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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6일 월요일

고대 로마인보다 못난 한국의 민영화 카르텔


이글은 프레시안 2013-05-05일자 기사 '고대 로마인보다 못난 한국의 민영화 카르텔'을 퍼왔습니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부실한 4대강 보와 2000년 된 로마 가도, 차이는?


로마의 오후 햇살이 달리는 버스에서 맞는 바람과 적당히 섞여 있는 시공간은 초콜릿과 바닐라가 혼합된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다. 버스는 고대 아피아가도를 뜻하는 'APPIA ANTICA'라고 적혀 있는 도로 안내표지판을 따라 달렸다. 왕복 이차선 정도의 폭을 갖고 있는 2300년이 넘는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원형이 살아있는 도로 중에 가장 오래된 길이 몇 년쯤 되었을까 생각해봤다. 기껏해야 100년 안쪽이었던 것 같은데, 아피아 가도의 연륜에 '쨉'이 안 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길은 아니지만 만리장성이 만들어진 시기가 기원전 3세기로, 로마의 가도와 동시대에 만들어졌다. 베이징 외곽의 산악지대를 타고 넘어 이어지는 장성을 바라보며 느꼈던 웅장함과는 또 다른 신기함과 경외감을 느꼈다. 버스가 고대 로마시의 경계를 나타냈을 성곽을 벗어나자 한적한 시골 길이 나왔다. 투어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관광객들이 올라탔고 버스는 제법 승객들로 채워졌다. 완전 인기 없는 코스는 아니었다. (☞ 이전 편 바로 가기 : 로마의 '삽질 군대', 위대한 길을 만들다)
▲ 로마의 아피아 가도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 ⓒ박흥수


고대 로마 가도의 폭은 6미터에서 10미터에 이른다. 일부 학자들은 프랑스나 한국의 고속철도 차량인 TGV(KTX)의 폭이 2.9미터이므로 로마의 가도와 복선 고속철도 노선의 폭은 거의 일치하는 구조라고 말하기도 한다. 산업혁명 시기 영국 철도를 소개할 때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렇게 폭이 일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기차의 바퀴 간격을 마차로부터 빌려 왔기 때문이다.

2000년을 이어온 '혁명적'인 로마 가도 

아피아 가도는 폭 4미터 이상의 마차 전용 길을 깔고, 이 바깥에 배수로를 파서 도로 파괴의 가장 큰 적인 물이 빠져나가도록 만들어졌다. 배수로 옆에는 다시 인도를 깔아 걸어서 이동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인도는 도보 여행을 하는 민간인 전용 도로이기도 했다. 로마의 중무장 군단병이 중앙 도로를 이용해 행군할 때 맞닥뜨리는 사람들은 양옆의 인도를 이용해서 길을 막는 일이 없도록 했다. 로마의 가도들이 일상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됐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카이사르가 교통 체증에 대응한 법을 제정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카이사르가 집권한 기원전 1세기 중엽의 로마는 서구 세계의 중심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뉴욕이나 런던파리 같은 분위기를 풍겼을 것이다. 막 북아프리카나 루비콘 강 건너 북이탈리아 전선에서 돌아온 군인들,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들어온 아프리카인들, 마케도니아, 그리스, 비잔티움(이스탄불), 중동에서 온 방문객들과 상인들이 가도를 이용해 한데 모여들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도로에 체증이 생기고 교통사고 사상자도 늘어났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교통법'을 만들어 일출부터 일몰 때까지 공공 목적이 아닌 마차나 수레의 로마 진입을 금지했다. 이 법이 시행되자 로마 시내는 교통지옥에서 해방되고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성곽 밖에서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가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사라진 후 일제히 로마 시내로 쇄도하는 수많은 마차와 수레들의 모습은 새로운 교통법이 만들어낸 진기한 풍경이었다.

해 질 녘 로마 시내로 앞다투어 들어오는 마차 바퀴들의 굉음은 도로 주변 주민의 원성이 자자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로마 시내에서는 걸어 다녀야 한다는 율리우스 교통법에 따라 카이사르도 걸어 다녔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던 날 부르투스로 알려진 칼을 품은 암살자는 걸어가는 카이사르를 뒤따르며 적당한 살해 시점을 노렸다고 한다. 한국처럼 권력을 갖고 있거나 법을 만드는 사람들만큼은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관행이 카이사르 시대에 있었다면 카이사르가 조금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른다.
▲ 아피아 가도변의 주택. 고대의 도로변에 수 천 년을 이어 사람이 살고 있다. ⓒ박흥수


고대 로마 가도는 지표면에서 1-1.5m 깊이로 파 내려가서 길을 평탄하게 한 후 자갈을 까는 1단계 시공을 한다. 최하층 구조다. 이 위에 돌과 자갈과 점토를 섞어서 깔고, 이 위에 다시 잘게 부슨 돌멩이를 아치형으로 깐다. 잘게 부순 돌멩이들은 철도에서 선로의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자갈을 깐 것처럼 가도가 받는 압력을 지탱해 주는 완충 역할을 맡았다. 아치형의 설계는 비가 오면 도로 양옆으로 자연 배수가 되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 최상층에는 사방 70cm로 두껍게 자른 돌을 빈틈없이 붙여 완벽한 포장도로가 되게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로마의 가도들은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했다.

"로마 가도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그로부터 2000년 뒤에 태어난 현대인이 상상하려면 고속철도를 떠올리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0권)
로마 가도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세계 각지의 물리적 거리를 고속철도처럼 대폭 단축시켰다. 게다가 비만 오면 움직일 수 없는 조건에서 주·야간을 불문하고 언제든지 전천후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2000년 전의 과학 기술과 사회 발전 정도를 따져볼 때 그야말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현대 철도에서도 쓰이는 기원 전 이정표

물질적 토대가 정치적, 법률적 구조를 생성해내듯이 기원전 120년경에 드디어 인류사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셈프로니우스 도로법'이라는 -'율리우스 도로법'보다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본격적인 도로교통법이 만들어진다. 이 법에 따라 로마 가도에는 마일스톤, 즉 구간 이정표가 생긴다. 1로마 마일인 1밀리아레는 1.4-1.5km 정도의 거리인데 이 1밀리아레마다 사람의 키 높이 정도 높이에 지름 30cm의 기둥 모양 이정표를 세웠다.
▲ 왼쪽의 화단처럼 보이는 것이 아피아 가도의 이정표 기둥이다. 달리는 버스에서 순간적으로 찍었다. ⓒ박흥수


이정표가 세워지자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 거리를 지나왔는지 쉽게 알 수 있었고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의 집을 찾기도 쉬워졌다. 한국에선 뒤늦게 기존 방식을 대체하고 있는 도로명 주소 방식이 이때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아피아 가도의 로마 기점 20번째 이정표 옆에 있는 붉은 흙벽 집이라고 알려주면 택배 기사는 마차를 타고 로마 시내에서 30km 정도 외곽에 사는 수취인을 찾을 수 있었다.

철도 노선에도 이 같은 이정표가 있다. '키로 정표'라고 불리는데 200m마다 철도 선로 옆에 세워져 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경부선 전철을 이용해서 수원이나 천안을 여행할 때 창밖으로 선로의 가장자리를 보시라. 파란 바탕에 흰색이나 노란 바탕에 검은색으로 쇠로 된 직사각형 판에 숫자가 쓰여 있는데, 서울역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이정표다. 파란 바탕 위에 쓰여 있는 숫자는 1000m 단위의 킬로미터를 나타내고 노란 바탕에 나타난 숫자는 200m 단위의 숫자이다. 키로 정표들은 경부선을 포함한 모든 노선의 시발역이 되는 중심역에서 시작되어 선로를 따라 나란히 서 있다.
▲ 천안역 경부선 상행선 승강장 끝에서 보이는 철도 '키로 정표'. 서울역까지는 정확히 96.8km다. ⓒ박흥수


이 키로 정표는 열차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된다. 기관사가 열차를 운행하다가 특정 선로에서 평소와 다른 진동이나 충격을 받았을 때는 바로 인근 역에 무전 연락을 한 후 이 키로 정표를 기준으로 위치를 알려주고 점검이나 보수를 의뢰한다. 또는 사고가 나거나 응급 환자가 발생했을 때 신속한 대처를 위해서도 요긴하게 쓰인다. 예를 들면 "수원-병점 사이 서울기점 경부 하1선 00키로 00미터에 정차해 있습니다"라고 무전을 하면 역이나 관제실에서 구급 요원이나 긴급 조치반을 파견할 때에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로마의 기동력을 뒷받침한 역참제도 

카이사르처럼 고대 로마를 대표하는 사람이 있을까? 정치인이자 뛰어난 군인이면서작가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저작 중의 하나인 (갈리아 원정기)에는 그가 병사들을 이끌고 어떤 전술을 수행했는지 자세히 나온다. 그중에서도 기습공격과 위험에 빠진 부대를 지원하는 데 이용한 그의 장기는 전광석화 같은 기동력이었다. 긴급한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하루 100km를 달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병사들의 하루 행군 속도가 20km가 안 되는 것을 고려하면 100km의 이동거리는 적의 예측을 빗나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군대의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서도 신속한 정보 공유가 필수적인데 가도를 통해 일찍부터 발달한 역참제도가 이를 가능케 했다. 로마사에 대한 독보적인 저술인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도 로마 황제들이 넓은 제국을 수월하게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통치 이념과 정치적 명령을 제국 전체에 신속히 전달하도록 한 우편제도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신속한 이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곳곳에 지친 말을 교체할 수 있는 스타티오네스(stationes)라는 말 보급소를 두었기 때문이다. 로마 전 가도에 걸쳐 4-5마일 간격으로 세워진 역참에는 40마리의 말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말들은 황제의 명령을 전하는 사신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사신들은 조선 시대의 암행어사처럼 마패와 비슷한 것들을 소지하지 않았을까? 영어의 기차역을 뜻하는 스테이션(station)은 이 스타티오네스에서 비롯됐다.

아피아 가도와 검투사 스파르타쿠스, 반란 노예들 

수 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아피아 가도에는 영광의 역사도 있지만 피로 얼룩진 역사도 있다. 아피아 가도는 유명한 노예 반란 사건인 스파르타쿠스 항쟁의 주요 무대이기도 했다. 기원전 73년 발칸반도 남동부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였던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남부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 소속 검투사 준비생이었다. 정식 글래디에이터로 데뷔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규정 과목들을 이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훈련소의 악질적인 소장부터 복리, 후생이랄 것도 없는 처참한 대우에 교관들의 비인간적인 처우는 예비 검투사들의 가슴에 분노를 차곡차곡 쌓게 했다.

이 시기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 이후 카르타고를 얻은 자신감으로 1세기에 걸쳐 국격이 상승하고 경제도 활성화되었지만 안으로는 썩고 있었다. 지역 속주의 학정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악질적인 군단 사령관에 반기를 들고 군을 탈영해 아예 원래의 로마 군단을 물리치고 지역의 속주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무단 정치의 폐해들이 나타났고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불길들이 결국은 이탈리아 본토로 옮겨붙었는데 그곳이 카푸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 학교였다.

정식 검투사가 되어도 소속사를 옮겨 다니며 높은 수익을 보장받는 게 아니라 로마 시민의 예능감을 피로 충족시켜야 했던 스파르타쿠스와 77명의 동료 예비 글래디에이터들은 반란의 횃불을 들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밝힌 스파르타쿠스는 노예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위대한 정신과 튼튼한 신체를 가졌고, 신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한 교양인이었으며 트라키아인보다는 그리스인에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문화와 예술적으로는 정복당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그리스 출신 노예들은 로마의 고위층 집에 입주해 주인이나 그 자식들의 가정교사로 철학과 역사, 천문, 수학, 예술 등을 가르쳤다. 스파르타쿠스가 그리스인에 가까웠다는 것은 노예 신분을 뛰어넘는 비밀을 간직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단순한 봉기로는 3년여에 걸쳐 이탈리아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는 반란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와 동료들은 양성소 교관들을 단숨에 처치하고 험준한 베수비오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항쟁을 벌인다. 로마 당국은 이들의 반란을 과소평가하고 정규 군단을 보내는 대신 지역에서 모집한 3000명의 예비군을 토벌대로 투입했다가 스파르타쿠스의 부대에 참혹하게 격퇴당한다.

요즘 유행하는 이종격투기 대회에 출전해도 하나도 '꿀릴 게' 없는 인간 병기들인 스파르타쿠스 부대의 위력은 상당했다. 검투사들은 창이나 칼을 다루는 개인 전술만이 아니라 집단적인 전투에도 능했다.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맹수들을 사냥하는 장면을 리얼 버라이어티로 재현해야 하는 노예들의 전공 필수 과정 덕분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펼쳐진 예능의 규모와 리얼리티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뛰어넘고 있다. 원형 경기장에 물을 채우고 사람이 실제로 불화살이나 갈고리에 맞아 죽는 해전을 재현할 정도이니 태양의 서커스나 평양의 능라도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아리랑 같은공연도 고대 로마의 공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밥 먹고 싸우는 것만 연습한 이들에게 군기 빠진 예비군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승리 소식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 노예들에게도 전해져 노예들의 탈출 러시가 이루어지고, 베수비오 산은 수호지의 양산박처럼 각지에서 로마에 대항해 싸우러 몰려온 반란군의 본산이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동료 노예들의 심금을 울리는 뛰어난 연설로 유명한데 단지 말을 잘했다기보다는 누구보다도 노예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대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탈리아 전역에 반란의 회오리를 몰아붙였던 스파르타쿠스 군은 처음의 78명에서 7만 명에 이르는 대부대로 발전한다.

3년여에 걸쳐 로마의 정규 군단을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리면서 남부 지역 일대에 광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반란군은 기원전 71년 로마군 총사령관 크라수스가 이끄는 8개 군단에 이르는 압도적 병력의 로마 정규군에 의한 토벌 작전에 소탕된다. 이때 6000명의 노예 반란군이 포로로 잡혔는데 진압군 대장 크라수스는 로마에서 처음 반란이 시작됐던 카푸아까지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의 양옆에 십자가를 세우고 처형을 집행했다. 반란 노예들이 못 박혀 매달린 십자가들이 아피아 가도를 따라 일정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노예들의 시체 행렬이 아피아 가도의 이정표를 대신했다. 이렇게 역사 속에 소멸했던 스파르타쿠스단은 수십 세기가 지나서야 베를린과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 부활한다.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베를린 봉기와 1923년 12월 일제 식민지 치하의 경성에서 '조선 스파르타쿠스당'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아피아 가도에 못 박혔던 저항 정신의 봉인을 다시 풀었다.
▲ 이탈리아 남부를 향해 뻗은 아피아 가도. 반란 노예들의 십자가 형이 집행되었던 사형장이기도 하다. ⓒ박흥수


아피아 가도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버스는 처음 출발지로 돌아와 있었다. 만약 다시 로마에 올 기회가 있다면 천천히 중간 중간 내려서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오게 될지….

2000년 전 고대인보다 못한 한국의 '민영화 카르텔' 

버스에서 내려 가까이에 있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해 만든 공화국 광장 앞의 노천카페를 찾아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키고 숨을 골랐다. 맞은 편 테이블에는 패션모델이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젊은 아가씨들이 모여서 신 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석양의 그림자를 즐기다 동양의 젊은이와 눈이 마주치자 가벼운 웃음을 건넨다.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답게 이탈리아는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이방인에게 편한 느낌을 준다. 에스프레소를 비우고 어둠이 깃든 거리의 중고 책 노점들을 지나 테르미니역을 향해 걸었다. 새벽부터 긴 하루였고 아직 보내야 할 밤 시간이 남아있는 힘겨운 로마에서의 첫날이었다.
▲ 로마 공화국 광장 앞의 노천카페 ⓒ박흥수


▲ 로마 공화국 광장 근처의 중고 책 노점 거리 ⓒ박흥수


로마의 가도들은 튼튼하게 지어지기도 했지만, 유지 보수에도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수 천 년을 이어 보존될 수 있었다. 각 가도마다 '쿠라토르 비아룸'이라는 공적 직책으로 가도를 관리하는 책임자를 두었다. 로마가 가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만큼 쿠라토르들은 고위직 공무원들로 채워졌다. 로마 가도들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6세기에 이탈리아를 찾은 사절단이 아피아 가도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착공된 지 800년이나 된 도로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한강의 다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고 4대강 유역의 보 밑에서 시멘트 덩어리들이 유실되는 것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가도들은 "비아이 푸블리카이"(viae publicae)라고 불렸는데 국가가 책임지는 공적 도로란 뜻이다. 고대인들은 사회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도로가 반드시 필요하며, 따라서 국가가 당연히 도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위정자들과 사적 이익 확보에 여념이 없는 일부 공무원들과 토건 금융 자본이 결합한 카르텔들은 어떻게든 공공성의 중요성을 깎아내리고 효율성이라는 가면을 앞세워 국가의 공적 역할을 축소하려 든다. 민자 고속도로와 민자 지하철, 경전철들이 내고 있는 파열음에 귀를 막은 채 KTX마저 흔들고 있는 자들을 보면 2000년 전의 사람들보다도 못났다는 생각에 측은함마저 든다.

2012년 10월 8일 월요일

MB정권 5년, 철도 민영화 대재앙의 역사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08일자 기사 'MB정권 5년, 철도 민영화 대재앙의 역사'를 퍼왔습니다.
[기고] 2015년은 철도산업 민영화의 원년?

고속철도, 일반철도, 도시철도 등 모든 궤도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여 국가기간망 철도를 외국자본에 완전히 개방하고 공공철도 시스템을 파괴하기 위한 작업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올봄, 정부가 야심차게 밀어붙였던 수서발 KTX 민영화가 전 시민적 반대에 부딪히자 사업자 선정을 미루는 등 주춤한 모습을 보였던 국토부가 추진한 것이 철도공사가 가지고 있는 관제권, 역시설·차량기지를 환수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국토부는 이토록 끈질기게 이 정책을 밀어 붙이는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9월 말 WTO GPA(세계무역기구 정부조달협상)협상안의 초안이 공개되고, 10월 5일 박원석 의원(무소속)이 WTO 협상 관련 내용을 담은 보도자료를 공개하면서 비로소 비워졌던 퍼즐이 채워졌다.

정권·관련부처·업계가 한 몸이 되어 추진해 온 민자사업 확대

2000년대 초반 IMF 위기를 겪은 후 정부재정의 부담을 줄이는 방안이 다양한 각도로 모색되었다. 이때 강력하게 떠오른 방안이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는 사회간접자본투자에 대해 민간의 투자를 이끌어 정부재정 부담을 줄이는 것으로 이른바 민자사업이라고 부르는 '민간투자사업'이었다. 1994년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간자본 유치촉진법)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민자사업은 IMF 구제금융 직후인 1998년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으로 전면 개정 되고 이에 따른 민간투자가 기지개를 펴게 된다.

초반에 지지부진하던 민자사업은 현재 수많은 민자사업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 MRG(최소운영수입보장제)가 도입되면서 활성화된다. MRG는 '민간투자자의 사업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업시행 전 예측된 수요에 미달할 경우 그 손실부분을 보전해 주는 제도'이다. 그런데 MRG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민간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변질된다. 이제 민자사업은 세금을 밑 빠진 독에 부어넣는 일이 되었다.

또한 외국인 투자의 제한 규정을 없애고 투자유치 시 자기자본 비율도 대폭 낮춤으로서 민자사업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된다. 2002년에는 민간이 투자할 수 있는 사업대상이 확대되고 국··공유지를 무상으로 임대해주며 지원금도 확대하는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민자사업은 더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었다. 민자사업법은 2005년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으로 다시 한 번 개정되었고, 이후 민자사업은 도로, 철도 등 전통적인 사회간접자본 뿐만 아니라 군부대, 학교, 한강 위에 떠있는 새 빛 둥둥섬 같은 레저나 문화시설까지 아우르는 한국사회의 광범위한 사업패턴으로 자리 잡는다.

민자사업법의 제정 이후 개정 과정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무시되었고, 민간자본의 이익은 극대화되었다. 인프라 투융자 사업이 초고율 이자소득 보장, 법인세 회피로 이어지는 등 각종 반사회적 행태가 선진 경영기법으로 둔갑해 자리 잡았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라는 투자금 유치방법으로 민간자본은 최소의 투자로 무한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도 닦았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최근까지도 철도협회 같은 곳의 협회 회원사와 관련 기업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도시철도 교육과정은 민자사업의 활성화와 사업과정에서의 수익확보방안을 위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강사진 또한 재벌 건설사 부장이나 지하철 9호선과 신분당선 등 민자지하철 회사 간부, 국토부 간부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이렇게 정권과 관련부처, 업계가 하나가 되어 온 나라를 민영화가 지배하는 땅으로 만드는 작업들이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어 왔다. 결과적으로 국가의 존재이유인 공공의 이익을 구현하는 장치들이 이윤논리에 지배당하는 상업 목적의 시스템으로 전환됐다. 전 방위적 민영화가 시민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도된 것이다. 민자사업이 지하철 9호선이나 용인경전철, 우면산 터널 같이 시민들에게 직접적인 역습을 가하기 전까지는.

이런 흐름속에 2008년 비즈니스 프랜들리 이명박 정권이 탄생했다. 민자사업과 민영화를 경제를 살리는 원천이라고 믿는 정권이 출범한 것이다. 서울시장 시절 서울지하철 1호 민자사업인 9호선을 성공적으로 유치했던 이명박 정권이 취임일성으로 약속한 것이 공기업 선진화 계획이다. 원래 민영화로 얘기 되었지만 사회적 반대가 거세지자 대운하사업을 4대강으로 개명하듯 민영화를 선진화로 바꾸었고, 이 계획에 따라 공공부분이 책임지고 있는 사업영역에 대한 민자사업과 민영화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

MB정권은 2009년 기획재정부를 통해 "정부재정지출 효율화를 위해 민간투자사업을 계속 확장 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자사업이야 말로 기업투자를 활성화하고 정부재정을 줄이며 경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는 시장만능주의적 정책기조를 강력하게 유지한 것이다.

철도도 민영화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해

철도산업은 MB정권 출범초기 효율화를 전제조건으로 민영화 대상에서는 제외 되었으나 집권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민영화를 위한 제반 여건들이 준비되었다.

특히 2010년은 철도분야에 대한 민영화와 민자사업을 가속화시킨 첫 해로 기록될 것이다. 10월에 대우건설이 만든 (GREEN 고속철도 민간투자사업 사업제안서)가 제출되었다. MB정권의 경제정책을 총괄한 강만수씨가 은행장으로 있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대우건설의 모기업이고 고속철도 민영화시 자금 조달을 맡는 안이 계획되었다. 대우건설 사장은 대통령의 고대 후배이며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과 가까운 실세로 통한다는 것도 언론을 통해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동시에 민영화 전도사로 나서고 있는 국책연구원인 한국교통연구원이 국토부의 용역을 받아 수행한 (철도산업발전 경쟁력강화를 위한 용역보고서)가 대우건설 보고서의 결론과 유사한 내용을 담아 두 달이라는 시차를 두고 제출되면서 수서발 KTX 민영화의 사회적 논란을 촉발시킨다. KTX 민영화를 위한 정부와 재벌의 동시다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 2010년 하반기 토건자본과 국토부 용역을 받은 국책연구원이 잇따라 고속철도 민영화안을 내놓았다. 왼쪽은 (2010년 12월).

이 시점에서 국토부가 한 일이 또 하나 있다. 박원석 의원이 정부로부터 제출받은 문서를 통해 공개된 철도산업 대외개방의 갑작스러운 추진이다. 2010년 12월 한국교통연구원의 민영화 추진 타당성 용역보고서가 제출되었고, 이달 3일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열린 제97차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국토해양부 장관이 'WTO 정부조달협정(GPA) 개정 및 양허확대 협상 3차 양허안'에 대하여 수정요청을 했다. 2006년 1차 양허안과 2007년 2차 양허안에는 없었던 철도시설공단과 그 사업분야를 다룬 양허안이 협상마감 3일을 앞두고 전격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이 안은 WTO에서 수정없이 채택되었다.

당시 국토부 장관은 정종환이었다. 4대강 사업의 전도사이자 MB정권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정종환 전 장관은 철도청장 시절인 2002년, 제1호 민자 철도사업인 인천공항철도 사업에 정부 측 협약대표로 서명한 사람이다. 성공이 확실하다며 장미빛 미래를 장담하던 인천공항철도 사업은 터무니없는 수요예측으로 세계에서 가장 한산한 철도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국민의 세금만 민간자본에 쏟아 붇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철도공사로 떠 넘겨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업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정종환 전 국토부 장관이다.

현재 국토부는 철도 운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설에 대한 관리권을 철도공사에서 철도시설공단으로 넘기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철도공사에 출자된 자산을 '감자'하는 방식으로 회수하려 하고 있다. 이 경우 철도공사의 부채는 급등하게 된다. 국토부가 역시설과 차량기지를 철도공사로부터 환수할 경우 자본이 5.5조원 감소하여 철도공사의 부채비율은 11년 말 기준 130%에서 385%로 증가하게 된다. MB정권 들어 공기업 부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정부가 발 벗고 나서 공기업을 부실화 시키는 믿지 못 할 일이 또 벌어지고 있다.

철도공사 자산을 환수하는 절차에서도 꼼수를 쓰고 있다. 철도산업의 기본 골격을 다루고 있는 철도산업발전기본법에 명시된 운영관련 자산의 철도공사 책임이 분명히 있는데도 법 규정을 무시하고 철도산업위원회란 기구의 의결을 통해 이관하려 하고 있다.

철도산업위원회란 무슨 기구인가? 국토해양부장관이 위원장으로 관련 7개부처 차관과 위촉직 위원을 포함하여 25명으로 구성된 철도산업발전에 필요한 자문을 하는 기구이다. 정부쪽 위원을 빼더라도 이들 위촉직 위원 중에는 민영화에 우호적인 민간기업들의 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소비자 단체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는 (녹색소비자 연대)와 (소비자 시민모임)은 지난 6월 19일 KTX 민간운영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낼 정도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단체이다. 게다가 KTX 민영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온 한국교통연구원 같은 단체의 대표가 포진해있는 곳이 철도산업위원회다. 이런 위원회가 철도 정책을 자문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단순 자문기구를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제 멋대로 의결하는 장치로 둔갑시킨 국토부의 행태도 참으로 졸렬하다.


2015년은 철도산업 민영화의 원년이 될 것인가

철도공사의 자산을 철도시설공단으로 이관하려는 이유는 2010년 협상마감을 3일 앞두고 급하게 수정한 WTO 협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 특별히 한국철도시설공단의 항목이 신설되고 그 세부내용에 역사 등 제반 시설에 대한 개방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철도시설공단의 관할로 이관시켜 국내외 자본에 운영권을 넘겨주게 되는 순간 철도산업 전반의 민간개방이 완수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게도 고속철도분야의 개방 배제에 대한 주석이 뒤늦게 국토부 제안으로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협상안에 반영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2011년 양허안 협상 막바지에 무더기로 지자체 관할 도시철도 즉, 현재 각 도시에서 운영되는 지하철이 포함된 것이다. 단 이 지하철부분에 대한 협정 적용은 2015년까지 유예된다. 이제 퍼즐의 조각이 다 맞아간다.

국토교통망 계획에 의해 건설되는 강원도권 등 많은 신설철도는 민자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그동안 정부의 입장이었다. 또 철도공사의 시설자산을 빼앗아 언제든지 국내외자본에 개방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민간에 개방하겠다는 수서발 KTX의 개통 시기는 2015년이다. 전국의 지하철에 WTO GPA 협정이 적용되는 시점 또한 2015년이다. MB정권과 국토부는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민영화계획에 따라 2015년을 고속철도와 일반철도, 도시철도 할 것 없이 모든 철도산업의 민영화를 촉진하는 원년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이 정부가 꿈꾸는 미래는 사회의 공익적 자산이 모두 사라지고 이윤이 최고의 가치인 민간영역이 지배하는 사회인가? 국가 기간 철도망부터 신기술인 고속철도뿐만 아니라 서민의 발인 지하철까지 모두 팔아 넘겨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평범한 서민들, 시민들을 위한 나라는 불가능 한 것인가? 디스토피아를 설계하면서 자신만만해 하는 권력과 정부당국이 심히 걱정스럽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 

2012년 3월 2일 금요일

KTX 민영화 모델이 궁금한가? 지하철 9호선을 보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02일자 기사 'KTX 민영화 모델이 궁금한가? 지하철 9호선을 보라!'를 퍼왔습니다.
[기고] MB 정권 공기업 선진화의 맨얼굴, 9호선 요금 인상

지난해 12월 27일 국토해양부는 대통령 업무보고 자리에서 KTX 민영화 추진 계획을 밝혔다. 2012년 상반기 안에 업체설명회와 희망기업 신청접수, 심사를 거쳐 사업체 선정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하겠다는 로드맵까지 천명했다. 말이 업무보고지 이미 정권의 하명을 받은 국토부가 민영화 추진의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국민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 다르게 여당조차 민영화 반대를 선언하고 광범위한 국민적 반대에 부딪히자 정부는 슬그머니 계획을 수정했다. 4월 안에 업체선정이 안 되면 2015년 개통일정상 KTX 민영화가 물 건너간다고 신속한 추진을 주장했던 국토부는 4월 총선 이후 업체 선정에 나서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이런 상황 속에 "고속철도 민간투자 사업제안서"를 정부계획 발표 이전에 입안하는 등 KTX의 운영권의 내정된 선정업체라는 의혹을 받고 있던 대우건설은 고속철도 사업 포기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KTX 민영화 추진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MB정권과 국토부는 왜 이토록 KTX 민영화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민간투자사업을 통해 단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KTX 민영화의 모델이 되었던 그 사업이 무엇인지 추적해보자.

지하철 9호선, 서울시가 비용 절반 대고 민간자본 수익 보장

2002년 7월 제3기 민선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이명박은 한계에 다다른 교통 분야에 대한 대 수술에 나선다. 특히 이명박 시장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서울버스 준공영제와 중앙차로제, 환승시스템도입은 그동안 한계에 다다른 서울시 교통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는 계기가 됐다. 경쟁을 통한 자유시장경제의 옹호자이자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공공연하게 표방하는 이가 공공적 조화를 우선시한 정책으로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이 시기에는 또한 개통한 지 40년이 다 돼가는 서울지하철의 용량한계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도 주어졌다. 이에 따라 강남의 모노레일 도입이라든지 새로운 지하철 노선건설 등 여러 가지 대안이 제시되었고 이 가운데 2000년 건설기본계획이 승인되고 2002년 4월 3일 착공된 지하철 9호선 건설 사업이 탄력을 받는다. 이명박 시장 2년 차인 2003년 11월 철도차량제작사인 로템을 앞세운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9호선 건설은 특이한 방식으로 추진된다. 원래 지하철건설은 현재 도시기반시설본부의 전신인 '서울특별시 지하철 건설 본부'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9호선은 민간투자 활성화와 정부 및 시 예산 절감이라는 미명 아래 BTO라는 민자투자사업으로 진행된다. BTO(Build-Transfer-Operate)방식이란 사회간접시설을 민간부분이 주도하여 프로젝트를 설계·시공한 후 시설물의 소유권을 공공부문에 먼저 이전하고 약정 기간 동안 그 시설물을 운영하여 투자금액을 회수해가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9호선 건설은 시설부분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선로건설 등 토목공사는 시에서 담당하고 궤도, 전력, 전차선, 차량제작, 신호, 통신, 역무자동화설비, 차량검수시설, 기타 설비공사, 정거장 마감공사, 스크린도어, 차량기지, 종합사령실 건축공사 등은 로템을 주축으로 하는 민간컨소시엄이 맡았다.

민간컨소시엄이 담당한 건설부분에는 총 8995억 원의 건설비가 책정되었으며 서울시가 건설분담금 4200억 원을 부담했고 서울메트로9호선(주)이 총 사업비 4795억 원을 민자로 조달하도록 되어 있다. 서울시가 부담하는 사업비는 03년 1월 2일 불변가격 기준으로 총사업비 대비 46.7%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하철 9호선은 완전한 민자사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서울시가 절반의 돈을 대면서 향후 운영과 이득을 보장하는 이상한 건설 방식이었다.

설계비로만 혈세 858억 원 낭비

지하로 연결되는 선로와 기반 시설을 서울시가 부담하고 민자로 하기로 정한 운영시설조차 서울시가 절반에 이르는 비용을 부담하면서 민간업체의 수익을 보장해주는 상식을 벗어난 투자행위가 서울시와 국토해양부(당시 건교부)의 심사와 승인을 거쳐 진행되었다.

특히 설계의 창의성 및 기술발전을 위해 서울시가 도입한 턴키·대안입찰 방식은 공사업체의 배를 불리는 장치가 되었다. 2002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에서 담합입찰이 적발되어 시정명령과 함께 71억 원의 과징금이 부과되어 예산낭비를 초래했다. 서울지하철 9호선 14개 공구의 공사비는 일반발주의 경우 보다 25% 높게 계약되어 약 4000억 원 규모의 예산이 낭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7월 경실련이 발표한 서울시 지하철 9호선 턴키공사 담합입찰조사 의뢰서를 보면, 5개 턴키공사의 평균 낙찰율이 98.3%이며, 14개 공구 전체 평균 낙찰율이 88.9%로 일반경쟁입찰의 경우 평균 낙찰율 64%보다 평균 25% 높다.

경실련은 턴키ㆍ대안입찰 방식을 채택함에 따라 1공구 당 3.4개, 최소 1000억 원 이상의 과다설계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서울지하철 9호선은 엄청난 예산을 낭비한 사업으로 낙인찍혔다. 경실련에 따르면, 서울시 지하철 9호선 설계비는 준비단계에서 760억 6000만원, 공사발주단계에서 696억1460만 원이 소요되었으나 '재설계방침'에 따라 79억 원을 지급하게 되어 설계비만 총 1537억7460만 원이 소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서울시 지하철 9호선을 실제 일반 공사로 발주했을 경우 설계비는 677억5490만 원이 소요되는 점을 감안한다면 설계비만 858억2000만 원의 예산이 낭비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시민들의 혈세를 낭비한 사업에 입찰해 한 몫씩 챙긴 사업체들이 대우, 동부, 삼성, 현대, 두산, 쌍용 등 재벌 건설사들이었다. 특히 대우와 동부건설은 2011년부터 KTX 민영화 사업에 뛰어들기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해왔던 사업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업진행과정에서 대주주가 변한 일이다.




'형님' 아들 위해 9호선 대주주 다국적기업에 넘겼나?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해에 지하철 9호선의 맥쿼리한국인프라가 2대 대주주로 등극한다. 1대 주주인 로템과의 지분차이는 불과 0.47%다. 2008년 공기업 선진화 계획에 따라 추진됐던 인천공항 매각추진 과정에서 매각주체 0순위로 거론 됐던 회사가 다국적기업 맥쿼리 금융그룹이었다. 맥쿼리IMM자산운영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의 아들 이지형씨라는 사실 때문에 인천공항 매각추진이 친인척에 국가기간산업을 팔아넘기는 특혜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던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국민적 관심대상에서 멀어져있던 지하철 9호선은 맥쿼리사가 슬그머니 대주주로 자리를 잡았다. 토건재벌에 엄청난 이익을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외국자본에 기간산업을 넘겨 시민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일이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된 것이다.

국토부는 KTX 민영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지하철 9호선이 경쟁을 통해 공기업이 운영하는 다른 지하철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민간경영기법을 도입해 직행전동차의 운행 등 기존 공기업이 하지 못하는 창의적 경영을 이루어 내고 있고 최소한의 고용으로 인건비 절감액도 상당하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직행전동차는 민간기업이 운영해서 도입된 것이 아니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기존 지하철 노선의 용량한계를 완화하고 이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오래전부터 제시된 대안이었다. 그러나 건설된 지 30년 이상 된 노선에 직행열차도입을 위한 대피선 공사를 할 경우 예산 등의 문제에 부딪혀 신규로 건설되는 지하철에 도입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 9호선에 도입된 것이다.

인력의 효율화도 다른 시각으로 봐야한다. 이윤을 최고의 목적으로 하다 보니 소요인력을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직원을 배치했다.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따른 고용창출이나 시민의 안전 같은 것은 아예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용시민은 민영화된 노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더라도 일산에서 출근하는 시민이 900원을 아끼기 위해 환승할인이 안 되는 여의도역 9호선에 바로 타지 않고 10분이나 돌아서 5호선을 통해 9호선을 이용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시민들은 9호선의 환승을 피하기 위해 도보로 한 두 정거장을 걷기도 한다는 불만을 토해내고 있다. 이것이 국토부가 말하는 시민편의와 민간경영 효율화의 진면목인가?

9호선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경기도와 국토해양부로부터 환승 할인으로 발생하는 손실분을 0원도 보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다른 노선은 관계기관으로부터 손실액을 보전 받고 있고, 9호선을 뺀 나머지는 공기업이기 때문에 손실이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결국 이 말은 시민들이 주인인 공기업이 지하철을 운행할 때 시민들의 편익이 높아진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서울시와 지하철 9호선, 국토해양부는 서로의 탓만 하고 있고 모든 불편은 시민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는 실정이다.

민영화 결과는 9호선 요금 인상

게다가 지하철 9호선은 대놓고 지하철요금 추가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2월 25일을 기해 일제히 인상된 서울시 교통요금에 더해 손실분을 보전하기 위한 요금인상을 하겠다며 공지를 하고 있다.


▲ 민간 투자 사업업으로 운영하는 지하철 9호선은 "민자철도의 특수상황 때문에 운임을 인상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서울시메트로9호선 홈페이지 화면 캡쳐

BTO 방식에서 부풀린 수요예측을 통해 투자사의 이익을 보장하는 해괴한 장치인 최소운영수익보장방침에 따라 이미 2011년 시 보조금으로 322억 원을 챙겨간 지하철 9호선은 누적적자가 자본잠식 상태에 이르러 별도의 추가운임을 반영할 계획임을 알리고 있다. 국토부가 말한 경쟁을 통한 효율화의 결과가 자본잠식 상태에 이르렀다며 시민들에게 돈을 더 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소유하지 못하면 통제하지 못한다. 이미 외국자본과 재벌이 장악한 기관이 시민 편익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 속속 증명되고 있다. 지하철 9호선은 서울시메트로9호선(주)과 서울9호선운영(주)으로 나뉜 2원적 체제인데 서울9호선운영(주)의 CEO는 베올리아사에서 파견한 마흐슬랑 다루 씨이고, 서울시메트로9호선(주) CEO는 정연국 씨로 이명박 대통령의 주요 인사 등용처인 고대라인이다. 지하철 9호선의 2대 대주주중 하나가 맥쿼리사이고 운영자는 베올리아사이다. 맥쿼리사는 인천공항고속도로, 인천대교, 서울-춘천 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 우면산터널, 수정산터널, 광주제2순환도로 등 국내의 다수 사회간접자본에 대주주나 운영자로 참여하고 있다. 베올리아사는 상수도 사업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프랑스계 초국적 기업이다.

특히 베올리아사는 2001년 한국 법인을 설립한 이후 2005년부터 인천시로부터 송도·만수 하수종말처리시설을 20년 계약으로 위탁받아 운영 중이다. 인천시민 중 33만 명이 이하수처리시설을 이용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38억 원의 순익을 올렸다. 인천시는 2006년 한국에서 최초로 외국계 물 기업인 베올리아와 상수도 사업 관련 양해각서를 맺었다. 이처럼 맥쿼리와 베올리아는 한국의 사회간접자본을 다방면에서 잠식해 나가고 있다. 민영화가 효율적인 사회적 대안으로 여겨지는 한국은 이들 다국적 기업에게 천혜의 투자처요 이윤확보 공간인 것이다.

KTX 민영화, 철도 주요간선망 몽땅 내주는 결과 초래할 것

KTX 민영화의 모델은 지하철 9호선이지만 정부의 정책대로 KTX 민영화가 추진된다면 그 파급력은 지하철 9호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미FTA협정에서 그나마 독점권을 인정받은 2005년 7월 1일 이전 건설된 노선에 대해서도 아무 문제없이 외국자본이나 재벌에게 자발적으로 헌납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수서-평택간의 노선을 빌미로 민간경쟁체제도입을 이야기하지만 이 노선이 결국은 경부선과 호남선을 통해 부산과 목포 광주로 연결된다. 부산까지의 고속신선은 이미 한국철도의 독점적 관할 노선이지만 민영화가 추진되고 민간업체에 지하철 9호선처럼 나중에 외국자본이 참여하게 될 경우 국토의 주요간선망을 몽땅 내주게 되는 결과가 된다. 정부가 국가의 기간교통망을 팔아넘기기에 안달이 난 모양새다.

지금 한국 정부는 누구의 정부인가? 국민의 정부인가? 외국투기자본과 재벌의 대리인인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인 공공부문이 무너지는 만큼 시민들의 삶은 더 황폐화될 것이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정부라면 전 사회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행을 멈추지 않고 있는 KTX민영화 정책을 하루 속히 철회해야 할 것이다.


▲ ⓒ뉴시스

* 참고로 필자는 운수노동정책연구소에서 사회공공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