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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삶의 주인공을 꿈꿨던 한 장애인의 죽음


이글은 시사IN 2012-11-12일자 기사 '삶의 주인공을 꿈꿨던 한 장애인의 죽음'을 퍼왔습니다.
10월26일 장애인 활동가 김주영씨가 화재로 숨졌다. 소방서에 전화를 했지만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시민단체는 ‘활동보조 24시간 보장’만 실현됐어도 그녀가 살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의 일생을 돌아본다.

10월26일 새벽 5시께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웠다. “김주영씨 부모님 맞으시죠? 잠깐 일이 있으니 성동경찰서로 와 주시죠.” 전화를 받은 김씨의 아버지 김성남씨(가명)는 아내 박숙자씨(가명)를 깨웠다. 허겁지겁 옷을 차려 입은 두 사람은 황급히 차를 몰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겹쳤지만, 딸의 숨이 멎었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김주영씨(33)는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한 연립주택 1층에서 혼자 생활했다.

10월26일 새벽 2시께. 방에 누워 있던 김씨는 부엌에서 불이 난 것을 알아차렸다. 119에 다급하게 신고했다. 터치펜을 입에 물고 스마트폰으로 건 전화였다. 소방관들은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불은 9분 만에 꺼졌다. 하지만 김씨의 집은 시커멓게 타버렸다. 그녀는 누워 있던 그대로 숨졌다.

ⓒ김흥구 10월30일 고 김주영씨 노제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그녀의 죽음은 장애인 정책을 수정하라고 웅변한다.

김씨는 1979년 6월14일,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목만 가눌 수 있는 정도였다. 활동보조인의 도움으로 씻고 밥을 먹고 용변 처리를 했다. 전동휠체어는 그녀의 발을 대신했다. 혼자서는 휠체어에 탈 수도, 내릴 수도 없었다. 활동보조인은 퇴근하기 직전 늘 그녀를 잠자리에 누이고, 머리맡에 휴대전화와 터치펜, 현관문을 열고 잠글 수 있는 리모컨을 두었다. 불이 나자 신고를 하고, 현관문을 열어둔 것이 김씨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등 시민단체는 ‘장애해방운동가 고 김주영 장례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10월30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을 출발한 운구차는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장례는 노제로 치러졌다. 영정 앞에 국화가 쌓였다. 사진 속에서 김씨는 웃었다. 박김영희 장애해방열사단 대표는 “주영이가 외치던 ‘활동보조 24시간 보장…’ 결국 이게 실현되지 않아 이렇게 가는구나…”라고 비탄했다. 김씨는 하얀 가루가 되어 경기도 광명시립납골당의 작은 그릇에 담겼다. 


어릴 적부터 공부 욕심 많아

3월부터 호흡을 맞춘 활동보조인 신미미씨(22)는 사고가 나기 직전까지 함께했다. 10월25일, 이날은 특별했다. 오후 4시께 이들은 왕십리역에서 만나 분당선을 타고 서울숲으로 향했다. 산책하던 김씨는 그날 오전에 생긴 기쁜 소식을 신씨에게 전했다. “새 직장에 11월1일부터 출근하기로 했어. 일터와 가까운 데 이사할 집도 봤고. 내일 계약하고 싶은데, 화장실이 좁아서 네가 불편할지도 모르겠네. 아, 오전 활동보조인도 구했어.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 

ⓒ김흥구 김주영씨의 어릴 적 사진과 최근 사진(위). 그녀는 “너무 고생해서 어렸을 때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씨에게 경사가 겹치는 듯했다. 닷새 후에는 남자 친구 서인수씨(가명·36)와 사귄 지 100일되는 날이었다(결국, 이날은 김씨의 발인일이 되어버렸다). 14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서씨도 장애가 있다. 서울숲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대형마트에 들러 남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스킨로션, 지갑, 벨트, 바지와 신발…. 이 가운데 마음에 드는 지갑을 고른 김씨는 들떠 있었다. 오후 9시30분께 집으로 돌아왔다. 잠잘 채비를 마친 후 신씨는 김씨의 집을 나섰다.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그로부터 2시간여 뒤인 새벽 1시께 김씨는 남자 친구 서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곤하지? 힘들겠네….” 통화는 간단했다. 일하는 중이던 서씨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여느 때라면, 김씨가 수십 분 이내에 또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이날은 그러지 않았다. ‘어쩐 일로 전화가 없네…’ 김씨와의 마지막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김씨는 ‘너무 고생해서, 어렸을 때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운전하는 화물차에 타고 ‘서울 소풍’ 가던 때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김씨가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김씨가 여섯 살이 되던 무렵, 서울에서 큰 수술을 받았다. 아버지 김씨는 17일 동안 화물차에서 잠을 청하며 김씨를 간병했다. 그 뒤, 가족은 김씨의 치료를 위해 수도권으로 이사했다. ‘엄마가 덮어주는 이불이 제일 따뜻해.’ 성인이 된 뒤에도 김씨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제공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는 김주영씨(오른쪽).

하지만 장애를 가진 이들은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김씨도 그랬다. 한 달여 전, 조카의 돌잔치. 하지만 가지 않았다. 부모의 결혼기념일 케이크를 두 동생과 함께 만들고,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 홀로 가서 아버지에게 드릴 MP3 플레이어를 구입해 선물하는 등 가족 사랑이 지극하던 김씨였다. 남자 친구 서씨는 그녀가 조카 돌잔치에 가지 않는 것이 뜻밖이었다. 김씨는 “여러 사람이 오는 복잡한 자리라,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라고 털어놓았다. 짐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같은 이유로, 결혼에 대해서도 신중했다. 

김씨는 공부에 욕심이 많았다. 여섯 살 때부터 삼육재활원에서 생활한 김씨는 장애인 학교인 삼육재활학교에 진학했다. 10여 명 학생 가운데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다. 당시 김씨의 초등부 담임은 “장애가 심했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제가 할게요’라고 손을 들며 항상 먼저 발표하려 했다”라고 말했다. 고등부를 졸업한 뒤 같은 재단 직업학교에서 정보처리사 2년 과정을 거쳤다. 또 전남 담양에 내려가 덕산직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사무자동화 전문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공부에 시간을 투자했다. 2007년, 한양사이버대학에 편입해 전자계산학을 전공했다. 2011년에도 사회복지를 공부하기 위해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김씨는 최근까지도 기말고사를 대비한 사회복지 공부 모임을 해왔다.

전문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도 취업은 쉽지 않았다. 2004년, 이력서를 냈지만 답신이 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문화센터에 첫발을 내디뎠다. 미디어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어려서부터 영상이 좋았다. 집에서, 병원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왔던 터다. 두 달여에 걸쳐 다큐멘터리 을 완성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녀가 기획·촬영·편집을 도맡아 내놓은 11분54초짜리 영상에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담겼다. 

집이 있는 경기도 광명에서, 미디어 수업이 있는 서울 광화문 미디액트까지 가는 것은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어렵게 도착해도, 조작법이 세밀한 카메라를 직접 만질 수 없었다. ‘내가 찍고 싶은데….’ 6㎜ 카메라를 휠체어에 달았다. 이렇게 찍힌 화면이, 김씨가 보는 세상이었다. 그 사이, 1시간 분량 테이프 6개가 쌓였다. 

김주영씨는 생전에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그는 에서 ‘나는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 어렸을 때 사진이 없다’라고 회고했다. 이런 김씨가, 촬영을 마치고 난 뒤, 한 인터뷰에서 “밖에 나가기 두려워 집 안에만 있으면 악순환이 계속된다. 열악해도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자”라고 말한다. 사회활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외출 혹은 탈출)을 완성한 다음 해인 2005년, KBS (열린채널)을 통해 전파를 타고, 제5회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 ‘젊은이 및 일반’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김씨는 ‘감독’이 된 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인턴으로 취직했다. 장애인 관련 방송 모니터링을 맡았다. 매주 20시간 근무, 월급 30만원. 자신의 힘으로 처음 번 돈이었다. 2006년 10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시민방송 RTV에서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독립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프로그램을 김씨와 함께 진행한 박김영희씨는 김씨에게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고 독려했다. 김씨도 부모님이 연로해졌을 때 내가 짐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던 터였다. 새로운 둥지를 틀기로 결심했다. 종로구 혜화동에서 자립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독립하면서 부모를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로, 활동보조인 제도를 꼽았다. 하지만 활동보조인 비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항상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삶의 주인공 되기 위해 자립 결심

2009년, 자립에 용기를 얻은 김씨는 광주로 내려가 광주한마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일했다. ‘열악한 현장’에서 활동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10여 개월 동안 중증장애인 2∼3명과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소감을 나누는 모임을 꾸렸다. 김씨가 쓴 감상평은 인터넷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생활도 잠시. 2009년 10월, 활동보조인을 구하지 못해 일을 포기했다. 부모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김흥구 강동역에 전시된 김씨의 그림을 한 장애인이 보고 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사회활동에 더욱 매진했다. 폐렴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2년9개월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센터)에서 일했다. 이때, 사고가 난 행당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센터에서는 장애인 회원 모임을 담당했다. 보치아 게임(장애인 스포츠)과 영화 모임, 글쓰기 모임을 맡았다. 또 선거 기간에는 장애인 참정권 문제를 공론화했다. 지난 4·11 총선 당시, 투표소 접근이 어려웠다. 직접 선관위에 시정을 요구했다. 올 대선도 기다리던 참이었다. 장애인 투표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살펴보자며, 동료들에게 의지를 전하기도 했다. 

퇴근 후에는 수채화를 배웠다. 입으로 붓을 물었다. 일을 그만두고는 매주 한 번씩 유화를 배웠다. 미술 선생이었던 김준우씨는 “다른 장애인과 달리 주영씨는 스스로 물감을 섞었다. 달라진 색을 보며 감탄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생전에 완성한 작품은 11월1∼2일, 강동역에 전시됐다. 

김씨는 가장 행복했던 일로 지난 7월, 계곡물에 몸을 담근 일을 꼽았다. 샤워를 할 때마다 활동보조인 신씨에게 “나는 물이 좋아. 물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타까워”라고 말하곤 했던 터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센터 동료들과 도봉산에 오른 날, 동료들과 등산객 8명이 김씨의 휠체어를 들었다. 이들은 계곡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씨는 33년 만에 계곡물을 만지고, 몸을 담갔다.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감격에 대해 신씨에게 말하곤 했다. 

2011년 말, 센터의 글 모임 주제는 ‘나의 장례식에 와준 친구들에게’였다. 김씨는 동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너희에게 짐처럼 느껴졌을까 미안한 마음뿐이구나. 너희를 두고 떠나는 지금, 너희에게 잘해준 일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고 잘해주지 못한 일들만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평생 나침반이 되어준 나의 친구, 사랑한다고 말 한번 못했네….” 그로부터 11개월여 후인 10월26일 새벽 2시, 아무도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그들만의 방송, 그들만의 국가… MB와 MBC


이글은 노컷뉴스 2012-11-02일자 기사 '그들만의 방송, 그들만의 국가… MB와 MBC'를 퍼왔습니다.
[변상욱의 기자수첩]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MBC 노조원들이 삭발을 했다. 170일 파업을 벌였고 파업 종료 후 복귀해 110일 가까이 지났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고 밤 9시 'MBC 뉴스데스크'는 'KBS 9시 뉴스'와의 맞대결을 포기하고 8시로 옮겨졌다. 그런데 8시에 메인 뉴스를 방송하고 있는 SBS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2012년 지상파 3사 저녁 뉴스 시청률 자료(AGB닐슨, 수도권가구시청률) 자료를 살펴보면 지난 9월 중 MBC 뉴스데스크 평균 시청률은 6.9%이다. 

같은 기간 KBS 9시뉴스는 21.4%, SBS 8시뉴스는 12.8%이니 SBS의 반토막, KBS의 1/3이다. 소신 있고 일 잘하는 제작요원들이 변방으로 쫓겨나고 일감이 주어지지 않은 채 샌드위치 만들기 교양교육 받으러 다니는데 무슨 재주로 시청률이 올라가겠는가. 당연히 MBC의 살림살이는 이야기 꺼내기 난감할 만큼 엉망이 되어있다. 

◇추락하는 MBC에 날개가 없다
 

MBC 노조가 사장에게 문제가 있다며 횡령과 배임, 부도덕한 행위들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지 한참이 지났다. 꽤 두툼한 근거자료들을 제시했으니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와 이사회가 철저한 진상조사를 벌여 결과를 바탕으로 처리했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눈치만 보며 자꾸 처리를 미룬다. 결국 국회까지 나서 청문회를 열어도 사장은 해외출장 간다고 빠져나간다. 

국회가 출장에 맞춘 건지 사장이 국회에 맞춘 건지 모르지만 방송의 위기에 사장을 국회가 청문회로 불렀다면 그 어떤 출장 일정도 우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도망이고 도피이다. 그리고서 회사 지분을 팔겠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와 다시 한 번 소동이 벌어졌다. 

MBC 피디수첩 '광우병' 편도 다시 문제가 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비판했던 2008년 4월 방송내용에 대해 정부 관료들이 명예훼손이라며 고소한 것은 모두가 아는 내용. 이 소송으로 지난해 9월 대법원이 'PD수첩' 제작진은 모두 무죄라고 확정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MBC 사측에서는 ‘PD수첩’이 일부 허위내용을 보도한 걸로 판결이 났다며 시키지도 않은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제작진은 회사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정직과 감봉이라는 징계까지 당해야 했다. 이번엔 억울한 제작진이 소송을 제기했다. 며칠 전 서울남부지방법원의 이 사건 담당 재판부는 MBC경영진이 대법원 판결을 잘못 해석해 엉뚱하게 사과방송을 하였으므로 다시 정정보도를 하라고 판결했다. 

◇MBC vs BBC, 달라도 너~무 달라

도대체 MBC는 왜?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최근 PD저널에는 영국 통신원의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지난해 8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미 새빌이라는 영국 공영방송 BBC의 간판 앵커 이야기이다. 무려 40년 간 국민의 존경을 받은 유명한 저널리스트. 그런데 최근 ITV(우리나라 SBS와 비슷한 방송)에서 지미 새빌의 성범죄 사실을 폭로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됐다. 지미 새빌과 그 주변사람들에게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가 수백 명에 이른다는 깜짝 놀랄 내용으로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더 큰 문제는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공영방송 BBC가 이런 성범죄 사실을 알고도 쉬쉬해 왔다는 것. 그런데 BBC는 지난해 12월 그의 악행을 폭로하는 다큐멘터리방송을 제작했다 한다. 그런데 BBC의 다른 제작팀은 지미 새빌을 추모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상극의 내용인 두 프로그램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둘 중에 결국 추모 특집이 방송되고 폭로특집은 방송되지 못했다. 결국 ITV가 이 범죄사실을 폭로했고 BBC는 사실을 숨겼다는 비난을 사고 있는 것. 


더 흥미로운 건 BBC의 다른 프로그램이 범죄사실 폭로 프로그램을 방송 못하게 한 경위와 그 책임자를 비난하는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낸 것. 그리고 이제라도 진실을 보도하겠다는데 협조하지 않은 간부들이 있었음도 폭로했다. 이후 성범죄 폭로 방송을 막았던 편집장은 보직을 내놓고 물러났고 10여명에 이르는 전·현직 직원들이 BBC 자체 조사를 받고, 국회청문회에 불려 나가고, 경찰 조사도 받고 있다. BBC 역사에서 최악의 위기가 닥쳐 온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렇게 언론동업자끼리 비리를 폭로하고, 내부의 양심고발이 터져 나오고, 책임자는 누구든 조사받고 처벌받는 이것이 민주주의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국회가 청문회를 열어도 외국 출장 가면 그만이다. 그런 사장을 호위하는 간부들만 득세한다. 대법원이 제작진에게 무죄 판결을 내려도 제작진을 처벌하고 억지 사과방송을 한다.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라는 의혹을 살 수 밖에 없다. 엄청난 판공비 유용과 부적절한 여성 관계에 대한 내부의 의혹 제기로 여론이 들끓어도 이사회는 그저 겉돌기만 한다. 공적 방송을 둘러싼 영국의 민주주의와 한국의 민주주의, 얼마나 엄청난 차이인지 한 눈에 드러나는 사건이다. 

◇무엇이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가?
 

왜 이런 어리석음이 등장하는 걸까? 무엇이 이런 어리석음을 만드는 걸까? 사람들은 정치인이 어리석어 그렇다고 믿는다. 천만에, 그건 사회문화적인 어리석음이다. 사회문화적 어리석음이란 이런 것들이다. 50여년 역사의 방송을 망치면서도 국회와 이사회에서는 무조건 여야 정파로 맞선다. 그러다보니 이사회도 국회도 방송사 사장이 무슨 일을 벌여도 힘을 못 쓴다. 

모든 건 최고 권력자에게 맡겨져 있다. 정책이 실패해도 여야, 진보보수 대결로만 겉돌지 문제의 해결로는 가지 않는다. MBC 사태도, 4대강도 뭐든 말만 나오면 권력이 바뀌어야 해결되지 않겠냐고 한다. 선거 때 약속했어도 최고 권력자가 되고나면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다. 모든 건 최고 권력자와 그 친위세력에게 달려 있다. 

국민사찰에 청와대가 끼어들고, 국민이 대통령 선거일에 투표할 수 있도록 시간을 늘려달라고 집권세력에게 빌다시피 해도 꿈쩍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게 우리 민주정치 문화의 수준이다. 

노엄 촘스키 교수는 국민에게 필요한 국가와 권력자에게 필요한 국가는 같아 보여도 전혀 다르다고 설명한다. "권력자에겐 국가가 필요하다. 그래야 세상을 지배하고 권력의 비용과 위험을 국민에게 떠넘길 수 있으니까." 

독재자에게 국가는 지배라는 짜릿한 재미와 거느릴 부하들, 술과 여자와 향락의 비용과 평생 쓸 노후 비용을 제공한다. 국민의 혈세가 그것을 대주어야 한다. 그런데 MBC 사장도 엄청난 권력인가 보다. 그에게도 먹고 놀고 여행하고 노후의 정치적 보장까지 MBC가 대주고 있다. MBC는 무엇을 위한 존재일까?

CBS 변상욱 대기자

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사회가 죽인 김주영 장례식 장애인도 사람 대접받는 사회 언제?


이글은 레디앙 2012-10-30일자 기사 '사회가 죽인 김주영 장례식 장애인도 사람 대접받는 사회 언제?'를 퍼왓습니다.
화재로 사망한 장애운동가 김주영 동지 장례식 열려

지난 26일 새벽 2시경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서 일어난 화재로 사망한 중증장애인 김주영씨의 장례식이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진행됐다.
김씨는 현관까지 다섯걸음밖에 되지 않는 곳에 누워있었지만 10분만에 진압될 정도의 작은 화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음에 이르렀다. 그는 뇌성마비 중중장애인으로 활동보조인 없이는 혼자서 휠체어에 타거나 화장실을 가고, 옷을 갈아입는 등의 기본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김주영씨는 화재가 발생한 직후 입으로 펜을 물어 스마트폰을 작동해 직접 119에 신고했으나 소방차가 도착하는 그 5분간 홀로 고통스럽게 질식사했다.
활동보조인 서비스는 12시간만 제공하기 때문에 김씨가 사망한 그 시간은 홀로 집에 있던 시간이었다. 만약 활동보조서비스를 24시간 제공했다면 이런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장애인해방운동가인 김주영씨의 장례식이 열리던 30일 광화문의 날씨는 화창했다. 장례를 마치고 보건복지부 항의를 위해 행진할 때 사회자는 “오늘 날씨가 너무나 좋다. 주영이와 마지막으로 경복궁으로 소풍을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탄식했다.

턱 없는 길은 오로지 차도 뿐

약 700여명의 추모객과 유족이 보건복지부로 향할 때 경찰은 2차선 도로까지 허용했다. 그러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활동가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안국동쪽으로 빠지는 우회로 길에서 3차선, 4차선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동지 가는 마지막 길을 막지 말라고.

세종은 백성의 말글의 장애를 안타까워했다만, 우리는 오늘 신체의 장애마저 무관심하다.(사진=이상엽)

그러고보니 휠체어가 턱에 걸리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차도밖에 없다. 차도에서는 턱도 계단도 없다. 장애인활동가들은 경찰들이 시민들의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고 길을 막아서자, “차가 조금 막힌다고 사람이 죽지 않는다”, “조금만 불편을 참으면 되지 않느냐”며 그들 스스로가 평생 들었던 “참아라”라는 말을 경찰들에게 소리쳤다.
평생을 당신들에겐 ‘조그만’ 불편이지만 본인들에겐 ‘모든 것을 감수하고’ 살아야 했던 이들이 동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라도 장애 없는 길에서 시원히 내달려보자고 소리치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차가 아니라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막았고, 한 장애인은 차와 부딪히는 경미한 사고까지 발생했다.
곳곳에서 도로를 확장해 행진을 보장해달라며 경찰들과 크고 작은 마찰이 있었고 이 과장에서 또 다른 장애인은 경찰에 의해 휠체어에서 떨어졌으며 한 나이 많은 여성활동가는 실신하기까지 했다.
최소 35만명이 평생을 본인 의지에 따른 의식주를 해결할 수도, 외출하지도 못한 채 쓸쓸한 삶과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데, 고작 몇 시간 광화문 인근을 지나가는 차량들이 지체된다고해서, 그 차들이 다른 길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렇게 큰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현장이었다.

2002년 시청역에 벌인 철로 점거 투쟁 그리고 2012년

김주영씨의 죽음은 사전에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가 지적했듯이 “사회적 타살”임이 분명하다. 노 대표는 이날 장례식에 참석해 “장애인은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모든 장애인은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누릴 국민”이라고 강조했다.
진보신당의 김종철 대표 직무대행은 한 사연을 소개해주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장애인 동지들이 시청역 철로에서 본인들의 몸을 묶고 투쟁했던 적이 있는데, 알고 지내던 한 여성분이 왜 그런 투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결혼을 해 아이를 낳은 뒤 지하철에서 한 아이는 손을 잡고 다른 아이는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르다가, 어느날 갑자기 생긴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왜 그런 투쟁을 했는지 이해하겠다고 했다”는 사연을 소개했다.
민주통합당의 남윤인숙 의원은 “김주영씨는 2005년 목숨을 걸고 자립생활을 시작하며 활동보조제 전면 시행 등 장애인 인권운동에 앞장섰다”며 “활동보조 시간을 늘리고 부양의무자 제도를 폐지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통합진보당 이상규 의원 또한 “더 살아야만 하고 더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청춘이 너무나 안타깝고 허망하게 갔다”며 “차별 없는 세상에서 장애인도 한 사람의 주체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해 함께 싸우겠다”고 밝혔다.
2002년 장애인들의 ‘이동할 권리’를 위한 투쟁이, 미약하나마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나 저상버스 도입 등의 일정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그 10년의 세월동안 바뀐 건 이 뿐인 것이었다.
그것도 모든 지하철역과 버스에 도입된 것이 아니다. 또한 턱없이 많은 ‘턱’과 계단으로, 활동보조인의 도움 없이는 지하철과 버스에 접근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에게는 허울좋은 전시행정일 뿐이었다.

본인부담금-부양의무제-장애등급제 폐지하고 활동보조 24시간 제공해야

현재의 정부 정책은 활동보조를 필요로 하는 장애인은 최소 35만명이지만, 활동보조의 대상을 1급 장애인으로 제한할 뿐더러 엄격한 판정기준을 가지고 그마저도 추리고 추려 5만명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이 문제점이다.

사진=이상엽 작가

김주영씨처럼 중증장애인이 아니면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해 가족들의 희생으로 감내하거나, 본인 스스로 시설로 입소하는 경우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활동보조서비스를 24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에 활동보조인이 퇴근하는 시간 이후에는 화재나 불시에 발생하는 사고 등의 위험에는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지난 달 최중증 근육장애인인 허정식씨가 활동보조인이 없는 상황에서 호흡기가 떨어져 사망한 사건도 김주영씨와 유사한 사례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부양의무제 제도는 최중증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가족과 같이 사는 경우에는 활동보조서비스를 약 100시간을, 최중증 장애인으로 독거 상태인 경우 한달 180시간으로 서비스의 상한선이 정해져 있어, 가족이 잠시 외출한 상태에 있거나 자립해 혼자 사는 장애인들은 늘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만 한다.
고 김주영씨의 경우 활동보조지원제도 인정조사점수에 따라 기본급여 월 100시간에 최중증 독거 추가지원 월 80시간을 받아 약 월 180시간의 서비스를 제공받았으나 재조사를 통한 수급자격 갱신 과정에서 제공시간이 하락될 공포에 시달리기도 했다.
본인의 장애 여부와 얼마나 삶이 고통스러운지에 대해 기준 ‘점수’를 받아야만 부족한 서비스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지난 8월 음독자살한 이씨 할머니의 경우는 사위의 소득이 발생한 이유로 수급권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씨 할머니의 경우 사위의 소득과 상관없이 극빈층에 속해 수급권 자격이 충분했다. 그런데도 2005년 기준 수급권 탈락 사유의 25%가 부양의무자 기준에 의한 것으로, 중증장애인을 평생 가족의 부양대상으로만 살아가도록 강요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본인부담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활동보조 서비스 수급 자격을 가진 사람 중 25%에 해당하는 이들이 이를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과중한 본인부담금 때문이다.
기존 장애인활동보조사업이 2011년 10월 장애인활동지원제로 전환되면서 급여량 확대는 미미한데도 본인부담금이 2009년 최대 월 4만원에서 2010년 최대 월 8만원으로 인상됐다 2011년에는 최대 월 12만원 이상으로 인상됐다.
본인부담금을 최대 15%로 상한선을 정해두었지만 부가급여에 대해서는 상한 제한없이 추가 본인부담금을 부과하고 있어 실질적으로는 본인부담금의 상한선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중증장애인일수록 추가서비스가 필요하며, 그만큼 본인이 감담해야 하는 본인부담금이 커지는 상황이다.
이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등은 지난 8월부터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대상 제한을 폐지하며 활동보조서비스 24시간 무상제공을 주장해왔다. 고 김주영씨도 이 같은 투쟁을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 해왔다.

장애 등급이 없는 일본 등 해외 사례의 경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밝힌 활동보조서비스와 관련한 해외 사례의 경우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방식이다.
스웨덴의 경우 자기관리 원칙에 의해 본인이 활동지원서비스 필요성을 기술하고 그것을 사회복지사가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고, 영국은 사회복지사 등의 전문가가 판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이 경우 의사의 진단서가 동반되나 참고 정도에 불과하다.
캐나다의 경우 본인이 서비스를 신청 리포트를 제출하면 장애인으로 구성된 ‘동료판정위원회’에서 심사해 판정결과를 주정부와 신청자에게 통지한다.
일본은 한국과 가장 유사하지만 장애등급에 의한 서비스 제한이 없다. 장애정도 구분이 판정에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장애인의 환경과 욕구를 감안해 지자체 심사위에서 서비스 제공 여부를 결정한다.

행진 중 차에 부딪힌 장애인(사진=장여진)

넓은 도로로 나가려는 장애인과 막는 경찰들(사진=장여진)

경찰의 봉쇄에 휠체어에서 떨어진 장애인(사진=장여진)


장여진
레디앙 취재기자

2012년 10월 30일 화요일

"손가락밖에 못 움직이는 주영이, 불 속에서 얼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29일자 기사 '"손가락밖에 못 움직이는 주영이, 불 속에서 얼마나…"'를 퍼왓습니다.

평생 두 발로 땅을 밟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1급 뇌성마비 중증장애를 앓았다. 하지만 25살 때부터 부모 품을 떠나 자립했다. 다른 장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해 중증 장애인들에게 한글 등을 가르치는 야학교사로 활동했다. 2009년부터는 성동구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자립을 원하는 중증장애인을 상담해주는 일을 했다. 지난 26일 새벽, 화재로 사망한 김주영(33) 씨 이야기다.

경찰의 말을 종합해보면, 26일 새벽 2시 40분께 6평 규모의 김주영 씨 원룸에서 불이 났다. 김주영 씨 집 2층에 사는 이웃주민은 펑 소리가 나서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김 씨의 집이 불타고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소방서 신고 접수 기록을 보면 최초신고 이후, 김 씨도 소방서에 구조 신고를 했다. 하지만 소방관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김 씨는 이미 화재 연기에 질식사한 상태였다.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는 김 씨는 리모컨으로 자신의 집 문을 열어놓았으나 이것만으론 연기를 피하기 어려웠다. 김 씨가 참사를 당한 장소와 출입문까지는 불과 몇 발작 거리였다.

불은 10분 만에 꺼졌지만 혼자서 전동휠체어에 앉을 수 없었던 김 씨는 밖으로 나오지 못해 화염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 추모제. ⓒ프레시안(허환주)

김 씨는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 12시간밖에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최대 시간이다. 이날 활동보조인은 밤 11시 30분에 퇴근했고 참사는 그 이후 발생했다. 장애인단체는 하루 24시간 활동보조 서비스만 이뤄졌다면 김 씨가 그렇게 어이없이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장애인 단체는 29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추모제를 열고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평소 고인과 친했던 최진영 성동구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왜 이렇게 장애인들이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손가락밖에 움직이지 않는데 화재 속에서 주영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24시간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게 해달라는 우리의 목소리를 지속해서 모르쇠로 일관했다"며 "그 결과, 지금처럼 한겨울 수도관이 터져 죽거나, 불이 나서 죽는 게 지금의 장애인이다. 이제라도 우리를 사람으로 봐주길 바란다"고 눈물을 흘렸다.

 /허환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