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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0일 수요일

국정원, 대선전 박정희 정권 홍보 영상 제작 배포 의혹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3-03-19일자 기사 '국정원, 대선전 박정희 정권 홍보 영상 제작 배포 의혹'을 퍼왔습니다.
지난해 8월부터 누리꾼들 국정원 교육에서 영상 봤다 증언… 현재도 국정원 이벤트 ID로 유튜브 유통

국내정치 개입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이 대통령 선거 전에 박정희 정권을 홍보하고 유신비판 세력을 비난하는 영상물을 제작해 배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8월부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안보 교육에서 박정희 정권을 홍보하는 영상인 '위대한 유산 대한민국'(유튜브 영상 보기 http://youtu.be/uiq41VsaoUU)을 방영했다는 다수의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또한 해당 영상은 유튜브 검색 결과,  아이디  'nis6event'가 올렸는데 'www.nis6event.co.kr'은 국가정보원 안보홍보 이벤트라는 사이트 주소인 것으로 확인돼 해당 영상물의 제작 주체가 국정원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해당 영상물은 유튜브에서 9개월전에 게시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유튜브 ID 'nis6event'는 현재도 국정원 홍보 사이트 (www.nis6event.co.kr')에서 홍보중인 '애국가 5절 개사하여 부르기 참가자 영상'을 올려놓기도 했다

국정원이 상영한 '위대한 유산 대한민국' 영상 화면 일부. 박정희 정부의 공을 일방적으로 홍보하는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당 영상은 지난해 10월 국가보훈처에서 배포해 대선 전 국가기관이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려는 증거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당시 국가보훈처 쪽은 동영상 자료 제공자에 대해 입을 다물었는데, 국정원 교육에서 해당 영상을 본 피교육자는 지난해 8월에 보았다고 증언해 국정원이 직접 제작 배포했다는 의혹을 더욱 짙게해주고 있다. 
8분 40초짜리 분량의 해당 영상의 주요 내용은 과거 한일합방부터 광복의 당시 장면에 이어 현재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보여보고 있는데 문제는 그 공(功)을 전적으로 30여년전 박정희 정부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영상에서 사회자는 "불과 50여년전 모두가 외면해버린 힘없고 가난한 나라였다. 낯선 땅에서 두려움과 싸워면서 외화를 보내온 사람들의 땀과 눈물...(중략)...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 어린 작은 손길도 이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고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영상을 통해 서독의 파견 석탄 노동자, 월남전 파병 모습, 중동진출 모습, 어린 나이의 공장 노동자, 경부 고속도로 개통 모습 등을 연달아 보여줬다.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을 ‘기적’이라고 지칭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적극 홍보하는 식이다.
이어 영상에서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과 미래에 대한 혜안이 있었기에 그리고 진정한 애국의 힘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박정희 정권의 공을 부각시켰다.
반면 "친미 친일 사대주의 정권이라며 대한민국 건국과 근대화 주역을 펨훼하는 이들, 세습독재 국가 북한에 대해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이들, 그것은 사회 분열과 혼란을 야기하고 자유 대한민국 파괴를 기도하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독재라고 비판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모두가 국가 파괴 세력이라는 주장이다.

지난해 10월 당시에도 영상을 배포한 국가보훈처에 대해 대선을 앞두고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이 제기됐음에도 국정원에서는 계속 영상을 활용하고 있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당시 영상을 공개하면서 국가보훈처에 제작 경위를 캐물었던 정호준 민주통합당 의원은 “지난해 국회 정무위에서 국가보훈처장이 제작 주체를 밝힐 수 없다고 했지만 자료 화면상 수사기관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자료라고 생각한다”면서 “국정원이 문제가 된 국가보훈처의 홍보자료를 활용하고 있는 것은 선거를 앞두고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해 국민들의 건전한 비판을 종북으로 매도하고 여론조작을 조직적으로 시도했다는 최근의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지적했다.
정 의원은 또한 "지난해 국회 운영위에서 하금열 대통령 비서실장한테도 관련 영상을 확인하라고 했고, 비서실장이 활용을 하지 못하게 약속했는데 지금까지도 국정원이 활용하는 것을 보면 (정치적)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미디어오늘은 국정원측에 해당 의혹에 대한 답변을 요청했으나 국정원측은 회신하지 않았다.

이재진 기자 | jinpress@mediatoday.co.kr  

2012년 10월 29일 월요일

부일장학회 소유 10만여평 땅도 박정희 정권서 강제헌납 받았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0-28일자 기사 '부일장학회 소유 10만여평 땅도  박정희 정권서 강제헌납 받았다'를 퍼왔습니다.

부산고법, 지난달 ‘강압 인정’ 판결
시효소멸 등 이유로 반환청구는 기각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가 소유한 (부산일보) 등 언론 3사의 주식에 이어 10만여평의 땅도 강압적으로 헌납받았다는 판결이 나온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부산고법 민사5부(재판장 한재봉)는 지난달 4일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고 김지태씨 유족이 “국가에 강제로 빼앗긴 땅 10만여평을 돌려달라”며 대한민국과 부산일보사를 상대로 제기한 ‘진정 명의 회복을 위한 소유권 이전등기 등’ 청구소송에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헌납이 이뤄졌다”고 판결했다. 앞서 올해 2월 서울중앙지법은 김지태씨 유족이 정수장학회를 상대로 낸 주식반환 청구소송에서 “김씨가 국가의 강압에 의해 5·16장학회에 주식을 증여하겠다고 의사표시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부산고법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씨가 1962년 10만여평의 땅과 부산일보 등 언론 3사의 주식을 대한민국에 증여할 때 날인한 포기각서와 기부승낙서 등 관계서류의 내용이 타인에 의해 미리 작성된 사정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군사정부가 강제적인 분위기에서 김씨로부터 땅을 기부받았다는 것이다.하지만 재판부는 원심대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땅 기부가 이뤄졌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김씨가 “의사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과 땅을 돌려받기 위한 시효(강제헌납일로부터 10년)가 지났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28일 이번 판결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지난번에) 다 말씀드렸다. 종합적으로도 말씀드렸고”라며 언급을 피했다. 이정현 공보단장은 “법원 판결은 존중되어야 하고, 존중한다”며 “민주통합당은 더는 이를 정치에 이용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진성준 선대위 대변인은 “정수장학회에 얽힌 역사적 사실이 법원에 의해서도 분명하게 인정되고 있는 만큼 박 후보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다시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공격했다. 안철수 대선 후보 캠프의 유민영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과거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며 “대한민국이 ‘강박’의 주체로 등장하는 이런 잘못된 과거에 대한 분명한 역사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산/김광수 기자, 성연철 기자 kskim@hani.co.kr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10월 유신’ 안보 내세우더니…박정희 정권, 북에 두차례나 ‘사전 통보’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0-17일자 기사 '‘10월 유신’ 안보 내세우더니…박정희 정권, 북에 두차례나 ‘사전 통보’'를 퍼왔습니다.

박정희

이후락 중정부장-북 인사 접촉 ‘미 비밀문서’ 등 공개
박명림 “겉으론 안보강화…뒤론 장기집권 작업” 비판

유신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명분은 국가안보 강화였다. 40년 전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비상계엄령 선포문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균형 관계에 큰 변화가 일고 있어서 한국의 안보에 위험스러운 영향을 미칠 것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유신독재 시절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했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도 그동안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됐을지도 모른다”(1981년 10월28일 일기)며 같은 인식을 보여왔다. 박 후보는 최근 5·16과 유신 등에 대해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공식 사과했다.

1972년 10월31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비밀문건.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나 “남북대화를 지속적이고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정치 시스템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우리 정부는 생각한다”고 말해 유신정권 출범을 북한에 미리 알려준 사실을 미대사관 쪽이 본국에 보고한 내용.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실제로는 북한 당국에 유신 내용을 두 차례나 사전 통보했다. 이러한 사실은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외교문서 등에서 드러났다. 1972년 10월31일자 미국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비밀문건(2급·secret)에 따르면,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10월12일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나서 “남북대화를 지속적이고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정치 시스템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우리 정부는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이 비밀전문은 “남북조절위원회 남쪽 실무대표인 정홍진이 계엄선포 하루 전인 10월16일 북쪽 실무대표인 김덕현을 판문점에서 만나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통보했다”고 적었다.지난 2009년에 공개된 동독과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에는 이후락이 남북조절위원회 북측대표인 김영주에게 “박 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10월16일)과 “헌법 수정을 통한 대화의 법적 근거를 만들 것”(10월18일)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적혀 있다.미 국무부 문서를 발굴했던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17일 “이 자료들은 박 정권이 겉으로는 공산화 방지, 즉 국가안보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북한과 내통하면서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를 구축해 나간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실제로 남한의 유신체제에 맞춰 북한도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했다. 공교롭게도 유신헌법과 북한의 사회주의헌법(1972년 헌법)은 같은날(12월27일) 제정됐다.

김종철 기자 phillkim@hani.co.kr

2012년 10월 6일 토요일

"박정희 정권이 세계최고 땅값에 50%기여"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10-06일자 기사 '"박정희 정권이 세계최고 땅값에 50%기여"'를 퍼왔습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 "박정희가 토지정의 무너뜨렸다… 불소소득이 근로소득 대비 2.5배"

서울 강남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덕에 아마 세계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지만 강남은 이미 그 전부터 세계 최고의 땅값으로 악명 높은 곳이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강남이 지금과 같은 빌딩숲으로 바뀌고 '헉' 소리 나올 만큼 비싼 땅값의 대명사로 떠오른 게 만든 이는 누구일까.

강남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땅값이 지금과 같은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치솟게 만든 일등공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최근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캠프에 합류한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5일 토지+자유연구소 공개 강연에서 "우리나라 땅값이 세계 최고인데 역대 대통령을 상대로 땅값 상승 기여도를 계산해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이 50.5%로 딱 절반이었다"며 "박정희 정부가 토지 정의를 무너뜨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가 역대 정권의 초기 전국 지가총액과 말기 전국 지가총액을 바탕으로 연평균 지가 상승률을 산출한 결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33.1%로 가장 높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21.6%, 노태우 전 대통령이 17.7%, 전두환 전 대통령이 14.9% 순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치솟은 땅값으로 토지를 소유했던 극소수 부자들이 얻은 이익도 어마어마했다. 박 전 대통령 시절 생산소득 대비 불로소득의 비율은 무려 248.8%다. 땀 흘려 일한 대가로 얻은 소득은 100이라고 봤을 때 땅값 상승으로 얻은 소득이 이보다 2.5배 가량 많았다는 의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96.3%, 전두환 전 대통령이 67.9%, 이승만 전 대통령이 43.2%임을 감안할 때 매우 압도적인 수치인 셈이다. 이 교수는 "당시 대한민국은 불로소득의 천국이고 이런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었느냐"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굉장히 큰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 역대 정권하의 지가 상승(단위: 조, % /자료출처=이정우 교수)

역대 정권의 지가 상승 기여도를 따져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50.5%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4.7%, 노태우 전 대통령이 8.8%, 전두환 전 대통령이 7.5%,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 김대중 전 대통령이 -0.1%, 김영삼 전 대통령이 -0.7% 순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땅값 상승에 65%, 즉 3분의 2 정도의 책임이 있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부동산 광풍의 '원흉'으로 지목됐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여도는 2.3%로 매우 낮았다.
이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했다고 박수 받지만 그 뒷감당은 누가 해야 하느냐"며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무책임한 경제운용이었다. 투기 규제 정책을 엄격하게 세우면서 개발을 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인사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재무부장관이자 부총리를 지낸 남덕우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토지정책을 수립하지 않고 개발정책을 추진한 결과 부동산 투기와 땅값 상승이 언제나 정부를 괴롭혔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토지의 사유권은 인정하되 이용권을 사회화하는 방향으로 토지정책을 확립했어야 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이 교수는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의 요직에 있었던 송정목씨가 (서울 도시계획이야기)란 책에서 '박정희 정권에서 강남 지역의 투기를 조장했고 이를 통해 1년에 3배 이상의 돈을 불리는 등 막대한 이익을 정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가져갔다'는 폭로를 한 적이 있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역대 정권 하의 물가 상승(%, 자료출처=이정우 교수)

역대 정권의 물가상승 기여도 측면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높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44.5%, 이승만 전 대통령이 24.2%로 무려 3분의 2를 차지했다. 이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오랫동안 임기했기 때문에 높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것 같아서 임기의 차이를 고려해서 균등 물가상승 기여도를 계산해봤더니 33.3%였다"며 "이와 비교해도 10%가 더 높기 때문에 물가상승에 분명히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평균 9.1%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내려진 '독재는 잘못했지만 경제성장은 했다'라는 평가를 이 교수가 통계적 수치로 반박한 셈이다.
최근 대선 화두로 경제민주화가 떠올랐지만 토지 문제는 별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참여정부 정책실장 출신인 이 교수는 "토지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토지 정의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며 "이 고통을 누가 벗어나게 할 것인지, 경제 민주화의 중요한 주제임에도 일시적으로 잊혀진 주제"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강연 말미 토지 정의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역사적 인물로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와 조선시대의 조광조를 들며 토지 정의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에둘러 지적했다. 호민관이었던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형제는 토지 소유의 제한과 재분배, 자작농의 창설을 꾀하려다 귀족들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곡물법과 토지법 등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조선 시대의 개혁가 조광조 역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유자광 등 훈구파들에게 집중된 토지 소유에 문제제기하다 개혁정책에 반발한 훈구파의 모략으로 결국 죽임을 당했다.

박정희와 박태준. 자료사진

조수경 기자 | jsk@mediatoday.co.kr  

2012년 8월 16일 목요일

박정희 정권은 왜 독도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8-15일자 기사 '박정희 정권은 왜 독도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를 퍼왔습니다.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칼럼]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군사독재 정권이나 보수정권이 가장 거론을 기피했던 문제는 희한하게도 독도였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면 일쑤 들고나와,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면을 전환시키곤 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이걸 모르고, 정치적 퍼포먼스에 말렸다가 선의의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다.역사적으로 독도를 지킨 건 국가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조선조 울릉도와 독도에서 왜구를 내쫓은 건 민간인 안용복이었다. 해방 후 독도를 지킨 건 예비역 특무상사 홍순칠과 33인의 민간인이었다. 홍씨는 전쟁을 틈타 독도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정부 지원도 없어, 가산을 처분하고 의연금을 모아 기관총·박격포 등을 구입하고 의용대도 모집했다. 수비대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침범을 두 차례나 격퇴하고, 가짜 해안포를 설치해 일본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기지도 발휘했다.문제는 그 열정이었다. 수비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다. 박정희 정권은 부담스러웠다. 홍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씨는 전했다. 학교 조례 때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떠들도록 한 정권이 왜 그러는지 홍 대장은 알 수 없었다.전두환의 신군부에서도 똑같았다.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독도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홈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우노 소스케 의원이 하나의 메모에 사인을 했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에 따라 성안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도밀약이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노 다니엘 저 ) 결국 미해결 상태를 해결로 간주하고, 독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일주일 뒤 1년 넘게 교착됐던 정상회담 예비회담은 재가동됐고, 6월22일 한-일 협정이 체결됐다. 함께 발표된 한-일 어업협정은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했다. 밀약 내용 그대로였다. 공동규제수역 혹은 중간수역 규정은 지금까지 지켜진다. 임기 말에 돌연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일전불사를 외쳤던 김영삼 정부도 독도 인근 해역을 잠정적 조치수역(중간수역)으로 수용했다.밀약도 밀약이지만,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일본 정부와 민간에게서 막대한 정치성 자금을 받아 썼다.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 이외에 1965년까지 5년 동안 6개 민간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일본 나카소네 정부로부터 40억달러의 차관을 받았다. 그러니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홍 대장을 가만두기 힘들었을 것이다.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공세를 높이고 있다. 일왕까지 거론했다. 물론 뒷감당도 못하면서 쏘아대는 말대포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 박종우 선수는 그 피해자였다. 그러니 진정성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 독도밀약의 진상과 파기 여부를 말이다. 그래야 ‘독도 쇼’니 정치 선동이니 하는 소모적 논란을 막고 홍순칠, 박종우 같은 어이없는 희생도 막는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박정희 정권은 왜 독도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8-15일자 기사 '박정희 정권은 왜 독도지킴이의 손을 부러뜨렸나'를 퍼왔습니다.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칼럼] 독도 밀약, 이제는 말해야 한다

군사독재 정권이나 보수정권이 가장 거론을 기피했던 문제는 희한하게도 독도였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면 일쑤 들고나와,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면을 전환시키곤 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이걸 모르고, 정치적 퍼포먼스에 말렸다가 선의의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다.역사적으로 독도를 지킨 건 국가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조선조 울릉도와 독도에서 왜구를 내쫓은 건 민간인 안용복이었다. 해방 후 독도를 지킨 건 예비역 특무상사 홍순칠과 33인의 민간인이었다. 홍씨는 전쟁을 틈타 독도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정부 지원도 없어, 가산을 처분하고 의연금을 모아 기관총·박격포 등을 구입하고 의용대도 모집했다. 수비대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침범을 두 차례나 격퇴하고, 가짜 해안포를 설치해 일본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기지도 발휘했다.문제는 그 열정이었다. 수비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다. 박정희 정권은 부담스러웠다. 홍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씨는 전했다. 학교 조례 때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떠들도록 한 정권이 왜 그러는지 홍 대장은 알 수 없었다.전두환의 신군부에서도 똑같았다.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독도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홈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우노 소스케 의원이 하나의 메모에 사인을 했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에 따라 성안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도밀약이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노 다니엘 저 ) 결국 미해결 상태를 해결로 간주하고, 독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일주일 뒤 1년 넘게 교착됐던 정상회담 예비회담은 재가동됐고, 6월22일 한-일 협정이 체결됐다. 함께 발표된 한-일 어업협정은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했다. 밀약 내용 그대로였다. 공동규제수역 혹은 중간수역 규정은 지금까지 지켜진다. 임기 말에 돌연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일전불사를 외쳤던 김영삼 정부도 독도 인근 해역을 잠정적 조치수역(중간수역)으로 수용했다.밀약도 밀약이지만,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일본 정부와 민간에게서 막대한 정치성 자금을 받아 썼다.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 이외에 1965년까지 5년 동안 6개 민간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일본 나카소네 정부로부터 40억달러의 차관을 받았다. 그러니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홍 대장을 가만두기 힘들었을 것이다.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한 공세를 높이고 있다. 일왕까지 거론했다. 물론 뒷감당도 못하면서 쏘아대는 말대포라는 시각이 많다. 실제 박종우 선수는 그 피해자였다. 그러니 진정성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 독도밀약의 진상과 파기 여부를 말이다. 그래야 ‘독도 쇼’니 정치 선동이니 하는 소모적 논란을 막고 홍순칠, 박종우 같은 어이없는 희생도 막는다.

곽병찬 논설위원chankb@hani.co.kr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조선·중앙·동아를 폐간하라"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6-11일자 기사 '"조선·중앙·동아를 폐간하라"'를 퍼왔습니다.
'언론소비자' 6·10 올레


1987년 초여름의 그날처럼 무더운 6월 10일, 전국 여러 곳에서는 6월항쟁 25주년을 기념하는 모임들이 열렸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흥겨운 기념잔치가 벌어지고 있던 오후 4시, 3백여명의 사람들이 광화문 네거리의 동아일보사 앞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시민단체인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언소주)’이 주관하는 ‘제1회 언론소비자 올레’가 막을 올린 것이었다.
일행이 동아일보사 정문에 이르자 사회자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성유보 위원에게 동아일보사의 행적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친일로 얼룩진 동아일보의 과거와 1974년 10월 24일에 시작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야기하면서,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박정희 정권과 야합해서 ‘민중의 격려광고’를 배신하고 언론인 113명을 강제해직한 경위를 설명했다. 올레 참가자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동아일보 폐간하라’를 외쳤다.
동아, 민중의 격려광고 배신…언론인 113명 강제해직
20대 젊은이들부터 일흔이 넘은 노인까지, 그리고 직장인과 주부들이 다양하게 참가한 올레 대열은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 조선일보사 앞에 이르렀다. 신문사를 가리고 있는 코리아나호텔 정문에서 ‘수구보수세력의 대변지’ 조선일보의 역사와 현재 행태를 간략히 들은 올레꾼들은 ‘조선일보 폐간하라’를 열 번이 넘게 외쳤다.
‘자유언론실천-1974, 10, 24’라는 글씨가 찍힌 주황색 수건을 목에 두른 올레 참가자들은 중구 정동의 경향신문사 앞으로 가서, 곤경을 무릅쓰고 한겨레와 함께 진보언론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경향을 격려한 뒤 서소문의 중앙일보사로 옮겨갔다. 동아투위 문영희 위원이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주도로 창간된 중앙일보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했다. 1960년대 중반의 ‘삼성 밀수사건’을 옹호한 일부터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을 노골적으로 지지한 이래 지금까지 ‘찌라시’ 소리를 듣게 된 내력을 들은 올레꾼들은 주먹을 흔들며 ‘중앙일보 폐간하라’고 합창했다.

언소주는 왜 6월 항쟁 25주년 기념일에 38년 전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들이 발표한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주제로 조·중·동 폐간을 주장하는 집회와 시위를 진행했을까? 언소주의 양재일 대표는 그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보수언론은 6월 항쟁 이래 25년 동안 민주화에 제동을 걸면서 1%의 특권층 편에 서서 기득권을 지키고 확대하는 데 앞장서왔습니다.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그들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6월 항쟁의 빛나는 성과를 땅에 묻고 독재자의 딸이 국민 위에 군림하도록 하면서 언론권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문들은 역사의 발전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서 반드시 폐간되어야 합니다.”
KBS, 육사 발전기금 낸 전두환 기사 외면
6월 항쟁 25주년 기념식이 끝난 바로 이튿날인 11일 아침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일부 신문에는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열을 받았다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그가 지난 8일 ‘육사 발전기금 200억 원 달성 기념행사’에 아내와 어린 손녀를 데리고 참석해서 생도들의 사열을 받으며 거수경례를 하는 사진을 본 이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는 2006년 4월 28일에도 ‘육사 발전기금 재단 창립 10주년 및 100억원 달성 축하’ 행사에 참여해서 사열을 받고 생도들과 간담회를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전두환과 ‘화음’을 맞추려는 것인가? 노태우가 ‘사돈인 전 신동방생명그룹 회장 신명수에게 비자금 420억 원을 맡겼다’면서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진정서를 낸 사실이 10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의 발표로 드러났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누구인가?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킨 뒤 1980년 5월 광주 항쟁을 총칼로 ‘진압’하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살육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1심에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신군부’의 우두머리들 아닌가? 전두환은 2심과 상고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으나 ‘5공 비리’와 관련된 추징금 2,205억 원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그는 그 가운데 532억 원만 내고 ‘전 재산이 29만 원뿐’이라면서 지갑을 꺼내 보여 사람들의 실소를 산 바 있다. 그런 전두환이 ‘육사 발전’을 위해 1000만 원을 선뜻 냈다고 한다. 노태우는 ‘내란 음모 및 군사반란’ 재판에서 확정된 추징금 2,629억 원 가운데 2,286억 원을 내고 343억 원이 ‘외상’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보다 큰 액수를 사돈에게 맡겨두었다는 것이다.
‘새노조’가 어렵사리 파업을 접고 회사로 복귀한 것이 며칠 전인데, KBS는 공영방송과는 정반대 길로 치닫고 있다. ‘전두환의 육사 사열’을 메인뉴스가 외면한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살인마가 사열을 받느냐’ ‘육사 생도들에게 쿠데타 교육을 시킨 것’이라는 등의 비난이 들끓고 있다.
나는 KBS의 행태를 보면서 언소주의 올레꾼들이 외치던 구호를 다시 떠올린다. “조선·중앙·동아일보는 자진 폐간하라.” 시청자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지 않은 KBS 역시 그 함성을 강 건너 불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