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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칼럼] 군인의 최악의 범죄 쿠테타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6-22일자 기사 ' [칼럼] 군인의 최악의 범죄 쿠테타'를 퍼왔습니다.

군은 국가가 국가의 목적에 따라 존치한 조직으로서 국토, 국민, 주권을 외침으로부터 방위수호하는 임무가 주된 사명의 공직자이다. 

이 군이 무장한 채 군의 규율을 망각 위반하고 야밤에 이탈 작당하여 정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수도 서울에 진격 대통령 관저(청와대)를 점령하고 국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헌법을 일시 정지시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대학교 교정에 중무장한 군대를 진주시켜 수업을 파괴시켰으니 이는 군법상 반란죄에 해당하고 형법상 내란죄이니 극형에 처할 범죄이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주범이고 정권찬탈 수괴이다. 전두환․노태우 12․12 쿠데타와 5․18 광주 민중 무력 학살자로 한국의 법질서가 확립되었섰다면 이미 형장의 주검으로 재가 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랑 5천만 국민의 자존심인 육군사관학교가 2004년 5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박정희를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가장 자랑스러운 육사인으로 선정하여 육사인 상을 주었다 하고, 평생 육사인의 정신을 지켜오며 후배들의 모범이 된 원로 동문에게 수여되는 상이라고 한다.

전두환 내외를 2006년 4월 28일 육사 을지강당 열린 기념음악회에서 육사생도들이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하고 지난 8일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육사발전기금 200억원 달성 기념행사에선 전두환과 가족 그 측근들에게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사열 예우도 했다니 육군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이 어떻게 되었기에 쿠데타에 대한 생도들의 의식이 그토록 왜곡 인식 되었을까? 심히 걱정되고 우리의 미래가 암담하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강도 살인마, 민주주의 국가의 절대 절차주의 파괴자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다. 따라서 육군사관학교를 가장 욕되게 한 범죄자이다.

박정희는 일본 침략 민족의 수난시대 관동군 육군 중위 다까기 마사오이다. 8․15 정국에서는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국방경비대내 남로당 계열의 우두머리로서 발각되어 무기징역에 처해 생명이 위태로워 지자 동지를 밀고하여 전멸시키고 혼자 살아남아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으로 정규 국방군이 되어 소장에 진급하고 1961년 5월 16일 5․16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고 유신을 발동하여 영구 총통제를 구축 국민의 주권을 무력으로 강몰 청와대 안가 철고에 가두고 2,359명의 통일주체 국민회의로 무소불위(無所不爲) 1인 독재하다 10․26에 총으로 와서 총에갔다. 

전두환, 노태우 10․26 정국에 12․12 하극상 쿠데타 5․18 광주민중학살 청와대 강점 유신체제 유신헌법 지속 1987년 4월 13일 4․13호헌 선언하여 6․10 민주항쟁에 굴복 6․29 직선제 선언 항복 유신체제가 16년만에 붕괴 주권이 환수되어 직선제시대가 되면서 사법처리되어 1997년 4월 대법원 전두환 사형 추징금 2,205억 확정, 노태우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600만원 확정, 1997년 12월 감형 형 집행정지 석방되었다. 통장에 29만1,000원밖에 없다던 전두환은 무슨 돈으로 육사발전기금 1,000만원이나 냈나? 노태우는 은닉한 비자금 654억 문제로 사돈 신명수와 싸우고 있다. 천하의 살인마 강도들이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여러분 ! 나는 나이 많은 전직 가난한 농촌 청소년 교사였다. 그대들 진심으로 사랑한다. 군인의 최악의 범죄 쿠데타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주권재민 민주주의 국가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헌법 제1장 1조의 1항, 2항이다. 평등․비밀․자율․평화의 투표로 정권의 향방이 정해지는 나라에서 국방의 의무자인 무장한 군인이 무기를 들고 국민을 쏴 죽이면서 정권을 강탈하다니 그대들의 선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인면수심(人面獸心) 포식 맹수 강도 살인마로 그대들의 모교 육군사관학교를 가장 욕되게 한 자들이다.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 중에 그대들의 선배가 5․16 쿠데타를 구국의 결단으로 뒤짚으려 하나 역사가 양말목처럼 뒤짚어 지는게 아니다. 쿠데타는 군인의 최악의 범죄다. 

이관복 (광화문 할아버지)

육사가 경의를 표할 이름은


이글은 한겨레21 2012-06-25일자 제916호 기사 '육사가 경의를 표할 이름은'을 퍼왔습니다.
[특집1] 전두환은 환영하지만 쿠데타 저항한 선배는 외면하는 육사… 강영훈·이한림·장태완·정병주·안종훈을 기억하는가

» 쿠데타에 맞섰던 육사 출신 군인들이 있다. 육사는 그 선배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육사 교장을 지낸 강영훈 전 국무총리, 이한림 전 1군사령관,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왼쪽부터). 한겨레 자료

육군사관학교 교훈. 지(智), 인(仁). 용(勇). ‘지’는 사리를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으로 군인의 사명을 인식하고 무력 관리라는 부여된 기능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덕목. ‘용’은 굳센 행동으로 어떤 위험에서도 옳은 일을 실천함으로써 책임을 다하는 덕목.
군형법 5조 ‘반란죄’.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수괴: 사형.’

12·12 쿠데타 맞선 정병주 특전사령관

군인에게 명령불복종은 엄청난 범죄다. ‘명령에 죽고 산다’는 말은 군대에서 흔히 회자된다. 무력을 다루는 집단인 탓이다. 육사의 교훈과 군형법에서 군인의 사명을 강조한 이유도 거기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6월8일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 섰다. 다른 육사 졸업생도 있었지만 그가 유독 눈에 띄었다. 생도들이 최고의 경의인 ‘우로봐’ 경례를 했다. 다른 참석자들이 박수칠 때 전두환은 자신의 특별석 자리에서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육사는 전두환의 특별석에 대해 ‘고령자 예우’로 문제없다고 해명했다. 보도를 보면, 전두환은 2006년에도 생도 행사에 참석했다.
반란 수괴가 미래의 군 장교를 사열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격렬하다. 보수주의자들은 ‘별것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내심 쿠데타에 대한 호감도 감추지 않는다. 쿠데타란 무력으로 권력을 접수하는 행위다. 자연스레 군부가 민간 부문을 지배·통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군 내부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의 쿠데타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쿠데타는 하극상의 역사였다. 육사 후배가 육사 선배와 동기에게 총을 들이대고 그들을 감옥에 보내는 행위가 반복됐다. 쿠데타에 맞서 군인의 사명을 다했던 육사 선배들은 쉬 잊혀진다. 육사는 전두환의 방문을 환영하지만, 쿠데타에 저항했던 선배는 좀체 기리지 않는다.
전두환은 1931년생이다. 육사 11기로 1955년 졸업했다. 노태우·정호용 등 쿠데타 주역들이 육사 11기였다.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쿠데타에 맞섰다. 그는 1927년생으로 육사 9기다. 전두환의 육사 선배이며, 전두환이 특전사에서 근무했을 때 상관이었다. 한국전쟁 때 참전해 부상을 입었다. 1979년 12월13일 새벽 1시, 그는 쿠데타에 가담한 육사 후배 13기 최세창 준장의 공격을 받았다. 정 전 사령관은 거실 문을 걸어잠근 채 권총을 쏘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총에 맞아 숨졌다. 김 전 소령은 육사 25기다. 정 전 사령관은 M16소총에 왼팔을 맞았다. 수술 뒤 목숨을 건진 정 전 사령관은 쿠데타를 저지른 후배들의 공직 제안을 마다했다. 야당의 정치 입문 제안도 거절했다. 그는 천생 군인이었다. 대신 술과 벗했다. 1989년 3월 행방불명된 지 130여 일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하루 세끼 밥 먹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땅이 있으니 걷고 그리고는 잠자고… 제가 걷기를 무척 좋아해요. 울화가 치밀 때는 술병을 들고 구파발 서오릉 주변을 온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걷다가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곤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 북쪽의 검문소 앞을 지날 때는 ‘노태우씨가 저곳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하는 생각이 나고….”(1987년 언론 인터뷰)

한국의 쿠데타는 하극상의 역사였다. 육사 후배가 육사 선배와 동기에게 총을 들이대고 그들을 감옥에 보내는 행위가 반복됐다. 쿠데타에 맞서 군인의 사명을 다했던 육사 선배들은 쉬 잊혀진다.

자신의 방식대로 후배에게 당한 JP

전두환에 의해 연행된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은 1929년생으로 육사 5기였다. 기수로 차이가 많이 나지만 전두환과 나이는 2살 차이다. 육사 1기부터 10기까지는 교육 기간이 짧다. 육사 11기는 최초의 4년제 기수였다. 한국 사회의 엘리트라는 그릇된 자부심이 군인 본연의 충성심과 사명감을 지워버렸다. 정 전 총장은 신군부 쪽 군사법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을 방조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군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정 전 총장은 1997년 서울지법에서 벌어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정 전 총장은 2002년 6월 숨졌다. 안종훈 당시 육군군수참모부장은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반란이라고 비판했다. 안 전 참모부장도 육사 9기로 전두환의 육사 선배였다. 그는 쿠데타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뒤 경남 진해 육군대학 총장으로 좌천됐다. 육사 11기 동기인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도 쿠데타에 맞섰다가 강제 예편당했다.
전두환의 하극상은 선배는 물론 스승에게도 향했다. 전두환은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육사생도였다.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영훈 전 국무총리가 당시 육사교장이었다. 강 전 총리는 1922년생으로 중국에서 대학을 나와, 1958년 미국 육군참모대학을 수료했다. 그는 군의 정치 개입에 반대했다.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반대했으나 결국 막지 못했다. 강영훈 전 총리는 쿠데타 뒤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1962년 2월 미국 뉴멕시코로 쫓겨났다.
육사 11기의 하극상은 전례를 따른 것이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1926년생으로 육사 8기다.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35살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역인 육사 5기와 육사 8기(김종필)도 육사·육군 선배들을 숙청하고 수감했다. 1980년엔 자신이 육사 후배에게 당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1980년 5월17일 밤 육사 11기 후배들인 신군부에 의해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연행됐다. 그는 7월3일 밤에 겨우 풀려났다. 216억원의 재산도 빼앗겼다. 김 전 총리는 훗날 신군부를 ‘살모사’(殺母蛇)라고 불렀다.

5·16 반대해 쫓겨난 이한림 1군사령관

민망하게도, 5·16 쿠데타 주역들 자신이 살모사였다. 이한림 전 1군사령관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다. 그는 1921년생으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와 해방 뒤 육사의 전신인 육군영어학교 1기생으로 졸업했다. 한국전쟁 때 군을 이끌었다.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지만 장면 당시 민주당 정권과 미국의 태도가 모호했다. 30여 시간의 고민 끝에 그는 내전을 우려해 쿠데타 진압을 포기했다. 그는 1940년 2월 만주군관학교에서 박정희와 처음 만났다. 조선인 학생은 많지 않았다. 금방 술친구가 됐다. 둘 다 공부를 잘해 함께 일본 육사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한림 전 사령관은 의회민주주의자였다. 진압을 포기한 뒤인 1961년 5월18일, 20여 년 지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연행된 뒤 마포교도소에 갇혔다. 이한림 전 사령관은 1961년 8월15일 풀려나 미국 소도시 샌타바버라로 쫓겨나 유학생 노릇을 했다. 1961년 11월 쿠데타 뒤 처음으로 이 전 사령관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야, 이 새끼야 나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속이 시원하지?”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몇 년 뒤 박 전 대통령의 대사직 제안을 받아들여 주로 외국을 떠돌았다. 말년에 건설부 장관도 했다. 그는 지난 4월29일 숨졌다. 신문은 부음 단신으로 조용히 그의 죽음을 전했다. 어디에도 그의 죽음은 기록되지 않았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참고 문헌 (남산의 부장들 2)(김충식·동아일보사),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까치), (세기의 격랑: 이한림 회상록)(팔복원) 

2012년 6월 20일 수요일

육사생도들, 전두환 그 대목도 존경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2-06-20일자 기사 '육사생도들, 전두환 그 대목도 존경했나'를 퍼왔습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 전방 병력 빼내 감행한 쿠데타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말하고 썼다. 읽고 또 퍼 날랐다. 육사생도들을 사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2·12쿠데타와 광주학살이 주축이 되는 전두환 씨 스토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5년 전 서울의 한 여고생이 '광주' 이야기를 쓴「그날」이라는 시가 새삼 가슴을 쳤고, 전 씨의 동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가 쓴「29만 원 할아버지」라는 시도 인터넷에서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다.

재산이 29만 원 밖에 안돼서인지 추징금 1600여억 원을 내지 않은 상태인데도, 손녀는 억대의 혼인 예식을 치르고, 귀빈골프를 즐기면서 재벌 못지않은 초호화 생활을 하는 분의 이야기가, 또 그런 분을 가장 존경한다는 하나회 출신 국회의장이 등장한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열을 돋웠다. 전두환 씨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면서도, 이 나라 경찰의 공식 경호까지 받으며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음을 본보이고 있다. 세상 일이 이렇게도 굴러갈 수 있다는 사실은 맥 풀리는 일이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그의 죄상이야 다 아는 일이지만, 요즘 그를 논하는 그 많은 말과 글 가운데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이야기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가 육사생도들을 사열한 게 6월8일이니까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도 그렇다. 다소 뒤 늦은 감도 있으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로 그 빠진 이야기를 그냥 빼놓고 갈 수는 없다. 누군가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다.

▲ 지난 8일 육사생도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전두환. ⓒjtbc화면 캡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상에는 이런저런 쿠데타가 참 많았다. 물론 그런 쿠데타는 대부분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주범은 반란수괴(反亂首魁)에 해당한다. 요약해 말하자면, 전두환 씨의 12·12쿠데타에는 그런 여느 쿠데타와는 성격이 매우 다른 측면이 있다. 그야말로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매우 질 나쁜 쿠데타였다.

이 나라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다. 그 휴전선에서 제자리를 굳게 지키며, 한시도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군인들이 슬며시 자리를 비우고 떼를 지어 서울로 갔다. 명령에 따른 출동이었다. 국권찬탈(國權簒奪)에 걸림돌이 되는 군 내부 상급자를 제압하고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게 바로 12·12쿠데타였다. 그게 바로 전두환 소장과 그의 일파들이 감행한, 상상도 못할 악질 쿠데타였다.

적과 대치중인 전방에서 병력을 빼내 정권을 빼앗은 쿠데타는 일찍이 별로 없었다. 지난 8일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이 나라 국토방위의 간성이 될 육사생도들이 분열(分列)을 하며 전두환 씨 일행에게 경의를 표한 것은, 그 '전방을 비운 악행(惡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것으로도 비쳐질 수 있는 행위였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누구보다도 그러도록 시킨 육군사관학교 교장이나, 틀림없이 보고 받았을 국방부장관이 깨달아야 한다. 책임을 져야 한다.

1979년 12월12일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서는 운명을 걸고 승부수를 던진 날이었다.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전두환 소장이 계속 '권력'을 향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눈치 채고 있었다. 따라서 정 총장은 전 소장을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발령키로 했으나 정보가 미리 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거꾸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전두환 소장은 그 날 12월12일 초저녁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의혹이 있다'며 부하들을 시켜 참모총장을 연행토록 총장공관을 습격했다. 몇 발의 총소리가 났으나 정 총장은 쉽게 체포되었다. 하극상이었다. 이 무렵부터 전두환 소장은 경복궁의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장세동 단장실에 뜻 맞는 장군들을 모아놓고, 쿠데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정 총장 체포가 곧 쿠데타임을 직감하고, 장세동 대령에게 전두환 소장 체포를 명령했으나 장 대령은 거부했다.

전두환 소장의 사전계획에 따라 서울 주변의 공수부대는 서울로 진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26사단 등 수도권의 사단장들에게 쿠데타 진압 병력을 요청했으나, 국방부 장관의 명령이 없으면, 그 병력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은 겁에 질려 이미 국방부 청사 담을 타고 넘어가 미8군 벙커로 숨어버린 뒤였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런 숨 가쁜 상황 속에서, 전방을 지키던 노태우 소장의 9사단 병력 2개연대가 소리 없이 자리를 비우며, 전차를 앞세우고 서울로 진격해 들어갔다. 서울은 금방 손쉽게 확실하게 점령되었다. 장세동 단장실에서 전두환 소장 일파는 만세를 불렀다. '박정희 대통령 유고(有故)' 이후 최규하 씨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나라 전체는 전후방 모두 초 비상상태였는데도 그랬다.

훗날 밝혀지지만 북한도 초비상을 걸어 놓고 남측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 날 1979년 12월12일 9사단 지역에서 병력이 빠져나가 사실상 방어불능 상태였음을 알아 차렸다면, 북측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12·12쿠데타는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상황을 거쳐 '성공'했다. 전두환 씨가 그 두목이었다. 그 무렵 외신들은 30경비단장실에 있던 장군들을 가리켜 '권력에 굶주린 장군들(power ̵hungry generals)'이라고 썼다.

전두환 씨는 일찍이 정치군인의 길에 눈을 떴다. 대위 때인 1961년 5월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육사교장 강영훈 장군 때문에 생도들의 혁명지지 퍼레이드가 방해 받고 있다"고 밀고해, 강 교장을 연금토록 한 뒤, 생도들을 부추겨 지지 퍼레이드를 유도해 냈다. 그 때 박정희 소장의 눈에 들어 훗날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1963년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해 배타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도 국토방위 보다는 자기 회원들만의 요직 독식과 출세를 위한 것이었다.

12·12쿠데타와 '광주의 살육'이 그에게는 지울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는 죄업이지만, 한 때 감옥에 간 것을 빼놓고 그는 지금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들은 죽어서도 국립묘지에 묻히게 되어있다. 그런 대목도 이 나라 현대사의 슬픈 단면이다. 그 단면에서는 전두환 씨를 감싸고 있는 이 나라 주류사회인 상류 기득권층의 따뜻한 손길이 감지된다.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가 일으킨) 구국의 혁명'이라 한 5·16쿠데타 과정에서 전두환 씨는 쿠데타를 확실한 성공 국면으로 각인 시킨 육사생도 지지 퍼레이드를 만들어 냈다. 그에게는 또 12·12쿠데타 이후의 '박근혜를 보살핀 고마움'도 있다. 전두환 씨를 가장 존경한다는 하나회 출신 강창희 의원이 박근혜 의원의 지원을 받아 이번에 국회의장이 된다. 그 강창희 의원이 주요 멤버인 7인회(박근혜 의원 지지 '원로' 모임이다)에는 저 '유명한' 갈봉근·한태연 씨와 함께 유신헌법을 만든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있고, 박정희 정권에서 재무부장관을 지낸 김용환 씨도 있다.

요컨대, 5·16쿠데타-유신-5공-박근혜로 이어지는 질긴 인연에는 도도히 흐르는 '일맥상통(一脈相通)'이 있고, 그 중간쯤에 박근혜 의원과 전두환 씨의 얼굴이 있다. 과거 회귀의 기운이 강력하게 느껴진다. 전두환 씨가 본보이고 있는 떵떵거림에는 그런 까닭이 있을 것이다.

12·12쿠데타가 있던 1979년 말부터, 광주의 살육이 있던 1980년 5월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어느새 우리나이로 33세 안팎이 된다. 그 때 초등학생쯤은 되었어야 '사태'를 짐작하리라고 쳐도, 지금 40세는 넘어야 당시의 일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전두환 씨 측은 괴로운 그 기억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한시 바삐 더 가슴 펴면서 더 떵떵거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역사에 올려진 죄업들은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건 보통 죄업이 아니다. 가해자들은 사람들이 잊어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반성하고 용서를 빌면서 참회의 길을 걸어가는 게 옳다고 본다.

광주의 살육이 벌어진지 10년이나 20년 뒤에 태어난 어린 학생들이 쓴 '전두환 씨 관련' 시가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했다. 어린 학생들은 이리저리 좁은 '통로'를 헤매면서 어느새 '진실'을 찾아냈다. 알아 버렸다. 서두에서 말한 두 학생의 시 몇 대목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를 끝내고자 한다. 가해자들도 읽어야 한다. 느껴야 한다.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올라타불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놈이 좀 갑시다 허잖어 (……)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요 요말이 떡 나오데 //그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재, (……) 저짝 언덕까정 달려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그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2007년 당시 서울경기여고 3년 정민경 양의「그날」중에서

(우리 동네 사시는/ 29만 원 할아버지/ 아빠랑 듣는 라디오에서는 맨날 29만 원 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큰 집에 사세요?/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셨으면/ 할아버지네 집 앞은/ 허락을 안 받으면 못 지나다녀요?/(……)// (……)/ 왜 군인들에게 시민을 향해/ 총을 쏘라고 명령하셨어요?/(……)// 29만 원 할아버지!/ 얼른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세요/ (……)) -서울 연희초등학교 5년 유승민 군의 「29만 원 할아버지」중에서

 /오홍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