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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화재·투신으로 안타까운 죽음 보고도… ‘장애인 지원 확대’거부하는 복지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1-22일자 기사 '화재·투신으로 안타까운 죽음 보고도…  ‘장애인 지원 확대’거부하는 복지부'를 퍼왔습니다.

활동보조 서비스 예산
국회 복지위 50% 증액요구에도
정부선 소폭 보완 기존안 고집
실질적 지원 확대 좌초될 위기

최근 부실한 ‘장애인 활동지원제도’(활동보조 서비스) 때문에 장애인들이 화재 등으로 잇따라 숨지자 국회가 최중증장애인의 24시간 지원을 위해 관련 예산 증액을 요구했지만 보건복지부가 이를 거부해 논란이 일고 있다.21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복지위는 20일 내년 장애인 활동지원 예산으로 복지부가 요청한 3213억7600만원보다 1535억9400만원 많은 4749억7000만원을 편성하자는 내용의 세입세출예산안 예비심사 결과를 내놓았다. 증액분은 최중증 독거 장애인 1578명과 최중증 장애인가구 및 취약가구 장애인 551명 등 모두 2100여명에게 24시간 활동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투입하기로 했다.그러나 복지부는 국회의 예산 증액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20일 복지위에 출석한 임채민 복지부 장관은 예산 증액에 동의하느냐는 오제세 복지위원장의 물음에 “(복지예산) 조정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에 따라 장애인단체들이 요구해온 24시간 활동지원이 내년 예산에 반영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신 응급안전 등을 소폭 보완하는 형태로 사업이 이뤄질 공산이 크다.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는 현재 1급 장애인만 신청할 수 있지만, 내년에는 2급 장애인으로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한다는 것이 복지부의 계획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내년 예산은 올해 3099억원보다 3.7% 증액됐다. 그러나 장애인단체들은 내년에 장애인 활동 보조인에게 지급하는 서비스 수가를 3% 올린다고 가정했을 때, 예산 동결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또 복지부는 복지위가 장애인활동지원예산 증액안과 함께 내놓은 0~2살 보육료 지원 전계층 확대(5438억5300만원), 국공립 어린이집 300곳 신설과 300곳 리모델링을 포함한 어린이집 기능 보강(869억1500만원), 0~5살 보육시설 미이용 아동 양육수당 20만원으로 증액(7476억6800만원) 요구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기초노령연금액도 국민연금 전체 가입자 평균소득(A값)의 5%(9만7100원)에서 6%(11만6600원)으로 인상하자는 게 국회의 요구지만, 복지부는 국회의 연금제도개선위원회 설치·운영이 선행돼야 한다고 맞섰다.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21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계동 복지부 청사 앞에서 복지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달 26일 숨진 중증장애인 인권활동가 김주영씨와 연이은 중증장애인들의 참사에도 복지부는 24시간 활동지원 예산을 증액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복지부 고위 관계자는 임 장관의 국회 발언에 대해 “전반적인 예산 조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지 장애인활동지원 예산 증액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며 “서비스 확대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지만 증액 요구에 대한 우리 입장을 밝히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삶의 주인공을 꿈꿨던 한 장애인의 죽음


이글은 시사IN 2012-11-12일자 기사 '삶의 주인공을 꿈꿨던 한 장애인의 죽음'을 퍼왔습니다.
10월26일 장애인 활동가 김주영씨가 화재로 숨졌다. 소방서에 전화를 했지만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시민단체는 ‘활동보조 24시간 보장’만 실현됐어도 그녀가 살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의 일생을 돌아본다.

10월26일 새벽 5시께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웠다. “김주영씨 부모님 맞으시죠? 잠깐 일이 있으니 성동경찰서로 와 주시죠.” 전화를 받은 김씨의 아버지 김성남씨(가명)는 아내 박숙자씨(가명)를 깨웠다. 허겁지겁 옷을 차려 입은 두 사람은 황급히 차를 몰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겹쳤지만, 딸의 숨이 멎었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김주영씨(33)는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한 연립주택 1층에서 혼자 생활했다.

10월26일 새벽 2시께. 방에 누워 있던 김씨는 부엌에서 불이 난 것을 알아차렸다. 119에 다급하게 신고했다. 터치펜을 입에 물고 스마트폰으로 건 전화였다. 소방관들은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불은 9분 만에 꺼졌다. 하지만 김씨의 집은 시커멓게 타버렸다. 그녀는 누워 있던 그대로 숨졌다.

ⓒ김흥구 10월30일 고 김주영씨 노제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그녀의 죽음은 장애인 정책을 수정하라고 웅변한다.

김씨는 1979년 6월14일,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목만 가눌 수 있는 정도였다. 활동보조인의 도움으로 씻고 밥을 먹고 용변 처리를 했다. 전동휠체어는 그녀의 발을 대신했다. 혼자서는 휠체어에 탈 수도, 내릴 수도 없었다. 활동보조인은 퇴근하기 직전 늘 그녀를 잠자리에 누이고, 머리맡에 휴대전화와 터치펜, 현관문을 열고 잠글 수 있는 리모컨을 두었다. 불이 나자 신고를 하고, 현관문을 열어둔 것이 김씨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등 시민단체는 ‘장애해방운동가 고 김주영 장례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10월30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을 출발한 운구차는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장례는 노제로 치러졌다. 영정 앞에 국화가 쌓였다. 사진 속에서 김씨는 웃었다. 박김영희 장애해방열사단 대표는 “주영이가 외치던 ‘활동보조 24시간 보장…’ 결국 이게 실현되지 않아 이렇게 가는구나…”라고 비탄했다. 김씨는 하얀 가루가 되어 경기도 광명시립납골당의 작은 그릇에 담겼다. 


어릴 적부터 공부 욕심 많아

3월부터 호흡을 맞춘 활동보조인 신미미씨(22)는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함께했다. 10월25일, 이날은 특별했다. 오후 4시께 이들은 왕십리역에서 만나 분당선을 타고 서울숲으로 향했다. 산책하던 김씨는 그날 오전에 생긴 기쁜 소식을 신씨에게 전했다. “새 직장에 11월1일부터 출근하기로 했어. 일터와 가까운 데 이사할 집도 봤고. 내일 계약하고 싶은데, 화장실이 좁아서 네가 불편할지도 모르겠네. 아, 오전 활동보조인도 구했어.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 

ⓒ김흥구 김주영씨의 어릴 적 사진과 최근 사진(위). 그녀는 “너무 고생해서 어렸을 때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씨에게 경사가 겹치는 듯했다. 닷새 후에는 남자 친구 서인수씨(가명·36)와 사귄 지 100일되는 날이었다(결국, 이날은 김씨의 발인일이 되어버렸다). 14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서씨도 장애가 있다. 서울숲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형마트에 들러 남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스킨로션, 지갑, 벨트, 바지와 신발…. 이 가운데 마음에 드는 지갑을 고른 김씨는 들떠 있었다. 오후 9시30분께 집으로 돌아왔다. 잠잘 채비를 마친 후 신씨는 김씨의 집을 나섰다.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그로부터 2시간여 뒤인 새벽 1시께 김씨는 남자 친구 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곤하지? 힘들겠네….” 통화는 간단했다. 일하는 중이던 서씨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여느 때라면, 김씨가 수십 분 이내에 또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이날은 그러지 않았다. ‘어쩐 일로 전화가 없네…’ 김씨와의 마지막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김씨는 ‘너무 고생해서, 어렸을 때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운전하는 화물차에 타고 ‘서울 소풍’ 가던 때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김씨가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김씨가 여섯 살이 되던 무렵, 서울에서 큰 수술을 받았다. 아버지 김씨는 17일 동안 화물차에서 잠을 청하며 김씨를 간병했다. 그 뒤, 가족은 김씨의 치료를 위해 수도권으로 이사했다. ‘엄마가 덮어주는 이불이 제일 따뜻해.’ 성인이 된 뒤에도 김씨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제공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는 김주영씨(오른쪽).

하지만 장애를 가진 이들은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김씨도 그랬다. 한 달여 전, 조카의 돌잔치. 하지만 가지 않았다. 부모의 결혼기념일 케이크를 두 동생과 함께 만들고,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 홀로 가서 아버지에게 드릴 MP3 플레이어를 구입해 선물하는 등 가족 사랑이 지극하던 김씨였다. 남자 친구 서씨는 그녀가 조카 돌잔치에 가지 않는 것이 뜻밖이었다. 김씨는 “여러 사람이 오는 복잡한 자리라,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라고 털어놓았다. 짐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같은 이유로, 결혼에 대해서도 신중했다. 

김씨는 공부에 욕심이 많았다. 여섯 살 때부터 삼육재활원에서 생활한 김씨는 장애인 학교인 삼육재활학교에 진학했다. 10여 명 학생 가운데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다. 당시 김씨의 초등부 담임은 “장애가 심했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라고 손을 들며 항상 먼저 발표하려 했다”라고 말했다. 고등부를 졸업한 뒤 같은 재단 직업학교에서 정보처리사 2년 과정을 거쳤다. 또 전남 담양에 내려가 덕산직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사무자동화 전문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공부에 시간을 투자했다. 2007년, 한양사이버대학에 편입해 전자계산학을 전공했다. 2011년에도 사회복지를 공부하기 위해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김씨는 최근까지도 기말고사를 대비한 사회복지 공부 모임을 해왔다.

전문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도 취업은 쉽지 않았다. 2004년, 이력서를 냈지만 답신이 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문화센터에 첫발을 내디뎠다. 미디어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어려서부터 영상이 좋았다. 집에서, 병원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왔던 터다. 두 달여에 걸쳐 다큐멘터리 을 완성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녀가 기획·촬영·편집을 도맡아 내놓은 11분54초짜리 영상에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담겼다. 

집이 있는 경기도 광명에서, 미디어 수업이 있는 서울 광화문 미디액트까지 가는 것은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어렵게 도착해도, 조작법이 세밀한 카메라를 직접 만질 수 없었다. ‘내가 찍고 싶은데….’ 6㎜ 카메라를 휠체어에 달았다. 이렇게 찍힌 화면이, 김씨가 보는 세상이었다. 그 사이, 1시간 분량 테이프 6개가 쌓였다. 

김주영씨는 생전에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그는 에서 ‘나는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 어렸을 때 사진이 없다’라고 회고했다. 이런 김씨가, 촬영을 마치고 난 뒤, 한 인터뷰에서 “밖에 나가기 두려워 집 안에만 있으면 악순환이 계속된다. 열악해도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자”라고 말한다. 사회활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외출 혹은 탈출)을 완성한 다음 해인 2005년, KBS (열린채널)을 통해 전파를 타고, 제5회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 ‘젊은이 및 일반’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김씨는 ‘감독’이 된 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인턴으로 취직했다. 장애인 관련 방송 모니터링을 맡았다. 매주 20시간 근무, 월급 30만원. 자신의 힘으로 처음 번 돈이었다. 2006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시민방송 RTV에서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독립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프로그램을 김씨와 함께 진행한 박김영희씨는 김씨에게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고 독려했다. 김씨도 부모님이 연로해졌을 때 내가 짐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던 터였다. 새로운 둥지를 틀기로 결심했다. 종로구 혜화동에서 자립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독립하면서 부모를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로, 활동보조인 제도를 꼽았다. 하지만 활동보조인 비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항상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삶의 주인공 되기 위해 자립 결심

2009년, 자립에 용기를 얻은 김씨는 광주로 내려가 광주한마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했다. ‘열악한 현장’에서 활동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10여 개월 동안 중증장애인 2∼3명과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소감을 나누는 모임을 꾸렸다. 김씨가 쓴 감상평은 인터넷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생활도 잠시. 2009년 10월, 활동보조인을 구하지 못해 일을 포기했다. 부모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김흥구 강동역에 전시된 김씨의 그림을 한 장애인이 보고 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사회활동에 더욱 매진했다. 폐렴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2년9개월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센터)에서 일했다. 이때, 사고가 난 행당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센터에서는 장애인 회원 모임을 담당했다. 보치아 게임(장애인 스포츠)과 영화 모임, 글쓰기 모임을 맡았다. 또 선거 기간에는 장애인 참정권 문제를 공론화했다. 지난 4·11 총선 당시, 투표소 접근이 어려웠다. 직접 선관위에 시정을 요구했다. 올 대선도 기다리던 참이었다. 장애인 투표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살펴보자며, 동료들에게 의지를 전하기도 했다. 

퇴근 후에는 수채화를 배웠다. 입으로 붓을 물었다. 일을 그만두고는 매주 한 번씩 유화를 배웠다. 미술 선생이었던 김준우씨는 “다른 장애인과 달리 주영씨는 스스로 물감을 섞었다. 달라진 색을 보며 감탄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생전에 완성한 작품은 11월1∼2일, 강동역에 전시됐다. 

김씨는 가장 행복했던 일로 지난 7월, 계곡물에 몸을 담근 일을 꼽았다. 샤워를 할 때마다 활동보조인 신씨에게 “나는 물이 좋아. 물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타까워”라고 말하곤 했던 터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센터 동료들과 도봉산에 오른 날, 동료들과 등산객 8명이 김씨의 휠체어를 들었다. 이들은 계곡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씨는 33년 만에 계곡물을 만지고, 몸을 담갔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감격에 대해 신씨에게 말하곤 했다. 

2011년 말, 센터의 글 모임 주제는 ‘나의 장례식에 와준 친구들에게’였다. 김씨는 동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너희에게 짐처럼 느껴졌을까 미안한 마음뿐이구나. 너희를 두고 떠나는 지금, 너희에게 잘해준 일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고 잘해주지 못한 일들만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평생 나침반이 되어준 나의 친구, 사랑한다고 말 한번 못했네….” 그로부터 11개월여 후인 10월26일 새벽 2시, 아무도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

2012년 10월 30일 화요일

"손가락밖에 못 움직이는 주영이, 불 속에서 얼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29일자 기사 '"손가락밖에 못 움직이는 주영이, 불 속에서 얼마나…"'를 퍼왓습니다.

평생 두 발로 땅을 밟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1급 뇌성마비 중증장애를 앓았다. 하지만 25살 때부터 부모 품을 떠나 자립했다. 다른 장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해 중증 장애인들에게 한글 등을 가르치는 야학교사로 활동했다. 2009년부터는 성동구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자립을 원하는 중증장애인을 상담해주는 일을 했다. 지난 26일 새벽, 화재로 사망한 김주영(33) 씨 이야기다.

경찰의 말을 종합해보면, 26일 새벽 2시 40분께 6평 규모의 김주영 씨 원룸에서 불이 났다. 김주영 씨 집 2층에 사는 이웃주민은 펑 소리가 나서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김 씨의 집이 불타고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소방서 신고 접수 기록을 보면 최초신고 이후, 김 씨도 소방서에 구조 신고를 했다. 하지만 소방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김 씨는 이미 화재 연기에 질식사한 상태였다.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는 김 씨는 리모컨으로 자신의 집 문을 열어놓았으나 이것만으론 연기를 피하기 어려웠다. 김 씨가 참사를 당한 장소와 출입문까지는 불과 몇 발작 거리였다.

불은 10분 만에 꺼졌지만 혼자서 전동휠체어에 앉을 수 없었던 김 씨는 밖으로 나오지 못해 화염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 추모제. ⓒ프레시안(허환주)

김 씨는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 12시간밖에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이다. 이날 활동보조인은 밤 11시 30분에 퇴근했고 참사는 그 이후 발생했다. 장애인단체는 하루 24시간 활동보조 서비스만 이뤄졌다면 김 씨가 그렇게 어이없이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 단체는 29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추모제를 열고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평소 고인과 친했던 최진영 성동구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왜 이렇게 장애인들이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손가락밖에 움직이지 않는데 화재 속에서 주영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24시간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게 해달라는 우리의 목소리를 지속해서 모르쇠로 일관했다"며 "그 결과, 지금처럼 한겨울 수도관이 터져 죽거나, 불이 나서 죽는 게 지금의 장애인이다. 이제라도 우리를 사람으로 봐주길 바란다"고 눈물을 흘렸다.

 /허환주 기자

2012년 6월 25일 월요일

4년 기다렸는데…정부, 표준운임료 약속 헌신짝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6-25일자 기사 '4년 기다렸는데…정부, 표준운임료 약속 헌신짝'을 퍼왔습니다.

 

화물연대 25일부터 파업
 운송료 중구난방·고유가 겹쳐 시급 2197원 ‘벼랑’
9년 전 해주겠다던 ‘노동자성 인정’도 나몰라라
부산 등 4곳서 화물차 27대 화제…경찰 수사 나서

화물운송 노동자들로 구성된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가 25일 오전 7시부터 파업에 들어간다. 2003년과 2008년 파업으로 물류대란을 일으켰던 화물연대가 또다시 파업에 나서는 이유는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최대 쟁점은 표준운임제다. 정부는 2008년 6월 화물운송노동자들의 생활임금을 보장하기 위해 적정 운송료를 결정하는 표준운임제를 법제화하기로 화물연대와 합의했으나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현재 화물운송료는 ‘중구난방’이다. 화주-운송회사-운송노동자로 연결되는 다단계 계약관계에서 높은 중간 수수료와 최저낙찰제의 영향으로 직접 물건을 나르는 운송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턱없이 낮다. 화물연대 관계자는 “기름값·도로이용료 등 직접비용 부담은 늘어만 가고 물가는 해마나 오르는데 운송료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화물노동자들의 수입이 시급 2197원 수준까지 떨어지는 등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화물운송 시장정보시스템을 보면, 2008년에 견줘 올해 부산~수도권 왕복운임은 7% 인상됐으나, 경유값은 24.2%나 올라 화물노동자들의 피해가 심각한 상황이다.화물연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름값·도로이용료 등을 고려해 화물운송노동자의 운임을 매년 법으로 정한 뒤 이를 어길 경우 화주나 운송회사를 처벌하는 내용이 담긴 표준운임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표준운임제 법제화는 찬성하지만, 처벌조항을 두자는 것은 과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화물연대는 “처벌조항이 없으면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반박했다.화물연대는 또 생활임금을 보장받기 위해 당장 올해 운송료 30% 인상과 면세유 지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화물연대는 운송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대형운송사가 가입해 있는 ‘통합물류협회’에 교섭을 요구했으나 전혀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화물운송노동자의 노동자성도 논란거리다. 화물노동자는 특수고용형태 종사자로,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4대 보험은 물론 노동법을 전혀 적용받지 못한다. 정부는 2003년 화물연대 첫 파업 때 특수고용형태 종사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입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콜롬비아를 국빈 방문중인 이명박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각) “유럽 재정위기로 세계경제 환경이 악화되고 있고 국내 경제 또한 어려움이 예상된다”며 “화물연대 파업은 현시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화물연대는 “정부가 표준운임제 법제화라는 4년 전 합의 사항을 외면한 것이 이번 파업의 원인인 만큼, 이 대통령은 국가 경제 운운하기에 앞서 약속부터 지켜야 한다”고 반박했다.한편 24일 새벽 부산·울산·경남·경주 네 지역에서 화물차 27대가 잇따라 불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25일로 예정된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 파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화물연대는 “화물연대가 화재를 일으킨 것으로 (당국이) 여론을 몰아가는 것은 교섭을 거부하고 파업을 장기화해 물류대란을 조장하기 위한 의도”라고 반발했다.

김소연 노현웅 기자, 창원/최상원 기자 dandy@hani.co.kr

2012년 1월 6일 금요일

"15톤 강판에 깔려 장 파열, 그래도 구급차 못 부른 이유"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06일자 기사 '"15톤 강판에 깔려 장 파열, 그래도 구급차 못 부른 이유"'를 퍼왔습니다.
[현장] 조선소 산업재해, 왜 하청 노동자에게만 집중되나

울산시 남구에 있는 울산병원 가는 길. 지난달 30일 세진중공업 대형 선박 블록에서 발생한 화재로 사망한 현욱일(37) 씨 시신이 안치돼 있다. 사망한 지 7일이 지났지만, 그의 시신은 아직 차가운 영안실에 있다.

길을 알려준다며 함께 병원으로 가던 세진중공업 하청 노동자 김인식(가명·50) 씨는 "현장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는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사고 속에서 오늘도 다치지 않고 일한 것에 감사하며 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 씨의 죽음은 자신의 미래 모습일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래도 일이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산단다. 김 씨는 새해 들어 딱 하루 일했다. 일하고 싶어도 '오야지'가 일감을 주지 않아 발만 동동거리고 있다. 20년을 넘게 조선소 하청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위험하다는 거야 늘 알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다.대학을 다니는 자식이 두 명이나 된다.

"우리가 바라는 건 딱 하나입니다"

7일 오후 3시께 현욱일 씨 유가족을 만났다. 함께 왔던 김인식 씨는 같이 만나지 못했다.회사에서 보낸 사람이 영안실을 찾는 하청 노동자를 체크하고 있다고 했다. 회사에 찍히면 생계가 곤란해진다.

현욱일 씨의 이름이 적힌 영안실 입구 전광판에는 발인 날짜가 없었다. 현 씨와 함께 사고를 당한 3명의 하청 노동자 유가족은 회사와 합의를 마쳤다. 오롯이 현욱일 씨만 남았다. 왜 현욱일 씨만 회사와 합의를 하지 못했을까.



▲ 현욱일 씨 시신이 안치된 울산병원 장례식장. ⓒ프레시안(허환주)

현욱일 씨 여동생 인영(가명) 씨는 "우리가 바라는 건 오빠 영정에 세진중공업 관계자가 와서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영 씨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유가족에게도 세진중공업은 아무런 사과의 말을 전하지 않았다"며 "버티기 힘들어 다른 유가족은 사과를 받지 않고 그냥 장례식을 치렀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현 씨와 계약관계에 있는 회사는 명성테크. 명성테크는 세진중공업에서 만든 조선 블록을 용접하는 일을 한다. 하청업체다. 세진중공업은 이번에 발생한 사고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이유다.

장례식장 복도 좌우를 빼곡히 채운 화환 중에는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 송영길 인천시장 등 정치인 화환을 비롯해 사망한 노동자 회사인 명성테크와 아주테크 화환도 보였다. 하지만 세진중공업 화환은 없었다.

김 씨는 "하청에 있는 소장과 직원들이 어제도 찾아와 조문을 했다"며 "이들은 우리에게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사죄했지만 사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나 싶다"고 말했다. 김 씨는 "우리 오빠가 아니라 이들이 현장에 있었다면 똑같이 죽었을 것"이라며 "구조적문제가 있음을 세진중공업도 알고 있지만 계약상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만 한다"고눈물을 글썽였다.

김 씨는 "세진중공업에서 사죄를 하지 않는 이상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며 "최소한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췄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닦았다. 현 씨의 시신이 아직 땅에 묻히지 못한 이유다. 현 씨의 초등학교 4학년과 7살 아이는 아직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외할머니 집에서 아버지가 선물을 사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원청의 공정기일 압박이 사고를 일으켰다"

경찰과 소방당국 발표를 보면 지난달 30일 오전 8시50분께 울산시 울주군 온산읍 원산리 세진중공업에서 대형 선박 블록 제조 작업 도중에 폭발사고가 발생해 김영도(52), 유동훈(32), 현욱일(37), 유지훈(27)씨 등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 4명이 숨졌다.

이날 폭발사고로 일어난 화재는 30여분 만에 진화됐다. 밀폐된 공간에서 여러 명이 작업했고 전날 용접작업이 끝난 뒤 세진중공업 안전팀이 점검해야 했지만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화재 원인을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원청의 관리부재로 전날 남아 있던 가스가 이날 그라인딩 작업(블록 면을 기계로 가는 작업)과 동시에 불꽃과 결합, 폭발을 일으켰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조선소에서는 이런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사고는 블록 안에서 그라인더 작업과 용접 작업을 진행하다 발생했다. 하지만 정작 사고현장에는 페인트통, 붓과 호스, 유압펌프 등이 흩어져 있었다. 주목할 점은 붓은 도장(블록에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을 마친 뒤, 미처 칠하지 못한 구석부분을 페인트로 마무리하는 데 쓰인다는 점이다. 사실상 최종 마무리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 용접을 하고 있는 조선소 하청 노동자. ⓒ조선하청노동자연대

하지만 정작 사고는 그라인드, 즉 도장 공정 전에 진행하는 블록 깎는 작업을 하다 발생했다. 이는 여러 작업을 블록 안에서 동시에 진행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도장작업이 선행됐다면 현장에 시너 등 인화성물질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폭발에 이은 화재로 연결돼, 사망확률이 더 높아졌을 것으로 조선업 관계자들은 분석한다.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원청에서 정한 공정 기일을 지키려 혼재작업, 즉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시킨 걸로 추측된다"며 "무리한 혼재작업이 결국 이런 사고를 빚어냈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해진 공정 기일을 맞추기 위해 애쓴 흔적이 곳곳에 있다. 피해자들은 사고 전날 밤 11시까지 작업을 한 뒤, 사고 당일 아침 8시에 또다시 일을 해야 했다. 유족에 따르면 현욱일 씨는 몸살 기운 때문에 쉬고 싶다고 했지만 현장관리자는 무조건 나와야 한다고 반강제적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다. 고인은 죽기 일주일 전부터 쉼 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더구나 사고 발생 이후 울산고용노동지청은 사고가 난 블록의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세진중공업은 "1월 3일까지 배가 나가야 하니 작업 중지를 풀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만큼 공정 기일 압박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혼재작업이 진행됐다면 원청 책임은 더욱 커진다. 혼재작업 관리를 하청업체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동일한 장소에서 원,하청이 작업을 할 때 산업재해예방의 의무는 원청 사업주에게 있다. 또 현실적으로도 세진중공업 안에 30여 개 하청업체가 공정별 또는 혼재된 상태에서 작업할 때, 기본적인 안전조치와 업무지시는 원청 사업주가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선실 내 배기시설 설치나 통풍 환기조치 등도 원청에서 관리할 수밖에 없다. 하청업체가 할 수 있는 건 잔류가스 점검, 산소측정, 작업 후 뒷정리 등이다. 그나마도 작업 공정 기일이 급하면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세진중공업이 안전보건시스템 인증(KOSHA 18001)을 받는 모범 기업이라도 지속적으로 안전관리를 하지 않으면 대형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 지난 30일 화재 사고가 발생한 블록. ⓒ연합뉴스

일하다 다쳐도 산재 인정은 꿈도 못 꿔

조선하청노동자연대에 따르면 조선소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90% 이상은 하청 노동자에게 일어난다. 중공업 현장에서 일하는 3만 명의 노동자 중 정규직의 숫자가 1만 명이지만 사고는 비정규직, 즉 하청 노동자에게만 일어나는 셈.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관계자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장에서도 쉬운 일, 편한 일을 한다"며 "어렵고, 위험한 도장 작업이나 용접 작업 등은 모두 하청 노동자의 몫"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정규직이야 고용이 보장됐고, 노조도 있으니 회사에서도 이들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며 "하지만 비정규직은 언제든 해고할 수 있을 뿐더러, 여차하면 하청업체와 계약해지를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라고 말했다.

일하다 다쳐도 산재 신청은 꿈도 못 꾼다. 산재를 신청하면 원청에서 곧바로 해당 하청업체와 계약을 해지하기 때문이다. 사내하청 관계자는 "얼마 전에는 공장 내에서 일하던 하청 노동자 한 명이 15톤짜리 강판에 깔려 골반이 부러지고 장이 파열됐다"며 "하지만 업체 관리자는 구급차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사고가 난 걸 알게 되면 하청 업체와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다친 노동자는 트럭 짐칸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혹시 문제가 될까 우려한 업체 관리자는 다친 노동자를 담요로 덮는 주도면밀한 모습까지 보였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업체 관리자는 병원에 와서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하라"고 협박까지 했다. 상황이 이러니 산재 인정은 엄두도 못 낸다. 사내하청 관계자는 "이런 일은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부산지방고용노동청은 13일 세진중공업 특별안전감독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세진중공업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비단 세진중공업의 문제만이 아닌 한국 조선업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지난 11월 4일에는 현대미포조선 장생포공장에서 하청노동자 1명이 추락해 사망했다. 12월 16일에는 삼호중공업 하청노동자 1명이 역시 추락해 사망했다. 알려지지 않은 죽음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선소 하청 노동자는 일하다 소리 소문없이 죽고 있다.



/허환주 기자(=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