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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일 일요일

오키나와에서 본 오키나와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08-13일자 기사 '오키나와에서 본 오키나와'를 퍼왔습니다.

미군기지 오키나와 < 오스프리 후텐마 미군기지 배치반대 > 반미시위. AFP연합

오키나와현의 수도 격인 나하공항에 내리자 아열대의 후끈한 대기가 온몸을 감쌌다. 오키나와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상기해볼 때, 오키나와는 두 층위의 역사적 파장을 한반도에 제기한다.
첫째, 근대 전환기의 역사적 파장. 오키나와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천황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거듭했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의 서막을 이룬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은 막부 체제를 청산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국주의 확장을 기도했는데, 변경이던 홋카이도의 개척(1875)과 독립 왕국이던 류큐국(현 오키나와현)의 처분(1879)이 그 시발탄이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한 중화 체제의 청산, 동아시아에서 서구 열강과의 패권경쟁,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를 통한 완벽한 제국주의 체제로의 변모가 잇따른다. 단순화하면, 근대 오키나와의 역사란 일본의 제국주의적 '시초축적'의 희생양 경로를 띤 것이다.
둘째, 전후 동아시아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거점. 1931년 만주사변에서 출발한 일본의 '15년 전쟁'은 1945년 6월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으로 사실상 종결된다. 당시 일본은 오키나와 수비군에게 미군의 본토 진입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한 옥쇄투쟁을 전개하라고 명령했다. 오키나와에 진주한 일본군에는 징병·징용당한 대만인과 조선인이 다수 참전했고, 현지 주민 역시 미군과의 오키나와 전쟁에서 15만 명 이상 희생되었다. 종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체제를 유지·관리하는 군사전략의 거점이 되었고, 1972년까지 미국은 오키나와를 직접 통치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는 이중의 식민지 체제, 즉 일본에 의한 '내부 식민지'이면서 미국 패권의 '명백한 점령지'로 희생되어온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1972년 일본 복귀 이후에도 변함없는 것이 현재 오키나와 문제의 핵심이다. 더 나아가 오키나와는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유지의 보루가 되어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때 미군의 전략적 전초기지였던 오키나와는 미-소 냉전기는 물론, 최근에는 북한과 중국 헤게모니의 견제를 위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요충지로 기능해왔다. 오키나와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모두를 군사적으로 관리하고 견제할 수 있는 미국 패권의 거점이었다.
당연히 이런 오키나와 근·현대사의 전개는 현재 130만여 명에 이르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희생을 강제해왔다. 류큐 처분 이후 1945년까지 오키나와인들은 조선인들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한 차별과 배제의 낯선 타자들로 간주돼왔다. 태평양전쟁기의 희생 역시 심각했다.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오키나와 전쟁 당시 15만여 명의 오키나와인들은 미군의 진압과 일본군의 집단 자결 명령 속에서 참혹한 죽음을 경험했다. 1972년까지 이어진 미군정기에 오키나와인들은 미군이 점령해 강제수용한 후텐마, 가데나, 헤노코 등 오키나와 본섬의 약 20%를 점유한 미군기지 건설로 토지와 재산을 강탈당했다.

일본과 미국의 이중 억압

오키나와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그 안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기지의 섬'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이 기지를 점유하고 있는 미군들에게 일본의 주권은 미치지 않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의 주권 역시 제한된다. 어떤 점에서 보면 현재의 오키나와는 일본 본도 주권과 미국 패권에의 이중 종속이라는, 1945년에 구조화된 지정학적 모순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키나와는 우리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명백하게 말하면 오늘의 오키나와는 한-미-일 안보 삼각동맹의 상징적 중심축이고, 넓게 보면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 헤게모니를 저지하기 위한 지정학적 공간이며, 한반도의 분단 체제와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의 가장 강력한 모순을 내포하는 장소이다. 오키나와인들에게 전쟁과 평화는 단순한 추상 개념이 아니고, 그들의 자치와 미래를 고려할 때 심각하게 숙고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개념이다.
2012년은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40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40년이라는 역사의 시간 단위 앞에서,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와의 과거와 미래를 사유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의 복귀가 오키나와인들의 자치와 주권을 보장해주었는가' 하면, 그 대답은 회의적이다. 오히려 현재 오키나와는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요새화가 더욱 강력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였다.
최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미국이 오키나와 공군기지에 배치하려는 수직이착륙헬기 '오스프리' 저지이다. 미국은 8월에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 22기를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배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동아시아의 안정적인 군사적 지배를 노골화하겠다는 의도이다. 그런데 이 통보는 후텐마 공군기지를 북부의 헤노코로 이전하려는 미군의 계획과 맞물려 주민들의 저항이 증폭하면서 후텐마·헤노코, 카데나 기지 지역의 주민항쟁을 전면적으로 폭발시키는 현 시국의 핵심 문제로 점화되었다.

'오스프리' 반대 투쟁

후텐마 기지의 역외 이전과 관련한 문제는 나하시 주민들의 강렬한 항의 행동과 현민대회를 통해 제기된 문제이다. 1997년 미군에 의한 오키나와 소녀 성폭행 사건이 벌어진 이후, 오키나와현 주민들은 미군기지가 초래하는 폭음(爆音) 문제에 대한 항의 집회와 법적 투쟁, 현민대회 등을 통해 기지 이전 문제를 공론화했다. 후텐마 기지는 나고시의 중앙을 거대하고 기괴하게 장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미군범죄 문제 말고도 주민들의 안전과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해왔다. 실제로 미군 헬기가 인근 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이 기지를 북부 해안지역 헤노코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는 것과 동시에 광대한 바다를 매몰해 전투기와 헬기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인구 1500명의 어촌 지역인 이곳 주민들은 즉각 이 계획에 반발해, 투쟁과 농성을 벌써 3천 일 이상 진행해오고 있다. 헤노코 연안은 매우 아름다운 바다이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희귀 어족이자 바다소로 불리는 '듀공'의 집단 서식지이고, 멸종위기종인 바다거북의 집단 서식지이기도 하다. 헤노코 주민들은 군사기지가 이전해옴으로써 초래되는 심각한 기왕의 모순과 더불어 오키나와의 환경과 생태에 대한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 문제가 야기되기 때문에, 미군과 일본 정부에 대항해 비타협적 투쟁과 농성을 계속해왔다.
가데나 기지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미군 해병대 훈련기지인 가데나 기지 주변에는 100여 명의 현지 주민이 기지 3곳의 출입구를 자동차 등으로 봉쇄하고 철야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최근 미국이 배치하겠다고 통보한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가 가데나 기지에도 배치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시설공사가 진행될 조짐이 보이자 주민들의 공사 저지 투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었다. 농성 현장을 방문해 만나본 대다수 주민들은 60대 이상의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기지 공사를 봉쇄하기 위한 농성과 투쟁 탓에 생업에 상당한 지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군기지 문제는 단순한 생업의 장애를 넘어서 이들의 생존권과 주권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침해로 간주되기 때문에 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투쟁이 거의 10년 이상 전개되자 일본 본도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내려와 오키나와 주민의 투쟁에 가세하고 있었다.
후텐마 기지의 폭음소송단을 중심으로 한 장기간의 주민 농성, 헤노코 기지의 해상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100일간의 투쟁, 가데나 기지의 헬기장 건설을 봉쇄하기 위한 농민들의 투쟁 등. 오키나와 전역은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의 일방적 배치에 따른 투쟁과 집회로 뜨겁다. 특히 이런 투쟁이 일본 복귀 40주년을 맞이하는 오키나와의 역사적 계기와 맞물리면서, 오키나와의 역사와 정체성을 둘러싼 전후 체제 청산의 문제로 확대되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 주민 전체의 반응은 어떠한가. 실제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시정촌(市町村)별로 8월 5일에 열리는 '오스프리 배치 반대를 위한 오키나와 현민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각종 집회와 준비위원 결성을 했다. 각 기지에서 진행되는 주민들의 집중농성과 더불어 지난 7월 21에는 나하시의 중심지 국제통거리에서 7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오스프리 설치반대 시민집회가 열렸다. 오키나와 현의회 의장은 오키나와현에서 열린 전국의원대회에 오스프리 반대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오키나와 현의회는 오키나와 현지사에게 8월 5일 현민집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항의 행동이 조직화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력한 운동의 동력이 형성되자, 일본 정부 역시 미국 정부에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오스프리를 오키나와에 배치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오스프리의 안전성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으며, 이른바 '과부제조기'로 불리는 오스프리 배치를 강행하기 위한 조처를 오히려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오키나와 주민들뿐만 아니라 미군기지가 설치된 본도 주민들에게까지 분노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런데 미 국무성은 오스프리 문제에서 더 나아가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에 오히려 기름을 끼얹는 조치를 발표했다. 지난 7월 24일 미 국무부는 역시 잦은 사고로 공화당 의원이 '가장 비싼 고철 덩어리'라 별명을 붙인 스텔스 기종의 전투기 F22 랩터의 비행제한을 해제하고, 이것을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에 배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과부제조기' 오스프리와 '가장 비싼 고철 덩어리' F22 랩터를 오키나와에 배치하려는 미국의 의도는 무엇일까.
동북아 정세를 군사적으로 관리하려는 목표이겠지만, 그것은 결국 부상하는 중국의 패권을 노골적으로 견제하려는 목적이 핵심일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북한위협론을 포함한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의 문제를 그 근거로 삼고 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오키나와에서는 거의 없다.

오키나와, 대추리 그리고 강정마을

오키나와의 상황 탓인지 중국 역시 오키나와를 분쟁지역화하려는 발언을 최근 들어 계속하고 있다. 오키나와 일본 복귀 4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만 해도 중국 정부는 오키나와는 류큐 처분 이전까지 중국의 조공국이었기 때문에, 오키나와는 중국의 고유 영토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한편, 최근 들어서는 노골적으로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나가라'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이는 대만과 오키나와 열도 중간에 있는 기존 센카쿠 열도와 관련한 일본과의 분쟁이 더욱 확대되는 양상인데, 중국의 이런 신경질적 반응은 결국 미국의 대중국 포위 군사전략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런 점에서도 나타나지만, 오키나와의 지정학적·역사적 모순은 극복되기보다는 더욱 첨예하게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지 오키나와 주민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가. 오키나와의 평화활동가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것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가 한국의 미군기지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오키나와의 평화활동가들은 가데나·헤노코·후텐마의 미군기지 문제가 결국은 한국의 평택 대추리와 제주의 강정 해군기지 문제와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오키나와에 배치되는 오스프리나 스텔스 22기는 단순히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의 분쟁, 중국과의 대결적 상황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한반도에서의 분단 해소나 평화 체제의 구축이 근본적 해법일 것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그래서인지 오키나와 주민들은 필자를 만날 때마다, 한국의 연말 대선에 관심을 보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만일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어떻게 박정희의 독재를 극복한 한국인들이 박근혜에게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지 의아해했다. 오키나와와 한국은 기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일이 희망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키나와에 있는 친구들의 현민대회와 투쟁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
 | 이명원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1993).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말과 사람)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실천문학사) 주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오키나와에서 본 오키나와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08-13일자 제47호 기사 '오키나와에서 본 오키나와'를 퍼왔습니다.

미군기지 오키나와 < 오스프리 후텐마 미군기지 배치반대 > 반미시위. AFP연합

오키나와현의 수도 격인 나하공항에 내리자 아열대의 후끈한 대기가 온몸을 감쌌다. 오키나와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상기해볼 때, 오키나와는 두 층위의 역사적 파장을 한반도에 제기한다.
첫째, 근대 전환기의 역사적 파장. 오키나와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천황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거듭했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의 서막을 이룬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은 막부 체제를 청산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국주의 확장을 기도했는데, 변경이던 홋카이도의 개척(1875)과 독립 왕국이던 류큐국(현 오키나와현)의 처분(1879)이 그 시발탄이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한 중화 체제의 청산, 동아시아에서 서구 열강과의 패권경쟁,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를 통한 완벽한 제국주의 체제로의 변모가 잇따른다. 단순화하면, 근대 오키나와의 역사란 일본의 제국주의적 '시초축적'의 희생양 경로를 띤 것이다.
둘째, 전후 동아시아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거점. 1931년 만주사변에서 출발한 일본의 '15년 전쟁'은 1945년 6월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으로 사실상 종결된다. 당시 일본은 오키나와 수비군에게 미군의 본토 진입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한 옥쇄투쟁을 전개하라고 명령했다. 오키나와에 진주한 일본군에는 징병·징용당한 대만인과 조선인이 다수 참전했고, 현지 주민 역시 미군과의 오키나와 전쟁에서 15만 명 이상 희생되었다. 종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체제를 유지·관리하는 군사전략의 거점이 되었고, 1972년까지 미국은 오키나와를 직접 통치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는 이중의 식민지 체제, 즉 일본에 의한 '내부 식민지'이면서 미국 패권의 '명백한 점령지'로 희생되어온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1972년 일본 복귀 이후에도 변함없는 것이 현재 오키나와 문제의 핵심이다. 더 나아가 오키나와는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유지의 보루가 되어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때 미군의 전략적 전초기지였던 오키나와는 미-소 냉전기는 물론, 최근에는 북한과 중국 헤게모니의 견제를 위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요충지로 기능해왔다. 오키나와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모두를 군사적으로 관리하고 견제할 수 있는 미국 패권의 거점이었다.
당연히 이런 오키나와 근·현대사의 전개는 현재 130만여 명에 이르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희생을 강제해왔다. 류큐 처분 이후 1945년까지 오키나와인들은 조선인들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한 차별과 배제의 낯선 타자들로 간주돼왔다. 태평양전쟁기의 희생 역시 심각했다.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오키나와 전쟁 당시 15만여 명의 오키나와인들은 미군의 진압과 일본군의 집단 자결 명령 속에서 참혹한 죽음을 경험했다. 1972년까지 이어진 미군정기에 오키나와인들은 미군이 점령해 강제수용한 후텐마, 가데나, 헤노코 등 오키나와 본섬의 약 20%를 점유한 미군기지 건설로 토지와 재산을 강탈당했다.

일본과 미국의 이중 억압

오키나와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그 안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기지의 섬'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이 기지를 점유하고 있는 미군들에게 일본의 주권은 미치지 않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의 주권 역시 제한된다. 어떤 점에서 보면 현재의 오키나와는 일본 본도 주권과 미국 패권에의 이중 종속이라는, 1945년에 구조화된 지정학적 모순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키나와는 우리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명백하게 말하면 오늘의 오키나와는 한-미-일 안보 삼각동맹의 상징적 중심축이고, 넓게 보면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 헤게모니를 저지하기 위한 지정학적 공간이며, 한반도의 분단 체제와 미국 중심의 세계 체제의 가장 강력한 모순을 내포하는 장소이다. 오키나와인들에게 전쟁과 평화는 단순한 추상 개념이 아니고, 그들의 자치와 미래를 고려할 때 심각하게 숙고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개념이다.
2012년은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40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40년이라는 역사의 시간 단위 앞에서,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와의 과거와 미래를 사유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의 복귀가 오키나와인들의 자치와 주권을 보장해주었는가' 하면, 그 대답은 회의적이다. 오히려 현재 오키나와는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요새화가 더욱 강력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였다.
최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미국이 오키나와 공군기지에 배치하려는 수직이착륙헬기 '오스프리' 저지이다. 미국은 8월에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 22기를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배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동아시아의 안정적인 군사적 지배를 노골화하겠다는 의도이다. 그런데 이 통보는 후텐마 공군기지를 북부의 헤노코로 이전하려는 미군의 계획과 맞물려 주민들의 저항이 증폭하면서 후텐마·헤노코, 카데나 기지 지역의 주민항쟁을 전면적으로 폭발시키는 현 시국의 핵심 문제로 점화되었다.

'오스프리' 반대 투쟁

후텐마 기지의 역외 이전과 관련한 문제는 나하시 주민들의 강렬한 항의 행동과 현민대회를 통해 제기된 문제이다. 1997년 미군에 의한 오키나와 소녀 성폭행 사건이 벌어진 이후, 오키나와현 주민들은 미군기지가 초래하는 폭음(爆音) 문제에 대한 항의 집회와 법적 투쟁, 현민대회 등을 통해 기지 이전 문제를 공론화했다. 후텐마 기지는 나고시의 중앙을 거대하고 기괴하게 장악하고 있는데, 이것은 미군범죄 문제 말고도 주민들의 안전과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해왔다. 실제로 미군 헬기가 인근 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이 기지를 북부 해안지역 헤노코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는 것과 동시에 광대한 바다를 매몰해 전투기와 헬기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인구 1500명의 어촌 지역인 이곳 주민들은 즉각 이 계획에 반발해, 투쟁과 농성을 벌써 3천 일 이상 진행해오고 있다. 헤노코 연안은 매우 아름다운 바다이다. 이곳에는 세계적인 희귀 어족이자 바다소로 불리는 '듀공'의 집단 서식지이고, 멸종위기종인 바다거북의 집단 서식지이기도 하다. 헤노코 주민들은 군사기지가 이전해옴으로써 초래되는 심각한 기왕의 모순과 더불어 오키나와의 환경과 생태에 대한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 문제가 야기되기 때문에, 미군과 일본 정부에 대항해 비타협적 투쟁과 농성을 계속해왔다.
가데나 기지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미군 해병대 훈련기지인 가데나 기지 주변에는 100여 명의 현지 주민이 기지 3곳의 출입구를 자동차 등으로 봉쇄하고 철야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최근 미국이 배치하겠다고 통보한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가 가데나 기지에도 배치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시설공사가 진행될 조짐이 보이자 주민들의 공사 저지 투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었다. 농성 현장을 방문해 만나본 대다수 주민들은 60대 이상의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기지 공사를 봉쇄하기 위한 농성과 투쟁 탓에 생업에 상당한 지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군기지 문제는 단순한 생업의 장애를 넘어서 이들의 생존권과 주권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침해로 간주되기 때문에 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투쟁이 거의 10년 이상 전개되자 일본 본도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내려와 오키나와 주민의 투쟁에 가세하고 있었다.
후텐마 기지의 폭음소송단을 중심으로 한 장기간의 주민 농성, 헤노코 기지의 해상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100일간의 투쟁, 가데나 기지의 헬기장 건설을 봉쇄하기 위한 농민들의 투쟁 등. 오키나와 전역은 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의 일방적 배치에 따른 투쟁과 집회로 뜨겁다. 특히 이런 투쟁이 일본 복귀 40주년을 맞이하는 오키나와의 역사적 계기와 맞물리면서, 오키나와의 역사와 정체성을 둘러싼 전후 체제 청산의 문제로 확대되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 주민 전체의 반응은 어떠한가. 실제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시정촌(市町村)별로 8월 5일에 열리는 '오스프리 배치 반대를 위한 오키나와 현민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각종 집회와 준비위원 결성을 했다. 각 기지에서 진행되는 주민들의 집중농성과 더불어 지난 7월 21에는 나하시의 중심지 국제통거리에서 7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오스프리 설치반대 시민집회가 열렸다. 오키나와 현의회 의장은 오키나와현에서 열린 전국의원대회에 오스프리 반대 의견서를 제출했으며, 오키나와 현의회는 오키나와 현지사에게 8월 5일 현민집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항의 행동이 조직화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력한 운동의 동력이 형성되자, 일본 정부 역시 미국 정부에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오스프리를 오키나와에 배치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해 오스프리의 안전성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으며, 이른바 '과부제조기'로 불리는 오스프리 배치를 강행하기 위한 조처를 오히려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오키나와 주민들뿐만 아니라 미군기지가 설치된 본도 주민들에게까지 분노를 확산시키고 있다.
그런데 미 국무성은 오스프리 문제에서 더 나아가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에 오히려 기름을 끼얹는 조치를 발표했다. 지난 7월 24일 미 국무부는 역시 잦은 사고로 공화당 의원이 '가장 비싼 고철 덩어리'라 별명을 붙인 스텔스 기종의 전투기 F22 랩터의 비행제한을 해제하고, 이것을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에 배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과부제조기' 오스프리와 '가장 비싼 고철 덩어리' F22 랩터를 오키나와에 배치하려는 미국의 의도는 무엇일까.
동북아 정세를 군사적으로 관리하려는 목표이겠지만, 그것은 결국 부상하는 중국의 패권을 노골적으로 견제하려는 목적이 핵심일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북한위협론을 포함한 불안정한 한반도 정세의 문제를 그 근거로 삼고 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오키나와에서는 거의 없다.

오키나와, 대추리 그리고 강정마을

오키나와의 상황 탓인지 중국 역시 오키나와를 분쟁지역화하려는 발언을 최근 들어 계속하고 있다. 오키나와 일본 복귀 4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만 해도 중국 정부는 오키나와는 류큐 처분 이전까지 중국의 조공국이었기 때문에, 오키나와는 중국의 고유 영토였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한편, 최근 들어서는 노골적으로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나가라'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이는 대만과 오키나와 열도 중간에 있는 기존 센카쿠 열도와 관련한 일본과의 분쟁이 더욱 확대되는 양상인데, 중국의 이런 신경질적 반응은 결국 미국의 대중국 포위 군사전략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런 점에서도 나타나지만, 오키나와의 지정학적·역사적 모순은 극복되기보다는 더욱 첨예하게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지 오키나와 주민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가. 오키나와의 평화활동가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 것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가 한국의 미군기지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오키나와의 평화활동가들은 가데나·헤노코·후텐마의 미군기지 문제가 결국은 한국의 평택 대추리와 제주의 강정 해군기지 문제와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오키나와에 배치되는 오스프리나 스텔스 22기는 단순히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의 분쟁, 중국과의 대결적 상황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한반도에서의 분단 해소나 평화 체제의 구축이 근본적 해법일 것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그래서인지 오키나와 주민들은 필자를 만날 때마다, 한국의 연말 대선에 관심을 보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만일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어떻게 박정희의 독재를 극복한 한국인들이 박근혜에게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지 의아해했다. 오키나와와 한국은 기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일이 희망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키나와에 있는 친구들의 현민대회와 투쟁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 | 이명원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1993).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말과 사람)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실천문학사) 주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2년 8월 12일 일요일

대추리·강정·두물머리… 행정대집행이란 이름의 폭력대집행


이글은 한겨레21 201208-13일자 제923호 기사 '대추리·강정·두물머리… 행정대집행이란 이름의 폭력대집행'을 퍼왔습니다.
[특집] ‘제3자’ 용역업체 등이 철거 등 행정 대신하고 비용은 ‘원인 제공자’ 철거민 등에게 징수하는 행정대집행… 철거지역 경비, 이주 업무까지 맡는 용역업체들은 강제 철거 전에도 세입자 등에게 폭행·협박 자행

‘2230만원’.
지난해 9월 서울 강남구청이 판자촌인 일명 ‘포이동 재건마을’(현 개포동 1266번지) 주민대표 조철순씨에게 이런 비용을 청구했다. 그해 6월 화마로 인해 살 곳을 잃어버린 주민들이 직접 설치한 임시주택 세 채를 강제 철거하는 데 들어간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른바 ‘행정대집행’ 비용이다. 행정대집행이란, 행정상 의무자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행정청이나 제3자가 이를 대행한 뒤 소요 비용을 의무자에게 징수하는 강제집행 제도다.

명도 소송 통한 철거, 계고장도 필요 없어

강제 철거가 있던 지난해 8월12일 새벽 6시, 강남구청 직원 60명과 철거용역업체 직원 80명이 포이동 재건마을로 들이닥쳤다. 주거 대책을 놓고 주민과 구청이 두 달째 갈등을 빚던 중이었다. 주민과 용역 간 충돌은 불 보듯 뻔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주민 3명이 다쳤다. 앞서 구청은 이재민들에게 서울시 7개 구에 위치한 임대주택 50가구를 마련해 거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주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대료와 보증금조차 마련할 형편이 안 되는 어르신이 많았다. 더구나 구청이 1991년부터 ‘시유지 무단 점유’를 이유로 집집마다 수천만원에서 1억원까지 부과한 토지변상금을 떠안은 상태에서 섣불리 마을을 떠날 수 없었다. 재건마을은 1981년 도시빈민·부랑인 등으로 구성된 자활근로대 일부가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돼 형성된 가난한 동네다. 주민들은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에 행정대집행 비용 부과 처분이 부당하다며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철거 현장에 집행 책임자가 나오지 않는 등 절차적 문제가 있었고, ‘공익을 해할 것으로 인정될 때’라는 행정대집행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구청은 절차상 하자가 없었으며, 공익을 해할 위험이 있는 ‘불법 건축물’을 방치할 수 없었다고 맞섰다.
취약 주거계층, 미군기지 건설 등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주민, 재개발 지역의 영세 세입자, 노점상 등의 집이나 가게를 합법적으로 철거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1954년 제정된 뒤 거의 바뀐 부분이 없는 행정대집행 절차를 따르거나, 민사집행상 명도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공공의 이익, 또는 사적 재산권을 수호한다며 이뤄진 법 집행 과정에서 늘상 약자들에 대한 ‘폭력’이 방조돼왔다. 적절한 보상 대책이나 제대로 된 이주 합의가 없었다는 근원적인 문제는 고려 사항이 되지 못했다. 강제 철거는 효율적인 집행을 내세워 불시에 일어난다. 특히 명도 소송을 통한 강제 철거의 경우, 거주민에 계고장을 발부하는 등의 고지 의무조차 없다.
과거엔 하루라도 빨리 개발 이익을 보려는 시행사가 인력을 고용해 구청과 짜고 공권력인 양 위장해 현장에 투입시켰다. 지금은 철거용역업체라는 허울 좋은 외피를 쓴 외주화된 폭력이 그 자리를 꿰찮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서울시의 한 구청 공무원은 “정비 업무 때 대개 용역업체 인력을 쓰는데, 이 업계엔 조직폭력배 출신이 많이 들어가 있다”며 “이런 업체들 중에는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주차장 경비 업무 등을 위탁받아 돈만 받은 뒤 사업장을 폐쇄하는 ‘먹튀’ 행각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 서울중앙지법 민사1부 집행관과 철거용역업체 직원 등이 13일 오전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상도11구역 에서 빈 집을 대상으로 명도집행을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1980년대 이래 성장가도 달리는 철거용역회사
최근 물의를 일으킨 용역경비업체 컨택터스의 정관을 보면 사업 목적에 ‘행정대집행업’이나 ‘가로정비업’ 등이 명시돼 있다. 물리력을 필요로 하는 행정대집행 역시 이런 업체들엔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행정대집행을 수행한 용역업체들은 주먹구구식으로 비용을 청구하고, 지자체가 이를 집행해왔다. 이런 이유로 국가권익위원회는 지난 3월 행정대집행 비용 산정 기준 개선을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업무를 위탁받은 용역업체가 일방적으로 산정한 금액을 행정청이 별다른 검증 없이 부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정재 ‘민중주거 생활권 쟁취를 위한 철거민연합’(민철연) 연대사업국장은 이런 문제를 두고 “나라가 노점상에게서 돈을 걷어 용역업체에 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합법적 강제 철거 및 퇴거에 이르지 않더라도, 개발을 반대하는 주민이나 세입자 등은 퇴거를 종용하는 폭력과 공포에 시달린다. 재개발조합 등과 계약을 맺은 철거용역업체들은 이주 업무까지 함께 수행한다. 이런 철거용역회사는 1980년대 중반부터 등장해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 업체들은 건설산업기본법에 의한 비계구조물해체공사업자로 규정되는데 동시에 경비업 허가를 보유한 경우도 있다. 2009년 1월20일 참사가 벌어진 서울 용산 남일당이 포함된 용산 4구역에도 시공사 및 조합과 ‘건설물 해체 및 잔재처리공사 도급계약’을 맺은 호람건설과 현암건설산업이라는 철거용역업체가 들어와 있었다. 이들이 맺은 계약서에는 ‘약정 기간 내에 철거를 끝내지 않으면 지체 1일에 대해 공사 금액의 1천분의 1을 보상금으로 배상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2008년 2월께부터 철거용역업체는 강제 철거를 반대하는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폭행·협박·영업방해 등을 통해 퇴거를 압박했다. 상가 세입자들은 철거용역업체의 폭력과 압박에 맞서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랐다 참변을 당했다.
강제 철거 현장에서의 폭력과 충돌은 거주민뿐 아니라 용역들의 목숨도 위협한다. 2005년 경기도 오산시 수청동 세교택지개발지구 철거 현장에서 주민들과 대치하던 20대 용역 직원이 숨진 경우가 그렇다. 당시 (한겨레) 보도를 보면, 철거 현장에 거의 무방비로 투입된 용역 직원 43명 대부분이 단순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이들은 경찰과 대한주택공사 직원들이 현장에 있었지만 위험한 상황을 통제하기는커녕 수수방관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인권위 개선 권고에도 변함없는 현실

용사 참사가 일어난 직후인 2009년 2월 국가인권위는 그동안 강제 철거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침해 상황이 발생해왔는데도 이를 최소화하려는 적극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며 △국토해양부 장관에게 충분한 사전고지·협상 및 적절한 보상 없는 강제 철거, 사람이 살고 있는 주택에 대한 강제 철거 등을 금지하도록 관련 법률 정비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 예방·금지 규정 및 불이행시 처벌할 수 있는 규정 마련 △경찰청장에게 강제 철거 현장에서 발생하는 철거 및 경비업체 직원에 의한 폭력 문제, 법적 자격 없이 경비업체 업무를 수행하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관리·감독 강화 등을 권고했다. 2012년 8월,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은 해군기지 건설 현장에 들어온 공권력 및 용역경비업체 직원들의 폭력에 노출돼 있다. 서울국토관리청은 경기도 양평군 두물머리 농민들에게 농지를 비우지 않으면 8월6일 강제 철거하겠다는 행정대집행을 예고했다. 법이라는 방패막 뒤로 난무하는 폭력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2012년 7월 15일 일요일

자본의 편에 선 국가 사람을 죽이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의 벗님글방 2012-0713일자 기사 '자본의 편에 선 국가 사람을 죽이다'를 퍼왔습니다.
[복음과상황 261호 커버스토리] 국가폭력 피해자 송경동 시인 인터뷰

 
» 송경동 시인

도심의 정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이 ‘오늘은 뭘 먹을까’ 고민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틈, 송경동 시인이 등산용 지팡이를 짚고 저 굽은 골목을 돌아오는 게 보였다. 송경동, 작년 한진중공업 사태 때 ‘희망버스’를 기획했던 시인이다. 공장 노동자이기도 했던 그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늘 노동자를 위해 싸우고 시를 쓰고, 노동자들과 함께 ‘사람’이 중요하다 외쳐 왔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은 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고, 농성장에서 발목을 다쳐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 

공권력으로 위장해 불법 체포와 불법 채증, 불법 폭행도 서슴지 않는 국가의 폭력이 노동 쟁의 현장에서 어떻게 노동자들의 숨통을 조이는지, 폭력의 실상이 어떻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저 노동자들은 국가폭력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송경동 시인에게 묻는 것이 왠지 미안했다. 폭력의 흔적들을 되짚어 보는 것이 그에게 아픔일 수도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픔을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에 대한 꿈꾸기’로 ‘사람에 대한 긍정과 믿음’으로 승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꿈꾸기를 멈추지 않고 사는 시인 송경동을 5월 30일, 서울 정동에서 만났다. 

국가폭력을 얘기하자니 신체적 폭력을 당한 직접적인 피해자로서 아직도 치료를 받고 있는 송 시인에 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발목을 크게 다쳤고, 평택 대추리에서 벽돌로 머리를 가격당하기도 하셨는데요. 

2010년 10월, 기륭전자 농성1) 중 포클레인에서 떨어져 두 달간 병원 생활을 했어요. 퇴원하고 6개월을 요양하다가 간신히 목발을 짚을 때쯤 희망버스를 기획했는데, 그 일로 체포 영장이 발부돼 수배 생활을 하면서 치료를 더 못 했어요.2) 감옥에 다녀오고 나서 재수술하면서 박혀 있던 금속핀 14개를 제거했어요. 의사 말로는 약간의 장애가 남을 거라고 해요. 어느 정도일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대추리3)에서는, 2006년이던가요. 평택 대추초등학교에 700명 정도 남아 있었는데, 전경 1만 5000명이 몰려 왔어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초등학교 안으로 밀려들어 갔고, 어느 순간 저는 옥상까지 올라갔어요. “방패로 곤봉으로 치지 마라, 사람 죽는다”고 악을 쓰는데, 어느 순간 머리가 띵하며 힘이 쭉 빠졌어요. 반대편에서 전경들이 벽돌을 던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맞은 거예요. 그러고는 병원에 실려 갔다가 치료하고 다시 대추리로 들어갔죠. 

몸의 상처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 공포, 트라우마 그런 것들로 힘들지 않을까 우려가 되네요. 그러면서도 늘 현장에 계시는데, 폭행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는 않나요? 

두렵습니다. 무법천지인 현장에서 막무가내로 진압당하다 보면 저를 포함해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 과정에서 사람도 많이 죽지 않았나요. 2004년 여의도에서 농민 집회할 때 대낮에 전경들이 농민들을 토끼몰이식으로 진압해 2명이 죽었습니다. 2006년에는 포항 형산강로터리에서 집회를 하던 건설 일용 노동자 하중근 씨가 뒷머리 세 군데가 열리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양팔에 피멍이 든 채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이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공권력 타살을 인정했지만 아직 의문사로 남아 있습니다. 경찰의 폭력 이상으로 무서운 게 사재 용역이에요. 거의 폭력 기계들이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현장에서 린치를 가하면 정말 두려워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요. 익히 기억하듯이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너무 절박해 망루에 올랐는데 하루도 안 돼 경찰 특공대를 진입시켜서 6명이 희생됐잖아요. 어디서든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어요. 그런 점에서 두렵기도 하죠. 

작년에 제1회 구본주예술상4)을 받으셨죠. ‘희망버스’ 기획으로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 내, ‘노동과 자본의 경계를 매개하는 소통의 예술가’로 평가받으셨는데요. 그래서인지 희망버스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2차 희망버스를 탔는데 밤을 새우고 다음 날 봉래삼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을 그리는 풍경 너머로 차벽을 세우고 서 있는 새까만 전경들이 극한 대비를 이룬 모습을 보기도 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안타깝죠. 평화로운 행진을 막고 불법화하고 탄압합니다. 그렇지만 경찰이 물리력으로 막을수록, 참가한 분들이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건강한 공동체의 문화를 만들고자 많이 노력해 주셨어요. 절망적인 순간도 있었지만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지금 말씀하신 내용도 그렇지만, 평소 송 시인의 시나 산문을 보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특히 ‘인간에 대한 긍정’이 무척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본에 사로잡히고 포섭된 이들이나 폭력적인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는 이들이 모두 같은 사람임을 생각하면, 인간됨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인류 역사 속의 그 모든 것이 한 개인, 한 개인에게 들어 있다고 봐요. 비과학적인 얘기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악하고 인성이 파괴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안에는 본인이 찾지 못한 인간애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은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수많은 사람의 힘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잖아요. 누구에게나 그런 인간애가 있다는 건 중요하다고 봐요. 현실이 아무리 왜곡돼 있더라도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안 믿으면 무엇을 믿을까 싶기도 하고…. 우리 전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 시대를 살아갈 겁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이런 시대에 태어난 거고요. 좀 더 불행한 시대도 있고, 좀 더 행복한 시대도 있어요. 그 속에는 한 개인이 넘을 수 없는 시대의 벽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개인을 미워하는 편이 아니에요. 사람은 자신이 처해 있는 조건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어요. 개인을 책망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에요. 누구나 한계가 있는 거예요. 구조나 당대의 역사적 한계를 고려하면서 개인을 얘기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또 그 한계를 넘어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의 진실을 찾고자 하지 않을까요. 

그 한계 중 하나가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대중의 무관심은 아닐까요. 노조의 투쟁이 장기화하는 데는 사측의 무시와 무성의한 태도 등이 크게 작용하고, 거기에 대중의 무관심이 더해지면, 그에 편승해서 자본과 국가가 무력(폭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수순을 밟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국가폭력은 자본의 폭력을 넘어 (대중의) 무관심이 낳은 폭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럴 수 있어요. 나의 무관심이 어떤 측면에서든 어떤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눈감아 주는 역할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눈앞에서 폭력이 버젓이 자행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체념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보통은 ‘나는 정치적인 게 싫다’고 하는데, 그런 얘기조차 정치적일 수밖에 없죠. 그런 사람들조차 뭔가 느끼고는 있을 것 같아요. 나의 무관심이 어떤 정치적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 고민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 2차 희망버스 때의 시민들. 사진 <복음과상황> 김은석 기자.

» 2차 희망버스 때의 경찰 모습. 사진 <복음과상황> 김은석 기자.

그간 목격하고 당했던 국가폭력 중, 가장 비난받아 마땅한 폭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용산이죠. 경찰 특공대의 ‘테러 진압 작전’에 시민 5명과 경찰 1명이 희생됐잖아요. 용산 사건은 ‘작은 광주’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잔인했어요. 용산 재개발 지역은 5조 원의 개발 이익이 떨어지는 곳이었어요. 건설 자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공사를 하고 싶었겠죠. 그럴 때 분쟁이 있다면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할지 모색하는 게 최소한 국가가 할 역할이잖아요. 사장이나 대주주 몇 명은 이익을 챙기지만 나머지 다수는 피해를 보는 절대적 약자예요. 그러니 약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줘야 하는데, 국가는 완전히 자본의 편에 섰어요. 평범한 국민을 하루 만에 테러범 잡듯이 잡아 죽였어요. 마음이 그토록 상해 있는 사람들에게 특공대를 투입해서 폭력을 자행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거기가 정말 심했어요. 

또 지금도 진행 중인 쌍용자동차 문제5)는 구조적 폭력이 극심하게 가해지고 있어요. 그 폭력에 의해서 근 3년 걸쳐 22명이…. 가공할 폭력이에요. 구조적 폭력이라는 건, 쌍용자동차가 상하이자동차로 넘어갈 때, 산업은행을 통해서 운영권을 국가가 갖고 있었거든요. 상하이자동차는 먹튀 기업이어서 핵심 기술만 빼서 튀었잖아요. 그때 국가는 아무런 조치도 안 했어요. 이후 법정 관리에 들어갔을 때도 쌍용자동차는 여전히 국가 소유였는데 안정적으로 운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규모 정리 해고를 단행했어요. 이런 게 바로 구조적 폭력이죠. 

국가의 직접적 책임을 넘어서 사회구조적 폭력도 있어요. 지난 십수 년간 우리 사회는 수많은 노동자를 정리 해고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900만 명을 양산했어요. 게다가 쌍용자동차 출신이라고 하면 어디서도 취업이 안 돼요. 또 정규직으로 일하다가 해고당하고 비정규직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심리적 박탈감은 엄청난 거예요. 이런 구조적 모순 앞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죠. 22명의 사망자가 자살이나 스트레스성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사실 우리 사회가 이분들을 죽인 거예요. 정리 해고시키고 경찰 동원해서 때려잡고 사회에 나갔더니 비정규직밖에 없고…. 직접적인 폭력보다 이렇게 일상적인 구조적 폭력이 더 무서워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것만 봐도 결국 구조적 학살임을 알 수 있잖아요. 안정되고 평화롭게 살 수 없는 사회에 절망해서 죽는 거니까요. 

국가폭력은 물리적 폭력이나 구조적 폭력 등 양태가 다양한데,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폭력의 양태는 무엇이라고 보세요? 

구조적 폭력이죠. 직접적 폭력은 많은 사람이 동시에 당하지는 않지만, 구조적 폭력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힘들게 합니다. 저는 인류 사회의 가장 큰 구조적 폭력은 자본주의 체제라고 생각해요. 수많은 사람의 노동, 자원을 1%도 안 되는 개인이 독점해 버리니까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빈곤과 미래에 대한 불안,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게 가장 큰 폭력이죠.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국가폭력에 맞서는 한국의 저항운동에 관해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요. “국가권력의 폭압에 대해 저항 세력은 쇠 파이프를 드는 대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저항 세력의 폭력은 분노에서 나오는데 저항 폭력이 권력에 의해 길든 한국 사회에서는 그 폭력의 방향이 ‘적’보다는 ‘자신’을 향하곤 했다.” 안타까운 내용인데요. ‘저항 폭력’에는 어떤 입장이신가요. 

그건 폭력이 아니죠. 말 그대로 저항이고, 최소한의 인간다움과 자기 권리를 지키려는 안간힘이라고 봐야겠죠. 거기에 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폭력에 저항하는 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어요. 어떤 인간이든 밟으면 꿈틀하잖아요. 그걸 폭력이라고 얘기하면 안 된다고 봐요. 노예사회에서 노예들이 봉기했던 역사가 있는데, 그걸 (저항) ‘폭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렇게 단순 비교를 할 수 없죠. 그건 안간힘이에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 때 경찰이 컨테이너를 쌓았고, 시민이 이를 명박산성이라 부르며 그 앞에 스티로폼을 쌓은 일이 있지요. 그때 한편에서는 ‘비폭력’과 ‘쌓지 마’를 외치면서 새벽 늦게까지 ‘비폭력’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때는 너무했죠. 당시 사람들이 그 벽이라도 넘어 보자, 그 정도라도 하자고 한 거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비폭력’ 논의가 된다면 그건 역사의식에 관한 고민이 덜한 것 아닌가 싶어요. 폭력, 비폭력 논의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봐요. 작년에 아랍 국가에서 민주화운동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나라별로 수천 명이 죽기도 했어요. 그런 강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잖아요. 원하지 않지만 사회적 갈등에서 피치 못하게 누군가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하는 역사가 있기도 한 거예요. 그게 참다운 자신, 참다운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희생과 헌신이라고 말할 것도 없어요. 그렇게 역사적 삶을 사는 거죠. 역사적 삶을 산다는 건 수많은 질문을 내포하고 있어요. 인간은 무엇인가, 사회적 불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그런 질문 말이에요. 그러니 단선적으로 어떤 상황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건 쉽지 않아요. 우선은 어떤 상황에서 시대적 요구가 생겨나는지를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명박 정부가 ‘법치’ 운운합니다만, 그 경계를 넘는 폭력 행위가 다반사입니다. 혹 노동운동과 관련해서 어떤 경우에 국가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국가의 행위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일쑤예요. 그런데 사실 그런 공권력 행사의 내용은 오히려 반공공적일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노동 현장에 분규가 있을 때 국가가 한 번도 사측을 때려잡아 본 적이 없어요. 늘 노동자가 잡혀가고 끌려가요. 그런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는 어렵죠. 공권력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자행하지만 역사의 법정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늘 재평가되기 마련이에요. 광주 5·18 때 공권력을 투입했던 전두환을 국가내란 수괴로 바로잡기도 하잖아요. 이처럼 공권력이라고 해서 늘 정당하다고 생각해선 안 돼요. 정말로 공공적인 성격을 가졌는지가 평가 기준이 되어야죠. 

그 공공성이 언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국가 공권력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일부에서는 국가 공권력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도 해요. 이건 본질적인 문제인데요. 우리나라는 헌법에 기초를 둔 자유 민주주의 국가잖아요. 그건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과도한 부를 개인이 독점하는 것을 용인한단 말이죠. 그런데 저는 사회적 자본은 개인이 과도하게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봐요. 사회적 부 중에는 자연에서 빌려 온 자원도 있어요. 그것과 수많은 인간의 노동력이 결합함으로써 사회적 부가 창출되는 것인데, 그걸 특정 개인이 소유할 수 있나요? 타인의 노동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나요? 자본주의사회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와 체계를 지키기 위한 형태로 조직돼 있어요. 그러니 국가는 본질적으로 가진 자들의 편에 설 수밖에 없죠. 즉 국가 공권력이 철저히 자본의 이해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만인에게 폭력이 아닌가 하는 얘기까지 나오는 거죠. 본질적으로 이런 지점에 관하여 사회적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실제로 국가폭력의 정당화 및 심화가 자본주의의 심화와 맞물려 있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는데요, 최근 좌담에서 쌍용자동차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공장의 사회화’라고 주장하신 것도 같은 맥락인 거죠? 

그렇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노동운동 과제가 한둘이 아니네요. 대중성 확보를 비롯해 노동운동이 정치운동으로도 이어져야 하고, 최근 대선 이슈로 떠오른 경제 민주화에 관해서도 점검이 필요할 듯합니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게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꿈이 커지면 좋겠어요. 사람들의 꿈이 너무 작아졌어요. 노동운동의 기본을 구호로 표현하자면 자본·소유로부터의 노동 해방, 존엄한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해지는 인간 해방 같은 것들이었어요. 그런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 안에서 각각의 사업이나 운동이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자꾸 꿈을 잃고 체제 내화돼 버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건 모두의 삶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지요.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초등학생들에게 ‘불의에 저항하라, 약자와 연대하라’고 가르칩니다. 폭력이 나에게 가해지든 혹은 타인에게 가해지든, 또 공동체 전체에 자행되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런 것에 당연히 저항해야 해요. 그리고 좀 더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하고요. 실천적 연대를 통해 조화로운 사회 운영 원리를 만들기 위한 모색과 실천도 필요할 듯해요. 

손석춘 교수도 노동대학 강의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학습”이라는 얘기를 했죠. 이념적으로 ‘승리’하고 난 다음의 세상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들이 없다는 지적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희망버스 같은 실천적 공간이 사회적 학습 공간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우선 거리에서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만남을 이뤄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어요. 사실 저 스스로 공부가 더 필요해요.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상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죠. 기생적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려면 우매한 대중이 가장 먼저 필요하거든요. 생각하는 기능을 잃어버린 멍청하고 일만 하는 기계가 필요할 뿐 역사적 의식을 대중이 갖추는 걸 자본주의 체제는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회가 바보를 만드는 체제라고 말하는 거죠. 자아를 찾고 공동체를 이루는 개인으로 거듭나는 길이 막혀 있거든요. 이 길을 뚫기 위해 역사의 진실, 사회의 진실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과 학습이 필요합니다. 

바쁘신 중에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쳐야 할 시간인데요, 기획 중인 행사나 주요한 일정이 있다면 나눠 주세요. 

작년 희망버스 참가자 중 130명이 기소되어 벌금 폭탄을 맞고 있거든요. 이런 사법 탄압에 맞서 기소된 사람을 지원하기 위해 공동기금을 마련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건 좀 널리 알려 주세요. 쌍용자동차에서 22명의 사회적 죽음이 있었는데 이에 연대하고자 6월 16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여의도공원에서 시청까지 걷기대회를 해요. 저녁에는 난장이 있고요. 분향소를 하룻밤 동안 지키자는 건데요. 주변에 알려서 많이 좀 와 주세요. 밑도 끝도 없이 1만 명이 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대한문 앞 쌍용차 분양소를 향하는 송경동 시인.

바쁜 틈에 잡힌 인터뷰를 끝내고 다시 일하러 가려다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로 향하던 그 고운 마음을 기억하며, 6월 16일 토요일 오후, ‘함께 걷자, 함께 살자, 함께 웃자’ 행사에 갔다. 희망과 연대를 위해 모인 시민들이었건만, 여의도에서 대한문까지 평화로운 행진을 이어가던 시민들이었건만, 그날 역시 경찰은 마포대교 입구에서 차벽을 세우고 시민들을 막았다. 돌멩이 하나 들지 않았던 4명의 시민이 연행됐고, 참가자들은 지하철을 이용해 가며 대한문까지의 행진을 마쳤다. 언제쯤 국가 공권력은 시민의 시위를 ‘보호’해 줄까. 언제쯤 시위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1)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서울 금천구 기륭전자 구사옥 앞 컨테이너에서 2005년부터 6년간 농성했다. 한 달에 64만 1850원을 받고 일하던 그들은 대부분 파견 근로자였고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를 받으면 그게 해고였다. 김소연 지회장은 농성하며 94일간 단식하기도 했다. 기륭전자 사태는 비정규직 문제의 절정판이었다. 2010년 10월, 농성장을 강제 진압하기 위해 회사가 포클레인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 송경동 시인은 포클레인에 올라가 투쟁하던 중 아래로 떨어져 발뒤꿈치뼈가 으스러져 큰 수술을 받았다. 2010년 11월 1일, 1895일간의 최장기 투쟁을 끝으로 조합원 전원 10명(노조를 설립할 당시 200명이던 조합원이 6년 동안 10명으로 줄었다)이 정규직으로 복직했다. 

2) 2011년 11월 15일 송경동 시인은 기자회견을 하고 부산영도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그러자 검찰이 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해 구치소 생활을 하다가 12월에 구속 기소됐다. 송 시인은 올해 2월 보석으로 풀려났고 재판이 진행 중이다. 

3) 평택 대추리는 2004년 용산 미군기지 확장 이전지로 확정되면서 주민이 강제 추방당한 곳이다. 노무현 정부는 대치가 가장 격렬했던 2006년 5월 4일, 수천 명의 사설 용역과 군대를 동원 1만 5,000명의 공권력으로 524명을 강제 연행했고, 그 과정에서 300여 명이 부상했다. 935일간 1,000여 명이 연행됐고 특히 김지태 이장 구속 때는 국제엠네스티까지 나서 ‘양심수석방운동’을 하기도 했다. 송 시인은 그해 3월에도 강제 집행에 맞서 문화 예술인들과 항의하다가 폭행을 당했다. 송 시인의 목에 감겨 있던 펼침막을 경찰들이 양쪽에서 잡아당긴 것이다. 주위에서 ‘목 졸려 죽는다’고 항의했지만 막무가내로 “저 새끼들 연행해”라는 폭언을 들었고, 의식을 잃을 뻔했다. 대추리 사건은 2007년 4월 주민 전원이 이주함으로써 강제 퇴거가 마무리됐다. 

4) 미술가 구본주는 자본주의사회의 계급성을 주요 모티프로 삼아 작업하던 젊은 예술가였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그의 작품 ‘갑오농민전쟁’ 동상은 평택 대추리 대추초등학교에 전시되기도 했다. 구본주예술상은 그의 예술정신을 잇고, 세대 간 소통과 공감을 확장하며, 자유·평등·노동·평화·인권·생명 등의 가치를 옹호하는 예술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1년 제정됐다. 

5) 쌍용자동차는 재정 악화로 2005년 상하이차에 매각됐다. 매각 초기부터 핵심 기술만 빼 가는 이른바 ‘먹튀 논란’이 일었던 상하이차는 4년간 쌍용자동차에 전혀 투자하지 않았고, 후에 핵심 기술과 핵심 인력을 중국으로 빼돌린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상하이차는 판매 부진과 경기 악화 등으로 2009년 1월 법정 관리를 신청했다. 이후 7000명 노동자 중 2600여 명의 정리 해고를 단행, 1500명은 희망 퇴직했고 1000명의 노조원은 5월부터 77일간 평택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농성 진압을 위해 경찰이 대테러 장비인 테이저건과 고농도 최루액, 진압용 총기 등을 사용해 부상자가 속출했고, 사측이 수시로 단수·단전하고 식료품과 의료진 출입마저 막는 등 인권 침해도 극심했다. 이 사건으로 64명이 구속됐고, 지금까지 22명의 노동자 및 노동자의 가족이 목숨을 잃어 ‘정리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2010년 11월 인도의 마힌드라가 인수 합병 계약을 했지만,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글·사진 (복음과상황)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본 글은 휴심정 벗님매체인  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2012년 3월 4일 일요일

안개 속 겨울도시의 풍경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 2012-03-02일자 기사 '안개 속 겨울도시의 풍경'을 퍼왔습니다.

서울 석관동에 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연출전공 3학년. 트위터 @mkmodus

며칠 전 지하철을 타고 닿는 거리에 있는 어느 도시에 들린 적 있었다. 두꺼운 잠바에 귀마개, 내복바지까지 단단히 무장했지만 뼛속까지 스며드는 날카로운 추위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여느 지방도시에서나 그렇듯 늦저녁 역전 한복판은 바삐 걸어가는 퇴근길의 노동자들로 복작거렸고 광장에는 술 취한 노숙인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현금인출기를 찾아 몇 장의 지폐를 뽑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이 도시와 내가 대체 무슨 인연이기에 이리도 자주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맨 처음 이곳에 왔던 6년 전보다 이곳은 더 화려해졌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 빨라져있었다.
버스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은 어느 때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다. 몇 번이고 갔던 길이지만 항상 처음 같았다. 생경한 풍경에 눌려 자꾸만 내가 작아지는 것만 같았고, 무기력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그곳에 가야했고 그곳에 간다면 아직은 내가 세상에 ‘냉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강박증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버스가 한창 안개 속을 누비며 달리고 있을 때 갑자기 30대 중반 가량의 한 남자가 운전수에게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자신이 내릴 곳이 어디냐고 몇 번이고 물었는데 대체 왜 대답하지 않느냐는 게 그의 폭발적 분노의 원인이었다. 좋은 말로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뚜껑 열고 역정을 내는 그 우락부락한 사람을 저지할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며 통탄했던 김수영의 시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친구와 싸우다가 칼로 찔러 죽였다는 저 흔한 사건사고 레퍼토리도 떠올랐다. 그날만 해도 벌써 서너번 그런 광경을 본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나는 형언키 어려운 감정에 휩싸였다. 마치 예술영화전용관의 스크린 속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그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희망’을 말했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말했고, 두려움 없이 행동을 도모해 “이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자”고 소리쳤다.
그곳은 다름 아닌 쌍용자동차 공장 앞이다. 이 ‘반전’의 도시는, 평택이다. 나는 마치 뿌옇고 차가운 겨울안개 같은 세계에서 하나의 따뜻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그곳에 서서 사람들과 함께 소리치고 또 춤을 추었다. 그곳에 모인 수천명의 사람들은 분노마저 조각조각 파편화시키는 세상에 대해 저마다의 목소리를 냈다. 정리해고 박살내자, 비정규직 철폐하라, 무원칙한 야권연대 기만이다, 신자유주의 끝장내자!
많은 죽음들이 있었다. 대추리의 “가을바람 머물다간 들판”과 “붉게 물들어 가는 저녁놀”을 노래한 고즈넉한 풍경은 이제 동요로만 남았다. 2006년 당시 한명숙 총리의 행정대집행에 의해 이곳에서 평생 농사짓던 주민들의 절규와 함께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또 우리는 2009년 여름 언론과 대중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정권이 자행한 무자비한 폭력으로 짓밟힌 쌍용차 노동자들의 77일간의 항쟁을 알고 있다. 그 공장에서 난 2012년 신차는 “스타일은 젊어지고 디테일은 깊어졌다”지만, 지난 2월 15일부로 해고 1000일을 맞은 노동자들의 삶은 보다 더 끔찍한 안개 속에 파묻혀왔다. 그러나 들판의 노을을 뭉갠 장본인이나 “해고는 살인이다” 절규한 노동자들을 밀어낸 장본인이나 누구도 그 죽음들에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복지’를 운운하고 정의를 모사하지만 자신들이 저지른 폭거는 애써 모른 척하는 것이다.
복작거리던 공장 앞에서의 밤이 끝나고 다시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지면 어디선가 다시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세 번째 희망텐트촌의 밤이 지나고 이틀 후, 스물한번째 죽음의 소식이 들렸다. 이제는 말문이 턱 막혀 어떤 말도 내뱉기 힘들다. 어떻게든 이 죽음의 행렬을 끝장내야 한다는 생각이 온종일 맴돌 뿐이다. 더 많은 이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우리 안에 내면화된 공포의 안개를 뚫고 나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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