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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4일 일요일

북핵 위기 20년: 합의와 퇴행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03-12일자 기사 '북핵 위기 20년: 합의와 퇴행'을 퍼왔습니다.
Spécial 북핵 20년-시시포스 신화

<무제>, 1997-겐지 요시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차관보는 얼마 전 국내의 한 학술회의에서 "봉쇄든 포용이든 지난 20년간 대북정책은 모두 실패했다"고 밝혔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왜 실패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지난 20년 북핵의 궤적을 크게 둘로 나눴다. 하나는 '합의와 퇴행'이라는 주제로, 합의는 어떻게 가능했고 왜 이행되지 못하고 파기됐는지를 짚었다. 다른 하나는 '위기와 반전'이라는 주제로, 어떻게 전쟁의 위기로 치달았고, 어떻게 반전이 가능했는지를 추적했다. 마지막으로 북-미 최후의 담판을 내건 3차 핵위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북한의 전략은 무엇인지를 분석했다.
북한 핵문제가 대두된 이래 북한과 국제사회 간에는 모두 세 번의 비핵화 합의가 있었다. 첫 번째 합의는 19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하 공동선언)이다. 남과 북이 핵무기를 시험·제조·생산·접수·저장·배치·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한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들자는 약속이다. 공동선언은 북한의 핵실험으로 사문화된 상태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도 공동선언 폐지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공동선언 폐지는 북한 비핵화를 포기하는 것이고 국제사회에 의해 잠재적 핵무장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개연성이 높다는 지적이 많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공동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의 준거 규정이지만, 문제와 한계도 있다. 우선 재처리·농축 시설을 포기함으로써 평화적 핵 이용권을 스스로 제한한 점이다. 재처리·농축 시설은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이지만, 핵의 평화적 이용 주기 완성에도 필수 시설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의 권리이기도 하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린 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핵보유국들의 핵전력 운용을 제한할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한반도가 온전한 비핵지대가 되려면, 남과 북이 핵무기를 포기할 뿐 아니라 주변 핵보유국들이 남과 북을 핵으로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이 제공돼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빠져 있다. 물론 이는 공동선언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핵지대 조약 중에서 핵보유국들이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NSA)를 비준한 경우는 '중남미 비핵지대조약'(1968)이 유일하다. '남태평양 비핵지대조약'(1986)은 미국이, '아프리카 비핵지대조약'(1996)은 미국과 러시아가 비준을 거부하고 있고, '동남아시아 비핵지대조약'(1997)은 모든 핵보유국들이 서명조차 거부하고 있다. 공동선언의 경우 아예 관련 논의조차 없었다.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가 없더라도 핵전력 운용을 제안할 방법은 있다. 조약에 외국 핵무기의 '출입·통과'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규정을 두는 것이다. 현재까지 금지 규정을 둔 조약은 없지만, 제한 규정을 둔 조약은 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두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첫 번째 말(Horse)'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다. 북한이 1992년 이전에 추출한 핵물질('과거 핵')과 1994년에 인출한 폐연료봉('현재 핵'), 그리고 영변 핵시설('미래 핵')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과 북-미 수교, 그리고 2003년까지 200만kW급 경수로를 건설해준다는 약속이었다.
문제는 합의 이행의 정치적 의지였다. 합의 직후 미국은 '공화당 혁명'(공화당의 상·하원 장악), 북한은 '선군혁명'에 직면한다. 보수주의 세력이 대두되면서 합의 이행에 제동이 걸렸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과의 갈등 사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굳이 북한 문제 때문에 정치적 자본을 소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하면서 합의 이행은 불필요한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유례없는 위기('고난의 행군') 속에서 김정일 정권의 관심도 대내 안정에 쏠렸다. 대외관계는 전략적으로 관리되지 못했고, 그 결과 선군정치와 함께 급부상한 군부 강경파의 분파적 이익에 포획되고 말았다.
제네바 합의를 낳은 것이 전쟁 위기(1994년 6월)였다면, 죽어가던 합의를 되살린 것은 대포동 위기였다(1998년 8월). 대포동 시험 발사는 제네바 합의를 결정적 좌초 위기로 몰아갔다. 합의 파기 목소리가 한·미·일 정계를 지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에게 대북정책 재검토를 지시한다. 의회 및 관련국과 조율을 거쳐 페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네바 합의가 파기될 경우 북한은 핵무장을 재개할 것이다. 국제사회가 제재를 취하더라도 북한정권이 무릎을 꿇기 전에 동아시아에 지정학적 지진(Geopolitical Earthquake)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둘째, 따라서 기존 '제한적 관여정책'을 버리고 '전면적 관여정책'을 취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셋째, 북-미 수교를 포함한 과감한 정치·경제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일괄타결 방식으로 해결한다. 넷째, 대북 관여는 효과가 나올 때까지 장기간 인내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페리 프로세스'는 급속도로 추진됐다. 사전 조율의 힘이었고,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와 북한의 재안정이 큰 도움이 됐다. 경수로 공사와 미사일 협상에 속도가 붙으면서 북-미 수교에 바짝 다가섰다. 2010년 10월 북한 군부의 실력자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한다. 핵·미사일 문제와 북-미 수교, 평화협정을 일괄타결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올브라이트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면담한다. 북-미 수교를 확정짓기 위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일정이 잡혔다. 지구적 탈냉전의 완성이 임박했다.

2002년 다시 터진 북핵 위기

클린턴 방북을 앞두고 공화당 부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클린턴은 방북을 포기했고, 페리 프로세스는 추진력을 상실한다. 제네바 합의는 다시 표류했고, 2002년 10월 북핵 위기 재발과 함께 폐기된다. 클린턴 행정부는 비확산(non-proliferation) 관여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북한 핵개발이 비확산 체제의 안정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동북아에 핵무장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보고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다. 반면 부시 행정부는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강경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협상을 통한 핵개발 저지는 어렵다고 보고 외부 확산 방지에 초점을 두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은 미사일 방어망이나 선제공격 능력 강화와 같은 억지력 증강을 통해 대처하려 했다.
물론 비핵화 협상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협상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비협력성을 공개 입증함으로써 '처벌을 위한 국제연대' 형성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간주됐다. 비핵화는 정권 붕괴나 그것이 임박한 상황에서 북한의 백기투항으로만 가능하다고 봤다. 따라서 양자회담보다는 다자회담(탈출구 봉쇄)을, 동시행동에 따른 점진적 비핵화보다는 '선(先) 핵포기, 후(後) 보상'의 일방적 비핵화를 선호했다(비협력성 입증). 그 결과 부시 행정부 1기 동안 한 차례의 3자회담과 세 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도출하지 못했다.
2005년 들어 북한과 미국은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한다. 그러고선 핵무기를 포기하게 하려면 미국의 대남 '핵우산'도 함께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 프로그램은 북-미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 등과 교환할 수 있지만, '이미 만든 핵무기'는 수교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만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비핵화 프로세스를 비핵화 프로세스와 핵군축 프로세스로 나누어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시 행정부 2기를 맞아 네오콘에 억눌려 있던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분출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으로 대표되는 이들 역시 대북 강경론자들이고 반확산 정책 지지자들이지만, 반확산에만 매달려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방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반확산 정책과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협상이 다시 시도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병행돼야 한다고 보았다.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은 미국 정책 전환의 결과물이다.

2013년 북한 3차 핵실험

공동성명은 한반도 비핵화 관련 세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두 번째 말'이다. 북한이 핵무기와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 6자회담 당사국은 소극적 안전보장, 북-미·북-일 수교, 평화체제 수립,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약속이다. 제네바 합의와 달리 공동성명에는 합의 이행 로드맵이 없다. 로드맵에 대한 합의는 2007년에 가서야,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9·19 프로세스'의 1단계에 대한 합의가 '2·13 합의'(2007년 2월)다. 북한이 3개 플루토늄 핵시설을 폐쇄·봉인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5만t을 제공하고 관계 개선 논의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1단계는 2007년 8월 완료됐다. 2단계에 대한 합의는 '10·3 합의'(2007년 10월)다. 북한이 3개 핵시설을 불능화하고(핵심 부품 제거 후 북한 내 특별관리)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95만t을 제공하고 테러지원국 지정 및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해제하며, 평화체제 협상틀을 가동한다는 내용이다. 2단계는 80%가량 진행된 상황에서 핵사찰 준비 협상이 최종 결렬되면서 중단됐고(2008년 12월), 이후 북한은 불능화한 핵시설을 복원했다. 따라서 현재 공동성명 자체는 살아 있지만, 로드맵에 대한 합의들은 파기된 상황이다.
그 이후 단계는 합의된 바 없다. 핵심 쟁점은 핵무기 폐기 시점과 경수로 건설 시점이다. 북한은 북-미·북-일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와 핵 프로그램 폐기를 맞바꾼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핵무기 폐기도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핵무기는 수교 및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 연계해 폐기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미국은 비핵화 완료 이후 경수로 건설을 시작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해체 완료와 함께 경수로가 완공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향후 9·19 프로세스가 재가동되더라도 합의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종말을 고한 비핵화 프로세스

북한은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연이어 6월에는 2차 핵실험을 실시한다. 미국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같은 말을 세 번 사지 않겠다"며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기조로 대응했다.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서 성의를 보이기 전에는 도발이나 유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략적 인내는 아시아 재균형 시대의 대북 반확산 전략이다. 국제 공조를 통해 북핵의 외부 확산을 막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을 명분으로 동아시아 미사일 방어망과 군사동맹을 강화해 중국 견제에 활용하려는 구상이다. 따라서 북한의 위기 조성 행위는 부시 행정부 1기 때와 마찬가지로 반향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북한은 한층 강화된 도발로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2010년 말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고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 영토에 포격을 감행한 것이다. 미국은 상황 관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2011년 여름부터 북-미 협상을 재개한다. 그러나 전략적 인내 기조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관심은 문제 해결이라기보다는 오바마 재선 때까지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는 것, 특히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을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두 차례(2012년 4월과 8월)나 특사를 북한에 보냈다. '재선 때까지 도발을 자제하면 재선 이후 협상을 재개한다'는 언질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오바마 재선 때까지 김정일 유훈 집행사업(위성 발사)까지 미뤘다. 그러나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예상을 깨고 채찍을 휘둘렀다. 위성 발사(2012년 12월)에 대해 의장 성명을 예상했으나 제재 결의안(2013년 1월)이 채택된 것이다. 중국도 동참했다. 북한은 미국이 현 상황을 즐기고 있고, 중국도 같이 놀아나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제재 결의안 채택 직후 북한은 핵정책 전면 전환을 실행에 옮긴다. 외무성(1월 23일)은 김일성의 유훈인 '조선반도 비핵화 노선'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국방위(1월 24일)와 조선평화통일위원회(1월 23일)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9·19 공동성명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3차 핵실험(2월 12일)을 감행했다. 비핵화 프로세스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
글 / 임수호 서울대 정치학 박사. 민주평통 상임위원 역임.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 수석연구원. 저서로 (북미대립) (계획과 시장의 공존) 등이 있다. 핵문제와 북한 정치경제, 남북관계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2013년 3월 17일 일요일

북핵 위기 20년: 합의와 퇴행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03-12일자 기사 '북핵 위기 20년: 합의와 퇴행'을 퍼왔습니다.
Spécial 북핵 20년-시시포스 신화

<무제>, 1997-겐지 요시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차관보는 얼마 전 국내의 한 학술회의에서 "봉쇄든 포용이든 지난 20년간 대북정책은 모두 실패했다"고 밝혔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왜 실패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지난 20년 북핵의 궤적을 크게 둘로 나눴다. 하나는 '합의와 퇴행'이라는 주제로, 합의는 어떻게 가능했고 왜 이행되지 못하고 파기됐는지를 짚었다. 다른 하나는 '위기와 반전'이라는 주제로, 어떻게 전쟁의 위기로 치달았고, 어떻게 반전이 가능했는지를 추적했다. 마지막으로 북-미 최후의 담판을 내건 3차 핵위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북한의 전략은 무엇인지를 분석했다.
북한 핵문제가 대두된 이래 북한과 국제사회 간에는 모두 세 번의 비핵화 합의가 있었다. 첫 번째 합의는 19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하 공동선언)이다. 남과 북이 핵무기를 시험·제조·생산·접수·저장·배치·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한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들자는 약속이다. 공동선언은 북한의 핵실험으로 사문화된 상태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에서도 공동선언 폐지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공동선언 폐지는 북한 비핵화를 포기하는 것이고 국제사회에 의해 잠재적 핵무장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개연성이 높다는 지적이 많다.

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공동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의 준거 규정이지만, 문제와 한계도 있다. 우선 재처리·농축 시설을 포기함으로써 평화적 핵 이용권을 스스로 제한한 점이다. 재처리·농축 시설은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이지만, 핵의 평화적 이용 주기 완성에도 필수 시설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의 권리이기도 하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린 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다음으로 핵보유국들의 핵전력 운용을 제한할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한반도가 온전한 비핵지대가 되려면, 남과 북이 핵무기를 포기할 뿐 아니라 주변 핵보유국들이 남과 북을 핵으로 공격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이 제공돼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빠져 있다. 물론 이는 공동선언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핵지대 조약 중에서 핵보유국들이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NSA)를 비준한 경우는 '중남미 비핵지대조약'(1968)이 유일하다. '남태평양 비핵지대조약'(1986)은 미국이, '아프리카 비핵지대조약'(1996)은 미국과 러시아가 비준을 거부하고 있고, '동남아시아 비핵지대조약'(1997)은 모든 핵보유국들이 서명조차 거부하고 있다. 공동선언의 경우 아예 관련 논의조차 없었다.
소극적 안전보장 의정서가 없더라도 핵전력 운용을 제안할 방법은 있다. 조약에 외국 핵무기의 '출입·통과'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규정을 두는 것이다. 현재까지 금지 규정을 둔 조약은 없지만, 제한 규정을 둔 조약은 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두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첫 번째 말(Horse)'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다. 북한이 1992년 이전에 추출한 핵물질('과거 핵')과 1994년에 인출한 폐연료봉('현재 핵'), 그리고 영변 핵시설('미래 핵')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과 북-미 수교, 그리고 2003년까지 200만kW급 경수로를 건설해준다는 약속이었다.
문제는 합의 이행의 정치적 의지였다. 합의 직후 미국은 '공화당 혁명'(공화당의 상·하원 장악), 북한은 '선군혁명'에 직면한다. 보수주의 세력이 대두되면서 합의 이행에 제동이 걸렸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과의 갈등 사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굳이 북한 문제 때문에 정치적 자본을 소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하면서 합의 이행은 불필요한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유례없는 위기('고난의 행군') 속에서 김정일 정권의 관심도 대내 안정에 쏠렸다. 대외관계는 전략적으로 관리되지 못했고, 그 결과 선군정치와 함께 급부상한 군부 강경파의 분파적 이익에 포획되고 말았다.
제네바 합의를 낳은 것이 전쟁 위기(1994년 6월)였다면, 죽어가던 합의를 되살린 것은 대포동 위기였다(1998년 8월). 대포동 시험 발사는 제네바 합의를 결정적 좌초 위기로 몰아갔다. 합의 파기 목소리가 한·미·일 정계를 지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에게 대북정책 재검토를 지시한다. 의회 및 관련국과 조율을 거쳐 페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네바 합의가 파기될 경우 북한은 핵무장을 재개할 것이다. 국제사회가 제재를 취하더라도 북한정권이 무릎을 꿇기 전에 동아시아에 지정학적 지진(Geopolitical Earthquake)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둘째, 따라서 기존 '제한적 관여정책'을 버리고 '전면적 관여정책'을 취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셋째, 북-미 수교를 포함한 과감한 정치·경제적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일괄타결 방식으로 해결한다. 넷째, 대북 관여는 효과가 나올 때까지 장기간 인내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페리 프로세스'는 급속도로 추진됐다. 사전 조율의 힘이었고,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와 북한의 재안정이 큰 도움이 됐다. 경수로 공사와 미사일 협상에 속도가 붙으면서 북-미 수교에 바짝 다가섰다. 2010년 10월 북한 군부의 실력자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한다. 핵·미사일 문제와 북-미 수교, 평화협정을 일괄타결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올브라이트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면담한다. 북-미 수교를 확정짓기 위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일정이 잡혔다. 지구적 탈냉전의 완성이 임박했다.

2002년 다시 터진 북핵 위기

클린턴 방북을 앞두고 공화당 부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클린턴은 방북을 포기했고, 페리 프로세스는 추진력을 상실한다. 제네바 합의는 다시 표류했고, 2002년 10월 북핵 위기 재발과 함께 폐기된다. 클린턴 행정부는 비확산(non-proliferation) 관여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북한 핵개발이 비확산 체제의 안정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동북아에 핵무장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보고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다. 반면 부시 행정부는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강경정책 차원에서 북핵 문제에 접근했다. 협상을 통한 핵개발 저지는 어렵다고 보고 외부 확산 방지에 초점을 두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은 미사일 방어망이나 선제공격 능력 강화와 같은 억지력 증강을 통해 대처하려 했다.
물론 비핵화 협상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협상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비협력성을 공개 입증함으로써 '처벌을 위한 국제연대' 형성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간주됐다. 비핵화는 정권 붕괴나 그것이 임박한 상황에서 북한의 백기투항으로만 가능하다고 봤다. 따라서 양자회담보다는 다자회담(탈출구 봉쇄)을, 동시행동에 따른 점진적 비핵화보다는 '선(先) 핵포기, 후(後) 보상'의 일방적 비핵화를 선호했다(비협력성 입증). 그 결과 부시 행정부 1기 동안 한 차례의 3자회담과 세 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도출하지 못했다.
2005년 들어 북한과 미국은 정책 전환을 시도한다. 2005년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한다. 그러고선 핵무기를 포기하게 하려면 미국의 대남 '핵우산'도 함께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 프로그램은 북-미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 등과 교환할 수 있지만, '이미 만든 핵무기'는 수교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만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비핵화 프로세스를 비핵화 프로세스와 핵군축 프로세스로 나누어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시 행정부 2기를 맞아 네오콘에 억눌려 있던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분출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으로 대표되는 이들 역시 대북 강경론자들이고 반확산 정책 지지자들이지만, 반확산에만 매달려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방치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반확산 정책과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협상이 다시 시도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 병행돼야 한다고 보았다. 2005년 9월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은 미국 정책 전환의 결과물이다.

2013년 북한 3차 핵실험

공동성명은 한반도 비핵화 관련 세 번째 합의이자 '미국이 산 두 번째 말'이다. 북한이 핵무기와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 등 6자회담 당사국은 소극적 안전보장, 북-미·북-일 수교, 평화체제 수립,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약속이다. 제네바 합의와 달리 공동성명에는 합의 이행 로드맵이 없다. 로드맵에 대한 합의는 2007년에 가서야,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9·19 프로세스'의 1단계에 대한 합의가 '2·13 합의'(2007년 2월)다. 북한이 3개 플루토늄 핵시설을 폐쇄·봉인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5만t을 제공하고 관계 개선 논의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1단계는 2007년 8월 완료됐다. 2단계에 대한 합의는 '10·3 합의'(2007년 10월)다. 북한이 3개 핵시설을 불능화하고(핵심 부품 제거 후 북한 내 특별관리)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는 대가로 미국 등 관련국은 중유 95만t을 제공하고 테러지원국 지정 및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해제하며, 평화체제 협상틀을 가동한다는 내용이다. 2단계는 80%가량 진행된 상황에서 핵사찰 준비 협상이 최종 결렬되면서 중단됐고(2008년 12월), 이후 북한은 불능화한 핵시설을 복원했다. 따라서 현재 공동성명 자체는 살아 있지만, 로드맵에 대한 합의들은 파기된 상황이다.
그 이후 단계는 합의된 바 없다. 핵심 쟁점은 핵무기 폐기 시점과 경수로 건설 시점이다. 북한은 북-미·북-일 수교, 평화협정, 경수로와 핵 프로그램 폐기를 맞바꾼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핵무기 폐기도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핵무기는 수교 및 평화협정 체결 이후 핵우산 폐기와 연계해 폐기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미국은 비핵화 완료 이후 경수로 건설을 시작한다는 입장인 반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해체 완료와 함께 경수로가 완공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향후 9·19 프로세스가 재가동되더라도 합의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종말을 고한 비핵화 프로세스

북한은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연이어 6월에는 2차 핵실험을 실시한다. 미국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협상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는 "같은 말을 세 번 사지 않겠다"며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기조로 대응했다. 북한이 먼저 비핵화에서 성의를 보이기 전에는 도발이나 유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략적 인내는 아시아 재균형 시대의 대북 반확산 전략이다. 국제 공조를 통해 북핵의 외부 확산을 막는 한편, 북한의 핵위협을 명분으로 동아시아 미사일 방어망과 군사동맹을 강화해 중국 견제에 활용하려는 구상이다. 따라서 북한의 위기 조성 행위는 부시 행정부 1기 때와 마찬가지로 반향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북한은 한층 강화된 도발로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2010년 말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하고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 영토에 포격을 감행한 것이다. 미국은 상황 관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2011년 여름부터 북-미 협상을 재개한다. 그러나 전략적 인내 기조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관심은 문제 해결이라기보다는 오바마 재선 때까지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는 것, 특히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을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두 차례(2012년 4월과 8월)나 특사를 북한에 보냈다. '재선 때까지 도발을 자제하면 재선 이후 협상을 재개한다'는 언질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오바마 재선 때까지 김정일 유훈 집행사업(위성 발사)까지 미뤘다. 그러나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예상을 깨고 채찍을 휘둘렀다. 위성 발사(2012년 12월)에 대해 의장 성명을 예상했으나 제재 결의안(2013년 1월)이 채택된 것이다. 중국도 동참했다. 북한은 미국이 현 상황을 즐기고 있고, 중국도 같이 놀아나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제재 결의안 채택 직후 북한은 핵정책 전면 전환을 실행에 옮긴다. 외무성(1월 23일)은 김일성의 유훈인 '조선반도 비핵화 노선'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국방위(1월 24일)와 조선평화통일위원회(1월 23일)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9·19 공동성명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3차 핵실험(2월 12일)을 감행했다. 비핵화 프로세스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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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수호 서울대 정치학 박사. 민주평통 상임위원 역임.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 수석연구원. 저서로 (북미대립) (계획과 시장의 공존) 등이 있다. 핵문제와 북한 정치경제, 남북관계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2013년 2월 10일 일요일

‘이후’가 될 수 없는 일본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02-08일자 제53호 기사 '‘이후’가 될 수 없는 일본'을 퍼왔습니다.
- 3·11 사태 발생 2년

<골페 핵발전소 #3, #1029>, 2006-드니 올리비에

'3·11'(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뒤이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칭)은 약 2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후쿠시마현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켜 십수만 명을 피난민으로 내몬 대재난이었다. 지진과 쓰나미(해일)는 천재(天災)이지만 원전사고는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그때부터 '포스트 3·11'(3·11 이후)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런 대사건을 경험한 뒤에는 사회 구성원 다수의 문명관이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재검토될 수밖에 없다. 사회 시스템상의 문제점이 철저히 까발리고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질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발상과 행동양식이 무비판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재생이 아니라 갱생,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의식이 널리 공유된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3·11은 '문명론'적 충격이었다. 지진과 쓰나미라는 대자연의 경이 앞에 더욱 겸허해지고, 이윤 추구나 대량 소비를 무조건 긍정하는 문명의 존재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일본 사회의 가치관과 개인 삶의 방식이 자연과의 투쟁보다는 공존, 소비보다는 분수에 맞은 질박한 생활양식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했다.
또한 '원자력 마피아'로 대표되는 정(政)·관(官)·재(財)·학(學), 그리고 미디어(언론)까지 포함한 일본 사회 도처에 편재하는 유착과 상호 의존, 무책임 구조로 이른바 '일본형 시스템'과 결연하게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과제를 던졌다. 그러나 사고 뒤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원전사고의 책임을 지지 않는 상태가 보여주듯 일본형 시스템과의 결별이라는 과제는 전혀 실현되지 못했다.

퇴행하는 일본, 일본인

3·11 이후의 갱생을 실현하려면 지금까지의 정치 구조를 바꿔야만 했다. 여론조사에서는 원전 반대가 절반을 넘었고, 총리 관저 앞 시위에 무당파 시민 수만 명이 집결하는 등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움직임도 나타났으나,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치세력은 없었다. 그런 소리는 '제3세력'을 자칭하는 포퓰리스트 세력에 흡수되고 이용당했다. 그 결과 원전 유지와 재가동을 공언하는 우파 세력의 대두라는 최악의 형태로 귀착됐다.
저간에 유포된 언설 대부분은 도저히 3·11이라는 질문의 무게에 걸맞은 것이라 할 수 없다. 이 사건을 더 넓은 시야로 좀더 긴 역사적 맥락에서 상상하는 힘이 전반적으로 위축돼 있다. 3·11 때문에 위축된 게 아니라 오히려 대다수가 현실을 외면하고 예전 그대로의 위축된 상태에 안주한다는 것이다.
3·11 발생 뒤 약 2년. 일본 사회는 이 경험에서 배워 갱생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3·11 이전으로, 나아가 '그 이전'(1945년 이전)으로 회귀하는 쪽으로 급속히 전락하고 있다. 대재난을 거쳐 역사가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넘길 수 없는 페이지가 또다시 펼쳐지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16일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당이 역사적인 대패를 하고 3년 전 퇴장한 자민·공명 연립정권이 부활했다. 민주당은 소비세 증세라는 마이너스 유산만 남기고 '정권 교체'에 기대를 건 국민을 배반한 채 무참하게 자멸했다. 제3세력을 자칭하는 우파 정당이 약진하고, 리버럴 세력과 진보 세력은 크게 퇴조했다. 이른바 제3세력은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경향을 지닌 우파 세력이며, 구보수 세력과 기득권 배분을 다투고 있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구세력과 야합할 것이다. 탈원전을 부르짖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그 간판을 간단하게 내리고, 낡은 행태의 전형인 우파 정치가 이시하라 신타로와 손잡고 '일본유신회'를 결성한 것이 그걸 말해준다. 하지만 일본 국민 상당수가 현실적 선택지가 없는 가운데 이런 움직임에 어떤 새로운 걸 기대하면서 현혹당하고 있다.
지난 1월 28일 (아사히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방위비 11년 만의 증액'이었다. 아베 신조 정권의 2013년 예산안에서는 방위비를 전년보다 400억 엔 증액할 것이라고 한다. 반면 생활보호비는 2013년부터 3년에 걸쳐 670억 엔 줄인다고 한다. 게다가 소비재 증세는 이미 정해진 대로 추진된다. 약자를 버리는 한편 군사력을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에 이번 정권 교체의 의미가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탄생 직후 아베 정권은 '경제 재생'을 위한 2% 인플레 목표를 설정하고 적자 국채를 발행해 경기 호황감을 연출하려 한다. 그 때문에 주가 상승과 엔화 약세가 진행돼 '아베 버블'로 들뜬 분위기가 사회를 뒤덮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비세를 올릴 수 있는 환경 만들기를 위한, 또 올여름의 참의원 선거 승리를 위한 위험한 도박이며, 조만간 그 청구서가 국민 부담으로 날아올 것이다. 물가와 세금은 오르지만 임금은 오르지 않고, 사회보장비는 삭감된다. 그런 길을 국민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아베 정권이 참의원 선거 승리를 겨냥하면서 '안전 운전'을 계속하는 진짜 이유는 '헌법 개정'이 가능한 3분의 2 의석 이상을 중·참 양원에서 획득하기 위해서다. 아사히신문사와 도쿄대 대학원 다니구치연구실이 공동으로 실시한 당선자와 유권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당선 의원의 89%가 헌법 개정에 '찬성' 또는 '굳이 택한다면 찬성'한다고 대답했다([아사히신문] 2013년 1월 28일). 즉 현재 일본에서 '개헌파'는 이미 소수파가 아니라 당파를 초월한 다수파라는 것이다. 패배한 민주당 내부에서도 개헌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헌법 개정이라지만 핵심은 물론 제9조 평화조항(교전권 포기)을 삭제 또는 수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실현되려면 중·참 양원 의원의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발의해서 국민투표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번 조사에서는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유권자가 딱 50%였다. 국회의원에 비하면 일반 유권자 쪽이 더 헌법 개정에 신중하다는 말인데, 그래도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빠듯하게 헌법 개정이 실현될 수 있는 수준이다. 1945년의 패전 결과 일본에 도입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는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벼랑에 선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

앞서 얘기한 공동 조사를 보면, 당선자의 50% 가까이가 원전 재가동에 찬성했다(유권자의 찬성률은 30% 정도). 이 문제에서도 의원들의 의식이 일반 유권자들 이상으로 원전 유지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베 정권은 원전 문제에서도 민주당 정권이 내걸은 '원전 제로' 지향 방침을 백지화하고 원전 재가동과 유지를 공공연히 꾀하고 있다. 그것이 일본의 경제 재생에 필요불가결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들의 본심(혼네)은 그보다 오히려 군사적 동기에 있다는 건 명백하다.
원전은 모습을 바꾼 핵무기다. 그것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게 최근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에 속속들이 드러났다. 안전성이 전혀 없고 비용도 더 많이 드는데 원전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일본을 '일등국'으로 존속시키는 데 필요한 잠재적 군사력이기 때문이다. 사용 후 핵연료는 단순한 산업 폐기물이 아니라 핵무기 원재료이기 때문에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여·야 정치가들이나 일본유신회 공동대표인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극우 정치가들도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다.
거기서 다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전후(戰後·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평화주의가 진정한 평화주의인가, 평화주의와 전전(戰前) 사이에 있는 것은 단절인가 계속인가 하는 문제다. 잠재적 군사력으로서 핵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원전 유지의 이유라면, 이것은 잠재적 전쟁이라는 말이다. 일본은 '평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잠재적 전쟁을 해온 국가이며, 이젠 그 표면적 간판마저 벗어던지고 전쟁 상태를 현재화하려는 단계를 맞는 것이다.
탈원전이라는 과제를 왜 동아시아 차원으로 문제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유는 일본, 한(조선)반도, 중국이 포진한 극동아시아라는 조밀한 지역이 세계 유수의 원전 밀집 지역이기 때문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이 지역 어딘가에서 다시 3·11 같은 사고가 일어난다면 전 지역이 심대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로 전 지구와 인근 지역이 입은 피해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돼 있고, 사죄의 뜻도 거의 표명하지 않았다. 정부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 국민이나 지식인에게도 가해의 책임 의식이 없다. 국가 논리를 당연시하고, 일본의 복구와 부흥을 말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전쟁 책임이나 식민지 지배 책임에 관한 의식 구조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동아시아란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단지 지리적 개념으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자나 유교 등의 문화적 동일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완전히 핵심을 비켜간 것이다. 동아시아란 근대에 일본이 침략한 지역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침략 전쟁이라는 가까운 과거의 각인이 깊게 박힌 지역인 것이다. 일본이 동아시아 멤버로 들어오려면 가해의 역사를 인정하고 주변 민족과 화해해야 한다.

'동아시아' 개념의 본질

현상이 잠재적 전쟁 상태인 이상 탈원전운동은 본질적으로 반전평화운동의 일환으로 실행돼야 한다. 원전에 반대하는 일본인이 중국이나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국가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응용 문제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동아시아 차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 답은 명확하다. 일본의 국가주의를 고무하면서 동아시아에서 탈원전을 실현할 수는 없다. 탈원전은 국가주의와 결코 공존할 수 없다.
하지만 3·11 이후 2년간 일본 사회에서는 오히려 국가주의적·배외주의적 주장이 급속히 대두하고 있다. 독도 문제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 북조선 로켓 발사 문제 등이 일본국민의 위기감과 국가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과도하게 강조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전통적 보수파의 흐름을 조장하는 정치가이지만 앞선 선배들과 현저한 차이는 '네트우익'(인터넷상에서 노골적으로 차별적·배외주의적 주장을 되풀이하는 우익 세력의 약칭)과 적극적으로 손잡으려는 유치함과 경박성에 있다. 그만큼 종래 정치가들보다 위험도가 높다. 지난해 말 총선 때 아베는 네트우익의 성지인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마지막 유세를 벌였다. 그의 선거 유세 차량을 많은 젊은이들이 에워싸고 히노마루(일장기) 깃발을 휘두르며 "일본 만세!" "조센징은 나가라!" 등을 연호했다. 차마 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잡한 모습은 공공방송에 보도되지 않았고, 유튜브(무료 동영상 공유 사이트)로만 떴다. 일본은 지금 이런 극우정치가들이 총리 자리를 차지하는 나라가 됐다. 이에 눈살을 찌푸리는 일본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흐름을 저지하기 위해 뭔가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1945년 패전은 일본이 갱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라는 극적인 사건으로 패전을 맞이하면서, 일본 근대 구도에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라는 구분이 성립하는 듯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이제부터는 전후다. 민주주의 시대다"라며 페이지를 넘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페이지를 실제로는 넘길 수 없었다. 그때까지 어떤 페이지였는지, 그 페이지가 어떻게 넘겨졌는지, 아니 넘길 수 없었는지 깊은 질문과 대면하지 못했다. 최대의 문제가 천황제였다. 히로시마 원폭이 떨어진 뒤 불타버린 폐허를 쇼와 '천황'이 행차했을 때 피해자들은 이 전쟁 최고책임자에게 등을 돌린 게 아니라 오히려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자신의 손으로 민주적 새 헌법을 기초할 수 없었던 일본 정부에 점령군이 초안을 제시했다. 물론 그 초안은 전후 미국의 패권을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주권재민, 전쟁포기, 남녀평등, 삼권분립 등 민주주의적 기본 이념이 명기됐다. 다만 조선 사람 등 구식민지 출신자들의 인권은 주도면밀하게 배제됐다. 헌법 제9조(전쟁포기 조항)는 침략 전쟁을 벌인 가해국 일본이 세계에 제시한 국제 공약이다. 헌법 제9조의 변경은 국제 공약을 파기하는 행위이며, 필연적으로 중국·한국·북조선 등 아시아 피해 국가 간의 심각한 대립으로 가는 길이다.
자민당 등 일본 보수파는 전후 일관되게 이 헌법이 전승국에 의해 '강요당한 헌법'이라며 자주헌법 제정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현재까지 구체화되지 않았다. 구체화를 억제해온 요인 가운데 하나는 일본 국민 다수의 염전(厭戰) 기분과 평화 지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일본 재무장(특히 핵무장)을 경계하는 미국의 통제,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피해 국가들의 반발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의 보수 정당은 정치적 리얼리스트(현실주의자)여서 속내는 어떠했든 그들의 주장을 구체화하는 데 신중했다. 그러나 3·11 이후는 이 구도가 바뀌어 억제 장치가 허물어지고 있다.
3년6개월 전의 정권 교체로 야당이 된 자민당은 야당의 홀가분함(즉, 무책임성) 덕에 여당 시절 이상으로 솔직하게 본심을 드러내게 됐다. 3·11이 일어난 지 약 1년 뒤인 지난해 4월, 그때는 아직 야당이던 자민당은 헌법 개정 초안을 책정했다.

올여름 참의원 선거가 분수령

헌법 제9조 2항을 삭제하고 '국방군'을 보유한다. 현재까지의 일본 정부가 헌법 해석상 금지해온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한다(즉, 미국에 대한 공격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반격한다). 전전의 헌법같이 천황을 '원수'로 삼는다. '기본적 인권' 대신에 국민은 '공익 및 공공질서에 반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 책무를 명기한다. 그 외 모든 내용을 열거할 수 없으나, 현 헌법과 가치관을 완전히 달리하는 내용으로 종래 자민당의 주장조차 훨씬 능가하는 국가주의적이고 복고적이었다.
이 초안대로 구체화될 날이 오리라 자민당 의원 중 몇 명이 상상했을까? 초안 기초자들조차 미처 예상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재야의 입장인 네트우익적 무책임성에 기인한 극단적 주장을 늘어놓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일본 국민 다수는 지금도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주장을 내세운 정당이 압도적 의석수를 지닌 여당이 된 것이다. 일본유신회 등 극우 세력은 '오른쪽'에서 압박을 가해 개헌을 밀어붙이려 한다. 올여름의 참의원 선거를 거쳐 그들이 중·참 양원에서 3분의 2 이상 의석을 차지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들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평화주의를 내팽개칠 것이고, 동아시아 평화는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다. 일본은 패전 뒤 일관되게 미-일 안보 체제 아래 잠재적 전쟁을 벌여왔다. 지금 그것이 현재화할 위기를 맞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과 독일의 과거사 극복에서의 커다란 차이점을 어느 일본인 교수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쨌든, 일본은 한 번밖에 지지 않았으니까요."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는 거대한 희생(타자에게 가한 피해는 그 몇 배나 된다)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독일은 충분하지 않지만 지금 정도로 과거를 극복하려는 자세를 보이게 됐다. 하지만 한 번밖에 패전하지 않은 일본은 아직 절박하지 않다는 취지였다.
이런 견해가 옳은지는 지금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은 향후 노력에 달렸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견해가 옳을 경우 당사자 일본인들은 물론 주변 민족들, 더욱이 재일조선인 같은 일본의 '내부 타자'는 상상을 절하는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바란다.
이 위기를 피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까. 물론 일본 국민의 각성에 기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점에서 낙관적이지 못하다. 일본 국민 다수는 1945년 패전의 경험조차 '기적의 부흥'이라는 자기애(自己愛) 이야기로 만들어버리고 타자에게 가한 피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기회를 몇 번이나 놓쳐버렸다. 겨우 2년밖에 지나지 않은 3·11의 경험조차 지금은 경시하고 망각하려 한다. 아베 새 총리는 얼마 전 취임 뒤 첫 소신 표명 연설에서 '원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 때문에 큰 비판을 받은 적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이번에야말로 스스로 각성할 것이라 기대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정도는 '심각한 사고'(Severe Accident)로 분류된다. 이 사고는 글자 그대로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어떤 것도 '이후'(포스트)가 될 수 없었던 일본의 근대, 바로 그 때문에라도 이번에는 어떻게든 이후가 돼야겠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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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서경식 재일 작가·저술가. 일본 도쿄경제대 교수. 1951년 교토에서 태어나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한겨레)에서 '서경식의 일본통신'을 연재 중이다.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눈) (나의 서양음악 순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평화·인권운동가 서승, 서준식의 동생이다.

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문재인 “참여정부 잘못으로 정권 내줘 민주주의 퇴행”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1-26일자 기사 '문재인 “참여정부 잘못으로 정권 내줘 민주주의 퇴행”'을 퍼왔습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영등포 민주당 당사에서 출마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5·18묘역 방문 ‘실정 사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가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정권교체를 바라면서도 참여정부와 ‘친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지니고 있는 유권자들을 고려한 발언으로 보인다.문 후보는 26일 광주 5·18 민주묘역을 참배한 자리에서 “참여정부가 더 잘해서 또다른 민주정부로 정권 이어지게 했어야 하는데 참여정부가 대단히 부족한 점이 많아서 이명박 정부에게 정권을 넘겨줬다”고 밝혔다. 문 후보는 “그 결과 우리 역사를 퇴행시키고, 5·18 광주가 이뤄낸 민주주의까지도 크게 퇴보시킨 뼈아픈 결과에 대해서 저희가 크게 성찰하고 있고, 뼈저린 교훈으로 삼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이어 문 후보는 “참여정부가 광주·호남 지역의 절대적 지지에 힘입어 출범하고서도 광주·호남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해서 많은 실망 드렸다. 그 결과 오히려 호남이 홀대 당했다는 그런 아픔을 또 드리고 또 그 홀대와 소외가 이 정부 들어 더 심해지게 만든 그 책임에 대해서도 뼈저린 성찰과 교훈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다시는 지역홀대나 지역차별이나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한 인사 등의 말은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그의 약속이었다.문 후보는 10월에도 “참여정부는 재벌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재벌공화국의 폐해가 심화됐다. 시장만능주의가 시대적 조류였던 내부적 환경만을 탓할 수는 없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여러차례 사과한 바 있다. 문 후보는 당시 “우리가 참여정부를 제대로 복기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복기를 해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후보들에 비해 나은 점이 있다”고 말했다. 문 후보는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쉬운 것이 많다. 바둑에서 가장 빨리 (실력을) 기르는 좋은 방법이 복기를 해보는 것이다. 이때 이 대목에서 이 점이 실책이다, 다르게 뒀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 대목이 패착이다, 그렇게 복기를 한번 해보고 나면 바둑 실력이 는다”고 설명했다.

광주/송채경화 기자 kksong@hani.co.kr

2012년 7월 15일 일요일

확실한 퇴행 ‘이명박근혜’


이글은 한겨레21 2012-07-16일자 제919호 기사 '확실한 퇴행 ‘이명박근혜’ '를 퍼왔습니다.
[표지이야기] 대통령 되어선 안 되는 이유추구하는 것은 선진적인 복지국가가 아니라 후진적인 ‘박정희 시스템’

홍성태 상지대 교수

또다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5년 전인 2007년 초부터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신드롬’이라고 부를 정도로 박 전 위원장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 경선은 이명박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쪽은 2008년 4월 총선에서 박 전 위원장에 대한 ‘공천학살’을 감행하며 권력을 독점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쪽은 박 전 위원장을 축출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이명박 대통령 쪽의 문제가 커지며 박 전 위원장의 힘은 계속 커졌다. 마침내 2012년 1월 박 전 위원장은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을 맡아 한나라당을 장악하고 이명박 대통령 쪽과 선을 긋기 위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으며, 2012년 4월 총선에서 이명박 대통령 쪽에 대한 공천학살을 감행하고 새누리당을 제1당으로 만들어 새누리당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 예비후보가 되었다.

상당수 무당파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확고

새누리당 내에서 박 전 위원장의 독주에 대한 비판과 견제의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박 전 위원장이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될 것은 분명하다. 김문수·정몽준·이재오 등을 다 합해도 지지도 면에서 박 전 위원장과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박 전 위원장에 대한 지지는 언제나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불변의 30% 유권자들을 넘어 상당수 무당파 유권자들 안에서도 확고해 보인다. 박 전 위원장은 전체 보수세력은 물론 상당수 중도세력의 통합 후보로서 확고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박 전 위원장에 대해 개혁진보 쪽에서는 강력한 반대의 뜻을 보이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반민주 독재화와 총체적 후진화를 강행해 이 나라를 ‘5공’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다면, 박근혜 정권은 그것을 더욱 악화시켜 이 나라를 ‘3공’으로 되돌려놓을 것이라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박 전 위원장은 흔히 ‘공주’로 불린다. 이것은 무소불위의 독재자였던 ‘박정희의 딸’이라는 데서 비롯된 부정적인 호칭이다. 그런데 사실 서로 깊이 연관돼 있지만 확실히 구분되는 두 가지 ‘공주’ 호칭이 박 전 위원장에게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유신공주’이고, 다른 하나는 ‘수첩공주’다. 전자는 박정희의 독재와 박 전 위원장의 연관을 나타내는 것이고, 후자는 현재의 독자적 정치인 박 전 위원장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전자를 강조한 비판에 대해 보수세력은 ‘연좌제’라는 식의 반박을 한다. 그러나 박 전 위원장은 어머니 육영수의 암살(1974년 8월15일) 때부터 아버지 박정희의 암살(1979년 10월26일) 때까지 사실상 ‘영부인’ 역할을 하며 ‘유신독재’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유신독재의 반민주성에 비춰본다면, 박 전 위원장은 정치를 하지 않는 게 옳다. 그런데 수첩공주의 문제도 여기에 뒤지지 않는다.

 
»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4월7일 국회에서 지역구 불출마 선언을 한 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수첩공주의 문제, 즉 독자적 정치인 박 전 위원장의 문제는 크게 성향과 정책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성향은 지도자의 자질과 직결된 주관적 특징으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박 전 위원장의 성향은 이미 많이 지적되었듯 무엇보다 반민주적 오만과 독선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런 성향은 기자들의 당연한 질문에 대해 “지금 저하고 싸우시는 거예요?” “한국말 모르세요?” “병 걸리셨어요?” 등의 막말을 던진 것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때문에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박 전 위원장에게 ‘발끈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 보여주었듯 오만과 독선에 빠진 자는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포용과 소통은 지도자의 근본적인 자질이며, 21세기 네트워크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이 점에서 박 전 위원장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정책 면에서 드러난 박 전 위원장의 문제는 더욱 명확하다. 박 전 위원장이 가장 강력히 나섰던 것은 사학법 개정의 저지였다. 한국의 사학은 공적 기관이지만 사적 재산처럼 다뤄져 온갖 비리와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어렵게 사학법을 개정했으나 박 전 위원장이 최선을 다해 사학법 개정을 무산시켜버렸다. 박 전 위원장은 반값 등록금, 의무교육 확대 등과 양립할 수 없다. 박 전 위원장은 경제와 고용 면에서도 이명박 대통령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명박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친재벌과 반노동의 노선에 있고, 망국적인 4대강 죽이기에도 찬성했다. 박 전 위원장이 복지를 높이 외치는 것은 언뜻 다행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복지국가의 요구에 대한 현혹적인 답변일 뿐이다. 친재벌·반노동·반생태에 입각해 복지의 강화를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박 전 위원장은 아버지 박정희의 친일과 독재를 극구 옹호한다. 가장 두드러진 성향의 문제인 오만과 독선은 ‘유신공주’에서 비롯된 ‘수첩공주’의 문제다. 정책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박근혜식 복지는 현혹적인 답변일 뿐

사실 ‘수첩공주’ 박 전 위원장의 문제는 ‘유신공주’ 박 전 위원장의 문제와 뗄 수 없이 연결돼 있다. 박 전 위원장은 아버지 박정희의 친일과 독재를 극구 옹호한다. 그러므로 박 전 위원장은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 두드러진 성향의 문제인 오만과 독선은 유신공주에서 비롯된 수첩공주의 문제다. 정책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박정희는 단순히 폭력적 억압만 행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이른바 ‘박정희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것은 노동과 자연에 대한 이중의 착취에 근거한 사회체계로서, 그 구조적 핵심은 착취적인 재벌체제와 파괴적인 토건국가로 요약할 수 있다. 박 전 위원장은 선진적인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후진적인 ‘박정희 시스템’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 나라를 확실히 더욱더 퇴행시켜 정말 ‘이명박근혜’를 이루게 될 것이다.
과거와의 연계에서나 현재의 정책에서나 박 전 위원장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4월 총선에서 비자격자를 대거 공천한 것, 공개토론과 국민경선을 극력 거부하는 것, 매국적인 한-일 군사협정 비밀 체결 시도에 대해 뻔한 말로 얼버무린 것 등에서 박 전 위원장의 오만과 독선, 무능이 잘 드러났다. 이런 정치인을 열렬히 지지하는 유권자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박 전 위원장이 진정한 선진화를 추진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박 전 위원장이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국민에게 공표하고 약속해야 할 것이다. 자신도 주역이었던 악독한 유신독재에 대한 반성, 이 땅의 불의한 현실을 대표하는 전두환의 처벌, 후진적인 재벌체제와 토건국가의 해소, 노동과 자연을 존중하는 복지국가의 추구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