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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4일 일요일

북핵 위기 20년: 합의와 퇴행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03-12일자 기사 '북핵 위기 20년: 합의와 퇴행'을 퍼왔습니다.
Spécial 북핵 20년-시시포스 신화

<무제>, 1997-겐지 요시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차관보는 얼마 전 국내의 한 학술회의에서 "봉쇄든 포용이든 지난 20년간 대북정책은 모두 실패했다"고 밝혔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왜 실패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지난 20년 북핵의 궤적을 크게 둘로 나눴다. 하나는 '합의와 퇴행'이라는 주제로, 합의는 어떻게 가능했고 왜 이행되지 못하고 파기됐는지를 짚었다. 다른 하나는 '위기와 반전'이라는 주제로, 어떻게 전쟁의 위기로 치달았고, 어떻게 반전이 가능했는지를 추적했다. 마지막으로 북-미 최후의 담판을 내건 3차 핵위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북한의 전략은 무엇인지를 분석했다.
북한 핵문제가 대두된 이래 북한과 국제사회 간에는 모두 세 번의 비핵화 합의가 있었다. 첫 번째 합의는 19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하 공동선언)이다. 남과 북이 핵무기를 시험·제조·생산·접수·저장·배치·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한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들자는 약속이다. 공동선언은 북한의 핵실험으로 사문화된 상태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도 공동선언 폐지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공동선언 폐지는 북한 비핵화를 포기하는 것이고 국제사회에 의해 잠재적 핵무장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개연성이 높다는 지적이 많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공동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의 준거 규정이지만, 문제와 한계도 있다. 우선 재처리·농축 시설을 포기함으로써 평화적 핵 이용권을 스스로 제한한 점이다. 재처리·농축 시설은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이지만, 핵의 평화적 이용 주기 완성에도 필수 시설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의 권리이기도 하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린 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핵보유국들의 핵전력 운용을 제한할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한반도가 온전한 비핵지대가 되려면, 남과 북이 핵무기를 포기할 뿐 아니라 주변 핵보유국들이 남과 북을 핵으로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이 제공돼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빠져 있다. 물론 이는 공동선언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핵지대 조약 중에서 핵보유국들이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NSA)를 비준한 경우는 '중남미 비핵지대조약'(1968)이 유일하다. '남태평양 비핵지대조약'(1986)은 미국이, '아프리카 비핵지대조약'(1996)은 미국과 러시아가 비준을 거부하고 있고, '동남아시아 비핵지대조약'(1997)은 모든 핵보유국들이 서명조차 거부하고 있다. 공동선언의 경우 아예 관련 논의조차 없었다.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가 없더라도 핵전력 운용을 제안할 방법은 있다. 조약에 외국 핵무기의 '출입·통과'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규정을 두는 것이다. 현재까지 금지 규정을 둔 조약은 없지만, 제한 규정을 둔 조약은 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두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첫 번째 말(Horse)'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다. 북한이 1992년 이전에 추출한 핵물질('과거 핵')과 1994년에 인출한 폐연료봉('현재 핵'), 그리고 영변 핵시설('미래 핵')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과 북-미 수교, 그리고 2003년까지 200만kW급 경수로를 건설해준다는 약속이었다.
문제는 합의 이행의 정치적 의지였다. 합의 직후 미국은 '공화당 혁명'(공화당의 상·하원 장악), 북한은 '선군혁명'에 직면한다. 보수주의 세력이 대두되면서 합의 이행에 제동이 걸렸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과의 갈등 사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굳이 북한 문제 때문에 정치적 자본을 소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하면서 합의 이행은 불필요한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유례없는 위기('고난의 행군') 속에서 김정일 정권의 관심도 대내 안정에 쏠렸다. 대외관계는 전략적으로 관리되지 못했고, 그 결과 선군정치와 함께 급부상한 군부 강경파의 분파적 이익에 포획되고 말았다.
제네바 합의를 낳은 것이 전쟁 위기(1994년 6월)였다면, 죽어가던 합의를 되살린 것은 대포동 위기였다(1998년 8월). 대포동 시험 발사는 제네바 합의를 결정적 좌초 위기로 몰아갔다. 합의 파기 목소리가 한·미·일 정계를 지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에게 대북정책 재검토를 지시한다. 의회 및 관련국과 조율을 거쳐 페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네바 합의가 파기될 경우 북한은 핵무장을 재개할 것이다. 국제사회가 제재를 취하더라도 북한정권이 무릎을 꿇기 전에 동아시아에 지정학적 지진(Geopolitical Earthquake)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둘째, 따라서 기존 '제한적 관여정책'을 버리고 '전면적 관여정책'을 취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셋째, 북-미 수교를 포함한 과감한 정치·경제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일괄타결 방식으로 해결한다. 넷째, 대북 관여는 효과가 나올 때까지 장기간 인내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페리 프로세스'는 급속도로 추진됐다. 사전 조율의 힘이었고,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와 북한의 재안정이 큰 도움이 됐다. 경수로 공사와 미사일 협상에 속도가 붙으면서 북-미 수교에 바짝 다가섰다. 2010년 10월 북한 군부의 실력자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한다. 핵·미사일 문제와 북-미 수교, 평화협정을 일괄타결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올브라이트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면담한다. 북-미 수교를 확정짓기 위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일정이 잡혔다. 지구적 탈냉전의 완성이 임박했다.

2002년 다시 터진 북핵 위기

클린턴 방북을 앞두고 공화당 부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클린턴은 방북을 포기했고, 페리 프로세스는 추진력을 상실한다. 제네바 합의는 다시 표류했고, 2002년 10월 북핵 위기 재발과 함께 폐기된다. 클린턴 행정부는 비확산(non-proliferation) 관여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북한 핵개발이 비확산 체제의 안정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동북아에 핵무장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보고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다. 반면 부시 행정부는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강경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협상을 통한 핵개발 저지는 어렵다고 보고 외부 확산 방지에 초점을 두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은 미사일 방어망이나 선제공격 능력 강화와 같은 억지력 증강을 통해 대처하려 했다.
물론 비핵화 협상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협상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비협력성을 공개 입증함으로써 '처벌을 위한 국제연대' 형성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간주됐다. 비핵화는 정권 붕괴나 그것이 임박한 상황에서 북한의 백기투항으로만 가능하다고 봤다. 따라서 양자회담보다는 다자회담(탈출구 봉쇄)을, 동시행동에 따른 점진적 비핵화보다는 '선(先) 핵포기, 후(後) 보상'의 일방적 비핵화를 선호했다(비협력성 입증). 그 결과 부시 행정부 1기 동안 한 차례의 3자회담과 세 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도출하지 못했다.
2005년 들어 북한과 미국은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한다. 그러고선 핵무기를 포기하게 하려면 미국의 대남 '핵우산'도 함께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 프로그램은 북-미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 등과 교환할 수 있지만, '이미 만든 핵무기'는 수교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만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비핵화 프로세스를 비핵화 프로세스와 핵군축 프로세스로 나누어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시 행정부 2기를 맞아 네오콘에 억눌려 있던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분출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으로 대표되는 이들 역시 대북 강경론자들이고 반확산 정책 지지자들이지만, 반확산에만 매달려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방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반확산 정책과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협상이 다시 시도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병행돼야 한다고 보았다.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은 미국 정책 전환의 결과물이다.

2013년 북한 3차 핵실험

공동성명은 한반도 비핵화 관련 세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두 번째 말'이다. 북한이 핵무기와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 6자회담 당사국은 소극적 안전보장, 북-미·북-일 수교, 평화체제 수립,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약속이다. 제네바 합의와 달리 공동성명에는 합의 이행 로드맵이 없다. 로드맵에 대한 합의는 2007년에 가서야,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9·19 프로세스'의 1단계에 대한 합의가 '2·13 합의'(2007년 2월)다. 북한이 3개 플루토늄 핵시설을 폐쇄·봉인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5만t을 제공하고 관계 개선 논의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1단계는 2007년 8월 완료됐다. 2단계에 대한 합의는 '10·3 합의'(2007년 10월)다. 북한이 3개 핵시설을 불능화하고(핵심 부품 제거 후 북한 내 특별관리)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95만t을 제공하고 테러지원국 지정 및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해제하며, 평화체제 협상틀을 가동한다는 내용이다. 2단계는 80%가량 진행된 상황에서 핵사찰 준비 협상이 최종 결렬되면서 중단됐고(2008년 12월), 이후 북한은 불능화한 핵시설을 복원했다. 따라서 현재 공동성명 자체는 살아 있지만, 로드맵에 대한 합의들은 파기된 상황이다.
그 이후 단계는 합의된 바 없다. 핵심 쟁점은 핵무기 폐기 시점과 경수로 건설 시점이다. 북한은 북-미·북-일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와 핵 프로그램 폐기를 맞바꾼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핵무기 폐기도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핵무기는 수교 및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 연계해 폐기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미국은 비핵화 완료 이후 경수로 건설을 시작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해체 완료와 함께 경수로가 완공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향후 9·19 프로세스가 재가동되더라도 합의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종말을 고한 비핵화 프로세스

북한은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연이어 6월에는 2차 핵실험을 실시한다. 미국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같은 말을 세 번 사지 않겠다"며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기조로 대응했다.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서 성의를 보이기 전에는 도발이나 유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략적 인내는 아시아 재균형 시대의 대북 반확산 전략이다. 국제 공조를 통해 북핵의 외부 확산을 막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을 명분으로 동아시아 미사일 방어망과 군사동맹을 강화해 중국 견제에 활용하려는 구상이다. 따라서 북한의 위기 조성 행위는 부시 행정부 1기 때와 마찬가지로 반향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북한은 한층 강화된 도발로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2010년 말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고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 영토에 포격을 감행한 것이다. 미국은 상황 관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2011년 여름부터 북-미 협상을 재개한다. 그러나 전략적 인내 기조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관심은 문제 해결이라기보다는 오바마 재선 때까지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는 것, 특히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을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두 차례(2012년 4월과 8월)나 특사를 북한에 보냈다. '재선 때까지 도발을 자제하면 재선 이후 협상을 재개한다'는 언질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오바마 재선 때까지 김정일 유훈 집행사업(위성 발사)까지 미뤘다. 그러나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예상을 깨고 채찍을 휘둘렀다. 위성 발사(2012년 12월)에 대해 의장 성명을 예상했으나 제재 결의안(2013년 1월)이 채택된 것이다. 중국도 동참했다. 북한은 미국이 현 상황을 즐기고 있고, 중국도 같이 놀아나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제재 결의안 채택 직후 북한은 핵정책 전면 전환을 실행에 옮긴다. 외무성(1월 23일)은 김일성의 유훈인 '조선반도 비핵화 노선'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국방위(1월 24일)와 조선평화통일위원회(1월 23일)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9·19 공동성명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3차 핵실험(2월 12일)을 감행했다. 비핵화 프로세스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
글 / 임수호 서울대 정치학 박사. 민주평통 상임위원 역임.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 수석연구원. 저서로 (북미대립) (계획과 시장의 공존) 등이 있다. 핵문제와 북한 정치경제, 남북관계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2013년 3월 17일 일요일

북핵 위기 20년: 합의와 퇴행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03-12일자 기사 '북핵 위기 20년: 합의와 퇴행'을 퍼왔습니다.
Spécial 북핵 20년-시시포스 신화

<무제>, 1997-겐지 요시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차관보는 얼마 전 국내의 한 학술회의에서 "봉쇄든 포용이든 지난 20년간 대북정책은 모두 실패했다"고 밝혔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왜 실패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지난 20년 북핵의 궤적을 크게 둘로 나눴다. 하나는 '합의와 퇴행'이라는 주제로, 합의는 어떻게 가능했고 왜 이행되지 못하고 파기됐는지를 짚었다. 다른 하나는 '위기와 반전'이라는 주제로, 어떻게 전쟁의 위기로 치달았고, 어떻게 반전이 가능했는지를 추적했다. 마지막으로 북-미 최후의 담판을 내건 3차 핵위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북한의 전략은 무엇인지를 분석했다.
북한 핵문제가 대두된 이래 북한과 국제사회 간에는 모두 세 번의 비핵화 합의가 있었다. 첫 번째 합의는 19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하 공동선언)이다. 남과 북이 핵무기를 시험·제조·생산·접수·저장·배치·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한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들자는 약속이다. 공동선언은 북한의 핵실험으로 사문화된 상태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도 공동선언 폐지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공동선언 폐지는 북한 비핵화를 포기하는 것이고 국제사회에 의해 잠재적 핵무장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개연성이 높다는 지적이 많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공동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의 준거 규정이지만, 문제와 한계도 있다. 우선 재처리·농축 시설을 포기함으로써 평화적 핵 이용권을 스스로 제한한 점이다. 재처리·농축 시설은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이지만, 핵의 평화적 이용 주기 완성에도 필수 시설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의 권리이기도 하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린 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핵보유국들의 핵전력 운용을 제한할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한반도가 온전한 비핵지대가 되려면, 남과 북이 핵무기를 포기할 뿐 아니라 주변 핵보유국들이 남과 북을 핵으로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이 제공돼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빠져 있다. 물론 이는 공동선언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핵지대 조약 중에서 핵보유국들이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NSA)를 비준한 경우는 '중남미 비핵지대조약'(1968)이 유일하다. '남태평양 비핵지대조약'(1986)은 미국이, '아프리카 비핵지대조약'(1996)은 미국과 러시아가 비준을 거부하고 있고, '동남아시아 비핵지대조약'(1997)은 모든 핵보유국들이 서명조차 거부하고 있다. 공동선언의 경우 아예 관련 논의조차 없었다.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가 없더라도 핵전력 운용을 제안할 방법은 있다. 조약에 외국 핵무기의 '출입·통과'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규정을 두는 것이다. 현재까지 금지 규정을 둔 조약은 없지만, 제한 규정을 둔 조약은 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두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첫 번째 말(Horse)'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다. 북한이 1992년 이전에 추출한 핵물질('과거 핵')과 1994년에 인출한 폐연료봉('현재 핵'), 그리고 영변 핵시설('미래 핵')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과 북-미 수교, 그리고 2003년까지 200만kW급 경수로를 건설해준다는 약속이었다.
문제는 합의 이행의 정치적 의지였다. 합의 직후 미국은 '공화당 혁명'(공화당의 상·하원 장악), 북한은 '선군혁명'에 직면한다. 보수주의 세력이 대두되면서 합의 이행에 제동이 걸렸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과의 갈등 사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굳이 북한 문제 때문에 정치적 자본을 소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하면서 합의 이행은 불필요한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유례없는 위기('고난의 행군') 속에서 김정일 정권의 관심도 대내 안정에 쏠렸다. 대외관계는 전략적으로 관리되지 못했고, 그 결과 선군정치와 함께 급부상한 군부 강경파의 분파적 이익에 포획되고 말았다.
제네바 합의를 낳은 것이 전쟁 위기(1994년 6월)였다면, 죽어가던 합의를 되살린 것은 대포동 위기였다(1998년 8월). 대포동 시험 발사는 제네바 합의를 결정적 좌초 위기로 몰아갔다. 합의 파기 목소리가 한·미·일 정계를 지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에게 대북정책 재검토를 지시한다. 의회 및 관련국과 조율을 거쳐 페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네바 합의가 파기될 경우 북한은 핵무장을 재개할 것이다. 국제사회가 제재를 취하더라도 북한정권이 무릎을 꿇기 전에 동아시아에 지정학적 지진(Geopolitical Earthquake)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둘째, 따라서 기존 '제한적 관여정책'을 버리고 '전면적 관여정책'을 취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셋째, 북-미 수교를 포함한 과감한 정치·경제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일괄타결 방식으로 해결한다. 넷째, 대북 관여는 효과가 나올 때까지 장기간 인내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페리 프로세스'는 급속도로 추진됐다. 사전 조율의 힘이었고,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와 북한의 재안정이 큰 도움이 됐다. 경수로 공사와 미사일 협상에 속도가 붙으면서 북-미 수교에 바짝 다가섰다. 2010년 10월 북한 군부의 실력자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한다. 핵·미사일 문제와 북-미 수교, 평화협정을 일괄타결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올브라이트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면담한다. 북-미 수교를 확정짓기 위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일정이 잡혔다. 지구적 탈냉전의 완성이 임박했다.

2002년 다시 터진 북핵 위기

클린턴 방북을 앞두고 공화당 부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클린턴은 방북을 포기했고, 페리 프로세스는 추진력을 상실한다. 제네바 합의는 다시 표류했고, 2002년 10월 북핵 위기 재발과 함께 폐기된다. 클린턴 행정부는 비확산(non-proliferation) 관여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북한 핵개발이 비확산 체제의 안정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동북아에 핵무장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보고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다. 반면 부시 행정부는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강경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협상을 통한 핵개발 저지는 어렵다고 보고 외부 확산 방지에 초점을 두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은 미사일 방어망이나 선제공격 능력 강화와 같은 억지력 증강을 통해 대처하려 했다.
물론 비핵화 협상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협상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비협력성을 공개 입증함으로써 '처벌을 위한 국제연대' 형성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간주됐다. 비핵화는 정권 붕괴나 그것이 임박한 상황에서 북한의 백기투항으로만 가능하다고 봤다. 따라서 양자회담보다는 다자회담(탈출구 봉쇄)을, 동시행동에 따른 점진적 비핵화보다는 '선(先) 핵포기, 후(後) 보상'의 일방적 비핵화를 선호했다(비협력성 입증). 그 결과 부시 행정부 1기 동안 한 차례의 3자회담과 세 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도출하지 못했다.
2005년 들어 북한과 미국은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한다. 그러고선 핵무기를 포기하게 하려면 미국의 대남 '핵우산'도 함께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 프로그램은 북-미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 등과 교환할 수 있지만, '이미 만든 핵무기'는 수교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만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비핵화 프로세스를 비핵화 프로세스와 핵군축 프로세스로 나누어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시 행정부 2기를 맞아 네오콘에 억눌려 있던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분출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으로 대표되는 이들 역시 대북 강경론자들이고 반확산 정책 지지자들이지만, 반확산에만 매달려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방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반확산 정책과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협상이 다시 시도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병행돼야 한다고 보았다.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은 미국 정책 전환의 결과물이다.

2013년 북한 3차 핵실험

공동성명은 한반도 비핵화 관련 세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두 번째 말'이다. 북한이 핵무기와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 6자회담 당사국은 소극적 안전보장, 북-미·북-일 수교, 평화체제 수립,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약속이다. 제네바 합의와 달리 공동성명에는 합의 이행 로드맵이 없다. 로드맵에 대한 합의는 2007년에 가서야,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9·19 프로세스'의 1단계에 대한 합의가 '2·13 합의'(2007년 2월)다. 북한이 3개 플루토늄 핵시설을 폐쇄·봉인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5만t을 제공하고 관계 개선 논의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1단계는 2007년 8월 완료됐다. 2단계에 대한 합의는 '10·3 합의'(2007년 10월)다. 북한이 3개 핵시설을 불능화하고(핵심 부품 제거 후 북한 내 특별관리)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95만t을 제공하고 테러지원국 지정 및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해제하며, 평화체제 협상틀을 가동한다는 내용이다. 2단계는 80%가량 진행된 상황에서 핵사찰 준비 협상이 최종 결렬되면서 중단됐고(2008년 12월), 이후 북한은 불능화한 핵시설을 복원했다. 따라서 현재 공동성명 자체는 살아 있지만, 로드맵에 대한 합의들은 파기된 상황이다.
그 이후 단계는 합의된 바 없다. 핵심 쟁점은 핵무기 폐기 시점과 경수로 건설 시점이다. 북한은 북-미·북-일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와 핵 프로그램 폐기를 맞바꾼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핵무기 폐기도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핵무기는 수교 및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 연계해 폐기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미국은 비핵화 완료 이후 경수로 건설을 시작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해체 완료와 함께 경수로가 완공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향후 9·19 프로세스가 재가동되더라도 합의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종말을 고한 비핵화 프로세스

북한은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연이어 6월에는 2차 핵실험을 실시한다. 미국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같은 말을 세 번 사지 않겠다"며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기조로 대응했다.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서 성의를 보이기 전에는 도발이나 유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략적 인내는 아시아 재균형 시대의 대북 반확산 전략이다. 국제 공조를 통해 북핵의 외부 확산을 막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을 명분으로 동아시아 미사일 방어망과 군사동맹을 강화해 중국 견제에 활용하려는 구상이다. 따라서 북한의 위기 조성 행위는 부시 행정부 1기 때와 마찬가지로 반향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북한은 한층 강화된 도발로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2010년 말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고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 영토에 포격을 감행한 것이다. 미국은 상황 관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2011년 여름부터 북-미 협상을 재개한다. 그러나 전략적 인내 기조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관심은 문제 해결이라기보다는 오바마 재선 때까지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는 것, 특히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을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두 차례(2012년 4월과 8월)나 특사를 북한에 보냈다. '재선 때까지 도발을 자제하면 재선 이후 협상을 재개한다'는 언질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오바마 재선 때까지 김정일 유훈 집행사업(위성 발사)까지 미뤘다. 그러나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예상을 깨고 채찍을 휘둘렀다. 위성 발사(2012년 12월)에 대해 의장 성명을 예상했으나 제재 결의안(2013년 1월)이 채택된 것이다. 중국도 동참했다. 북한은 미국이 현 상황을 즐기고 있고, 중국도 같이 놀아나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제재 결의안 채택 직후 북한은 핵정책 전면 전환을 실행에 옮긴다. 외무성(1월 23일)은 김일성의 유훈인 '조선반도 비핵화 노선'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국방위(1월 24일)와 조선평화통일위원회(1월 23일)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9·19 공동성명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3차 핵실험(2월 12일)을 감행했다. 비핵화 프로세스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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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수호 서울대 정치학 박사. 민주평통 상임위원 역임.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 수석연구원. 저서로 (북미대립) (계획과 시장의 공존) 등이 있다. 핵문제와 북한 정치경제, 남북관계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2012년 10월 3일 수요일

새누리 "MB, 야당 추천 특검 임명하지 말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02일자 기사 '새누리 "MB, 야당 추천 특검 임명하지 말라"'를 퍼왔습니다.
합의할 때는 언제고 뒤늦게 '특검 반대'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매입 의혹 특검 추천에 대해 새누리당이 공식 반대 입장을 내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여야 합의로 출범을 앞두고 있는 특검에 합의 당사자인 여당이 뒤늦게 제동을 건 것이다.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이 이 대통령 감싸기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통합당이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의혹사건을 수사할 특별검사 후보자로 김형태, 이광범 변호사를 추천한데 대해 새누리당 김기현 원내수석부대표는 2일 오후 브리핑을 갖고 "민주당이 '새누리당과의 원만한 협의를 거쳐 특검 후보자를 추천한다'는 여야 합의 사항을 깼다"며 "이명박 대통령은 오늘 민주당이 추천한 특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는 게 옳다"고 요구했다.

김 수석은 "민주당은 비공식 협의에서 제시된 새누리당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늘 일방적으로 후보자를 결정해 발표했다"며 "이는 여야 간 신뢰의 정치에 대한 정면 도전이고, 민주당은 믿을 수 없는 정당이란 사실을 백일 하에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앞서 새누리당은 민주당 측에 자당이 엄선한 특검 후보자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수석은 "민주당은 여야 합의를 정면으로 어기고 특검을 대선에 정략적으로 악용코자 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민주당의 이번 특검 추천은 수사과정에서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김 수석은 "민주당은 향후 모든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실적으로 새누리당이 특검에 제동을 걸수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김 수석은 "꼭 그렇게(제동을 못 걸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새누리당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논의를 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이 이 대통령에게 "특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는 게 옳다"고 공개 주문해 정치적 파장은 커질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앞서 "위헌적 요소가 있고 정치 공세"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대승적 차원에서 특검법을 수용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야당이 추천하도록 돼 있는 것을 알고 특검법을 수용한 터라, 뒤늦게 야당 추천 인사를 거부할 경우 역풍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청와대 입장에서 추천받은 인사들이 정치적 중립과 관련해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 경우 다시 돌려 보낼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럴 수) 없다. 무조건 한 사람을 받도록 돼 있다"고 말했었다.

청와대가 당의 입장을 수용해 민주당 추천 인사를 거부할 경우 새누리당과 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한 배를 탄 모양새가 된다.

 /박세열 기자 

2012년 9월 22일 토요일

YTN, 협상 타결…'두 번째 파업' 종료


이글은 미디어스 2012-09-21일자 기사 'YTN, 협상 타결…'두 번째 파업' 종료'를 퍼왔습니다.
20일 회사측과 '임금 7% 인상' 합의…'희망펀드' 전면중단

▲ 3월 8일 오전 서울 YTN타워 1층 로비에서 열린 YTN 노동조합 총파업 출정식에 참석한 이들이 '해직자는 회사로, 배석규는 집으로'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미디어스

임금협상 결렬에 따라 올해 3월부터 창사 이래 두 번째 파업에 나섰던 YTN노조가 사측과의 임금협상을 타결지으면서 파업을 마무리하게 됐다.
전국언론노동조합 YTN지부(지부장 김종욱)에 따르면, 20일 YTN지부는 회사측과 △임금 7% 인상 △시간외 수당 5% 인상 △장기근속 휴가일수 확대 및 격려금 지급 등에 대해 합의했다.
올해 초 YTN노사는 2012년 임금협상에서 각각 '11% 임금인상'(노측) '2% 인상'(사측)을 주장하다 의견일치를 보지 못해 협상이 결렬됐으며, YTN노조는 3월 8일부터 '임금협상 쟁취' '해직기자 복직' '배석규 사장 연임반대'을 내걸고 총 10차례에 걸쳐 게릴라 파업을 진행해온 바 있다.
다만, YTN 사측은 파업 주도 혐의로 김종욱 YTN지부장(정직 6개월) 등 집행부 3명에게 중징계를 내린 것에 대해서는 "징계를 철회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YTN지부는 20일 "징계를 그대로 놔둘 경우 전임자들의 개인적 피해도 크지만 무엇보다 우리 파업의 정당성이 훼손되는 것인 만큼 끝까지 철회를 요구하려 했지만, 자칫 조합원들의 임금이 발목잡힐 수 있는 상황을 우려해 징계에 대한 내용은 별도로 대응하기로 하고 사측과 최종 합의에 이르게 됐다"며 "징계 문제는 법적 대응을 비롯한 모든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YTN지부는 협상 결과에 대해 "당초 2%를 고수하던 사측이 6%까지 인상률을 올리고, 나아가 1%의 일시불 지급을 추가로 제시하고, 여타 사원 복지에 추가 비용을 내놓게 된 것은 파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쟁취해내기 어려운 성과물들"이라고 평가했다.
YTN지부는 24일 대의원대회를 열어 이 같은 협상안을 추인할 예정이며, 이날 대의원대회에서는 해직자들과 파업 참가자들의 생계를 보전하기 위해 조합비를 한시적으로 인상하는 안건도 상정된다.
2008년 '구본홍 낙하산 반대 투쟁'을 하다가 일시에 해직된 노종면 전 위원장 등 6명의 기자들의 생계를 위해 설립됐던 '희망펀드'는 이번 임금협상 타결을 계기로 전면 중단된다.
YTN지부는 "무려 4년이나 계속된 해직사태는 해직자들 본인은 물론 희망펀드를 유지해온 수많은 조합원들의 금전적 부담도 가중시켜 왔다"며 "해직자와 조합원들의 고통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기 때문에 이번 임금협상 타결을 계기로 희망펀드를 전면 중단하고 조합비로 해직자들의 생계비를 보전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곽상아 기자  |  nell@mediaus.co.kr

2012년 8월 28일 화요일

“9기 방문진 첫 과제는 김재철 사장 해임”


이글은 미디어스 2012-08-27일자 기사 '민주당 “새누리당과 원내협상서 김재철 퇴진 사실상 합의”'를 퍼왔습니다.
민주당 “새누리당과 원내협상서 김재철 퇴진 사실상 합의”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가 27일 오후 이사회를 열어 공식 행보를 본격화 한 가운데, 민주통합당이 방문진을 향해 이사회의 첫 과제로 김재철 MBC 사장 해임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와는 달리, 새누리당은 ‘언론사의 정치 중립’을 언급하며 민주통합당의 입장을 반박했다.
9기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는 이날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율촌빌딩 방문진 사무실에서 이사회를 열어 이사장 선출 등 현안과 관련한 논의를 시작했다. 방문진은 이날 오후 5시20분 현재까지도 이사장 선출을 위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 김재철 MBC 사장 ⓒMBC

이와 관련해, 정성호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서면브리핑을 통해 “제9기 방문진 이사진의 역사적 소명은 김재철 MBC 사장을 해임하는 것으로 이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방문진은 국민의 신뢰를 잃을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통합당은 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MBC 파업사태와 관련해 ‘노사 간 타협하고 대화’할 문제라면서도 ‘징계사태까지 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밝힌 점을 언급하며 “새누리당과 민주당도 원내협상에서 김재철 사장 퇴진을 사실상 합의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제 남은 건 방문진 이사회의 결정뿐”이라며 “김재철 사장을 퇴진시킬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그날의 약속을 오늘 지키기 바란다. 만약 오늘 김재철 퇴진이 결정되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에게 있음을 밝혀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같은 민주통합당 브리핑에 대해 새누리당은 즉각 반발했다.
이철우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원내 협상한 적도 없고, 김재철 사장 퇴진의 퇴짜도 논의한 적이 없다”며 유감을 밝혔다.
새누리당은 또 “김재철 사장에 대해서는 여야간의 어떠한 부분도 협상이 없었단 점을 밝히며 정치권에서 언론사 사장을 물러가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언론사의 정치중립을 저해하는 일”이라며 “민주당은 방문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놓아주길 당부한다”고 밝혔다.

송선영 기자  |  sincerely@mediaus.co.kr

2012년 8월 8일 수요일

[보험특집2] 삼성생명, 고객의 눈물로 자신의 죄를 지우다


이글은 위키프레스 201208-07일자 기사 '[보험특집2] 삼성생명, 고객의 눈물로 자신의 죄를 지우다'를 퍼왔습니다.

"이번 합의로 삼성생명이 제게했던 사기 행각은 철저히 은폐되겠죠"

(위키프레스)에 제보한 부산의 강모 씨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당연히' 받아야할 보험금을 받지 못한 강 씨는 삼성생명과 2년 동안 홀로 싸웠다. 그는 처절한 싸움 끝에 자신에게 남은 건 합의금 1천만 원과 화병 밖에 없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강 씨의 싸움은 지인 황 씨를 위한 것이었다. 2년 전 황 씨는 뇌졸중 연계질환인 '열공성 뇌경색'(이하 열공경색)을 앓았던 터라 보험금 청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에 강 씨는 황 씨의 부탁으로 보험금 청구를 도와주었다. 며칠 뒤 삼성생명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을 통보했다. 강 씨는 이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다 싶었다. 그는 일하는 시간을 뺀 모든 시간을 황 씨의 보험금을 받아내는 데에 썼다. 사회구조적 문제임에도 힘 없는 자들이 늘 그러하듯 강 씨 또한 그저 '자기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강 씨는 1인 시위를 비롯,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삼성생명의 행각을 고발하며 고군분투했다. 그는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한 뒤 요목조목 따졌다. 그러나 삼성생명의 덫에 말려든 그는 되레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약점을 잡은 삼성생명은 끝내 보험금 2천만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합의금(삼성은 '화해'라고 주장하지만)명목으로 1천만 원을 지급할 용의가 있음을 여러 경로를 통해 강 씨에게 통보했다. 

강 씨는 지칠대로 지친 황 씨의 권유에 못이겨 결국 삼성생명의 제안을 승락했다. 이들은 함께 합의서를 작성하러 갔다. 가뜩이나 모든 상황이 억울했던 강 씨는 황 씨가 합의서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며 극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합의 내용 때문이다. 합의하러 온 삼성생명 직원은 피보험자 황 씨에게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라 했다. 

"화해금 1천만 원을 보험금 청구에 갈음하고···본인이 게재한 모든 인터넷 게시글, 회사 비방글을 삭제할 것이며 이를 어길 시 화해금을 반환할 것을 확약한다" 

강 씨는 다른 건 몰라도 '비방글 삭제하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삼성생명의 횡포를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자 삼성생명 직원은 그러면 합의금을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뿐만 아니라 관련 글을 또 다시 게재할 시 명예훼손 등으로 고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 씨가 부당하다며 화를 내자 황 씨가 나서 '이제 그만하자'며 그를 말렸다. 황 씨는 직원이 부르는 대로 묵묵히 받아 적었다. 


이번 합의로 삼성생명은 얻은 게 많다. 무엇보다 원래 지급해야할 보험금의 절반인 1천만 원만 지급하면 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손해사정사와 지급팀은 인센티브를 받을 것이다. 강 씨가 올린 고발 글도 깨끗하게 해결했다. 모든 것을 '당신 손으로 직접' 삭제하라 합의서를 받아냈기 때문이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그쪽이 직접 작성한 합의서에 따라 합의금을 회수한다고 엄포를 놓으면 된다.

합의서를 작성한 뒤 강 씨는 기자에게 전화해 울먹이며 말했다. "대기업이 국민을 두고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삼성생명은 이렇게 자신들의 행각을 고객들의 눈물로 지워나갔다. 

애초, 강 씨는 황 씨의 보험금 청구만 잠깐 도와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황 씨가 들었던 보험은 열공경색을 보장했기에 진단서를 끊어주는 절차만 도와주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강 씨는 손해사정사와 만나 필요한 서류를 꾸민 뒤 모두 삼성생명에 넘겼다. 며칠 뒤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삼성생명의 통보를 받았다. 진단명에 따른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코드(이하 질병코드)가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강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자신이들고 있는 진단서에는 분명 '진단명-열공경색, 질병코드-I63.8'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통상 의사의 진단에 따라 원무과에서 입력하는 질병코드는 사실 '통계청'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분류해 놓은 번호일 뿐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보험사는 이 질병코드를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근거로 악용해왔다. 방법은 간단하다. 손해사정사는 삼성이 직접 만든 서류양식 하나를 의사에게 내민다. 이어, 한 의사의 표현을 빌리면, 손해사정사는 '말로 의사를 구워삶아' 의사가 다른 질병코드를 쓰도록 유도한다. 이 서류를 받은 보험사 보상팀(지급팀)은 '의사가 명확한 진단을 못하고 있다'고 왜곡 해석하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다. 당시 황 씨에게 열공경색 진단을 내린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의 내과과장은 황씨의 뇌 MRI를 9년 동안 찍었고, 열공경색으로 판명된 후 3년간 치료 했다. 이러한 의사의 진단명을 한 순간에 '오진'으로 만든 것이다. (본지 7월 24일자 보도된 '삼성생명의 기막힌 말장난에 놀아난 의사와 금감원' 참조)

이에 본지는 통계청의 한 관계자와 전화인터뷰를 시도했다. 관계자는 '보험사가 질병코드를 근거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질병코드는)그런 용도가 아닌데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통계청에서 발행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코드지침서 2권 11쪽의 '목적과 이용'을 보면, '국민건강을 연구하기위한 것'이라고 적혀있다"고 답했다. 질병코드가 의사의 진단명을 대신할 수 있지에 대해서는 "진단명에 따라 질병코드가 부여되는 것이지, 질병코드에 따라 의사의 진단명이 결정되는 건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질병코드를 만든 목적은 우리나라 국민의 질병 및 사인을 조사하기 위한 연구자료임을 명시해 두었다 (자료=통계청 제공)

이를 몰랐던 강 씨는 다른 여러 자료를 인용해 보험금을 재청구 하지만, 오히려 삼성생명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수법들에 모두 말려들고 말았다. 특히 보험사기를 막기 위해 마련된 '제3 의료기관 자문 소견서'와 방관에 가까운 분쟁조정결과를 내놓은 금감원의 '보험분쟁 회신문'은 삼성생명의 보험금 지급 거절논리로 철저히 악용됐다. 

결국 황 씨는 삼성생명이 내민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강 씨는 자신이 올린 모든 글을 삭제해야만 했다. 이뿐만 아니라 삼성생명은 황 씨에게 '위키프레스에 제보해 게재된 기사 또한 삭제요청을 하라'고 요구했다. 황 씨는 기자에게 전화해 기사삭제를 부탁했다. 기자가 이를 거절하자 삼성생명 측은 기자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냈다. 

"보험금 지급이 원리와 원칙에 맞지 않을 경우 결국은 보험료가 더 높아져 소비자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험금 지급심사는 신중해야···(이번 사안은)의학적, 법리적 논리가 팽팽한, 더 나아가 보험사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는 현시점에서 '거대보험사의 횡포' 로만 비춰질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기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기사 삭제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보험소비자협회의 김미숙 대표는 "종신보험 총액이 대략 117조 원인데 이중 보험금으로 지급된 돈은 3.8%에 해당하는 4조 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임직원 수당, 주주이익분배 등에 사업비로 나간돈은 무려 30조원이 넘는다"며 보험료 상승요인은 따로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보험사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말은 거대보험사의 횡포가 그만큼 심각해 진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이라며 미국의 민간보험 사례를 들며 반박했다. 

박성제 (park@wikipres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