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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4일 일요일

한-미 FTA 탓에 담뱃값 인상 어렵다


이글은한겨레21 201303-18일자 제925호 기사 '한-미 FTA 탓에 담뱃값 인상 어렵다'를퍼왔습니다.
[기획] 협정 체결 뒤 바뀐 법령 한국 66개·미국 8개, 미국식 제도 한국에 그대로 이식하는 경제헌법… 공공정책 가로막히지만 정부는 경제 효과만 따져

»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1년 11월29일 청와대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을 위한 개정법률 공포안에 서명하고 있다. 한-미 FTA로 바뀐 국내법 66개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1년 11월29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을 위한 개정법률 공포안에 서명했다. 일주일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한-미 FTA 비준안과 함께 날치기 처리한 법안들이었다. 법안 개정은 FTA 비준안 처리만큼이나 정부가 오랫동안 목매온 절차였다. 미국은 FTA가 발효된 뒤 1년 안에만 여유 있게 협정문에 맞게 관련 법령을 수정하면 됐지만, 한국은 발효 전까지 관련 국내법을 다 뜯어고쳐야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여 일 동안 미국이 손질된 한국의 국내법을 꼼꼼히 따져본 뒤에야 한-미 FTA는 공식 발효됐다.

김현종 “미국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

이렇게 오로지 한-미 FTA를 위해 바뀐 국내 법률은 23개에 이른다. 당시 법률이 1200여 개이던 것을 고려하면 국내 법체계의 대수술이라 할 만한 변화다. 여기에 시행령 16건, 시행규칙 18건, 고시·예규 9건을 더하면 한-미 FTA로 개정된 법령은 총 66개로 늘어난다. 정부가 한-미 FTA가 처음 타결된 2007년부터 발효 직전인 2011년 말까지 법령을 하나둘 손본 결과다. 개정된 법령 분야도 세제부터 지적재산권, 보건·의료, 방송통신, 독점 규제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반면 미국은 한-미 FTA로 바꾼 법령·규정이 8개뿐이다. 분야도 한국산상품 수입 절차 등을 바꾸려고 관세법이나 무역협정법을 고친 정도다. 양자 간 FTA를 체결했는데도 미국은 상품 교역 등에 관한 국내법만 일부 손질한 반면, 한국은 경제·사회 시스템을 대수술한 셈이다. 게다가 한국은 아직도 바꿔야 할 법령이 여럿 남아 있다. 단계적으로 개방 범위가 확대될 때마다 추가로 방송법, 약사법, 세무사법, 외국법자문사법 등을 개정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이 FTA를 국내법 체계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간단하다. 한-미 FTA 자체가 미국 제도를 한국에 이식하는 절차인 탓이다. 당연히 시스템을 통째로 이식받는 한국 처지에선 여러 준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실제 한국 쪽 협상 대표이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한-미 FTA를 가리켜 “미국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법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개정된 법령 개수만으로 협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주장대로 한국과 미국이 법체계가 다른 건 맞다. 성문법을 채택한 한국에서 FTA 협정은 기존 국내법에 우선한다. 한-미 FTA와 배치되는 모든 법률과 하위 규범은 별도의 개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무효가 된다는 의미다. 반면 불문법인 미국은 FTA가 그 자체로 법이 되지 않는다. 이에 미국은 자국법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FTA 이행법을 별도로 만들어 협정 내용을 이행한다. 연방법이나 주법에 배치되는 FTA 조항이 있다면 자동 무효가 된다. 그러나 이런 법체계의 차이는 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 법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이행법 제정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바뀐 법률

박균성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원장의 설명이다. “양자 간 협정을 체결할 때는 ‘상호주의 원칙’이 기본이다. 미국은 이행법률을 제정하며 한-미 FTA의 국내법적 효력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지만 우리는 무조건 비준 동의했다. 법체계와 상관없이 미국이 그렇게 국내법적 효력을 제한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결국 한국 정부가 앞뒤 재지 않고 한-미 FTA를 발효시키려다 국가의 고유 권한인 입법권 침해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실제 국내법 개정으로 미국식 제도는 한국에 그대로 옮겨졌다. 대표적인 게 의약품 시판을 허가하는 절차와 특허권을 연계하는 제도의 도입이다. 국내 제약사가 미국의 다국적 제약사가 특허권을 가진 의약품 복제약을 국내에서 판매하는 허가를 얻으려면,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이 특허권자에게 통지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나마 2015년 3월부터는 특허권자가 특허 침해를 주장하면 일정 기간 허가가 정지돼 복제약 시판이 늦어질 수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는 기업이 소비자 피해 구제·예방 방안을 제출하면 위법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과징금 등을 면제해주는 ‘동의의결제’도 미국식 제도다.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손질된 법령도 많다. 정부는 법 개정을 통해 2천cc 이상 중·대형 차량에 부과하던 개별소비세 부담을 줄여주고, 승용차의 세율도 낮춰줬다. 미국의 자동차 수출업체에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다. 지적재산권 분야도 변화폭이 크다. 상표법 개정으로 상표의 범위에 소리와 냄새까지 포함됐다. 지금껏 소리·냄새 상표 등록을 제대로 해오지 않은 한국에 불리한 상황이다. 저작권과 저작권 보호 기간이 50년에서 70년으로 늘어나 한국의 추가 로열티 부담도 가중됐다.
공공 영역은 축소됐다. 특히 ‘우체국 민영화’ 우려가 나올 정도로 정부의 우편 분야 서비스 영역이 쪼그라들었다. 국가가 독점해온 우편사업 범위가 축소된 것이다. 우체국 예금·보험에 관한 법률이 바뀐 탓에 새로운 우체국보험 출시는 불가능해졌다.
이처럼 한국의 시스템을 뒤흔드는 법령들이 시행된 지 1년 정도가 지났지만 효과나 부작용을 따져보기는 어렵다. 일단 변화된 제도의 영향을 측정하기엔 시행 기간이 아직 짧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충분히 흐른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캐나다 등은 조약 체결 뒤 인권영향평가

남희섭 변리사는 이렇게 비판했다. “상품이 오고 가는 문제는 한-미 FTA에서 극히 일부분이다. 중요한 건 미국이 한국의 공공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교역량 같은 경제적 효과만 따진다. 시스템 변화로 초래되는 사회·문화·경제적 분야에서의 문제를 수집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할 준비는 전혀 안 돼 있다. 반면 캐나다 등은 다른 국가와 FTA를 체결한 뒤 인권영향평가를 시행해 사회 전반에 대한 종합 평가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한-미 FTA로 정부의 행정권에도 벌써부터 상당한 제약이 생기고 있다. 공공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정부의 권한과 기능이 서서히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 올해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던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의 연기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소비자가 탄소 배출이 적은 차량을 구입할 때 최대 300만원의 보조금을 주되 탄소 배출이 많은 차량을 살 때는 최대 300만원의 부담금을 매겨 온실가스를 줄이는 정책을 펼 계획이었다. 1515억원의 예산까지 책정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갑자기 제도 시행을 2015년으로 늦췄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가 지난해 8월 환경부 장관에게 “이 제도안은 한-미 FTA협정을 위반하는 금지된 무역 기술장벽이 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 대해 미 당국도 공감하고 있다”는 의견을 보내 압력을 넣은 게 주된 원인이었다. 한국과 미국이 2011년 재협상 때 “양국은 자동차 연비 또는 온실가스 배출에 관한 강제적 새 기술 규정을 마련할때 비효과적이거나 부적절한 경우 도입할 수 없다”고 합의한 내용이 발목을 잡았다. 한국의 환경정책이 미국 자동차 업계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주장에 밀린 셈이다.

필사적으로 발효시킨 협정이 부메랑으로

제2의 저탄소 협력금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보건 정책으로 내건 금연정책도 그중 하나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3월6일 “담뱃값을 인상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고,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은 아예 담뱃값을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인상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송기호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지난해 11월 한 토론회에서 한-미 FTA 협정 때문에 금연정책 시행이 어렵거나 시행하더라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미 FTA로 한국의 담배 관세율이 40%에서 2027년까지 0%로 내려가면 수입 담배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소비자가 비싼 국산 담배 대신 값싼 수입 담배로 갈아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가 담배의 포장·라벨 등에 담배의 실상을 알리는 조처를 하고 담배 광고를 금지하는 등의 노력을 하면 미국 투자자(담배기업)의 문제제기로 손해배상을 해줘야 할 위험도 높다고 지적했다.
“한-미 FTA는 지금까지 한국이 체결한 FTA 중에서 (구속력이) 가장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한국에는 경제헌법과도 같다는 의미다. 환경정책이나 금연정책 등 공공정책이 가로막히고, 전기·철도 같은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우려가 계속 제기되는 건 이러한 한-미 FTA의 속성과 연관돼 있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의 지적이다. 정부가 필사적으로 발효시킨 한-미 FTA가 곧 부메랑으로 돌아와 정부의 손발을 자를 수 있다는 얘기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2013년 3월 17일 일요일

한-미 FTA 탓에 담뱃값 인상 어렵다


이글은 한겨레21 2013-03-18일자 제952호 기사 '한-미 FTA 탓에 담뱃값 인상 어렵다'를 퍼왔습니다.
[기획] 협정 체결 뒤 바뀐 법령 한국 66개·미국 8개, 미국식 제도 한국에 그대로 이식하는 경제헌법… 공공정책 가로막히지만 정부는 경제 효과만 따져

»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1년 11월29일 청와대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을 위한 개정법률 공포안에 서명하고 있다. 한-미 FTA로 바뀐 국내법 66개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1년 11월29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을 위한 개정법률 공포안에 서명했다. 일주일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한-미 FTA 비준안과 함께 날치기 처리한 법안들이었다. 법안 개정은 FTA 비준안 처리만큼이나 정부가 오랫동안 목매온 절차였다. 미국은 FTA가 발효된 뒤 1년 안에만 여유 있게 협정문에 맞게 관련 법령을 수정하면 됐지만, 한국은 발효 전까지 관련 국내법을 다 뜯어고쳐야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여 일 동안 미국이 손질된 한국의 국내법을 꼼꼼히 따져본 뒤에야 한-미 FTA는 공식 발효됐다.

김현종 “미국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

이렇게 오로지 한-미 FTA를 위해 바뀐 국내 법률은 23개에 이른다. 당시 법률이 1200여 개이던 것을 고려하면 국내 법체계의 대수술이라 할 만한 변화다. 여기에 시행령 16건, 시행규칙 18건, 고시·예규 9건을 더하면 한-미 FTA로 개정된 법령은 총 66개로 늘어난다. 정부가 한-미 FTA가 처음 타결된 2007년부터 발효 직전인 2011년 말까지 법령을 하나둘 손본 결과다. 개정된 법령 분야도 세제부터 지적재산권, 보건·의료, 방송통신, 독점 규제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반면 미국은 한-미 FTA로 바꾼 법령·규정이 8개뿐이다. 분야도 한국산상품 수입 절차 등을 바꾸려고 관세법이나 무역협정법을 고친 정도다. 양자 간 FTA를 체결했는데도 미국은 상품 교역 등에 관한 국내법만 일부 손질한 반면, 한국은 경제·사회 시스템을 대수술한 셈이다. 게다가 한국은 아직도 바꿔야 할 법령이 여럿 남아 있다. 단계적으로 개방 범위가 확대될 때마다 추가로 방송법, 약사법, 세무사법, 외국법자문사법 등을 개정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이 FTA를 국내법 체계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간단하다. 한-미 FTA 자체가 미국 제도를 한국에 이식하는 절차인 탓이다. 당연히 시스템을 통째로 이식받는 한국 처지에선 여러 준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실제 한국 쪽 협상 대표이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한-미 FTA를 가리켜 “미국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법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개정된 법령 개수만으로 협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주장대로 한국과 미국이 법체계가 다른 건 맞다. 성문법을 채택한 한국에서 FTA 협정은 기존 국내법에 우선한다. 한-미 FTA와 배치되는 모든 법률과 하위 규범은 별도의 개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무효가 된다는 의미다. 반면 불문법인 미국은 FTA가 그 자체로 법이 되지 않는다. 이에 미국은 자국법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FTA 이행법을 별도로 만들어 협정 내용을 이행한다. 연방법이나 주법에 배치되는 FTA 조항이 있다면 자동 무효가 된다. 그러나 이런 법체계의 차이는 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 법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이행법 제정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바뀐 법률

박균성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원장의 설명이다. “양자 간 협정을 체결할 때는 ‘상호주의 원칙’이 기본이다. 미국은 이행법률을 제정하며 한-미 FTA의 국내법적 효력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지만 우리는 무조건 비준 동의했다. 법체계와 상관없이 미국이 그렇게 국내법적 효력을 제한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결국 한국 정부가 앞뒤 재지 않고 한-미 FTA를 발효시키려다 국가의 고유 권한인 입법권 침해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실제 국내법 개정으로 미국식 제도는 한국에 그대로 옮겨졌다. 대표적인 게 의약품 시판을 허가하는 절차와 특허권을 연계하는 제도의 도입이다. 국내 제약사가 미국의 다국적 제약사가 특허권을 가진 의약품 복제약을 국내에서 판매하는 허가를 얻으려면,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이 특허권자에게 통지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나마 2015년 3월부터는 특허권자가 특허 침해를 주장하면 일정 기간 허가가 정지돼 복제약 시판이 늦어질 수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는 기업이 소비자 피해 구제·예방 방안을 제출하면 위법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과징금 등을 면제해주는 ‘동의의결제’도 미국식 제도다.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손질된 법령도 많다. 정부는 법 개정을 통해 2천cc 이상 중·대형 차량에 부과하던 개별소비세 부담을 줄여주고, 승용차의 세율도 낮춰줬다. 미국의 자동차 수출업체에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다. 지적재산권 분야도 변화폭이 크다. 상표법 개정으로 상표의 범위에 소리와 냄새까지 포함됐다. 지금껏 소리·냄새 상표 등록을 제대로 해오지 않은 한국에 불리한 상황이다. 저작권과 저작권 보호 기간이 50년에서 70년으로 늘어나 한국의 추가 로열티 부담도 가중됐다.
공공 영역은 축소됐다. 특히 ‘우체국 민영화’ 우려가 나올 정도로 정부의 우편 분야 서비스 영역이 쪼그라들었다. 국가가 독점해온 우편사업 범위가 축소된 것이다. 우체국 예금·보험에 관한 법률이 바뀐 탓에 새로운 우체국보험 출시는 불가능해졌다.
이처럼 한국의 시스템을 뒤흔드는 법령들이 시행된 지 1년 정도가 지났지만 효과나 부작용을 따져보기는 어렵다. 일단 변화된 제도의 영향을 측정하기엔 시행 기간이 아직 짧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충분히 흐른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캐나다 등은 조약 체결 뒤 인권영향평가

남희섭 변리사는 이렇게 비판했다. “상품이 오고 가는 문제는 한-미 FTA에서 극히 일부분이다. 중요한 건 미국이 한국의 공공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교역량 같은 경제적 효과만 따진다. 시스템 변화로 초래되는 사회·문화·경제적 분야에서의 문제를 수집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할 준비는 전혀 안 돼 있다. 반면 캐나다 등은 다른 국가와 FTA를 체결한 뒤 인권영향평가를 시행해 사회 전반에 대한 종합 평가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한-미 FTA로 정부의 행정권에도 벌써부터 상당한 제약이 생기고 있다. 공공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정부의 권한과 기능이 서서히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 올해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던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의 연기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소비자가 탄소 배출이 적은 차량을 구입할 때 최대 300만원의 보조금을 주되 탄소 배출이 많은 차량을 살 때는 최대 300만원의 부담금을 매겨 온실가스를 줄이는 정책을 펼 계획이었다. 1515억원의 예산까지 책정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갑자기 제도 시행을 2015년으로 늦췄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가 지난해 8월 환경부 장관에게 “이 제도안은 한-미 FTA협정을 위반하는 금지된 무역 기술장벽이 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 대해 미 당국도 공감하고 있다”는 의견을 보내 압력을 넣은 게 주된 원인이었다. 한국과 미국이 2011년 재협상 때 “양국은 자동차 연비 또는 온실가스 배출에 관한 강제적 새 기술 규정을 마련할때 비효과적이거나 부적절한 경우 도입할 수 없다”고 합의한 내용이 발목을 잡았다. 한국의 환경정책이 미국 자동차 업계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주장에 밀린 셈이다.

필사적으로 발효시킨 협정이 부메랑으로

제2의 저탄소 협력금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보건 정책으로 내건 금연정책도 그중 하나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3월6일 “담뱃값을 인상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고,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은 아예 담뱃값을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인상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송기호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지난해 11월 한 토론회에서 한-미 FTA 협정 때문에 금연정책 시행이 어렵거나 시행하더라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미 FTA로 한국의 담배 관세율이 40%에서 2027년까지 0%로 내려가면 수입 담배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소비자가 비싼 국산 담배 대신 값싼 수입 담배로 갈아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가 담배의 포장·라벨 등에 담배의 실상을 알리는 조처를 하고 담배 광고를 금지하는 등의 노력을 하면 미국 투자자(담배기업)의 문제제기로 손해배상을 해줘야 할 위험도 높다고 지적했다.
“한-미 FTA는 지금까지 한국이 체결한 FTA 중에서 (구속력이) 가장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한국에는 경제헌법과도 같다는 의미다. 환경정책이나 금연정책 등 공공정책이 가로막히고, 전기·철도 같은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우려가 계속 제기되는 건 이러한 한-미 FTA의 속성과 연관돼 있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의 지적이다. 정부가 필사적으로 발효시킨 한-미 FTA가 곧 부메랑으로 돌아와 정부의 손발을 자를 수 있다는 얘기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한-미FTA 1년, ‘경제영토 확장’ 없었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3-03-13일자기사 '한-미FTA 1년, ‘경제영토 확장’ 없었다'를 퍼왔습니다.

지난해 3월15일 오전 서울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 발효 기념 오찬에서 두 나라 참석자들이 손뼉을 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경제효과 살펴보니수출
늘었지만 무역규모는 줄어

수출 538억달러…전년보다 2.7%↑
무역규모 1.8%↓…홍보 비해 초라
미와 FTA 안한 일본은 무역 늘어
자동차업종 수혜 커 ‘함박웃음’

공공정책, 미에 잇따라 발목잡혀
주권훼손 우려에 재협상 더 절실

15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1주년을 맞는다. 협상 단계부터 한국 사회에 많은 논란을 남긴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발효 이후에도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자유무역협정의 경제적인 효과는 물론이고,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재협상, 공공정책 훼손 우려, 쇠고기 시장 개방 압력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 흑자는 늘었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성적표로는 한국이 상대적인 이익을 누렸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3월부터 올해 1월까지 대미 수출 538억달러를 기록했다. 전년 같은 기간(524억달러)에 견줘 2.7% 늘었다. 또 수입은 391억달러로 7.3% 줄며 무역수지는 45억달러 흑자(44.1% 증가)를 냈다.하지만 애초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경제 영토의 확장’을 이룰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에 비해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다. 지난해 3월 자유무역협정 체결로 우리나라는 7218개 품목(85.6%), 미국은 6175개 품목(87.6%)의 관세가 사라졌는데도 오히려 전체 무역규모는 946억달러에서 929억달러로 1.8% 줄었다. 더욱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않은 일본과 비교하면, 성적은 더욱 초라하다. 일본은 같은 기간 대미 수출 1274억달러를 기록하며, 무역수지 579억달러 흑자를 달성했다. 무역규모 역시 1970억달러로, 5.6%의 증가율을 보였다.자유무역협정의 대표적인 수혜 업종은 자동차다. 현대차는 지난해 3~12월 35만3405대를, 기아차는 31만2376대를 수출했다. 각각 11%, 11.4% 늘었다. 같은 기간 대미 수출 증가율의 다섯배에 가깝다. 자동차 부품 역시 큰 재미를 봤다.

■ 계속되는 주권 훼손 우려 국토해양부는 지난해 8월 ‘자동차안전기준 시행세칙’ 일부 개정안을 공고했다. 미국·유럽연합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뒤 두 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 차량에는 우리의 안전기준을 적용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시행세칙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안전기준을 준수하면 국내 안전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인정해왔다. 여기에 세계무역기구(WTO)의 차별금지 원칙에 따라 다른 나라의 수입차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 국토부는 “자유무역협정 발효로 별도 안전기준이 마련됐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간소한 안전기준만을 충족한 제3국 차량이 수입돼, 우리나라 자동차 안전기준 관리에 위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개정 배경을 설명했다.하지만 미국 쪽 반발 때문에 이 개정안은 아직도 처리되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 정부와 자동차 업체들이 시행세칙 개정에 반발했다. 미국 업체들이 미국 외 다른 나라에서도 자동차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우리 쪽에서 ‘주권 침해’라며 반발도 있지만, 두 나라의 공동위원회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공공정책이 미국의 반발로 발목이 잡힌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환경부가 2008년부터 추진하던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도 미국 정부와 자동차 업체의 반발로 시행 시기를 2013년에서 2015년으로 미뤘다. 우체국보험의 한도 확대, 굴착기의 신규 등록을 제한하는 건설기계 수급조절 정책 등은 자유무역협정 발효 이전에 제동이 걸렸다. 모두 한-미 자유무역협정 위반 등을 이유로 내세웠다.최근 기획재정부가 무소속 박주선 의원실에 제출한 ‘한-미 자유무역협정 이행법령 목록’을 보면, 한-미 자유무역협정 탓에 23건의 법률을 비롯해 시행령(16건), 시행규칙(18건), 고시·예규(9건) 등이 개정됐다. 향후 개방 범위가 늘어나면서 법률 개정은 더 늘 전망이다. 여기에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제기한 투자자-국가 소송제 역시 사법주권의 위기를 보여준다는 우려를 키운다.송기호 변호사는 “지난 1년간 우리나라 제도가 미국 회사의 이익에 맞게 변경되거나 우리 사회에 맞는 공공정책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줬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재협상 필요성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론도 있다. 최원묵 이화여대 교수(법학)는 “북핵 등 다른 정치적 이유로 미국과 갈등을 꺼리는 등 제도를 잘 만들어놓고 활용을 제대로 안 하는 것이 문제이지 자유무역협정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공공정책 역시 문제가 있으면 두 나라간 협상을 통해 보완해 나가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쇠고기시장 추가개방 등
미 통상압력 더 커질듯

오바마 “2014년까지 수출 2배”
무역적자 등 협상요구 움직임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한국에 대한 통상 압력이 거세질 전망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목표로 제시한 ‘2014년까지 수출 2배, 200만개 일자리 창출’ 등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미국 통상 전문지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는 최근 “오바마 행정부가 한국·콜롬비아·파나마 등에 양자 협의나 다른 수단을 동원해 농산물 시장 개방과 위생수준, 지적재산권 등에 대한 의무를 강화하도록 압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같은 전망은 이미 현실화돼 나타나고 있다.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미국 중소기업 무역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보고서를 작성해 5월1일까지 제출하도록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지시했다. 무역대표부는 이 보고서를 근거로 두 나라가 설립한 실무그룹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무역적자 개선과 중소기업 불이익에 대한 협상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무역협회 조성대 연구위원은 “미국이 상당한 무역적자를 보고 있어 한국 수출품의 원산지 증명 검증 등의 압력과 함께 개방 압력이 가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여기에 쇠고기 시장도 압력에 시달릴 전망이다. 최경림 외교통상부 자유무역협정 교섭대표는 지난 2월 “최근 미국 워싱턴에서 웬디 커틀러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보를 만나 대화하는 중 쇠고기 추가 개방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고 밝혔다.만약 미국이 쇠고기 협상을 요청하면 우리 나라는 의무적으로 이에 응해야만 한다. 2008년 미국과 맺은 한-미 수입위생조건 협의 조항(제25조)은 ‘두 나라 가운데 한쪽이 협의를 요청하면 7일 안에 상대방이 응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미 일본은 쇠고기 수입 조건을 완화했다. 지난 2월1일 일본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을 20개월 미만에서 30개월 미만으로 수입 폭을 늘렸다.

이정훈 기자

ISD 재협상·개성공단 제품 원산지 인정 ‘감감’

여전히 풀지 못한 과제들

ISD, 소관부처 바뀌어 ‘제자리’
전문직 비자쿼터 확보 오리무중
수출기업 관세혜택 물량도 적어

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약속한 투자자-국가소송제(ISD) 재협상을 비롯해 개성공단 제품 원산지 문제, 전문직 비자 쿼터 등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지 1년이 다 돼 가도록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새 정부에서 담당 부처가 외교통상부에서 산업통상자원부로 옮겨가면서 관련 업무가 제자리 걸음이다.우선 투자자-국가소송제 재협상은 지난해 3월 우리 정부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태스크포스(TF)팀이 12월에 해산된 상황이다. 태스크포스팀은 정부에 안을 제출했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최근 국회에서 “일단 재협상이 될 지, 재협의가 될 지 형식에 대해서는 사전에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될 부분이 있다. 준비가 되는 대로 추진하겠다“고 답했다.개성공단 등 역외 가공지역의 생산제품에 대한 원산지 인정 문제도 남아있다. 부속서에는 △한반도 비핵화 진전 △역외가공지역 지정이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 △역외가공지역 내 일반 환경기준, 근로기준·관행, 임금, 경영·관리 관행 등에 관한 기준을 설정해 충족 여부에 따라 원산지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상황에서 올해 열릴 ‘한반도 역외 가공지역위원회’에서 이를 다루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이밖에 전문직 비자 쿼터, 낮은 자유무역협정 활용 등의 문제도 남아있다.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성과 가운데 하나로 전문직 비자 쿼터 확보를 내세웠다. 미국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나라들에 전문직 비자쿼터를 선물로 줬다. 호주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뒤 1만여개의 쿼터를 배정받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황이다.수출기업의 자유무역협정 활용률 역시 지난해 연말 68.9%로, 여전히 상당수 기업들이 자유무역협정의 수혜를 입지 못하고 있다. 활용률이란 관세혜택을 받을 수 있는 수출입 물량에서 실제로 관세혜택을 적용받은 물량의 비중을 뜻한다. 중소기업청·관세청 등에서 자유무역협정의 수혜를 제공하기 위해 관련 부서를 신설했지만 아직 미흡하다.대구의 한 수출중개업체는 “원산지 증명이 까다로운 탓에 이를 할 수 있는 업체에게 물량을 주문할 수밖에 없어 중소기업에겐 수출 주문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2013년 1월 22일 화요일

환경 예외 조항? 국제중재재판에서 유명무실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3-01-22일자 기사 '환경 예외 조항? 국제중재재판에서 유명무실했다'를 퍼왔습니다.
[연속 기고 - 론스타 ⑧] ISD 사례를 통해 본 공공정책과 투자자 권리

2012년 11월 22일, 론스타가 결국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소송(ISD)을 제기했다. 10년간 지속된 론스타 문제가 왜 생겼는지, 제2의 론스타 사태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짚어봐야 할 대목이 많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치 공학이 모든 이슈를 삼켜버린 듯한 대선에서 론스타와 ISD는 주요 쟁점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론스타 문제는 그렇게 적당히 묻어버려도 좋을 만큼 만만한 사안이 아니다. 찬찬히 쟁점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선은 끝났지만, 론스타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에 (프레시안)은 론스타 문제를 집중조명하는 김익태 변호사의 글들을 게재한다. 김 변호사는 미국 변호사로서 헌법재판소 헌법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통상교섭본부 민간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이 분야 전문가다. 2012년 8월 한미FTA와 ISD 문제를 다룬 이라는 책도 펴냈다. (편집자)

[연속 기고 - 론스타]
 ① "론스타 소송, 패소하면 전 국민이 5만 원인데…"
② ISD,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투자금 내놓으라는 격
③ 전두환 정부는 미국 무기 회사에 얼마를 건넸을까?
④ '제2의 론스타'로 가는 지름길 민영화, 박근혜는…
⑤ 투자자국가소송, 이제 골목을 노린다
⑥ 국제중재재판은 공정하다? 천만의 말씀
⑦ 한미FTA의 기묘한 서문에 담긴 비밀

북미자유무역협정인 NAFTA는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이다. 자유무역협정(FTA)의 창시자인 미국은 NAFTA를 통해서 투자자-국가 소송제인 ISD를 충분히 경험하고 이어 그 장단점을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미국은 FTA에 의한 ISD 소송에서 단 한 차례도 패소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국의 패소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하여 NAFTA를 개정하였고 이어 "외국인 투자자가 미국에서 미국인 투자자보다 더 많은 보호를 받을 수 없음"을 밝힌 서문의 조항을 삽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바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NAFTA에 이어, 중미FTA인 CAFTA 와 미-페루 FTA를 체결하였다.

미국의 민간단체인 퍼블릭 시티즌(Public Citizen, www.citizen.org)이 2012년 1월에 발표한 범NAFTA의 ISD 사건을 분석한 자료(Table of Foreign Investor-State Cases and Claims under NAFTA and other U.S. Trade Deals)가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총 72건의 ISD 사건 중, 기각되어 국가 승소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15건이며 투자자 승소 사건은 10건이다. 나머지는 계류 중이거나 소송이 개시되지 않은 사건들이다. 그런데, 10건의 승소 사건은 모두 미국인 투자자의 사건이었으며, 미국은 자국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단 한 건도 패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이다.

한미FTA가 발효된 지금, 론스타의 뒤를 이어 미국 투자자의 ISD 소송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당장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론스타 또한 한미FTA를 이용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런 시점에서 기존의 ISD 소송을 돌아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위에서 밝힌 NAFTA를 위시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72건의 소송에 대한 퍼블릭 시티즌의 자료를 검토하고 세 가지 경향성을 발견했다. 이 중 민영화의 폐해에 대한 부분은 지난 연재에서 다루었던 바, 나머지 두 가지 경향성을 소개한다.

(1) 미국 투자자의 남소(濫訴) 경향성

미국이 자국의 칠링 이펙트(Chilling Effect)에 대해서는 세심한 우려를 표하는데 반해, 미국의 투자자는 타국을 상대로 다분히 남소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대표적인 남소는 인허가와 관련하여 처리 지연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한 보상 청구이다.

2011년 세인트 메리(St. Mary's VCNA, LLC) 사건을 보면, 미국 투자자가 캐나다 주정부의 여러 가지 조치로 인하여 사업 허가가 늦어진 점을 들어 캐나다 연방정부를 제소하였다. 허가가 늦어져서 사업에 손실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현재 약 3000억 원의 배상금을 두고 계류 중이다.

2008년의 퍼시픽 림(Pacific Rim Corp) 사건은, 캐나다 회사가 엘살바도르 금광 허가권을 요청한 후, 환경과 식수 오염에 대한 엘살바도르 국내 반대 여론에 부딪혀 이에 대한 처리가 미루어지자 미국의 지사를 통하여 소송을 제기한 사건으로서, 인허가 지연에 관한 또 다른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엘살바도르와 FTA를 맺지 않은 캐나다 투자자가 미국 지사를 통해 제소한 사건으로서 론스타 사건의 경우처럼 ISD 사건의 입체적 제소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좀 더 심각한 남소 사례들도 찾아볼 수 있다.

1999년 스콧 애쉬톤(Scott Ashton Blair) 사건의 경우, 멕시코에서 주택과 식당을 구입한 미국인 투자자가 멕시코 행정 기관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다. 청구액은 알려지지 않았고 소송은 개시조차 되지 않았다. 소송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대표적 남소 사례다.

2000년 제기된 아담스(Adams, et al) 사건은 또 다른 남소 사례다. 미국인 투자자가 매입한 부동산이 실소유자로부터 산 것이 아니므로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멕시코 법원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 사건으로서, 자신의 귀책 여부와 상관없이 타국 사법부의 판결을 국제투자중재재판소(ICSID)에 가져가서는 소송은 개시조차 하지 않은 사건이다.

2001년 프랜시스 케네스(Francis Kenneth Haas) 사건은 멕시코 사업 파트너에게 사기를 당한 미국인 투자자가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서는 개시조차 안 한 또 하나의 사건이다.

2009년에 캐나다를 상대로 있었던 크리스토퍼(Christopher and Nancy Lacich) 사건의 경우, 소송 액수는 미화 1176달러(한화 120만 원) 상당의 액수이다. 집단 소송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국을 상대로 벌이는 소송치고는 그 액수가 터무니없다.

미국을 상대로 한 남소 사례는 없다. 한데, 미국인 투자자의 남소 경향성은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약소국에 대한 무시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상대국이 어떻게든 겪게 될 칠링 이펙트를 감안할 때, 이런 식의 남소는 심심해서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 형국이다.

한미FTA 체결 이후, 소송에 익숙한 미국인 투자자가 한국에서 투자 손실을 입었을 때 손쉬운 방편으로 소송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론스타 소송과 관련하여 범정부 차원에서 대책팀(Task Force)이 꾸려져 있다고 발표된 바 있다. TF의 구체적인 논의나 대책 방안에 대해서는 공개된 바가 없으나, 차제에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전문성을 담보한 국가 소송 기구의 설치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2008년에 국가 소송을 전문으로 담당하기 위한 정부 출연 기관인 정부법무공단이 발족했다. 일반 로펌과 같이 수임료를 받는다는 점에서 미국과는 다르나, 국가나 정부를 상대로 제기되는 소송을 전문적으로 담당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Solicitor General's Office 모델과 비슷하다. 이 조직이 출범하면서 활동 업무 중의 하나로 ISD에 대한 준비를 잡은 점도 눈에 띈다. 현재 정부법무공단이 이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문성 확보의 측면을 고려할 때 이러한 형태보다는 법무부 산하에 조직을 두어 정부 예산으로 운영하는 방법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번 외부 로펌을 고용해야 하는 데서 발생하는 혼란과 일관성 결여 문제를 덜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 중앙정부를 상대로 제기되는 소송을 전담하는 기구를 정부 산하에 둘 필요가 있다.

▲ ICSID 홈페이지. ⓒICSID

(2) 환경과 공공정책에 대한 소송

앞서 밝혔듯이, 10여 건의 승소는 모두 미국인 투자자가 제기한 사건들이다. 그 사건들을 보면 대부분 환경이나 보건 등 공공정책에 연관되어 있는 사건들이다. 계류 중인 사건들 또한 거의 모두 이와 관련된 사건들인데 소송 액수는 95억 달러, 한화 약 10조원 정도다.

정부는 한미FTA 체결 시, 환경이나 보건 등에 관한 국가의 조치는 예외 사항에 해당하기 때문에 투자자가 이를 빌미로 제소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정부가 발행한 "한미FTA 주요 내용"에 의하면, "투자와 환경(Investment and Environment) (제.11.10조.) 챕터에 합치하는 범위 내에서 당사국은 투자 활동이 환경에 대해 민감성을 고려하면서 사업이 수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일견, 이러한 조항은 투자 유치국의 환경 입법과 조치에 관한 최대한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조항은 이미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 당시 환경 단체들의 입장을 반영하여 환경 보호에 관한 투자 유치국의 입법과 행정 조치를 보장하기 위하여 삽입되어 있는 NAFTA 제11장에 있는 환경에 관한 예외 조항과 똑같은 문장이다. 비교해 보자.

(한미FTA와 NAFTA의 환경에 관한 예외 조항 비교)

한미FTA
ARTICLE 11.10: 투자와 환경
(INVESTMENT AND ENVIRONMENT)

Nothing in this Chapter shall be construed to prevent a Party from adopting, maintaining, or enforcing any measure otherwise consistent with this Chapter that it considers appropriate to ensure that investment activity in its territory is undertaken in a manner sensitive to environmental concerns.

NAFTA
Article 11.14환경에 관한 조치
(Environmental Measures)

Nothing in this Chapter shall be construed to prevent a Party from adopting, maintaining or enforcing any measure otherwise consistent with this Chapter that it considers appropriate to ensure that investment activity in its territory is undertaken in a manner sensitive to environmental concerns.

하지만 이 조항이 실제로 투자자-국가 분쟁 시 투자 유치국의 환경 보호에 관한 조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중재재판부의 해석은 이 조항을 무력화하는 쪽으로 이루어졌다. 국제투자중재재판소는 환경 문제와 관련한 소송 예외 조항에도 불구하고 "환경 목적의 진정성(genuine environmental purpose)"을 들어 투자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왔다.

미국 회사가 멕시코를 상대로 ICSID에 1996년 제소를 한 메타글레드(Metaclad v. Mexico) 사건을 보자. 메타클레드라는 미국 회사가 유독성 폐기물 처리 시설을 짓기 위해 멕시코 지자체에 건축 허가를 신청하여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공장 부지가 위치한 지자체 정부는 건축 허가 조건으로 이미 존재하는 유독성 폐기물에 의한 오염을 제거하고 공장 건축과 더불어 환경기금을 조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메타클레드는 지자체의 요구를 거절했고 지자체는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에 메타클레드는 ICSID에 제소해 승소했다. ICSID는 총 1560만 달러, 한화 약 180억 원을 배상할 것을 명령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간접 수용에 관한 재판부의 이유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멕시코 주정부 조치의 동기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고 곧바로 "이러한 조치는 간접 수용에 해당한다"라고 판단했다. 이유 없이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또한, 에스디 마이어스 사건(S.D. Myers v. Canada)의 경우, 캐나다 정부가 다자 간 국제 환경 협약을 준수하기 위해 유해성 폐기물의 해외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자 캐나다에 지사를 둔 미국의 수입업자가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수출 금지 기간은 16개월이었으며, 이 조치는 캐나다의 모든 기업에 내려진 환경 관련 처분이었다. 한데, 중재재판부는 "이러한 조치는 캐나다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작위적인 조치였으며 환경 보호와는 무관하다"라고 판단하였다. 환경과 관련한 정부의 조치에 대해 재판부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잣대를 들이댄 결과였다.

이러한 경향성은 국제투자중재재판부가 투자 유치국의 환경과 관련한 조치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심사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사실상 환경과 관련한 조치에 대한 ISD 금지 조약을 무력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런 점에서, NAFTA와 똑같은 한미FTA의 예외 조항이 환경 관련 조치에 대해 얼마나 실제적으로 작용할지 의문이다. 정부는 일관되게 환경 조치는 한미FTA 하에서 ISD 예외 조항임을 들어 환경 조치 안전론을 펴왔는데, 기존의 NAFTA 사건들을 분석해 볼 때, 근거 없는 낙관론은 아닌지 우려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기존의 ISD에 대한 검토는 이후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될 수 있는 소송에 대비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는 단지 중앙정부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지방자치정부 또한 이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가래로 막을 것을 서까래로 막는 상황은 피해야 할 것이다.


 /김익태 변호사 

2012년 12월 9일 일요일

한국, 자본의 법정에 서다


이글은 한겨레21 2012-12-10일자 제939호 기사 '한국, 자본의 법정에 서다'를 퍼왔습니다.
[특집] 식민지 해방되자 투자한 자본 보호하려 제국주의가 고안한 ISD,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소송 제기…한국에 불리한 판례 있고 정부 대리했던 로펌까지 론스타 변호, 사법주권·공공정책 벼랑 끝에

론스타는 잃을 것 없는, 한국은 잃을 것밖에 없는 투자자-국가 소송(ISD)이 시작됐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는 11월21일 오전(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센터(ICSID)에 ISD 청구서를 제출했다. 지난 5월22일 한국 정부의 차별적 조처로 수십억유로(수조원)의 손해를 입었다며 중재의향서를 낸 론스타가 냉각(협의) 기간 6개월이 끝나자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본격적인 국제중재에 돌입한 것이다. 그만큼 자신만만하고 철저히 준비했다는 의미다. 이로써 한국은 1967년 ICSID에 가입한 이후 45년 만에 처음으로 ISD를 당하게 됐다.

‘먹튀’ 론스타, 두 가지 손실 주장

» 론스타가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부당하게 늦춰 수조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지만 한국 정부는 론스타가 자초한 일이라고 반박한다. 론스타가 외환카드 주가조작이라는 중대 범죄를 저질러 2011년 10월에야 유죄판결이 최종 확정됐기 때문이다. 2008년 1월12일,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중앙)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모습.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론스타는 2003년 한국에 설립한 론스타코리아를 통해 외환은행을 인수했다가 2008년 벨기에에 세운 페이퍼컴퍼니인 ‘LSF-KEB홀딩스’로 운영 주체를 바꾼 뒤 2012년 1월 하나금융그룹에 외환은행을 매각했다. 매각액은 3조9156억원. 론스타가 투자한 원금 2조1549억원을 웃돌 뿐 아니라, 지난 9년간 배당 등을 통해 회수한 2조9027억원까지 합치면 투자수익률은 200%를 훨씬 넘는다. ‘먹튀’ 논란이 거셌지만 정부는 양도소득세 3915억원만 거둬들이고 론스타를 풀어줬다.
그런데 론스타가 자신들이 아직도 더 챙겨야 할 몫이 있다고 지난 5월 돌아왔다. 손에는 ISD라는 칼을 들고 말이다. ISD란 상대국 정부가 투자협정상 의무를 위반해 외국 투자자가 손실을 입었을 경우, 그 투자자가 정부를 상대로 국제중재를 청구하는 제도다. 지난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 비준 동의를 앞두고 ‘독소조항’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바로 그 제도다. 한국은 한-미 FTA를 포함해 6개 FTA, 81개 투자보장협정(BIT)에 ISD를 허용하고 있다. 론스타는 1976년에 체결해 2011년 3월에 개정한 한-벨기에 투자협정을 근거로 삼았다.
론스타가 주장하는 손실은 두 가지다. 첫째, 2003년 10월 외환은행 지분 51%를 1조3830억원에 매입한 론스타는, 2006년 KB금융지주, 2007년 싱가포르의 DBS은행, 2007년 HSBC에 외환은행 지분을 매각하려고 잇따라 주주매매계약을 체결했지만 한국 정부가 여론을 의식해 매각 승인을 부당하게 늦췄다는 것이다. “론스타의 수익 창출을 여론이 ‘먹튀’라고 비판하자 한국 정부가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법적으로 매수자의 적정성만 따지면 되는데 매도자인 론스타의 자격을 문제 삼아 매각이 여러 차례 좌절됐다.” 그 결과 2조4천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둘째, 낼 이유가 없는 세금을 내서 손실을 입었단다. 하나은행에 외환은행을 매각한 주체는 벨기에 회사인 LSF-KEB홀딩스인데, 벨기에와 한국은 조세조약(이중과세 방지협정)을 맺고 있다. 이 협정을 보면, 벨기에 회사가 한국에 투자해 수익을 얻으면 벨기에 정부가 과세권을 갖는다. 하지만 벨기에는 해외 주식투자 소득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아 론스타는 결과적으로 어디에도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다. 미국 텍사스주에 기반을 둔 론스타가 벨기에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한국에 우회 투자한 이유다.

엑손모빌·머피오일 vs 캐나다 정부

론스타는 이런 주장을 내세워 앞서 한국 법원에 소송을 냈다. 하지만 모두 패소했다. 정부가 ISD에 대해서도 “120% 승소”를 자신하는 이유다. 매각 승인 지연의 경우 론스타가 외환은행 주가조작이라는 중대 범죄를 저질러 자초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주가조작 사건을 수사하며 금융 당국에 매각 승인을 보류해왔고, 2011년 10월에야 론스타의 유죄가 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그 이후에야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을 금융 당국이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과세와 관련해서도 대법원이 7년간 소송 끝에 국세청에 승소 판결한 바 있다. 2004년 12월 서울 강남 스타타워빌딩(강남파이낸스센터) 주식을 매각한 뒤 론스타는 양도소득세와 법인세를 내지 않으려고 행정소송을 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1월 벨기에 법인은 론스타가 조세회피 목적으로 세운 페이퍼컴퍼니에 불과해 한-벨기에 조세조약의 혜택을 입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 참여연대 회원들이 지난 5월24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앞에서 ‘론스타의 외환은행 부당이득 환수 추진을 위한 주주 모집’ 기자회견을 열었다(왼쪽). 하지만 투자수익률 200%를 달성한 론스타는 투자자-국가 소송(ISD)으로 추가 이득을 얻어낼 심산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 비준 동의를 앞두고 ISD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라 2011년 10월 국회 끝장토론이 열렸을 때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현 새누리당 의원·오른쪽 사진 왼쪽)은 “ISD는 한국에 필요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한겨레 박종식, 한겨레 강창광

한발 더 나아가 시민사회는 론스타가 비금융주력자(산업자본)인데도 이를 숨기고 외환은행 대주주 자격을 얻었기에 원천 무효라고 주장한다. 당시 은행법은 산업자본이 금융기관 주식을 4% 초과해 보유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3월 외환은행 소액주주가 제기한 의결권행사금지 가처분 사건에서, “2005년부터 2011년까지 론스타는 산업자본에 해당함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의 기대처럼 한국의 사법적 판단을 ISD가 존중할까? 그동안의 판례를 보면 불행히도 아니다. 미국 정유업체인 엑손모빌과 머피오일이 캐나다 뉴펀들랜드주를 상대로 낸 ISD 사건을 보자. 캐나다 주정부는 엑손모빌 등이 뉴펀들랜드의 래브라도반도와 섬 주변에서 유정 개발 사업을 하며 발생한 이익금의 일부를 지역사회를 위한 연구개발비로 투자하도록 했다. 이에 반발해 미국계 정유업체는 캐나다 법원에 소송을 냈다. 캐나다 법원은 국내법에 따라 이들의 주장을 세 차례나 기각했다. 결국 이들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위반이라며 6천만달러를 요구하며 ISD를 제기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 5월 캐나다 주정부의 행위가 ‘이행요건 부과 금지’(투자인가의 조건으로 투자자에게 일정한 의무를 부담하게 하는 것을 금지)에 해당한다며 미국계 정유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캐나다의 사법적 판단이 무력화된 것이다.
한국 대법원은 ‘사법주권’ 침해의 위험성을 이미 경고했었다. 대법원은 2006년 6월 한-미 FTA 협상 당시 법무부의 요청에 따라 ISD에 관한 검토 의견서를 제출했다. “미국 투자자의 중재 청구가 더 많을 것으로 예상돼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제소에 따른 대응 등 상당한 부담이 작용한다. 중재 청구 대상에 사법부의 재판을 배제할 수 없다면 극심한 법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등 부작용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미국의 재판 절차와 판결을 중재판정부가 심판한 로언 사건을 사례로 들었다. 캐나다 장의업체인 로언이 1995년 미국 미시시피 주법원에서 5억달러를 배상하라는 배심원 평결을 받자, NAFTA 위반이라며 ISD를 청구했다. 중재판정부는 절차상 문제를 들어 기각 결정을 내지만 사법부 판결이 중재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ISD는 이처럼 투자를 받는 국가에 부담이 되는 제도다. 다국적 투자자가 현지 판결·공공정책 등을 무력화하는 무기로 ISD를 휘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ISD를 둘러싼 전선은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자본 대 국가’로 그어진다. 특히 ISD에서 가가 패소하면 대자본이 요구한 손실보상을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시장적 남미나 당하는 소송이라더니

한마디로 정리하면 ISD는 이처럼 투자를 받는 국가에 부담이 되는 제도다. 다국적 투자자가 현지 판결·공공정책 등을 무력화하는 무기로 ISD를 휘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ISD를 둘러싼 전선은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자본 대 국가’로 그어진다. 공공정책·경제민주화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 다수의 국민과, 시장에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대자본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ISD에서 국가가 패소하면 대자본이 요구한 손실보상을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나 의회가 입법주권과 사법주권을 제한한다며 ISD 반대에 적극적인 이유다. 미국 주의회,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브라질 의회 등이 대표적이다.
자본의 이득을 보호하는 건 ISD의 태생적 숙명이다. ISD는 1960년대부터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신생국가들이 옛 식민지 자본을 국유화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자본의 자구책이라고 볼 수 있다. 김익태 미국 변호사는 저서 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어찌 보면 식민지 지배에 실패한 점령국이 떠나면서 자신들이 식민 지배를 통해 착취한 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도리어 그간 투자한 금액에 대해 보상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고안해낸 제도라고 볼 수 있다.” 김 변호사는 “일본 점령군이 36년 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하다가 2차 대전의 패배로 본국으로 도망가면서 그동안 식민지 조선에 투자한 금액을 보전해주길 기대하는 경우와 유사하다”고 평했다.
이런 ISD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모르지만 한국은 국외 투자가 드물던 1967년에 덥석 ICSID 회원국에 가입했다. 게다가 ISD가 포함된 투자협정 81건을 체결하며 독일·일본과의 협정을 제외하고는 국회 비준 절차도 밟지 않고 정부가 발효했다. 국가별 국제투자협정 체결 수를 순위로 매겨보면 영국·독일·프랑스·중국에 이어 한국이 5위를 차지한다.

‘특혜’의 비밀이 지난 5월 론스타가 공개한 중재의향서에서 밝혀졌다. ISD를 제기하겠다는 ‘협박’ 편지를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세 차례나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7월9일과 2009년 2월11일, 2012년 1월17일이었다. 마지막 서신이 도착한 지 열흘이 지난 1월27일, 금융 당국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을 최종 승인했다.

‘피소 가능성 0%’라더니 겁먹은 정부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무사태평이었다. 2011년 외교통상부가 낸 ‘ISD 우리에게 필요한 제도입니다’라는 자료에는 “정부 조치가 정당하고 미국 투자자에게 비차별적인 경우에는 ISD 피소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돼 있다. 그리고 ‘피소 가능성 0%’라고 적었다. “일부 남미국가가 제소를 당한 것은 대부분 정당한 보상 없이 실시한 국유화 등 반시장적 조치 때문이다. 시장경제 원칙을 따르고, 안정적인 법체계를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상황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1967년 ICSID에 가입한 이래 ISD에 피소된 사례가 없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막대한 비용과 중재 판정이 내려지기까지 2∼3년의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기업이 무분별하게 상대국 정부를 제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외교부의 설명과 달리 ISD는 급증하는 추세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발간하는 연간 보고서 ‘ISD의 최근 현황’을 보면, 2011년에 발생한 ISD 사건은 46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ISD 누적 발생 건수는 450건에 달하고 1개 이상의 ISD에 휘말린 국가는 89곳이다. UNCTAD는 “대부분 ISD 사실을 공개하지 않아 실제 건수는 더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국가 공공정책에 대한 다국적기업의 제소가 많아진 것에 주목했다. 미국 담배회사 필립모리스가 강력한 금연법을 제정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를 상대로, 스웨덴의 국영 에너지 기업인 바텐팔이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한 독일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한 것이 그 사례다. 론스타도 조세 등 공공정책을 문제 삼고 있다.
‘피소 가능성 0%’를 공언하던 그들은 론스타의 ISD 사건에 대해 무엇이라고 해명할까? “흥분할 필요 없다. 상대편이 소송을 제기해왔으니까 아주 냉정하게 대응을 해서 패소를 시켜버리면 된다. 정부의 규제가 정당하고 비차별적이라면 ISD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현 새누리당 의원)이 11월28일 YTN 라디오에서 한 말이다. 1년 전에는 기업이 무분별하게 제소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안심시키더니, 이제는 기업이 무분별하게 제소한 것이니 한국 정부가 승소하리라 자신한단다.
그 자신감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한국 정부가 ‘론스타의 작전’에 휘말리고 있어서다. 론스타는 2003년 9월 외환은행을 인수할 때부터 산업자본이라 대주주 자격이 없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금융 당국은 론스타에 대한 적격성 심사를 이행하지 않았다. 시민사회의 거듭된 요구에 떠밀려 뒤늦게 심사한 뒤 2011년 3월에야 산업자본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싱가포르 정부 소유의 투자전문회사인 테마섹홀딩스가 2004년 5월 하나은행의 주식을 취득할 때 사전에 엄격히 심사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또 법원이 2011년 10월 외환카드 주가조작 혐의로 론스타에 대한 벌금 250억원 선고를 확정했는데도 금융 당국은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해 막대한 주식매각액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터줬을 뿐이다.
이런 ‘특혜’의 비밀이 지난 5월 론스타가 공개한 중재의향서에서 밝혀졌다. ISD를 제기하겠다는 ‘협박’ 편지를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세 차례나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7월9일과 2009년 2월11일, 2012년 1월17일이었다. 마지막 서신이 도착한 지 열흘이 지난 1월27일, 금융 당국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을 최종 승인했다. “론스타를 산업자본으로 판단해 징벌적 매각 명령을 내리자는 시민단체의 주장을 따르지 않은 것은, 나중에 혹시라도 론스타가 ISD를 제기할 경우 약점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금융 당국 관계자의 말이다. 엉겁결에 ‘된서리 효과’(Chilling Effect)를 고백한 거다. ‘서부시대 총잡이의 총처럼’ 기업이 ISD라는 무기를 만지작거리면 정부가 움츠러드는 현상이다. 제도적·관행적 장벽을 없애고 상대국 정부를 길들이려고 다국적기업이 활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기울어진 운동장, 빼앗긴 베테랑

한국 정부의 전략을 잘 아는 로펌도 론스타가 스카우트했다. 론스타의 법률 대리인인 미국계 다국적 로펌 ‘시들리오스틴’ 얘기다. 시들리오스틴은 지난 7월까지 5년간 한국 정부의 세계무역기구(WTO) 통상분쟁 관련 자문계약을 맺고 그 대가로 7억9천여만원을 받아갔다. 또 한-미 FTA와 관련해 주미 대사관과 법률자문 계약을 2010년에 맺어 지난 6월30일까지 유지했다. 그 대가는 월 1만달러 이상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통상정책과 분쟁 대책을 소상히 알고 있는 이 로펌이 론스타가 ISD를 제기하겠다고 밝힌 지난 5월부터 론스타의 편에서 칼끝을 겨누고 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외교부가 6월16일 문제제기를 했고 7월16일 로펌은 한국 정부와의 자문계약을 해지했다. 김행선 미국 변호사는 “한국 정부를 오래 대리해 많은 정보가 있는 로펌이 그 정보를 사용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베테랑 선수까지 빼앗긴 상황, 혹독한 신고식이 한국을 기다린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공공정책 투자자소송 급증… 지난해 46건 사상 최고치


이글은 경향신문 2012-09-13일자 기사 '공공정책 투자자소송 급증… 지난해 46건 사상 최고치'를 퍼왔습니다.

ㆍ유엔 “본래 취지 벗어나”

투자자-국가소송(ISD)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46건이 발생, 연간 발생 건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호주의 금연정책과 독일의 원전 폐쇄정책 등 국가의 공공정책이 국제중재 대상이 된 것에 대해 “투자자-국가소송제가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표준 약관’에 비유한 투자자-국가소송제에 대해 유엔 직속기관조차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12일 유엔무역개발회의가 매년 발간하는 ‘투자자-국가소송제의 최근 진전 현황(Latest Developments In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이라는 이슈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46건의 투자자-국가소송이 발생해 1987년 이후 연간 발생 건수로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투자자-국가소송 누적 발생 건수는 450건에 달했고 1개 이상의 투자자-국가소송에 휘말린 국가는 모두 89곳이었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대부분의 중재포럼이 투자자-국가소송 제소 사실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발생 건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지난해 투자자-국가소송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경향으로 국가 공공정책에 대한 제소가 많아진 것을 꼽았다.미국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는 강력한 금연법을 제정한 호주 정부를 국제중재에 회부했다. 또 스웨덴의 국영 에너지 기업인 바텐팔도 자신들이 소유·운영한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한 독일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소송을 제기했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2012년 6월 3일 일요일

은행들 조세피난국과 거래 못하게 하겠다


이글은 Economy Insight 2012-06-01일자 기사 '은행들 조세피난국과 거래 못하게 하겠다'를 퍼왔습니다.
Cover Story - 프랑스 대선 이후 유럽연합- ② 미셸 사팽 신임 노동장관 인터뷰

프랑스의 노동장관에 새로 임명된 미셸 사팽 사회당 의원이 지난 5월17일 첫 번째 각료회의를 마친 뒤 엘리제궁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REUTERS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의 정책을 총괄했던 미셸 사팽(60) 사회당 의원은 적절한 정책 개입만이 금융을 본래의 '착한 금융'(실물경제에 대한 안정된 자금지원 기능)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공정책, 은행 업무영역 분리, 은행가의 과다한 소득, 조세피난처 등 사회당의 금융규제 관련 주요 공약을 짚어봤다. 그는 대선 이후 새 정부의 노동장관에 임명됐다.
금융시장이 크게 요동친 1992~93년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정책이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시장이 실물경제에 자금 지원 역할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정책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현실에서 시장은 늘 정책과 대화(때로는 매우 대립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정책, 유럽연합(EU) 정책, 세계정책과 끊임없이 교류 중이다. 상황이 복잡하고 대립적이고 불안정하게 치달을 때는 정책 개입의 여지가 더욱 커진다. 오로지 정책 개입을 통해서만 '착한 금융', 즉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 성격을 지향하는 금융이 경제에 대한 자금 지원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회복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유럽 국채에 대한 투기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가?
두 가지 정책을 취해야 한다. 먼저 개별국 차원에서 각 회원국이 균형재정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이때 균형재정 회복 과정이 성장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EU 차원에서 상호보완적 성격의 세 가지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 첫째, 회원국이 연대해 투기 바람을 꺾을 수 있는 유럽안정기구(ESM) 같은 제도를 활용한다. 둘째, 모두 똑같은 정책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EU의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는 범위 내에서 각국에 적합한 예산정책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회원국 예산정책을 조율한다. 셋째, 유로존 차원에서 성장 정책을 도입한다. 이제 다시 산업과 연구개발 진흥책을 펴야 할 때가 돌아왔다. 한마디로 포괄적인 공공투자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고삐 풀린 시장은 제 기능 못한다"
이 정책들은 모두 유럽을 위한 정책인가, 아니면 그저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한 길인가?
그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라마다 예측 가능하고 명확한 정책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면 시장도 긍정적으로 인식할 것이다. 정책적 방향이 분명치 않은 완전히 고삐 풀린 시장은 절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투자와 고용에 기여하는 은행의 업무와 그 밖의 투기 활동을 서로 분리하겠다고 공약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업무 영역 분리는 영국이나 미국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최후의 보증인' 노릇을 하는 국가가 은행의 파렴치한 행위까지 보증해줘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해 경제에 기여하는 착한 금융만이 국가의 보증을 받을 자격이 있다. 국가가 예금 모집이나 자금 대출과는 거리가 먼, 은행의 이른바 '자기자본거래'까지 보증해줄 필요는 없다.
미국이나 영국과 같이 업무 영역 구분 기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모색해야 한다. 상호공제조합의 위상 등 프랑스 은행만이 지닌 특수성도 감안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은행들을 각각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은행 업무와 그렇지 않은 업무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투기 관련 부문에서 일어난 위기가 나머지 업무 영역으로 전염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은행과의 협상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현재 정부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은행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하는 분위기다. 은행이 흡족해한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나, 어쨌든 준비가 돼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올가을쯤이면 법안이 완성될 것이다.
본래 업무와 투기 업무 분리해야
영국은 은행의 위기가 국채 위기로까지 확대되지 않게 하려면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분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공공재정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소매은행에 위기가 발생할 때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자본을 평소 보유하도록 강제하는 방법이 있다. 이는 바람직한 정책인가?
은행은 '바젤3' 국제협약의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것이 이미 실물경제에 대한 자금 조달 등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장기로 빌려줄 자금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들어 은행들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자금 공급을 거부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 규제를 더 강화하라고 주문해서는 안 된다. 은행의 대출 여력만 더 약화할 뿐이다.
올랑드 대통령은 "악성 금융상품을 뿌리 뽑겠다"고 말했다.
돈을 버는 방법이 모두 합법적인 것은 아니다.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될 투기 수단도 있다. 주요 20개국(G20)은 이 문제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규제 당국은 앞으로 금융상품이 국채나 기업 주식에 대한 투기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을 교란하는 금융상품을 찾아내 가차 없이 금지할 것이다.
몇몇 프랑스 은행 경영자가 받는 상여금이 고정 급여의 5배에 달하기도 한다. 상여금을 규제해야 하는가?
사실 소득은 민간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국가가 일부 소득 유형을 금지하는 것은 몰라도 소득금액까지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올랑드는 소득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사내급여위원회에 임금노동자를 참여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 나는 현행 상여금 규제가 별 효과가 없는 상황에서 좀더 강력한 규제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조세라는 무기도 활용할 수 있다.
공기업에 최저소득과 최고소득의 격차를 1~20단계로 분류한 급여체계를 도입하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이제 100만유로 고소득자의 시대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국가가 주주로 있는 기업에 한해 도입할 수 있다.
조세포탈과 조세회피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무엇이 있는가?
세 가지 대책이 있다. 첫째, 이미 오래전부터 제안해온 대책이지만, 해외 거주자에 대한 과세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자본소득만이 아니라 해외에 보유 중인 자산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둘째, 탈세 관리 인력을 보강해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인력 강화 방안이 마련돼 의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현재 세무 당국은 인력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탈세와의 전쟁은 인력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 재정부 예산을 이 부분에 집중 투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은행과 조세피난국의 거래를 금지해야 한다. 이 조처는 EU 차원이나 세계적 차원에서 시행할 때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G20은 이 문제에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줬지만 끝까지 계획을 완수하지는 못했다.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이를테면 벨기에·룩셈부르크·스위스, 이 3개국과 새로운 조세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미셸 사팽 노동장관(오른쪽)이 지난 5월15일 파리 시청에서 열린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취임 기념식에서 장마르크 아이로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REUTERS

"시장교란 금융상품 가차 없이 금지할 것"
모든 프랑스 은행이 조세피난국에 진출해 있다. 은행들이 조세피난국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은 결국 프랑스의 은행 시스템을 폐쇄하자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그저 은행들에 조세피난국에서의 영업을 금지하자는 것뿐이다. 더욱이 이 조처가 은행들에 심한 타격을 주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 개혁은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문제는 은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자금융'이다. 다른 나라의 미흡한 조세 및 법규 체계를 악용하고 있는 투기 및 투자 기금이 문제인 것이다.
G20은 상대국의 요청이 있는 경우 조세정보를 자동 교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등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조세피난국은 조세정보 교환에 매우 비협조적이다.
강력한 규제책을 마련해야 한다. 일부 잘못된 관행을 금지하고, 조세정보 자동교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단호한 태도를 고수해야 한다.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등 새로운 협정을 거부하는 국가들과도 협상에 나서야 한다. 뜻을 같이하는 다른 유럽 국가들을 모아 이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아 좀더 포괄적인 협상을 벌여야 한다.
기업의 수익이나 과세내역 신고 지역에 대한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별 회계'(Reporting Country by Country)를 도입하는 방안에 찬성하는가?
국내외적으로 과세액을 줄이기 위해 각 계열사들의 손익을 조작하는 행위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기업이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제도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EU 차원에서 은행 및 금융 규제에 대해 많은 논의와 결정이 이뤄지고 있다. 프랑스의 입장을 좀더 체계적으로 잘 대변하기 위해 이를 담당할 금융개혁부를 신설하자는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공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단 금융개혁부의 업무는 금융·경제 정책 수립, 다시 말해 재정부 관할 문제에 국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무부 장관 외에 EU 담당 장관이 필요한 것처럼, 재정부 장관 곁에는 금융 개혁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적임자가 누구인지까지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겠다.

크리스티앙 샤바뇌 Christian Chavagneux  기자

ⓒ Alternatives Economiques 2012년 5월호(제313호) L'Etat n'a pasà assurer les turpitudes des banques! 번역 허보미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