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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8일 월요일

고양이 구하다 죽은 소방관은 국립묘지 못 간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3-03-17일자 기사 '고양이 구하다 죽은 소방관은 국립묘지 못 간다?'를 퍼왔습니다.
[119가 필요한 소방관들 ③] 트라우마 심각…"노동권 보장해야"

불. 사람들이 소방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단어다. 맞다. 소방관은 불을 끄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매일 목숨 걸고 불과 싸우는 이들이다. 그러나 소방관이 하는 일은 화재 진압만이 아니다. 불뿐만 아니라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다른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 또한 소방관의 몫이다. 예컨대 보행자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고층 건물의 얼음도 깨고, 가스 폭발 같은 사고가 발생해도 어김없이 출동한다. 이렇게 소방관은 시민들의 일상과 직결된 공무원이다. 하지만 소방관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 잘 아는 시민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소방관들의 안타까운 순직이 이어지고 처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현실도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프레시안)은 소방관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2001년 3월 4일 새벽 3시 48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울 서부소방서(현 은평소방서)대원들이 홍제동 가정집 화재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소방관들은 20여분 동안 화마와 결사적으로 싸웠다. 누군가 '집 안에 사람이 있다'고 소리쳤다. 망설임은 없었다. 9명의 소방관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먹고 물을 먹은 벽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9명의 소방관이 매몰됐고 이 중 6명이 숨졌다. 소방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날이었다. 순직한 소방관 중 고(故) 김철홍 소방관의 책상 유리판 밑에는 '어느 소방관의 기도'라는 시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어느 소방관의 기도

신이시여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아무리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언제나 안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고가날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소서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

저희 과업을 충실히 수행케 하시고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시어저희 모든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보호하고 지키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신의 뜻에 따라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신의 은총으로저와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주소서

스모키 린(A.W. 'Smokey' Linn)이라는 소방관이 1958년 출간한 시다. 미국 소방관들이 즐겨 암송하는 시라고 한다.

▲ 지난달 13일 오후 경기도 포천시 포천장례식장 고(故) 윤영수 소방교의 빈소에서 조문객이 절하고 있다. 이날 오전 4시 15분께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플라스틱 공장에서 난 화재를 진압하던 가산 119소방센터 구급대원 윤 소방교가 숨졌다. ⓒ연합뉴스

소방관은 목숨을 거는 직업이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한국에는 3만7826명, 일본에는 15만9354명의 소방관이 있다(2011년 기준). 2007년-2011년에 한 해 평균 한국에서는 7명, 일본에서는 11.2명의 소방관이 순직했다. 순직률(소방관 1만 명당 순직자 수)은 같은 기간에 일본이 0.7명, 한국이 1.85명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소방관 순직률은 일본의 2.6배가 넘는다. 일본의 인구당 소방관 비율이 한국보다 훨씬 높고, 일본 자체가 상시적으로 지진 위험에 노출된 국가일 뿐만 아니라 2011년에만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으로 29명(다른 해 평균의 4배)의 소방관이 순직한 점을 감안하면, 한국 소방관의 순직률이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재난에 상시적으로 시달리는 일본 소방관들의 순직율이 낮은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지만, 인구당 소방관 비율에서 일본이 한국을 압도하는 면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 비해 인력 사정에 여유가 있고, 이것이 사고 감소로 이어진 측면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 소방관들이 직면한 현실은 일본과는 많이 다르다. 순직률이 높고 평균 수명은 매우 낮다. 한국 소방관의 평균 수명이 58.8세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2001년 기준, 당시 한국인 평균 수명은 76.5세). 이는 많은 소방관이 자조 섞인 '질 나쁜 농담'으로 자주 인용하는 사례다.

고양이 구하다 순직하면 국립묘지 못 간다?

홍제동 사건 당시 소방관의 하루 생명 수당이 1000원이 채 안 된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었다. 지금도 소방관들의 생명 수당은 한 달에 5만 원에 불과하다. 소방방재청이 낸 '2012년 소방방재 통계'에 따르면 2011년도 공상자는 355명이고 순직자는 8명이다. 최근 5년간 공상자는 1666명이고, 순직자는 35명이다. 연평균 7명이 순직하고 있는 상황이다.

▲ 소방관 공상 및 순직자 현황 ⓒ소방방재청

순직한 공무원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까. 현행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 제1항에는 "화재 진압, 인명 구조 및 구급 업무의 수행 또는 그 현장 상황을 가상한 실습 훈련 사망"이나 "상이등급 1급·2급·3급을 받고 사망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지난 2008년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주택 화재 진압을 위해 출동했다가 복귀하던 소방차가 옹벽을 들이받는 사고가 일어났다. 갑자기 나타난 물체(야생동물로 추정)를 피하려다 발생한 사고였다. 이 사고로 순직한 20년 경력의 고(故) 차주문 소방관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순직 인정과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다. 경기도 이천의 한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가 고장 난 소방차(펌프카)를 수리하던 중 교통사고로 숨진 여주소방서 고(故) 최태순 소방관도 마찬가지로 국가보훈처로부터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당했다. 역시 순직 군경 지정을 거부당해 국립묘지 안장 자격도 받지 못했다. 이 두 사안 모두 화재 진압이나 인명 구조 등의 업무 수행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더해 강원도 속초시의 한 건물 3층에 고립된 고양이를 구조하다 로프가 끊어져 사망한 고(故) 김종현 소방관은 국가 유공자로 인정은 받았지만, 인명 구조 작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당했다.

앞선 두 경우는 유가족들이 법정 싸움까지 한 끝에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 김종현 소방관의 경우, 유가족이 현재 정부를 상대로 행정 소송을 진행 중이다. 김 소방관의 사례는 다른 소방관들에게도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 사건은 소방관들 사이에서 이른바 '고양이 소방관'으로 통하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소방관들 사이에서는 '고양이가 됐든 뭐가 됐든 신고가 들어오면 안 나갈 수 없는 상황인데 이런 논란이 생기는 것 자체가 서글프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 소방관들은 평상시에 각종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기도소방본부

소방관 '트라우마' 빨간불…그럼에도 소방병원 하나 없어

지난해 11월 15일, 문상필 광주광역시의원이 광주시 소방본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광주시 소방본부 소속으로 건강검진을 받은 1089명의 소방관 중 무려 24%에 달하는 258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우울증, 수면 장애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고위험군은 40명이나 됐다.

이 같은 실태 조사에 앞서 2011년 5월 전후 한 달 사이에 전남본부 소속 소방관이 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전남 지역 소방관 3명이 연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줬다. 당시에도 소방관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과 같은 정신 질환이 원인으로 지목됐었다. 한 소방관은 "전국의 다른 시도도, 조금씩 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실태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중앙소방학교가 현직 소방관 29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27%가 '직접 경험한 가장 충격적인 일'로 '처참한 시신을 목격한 일'을 꼽았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았던 경험',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소방관들이 겪는 일상적인 트라우마가 심각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소방관들에 대한 체계적인 치료를 담당하는 기관은 없다. 일부 소방본부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예방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지만 경찰병원이나 군병원과 같은 '소방병원'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소방관의 근무 환경도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예컨대 구급차를 운전하는 경우 항상 사고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한다. 소방발전협의회가 지난 1월 대통령직 인수위에 제출한 소방정책건의서에는 구급차의 교통사고 사례가 나와 있다.

일례로 2010년 3월 고속도로 교통사고 현장으로 긴급하게 출동하던 구조 버스가 신호를 무시하고 사거리를 통과하려 했다. 구조 버스는 다른 방향에서 오고 있던 차량에 사이렌을 울리고 교통 신호봉을 휘둘렀지만 결국 추돌 사고가 났다. 영업용 택시 4대가 연쇄 추돌한 사고였다.

이 사건은 일반 형사사건으로 분류돼 검찰에 송치됐다. 운전을 담당했던 소방관은 형사 합의를 보고, 반성문과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해 결국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 당연한 사건 처리지만, 이 과정에서 소방관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소방발전협의회는 "현행법의 내용은 긴급 차량의 경우 사고를 발생시키지 말고 빨리 가라는 것일 뿐, 일단 사고가 발생되면 면책이 없다.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 등 긴급 차량이 교통 법규를 다 지키는 준법 출동을 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소방관들은 "구급차인데 왜 신호를 지키느냐"는 피해자 가족의 항의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방법은 마땅치 않다. 소방관들은 생명이 걸려 있어 촌각을 다투는 상황과 교통사고의 위험 사이에서 불안해할 뿐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소방 및 경찰공무원이 소방기본법 및 경찰관직무집행법에 따른 긴급한 각종 출동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교통사고에 대해 공소 제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에 대해, 현재 교통사고 관련 특례를 줄여가는 추세임을 감안하면 현실성이 없는 주장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박해근 소방발전협의회장은 "지금 소방관은 사고가 나면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는데다 자체 징계까지 받아야 하는 2중 부담에 시달린다. 사고와 관련돼 면책을 주는 게 불가능하다면, 명백하게 소방관의 과실이 아닐 경우 자체 징계를 면해주는 방식으로 현행 제도를 바꾸는 것 역시 하나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문제는 노동 기본권…"직장협의회 구성 막지 말아야"

결국 근본 대책은 소방관들의 기본적 노동권을 보장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소방관은 노동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노조나 직장협의회가 없다. 경찰이나 군인이 노조를 결성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헌법재판소는 소방 공무원의 전국공무원노조 가입 불허를 합헌으로 판단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2006년과 2007년, 2009년 세 차례에 걸쳐 소방관의 단결권을 보장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정부 방침에는 변화가 없다. 그럼에도 소방 공무원들은 2008년 일부 일간지에 "소방 공무원 인권 사수를 위해 노동 단결권을 보장하라"는 내용의 의견 광고를 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선진국의 경우 소방 공무원들도 단결권을 제한적으로나마 보장받고 있다. 미국에는 조합원 15만 명의 국제소방협회가 있다. 1873년에 결성된 전미소방기사연합(National Association of Fire Engineers)이 그 연원이다. 미국을 비롯한 상당수 서구 국가들의 소방 시스템이 민간 영역에서 발전해온 것을 감안하면 정책 결정 등에서 미국의 국제소방협회가 갖는 권위는 막강하다. 일본에는 한국의 소방발전협의회 등과 비슷한 임의단체인 전국소방직원협의회가 있다. 이들도 한국보다 사정이 낫다. 단체협약권이 일부 보장되는 일본의 공무원 노조, 혹은 공무원 직원 단체와 긴밀한 협의체 구성이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등 일부 유럽 국가에는 직장협의회보다 수준이 높은 소방관 노조가 있다.

박해근 소방발전협의회 회장은 "하위직 소방공무원에게 노동 기본권이 허용돼야 한다. 현재는 일상적인 고충 사항도 얘기하거나 건의할 수 있는 창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소방 업무의 특수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근무 환경 개선, 업무 능률 향상, 일반적인 고충 처리 등을 소속 기관의 장과 협의해 소방 공무원의 권익을 보호하고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관련 법률 개정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정부 당국자 등은 국가 긴급 재난 등을 담당하는 소방관에게 단결권을 인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 소방 관계자는 "재난이 발생했는데 파업을 하는 정신 나간 소방관이 어디 있겠나. 정부에서 직장협의체 구성을 반대할 때 내는 전형적인 논리인데,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박세열 기자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내 가족 죽게 만든 '연쇄 살인범', 알고 보니…


이글은 프레시안 2013-01-14일자 기사 '내 가족 죽게 만든 '연쇄 살인범', 알고 보니…'를 퍼왔습니다.
[강자의 무기, 손배·가압류 ①]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 돈의 힘에 짓눌리다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제1항이다. 여기서 말하는 단체행동에는 잔업 거부, 태업, 부분 파업, 전면 파업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막상 노동자들이 단체행동을 하면,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은 손쉽게 제한된다.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악랄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평가받는 게 손해배상청구소송(손배)과 가압류다.
지난해 12월 21일 최강서 한진중공업 노조 조직차장을 자살이라는 벼랑 끝으로 몰았던 것도 이 손배·가압류였다. 최 조직차장은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노동 현장이 수십 억, 수백 억대의 손배·가압류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태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 꼭 돌아와서 승리해주십시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 - 고(故) 최강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 조직차장이 휴대전화에 남긴 유서지난해 12월 21일 최강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 조직차장은 이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 씨의 죽음을 계기로 한진중공업이 노조를 상대로 제기한 158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도마에 올랐다.

노동계는 재작년에 이어, 다시금 '희망버스' 등을 조직하며, 손배·가압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또 사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각계각층의 2만3000여 명은 최근 부산지방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한진중공업은 문제가 되는 158억 원의 손배를 철회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 손배는 파업 기간에 발생한 각종 피해를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란 게 사측의 입장이다. 그러면서 지난해 12월 26일에는 최 씨의 자살을 두고 "지극히 개인적인 사안"이라며 노조의 교섭 요청을 거부했다.

과연 그럴까. 최 씨의 죽음을 단지 '사적인 선택'으로 치부해도 되는 걸까. 그러기엔 손배·가압류 문제는 지난 10여 년 동안 너무나 많은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실제 죽음이 아니더라도, 일상 경제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사실상 사회·경제적 죽음 상태로 몰아넣은 사례도 많다.

 
▲ 지난 5일 오후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앞에서 민주노총과 전국의 시민사회 단체 인사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집결했다. 이들은 해고된 뒤 재취업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씨를 추모하며 사측이 노조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집회가 끝난 뒤 민주노총 조합원과 시민사회 단체 단원들이 한진중공업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잊을 수 없는 죽음"…두산중공업 배달호, 한진중공업 김주익·곽재규 등

손배·가압류를 비롯한 사측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는 최 씨만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여러 사람이 이 문제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무차별적인 손배·가압류는 사실상 '연쇄 살인 무기'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대표적인 게 지난 9일 10주기를 맞은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죽음이다. 노동계가 '손배·가압류'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바로 배 씨, 그리고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 위원장이다.

고 배달호 씨는 두산중공업 노조 교섭위원이었다. 2002년 두산중공업은 노조를 상대로 65억 원 규모의 손배와 가압류를 청구·신청했다. 배 씨는 2003년 1월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하며 사측이 제기한 손배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그리고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비슷한 일이 한진중공업에서 벌어졌다. 김주익 당시 노조 위원장은 구조조정과 손해배상 청구 철회를 요구하며 그해 6월부터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였다. 재작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올랐던 그 크레인이다. 그러다 그해 10월 17일, 김 위원장은 농성 129일 만에 85호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13일 후, 곽재규 조합원이 도크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한진중공업과 금속노조는 "노조 활동을 이유로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가압류를 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그러면서 당시 노조를 상대로 제기했던 손배를 사측은 취하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9년 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같은 이유로 동료를 또 한 번 떠나보냈다.

생사람 잡는 손배·가압류…"내 권리 요구하다 '패가망신' 한순간"

최강서, 배달호, 김주익, 곽재규 외에도 손배·가압류가 '(사회·경제적) 사망 선고'를 내린 노동자들은 많다. 경우에 따라, 임금·노조통장이 가압류돼 생활이 불가능해짐은 물론,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까지 경매에 부쳐진 사례도 있다.

6년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이 딱 그런 경우다. 재능교육은 지난 2008년 노조를 상대로 업무방해금지가처분을 신청냈다. 서울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항의 농성을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를 통해 사측은 노조원 8명의 급여와 통장을 가압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중앙지법에 강제 압류를 신청했다.

그리고 2010년 10월, 재능교육 직원 6명이 법원 집행관과 함께 오수영 전 노조 사무국장 집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오 전 사무국장의 시어머니가 혼자 있는 집에서 세탁기, 김치냉장고, 장롱, 텔레비전 등 총 127만 원어치의 가전 제품에 빨간 압류 딱지를 붙였다.

이 일에 대해, 오수영 전 사무국장의 남편은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저희 집에 법원 집행관과 자칭 채권자 교육기업 재능교육에서 와서 집안 집기들에 빨간딱지들을 붙이고 갔습니다. 육아 때문에 2년 전에 합가해 모시고 있는 어머님 혼자 계실 때, 장정 6명 정도가 우르르 몰려와 제대로 설명도 없이 왜 함부로 들어오냐니까 우리는 그냥 문 따고도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집안을 어슬렁거리면서 여기저기 딱지를 붙였다는군요."

"집사람이 노조일 한다고 애 돌볼 여력이 안 돼서 곧 칠순인 어머니하고 합쳤습니다. 몇 년 전에 세 아들네가 주는 용돈들 모아서 사신 김치냉장고에 딱지가 붙었습니다. 당신이 드시려는 생각보다는 김치 담글 줄 모르는 며느리들 생각에 많이씩 담가서 나눠 먹이려고 당신 용돈 모아서 사신 거지요. 그 김치냉장고에 붙어 있는 딱지. 보니까 참 거시기합니다."

▲ 오수영 전 사무국장 집에 붙은 빨간 압류 딱지.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제공

이것만이 아니었다. 사측은 오 전 사무국장의 집안 집기를 압류하고 두 달 후인 2010년 12월, 유득규 재능지부 조합원의 자택을 실제로 경매에 넘겼다. 강제 경매 통보를 받은 집은 유 씨의 어머니가 유산으로 물려준 것이었다. 당시 유 씨와 유 씨의 오빠 식구까지 총 다섯 명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 같은 재능교육의 노조원 재산 압류는 당시 시민사회 진영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사측이 실제 빨간 압류 딱지를 들고 자택에 들이닥치거나, 집을 경매에 부쳐버린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노동계는 이 사건이 노조 탄압의 '선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유 조합원 자택에 대한 강제 경매는 재작년 법원에서 기각 결정이 내려졌다. 또 오 씨에게서 압류한 재산에 대해서도 재작년 사측은 경매를 취하했다고 밝혔다. 그 외에 사측이 노조원들을 상대로 벌였던 20억 원 규모의 손배와 여타 경제적 압박도 현재는 일부 해제된 상태다. 단, 강종숙 학습지 노조위원장의 급여는 재작년 1월부터지금까지 100% 압류되고 있다.

이 같은 재능교육의 손배·압류 사례는, 사측이 마음만 먹으면 노동자들의 경제생활을 얼마든지 파탄 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또 그에 따른 고통은 노사갈등 당사자인 노조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겪게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였다.

이와 관련,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노조 활동이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란 인식을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시도"라며 "손배·(가)압류는 매우 반인권적인 신종 연좌제"라고 비판했다.

힘들게 지켜온 노조, 사측의 가압류 협박으로 '산산조각'

또 하나 눈여겨볼 사례는, 반도체 공장 KEC가 노조를 상대로 손배·가압류를 사용한 방식과 목적이다. 수십 억, 수백 억대의 청구액을 노조로부터 전부 받아내려는 게 손배를 청구하는 사측의 진짜 목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KEC 등 많은 사례에서 손배·가압류는 사측이 자신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노조를 파괴하거나, 집단행동을 조기에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KEC 노조는 지난 2010년 6월 '노사 성실교섭'을 요구하며 14일간 옥쇄 파업(점거 농성)을 벌였다. 그러다 노사 양측은 '즉시 교섭, 징계·고소·고발·손해배상 등의 최소화' 원칙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는 당시 야 5당도 참여해 '사회적 합의'라 불렸다.

하지만 막상 파업이 끝나자, KEC는 노조 간부 및 조합원 88명(점거 농성자)을 대상으로 무려 301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조합원들에게 사직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금속노조 KEC 지회 김성훈 지회장은 "사측에서 조합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전화를 걸어, 손배 안 걸고 희망퇴직금 몰아줄 테니 퇴사하라고 설득했다"며 "이런 노조 파괴 작업을 통해 당시 조합원 150여 명이 사표를 쓰고 회사를 떠났다"고 말했다.

150여 명이 떠났으니 노조의 기세가 기우는 건 당연했다. 김 씨는 "한번 노조가 꺾였다는 소문, 회사가 사표 내면 손배를 안 건다는 소문이 현장에 퍼지기 시작하자 퇴직이 줄줄 이어졌다"며 "조직이 무너지니 정말 답답했다. 힘들게 공장을 점거해서 교섭 합의를 이끌어낸 결과가 해고와 구속, 그리고 손배였다"고 말했다.

현재 KEC가 조합원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금액은 156억 원으로 줄었다.재판 과정에서 입증이 어려운 부분을 사측 스스로 취하하면서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은 커다란 심리적·경제적 압박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김 지회장은 "손배를 빌미로 한 사측의 노조 탈퇴 작업으로 빠져나간 많은 사람의 빈자리를 남은 사람들이 정말 간신히, 간신히 지켜가고 있다"며 "사측은 지금도 손배 1심 결과가 나오면 바로 집행을 하겠다는 협박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고(故) 최강서 씨의 죽음을 바라보는 마음도 남다르다. 김 지회장은 "최강서 열사를 보면, '저게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며 "그래서인지 최근 노조 분위기가 부쩍 우울해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가진 걸 다 뜯어가도 156억 원이 나올 리 만무하다. 사측도 이를 당연히 알고 있다"며 "회사가 진짜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느낄 불안이나 공포, 절망감"이라고 말했다. "벼랑 끝까지 밀어 넣어 원하는 바를 달성하고 싶은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 지난 5일 오후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앞에서 민주노총과 전국의 시민사회 단체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집결,했다. 이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고 최강서 씨를 추모하며, 사측에 손배 철회를 촉구했다. ⓒ연합뉴스

금속노조 사업장만 해도 총 709억6000만 원 손배, 20억8000만 원 가압류

2013년 1월 현재,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 사업장 중 손배·가압류에 시달리고 있는 곳이 총 12곳에 이른다. 청구한 손해배상 금액만 총액 약 709억6000만 원이고 가압류 금액도 20억8000만 원에 이른다. 이 밖의 다른 산별노조 소속 사업장까지 생각하면, 그 규모는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 77일간 옥쇄파업을 벌였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와 금속노조에는 약 430억9000만 원 규모의 손배 및 구상권 청구가 걸려 있다. 이와 함께, 일부 노조 간부들의 임금 및 퇴직금, 부동산 등(28억9000여만 원 규모)이 가압류됐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에는 전주 지회 소속 간부 및 조합원들에게 22억6000만 원, 아산 지회에는 16억7000만 원대 손배가 청구됐다. 발레오만도 노조에는 26억4800만 원, 포항 DKC 노조에는 26억 원, 유성기업 노조에는 58억6400만 원의 손배가 걸려 있다.

이 같은 수십 억, 수백 억대 손배로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무색해졌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정당한 투쟁을 벌이더라도, 사측이 제기하는 민사소송(손해배상청구소송)은 쉽사리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양형근 쌍용자동차 지부 조직실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압박하는 것만큼 잔인한 압박 방법이 어디 있겠나"라며 "자신의 일자리, 노조, 가족 등을 지키기 위해 벌인 투쟁이 자본주의 사회에선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손배로 돌아온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최하얀 기자

2012년 10월 9일 화요일

참정권 박탈당한 비정규직 "대선은 어느 나라 얘기?"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08일자 기사 '참정권 박탈당한 비정규직 "대선은 어느 나라 얘기?"'를 퍼왔습니다.
각계 2446인 "비정규직의 노동권과 참정권부터 보장하라"

노동계가 오는 27일로 예고한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사회를 위한 10만 촛불행진'을 앞두고, 비정규노동자를 비롯한 노동계, 종교계, 학술계, 법조계 등 각계 2446인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기본권과 참정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8일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비정규직 규모가 1000만 명에 가까워진 현실에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복지, 사회양극화 해소는 비정규직 문제해결에서 시작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당면한 해결과제로 이들은 1750여 일째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재능교육 노동자들과, 대법원의 불법 판결에도 사내하청 신세로 남아 있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오는 11월 총파업을 예고한 전국 초·중·고교 비정규직 노동자들 등을 열거했다.

이들은 "대선 후보들 모두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을 어떻게 더 잘 활용할 수 있을지만을 궁리하고 있다"며 "후보들이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며 내세우는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이나 '사내하도급 보호'는 사실 '짝퉁 정규직' 만들기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이번 대선에서 혹여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더라도 새 정권이 재차 노동자의 권리를 내팽개친다면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로 볼 수 없을 것"이라며 야권 후보들을 겨냥했다.

이어 이들은 비정규직의 참정권 보장을 위해 대통령 선거일을 법정공휴일화 할 것을 요구했다. 선언문을 대표 낭독한 유명자 재능교육노조 위원장은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투표장에 가지도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대선의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주최한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 만들기 공동행동은 이날 선언문 발표를 시작으로 오는 27일까지 매일 저녁 서울 대한문 앞에서 릴레이 촛불집회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8일 오전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만들기 공동행동은 서울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분향소 옆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노동자 권리 확보를 위해 대통령 선거일을 법정공휴일화 하라"고 촉구했다. ⓒ프레시안(최하얀)

/최하얀 기자

2012년 7월 2일 월요일

파업이 있었던 곳에는 반드시 복수노조 나타난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7-02일자 기사 '파업이 있었던 곳에는 반드시 복수노조 나타난다?'를 퍼왔습니다.

지난해 7월 1일 시행된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제도의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사업장단위에서도 자유롭게 제2, 제3의 복수노조를 만들 수 있다. 둘째, 그러나 산업평화와 교섭비용 절감을 위해 교섭창구 단일화 과정을 거쳐 과반수 노조에게만 교섭권, 쟁의권을 부여한다. 셋째, 그렇지만 사용자가 원할 시 소수 노조와도 자율교섭 할 수 있다.

복수노조 제도가 도입되면서 단결의 자유는 넓어졌지만 교섭권과 쟁의권은 제한됐다. '창구단일화' 제도는 복수노조의 의의를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탄압의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이 신무기에 의해 민주노조가 파괴되고 친기업노조로 대체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민주사회의 기본원리이자 헌법상의 기본권리인 노동기본권이 박탈되고 노사관계는 자본 일방으로 재편됐다.

'창구단일화' 아래서 친 기업노조는 다수든 소수든 유리 

'복수노조 창구단일화'를 매개로 한 민주노조 파괴 시나리오는 친 기업노조 설립으로 시작된다. 회사 측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친 기업노조가 다수를 장악하면 창구단일화 절차를 밟아 교섭권, 쟁의권을 독점할 수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주노조 소속 조합원들을 압박하여 탈퇴시키고 친기업 노조에 가입시키면 게임은 거의 끝난다. 소수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교섭대표 노조에게 공정의 의무를 다하라고 따지는 것 정도이다.

또 하나의 기가 막힌 문제는 민주노조의 교섭대표권이 남아 있거나, 친 기업노조가 다수를 점하지 못한 소수일 경우에도 회사는 자율교섭을 한다는 명목으로 소수노조인 친 기업노조와 교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측은 소수노조 상태인 친 기업노조와 먼저 합의하고 민주노조와의 교섭은 형식적으로 임하고 버틴다.

동시에 친 기업노조는 회사의 지원 하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다수 조합원 확보에 나선다. 조합원들은 갈등 속에서 살기 위해 동료를 등지고 자책감에 괴로워한다. 노동현장은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한 갈등, 분노, 배신감등이 뒤 얽혀 인간성의 파괴를경험하고 있다. 문제의 근원은 바로 다수노조가 교섭권, 쟁의권을 독점하게 하고, 사측이 교섭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임의로 선택하여 자율교섭을 할 수 있게 한 이 모순된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제도이다.

한일파카 유압·유성기업·KEC·한진중공업에서 맹활약한 '창구단일화'

한일파카 유압은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비정규직의 사용을 위해 장안외국인투자단지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2009년 5월 32명을 정리해고 했다. 이후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전개되었고 2011년 7월 1심에서 승소하였다. 그러나 사측은 2011년 2월 단협을 일방해지하고 그해 7월 1일 복수노조를 설립하였다. 이후 민주노조 소속 조합원들은 잔업, 특근에서 배제되고 부당한 업무지시, 배치전환에 항의하면 중징계를 받아야 했다.

유성기업에서는 공격적 직장폐쇄 기간이 장기화되어 조합원 복귀율이 50%가 되던 2011년 7월 14일 복수노조가 설립되었다. 회사 측이 노골적으로 나서서 친 기업노조 가입운동을 펼쳤으며, 관리직 사원 50명을 가입시켜 다수를 확보해 나갔다. 또한 2011년 12월말까지 '친 기업노조 가입이 50%를 넘지 못하면 현대자동차에서 물량을 안 준다고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조합원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장기파업으로 인한 징계 및 손배소 대상에서 제외되기 위해 등을 돌려야 했다.

2011년 희망버스의 소중한 성과물인 한진중공업에는 정리해고자들이 복직하기 전에 이미 친 기업노조가 설립되어 다수를 확보해 2012년 7월 18일 이후부터는 '교섭 창구단일화 절차'를 앞두고 있다. 일거리가 없는 조합원들에게 친 기업노조에 가입하면 받을 수 있는 대출형식의 1000만 원 지원과 순환휴직에서 벗어나 먼저 현장에 투입될 수 있다는 바람은 열사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 애틋한 동지들 사이를 갈라놓고 말았다. 노조 간의 선의의 경쟁은 말할 가치조차 없다. 고도로 준비된 노무컨설팅을 바탕으로 기획적인 노동탄압이 존재할 따름이다. 친 기업노조는 노무관리 대행, 사측의 아바타 역할을 수행 한다. 사측은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라는 효율적인 탄압의 무기를 얻었을 뿐이다.

▲ 희망버스를 계기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정리해고 철회에 합의했지만, 일거리가 없었던 조합원들은 순환휴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바람에 제2노조에 속속들이 가입했다. 사진은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 ⓒ프레시안(최형락)

그렇다면 소수 신규노조에는 단결의 자유를 주나?

복수노조가 허용되었다고 해서 노조의 무풍지대나 기존 어용노조의 아성에 노조 결성의 바람이 불지 도 않았다. 교섭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노조를 만들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 소수노조라도 교섭권이 보장된다면 장기적 전망을 갖고 활동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과반수 노조에게만 교섭권이 보장되어 있는 이 제도 하에서는 노조의 확산을 통한 노동자 권리의 확대를 예측할 수 없다.

금속노조에서 기존 친 기업노조 하에서 새롭게 지회를 결성한 곳은 부산 TY밸브가 유일하다. 조합원 160명의 TY밸브 노조위원장은 임금을 결정하고 인사권을 행사하는 등 사측의 인사노무관리 역할을 하고, 조합비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전횡을 일삼아 왔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조합원 중 30명이 복수노조 창구단일화가 시행된 2011년 10월 4일 금속노조에 가입하고 지회를 결성하여 교섭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과반수 조합원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측과 한 몸인 친 기업노조를 상대로 과반수 조합원을 확보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이긴 하지만 그 산을 오르기가 무척 힘겨워 보인다. 그렇다고 사측이 스스로 선택하여 지회와도 교섭을 할리는 만무하다. 현재 TY밸브 지회는 공정대표 의무 위반으로 친 기업노조를 제소하며 힘겹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며, 조직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렇듯 '복수노조 창구단일화'는 기존 민주노조를 파괴하는 훌륭한 무기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규 노조의 진입을 가로 막는 강력한 장벽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민주사회의 기본원리인 노동기본권을 제한하고 박탈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노동법 전면 재개정 투쟁' 앞에 서다

장기간의 투쟁 끝에 민주노조를 파괴하고 교섭대표 노조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친 기업노조는 자주성을 가지고 있는 '노조' 가 아니라 회사 측의 노무관리를 대행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2011년 7월 1일 만들어진 복수노조 1호 사업장인 KEC노조는 교섭창구 단일화 과정을 거쳐 2012년 2월 17일 회사 측의 오랜 염원이었던 상여금 300% 삭감, 고정 OT폐지, 교대수당 폐지, 2조 2교대제, 무급순환 휴직에 흔쾌히 합의해 주었다. 유성기업노조는 관리직 50명을 가입시켜 교섭대표권을 행사했고, 단체협약상의 노조활동시간과 구조조정 제한규정 삭제, 여성들의 생리휴가 제한 등에 합의해 주고 있다. 센트랄, 두산 모트롤도 회사 측의 경영방침이지만 민주노조가 걸림돌이 되어 못했던 구조조정 제한규정 삭제, 노동유연성 확대, 노조활동 지원축소, 노동조건 하향조정 등에 합의했다. 이렇듯 '복수노조 창구단일화'는 노동기본권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의 권리를 후퇴시키고 자본일방의 노사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관전평은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데 비해 노동자의 권리는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아직 국제노동기구(ILO)와 협약도 비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가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는 국제적 권고도 잇따르고 있다. 최근 국제노동기구(ILO)의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지난 3월 15일 313차 회의에서 한국이 "모든 노조에게 쟁의권을 부여하고, 과반수 노조가 없을시 모든 노조에게 교섭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복수노조 창구단일화가 도입된 지난 1년을 통해 밝혀진 결론이 있다. 노동기본권을 지키고,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노동법을 시급히 전면 재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노조의 교섭권을 제한하고, 사용자가 교섭파트너를 선택하게 한 이 악법은 모든 노조에 교섭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전면 재개정해야 한다. 또한 사용자의 부당한 차별행위, 친 기업노조 설립지원, 노조에 개입하는 행위에 대해 처벌을 강화해야 하며, 모든 노조에게 쟁의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투쟁해 나가야 한다. 그 출발이 8월말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이다.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도 함께 실립니다.)

▲ 민주노총은 지난달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총파업을 예고하는 경고파업을 벌였다. 민주노총 대표단은 이날 노동법 전면 재개정을 촉구하는 서한을 국회에 전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이상우 금속노조 정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