정희·김일성이 독재강화를 위해 짜고친 고스톱이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14일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 대해서는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독재통치의 과거에 대해서는 그냥 묻어버리고 가자는 주장을 한다"며 "나는 일제 통치가 우리 경제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말이 듣기 싫고,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통치 때문에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말도 듣기 싫다"고 말했다.

이계덕 기자  |  dlrpejr@hanmail.net

2012년 9월 1일 토요일

‘건망증’ 홍사덕! 유신을 가르쳐주마②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8-31일자 기사 '‘건망증’ 홍사덕! 유신을 가르쳐주마②'를 퍼왔습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수업 빠지면 사형 당하는 유신헌법

수업 안 들으면 사형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아십니까?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을 보장하기 위해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헌법에 추가했다. 즉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또는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했을 때 대통령이 국정전반에 걸쳐서 긴급조치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판단해서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면 ‘자기 입맛에 맞는 대로 긴급조치를 취해 사람들을 조질 수 있게 한 것이 긴급조치이다. 긴급조치 위반자들은 민간인이고 계엄령 치하가 아님에도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군인이 민간인을 재판한 것이다. 유신이 독사라면 긴급조치는 그 독이빨이었다. 박정희는 죽기 전까지 긴급조치를 무려 9번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에 대해 찬성이든 반대든 일체 의견을 금지시킨 것이다. 의사표현마저 무시한 초헌법적 횡포였다. 그리고 그 첫 구속자가 광복군 출신 재야지도자 장준하선생과 재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다. 장준하선생은 유신헌법을 비방했다고 무려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것도 조국근대화이고 수출100억불 문제이겠는가! 1974년 고 김근태 의원 등이 구속되었던 민청학련 사건 당시 발동한 긴급조치 4호의 내용은 경악할 지경이다.

“학생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거나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여도 사형·무기징역·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 9호의 경우 4년 6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쉽게 말해 계엄령이 4년 반 정도 지속된 것이다. 유신이 사실상 계엄과 다름없는데 거기에 긴급조치라는 보너스 계엄이 추가되었다. 한마디로 전 국토의 감옥화 전 국민의 죄수화가 유신시대였다. 그것을 박정희는 총력안보라고 불렀다. 이것이 잘 살기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협박한 박정희의 유신 실체이다. 

ⓒ자료사진 유신독재에 맞서다 박해를 당하고 끝내 의문사한 '재야 대통령' 장준하 선생(맨 오른쪽)

잘 살기 위한 유신? 누가 잘 살았나?

어디 유신독재가 일인 독재에 그치겠는가. 잘 살기 위해 유신을 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경제성장의 주역인 노동자들이 유신시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당시 생산직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1970년에 51.6시간, 1975년 50시간, 1978년 월 260시간으로 주당 65시간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이었다. “근로자를 가족같이 직장을 내 집같이” 구호 아래 일어난 일이었다. 유신 전야인 1960년대 말 청계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박정희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2만 여명이 넘는 종업원의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보조노동자)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이 편지를 전태일은 끝내 부치지 못했다. 1969년 전태일은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다음과 같이 공개장을 보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12시간으로 1개월 특(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끝내 아무 대답도 없었다. 마침내 전태일은 1970년 11월 근로기준법을 품에 안고 분신자살로서 항의하고 노동자의 자각을 촉구했다 1886년 5월 1일 미국에서 노동자들이 1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일으킨 파업으로부터 80년 지난 대한민국에서 노동자 전태일은 8시간도 아니고 10시간에서 12시간을 요구하는 이 비참한 절규가 박정희 시대 노동자의 외침이었다. 

ⓒ자료사진 민주노조를 지키려다 사측의 구사대가 끼얹은 똥물을 뒤집어 쓴 동일방적 노동자들
홍사덕씨 말대로 1970년대 수출의 주요 역할을 했던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은 어떠했던가. 1977년 7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민주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해 강제 진압에 나선 경찰들에 맞서 옷을 벗고 알몸으로 저항했다. 설마 이런데 경찰이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개들은 잔인했다. 알몸의 여성노동자들을 짓밟고 강제연행했다. 1978년에는 회사가 한 수 더 떴다. 남성노동자들을 매수해 여성노동자들에게 똥을 퍼붓고 젖가슴과 입에다 똥을 집어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이를 구경만 했고 회사는 조합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이것이 “직장을 내집처럼 근로자를 가족처럼”이라는 슬로건 하의 노동자의 현실이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동요시킨 결정적 계기도 수출역군에 의해서였다. 1979년 가발수출업체인 YH무역의 여성노동자 187명이 회사의 위장 폐업조치로 거리에 나앉게 되자 당시 야당인 신민당사에 가서 최후의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무려 10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1명이 추락 사망했다. 홍사덕이 수출 주역이라고 추켜세운 가발업체의 여공들이 조국근대화에 대해 박정희로부터 돌려받은 보답이 이것뿐이었다! 

홍사덕씨는 말해야 한다. 1970년대 필자 또한 체험했듯이 박정희의 퇴폐·향락풍조 일소 사회기강 확립 지침에 따라 경찰들이 줄자와 가위를 들고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다. 머리가 귀를 덮기만 하면 줄줄이 파출소로 끌려가 강제로 뒷머리를 바리캉으로 밀어버렸다. 지나가던 아가씨의 허벅지에 줄자를 대어 치마 길이가 규정을 어기면 길에서 팻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서 있어야 했던 그 짐승의 시대를 당신은 조국근대화의 시대라고 부를 것인가. 청량리역과 서울역에 경찰을 배치해 놀러가는 청춘남녀들이 들고 가던 기타마저 사회기강 확립이란 구실로 사그리 압수했다. 도대체 홍사덕씨가 말하는 경제성장을 위한 수출100억불은 씻고 찾아보래야 볼 길이 없다. 이 지랄같은 것들이 100억불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는지. 이 어처구니없는 짐승의 폭력이 난무한 유신시대는 오직 한 사람 박정희만을 위한 시대였다. 

이렇듯 장시간 중노동 저임금 비인간적 처우에 시달리면서 산업전사라는 이름 아래 전사해 간 노동자들의 피 위에서 한국 경제는 성장했고, 그 과실은 몽땅 재벌과 소수의 권력자에게 돌아갔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된다는 ‘빈익빈부익부’가 그 시절 유행어 아니던가. 

그런 범죄집단의 후계조직이 이제는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노동자들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한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며 느닷없이 추켜세우는 추태를 부리고 있다. 정말 타임머신이 있다면 간곡하게 희망한다. 홍사덕씨가 유신 시절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던 가발공장 여공이나 청계피복공장 노동자로서 한 번 살아보기를.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에게 의무를 다해야 할 정치인들이 국가나 헌법이나 정강정책이 아니라 특정 개인에 게 충성을 바치면서 정치일선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충성 대상은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박근혜 개인이다. 과거 박정희의 친위조직인 유신정우회가 자연 연상된다.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의 심복 이후락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이 당당히 외치던 말 “우리는 박정희대통령을 모시는 박정희교의 신도들이다!” 


이 기사와 관련기사
  • ‘건망증’ 홍사덕! 유신을 가르쳐주마①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2012년 8월 7일 화요일

박근혜, 군사문화 대물림 받았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2-08-06일자 기사 '박근혜, 군사문화 대물림 받았나'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다시 쓰는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

현역군인들로부터 필자가 칼부림 테러를 당한 것은, 군사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쓴 칼럼 때문이었다. 1988년 8월6일이었다. 24년 전 바로 오늘이었다. 그렇게나 오래된 이야기를 오늘 다시 꺼내 드는 데는 까닭이 있다. 그 군사문화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채, 오늘 이 나라에서 다시 시대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이 분명한 상황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군사문화는 힘으로 싸우거나 지킴으로써 승리를 쟁취하는 문화다. 때문에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일사불란이나 획일성이 중요한 가치가 된다. 때문에 군사문화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목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체제에 불편함을 느낀다. 때문에 군사문화는 민주주의 체제를 싫어하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낸다. 다양함에 대한 그런 혐오감이 하나의 사건으로 표출된 게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자 한, 필자에 대한 '오홍근 부장 테러사건'이었다.

▲당시 필자가 받았던 편지 ⓒ프레시안

해방 후 이승만 씨가 건강한 민주국가 건설에 재를 뿌린 뒤, 4·19혁명으로 민주주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할 무렵, 장면 내각이 출범한 1960년 8월19일부터 불과 9개월 만인 1961년 5월16일, 이 땅에 군사문화는 점령군으로 짓쳐들어왔다. 이 나라 현대사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다 알다시피 군사문화의 원조는 그래서 박정희 씨다. 전두환 씨가 뒤를 이으면서 "군사문화는 견딜만한 것"이고, "(일부 계층이지만) 협조만 잘하면 혜택도 돌아간다"며 국민들을 학습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군사문화는 병영(兵營) 안에 있어야 했다. 그게 군부대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 나오면 소리가 나게 되어있다. 5000만 명의 국민이 사는 나라에서는 5000만 개의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그 많은 목소리들을 한 줄로 세워, 제식훈련 하듯이 이끌고 가고자 하는 게 군사문화다. 10월 유신에서 박정희 씨가 표방한 이른바 '능률 극대화'도 그런 류(類)의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무리였다.

5000만 개의 목소리 가운데 최대공약수를 살펴 짚어가는 게 순리이고, 그게 민주적 절차였다. 그러나 그들은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없이 잔인무도하고 야비하기 까지 했다. 필자에 대한 테러 실행 방안을 놓고서도, 행동대원들이 상부에 올린 3개안(案) 가운데 제1안은 '오홍근 가족 몰살'이었다.

결재 과정에서 지휘관은 고맙게도(!) 제3안을 택해 주었다. 그게 '혼내주라'는, 왼쪽 허벅지 도륙이었다. 깊이 3~4㎝에 길이 34㎝의 상처가 난 칼질을 했는데도, 고등군사법원은 '군을 아끼고자한 충정'과 '피해자의 피해정도가 경미한 점'을 참작한다며, 주요 관련자 전원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당당함을 외면한 비겁한 판결이었다. 그런 게 다 병영 밖으로 무단 외출해 국민들에게 보여준 군사문화의 본 모습이었다.

때마침 88올림픽이 진행되거나, 이른바 민주화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회적 이슈가 터져 나와 국민들의 관심이 그 쪽을 뒤 쫓는 사이, 그들은 태연히 그렇게 일을 처리했다. 그해 연초 월간중앙에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필자는 숱한 협박편지와 협박전화에 시달렸다. 그것들이 대부분 군(軍)에서 보낸 것들이었음에도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필자 테러사건이 터지면서 소리 없이 가슴앓이를 한 곳이 따로 있었다. 삼성이었다. 때마침 군이 발주하는 방산무기 수주와 관련해 대기업들이 총력전을 펼치던 무렵이었다. 삼성 산하 중앙경제신문의 일개 부장이 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글을 써, 골치 아픈 부스럼을 만든 게 문제였다. 삼성이 중알일보에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이윽고 중앙일보에서 이상스런 작업이 소리없이 추진되고 있었다.

한참 뒤에서야 '피해자 측이 오히려 잘못했노라고 빌고 다닌'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 필자는 경악했다. 사장 등 최고 경영층이 군 고위 장성들을 그루핑 해 거의 매일 밤 술자리를 마련하고 사과를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해자"라며 "이해해 달라"했고, 장성들은 그래도 분이 안 풀린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다는 이야기가 필자의 귀에까지 들렸다.

밤늦게 술자리가 파하고 승용차에 올라탈 때마다, 사장은 울었다고 했다.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부축하던 수행 직원의 증언이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가슴을 쳤다고 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신문사 사장'의 울부짖음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분은 고인이 되어 있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그분이 중앙일보를 떠난 뒤, 회사는 한동안 필자의 인사문제를 사전에 군부의 동의를 얻어 처리하고자 했다. 예컨대 "오 아무개 이번에 A부 부장으로 옮겨도 괜찮겠느냐"는 식의 협의 과정이 여러 차례 이루어 졌고, 그 때마다 나온 "안 된다"는 군부의 답변 때문에, 필자는 오랫동안 A부 부장자리에 갈 수 없었다. 신문사의 부장인사를 군대의 결재를 받아 시행하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 사원들은 다 안다.

심지어 그동안 쓴 칼럼을 모아 책을 출간 할 때도, 회사에서는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란 제목을 달지 못하게 했다. 병실에 누워 있을 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만 보장 된다면 언론은 번듯하게 바로 설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피해자 측이 빌고 다닌 상황' 이후 필자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 못지않게 '자본권력으로부터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MB도 최시중 씨를 앞세워 그런 약점을 악용해 비열하게 언론의 숨통 조인 것을 우리는 목도했다. MB가 국민 우습게 본 것 또한 그런 선배 대통령들의 군사문화에서 배운 것임도 우리는 안다. 그런 군사문화가 이 땅에 발을 붙인지 반세기가 지나고, 필자에 대한 테러로 부터도 거의 한 세대가 돼가는 요즘, 다시 주목 받고 있는 것은 한국형 신화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다. 내년 2월25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는 이야기는 달리 표현하자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말도 된다. 그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될 새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는 건 그래서 초미의 관심사 일 수밖에 없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이 나라 여당인 새누리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 박근혜 의원을 놓고, 군사문화를 연상시키는 여러 우려들이 쏟아지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그녀와 관련해서는 물론 좋은 이야기들도 많다. 허나 새누리당 안에서 조차 여러 소리가 나오고 있는데다, 박의원 본인의 언행에 객관적 사실까지 겹쳐 바야흐로 심각해 질 가능성까지 엿보이고 있다. '사당화(私黨化)'니, '불통'과 '독선'의 리더십이니, '일사분란'에 '유신회귀', '수렴청정 대왕대비'란 소리도 들린다. 이런 것들은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들이지만, 박 의원 자신도 5·16이 구국의 혁명이라는 것을 전 국민의 50% 이상이 지지하고, 유신헌법을 80% 이상의 국민들이 찬성했다는, 터무니 없고 기막힌 소리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 박근혜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유신헌법이나 유신헌법 재신임 안건이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적어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가 정당한 절차와 공정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고 믿는 사람 거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국가비상사태와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하고, 투표 안건에 대한 찬반 운동까지 금지된 서슬 퍼런 분위기 속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그게 다 국민투표에서 패배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해놓고 벌인 작태었다. 말하자면 '승리'가 100% 보장되도록 판을 짜놓고 밀어붙인 군대식 '작전'이었다.

박근혜 의원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보고 우겼는지 몰라도,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이 다른 것도 아닌 유신헌법과 관련해 그런 거짓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박근혜 의원의 태생적 체질에 아버지 박정희 씨의 군사문화가 혈맥을 타고 흐른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다. 군사문화식 고집을 부린다고 되는 세상이 아니다.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방법에 대해 전 국민의 70% 이상이 완전 국민경선제를 찬성했다. 다른 경선 후보들도 그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 의원은 단호히 거부했다. 사람이 원칙과 룰(rule)에 따라 가야지, 사람에 맞춰 원칙과 룰을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자면 박근혜 의원의 '원칙'에 대한 견해는 군사문화식 견해다. 군사문화에서 패배는 용납되지 않는다. 경선방법을 바꿀 경우 만에 하나라도 생길 수 있는 경선 패배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박 후보는 '원칙론'을 고수했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는 논의·타협하는 과정을 거쳐 많은 사람들이 원한다면, '원칙도 바꿀 수 있다는 원칙'이 더 중요하다는 쪽이다. 그게 '원칙'이라는 말에 대한 민주주의 식 해석이라 했다.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다면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국민경선제에 대한 문제도 처음부터 사고방식을 달리 했다면 지금 같은 '망신스런 경선' 사태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달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 처리과정을 전후해서 드러난 박 의원과 새누리당의 행태에서도, 그녀와 그 정당이 섬기고 있는 문화가 바로 전형적인 군사문화였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국회 복도에서의 박 의원 말 한마디로,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정두언 의원과 사퇴하겠다는 이한구 원내대표의 가야 할 길이, 본인들이나 의원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미리 결정되었다. 박근혜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두말없이 그리 되었다.

그녀가 복도에서 기자들에게 그 문제에 관한 '속내'를 말하는 사이, 의원총회 회의장에 있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스마트 폰으로 박 의원의 발언을 검색해 서둘러 문자를 주고받느라 법석을 피웠고, 당 지도부도 그녀의 '뜻'을 받들어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새누리당 지도부나 의원들의 '좌우지간 바빴을 광경'이 눈에 선한 대목이지만 사실은 그게 다 박근혜 의원이 '그러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라 보는 게 맞다.

아버지 박정희 씨 못지않은 그녀의 군사문화가 지금 새누리당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원조 박정희 씨로부터 흘러온 군사문화가 그의 딸 박근혜 의원을 통해, 획일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새누리당을 흠뻑 적셔놓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 해야 한다며 기를 쓰고 노력한 기간이 건국 이후 10년 밖에 되지 않는 나라, 군사문화가 더 좋다고 섬기는 사람들이 그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말하는 나라, 우리도 민주주의 한번 본 좋게 해봤으면 좋겠다.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란 칼럼을 썼다가 식칼 테러를 당한 필자가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지금 다시 군사문화를 청산하자는 글을 쓰고 있다. 참으로 감회가 한없이 착잡하다.



/오홍근 칼럼니스트

2012년 7월 22일 일요일

가톨릭 양심 깨운 5·16장학회 깡패짓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블로그 휴심정 벗님글방 2012-07-20일자 기사 '가톨릭 양심 깨운 5·16장학회 깡패짓'을 퍼왔습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 1972~2007)

'국민'학교 2학년 때였던가, 어머니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종이뭉치를 받아와 집에서 봉투를 접었다. 종이를 재단하고 밀가루 풀을 쑤어 봉투를 만들면, 이게 싸전에선 쌀을 담아, 구멍가게에선 과일을 담았다. 요즘이라면 인형에 눈알을 박거나 구슬을 꿰는 일처럼 장당 얼마씩 수공을 받았다. 동네 아이들은 학교를 파하면 우리 집 마루에 앉아 옥수수 얻어먹을 요량으로 봉투를 붙이고, 여름에도 군불을 지피고 방바닥에 봉투를 깔아 말렸다. 풀칠이 잘 마른 봉투의 수량을 세어 100장씩 끈으로 묶는 일은 내 몫이었다. 

» 신동우 화백이 그린 <10월 유신의 미래상> 리플릿. 그 당시에는 길거리에 서서 '애국가'만 들어도 멀리 쭈삣하고 전기가 오르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유신헌법' 홍보물을 주었다. 십년 후에는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과 더불어 마이카 시대가 열린다는 복음을 알리는 리플릿인데, 문화공보부에서 신동우 화백에게 그림을 맡겼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라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며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애국자'가 되고 싶었을까?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었건만, 그날부터 옆집 3학년 형과 신동우 화백의 그림을 도화지에 베끼기 시작했다. 그림에 재간이 있던 나는 포스터를 만들고, 10월 유신을 찬양하는 표어도 숱하게 만들었다. 집에는 종이도 많았고, 포스터와 표어를 붙일 풀은 언제나 잔뜩 남아 있었다. 

수줍은 탓이었을까, 아님 자랑하지 말고 숨어서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 때문이었을까, 그 '장한' 일을 숨어서 하느라 밤에만 동네 골목을 누볐다. 손으로 풀을 집어 남몰래 포스터와 표어를 붙이면서 얼마나 가슴이 조이면서도 설렜는지. 그러나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우리를 잘 살게 해준다는 '미신'을 신앙처럼 간직했다. 그러나 우리집 살림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고, 그게 독재정권의 시작임을 나는 몰랐다. 

이른바 '유신헌법'은 일본 메이지유신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과 국회 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연임할 수 있으며, 대통령도 직선제가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행정 · 입법 · 사법권을 모두 대통령에게 집중시킨 독재정권을 허용하는 법이었다. 유신헌법 아래서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내게 성당에서는 '괴담' 같은 다른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문학의 밤'이라 해서 가톨릭센터에 갔다가 김지하의 라는 시를 처음 접하고 무서워했던 중학생이었고, 주보와 함께 성당 입구에서 나눠주던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사건'에 대한 등사본 유인물을 받아 들고 경악했던 고등학생이었다. 

» 지난 4월 30일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의 장례미사에서 만났던 오원춘 씨. 그 선한 얼굴이 지금도 삼삼하다.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씨는 기관원에게 납치되었다고 양심선언한 뒤에 고문을 받고 허위사실유포죄로 1979년 10월 15일 법원에서 징역 2년이 선고받았으나, 그로부터 11일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살사건이 발생하였고, 오원춘은 그해 12월 8일 형집행정지로 정호경 신부, 정재돈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고문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한상봉 기자

지난 4월 30일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의 장례 미사에서 만났던 오원춘 씨의 모습은 그야말로 '착하고 선량한 농부'였다. 내가 '애국심'을 발휘했던 나라는 선량한 백성을 고문하고 회유하고 다시 협박하는 나라였다. '대통령을 반대하면 나라를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요하는 나라였다. 엄마 등에 업혀서 성당에 다니던 내게는 '주교님도 삐끗하면 감옥에 보내는' 나라였다. 

1974년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연행 당했고,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2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을 발표해 구속됐다.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의 악연은 예고된 것이었다. 

최근 박근혜와 관련해 논란이 되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전신이 '5·16장학회'인데, 1970년 원주 문화방송국 설립을 둘러싸고 5·16장학회와 천주교 원주교구가 함께 방송국을 만들기로 했을 때, 원주교구는 분담금과 방송국 건물까지 내주었지만 장학재단은 한 푼도 돈을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계장부도, 영수증도 없이 공금까지 유용했다.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진정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고, 5·16장학회는 오히려 협박조로 나왔다. 급기야 지학순은 1971년 10월 5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열고 천주교회 사상 최초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애국심'을 조롱하는 유신독재..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10월 유신 포스터를 붙이던 것은 '독재에 대한 예방주사'였을까? 그 뒤로 '애국가'와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에 담긴 국가주의를 체질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광주항쟁 이후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준법정신'이라는 말이 제일 싫었다. 그래서 교통신호를 일부러 어기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10월 유신이 예방주사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내게 '국가주의에 대한 백신'으로 작동했다. 부족동맹의 자유롭고 평등한 삶에 익숙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며 자녀들을 군대에 동원하고 "너희마저도 종으로 삼으리라"고 전한다. 그때에 가서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하느님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것이라 전했다. 예수도 이른바 '국가보안법'에 걸려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으니, 이처럼 국가권력에 의해 밀려난 백성들에게 마음을 두는 게 예수의 제자 된 도리다. 

황지우 시인은 라는 시에서 예전에 영화관에서 듣던 '애국가' 감상문을 적었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날아가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데,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고 했다. 

유신 교육의 탓이었을까?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하교 시간에 국기하강식을 하면서 스피커로 애국가가 흘러 나오거나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며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머리가 쭈볏 하고 감전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동료들과 이른바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해방신학을 접하면서 달라졌다. 1994년 정월 한겨울에 문익환 목사님이 선종하셨을 때, 대학로에서 영결식을 하는데 눈이 펄펄 내렸던 장면은 지금도 가슴속을 묵직하게 만든다. 그날 가슴으로 불렀던 노래 이 어느새 애국가를 대체했다. 



1980년대 노래운동모임 '새벽'을 이끌었던 문승현이 작곡한

이 마당에 30년 이상 시공을 뛰어넘어서 또다시 박정희 시대를 사모하는 이들이 출몰하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는 최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바른 선택"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이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가난한 나라로 힘들게 살았고" "안보적으로도 굉장히 위기상황"이었다며 "오늘날 한국이 있기까지 5·16이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했다. 허나, 그들이 재벌을 낳았으나, 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 수없이 죽어갔다. GNP는 올라갔지만 민주주의는 참살 당했다. 그래서 묻게 된다.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박근혜는 지난 7월 10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제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을 국가에서 국민으로, 개인의 삶과 행복 중심으로 확 바꿔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말만 조금 바뀌었을 뿐  유신 헌법 홍보 리플릿의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박근혜는 이번 선거를 (국가폭력의) 아버지인 박정희의 신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모양인데, 박근혜는 '국가와 국민이라는 말의 순서만 바꾸어' 우리나라를 다시 '유신'하려는 것인가? 

그나저나 이 국가가 국책사업으로 해군기지 만든다고 나서는 바람에, 제주 강정 바닷가를 떠나지 못하시는 문정현 신부님의 안부가 궁금하다. 장마전선이 예고되고 태풍이 불현듯 엄습하는 제주에서 부디 안녕하시라 여쭈고 있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isu@catholicnews.co.kr



본 글은 휴심정 벗님매체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