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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24일 수요일

진주의료원, 노조가 아니라 ‘정책이 문제’


이글은 시사IN 2013-04-24일자 기사 '진주의료원, 노조가 아니라 ‘정책이 문제’'를 퍼왔습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진주의료원의 적자가 노조 때문이라며 폐업을 강행하려 한다. 그러나 (시사IN)이 입수한 보건 복지부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시 외곽으로 병원을 신축이전한 데 따른 정책 실패가 원인이었다.

4월9일 오후 5시 경남 진주의료원 호스피스 병동. 마지막 환자 이정자씨(74·가명)의 아들 김 아무개씨(34)가 병동을 지키던 간호사 두 명에게 퇴원 통보를 했다. “내일 경상대병원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순간 간호사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기 암 환자를 끝까지 보호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이씨가 퇴원하면 호스피스 병동은 정말 문을 닫는다는 현실의 무게감 때문이었다. 이씨가 나가면, 진주의료원에는 급성기 병동에 1명, 노인요양병원에 29명만 남게 된다. 

내일부터 호스피스 병동이 비면 무얼 할 거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 간호사는 “이제 우리도 투쟁해야지요”라면서도 ‘투쟁’이라는 단어가 멋쩍은 듯 웃어버렸다. 환자도 의사도 거의 다 떠나면서 폐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다는 그녀는 기자에게 대뜸 “쌍용차는 요즘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대량 정리해고와 잇따른 노동자의 죽음으로 기억되는 쌍용자동차 사건처럼 진주의료원 사태가 번질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일방적으로 폐업을 밀어붙여 그만큼 반작용으로 더 싸우고 있지만, 재취업과 같은 당근으로 유혹하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강성 노조’의 모습이라기에는 소박한 고민이었다.

ⓒ시사IN 이명익 노조의 현수막이 붙어 있는 진주의료원 로비.


같은 시각, 진주의료원 본원에서는 직원들이 삼삼오오 데스크톱과 노트북 앞에 둘러앉았다. 홍준표 지사가 도의회에 출석해 도정 질의에 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홍 지사는 강성 노조 때문에 진주의료원 문을 닫게 되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당장 “6개월째 월급도 못 받고 출근하는 강성 노조가 어디 있노” 따위 푸념이 새어나왔다. 같은 날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는 경상남도 직원들이 ‘진주의료원 노조 실상’을 담은 자료를 돌렸다.  
 
“누적부채 279억원, 지난해 당기순손실 69억원 등 재정 여건이 심각하다. 이는 의료수익 대비 인건비 비율이 77.6%에 달하기 때문이다. 전국 의료원 평균이 69.8%인 점을 감안하면 비정상적으로 높다. 또한 진주는 의료서비스 공급과잉 지역으로 경영개선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노조는 도의회 및 경남도의 수차례 경영개선 요구에도 지속적인 임금인상 요구와 부채탕감 예산 지원만 요구했다. 이에 따라 자구 의지가 없어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고 폐쇄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인건비 비중이 높은 것은 급여 수준이 높아서가 아니라 수익이 낮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진주의료원보다 인건비 비중이 높은 곳도 7군데나 되지만 폐업한 곳은 없다는 것. 또 진주의료원 간호사 평균 연봉은 3100만원으로 한국 간호사 평균 연봉보다 1000만원 낮다고 덧붙였다. 
<시사IN>이 입수한 ‘공공병원 운영평가 보고서’.


같은 의료권 내에 민간병원 너무 많아   
 
진주의료원 폐업을 두고 경상남도와 진주의료원 노조의 주장은 공방으로 흘러갔다. 진주의료원의 진실은 뭘까. (시사IN)은 민주통합당 최동익 의원실을 통해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2012 지역거점 공공병원 운영평가 결과 보고서’를 단독 입수했다. 전국 39개 공공병원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다. 보건복지부가 삼일회계법인에 의뢰해 지난해 8월 작성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진주의료원의 부실은 잘못된 정책 판단과 그로 인한 경영부실 탓이 크다. 홍준표 지사가 꼽는 ‘강성 노조’ 문제는 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의료서비스 과잉공급 지역이라는 경상남도의 진단은 보고서의 내용과 동일했지만 해법은 달랐다. 노조의 ‘발목잡기’가 아니라 병원 운영의 비효율성을 없애는 게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세부 내용을 보자. 진주의료원에 경영혁신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34개 전국 지방의료원과 5개 적십자병원을 A·B·C·D 등급으로 나누는 진단에서 진주의료원은 D등급을 받았다. 진주의료원을 비롯해 11개 지방의료원과 적십자병원이 이에 속했다. 평가 기준은 양질의 의료, 합리적 운영, 공익적 보건의료 서비스, 사회적 책임 네 가지 항목이었다. 
 
평가 영역 중에서 합리적 운영 부분은 좀 더 세분해서 점수가 매겨졌다. 경영효율성은 세 분야로 나뉘었는데, 진주의료원의 재무건전성은 100점 만점에 63.4점(전체 평균 53.63점), 경영성과는 34.6점(전체 평균 44.03점), 운영 효율성은 26.2점(전체 평균 50.02점)이다. 공공병원이 대체로 효율성이 낮지만 그에 비해서도 진주의료원은 생산성은 낮고 수익성이 취약했다. 이 보고서가 꼽은 진주의료원의 주요 문제는 크게 6가지다. △환자 수 부족 △신축 이전에 따른 재무 악화 △의사 수급 어려움 △수익 대비 높은 인건비 구조 △수익성 관리 부족 △인건비 체불 증가가 꼽힌다. 
ⓒ시사IN 이명익 4월9일 진주의료원 직원들이 홍준표 지사의 도의회 답변 모습을 보고 있다.


먼저 환자 수가 부족한 이유는 같은 의료권 내 민간병원이 여럿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로 인해 병상 규모 대비 환자 수가 적었다. 보고서의 진단 기준인 2011년 현재 진주의료원은 병상 240개에 1년간 외래 및 입원 환자 수가 15만명이다. 진주의료원 주변에는 자동차를 타고 30분 거리 안에 상급 종합병원 1개, 종합병원 2개, 병원 12개가 있다. 사실상 과포화 상태이다. 
 
게다가 진주의료원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외졌다. 2008년 진주시 외곽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환자의 접근성이 떨어졌다. 환자 수 감소는 더욱 심각해졌다. 외진 곳에 자리 잡으면서 환자 수도 증가하지 못했고 관련 빚만 늘었다. 2008년 진주의료원 신축 이전 후 의료수익 증가가 약 31억원이었지만 의료비용은 약 56억원이 늘었다. 의료수지 적자 확대에 의료원 신축 이전이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평가했다. 
 
지리적 환경이 이렇다 보니 환자 만족도는 2011년 기준 평균 84점으로 다른 공공병원에 비해 높지만, 이런 서비스 품질 향상이 당장의 환자 증가로는 연결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주변 의료권역을 고려하지 않고 늘린 병상과 위치 이전으로 인한 재정 위기는 곧 정책 실패를 뜻한다. 
 
의사 수급의 어려움도 뒤따랐다. 같은 권역 내 민간병원 곳곳으로 전문의가 자주 이직했다. 2010년에 5명, 2011년에 2명이 다른 병원으로 떠났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전문의에 대한 연봉을 높게 책정했다. 일종의 유인책이었다. 진주의료원의 공보의 6명을 제외한 전문의 1인당 인건비는 2억1700만원이다. 이런 상황은 의료수익 증가 대비 전문의 인건비 증가율을 더 높게 만들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총 의료수익 증가는 0.6%였지만 전문의 인건비는 46% 늘었다. 
 
같은 이유로 수익 대비 인건비도 높다. 의료수익 대비 인건비 비율은 2011년 기준으로 약 79%다. 비슷한 규모의 300~400병상 규모 민간병원의 인건비 비율이 42%인 것과 비교하면 30%포인트 이상 높다. 홍준표 지사가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다르다. 홍 지사는 이 문제를 노조 탓으로 보고 있지만, 보고서는 상당 부분 의사의 높은 인건비를 지적한다. 사무직 및 간호사·의사를 제외한 직원의 평균 근속연수는 다른 공공병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고 보았다. 또 직원 1인당 평균급여도 3000만원 중반으로 높지 않은 편이라고 진단한다. 
 
다만 병원에 오는 환자 수가 적은 탓에 환자 수 대비 직원 수가 2011년 환자 1000명당 1.6명으로 동일 규모 공공병원 환자당 직원 수(환자 1000명당 직원 1.0~1.4명)에 비해 많다. 그에 따라 총직원 인건비도 의료수익에 대비해 높게 나타난다고 평가했다. 수익이 적다 보니 인건비가 과다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보고서, 지자체 주도 경영쇄신안 권고 
 
수익성 관리가 부족한 것도 병원 부실경영의 한 원인이었다. 종합병원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진료과 유지, 수익성이 좋지 않은 수술실·응급실 유지 등으로 인한 손실을 진주의료원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또 병원의 각 과와 의사 사이에서도 손익에 대한 분석이 다소 형식적이고 임직원 간 공유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인건비 체불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인지라 이로 인한 부채도 증가한다고 진단했다. 
 
보고서 내용을 종합하면, 진주의료원은 경영상 문제를 앓고 있는 병원이 맞다. 기본적으로 공공병원이 수익을 창출하기 힘든 구조(보고서의 다른 부분을 보면 “지방의료원은 의료안전망 진료과와 응급실 운영으로 인한 손실액 및 공공의료기관으로서의 책무 수행으로 감내하는 비용 부담이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취약 지역에서 응급의료 건수가 동급 전체 병원보다 1.08배, 수익을 얻기 어려운 격리 병상은 3.42배, 호스피스 병상은 3.55배 많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수익을 창출하기 힘든 구조라는 의미다. 더 자세한 내용은 32~33쪽 기사 참조)이지만, 진주의료원은 평균보다 아래로 평가받는 항목이 많았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과 진단 그리고 해법은 홍준표 지사와 달랐다. 보고서는 “진주의료원은 병원 이전으로 인한 접근성 하락과 전문의의 이탈에 따른 환자 수 감소로 과거 신축 투자금에 대한 회수와 수익성 개선이 불확실하므로 수익성이 높거나 반드시 필요한 기능 중심으로 진료과 운영의 효율화가 필요하다”라고 결론지었다. 또 지방자치단체의 구실도 강조한다. 지자체 주도로 경영쇄신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유휴 시설을 활용하고 조직 진단을 통해 인력배치 효율화를 기하라는 내용 등이다. 민주통합당 최동익 의원은 “이 보고서만 보면 홍 지사의 주장이 억지라는 걸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적자 때문에 병원 운영을 못하겠다고 하다가, 여론에 밀리니까 ‘노조의 해방구’를 운운하며 공공병원 적자 구조를 호도했다. 지금이라도 공공병원을 없앤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홍 지사의 ‘밀어붙이기’가 여전하자 정부가 진화하는 모양새를 취하기 시작했다. 4월10일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진주의료원에 들러 “진주의료원이 공공병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밝혔고, 이정현 청와대 정무수석도 야당 의원들을 만나 “최악의 상황으로 가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남도의회 문화복지위원회는 4월12일 저녁 몸싸움 끝에 진주의료원 폐업 조례를 날치기 통과시켰다. 조례 개정안은 4월18일 도의회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김은지 기자  |  smile@sisain.co.kr

2013년 1월 13일 일요일

정책·금융·실물 하나도 확실한 것 없다


이글은 이코노미인사이트( Economy Insight) 2013-01-01일자 제33호 기사 '정책·금융·실물 하나도 확실한 것 없다'를 퍼왔습니다.
집중 기획 한국 경제 4대 변수 진단- ① 국내외 4대 변수 진단


경제 전문가들은 새해 상반기에 국내 경기가 바닥을 칠 것으로 내다본다. 하반기 들어 완만한 상승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반기가 되더라도 지금 같은 조건에서는 본격적인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상당 기간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얘기다. 또한 변수가 있다. 원-달러 환율 급락이다. 국제 투기자본이 몰려들어 예상을 뛰어넘는 급락세를 보인다면 국내 경제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반대로 오랫동안 바닥을 다진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상승세로 돌아설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국내 경제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가계부채 증가와 새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도 큰 변수임이 틀림없다. _편집자

정책·금융·실물 하나도 확실한 것 없다

환율급락·가계부채·경제민주화·미국경제 4가지가 새해 국내 경제 결정한다
새해 국내 경제를 좌우할 변수는 무엇일까? 유럽의 재정위기를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악재가 거의 노출된 유럽은 큰 변수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오히려 미국 경제의 회복 여부가 중요한 변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더 급박한 문제도 있다.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기업들의 수출이 큰 지장을 받게 된다. 국내 소비와 부동산 시장을 억누르는 가계부채 문제는 해결 기미가 없다. 새 정부의 경제민주화도 불확실성투성이다. 2013년 국내 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4가지 변수를 살펴본다.

정남기 (이코노미 인사이트) 편집장

새해 국내 경제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하반기에 경기가 약간 살아난다는 전망이 있지만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3년 한국 경제 성장률을 3.1%로 내다봤다. 세계경제 성장률 3.4%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국은행은 3.2%, 한국개발연구원(KDI)은 3%로 예측했다.
이런 예측도 불확실하기 그지없다. 국내 경제를 크게 뒤흔들 변수들이 곳곳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면서 수출 전선이 흔들리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새해 국내 경제를 좌우할 주요 변수로 새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 원-달러 환율 급락, 가계부채 증가, 미국 경제의 회복 여부 4가지를 꼽고 있다.

원화 가치 급등에 흔들리는 거시경제

당장 코앞에 다가온 변수는 원-달러 환율 하락이다. 환율 하락은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의 상승을 의미하고, 이는 국내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과 수익성을 크게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환율 하락으로 수혜를 보는 업종도 적지 않다. 내수 업종들이 그렇다. 문제는 환율 하락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는 데 있다. 급격한 환율 변동은 기업은 물론 국가 경제에도 큰 리스크가 될 수밖에 없다.
원-달러 환율은 2011년 말 1151.8원에서 2012년 12월21일 현재 1074.3원으로 6.7% 하락했다. 환율은 2012년 6월까지도 1150원대를 유지했으나 하반기 들어 급락세로 돌아섰다. 중요한 것은 새해 추가 하락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1천원대 중반을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1천원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고영선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본부장은 "국가 신용등급이 상승하고 환율이 하락하면서 외국 자본이 정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밀려들어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원화 강세를 예측한 투기성 외국 자본이 대거 몰려들면서 환율이 예상보다 훨씬 더 하락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원-달러 환율은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말 936.1원까지 하락했다.
수출 기업의 경우 환율이 1천원으로 하락하면 매출(원화 기준)이 2011년 말 대비 13.17%나 줄어들게 된다. 영업이익률이 7%였다면 거꾸로 6%의 영업손실을 본다는 얘기다. 그동안 높은 환율로 재미를 봤던 삼성전자·현대차 등 수출 대기업들에는 비상이 걸린 셈이다. 반면 내수 기업과 가계는 수입 물가 하락 덕분에 상대적으로 이득을 본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처럼 외화 부채가 많은 기업도 큰 이득을 보게 된다. 원화 강세가 되면 원금 상환 부담이 줄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 전체적 손익을 따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정부는 대부분의 경우 수출 경쟁력 약화를 우려해 시중의 달러를 사들이거나 국내 달러의 해외 유출을 장려하는 방법으로 환율 하락을 저지해왔다. 예를 들면 내국인의 국외 부동산 투자를 장려하는 것 등이다. 새 정부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예상된다. 급속한 환율 하락으로 인해 거시경제 운용 방식 자체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백화점 업계가 겨울 세일에 들어간 2012년 11월 말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소비자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최근 유통업계는 유례없는 불황을 겪고 있다(왼쪽). 2012년 10월 미국 메릴랜드주 풀스빌에서 주택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미국은 1인 가구용 주택 판매가 2년6개월 만에 가장 높은 신장률을 보이는 등 경기가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오른쪽). 뉴시스/뉴시스 REUTERS

걱정되는 것은 수출 대기업들이 수익성 하락을 보전하기 위해 납품 업체들의 단가를 일방적으로 후려치는 일이다. 이 경우 환율 하락에 따른 손실은 납품 중소기업과 그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환율에 따른 손실이 교과서대로 수출 대기업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결국 급격한 환율 하락은 경제적 약자들에게 큰 부담을 지울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새 정부가 경제민주화 차원에서 대기업의 횡포를 얼마나 강력하게 단속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경제 전문가들이 첫 번째로 꼽는 변수 중 하나가 가계부채 증가와 부동산 시장의 침체다. 정부의 노력으로 가계부채 증가율이 둔화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웃돌고 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2012년 3분기 가계신용(금융사 대출과 판매신용을 합친 것)은 937조5천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6% 증가했다. 같은 기간 명목 GDP 성장률 2.4%를 크게 넘어선 수준이다.
현재 937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 규모는 미국과 유럽처럼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을 거쳐야 할 상황이다. 증가율이 둔화되는 데 만족하지 말고 절대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디레버리징을 인위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오히려 잠복해 있던 가계부채의 불씨를 키워 실제 위기를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결국 과격한 해결책보다는 가계부채 증가율을 최대한 낮추면서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점차 축소해나가는 점진적 해결 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금융 당국의 치밀한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

소비 억누르는 가계부채 부담

큰 문제는 가계부채에 짓눌려 국내 소비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명활 금융연구원 거시국제금융연구실장은 "국내 소비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요인은 가계부채 증가와 이로 인한 부동산 시장의 침체"라며 "가계부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절대 규모를 줄여야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가계부채가 부동산 시장 회생은 물론 내국인들의 소비 증가 여부를 좌우하는 결정적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기업과 가계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의 학습 효과 때문에 또 다른 위기 상황에 대비해 극도로 소비지출을 줄이고 있다.
가계부채 부담 때문에 부동산 가격도 오르기 어려운 형편이다. 부동산 가격은 가계부채 증가율 상승세와 비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취득·등록세 감면, 양도세 중과세 부과 유예 연장 등 갖가지 미시적 정책을 동원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장이 반응하지 않으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부동산 시장의 침체 장기화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에 돈이 묶인 상당수 기업들을 추가로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도 있다. 이미 웅진이 PF로 무너졌고, 상당수의 다른 기업들도 PF의 덫에 걸려 고전하고 있다. 이 상태가 1년 이상 지속된다면 적잖은 기업들이 비슷한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

박근혜 전 새누리당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정부의 경제정책 변화도 예상된다. 가장 큰 관심은 박 당선자가 추진하는 경제민주화의 범위가 어디까지냐라는 것이다. 거시경제와 상관없이 새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국내 경제가 큰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당선자의 경제 분야 공약은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경제민주화, 미래창조과학부 신설 등 창조경제 구현, 한국형 고용복지 모형 구축, 가계부채 해결 등 7대 정책 과제, 지분매각제도 등 집걱정 덜기 종합대책 5가지로 요약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민주화 공약이다. 경제적 약자의 권익 보호(비정규직 차별 해소, 대형 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진입 규제, 하도급 또는 납품(입점) 업체에 대한 불공정 행위 근절 등), 공정거래 관련 법 개선(공정위 전속고발권제 폐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집단소송제 도입 등), 재벌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근절(부당내부거래 규제 강화, 특가법상 횡령에 대한 형량 강화, 지배주주나 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한 사면권 행사 제한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신규 순환출자 금지, 공적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 다중대표소송제 및 집중투표제의 단계적 도입 등), 금산분리 강화(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 축소 등)가 그 뼈대다.
비록 민주당의 공약보다는 약하지만 그동안의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에서는 훨씬 더 나아간 것이다. 이것들만 제대로 시행해도 국내 경제 시스템은 획기적으로 변하게 된다. 물론 이 공약들이 다 실현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통령에 취임하면 현실론을 앞세워 용두사미로 흐지부지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기업들은 경제위기와 저성장 시대 진입을 이유로 경제 활성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민주화가 제대로 추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결국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등 박근혜 정부 내의 몇몇 경제민주화 추진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재벌 대기업 및 관료들과의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2012년 10월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서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이 국회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금융 당국이 가계부채 증가를 최대한 억제하고 있지만 가계부채 증가율은 여전히 경제성장률을 넘어서고 있다. 뉴시스

미국 경제의 급속한 회복 가능성

다만 어느 때보다 경제민주화 요구가 높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공약이 공수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재벌 대기업과 총수 일가들의 부당한 내부 거래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규제가 가해질 것이다. 횡령 등 재벌 총수 일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도 강화될 게 확실하다. 이런 일이 몇몇 재벌 대기업 손보기에 그치지 않고 제도적인 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13년에도 유럽 재정위기가 세계경제의 가장 큰 변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미국과 중국이 훨씬 크다. 특히 반등 조짐을 보이는 미국 경제의 회복 여부가 관건이다. 교역 규모 등을 감안할 때 국내 경제에서 유럽연합(EU)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데다 유럽 재정위기는 대부분의 악재가 이미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경기 하락기에 접어든 중국이 연착륙에 실패하거나 완만한 회복기에 접어든 미국이 본격적인 경기 상승세를 탈 경우 그 파장은 훨씬 클 수 있다. 고영선 연구본부장은 "새해 유럽이 2~3번 출렁거릴 수 있지만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오히려 미국과 중국이 클 것"이라며 "중국 경제의 연착륙 및 미국 경제의 회복 여부가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활 거시국제금융연구실장도 "2013년 글로벌 경제의 핵심은 미국"이라며 "미국 경제가 새해 2%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지만 회복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거의 무제한적으로 돈을 뿌린 상황인데다 부동산 경기가 바닥을 친 뒤 상승하고 있고, 고용 상황도 호전되고 있어 재정절벽이 해소되는 등 계기가 주어지면 경제가 급속하게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용·주택 등 거의 모든 지표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인다. 2012년 10월 신규 주택 착공 호수는 전월 대비 3.6% 증가해 4년3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보였다. 더불어 은행들도 대출을 늘리고 있다. 실질가처분소득 증가에 힘입어 실질소비지출도 증가하고 있다. 고용 지표 역시 크게 좋아졌다. 미국 노동부의 11월 고용 동향을 보면, 실업률이 4년 만에 가장 낮은 7.7%를 기록했다. 이런 회복세는 그동안 기업과 가계의 구조조정이 상당 수준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동산 가격은 2006년 초부터 하락해 거의 7년 동안 바닥을 다진 상태다.
이에 따라 미국 내에서는 경기회복에 대한 낙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이 속속 낙관론으로 돌아섰으며, 일반 국민도 2013년 경제를 긍정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은 최근 "미국인 1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미국 경제가 정상 궤도에 있다'고 답변한 응답자가 38%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3개월 전인 2012년 9월 조사의 33%에 비해 5%포인트나 높아진 것이다.
중국 경제의 회복도 중요하다. 한국의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이르고 있어 중국이 휘청일 경우 국내 경제는 직격탄을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상황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몇몇 지표만 호전됐을 뿐 연착륙 여부가 매우 불확실하다. 따라서 2013년 세계경제의 회복 여부는 미국에 달려 있다. 미국 경기의 회복은 대미 수출 물량이 많은 중국 경제 회복의 견인차가 될 것이고, 대중 수출이 많은 국내 경제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불확실성투성이인 국내 경제 상황을 크게 반전시킬 수 있는 변수라고 하겠다. 

jnamki@hani.co.kr

정남기  economyinsight@hani.co.kr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정책·금융·실물 하나도 확실한 것 없다


이글은 이코노미인사이트(Economy Insight) 2013-01-01일자 제33호 기사 '정책·금융·실물 하나도 확실한 것 없다'를 퍼왔습니다.
집중 기획 한국 경제 4대 변수 진단- ① 국내외 4대 변수 진단


경제 전문가들은 새해 상반기에 국내 경기가 바닥을 칠 것으로 내다본다. 하반기 들어 완만한 상승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반기가 되더라도 지금 같은 조건에서는 본격적인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상당 기간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얘기다. 또한 변수가 있다. 원-달러 환율 급락이다. 국제 투기자본이 몰려들어 예상을 뛰어넘는 급락세를 보인다면 국내 경제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반대로 오랫동안 바닥을 다진 미국 경제가 본격적인 상승세로 돌아설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국내 경제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가계부채 증가와 새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도 큰 변수임이 틀림없다. _편집자

정책·금융·실물 하나도 확실한 것 없다

환율급락·가계부채·경제민주화·미국경제 4가지가 새해 국내 경제 결정한다
새해 국내 경제를 좌우할 변수는 무엇일까? 유럽의 재정위기를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악재가 거의 노출된 유럽은 큰 변수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오히려 미국 경제의 회복 여부가 중요한 변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더 급박한 문제도 있다.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기업들의 수출이 큰 지장을 받게 된다. 국내 소비와 부동산 시장을 억누르는 가계부채 문제는 해결 기미가 없다. 새 정부의 경제민주화도 불확실성투성이다. 2013년 국내 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4가지 변수를 살펴본다.

정남기 (이코노미 인사이트) 편집장

새해 국내 경제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하반기에 경기가 약간 살아난다는 전망이 있지만 크게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3년 한국 경제 성장률을 3.1%로 내다봤다. 세계경제 성장률 3.4%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국은행은 3.2%, 한국개발연구원(KDI)은 3%로 예측했다.
이런 예측도 불확실하기 그지없다. 국내 경제를 크게 뒤흔들 변수들이 곳곳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면서 수출 전선이 흔들리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새해 국내 경제를 좌우할 주요 변수로 새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 원-달러 환율 급락, 가계부채 증가, 미국 경제의 회복 여부 4가지를 꼽고 있다.

원화 가치 급등에 흔들리는 거시경제

당장 코앞에 다가온 변수는 원-달러 환율 하락이다. 환율 하락은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의 상승을 의미하고, 이는 국내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과 수익성을 크게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환율 하락으로 수혜를 보는 업종도 적지 않다. 내수 업종들이 그렇다. 문제는 환율 하락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는 데 있다. 급격한 환율 변동은 기업은 물론 국가 경제에도 큰 리스크가 될 수밖에 없다.
원-달러 환율은 2011년 말 1151.8원에서 2012년 12월21일 현재 1074.3원으로 6.7% 하락했다. 환율은 2012년 6월까지도 1150원대를 유지했으나 하반기 들어 급락세로 돌아섰다. 중요한 것은 새해 추가 하락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1천원대 중반을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1천원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고영선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본부장은 "국가 신용등급이 상승하고 환율이 하락하면서 외국 자본이 정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밀려들어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원화 강세를 예측한 투기성 외국 자본이 대거 몰려들면서 환율이 예상보다 훨씬 더 하락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원-달러 환율은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말 936.1원까지 하락했다.
수출 기업의 경우 환율이 1천원으로 하락하면 매출(원화 기준)이 2011년 말 대비 13.17%나 줄어들게 된다. 영업이익률이 7%였다면 거꾸로 6%의 영업손실을 본다는 얘기다. 그동안 높은 환율로 재미를 봤던 삼성전자·현대차 등 수출 대기업들에는 비상이 걸린 셈이다. 반면 내수 기업과 가계는 수입 물가 하락 덕분에 상대적으로 이득을 본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처럼 외화 부채가 많은 기업도 큰 이득을 보게 된다. 원화 강세가 되면 원금 상환 부담이 줄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 전체적 손익을 따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정부는 대부분의 경우 수출 경쟁력 약화를 우려해 시중의 달러를 사들이거나 국내 달러의 해외 유출을 장려하는 방법으로 환율 하락을 저지해왔다. 예를 들면 내국인의 국외 부동산 투자를 장려하는 것 등이다. 새 정부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예상된다. 급속한 환율 하락으로 인해 거시경제 운용 방식 자체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백화점 업계가 겨울 세일에 들어간 2012년 11월 말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소비자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최근 유통업계는 유례없는 불황을 겪고 있다(왼쪽). 2012년 10월 미국 메릴랜드주 풀스빌에서 주택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미국은 1인 가구용 주택 판매가 2년6개월 만에 가장 높은 신장률을 보이는 등 경기가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오른쪽). 뉴시스/뉴시스 REUTERS

걱정되는 것은 수출 대기업들이 수익성 하락을 보전하기 위해 납품 업체들의 단가를 일방적으로 후려치는 일이다. 이 경우 환율 하락에 따른 손실은 납품 중소기업과 그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환율에 따른 손실이 교과서대로 수출 대기업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결국 급격한 환율 하락은 경제적 약자들에게 큰 부담을 지울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새 정부가 경제민주화 차원에서 대기업의 횡포를 얼마나 강력하게 단속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경제 전문가들이 첫 번째로 꼽는 변수 중 하나가 가계부채 증가와 부동산 시장의 침체다. 정부의 노력으로 가계부채 증가율이 둔화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웃돌고 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2012년 3분기 가계신용(금융사 대출과 판매신용을 합친 것)은 937조5천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6% 증가했다. 같은 기간 명목 GDP 성장률 2.4%를 크게 넘어선 수준이다.
현재 937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 규모는 미국과 유럽처럼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을 거쳐야 할 상황이다. 증가율이 둔화되는 데 만족하지 말고 절대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디레버리징을 인위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오히려 잠복해 있던 가계부채의 불씨를 키워 실제 위기를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결국 과격한 해결책보다는 가계부채 증가율을 최대한 낮추면서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점차 축소해나가는 점진적 해결 방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금융 당국의 치밀한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

소비 억누르는 가계부채 부담

큰 문제는 가계부채에 짓눌려 국내 소비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명활 금융연구원 거시국제금융연구실장은 "국내 소비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요인은 가계부채 증가와 이로 인한 부동산 시장의 침체"라며 "가계부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절대 규모를 줄여야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가계부채가 부동산 시장 회생은 물론 내국인들의 소비 증가 여부를 좌우하는 결정적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기업과 가계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의 학습 효과 때문에 또 다른 위기 상황에 대비해 극도로 소비지출을 줄이고 있다.
가계부채 부담 때문에 부동산 가격도 오르기 어려운 형편이다. 부동산 가격은 가계부채 증가율 상승세와 비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취득·등록세 감면, 양도세 중과세 부과 유예 연장 등 갖가지 미시적 정책을 동원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장이 반응하지 않으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부동산 시장의 침체 장기화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에 돈이 묶인 상당수 기업들을 추가로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도 있다. 이미 웅진이 PF로 무너졌고, 상당수의 다른 기업들도 PF의 덫에 걸려 고전하고 있다. 이 상태가 1년 이상 지속된다면 적잖은 기업들이 비슷한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

박근혜 전 새누리당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정부의 경제정책 변화도 예상된다. 가장 큰 관심은 박 당선자가 추진하는 경제민주화의 범위가 어디까지냐라는 것이다. 거시경제와 상관없이 새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국내 경제가 큰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당선자의 경제 분야 공약은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경제민주화, 미래창조과학부 신설 등 창조경제 구현, 한국형 고용복지 모형 구축, 가계부채 해결 등 7대 정책 과제, 지분매각제도 등 집걱정 덜기 종합대책 5가지로 요약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민주화 공약이다. 경제적 약자의 권익 보호(비정규직 차별 해소, 대형 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진입 규제, 하도급 또는 납품(입점) 업체에 대한 불공정 행위 근절 등), 공정거래 관련 법 개선(공정위 전속고발권제 폐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집단소송제 도입 등), 재벌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근절(부당내부거래 규제 강화, 특가법상 횡령에 대한 형량 강화, 지배주주나 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한 사면권 행사 제한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신규 순환출자 금지, 공적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 다중대표소송제 및 집중투표제의 단계적 도입 등), 금산분리 강화(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 축소 등)가 그 뼈대다.
비록 민주당의 공약보다는 약하지만 그동안의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에서는 훨씬 더 나아간 것이다. 이것들만 제대로 시행해도 국내 경제 시스템은 획기적으로 변하게 된다. 물론 이 공약들이 다 실현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통령에 취임하면 현실론을 앞세워 용두사미로 흐지부지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기업들은 경제위기와 저성장 시대 진입을 이유로 경제 활성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민주화가 제대로 추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결국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등 박근혜 정부 내의 몇몇 경제민주화 추진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재벌 대기업 및 관료들과의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2012년 10월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서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이 국회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금융 당국이 가계부채 증가를 최대한 억제하고 있지만 가계부채 증가율은 여전히 경제성장률을 넘어서고 있다. 뉴시스

미국 경제의 급속한 회복 가능성

다만 어느 때보다 경제민주화 요구가 높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공약이 공수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재벌 대기업과 총수 일가들의 부당한 내
부 거래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규제가 가해질 것이다. 횡령 등 재벌 총수 일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도 강화될 게 확실하다. 이런 일이 몇몇 재벌 대기업 손보기에 그치지 않고 제도적인 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13년에도 유럽 재정위기가 세계경제의 가장 큰 변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미국과 중국이 훨씬 크다. 특히 반등 조짐을 보이는 미국 경제의 회복 여부가 관건이다. 교역 규모 등을 감안할 때 국내 경제에서 유럽연합(EU)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데다 유럽 재정위기는 대부분의 악재가 이미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경기 하락기에 접어든 중국이 연착륙에 실패하거나 완만한 회복기에 접어든 미국이 본격적인 경기 상승세를 탈 경우 그 파장은 훨씬 클 수 있다. 고영선 연구본부장은 "새해 유럽이 2~3번 출렁거릴 수 있지만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오히려 미국과 중국이 클 것"이라며 "중국 경제의 연착륙 및 미국 경제의 회복 여부가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활 거시국제금융연구실장도 "2013년 글로벌 경제의 핵심은 미국"이라며 "미국 경제가 새해 2%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지만 회복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거의 무제한적으로 돈을 뿌린 상황인데다 부동산 경기가 바닥을 친 뒤 상승하고 있고, 고용 상황도 호전되고 있어 재정절벽이 해소되는 등 계기가 주어지면 경제가 급속하게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용·주택 등 거의 모든 지표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인다. 2012년 10월 신규 주택 착공 호수는 전월 대비 3.6% 증가해 4년3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보였다. 더불어 은행들도 대출을 늘리고 있다. 실질가처분소득 증가에 힘입어 실질소비지출도 증가하고 있다. 고용 지표 역시 크게 좋아졌다. 미국 노동부의 11월 고용 동향을 보면, 실업률이 4년 만에 가장 낮은 7.7%를 기록했다. 이런 회복세는 그동안 기업과 가계의 구조조정이 상당 수준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동산 가격은 2006년 초부터 하락해 거의 7년 동안 바닥을 다진 상태다.
이에 따라 미국 내에서는 경기회복에 대한 낙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이 속속 낙관론으로 돌아섰으며, 일반 국민도 2013년 경제를 긍정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미국인 1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미국 경제가 정상 궤도에 있다'고 답변한 응답자가 38%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3개월 전인 2012년 9월 조사의 33%에 비해 5%포인트나 높아진 것이다.
중국 경제의 회복도 중요하다. 한국의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이르고 있어 중국이 휘청일 경우 국내 경제는 직격탄을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상황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몇몇 지표만 호전됐을 뿐 연착륙 여부가 매우 불확실하다. 따라서 2013년 세계경제의 회복 여부는 미국에 달려 있다. 미국 경기의 회복은 대미 수출 물량이 많은 중국 경제 회복의 견인차가 될 것이고, 대중 수출이 많은 국내 경제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불확실성투성이인 국내 경제 상황을 크게 반전시킬 수 있는 변수라고 하겠다.

jnamki@hani.co.kr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새누리 재외국민 공보물에 “정치야 노~올자”만…정책은?


이글은 경향신문 2012-11-30일자 기사 '누리 재외국민 공보물에 “정치야 노~올자”만…정책은?'을 퍼왔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교민 ㄱ씨(29)는 27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e메일로 ‘제18대 대통령선거 정당·후보자 정보자료’를 받고 깜짝 놀랐다고 전해왔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의 선거공보물 때문이었다.

공보물은 각 후보별로 후보의 인적사항과 재산내역을 담은 흑백문서와 후보 이미지 및 공약을 담은 포스터 형식의 컬러문서 등 2장으로 구성 돼 있었다. 박 후보의 포스터에는 후보 이미지 및 ‘정치야 노~올자’ ‘분열과 대립의 증오정치는 싫어!’ ‘원칙을 지키는 쇄신정치랑 놀래^^’ 등의 구호만 있었다. 정당 후보 중 공보물에 공약을 넣지 않은 후보는 박 후보가 유일했다.

그는 “명색이 제 1당이고 선거를 한두번 해 본 것도 아닐텐데, 공약도 없이 공보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다른 후보들은 세세하지는 않더라도 공약이 다 담겨 있다. 유권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법적·정책적 지원 확대’ ‘재외동포 교육지원 확대’ 등 원론적 수준이라도 4가지의 공약을 제시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도 ‘한글학교 지원’ ‘재일조선인학교 지원 강화’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박 후보의 공보물에는 “어느나라 어느 곳에 있어도 여러분은 소중한 대한민국 국민입니다”는 메시지만 있을 뿐, 정책공약은 찾아볼 수 없다. 새누리당은 대선을 20일 앞둔 30일까지 공약집을 내지 않고 있다.

황당한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재외국민 투표 기간은 현지시간으로 12월 5일부터 10일까지다.대선후보 TV토론은 한국시간으로 각각 4일, 10일, 16일 오후 8시에 열린다. 재외국민들로선 TV토론을 한 번도 못 보고 투표를 해야 하는 유권자도 있을 수 있다. ㄱ씨 역시 TV토론은 못 보고 투표할 예정이다.

이번 대선은 재외국민들도 참여하는 첫번째 대통령 선거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제 18대 대선에 참여하는 재외국민은 22만2389명. 전체 재외국민의 10%에 해당하지만 지난 4·11 총선 재외선거 유권자 등록자 수인 12만3000여명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난 숫자다. 그런데도 재외국민 유권자들은 선거전에서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박근혜 후보가 재외국민들에게 보낼 방송연설 녹화를 마쳤고 12월 2일부터 방송이 나간다”며 “후보가 직접 공약을 발표해 정책의 신뢰성을 높인다는 차원으로 이같은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원유철 재외국민위원장이 현지에 나가 간담회 등을 하고 있다”며 재외국민 홀대론에 대해 해명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2012년 11월 18일 일요일

정책 없는 열광, 메시아 정치를 우려한다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11-12일자 제50호 기사 '정책 없는 열광, 메시아 정치를 우려한다'를 퍼왔습니다.
Corée 우리에게 대통령은 무엇인가

 
<돌기 변형1>, 2008-카르멘 칼보

2002년 이른 겨울 '효순이 미순이를 살려내라', '소파 개정하라' 등을 외치며 거리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때, "깃발 치워라"라는 외침으로 시작된 이른바 '깃발 논쟁'이 있었다. 이후 이것은 단지 시야를 가로막는 '깃발들'에 대한 항의를 넘어서, '위대한 1980년대'의 종말을 고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깃발'과 '촛불'이 논쟁을 차별화하는 상징적 대응물로 부상했고, 촛불은 이후 우리 사회를 읽는 하나의 징후적 이미지가 된 것이다.
여기서 깃발은 동지들을 결속시키는 기호다. 또한 깃발에는 대중의 동원을 조직해내는 사회운동 기관들의 인문적 미래 기획이 담겨 있다. 반면 촛불은 이 거대한 집회에 참여한 이들의 의지를 공유하는 상징물이지만, 깃발과는 달리 개개인이 저마다 하나씩 들고 있는 사적 성물(聖物)이다. 하여 촛불을 들고 있는 이들은, 깃발에 표상된 조직들의 구호가 아닌 자신의 염원을 촛불 속에 담고 있는 개인들이기도 하다. 하여, 깃발 속에는 개개인의 욕망을 흡수하는 역사 긍정적 미래 비전이 담겨 있지만, 촛불에는 어떠한 역사적 비전으로도 수렴되지 못한 개개인의 좌절된 불안이 촛농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과거 '깃발들의 시간'에는 그 속에 함축된 미래가, 곧 민주주의가 사적인 불안을 해소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가 실행되어도 행복은커녕 더욱 심한 불행이 엄습했다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이 촛불을 든 개개인의 불안과 뒤엉켜 있다.
촛불은 오래전부터 많은 종교적 염원의 상징물이다. 그 염원은 세속의 질서 속에서 불안과 좌절을 헤쳐나갈 이치를 발견할 수 없는 이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었다. 바로 그런 종교적 상징물을 2000년대 광장에 모여든 대중이 들고 있다. 촛불, 그것은 자신들에게 덮쳐온 삶의 위기를 헤쳐나갈 계산 가능한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이 선택한 종교였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대중 현상의 배후에 이런 종교성이 꽤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아니든. 일단 근거 없는 폭로전이 난무하다.
심지어 수년 전 했던 말들, 남의 말이지만 공감을 표하는 제스처를 취했던 말들, 나아가 확실하지 않지만 했을 것 같다고 추정되는 말들까지 '정치적 사실'의 공간 속으로 난폭하게 호출되었지만, 흥미롭게도 주요 후보 세 명의 지지율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이렇게 확고한 지지자층이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합리적 유권자가 늘어난 탓도 분명 있다. 하지만 이것이 큰 이유가 아닌 것은 진정 합리적 유권자라면 자신이 지지하던 후보의 생트집이 너무 지나칠 때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한데 그럴 만한 사건이 충분히 있음에도 지지율은 요동하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나 복지, 정치개혁에 대한 공약이 큰 틀에서 유사함에도 그것을 구체화하는 데 세 캠프의 수준 차이가 뚜렷했다. 그럼에도 지지율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고질적인 지역주의는 여전히 유의미하지만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정당 중심의 진영주의도 강력하지만 그 힘이 약화된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려는 주요 변수는 '팬덤'이다. '대중문화의 팬덤화 현상'이 1990년대 초 이른바 '서태지 현상'과 더불어 나타났다면, 2000년대에는 '정치의 팬덤화' 현상이 나타났다. 과거에도 유사한 현상은 있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지역주의와 결합된 팬덤이 과도하게 활성됐다면, 2000년대 특히 2012년 대선 정국은 지역주의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리적·사회적으로 분산된 이들이 특정인을 중심으로 결속하는 팬덤 현상이 대두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팬덤화는 (세속)문화적 현상이지만, 그중의 일부에는 종교성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치의 팬덤화 속에는 특정 존재의 숭고함을 추구하고, 그의 숭고함에 힘입어 불안에서 구원받고 싶은 대중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불안은 합리적 해결 가능성, 곧 계산 가능한 희망의 조건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불안이다. 대중은 숭고한 존재들이 이 해결 불가의 불안에서 구원해주기를 막연히 바라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열망을 투사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정치의 팬덤화는 종교적이며, 저 숭고한 이들은 세속 정치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줄 존재, 곧 메시아적 존재다. 요컨대 팬덤의 종교화는 '메시아 정치'적 열망을 담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의 팬덤화가 곧 팬덤의 종교화는 아니다. 종교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신학'이 있어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교리, 곧 도그마가 구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들'이 필요하다. 사도(Apostle)는 메시아적 존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가 아니라 메시아적 존재 자체를 전파하는 이들이다. 나아가 메시아의 가치나 이념 같은, 현실의 당면 과제를 초월한 이념의 설파자다. 그런 점에서 사도는 예언자(Prophets)와 다르다. 예언자는 동시대의 과제를 설파하는 종교적 메신저이고, 대중이 그를 메시아적으로 추앙할 때조차 그는 직면한 과제를 부르짖는 자로서 추앙된다. 반면 사도는 직면한 과제를 외칠 때조차 현실 너머의 메시아적 가치나 이념에 투영된 과제를 설파한다.
2012년 팬덤의 주역인 세 인물 중 안철수는 예언자에 가깝다. 그는 종교적 메시아라기보다는 유사종교적 메시아, 혹은 예언자 같은 존재다. 반면 다른 두 인물은 본격적인 메시아 정치와 연관해서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메시아 정치의 사도, 특히 예수 제자단에서 베드로 같은 '으뜸사도' 같은 존재다.

지배적 메시아 vs 대항 메시아

예언자가 부르짖는 개혁의 메시지는 당면한 정치 지형에 결코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대중의 팬덤 현상은 매우 강렬해, 다른 으뜸사도들의 팬덤 현상을 압도하는 형국이다. 그래서 두 으뜸사도는 자신들이 신봉하는 메시아의 이념에 그의 천둥벼락 같은 당면 개혁의 소리를 반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다.
팬덤은 주류문화에서 상처받은 정체성을 보상받기 위해 벌이는 대중의 '정체성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팬덤화는, 경제·사회·문화적 소외감과 고통에 사로잡힌 대중이 그것들로 인해 훼손된 정체성을 보상받기 위해 정치에 주목해 특정 정치인에게 열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팬덤으로서 '안철수 현상'은 '정치개혁'에 방점이 찍혔다. 그는 예언자로서 현재 당면한 과제는 정치의 구태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설파했다. 시민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지배집단의 지대추구적 이해관계의 반영체로서 대통령의 정치와 정당정치가 이 모든 고통과 소외감의 주요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자적 외침은 다른 대선 후보보다 더 열렬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정치 담론을 주도하는 정당의 배경이 없음에도 대중은 이 무소속 후보에게 더 큰 지지와 환호를 보낸다. 그리하여 두 정당을 대표하는 대선 후보 캠프에서도 정치개혁의 밑그림을 그려내도록 이끌었다.
메시아 정치는 말했듯이 고통에서 벗어날 계산 가능한 대안의 부재 위에서 대두한다. 필경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광풍 속에서 생존을 위해 무한경쟁을 벌여야 하는 대중 모두가 실은 '잠재적 실패자'가 되어야 했던 집단적 위기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10년간 지속된 민주화가 삶을 위한 안전의 조건을 마련해주지 못했고, 그 대안으로 선택한 MB 정부는 위기를 더욱 극대화했다는 좌절감이 깔려 있다. 위기는 심각한데,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 두 메시아적 존재가 다시 역사로 호출되었다. 박정희와 노무현이 바로 그들이다. 박정희는 1997년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 조갑제, 이인화 등에 의해 '강력한 지도력을 통한 성공의 아이콘'으로 재해석되었고, 주류 미디어에 의해 유포됨으로써 메시아 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박정희 메시아 정치는 자원을 과점하고 있는 지배 집단 중심의 체제 개혁을 통한 정치적 구원 담론의 성격을 지닌다.
반면 노무현은 팬덤 정치화 현상에 의해 집권했으나 지배 집단의 비협조로 인해 좌절한 영웅이 2009년 죽음과 함께 부활했다는 믿음을 통해 메시아 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지배 집단의 권위주의적 권력 과점 체제를 혁신해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겠다는 민주화의 아이콘인데, 미완에 그쳤다. 이것을 유포한 이들은 주로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는 비엘리트적 대중이다. 노무현 메시아 정치는 미완에 그친 혁신을 이어가겠다는 도전 세력의 '대항의 아이콘'이다.
이 두 메시아 정치가 선택한 두 '으뜸사제'는 알다시피 박근혜와 문재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의 메시아주의적 신앙 양태다. 우선 앞에서 말한 지배적 메시아와 대항 메시아가 각각 전자는 초월적 메시아이고 후자는 내재적 메시아라는 점을 주지하자. 초월적 메시아는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 위에서 이끄는 존재인 반면, 내재적 메시아는 내면에서 자기를 설득하는 존재다. 이것은 대중의 열광 방식과 관련 있는데, 전자는 수동적으로 메시아를, 그 대리인인 으뜸사제 박근혜를 추종하는 반면, 후자는 능동적으로 대리인 문재인을 지지한다. 여기서 '능동적'이라 함은 비엘리트적 대중이 여러 인터넷 카페에서 공론장을 만들어 논쟁을 하면서 노무현의 개혁이 미완에 그쳤던 원인을 분석하고, 전략을 구성하고, 실천을 조직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능동적 대중은 '해석적 대중'이다.
이런 적극적 해석의 장은 주류 미디어가 아니라 대안 미디어, 특히 인터넷 공론장이다. 그곳에서 대중은 무수한 분파적 공동체를 만들어 제각기 일종의 노무현 해석 게임을 벌인다. 요컨대 이 메시아 정치의 사도들은 특정 엘리트가 아니라, 다중적 대중(Multiful Peoples)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대선 정국을 맞아 특정 인물을 선택해 으뜸사도로 위임했다. 대선 후보 문재인은 이렇게 부상했다.
가령 북방한계선(NLL) 공박 담론과 안철수 논문 시비 같은 거의 근거 없는 생떼 같은 주장이나, 인혁당 논란과 정수장학회 논란에서 보인 심각한 역사와 법률 해석의 몰이해에도 으뜸사도인 박근혜의 지지율은 변함없었다. 또한 NLL 비밀문건 논란에서 보듯, 문재인과 그 진영의 사도들을 도전세력임에도 마치 정부가 걱정할 법한 논리로 정상 간의 대화록을 공개하는 것의 부당성을 강변했고, 인혁당 사건이나 정수장학회 사건을 정쟁화할 때도 논리 정연한 화법을 택했다.

삶의 질을 위한 선거, 가능한가

이런 정치의 팬덤화와 정치의 종교화로 특징 지울 수 있는 2012년의 대선 정국, 과연 시민의 대통령은 선출될 수 있을까? 우선 팬덤과 메시아 정치라는 대중적 열광의 정치학은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정치 지형을 다시 활기차게 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네거티브 선거 전략이 난무함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이런 열광의 정치학은 선거에서 정책을 사라지게 했다. 대중이 열광하는 지점을 따라서 모든 후보들은 서로 비슷한 공약의 밑그림을 그렸고, 비록 그 세부 내용이 차별화되기는 하지만 그 차이나 실현 가능성의 문제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어쩌면 아직 시작도 못한 후보 간 토론도 별로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 모른다.
문제는 팬덤적이거나 메시아주의적인 대중의 욕망의 선을 누가 어떻게 자극하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역대 어느 대선보다 시민이 존중받는 선거가 되고 있음에도 사실상 시민의 삶의 질을 위한 담론이 홀대되는 선거가 될지도 모른다.

*글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편집주간 역임. 주요 저술로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반신학의 미소) (당신들의 대통령)(공저) 등이 있다.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두루뭉실 ‘시대정신’,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이글은 한겨레21 2012-10-08일자 제930호 기사 '두루뭉실 ‘시대정신’,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를 퍼왔습니다.
[표지이야기] 질문3- 연설 속 단어로 살펴본 대선 의제… 모두 ‘통합’을 주장하고 ‘경제민주화’ ‘복지’ ‘일자리’ 외치지만 정책과 프로세스 제시 태부족

» 박근혜 · 문재인 · 안철수 후보 셋 다 ‘통합’과 ‘경제문제 해결’을 과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해법은 다를 것으로 전망된다. 똑같은 현충원 참배도 세 후보는 미묘한 차이를 드러냈다. 한겨레 강창광

» 국회사진기자단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정치인의 진면목은 그가 떠드는 말과 슬로건보다 그가 해온 선택과 결정을 통해 드러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정부 슬로건은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그러나 정치인의 말은 적어도 단면은 된다. 정치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엑스레이 사진은 아니지만, 특징의 일부를 포착하는 스냅사진은 된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연설문을 비교했더니, 공통점이 도드라졌다. 세 후보가 내세우는 시대정신과 과제가 비슷했다.

대통합, 소통과 화합, 통합의 정치…

일단 ‘시대정신’이 비슷했다.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대선 후보 수락연설과 안철수 후보의 대선 출마선언에서 반복된 단어와 문장, 제시된 의제(어젠다) 등을 분석한 결과, 세 후보 모두 2012년 한국 사회의 핵심 과제로 ‘통합’과 ‘경제민주화 및 복지’를 과제로 꼽았다. 같은 정당 소속으로 보일 정도다. 다만, 문 후보가 대립적 정치문화와 관련해 재벌, 검찰, 집권세력 등의 책임을 좀더 따져물었다.
먼저 자주 구사한 단어를 분석해봤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는 ‘통합’이라는 단어를 각각 2번, 1번, 4번 구사했다. ‘국민이 하나되도록’과 같이 ‘통합’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 ‘하나’는 3번(박근혜), 2번(문재인), 1번(안철수) 구사했다. 박 후보는 지난 8월20일 수락 연설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먼저, 국민 대통합의 시대를 열어가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국민의 힘과 지혜를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큰 길에 모든 분들이 기꺼이 동참하실 수 있도록 저부터 대화합을 위해 앞장서겠습니다. 이념과 계층, 지역과 세대를 넘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모두가 함께 가는 국민 대통합의 길을 가겠습니다”와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말했다. “우리 대한민국은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산업화로 기적의 ‘경제성장’을 만들었고, 민주화로 성숙한 ‘정치 발전’을 이뤄왔습니다”라는 문장에서는 이른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합을 도모했다.
문 후보도 지난 9월16일 수락 연설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협력과 상생’이 오늘의 시대정신입니다. 저는 ‘소통과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편가르기와 정치 보복,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야당과도 외교안보에 관한 정보를 공유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안철수 후보도 표나게 통합 의지를 내세웠다. 안 후보는 9월19일 출마 연설에서 이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한 에너지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겁니다. 누가 당선 되더라도 국민을 위해서라면 서로 도울 수 있고 또 함께할 수 있는 통합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책 대결 속에서 제가 만약 당선된다면 다른 후보들의 더 나은 정책이 있다면 받아들이고 또 경청할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국민들이 원하는 덧셈의 정치, 통합의 정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태와 서거, 2007년 경선 이후 이명박 대통령 쪽의 박근혜계 공천 ‘학살’ 논란 등의 역사가 이들이 통합을 내세우게 된 배경이다.

경제민주화, 박의 ‘내용 없는 처음’

세 후보 모두 어젠다로 경제문제를 내세우는 데 차이가 없었다. 셋 다 2012년 대선에서 경제문제의 핵심 어젠다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꼽았다. 경제와 민생이 시대의 화두라는 점을 세 후보 모두 인정한 것이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는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를 각각 3차례, 2차례, 1차례 구사했다. ‘복지’는 4차례(박근혜), 12차례(문재인), 1차례(안철수) 말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경제와 민생 의제를 내세운 점에서 세 후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심지어 ‘일자리’와 ‘복지’를 함께 구축하겠다는 큰 틀의 해법마저 동일했다.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그리고 일자리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겠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진 구조에서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성장과 복지가 따로 가지 않고 함께 가는 방식으로 바꾸겠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경제민주화를 의제화한 것은 사실상 박근혜 후보다. 그렇지만 연설문에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계획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경제민주화는 국민 행복의 첫걸음입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함께 성장하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차별 없이 대우받도록 하겠습니다. 경제적 약자도 공정한 기회를 갖도록 만들겠습니다”라고 원칙을 선언하는 데 그쳤다. 복지와 관련해 ‘5천만 국민행복 플랜’ 수립과 ‘국민행복추진위원회’ 구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일자리 창출과 복지를 동시에 이끌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연설문에는 구체적인 각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정보통신’ ‘과학기술’ ‘소프트웨어 산업 같은 일자리 창출형 미래산업’ 등의 표현에서 어렴풋이 토건경제에서 벗어나려는 구상이 포착되는 정도다.
문 후보의 연설문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문 후보는 재벌에 대한 견제·규제 뜻을 분명히 밝혔다. 박 후보나 안 후보보다 이 점이 도드라졌다.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세 번째 문은 경제민주화의 문입니다. 경제민주화는 시대적 명제입니다. 저 문재인이 그 문을 열겠습니다. 일자리 창출, 복지 확대, 지속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습니다.” 특히 재벌 문제와 관련해 “재벌 관련 제도를 확실히 정비하겠습니다. 재벌의 특권과 횡포는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재벌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길을 찾겠습니다. 골목상권을 보호하겠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공존·공생’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받게 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일자리와 관련해 대통령 직속 ‘국가일자리위원회’ 설치 및 ‘청년일자리특별위원회’ 설치를 공약으로 밝혔다. 복지와 관련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과를 먼저 내세웠다. “시혜적이고 선별적인 복지를 뛰어넘겠습니다. 보편적 복지가 계획의 핵심이 될 것”이라며 비교적 분명히 표현했다.


전반적으로 경제와 민생 의제를 내세운 점에서 세 후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심지어 ‘일자리’와 ‘복지’를 함께 구축하겠다는 큰 틀의 해법마저 동일했다.
뒤처리 하느라 ‘쓸 돈’이 모자라는데…

안철수 후보는 지난 7월 출간한 저서 의 표현에 비해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대해 많이 발언하지 않았다. 원칙을 천명한 수준이었다. “국내의 가계부채와 부동산 문제가 정말 심각합니다. 세계적인 장기 불황까지 겹쳐 한꺼번에 위기적 상황이 닥쳐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제가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부족하고 실수도 하고 결점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명한 국민들과 전문가들 속에서 답을 구하고 지혜를 모으면, 그래도 최소한 물줄기는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힘을 합쳐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바뀌어야 우리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가 들어서야 민생경제 중심 경제가 들어섭니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경제모델이 필요합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성장동력과 결합하는 경제 혁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안 후보는 연설의 처음과 중간 부분까지, 시대정신과 그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먼저 자신이 왜 출마하며 어떤 경로로 결심을 굳히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세 후보 모두 이구동성으로 ‘경제민주화’ ‘복지’ ‘일자리’를 의제로 받아들였지만, 구체적인 정책과 해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2012년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명박 정부의 과오를 뒤처리하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입해야 한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세수는 줄이고 4대강 사업은 일방적으로 강행해 재정건전성을 크게 악화시킨 사실은 진보·보수 학자들이 입 모아 지적하는 문제다. 한마디로 다음 대통령이 자기 공약에 ‘쓸 돈’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다. 세 후보 가운데 재정건전성 악화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안 후보가 유일했다.
어젠다는 던졌지만 구체적 정책, 공약, 해법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비판이 제기된다. 의제만 있고 정책이 없다, 자신만의 정책 브랜드가 없다, 여러 정책을 나열할 뿐 구체적인 실행 순서와 프로세스가 없다는 반박이 주로 제기된다. 불행히 세 후보 모두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9월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여야 국회의원 모임인 국회경제민주화포럼과 한국경제정책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경제민주화 대토론회’에서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3명의 재벌 개혁 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박 후보에 대해선 구체적인 재벌 규제책이 없음을 근거로 재벌 개혁 의지의 진정성에 의심을 제기했다. 문 후보에 대해서는 정책 나열에 그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민주통합당의 에너지와 힘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밝히라고 조언했다. 안 후보의 큰 구상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가 정치 영역에서 지도력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수술 실력에 생사 갈리는 같은 병 환자

소속과 이념이 다른 세 후보가 연설문을 통해 아픈 한국 사회의 병명을 동일하게 진단한 것은 유권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악마는 각론에 숨어 있다. 중병의 경우, 같은 병이라도 의사의 수술 실력에 따라 환자의 생사가 갈린다. 수술은 말로 하지 않는다. 연설문 너머에 있다.

의제만 있고 정책이 없다, 자신만의 정책 브랜드가 없다, 여러 정책을 나열할 뿐 구체적인 실행 순서와 프로세스가 없다는 반박이 주로 제기된다. 불행히 세 후보 모두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2012년 10월 3일 수요일

장하성, '안철수 선택, 정책으로 세상 바꿀 수 없기 때문'


이글은 미디어스 2012-10-02일자 기사 '장하성, '안철수 선택, 정책으로 세상 바꿀 수 없기 때문''을 퍼왔습니다.
재벌개혁, '재벌이 스스로 고치도록 틀을 바꾸어야'

무소속 안철수 대통령 후보의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장하성 교수는 "정책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철수 후보를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2일 S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장 교수는 "안 후보가 저를 선택했지만, 제 입장에서는 안철수라는 개인이 아니고 우리나라가 대변화의 중대한 시기에 있기 때문에 그런 변화의 적임자로서 안철수 후보가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에 돕기로 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장하성 교수는 지난 27일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으며 안 후보의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경제민주화 포럼을 담당하고, 안 캠프의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 장하성 교수와 안철수 후보 ⓒ연합뉴스

장 교수는 "정책은 어떤 것을 넣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정성 있게 현실로 만들어 낼 것이냐 하는 것에서 차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세간의 각 캠프 경제정책에 대해  박근혜는 보수, 문재인은 진보, 안철수는 중도라는 구분법은 맞지 않는다며 한국 경제현실에 맞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 교수는 "(재벌정책은) 몽둥이를 들고 당근도 주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환경도 만들고 종합적이고 전 방위적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라며, "경제민주화도 재벌개혁 하나로 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결국 정책을 나열하는 것은 실천해 낼 수 있는 진정성 여부에 의해 결판이 날 것 같다"며, "저희는 단순히 정책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 현실에 적용해서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 '공정,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
장 교수는 "나는 비록 덜 혜택을 받지만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는 공정하다, 정의롭다, 이런 희망을 갖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고 제시했다. 이어 "지금 합정 홈플러스 문제로 재래시장 상인들이 농성을 하고 있다"며, "재벌이 동네 빵집에서부터 명품 장사까지 다하겠다고 하고 회사재산을 빼돌리고, 극장 안에 있는 음료수 팝콘 파는 걸로 총수 딸이 돈을 버는 이런 현실에서 재벌을 고치지 않고 다함께 잘 사는 사회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 아니냐"라고 지적했다.
재벌개혁, '제도뿐 아니라 큰 틀을 바꾸어야'
장 교수는 "재벌을 선의로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재벌이 스스로 고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제도뿐 아니라 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어떤 특정 재벌기업의 구조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시장구조, 산업구조도 바꾸어야 한다"며, "새로운 시장과 산업의 틀에서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생존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 교수는 "기업 내부의 지배구조 개선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며, "전체 산업구조도 바꾸고 시장구조도 바꾸어야 재벌기업 지배구조에 대해 실효성 있게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동근 기자  |  qkdkqh1@gmaill.com

2012년 9월 24일 월요일

안철수, 소득차등화 보편복지 내세워야"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23일자 기사 '안철수, 소득차등화 보편복지 내세워야"'를 퍼왔습니다.
[대선쟁점 일문일답] (8) 안철수가 보완해야 할 전략과 정책들

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는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의 대선출마에 대해 "고맙고, 안쓰럽다"고 표현했습니다. 후발주자 역할을 해본 사람의 동병상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도 유시민 전 대표와 유사한 시선에서 쓰였습니다.

1. 안철수 대선후보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경제 멘토로 영입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그의 책, (안철수의 생각)을 보면 그가 민주당과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주당보다는 더 중도를 포용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이헌재 전 부총리를 영입한 것은 아마도 그의 중도 포용 의지가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2.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헌재 전 부총리 영입을 결정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우리 사회에는 부동산 경착륙 유도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보수 쪽에서는 이헌재 전 부총리와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있고, 진보 쪽에서도 일부 학자들이 그런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안 후보가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지나치게 비중을 둔 나머지 이헌재 전 부총리를 영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안 후보의 책, (안철수의 생각)을 보면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준비 기간이 짧은 부작용이 이헌재 전 부총리 영입 논란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3. 안 후보는 어떤 식으로든지 이헌재 전 부총리 영입 논란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신중하기로 소문난 안 후보가 대선을 3개월 앞두고, 보수적 성향을 이유로 자신이 영입한 인사를 내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이헌재 전 부총리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안 후보를 돕고 싶다면 그런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게 어렵다면 누군가 총대를 메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의문입니다. 대선캠프는 단결이 생명인데, 자칫 이헌재 논란이 세력다툼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총대를 메게 된다면, 안 후보는 그에게 전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결단력'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4. 안 후보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부드럽기 때문에 그런 결단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법합니다. ⇨ 안 후보는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기 때문에 충분히 결단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주 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산토끼에 욕심을 내다 집토끼까지 잃는 실수'인데 안 후보가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도를 포용하며 민주당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면 다수의 집토끼들을 잃을 수 있습니다. 

5. 안 후보가 쌍용차 문제에도 더 적극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안 후보는 중도와 진보를 모두 아우르는 행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과거 정동영 전 대표처럼 쌍용차 노조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쌍용차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명분과 대안이 뚜렷하기 때문에 안 후보에게는 실보다 득이 훨씬 더 큽니다.

6. 며칠 전 쌍용차 국회청문회에서 새누리당은 이 문제의 책임이 참여정부에 있다고 했고, 민주당은 MB정부에 있다고 했습니다.⇨ 부분적으로 양쪽에 일정 정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 후보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내놓으면 실보다 득이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7. 쌍용차, 쌍용차 하는데 지난 십여 년간 이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이 회사는 1988년 쌍용그룹에 인수된 이후 10여 년간 과감하게 투자를 늘려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독일 벤츠와 기술제휴를 하여 무쏘, 코란도, 체어맨 등을 출시한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대우자동차에 인수되었고, 1999년에는 워크아웃 대상이 되었으며, 2000년에는 대우에서 분리되어 채권단 관리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8. 채권단 관리 하에서 쌍용차의 경영상태는 상당히 좋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채권단 관리 하의 쌍용차는 2002년에 3200억 원의 순이익을 냈고, 2003년에는 사상 최고치인 5900억 원의 순이익을 내며 경영정상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2004년 10월 채권단이 쌍용차를 중국 국영기업인 상하이차에 넘기면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상하이차가 노조와 약속했던 투자는 하지 않고, 기술만 빼돌리고 인력감축에만 주력했기 때문입니다.

9. 2004년 상하이차가 노조와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쌍용차가 상하이차에 인수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노조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상하이차가 투자는 하지 않고 기술만 빼돌리고 인력감축에만 주력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노조의 반발이 거세지자 상하이차는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노조에게 특별노사합의서를 써 주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4000억 원을 투자하고 30만 대 생산설비를 구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합의가 지켜지기는커녕 상하이차는 경비절감을 한다며 국내외 영업망과 A/S 센터를 대폭 축소했고, 생산량도 15만 대(2003년)에서 8만 대(2008년)로 줄였습니다.

10. 결국 쌍용차는 2009년 1월에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5월에 2646명을 해고하는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는데요.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상하이차 지배 하에서 기술개발과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해 경영위기가 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 유가 급등으로 주력 차종인 SUV 차량의 매출이 급격히 떨어지자, 이 회사는 2009년 1월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정 관리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법정관리인들이 경영정상화라는 명분 아래 2009년 4월 전체 인력의 37%에 해당하는 2646명을 해고했다는 것입니다.

11. 노조 측은 사측이 정리해고를 하기 위해 사실상 회계를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들은 어떤 근거 하에서 그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 건가요?⇨ 건물이나 공장설비 등의 시장가치가 급락할 것이 예상될 때 장부에 기록하는 예비손실을 '손상차손'이라 합니다. 2008년 GM 대우가 장부에 기록한 건물, 공장설비 등의 손상차손(예비손실)은 28억 원, 르노삼성은 21억 원, 현대차는 0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쌍용차는 이 예비손실액을 5177억으로 부풀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비손실액 뻥튀기 결과로 부채비율이 187%에서 561%로 치솟자 이를 근거로 쌍용차 전체 인력의 37%에 해당하는 2646명을 대량 해고하는 구조조정안을 발표했습니다.

12. 2009년 5월 2646명이 해고된 직후 파산법원은 쌍용차와는 다른 조사결과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2646명이 해고된 직후인 2009년 5월 파산법원이 쌍용차의 회생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실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쌍용차의 건물, 공장설비 등의 자산가치는 회사평가액보다 2배 가까이 더 높게 나왔습니다. 쌍용차가 건물, 공장설비 등의 예비손실액을 5000억 가까이 부풀려 이것의 시장가치가 5252억 원에 그친다고 평가한 반면, 파산법원은 그것이 1조 1억 원이라고 평가한 겁니다. 노조 측은, 이것은 사측이 정리해고를 하기 위해 사실상 회계를 조작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3.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지금까지 나온 여러 가지 정황을 토대로 판단해 볼 때, 쌍용차를 상하이차에 매각한 것도 잘못되었고, 또 근로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한 것도 잘못되었습니다. 참여정부와 MB정부 모두 일정 정도 책임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부와 정치권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특히 이 문제는 두 정부에 모두 일정 정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안 후보 진영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14. 쌍용차가 상하이차로 매각되는 시점이 공교롭게도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재임시기와 겹칩니다.⇨ 안 후보 캠프가 쌍용차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이헌재 전 부총리에게 누가 되고 결과적으로 안 후보에게 누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면, 그 캠프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누군가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모든 정치행보에 득과 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정치를 해서도 안 됩니다. 쌍용차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것이 안 후보에게 실보다 득이 더 크기 때문에 권하는 것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15. 박 후보나 문 후보는 선발주자이기 때문에 선점한 의제들이 꽤 있는데, 안 후보에게는 그런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안 후보의 책, (안철수의 생각)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시대상황과 현실적 여건에 맞춰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전략적으로 조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대표작품으로 구체화한다면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16. 시대상황과 현실적 여건에 맞춰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전략적으로 조합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 즉 OECD 평균의 복지를 하려면 연간 140조 원 이상의 복지재원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겨우 연평균 10~16조 원 정도의 복지재원조달방안을 만들어 놓고 선진국 수준의 복지를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시대상황과 현실적 여건에 맞춰 보편 복지와 선별 복지를 전략적으로 조합하겠다는 안 후보 주장이 설득력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7.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확보한 연평균 10~16조 원의 복지재원으로는 어떤 복지를 어느 정도 늘릴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가 민주당 대선후보라면 대학개혁과 등록금 지원에 3조 원, 일자리 창출을 위한 근로장려금 지원에 3조 원, 의료복지에 3조 원, 보육복지에 2조 원, 차상위계층 지원에 2조 원, 주거복지에 2조 원, 기타부문에 1조 원을 투입하겠습니다. 연평균 16조 원의 복지재원으로는 확대할 복지가 많지 않습니다.

18. 더 적극적인 조세재정개혁을 통해 연평균 30조 원의 재원이 확보된다면 어떤 복지를 어느 정도 늘릴 수 있을까요?⇨ 역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가 대선후보라면 30조 원 중에서 대학개혁과 등록금 지원에 5조 원, 일자리 창출과 근로장려금 지원에 5조 원, 의료복지에 5조 원, 보육복지에 3조 원, 차상위계층 지원에 4조 원, 주거복지에 3조 원, 기타부문에 5조 원을 투입하겠습니다. 연평균 30조 원의 복지재원으로도 확대할 복지가 많지 않습니다.

19. 담뱃값을 현재보다 1000원 정도 인상하면 상당한 세수가 확보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1년 담배소비량은 900억 개비(45억 갑)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현행 1갑당 354원인 국민건강증진기금 부담금을 1354원으로 인상할 경우 약 4조 5000억 원의 재원이 확보됩니다. 만약 담배가격 인상으로 담배소비량이 800억 개비(40억 갑)로 줄어든다면, 이를 통해 확보되는 국민건강증진기금 부담금 수입은 4조 원이 될 것입니다.

20. 여러 가지 세목 중에서 담배에 붙는 세금의 역진성이 가장 커서 이를 인상할 경우 저소득층들의 부담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담뱃값을 인상하기 전에 정부가 꼭 해야 할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정부가 흡연율을 낮추기 위해 담뱃값을 인상하는 것이라면 담뱃갑에 경고사진을 1년 이상 붙이는 노력부터 해야 합니다. 둘째, 정부가 우선적으로 부자감세를 철회하고 부자증세를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셋째, 담뱃값 인상분 전액이 국민건강증진기금 부담금으로 채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기업에 엄청난 특혜만 줄 수 있습니다.

21. 대기업에 엄청난 특혜만 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담뱃값이 100원만 올라도 국내 담배회사 대기업의 순이익이 14% 이상 오른다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정부가 담뱃값을 인상하더라도 그 인상분 전액이 국민건강증진기금 부담금으로 채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기업에 엄청난 특혜만 줄 수 있습니다.

22. 보육복지가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 공약이 보육수급대란과 보육재정대란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 박 후보가 집토끼보다 산토끼를 사냥하는 데 재미를 붙여 지속적으로 민주당 흉내 내기를 하다 수렁에 빠진 것이 바로 '0~5세 무상보육공약'입니다. 이 공약은 민주당 공약보다 더 무상복지에 근접한 것인데요. 시대상황과 현실적 여건에 전혀 맞지 않는 공약입니다. 결국 이 공약은 보육수급대란과 보육재정대란을 불러오고야 말았습니다. 안 후보는 이 황당한 사태를 합리적으로 극복하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자신만의 대표 상품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23. 보육복지와 관련해서 안 후보가 가장 우선적으로 제시해야 할 공약은 어떤 것입니까?⇨ 예산이 적게 들면서도 그 효과가 매우 큰 것부터 공약화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 보육복지 전문가들은 공공보육시설 비중을 30%로 올리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을 실현하려면 5년간 약 5조 원의 예산이 들어갑니다. 이 공약은 해마다 1조 원씩만 투입하면 되기 때문에 박 후보의 무차별적인 보육복지공약에 비해서 현실성이 매우 높습니다.

▲ 안철수 후보. ⓒ프레시안(최형락)

24. 공공보육시설 비중을 30%로 올리는 데 5년간 매년 1조 원씩만 투입하면 된다는 근거가 있나요?⇨ 최근 우리나라 공공보육시설은 모두 2000여 개이고, 그 비중은 5% 정도입니다. 이것을 30%로 올리려면 1만 2000개의 보육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1만 개만 더 늘리면 됩니다. 공공보육시설 1개 건설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수치들이 나오고 있으나, 평균적으로 5억 원이면 충분합니다.

25. 박 후보의 무리한 공약이 보육수급대란과 보육재정대란을 불러왔는데, 거기다 매년 1조 원을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고 하면 재정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지는 것 아닌가요?⇨ 박 후보가 집권한다 해도 5년 안에 0~5세 무상보육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재원조달방안이 없습니다. 또 복지정책에 보육복지정책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어렵습니다. 나중에 그 누가 집권한다 하더라도 박 후보식 보육복지정책은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26. 박 후보의 보육복지공약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나요?⇨ 보육시설이 있는 지역 영유아에 대해서는 1인당 연간 400~500만 원씩 지원하고, 보육시설이 없는 지역 영유아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이런 엉터리 시스템이 옳다고 전제하고, 이런 엉터리 시스템에 연간 10조 원에 가까운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입니다.

27. 어쩌다 보육복지 시스템이 이런 엉터리가 되었나요?⇨ 민간보육시설 운영자들의 저항이 낳은 촌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민간보육시설 운영자들은 공공보육시설 확대를 적극적으로 저지해 왔습니다. 공공보육시설이 확대될 경우 영세한 자신들이 시장에서 도태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부와 정치권은 공공보육시설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상태에서 무상보육을 무리하게 추진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보육수급대란과 보육재정대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28. 현명한 정부였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까요?⇨ 제가 정부 책임자라면 민간보육시설과 빅딜(Big Deal)을 했을 겁니다. 보육료 지원 확대와 공공보육시설 확대를 맞바꾸는 겁니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은 막무가내로 무상보육 확대부터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29. 민간보육시설의 권리금이 폭등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 후보의 무리한 공약이 낳은 촌극입니다.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수요가 폭증하면 민간보육시설의 권리금이 폭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민간보육시설의 권리금이 폭등하면 공공보육료와 별도로 내야 하는 민간보육료가 급격히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30.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일단 먼저 민간보육시설의 권리금 폭등 사태부터 막아야 합니다. 이것은 고소득층의 수요억제로 가능하며, 고소득층 수요억제는 소득차등형 보편복지로 가능합니다.

31. 소득차등형 보편복지란 어떤 것인가요?⇨ 보편복지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 계층에 100% 전액 지원하는 무상복지이고, 다른 하나는 전 계층에 지원하되 소득과 무관하게 일부 비용을 지원하는 복지이며, 나머지 하나는 전 계층에 지원하되 소득에 따라 지원액을 차등화하는 복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복지가 확대되는 초기단계로 복지재원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이 중에서 세 번째 개념을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의 보육수급대란과 보육재정대란은 보편적 복지 개념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 데서 나타난 부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32. 보육복지에서 소득차등형 보편복지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나요?⇨ 최근 인구추세를 보면 0~5세 인구는 270만 명(연령별로 대략 45만 명)으로 이들에게 매년 평균 450만 원씩 현물급여나 현금급여를 제공할 경우, 연간 12조 150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중 중상위 50% 계층에 대해서만 소득차등화를 한다면 12조 원의 1/4인 3조 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보육수급대란문제도 말끔하게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절약된 예산 중 매년 1조 원만 활용해도 5년 안에 공공보육시설 비중 30% 목표 달성은 무난합니다.

33.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소득계층 10개 분위 중 중하위 50%에 대해서는 1인당 450만 원씩 총 6억 원을 지원합니다. 그리고 그 위의 계층인 6분위에 대해서는 80%를 지원하고, 7분위에 대해서는 60%, 8분위는 40%, 9분위는 20%, 10분위는 10%를 지원합니다. 이와 같이 소득차등화를 할 경우, 전원 무상보육을 할 때와 비교해서 6분위에서는 2430억 원, 7분위에서는 4860억 원, 8분위에서는 7290억 원, 9분위에서는 9720억 원, 10분위에서는 1조 935억 원, 도합 3조 5235억 원의 예산이 절감됩니다.

34. 극소수지만 일부 학자들은 소득차등화를 할 경우 막대한 행정비용이 든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노무현 정부 때 소득에 따라 보육료를 차등지원하는 차등보육료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등보육료 정책을 시행하면서 많은 행정비용이 들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정부를 포함하여 역대 정부가 무수히 많은 저소득층 정책을 시행했지만 그들을 선별하기 위해 막대한 행정비용이 들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35. 현재 정부의 보육료 지원예산은 유아교육비 지원액까지 합쳐서 모두 6조 원 규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와 교육과학기술부, 그리고 지자체들이 부담하는 보육료 지원예산을 모두 합하면 6조 원 정도 됩니다. 이것을 완전무상보육으로 전환하게 되면 소요예산이 12조 원이 되므로 6조원 정도가 더 소요된다고 보면 됩니다. 지자체도 지금은 2조 5000억 원을 부담하고 있지만, 완전무상보육이 될 경우 그 부담액은 지금보다 2배 이상 더 늘어날 것입니다.

36. 지자체들이 부자감세와 경기침체 때문에 재정위기로 치닫고 있는데, 연간 2조 5000억 원의 보육료 부담을 5조 원 이상으로 올릴 경우 엄청나게 저항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박 후보의 0~5세 무상보육 공약이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자체의 경우 부동산 취득세에 대한 세수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습니다. 그런데 최근 부동산 경기침체로 취득세 수입이 급감하자, 여기저기서 재정이 어렵다고 난리들입니다. 박 후보가 집권한다 하더라도 무상보육 지자체 부담액을 연간 2조 5000억 원에서 5조 원 이상으로 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37. 학교급식은 전액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보육복지는 소득차등화로 하는 것은 모순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무상급식은 한 달에 1인당 5만 원 지원하는 겁니다. 이 정도 액수를 가지고 감수성 예민한 초중고생들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서 선별적 지원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좀스럽고 유치하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무상보육은 그 규모가 무상급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무상급식은 1인당 연간 50만 원 지원하는 것이지만 무상보육은 500만 원 가까이 지원하는 겁니다. 그 액수가 무상급식에 비해 10배에 육박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무상보육은 무상급식과는 다른 방식, 즉 전 계층에 지원하되 소득에 따라 차등화하는 방식을 취해야 하는 겁니다.

38. 선진국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선진국들도 보육복지는 소득차등화로 하고 있습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스웨덴은 가구 평균 소득의 3%를 보육료 상한선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저의 대안보다도 더 강한 소득차등화입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와 같은 선진국들도 소득 및 근로 유무, 자녀수 등에 따라 차등 지원하거나, 보편적 지원이라도 저소득층에 대한 별도의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39.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아동수당을 소득과 무관하게 지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의 아동 수당은 대부분 1인당 월 10~20만 원입니다. 우리나라와 1인당 GDP 차이 고려하면 5~10만 원 수준입니다. 이렇게 액수가 크지 않기 때문에 아동수당을 소득과 무관하게 지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지수준이 걸음마 단계인 우리나라가 소득과 무관하게 월 40만 원 내외의 보육료를 지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40. 마무리합니다. 안 후보가 대선 경쟁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후발주자인만큼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이를 보완하려면 정치력과 인재 영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재를 물색하고, 그와 더불어 적극적인 인재 영입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선 승리는 어려울 것입니다. 최근 정치권을 보면 의외로 소외된 인재들이 많습니다. 안 후보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집토끼와 산토끼를 모두 잃지 않는 정치적 수완이 필요합니다. 만약 안 후보가 소득차등화 보편복지를 자신의 대표상품으로 내세울 경우, 집토끼와 산토끼에게 모두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 계층을 대상으로 한 보편복지를 지향했으므로 집토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소득차등화로 중도보수의 우려를 불식시켰으므로 산토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