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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0일 수요일

헌금이 신앙이듯 헌금 쓰는 것도 신앙


이글은 뉴스앤조이(NEWSNJOY) 2013-04-09일자 기사 '헌금이 신앙이듯 헌금 쓰는 것도 신앙'을 퍼왔습니다.
한국인·한국교회 돈에 대한 이중적 태도...헌금 투명하게 쓰이는지 살펴야
한국 사회에서 돈은 이중성을 가진다. 유교적 전통을 가진 과거 조선 시대에는 돈을 더러운 것으로 여겼다. 양반들은 돈을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돈에 손을 대는 것조차 꺼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돈주머니를 던져 주고는 알아서 찾아가라 하기도 하고, 막대기나 곰방대에 엽전을 꿰어서 돈을 전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돈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우리 가운데 남아 있다. 돈의 액수나 돈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부끄러워하고, 남세스러워한다
.
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돈이 모든 것의 목적이다. "부자 되세요!" 하는 인사가 한때 유행이더니 이제는 "대박 나세요!" 한다. 전에 성공회의 박경조 주교께서 자신이 왜 영성 운동에 관심을 갖는지를 설명하셨다. 어느 지방의 교회를 찾았는데 사회를 보시는 분이 당신이 왔다고 인사를 이끄는데, 회중들에게 "부자 되세요!" 하더란다. 그래서 '교회가 왜 이렇게 됐나' 하고 깜짝 놀라서 영성 운동을 한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1위가 부자가 되는 것이고, 2위가 연예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 사회는 돈 많이 버는 것이 모든 이들의 소망이 되었다. 아이부터 해서 어른들까지, 그리고 교회마저도 이 돈의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참 아이러니다. 돈을 더럽다고 여기고,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또 돈이 최고라고 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 헌금이 거룩하다면 쓰임까지도 거룩해야 한다. 돈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신앙의 행위라면, 그 헌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보는 것도 신앙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돈에 대한 교회의 시각은 어떤가. 이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헌금이라고 해서 돈을 그 무엇보다도 거룩하게 본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헌금 기도를 들어 보면 이러한 시각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거룩한 제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러한 제물을 '흠향'이라는 유교적 제사 용어를 갖다 붙여 거룩하게 만든다.
그런데 돈의 흐름이나 쓰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마치 더러운 것을 대하는 유교 양반의 자세와 비슷하기도 하고, 그런 것을 따지면 속된 것처럼 치부하기도 한다. 즉 돈을 내는 것은 거룩하게 생각하면서, 그 쓰임에 있어서는 그 거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 때문에 교회는 항상 돈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돈을 모으는 것에는 각종 이름을 붙여서 다양하게 모으고, 이름을 공개하여 격려하고, 그래프까지 그려 붙여 독려한다. 요즘이야 그런 이야기를 듣기 힘들지만 과거에 한국교회가 열심이 넘칠 때는 집을 팔았다는 분들이나 돈이 없어서 금가락지를 뽑아서 드렸다는 '전설'들도 있었다. 헌금을 모으고, 드리는 것에는 이렇게 열심인 곳이 우리 한국교회이다.
그런데 그렇게 드린 거룩한 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회계 보고를 요구하는 사람도 없고, 돈의 쓰임을 합리적으로 보고하는 교회도 드물다. 나는 드렸으니까 신앙인으로서 그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돈이 쓰이는 것은 목사와 장로들이 알아서 하겠거니 한다. 그러다 보니 돈이 쓰이는 곳에 견제나 확인의 절차가 없는 것이다.
내 나이 오십이 가까워 오지만 공금을 썼던 것은 대부분 교회에서였다. 학생회에서 예산을 타 쓰고 나누었던 것이나 전도사와 목사로서 재정을 다루었던 것이 다였던 것이다. 삶의 환경이 보통 그랬으니까 당연하다. 그리고 교수 생활을 하는데, 평교수의 경우는 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접할 기회가 없다.
최근 학교의 행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처음 돈과 관련된 행정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참 많이 놀랐다. 교육을 위해 쓰여야 할 예산이 허투루 쓰이지 않게 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이중, 삼중의 견제와 감시의 시스템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즉 돈의 쓰임을 계획하는 이, 돈을 직접 관장하여 내주는 이, 그리고 직접 예산으로 쓰는 이가 다르게 해 놓았다. 그러니 삼중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것이다.
헌금이 거룩하다면 쓰임까지도 거룩해야 한다고 본다. 돈을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신앙의 행위라면, 그 헌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는 것도 신앙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또한 교회 역시 헌금을 하라고 광고하고 독려했다면, 그 돈의 쓰임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응답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교회 안에서 돈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버리고, 돈을 통해 교회가 더욱 거룩하여지기를 기대해 본다.

조성돈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사회학 교수

2013년 2월 26일 화요일

한국 교회, 슬퍼하고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이글은 대자보 2013-02-23일자 기사 '한국 교회, 슬퍼하고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를 퍼왔습니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못받는 이유 깊이 고민해야

1. ‘긍정의 힘’에 담긴 함정에 대하여

우리 한국 교회 강단에서는,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하는 설교가 자주 선포됩니다. 하지만 슬퍼하고 고민하는 신앙과 삶을 더불어 강조하시는 목사님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 슬퍼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설교하시는 목사님이나 그렇게 생각하시는 교우님들도 가끔 만납니다. 물론 기쁨과 감사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면 감사와 기쁨이 절로 우러납니다. 하지만 그 기쁨과 감사가 왜곡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자신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악과 모순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고 세상에 악과 모순이 존재하는데도 슬퍼할 줄 모르고 오직 기뻐하기만 한다면, 그건 믿음이 성숙하지 못했거나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교우님들께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둡고 칙칙한 감옥이 바울이 누리는 영적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환경을 초월한 기쁨’이 바울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도 영적인 기쁨을 누렸던 사도 바울은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로마서 12:15, 공동번역)라고 권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4. 개역성경에는 “애통해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도 세상의 불의와 모순에 대해 슬퍼하며, 또한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면서도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웃들과 함께 울며 애통해하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특히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무책임한 낙천주의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순이나 갈등, 아픔에 대해 같이 아파하고 그 모순이나 갈등을 극복해서 다 같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 애쓰기보다, 그것을 피해가거나 외면하고, 또는 그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편리한 삶만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낙천주의자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2. 슬픔과 고뇌가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 주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고민하고 슬퍼하셨으며, 우셨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밤을 새고 기도하며 고민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평생 웃지 않고 사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들과 어울려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시고 함께 웃으시며 먹고 마시기를 즐겨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뻐하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성서기자들과 편집자들은 그런 듣기 좋고 보기 좋은 모습보다 오히려 주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시는 장면들을 더 많이 기록으로 남겼을까요?

그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의미가 슬픔과 고난에서 출발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앙과 삶도 중요하지만, 어둠의 세력이 여전히 뿜어내는 모순과 불의를 극복하고 만 백성이 함께 누리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복음의 정신이라고 생각했기에, 우리 주님의 고난의 삶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그렇게 고뇌하며 슬퍼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못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 하며, 어둠의 세력과 싸워 이기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눈물 흘리신 우리 주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고뇌하며 울 줄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선각자들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받아야 하는 그런 고통과 슬픔에 직면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가진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멸망을 예고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방탕한 삶을 사는 동족을 향해 이방족속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할 수밖에 없었던 이 고독하고 슬픈 예언자를 향해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매국노라고 욕하며 거짓선지자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부딪쳐오는 핍박과 고통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예레미야는 차라리 예언자직을 내려놓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며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레미야는 고난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고난과 핍박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하여 위대한 선지자의 반열에 올라 지금까지 우리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산적인 고민,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이웃에 대한 짙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슬픔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민중교회를 비롯하여 일부 열린 교회들이 생명평화 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세상에 평화를 심으며 헐벗고 고난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울고 아파하는 그 아름다운 교회들을 외면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불편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우리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 주십시오.

요즘 우리 기독교인과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존경은커녕 비난을 사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인터넷에는 많은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존재합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교회를 비난하는 분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교회가 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자기 신념에 대한 지나친 확신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회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난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우리가 잘 새겨듣고 뼈저리게 반성할 부분도 적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십자가가 있었기에 영광의 부활이 있는 것이며, 부활의 영광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의미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고난과 영광,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고난과 기쁨, 고뇌와 감사, 이 두 요소가 우리의 삶 가운데 조화를 이루어야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교우님들은 어떠십니까? 우리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동시에, 본래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된 이 세상의 질서가 하나님을 떠나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답게 온전한 모습으로 성화되어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뇌하며 아파하고 계십니까?

한국 교회와 교우님들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 못지않게, 고민하고 슬퍼하는 삶도 살아주십시오. 생산적인 고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그런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산적인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생각하고 기뻐하며 찬양한다면,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균형과 조화가 무너진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기도 열심히 하시는 교우님들께 부탁드립니다. 교우님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따뜻해 질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주위에 여전히 남아있는 모순과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도 알고, 우는 이웃들과 함께 울 줄도 아는 진정한 예수사람이 되어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은 우리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해달라고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동참하며, 우리의 신앙 이대로 좋은지 함께 고민하며 돌아보시는 뜻 깊은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류상태

2012년 7월 22일 일요일

국민 말고 하나님만 섬기는 공직자들


이글은 한겨레21 2012-07-23 제920호 기사 ' 국민 말고 하나님만 섬기는 공직자들'을 퍼왔습니다.
[이슈추적]김신 대법관 후보 종교 편향적 판결 논란 계기로 짚어본 공직자의 신앙과 업무 충돌공사 구분없는 배타성에 정교분리 원칙 흔들

 
» 지난 7월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김신 후보자가 자리에 앉고 있다. 김 후보자는 ‘법정 기도’와 ‘성시화 발언’에 대해 “기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기독교가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내심으로 있을 것이다. 전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라고 답했다. 한겨레21 김명진

1948년 5월31일 월요일 오전 10시20분 제헌의회가 개원했다. 첫 회의였다. 그해 5월10일 총선거를 통해 뽑힌 의원 198명이 모두 참석했다. 애국가,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이 이어졌다. 국회선거위원장 노진설이 최고 연장자인 이승만 박사를 국회 임시의장으로 추천했고, 박수로 가결됐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날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세속의 법 아닌, 성경 말씀 더 따른 판사

의장석에 올라선 이승만 임시의장의 첫마디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였다. 모든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선 가운데 평안북도 영변 출신 목사로, 서울 종로 갑구에서 당선된 이윤영 의원이 기도를 시작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선림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날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의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국회속기록) 제1회 제1차)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는 대한민국 국회가 기도로 첫발을 떼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 ‘악마의 권세’를 경계했던 제헌의회는 개원 두 달여 뒤 헌법 조문 심사를 한다. 헌법 제12조 “모든 국민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는 조문을 두고 의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라는 문구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여러 수정안이 표결에 부쳐진 끝에 원안이 그대로 가결됐다. 그렇게, 기도로 시작한 제헌의회는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와 정치를 떼어놓았다. 1962년 12월 개정된 헌법부터는 종교 관련 내용이 양심의 자유 항목과 분리돼 독자적 기본권으로 대접받게 된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김신(55·울산지법원장) 대법관 후보자의 종교 편향적 판결과 언행이 도마에 올랐다. 부산·울산 지역에서 법관 경력을 쌓은 ‘향판’인 김 후보자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다. ‘장로 법관’이다. 그는 2002년 출간한 에세이집 에서 2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인도 지진을 두고 “하나님의 경고이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썼다. 조용기·김홍도 목사 등 개신교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꽉 막힌 이들이 일삼던 발언이다. 2010년 부산기독인기관장회 회장을 맡아 “부산 성시화(聖市化)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지난 2월 울산지법원장이 된 뒤에는 “울산에도 성시화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했다. 교인들이 모인 사적 자리에서 나온 지극한 신앙심의 표현일 수도 있다. 성시화 발언은 개신교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익숙하다. 인사와 정책 등에서 두루 ‘종교 편향’을 보여온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발언(“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과 빼닮았다. 2011년 1월 교회 분열을 둘러싼 민사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 교인인 원고와 피고 양쪽에 ‘화해를 위한 기도’를 요구하고, 기도 뒤 ‘아멘’으로 답했다. 부산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2009년 12월에는 대법원 판례를 부정하며 교회가 소유한 부목사 사택이 과세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민사사건에서 화해나 조정을 시도하거나, 하급심에서 대법원 판례에 맞서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김 후보자의 평소 언행과 맞물리며 종교적 편향이 법정에서도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다양한 갈등 상황을 정리하고 사법적 판단을 내려야 할 고위 법관이, 세속의 법이 아닌 자신이 믿는 성경 속 말씀을 더 따른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정교분리’라는 헌법과 민주정치의 대전제를 어겼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황우여 “대법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이들이길”

김 후보자는 7월12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지만 제 판결이 종교 편향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다만 어려운 삶의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됐고, 그런 면이 개인 생활에서 드러나 공적인 부분에 영향을 끼쳤던 부분이 있었던 듯하다”고 했다. 그는 소아마비 장애를 이유로 사법연수원 동기들보다 여섯 달 늦게 판사로 임관됐었다.
우리 헌법 나이가 환갑을 넘겼다. 21세기 한국의 일부 공직자는 자신의 내면적 신앙과 자신이 맡은 공적 업무를 관계짓는 방식을 잘 모르는 듯하다. 좋게 말해 서툴다. 나쁘게 말하면 의도적이거나 노골적일 때가 많다.
2011년 1월 황우여 당시 한나라당 의원(현 새누리당 대표)은 개신교를 믿는 법조인들의 단체인 애중회(愛重會) 창립 50돌 축사에서 “가능하면 모든 대법관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들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행사에는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 대법관 출신인 김황식 국무총리 등이 참석했다. 김 총리는 애중회 회장이기도 하다. 대규모 대법관 인사를 앞둔 터여서 ‘종교 편향’ 논란을 불렀다. 기도가 통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법정에서도 기도하는 대법관 후보자가 나오기는 했다.
한국은 어느 종교도 완벽한 우세를 보이지 않는 다종교 사회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개신교는 불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신자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인구의 절반 정도는 종교가 없다. 김신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개인으로서 가지는 종교의 자유’와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정교분리 원칙’을 어떻게 조율할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김 후보자가 대법관직에 오른다면, 과연 종교 관련 사건을 편하게 맡을 수 있을까. 소송 당사자들이 김 후보자가 속한 대법원 소부나 전원합의체 판결에 승복할 수 있을까. 김 후보자 스스로 사건을 기피하거나, 제척당할 가능성이 크다.
2008년 5월, ‘학내 종교 자유’를 주장하다 퇴학당한 강의석씨가 개신교계 학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강씨에게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이 뒤집혔다. 해당 재판장은 법원 안에서도 독실하기로 유명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 역시 ‘장로 법관’이다. 판결 뒤 강씨와 그를 지원하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 회원들은 “재판장이 학교 쪽과 같은 계열의 교단 소속 장로이기 때문에 1심과 항소심 결론이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2010년 4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항소심 결론을 깨고 학교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전원합의체에서도 대법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던 만큼 ‘종교적 영향’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외부에까지 알려진 재판장의 신앙심이 뜻하지 않은 사법 불신을 불러왔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입법부는 어떨까. 자신에게 사건이 떨어져야만 힘을 쓸 수 있는 법관과 달리, 국회의원은 ‘입법’이라는 능동적 채널이 있다. 이러다 보니 개신교·불교계 등은 국회의원과 주요 상임위원장들의 종교가 무엇인지에 민감하다. 국회에는 개신교 의원 모임인 국회조찬기도회, 불교 모임인 국회정각회, 가톨릭 모임인 국회가톨릭의원신도회 등이 있다. 새로 구성된 19대 국회의원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111명(37%)이 개신교 신자다. 가장 많다. 국내 개신교 신자 비율(19%)을 크게 웃돈다. 가톨릭을 믿는 의원은 73명, 불교는 42명이다. 18대 국회에서는 개신교 120명, 가톨릭 72명, 불교 55명이었다.

대통령의 ‘무릎기도’

2010년 4월, 당시 한나라당 허천·황우여 의원 등은 ‘종교문화시설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도시개발정책·택지개발사업 등 난개발로 인한 수용·이전으로부터 종교시설을 보호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개신교·불교·천주교·원불교 시설 등을 두루 나열했지만 방점은 개신교에 찍혔다.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 이후, 개신교계 일부에서 재개발지역 영세 개척교회 문제가 떠올랐다. 이 법안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함께 추진됐다고 한다. 개신교계의 한 인사는 “난개발을 막자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오래되고 전통 있는 교회 건물도 아닌 일반 교회까지 보존하거나 지원해야 할 문화시설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해당 법안은 18대 국회가 끝나며 자동 폐기됐다.
국내외 학설은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 기본권에 속하지만, 이를 외부로 드러내 다른 이들의 기본권과 충돌할 경우에는 적정한 제한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와 불교계의 갈등이 커지자, 문화체육관광부는 2009년 12월 다양한 유형의 종교차별 행위와 공직자들이 지켜야 할 ‘선’을 담은 를 내놓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특정 종교행사 등에 참석하고,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지침도, 사회·정치적 합의도 없다. 개신교계가 1966년부터 주최하는 국가조찬기도회에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이 계속 참석하는 것을 두고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국가조찬기도회는 지난해 3월 이명박 대통령에게 ‘무릎기도’를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목사의 요구에 무릎 꿇은 이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쓴 입맛을 다신 이들의 수는 한국 사회 종교 분포와 대략 비슷했을 것이다.
유독 개신교만 걸고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개신교계 공직자·정치인들이 자주 논란이 된다. 내면의 신앙을 바깥으로, 그것도 자신의 공적인 권한을 통해 강요하고 투사하려는 거친 욕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여러 진단이 나오지만, 1990년대 들어 개신교계 안에서도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세력이 대형 교회를 통해 힘을 키우고 정치세력화한 데서 이유를 찾는 분석이 많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한국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타 종교 등에 대한) 배타성이 교세 확장에 도움이 됐다. 그러나 신자 수가 늘고 국회의원의 40% 가까이가 개신교 신자이자 장로 대통령까지 나온 상황에서는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됐다”고 했다. 여러 종교가 어우러지고, 종교 없는 사람도 많은 한국 사회에서 다른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회복하기 어려운 갈등을 키운다는 것이다. 김진호 연구실장은 “한국은 대통령이 성서에 선서를 하는 미국과는 다르다”며 “몇천 명씩 모여 세를 과시하는 듯한 국가조찬기도회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도 적절한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 이명박 대통령이 3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해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있다.

» 지난해 3월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43회 국회조찬기도회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부인 김윤옥씨가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고 있다(위,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8월27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정부의 종교 차별을 규탄하는 범불교도대회가 열렸다(아래, 한겨레21 윤운식).

“성시화 운동은 폭력”

어느 기독교계 언론은 한 변호사가 법원장 시절, 부임하는 도시마다 ‘성시화’를 위해 노력한 일화를 전한다. 이 법원장은 성시화를 위한 ‘파송 선교사 자격’으로 전도했다고 한다. 특정 도시 법원장으로 있을 때는 임기 동안 무려 100여 개의 교회·기관·단체를 다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김 실장은 “성시화 운동은 실현하기도 어렵지만 그 자체로 매우 폭력적이다. 구체적 정책으로 나타날 경우 ‘종교전쟁’이 벌어질 사안”이라며 부정적으로 봤다.
‘기독법률가회’ 사회위원회에서 일하는 박종운 변호사(법무법인 소명)는 약간 결이 다르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겠지만 공적인 위치에 있는 ‘나’가 종교적 세계관과 완전히 유리될 수는 없다. 신앙적 가치와 신념이 일상과 업무 등 여러 영역에 끼치는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며 “다만, 이를 관철시키는 방법이나 용어 등이 다른 종교나 비종교인들을 얼마나 존중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행해지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보수적 관점에서는 지진 등 자연재해도 당연히 ‘하나님의 역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징벌’이나 ‘경고’와 연결시키는 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봉헌’ 역시 교인들 사이에서 쓰였다면 자연스러운 용어지만, 어떤 상황과 장소, 대상인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개신교’가 자꾸 돌출되는 상황에 대해 “그들만이 전체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정치적 문제를 신앙적 가치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워왔던 보수적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나중에 성경으로 덧씌우는 이들의 문제”라고 했다.
비종교인은 잘 모르거나 별다른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종교적인 어떤 것’들은 많다. 군에서 개신교·가톨릭·불교·원불교 성직자만을 받아들이는 군종장교 제도와 성탄절·석가탄신일·개천절만 휴일로 정한 것은 다른 종교를 차별한다는 논란이 따라붙는다. 예배에 가야 하는 일요일에 공무원시험을 치르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군·경찰서·교도소에서의 종교행사 강요·불허도 시빗거리다. 도로명에 절 등 종교시설이 포함되거나 지폐 도안에 태극무늬 등이 사용된 것도 괴로워하는 이가 있다. 광장에 서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나 불교 장식물, 학교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고, 특정 종교시설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것도 말썽이 생기고, 법원이나 헌법재판소를 향한다.

‘장로 대통령’ 이후를 생각해야

한국 사람들은 자기 종교가 무엇이 됐든 어쩔 수 없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 혹은 종교가 없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악마의 권세’를 떨쳐버리라는 얘기다. 김진호 실장은 하나 더 주문한다. “장로 대통령이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계에 얼마나 상처가 됐는지 반성적으로 성찰해보자는 흐름이 있다. 장로 대통령 이후를 생각해보자.”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국민 말고 하나님만 섬기는 공직자들


이글은 한겨레21 2012-07-23 제920호 기사 ' 국민 말고 하나님만 섬기는 공직자들'을 퍼왔습니다.
[이슈추적]김신 대법관 후보 종교 편향적 판결 논란 계기로 짚어본 공직자의 신앙과 업무 충돌공사 구분없는 배타성에 정교분리 원칙 흔들

 
» 지난 7월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김신 후보자가 자리에 앉고 있다. 김 후보자는 ‘법정 기도’와 ‘성시화 발언’에 대해 “기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기독교가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내심으로 있을 것이다. 전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라고 답했다. 한겨레21 김명진

1948년 5월31일 월요일 오전 10시20분 제헌의회가 개원했다. 첫 회의였다. 그해 5월10일 총선거를 통해 뽑힌 의원 198명이 모두 참석했다. 애국가,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이 이어졌다. 국회선거위원장 노진설이 최고 연장자인 이승만 박사를 국회 임시의장으로 추천했고, 박수로 가결됐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날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세속의 법 아닌, 성경 말씀 더 따른 판사

의장석에 올라선 이승만 임시의장의 첫마디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였다. 모든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선 가운데 평안북도 영변 출신 목사로, 서울 종로 갑구에서 당선된 이윤영 의원이 기도를 시작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선림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날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의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국회속기록) 제1회 제1차)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는 대한민국 국회가 기도로 첫발을 떼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 ‘악마의 권세’를 경계했던 제헌의회는 개원 두 달여 뒤 헌법 조문 심사를 한다. 헌법 제12조 “모든 국민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는 조문을 두고 의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라는 문구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여러 수정안이 표결에 부쳐진 끝에 원안이 그대로 가결됐다. 그렇게, 기도로 시작한 제헌의회는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와 정치를 떼어놓았다. 1962년 12월 개정된 헌법부터는 종교 관련 내용이 양심의 자유 항목과 분리돼 독자적 기본권으로 대접받게 된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김신(55·울산지법원장) 대법관 후보자의 종교 편향적 판결과 언행이 도마에 올랐다. 부산·울산 지역에서 법관 경력을 쌓은 ‘향판’인 김 후보자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다. ‘장로 법관’이다. 그는 2002년 출간한 에세이집 에서 2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인도 지진을 두고 “하나님의 경고이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썼다. 조용기·김홍도 목사 등 개신교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꽉 막힌 이들이 일삼던 발언이다. 2010년 부산기독인기관장회 회장을 맡아 “부산 성시화(聖市化)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지난 2월 울산지법원장이 된 뒤에는 “울산에도 성시화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했다. 교인들이 모인 사적 자리에서 나온 지극한 신앙심의 표현일 수도 있다. 성시화 발언은 개신교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익숙하다. 인사와 정책 등에서 두루 ‘종교 편향’을 보여온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발언(“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과 빼닮았다. 2011년 1월 교회 분열을 둘러싼 민사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 교인인 원고와 피고 양쪽에 ‘화해를 위한 기도’를 요구하고, 기도 뒤 ‘아멘’으로 답했다. 부산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2009년 12월에는 대법원 판례를 부정하며 교회가 소유한 부목사 사택이 과세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민사사건에서 화해나 조정을 시도하거나, 하급심에서 대법원 판례에 맞서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김 후보자의 평소 언행과 맞물리며 종교적 편향이 법정에서도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다양한 갈등 상황을 정리하고 사법적 판단을 내려야 할 고위 법관이, 세속의 법이 아닌 자신이 믿는 성경 속 말씀을 더 따른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정교분리’라는 헌법과 민주정치의 대전제를 어겼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황우여 “대법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이들이길”

김 후보자는 7월12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지만 제 판결이 종교 편향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다만 어려운 삶의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됐고, 그런 면이 개인 생활에서 드러나 공적인 부분에 영향을 끼쳤던 부분이 있었던 듯하다”고 했다. 그는 소아마비 장애를 이유로 사법연수원 동기들보다 여섯 달 늦게 판사로 임관됐었다.
우리 헌법 나이가 환갑을 넘겼다. 21세기 한국의 일부 공직자는 자신의 내면적 신앙과 자신이 맡은 공적 업무를 관계짓는 방식을 잘 모르는 듯하다. 좋게 말해 서툴다. 나쁘게 말하면 의도적이거나 노골적일 때가 많다.
2011년 1월 황우여 당시 한나라당 의원(현 새누리당 대표)은 개신교를 믿는 법조인들의 단체인 애중회(愛重會) 창립 50돌 축사에서 “가능하면 모든 대법관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들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행사에는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 대법관 출신인 김황식 국무총리 등이 참석했다. 김 총리는 애중회 회장이기도 하다. 대규모 대법관 인사를 앞둔 터여서 ‘종교 편향’ 논란을 불렀다. 기도가 통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법정에서도 기도하는 대법관 후보자가 나오기는 했다.
한국은 어느 종교도 완벽한 우세를 보이지 않는 다종교 사회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개신교는 불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신자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인구의 절반 정도는 종교가 없다. 김신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개인으로서 가지는 종교의 자유’와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정교분리 원칙’을 어떻게 조율할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김 후보자가 대법관직에 오른다면, 과연 종교 관련 사건을 편하게 맡을 수 있을까. 소송 당사자들이 김 후보자가 속한 대법원 소부나 전원합의체 판결에 승복할 수 있을까. 김 후보자 스스로 사건을 기피하거나, 제척당할 가능성이 크다.
2008년 5월, ‘학내 종교 자유’를 주장하다 퇴학당한 강의석씨가 개신교계 학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강씨에게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이 뒤집혔다. 해당 재판장은 법원 안에서도 독실하기로 유명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 역시 ‘장로 법관’이다. 판결 뒤 강씨와 그를 지원하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 회원들은 “재판장이 학교 쪽과 같은 계열의 교단 소속 장로이기 때문에 1심과 항소심 결론이 달라졌다”고 주장했다. 2010년 4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항소심 결론을 깨고 학교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전원합의체에서도 대법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던 만큼 ‘종교적 영향’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외부에까지 알려진 재판장의 신앙심이 뜻하지 않은 사법 불신을 불러왔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입법부는 어떨까. 자신에게 사건이 떨어져야만 힘을 쓸 수 있는 법관과 달리, 국회의원은 ‘입법’이라는 능동적 채널이 있다. 이러다 보니 개신교·불교계 등은 국회의원과 주요 상임위원장들의 종교가 무엇인지에 민감하다. 국회에는 개신교 의원 모임인 국회조찬기도회, 불교 모임인 국회정각회, 가톨릭 모임인 국회가톨릭의원신도회 등이 있다. 새로 구성된 19대 국회의원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111명(37%)이 개신교 신자다. 가장 많다. 국내 개신교 신자 비율(19%)을 크게 웃돈다. 가톨릭을 믿는 의원은 73명, 불교는 42명이다. 18대 국회에서는 개신교 120명, 가톨릭 72명, 불교 55명이었다.

대통령의 ‘무릎기도’

2010년 4월, 당시 한나라당 허천·황우여 의원 등은 ‘종교문화시설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도시개발정책·택지개발사업 등 난개발로 인한 수용·이전으로부터 종교시설을 보호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개신교·불교·천주교·원불교 시설 등을 두루 나열했지만 방점은 개신교에 찍혔다.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 이후, 개신교계 일부에서 재개발지역 영세 개척교회 문제가 떠올랐다. 이 법안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함께 추진됐다고 한다. 개신교계의 한 인사는 “난개발을 막자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오래되고 전통 있는 교회 건물도 아닌 일반 교회까지 보존하거나 지원해야 할 문화시설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해당 법안은 18대 국회가 끝나며 자동 폐기됐다.
국내외 학설은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 기본권에 속하지만, 이를 외부로 드러내 다른 이들의 기본권과 충돌할 경우에는 적정한 제한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와 불교계의 갈등이 커지자, 문화체육관광부는 2009년 12월 다양한 유형의 종교차별 행위와 공직자들이 지켜야 할 ‘선’을 담은 를 내놓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특정 종교행사 등에 참석하고,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지침도, 사회·정치적 합의도 없다. 개신교계가 1966년부터 주최하는 국가조찬기도회에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이 계속 참석하는 것을 두고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국가조찬기도회는 지난해 3월 이명박 대통령에게 ‘무릎기도’를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목사의 요구에 무릎 꿇은 이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 쓴 입맛을 다신 이들의 수는 한국 사회 종교 분포와 대략 비슷했을 것이다.
유독 개신교만 걸고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개신교계 공직자·정치인들이 자주 논란이 된다. 내면의 신앙을 바깥으로, 그것도 자신의 공적인 권한을 통해 강요하고 투사하려는 거친 욕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여러 진단이 나오지만, 1990년대 들어 개신교계 안에서도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세력이 대형 교회를 통해 힘을 키우고 정치세력화한 데서 이유를 찾는 분석이 많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한국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타 종교 등에 대한) 배타성이 교세 확장에 도움이 됐다. 그러나 신자 수가 늘고 국회의원의 40% 가까이가 개신교 신자이자 장로 대통령까지 나온 상황에서는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됐다”고 했다. 여러 종교가 어우러지고, 종교 없는 사람도 많은 한국 사회에서 다른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회복하기 어려운 갈등을 키운다는 것이다. 김진호 연구실장은 “한국은 대통령이 성서에 선서를 하는 미국과는 다르다”며 “몇천 명씩 모여 세를 과시하는 듯한 국가조찬기도회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도 적절한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 이명박 대통령이 3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해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있다.

» 지난해 3월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43회 국회조찬기도회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부인 김윤옥씨가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고 있다(위,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8월27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정부의 종교 차별을 규탄하는 범불교도대회가 열렸다(아래, 한겨레21 윤운식).

“성시화 운동은 폭력”

어느 기독교계 언론은 한 변호사가 법원장 시절, 부임하는 도시마다 ‘성시화’를 위해 노력한 일화를 전한다. 이 법원장은 성시화를 위한 ‘파송 선교사 자격’으로 전도했다고 한다. 특정 도시 법원장으로 있을 때는 임기 동안 무려 100여 개의 교회·기관·단체를 다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김 실장은 “성시화 운동은 실현하기도 어렵지만 그 자체로 매우 폭력적이다. 구체적 정책으로 나타날 경우 ‘종교전쟁’이 벌어질 사안”이라며 부정적으로 봤다.
‘기독법률가회’ 사회위원회에서 일하는 박종운 변호사(법무법인 소명)는 약간 결이 다르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겠지만 공적인 위치에 있는 ‘나’가 종교적 세계관과 완전히 유리될 수는 없다. 신앙적 가치와 신념이 일상과 업무 등 여러 영역에 끼치는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며 “다만, 이를 관철시키는 방법이나 용어 등이 다른 종교나 비종교인들을 얼마나 존중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행해지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보수적 관점에서는 지진 등 자연재해도 당연히 ‘하나님의 역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징벌’이나 ‘경고’와 연결시키는 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봉헌’ 역시 교인들 사이에서 쓰였다면 자연스러운 용어지만, 어떤 상황과 장소, 대상인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개신교’가 자꾸 돌출되는 상황에 대해 “그들만이 전체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정치적 문제를 신앙적 가치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워왔던 보수적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나중에 성경으로 덧씌우는 이들의 문제”라고 했다.
비종교인은 잘 모르거나 별다른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종교적인 어떤 것’들은 많다. 군에서 개신교·가톨릭·불교·원불교 성직자만을 받아들이는 군종장교 제도와 성탄절·석가탄신일·개천절만 휴일로 정한 것은 다른 종교를 차별한다는 논란이 따라붙는다. 예배에 가야 하는 일요일에 공무원시험을 치르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군·경찰서·교도소에서의 종교행사 강요·불허도 시빗거리다. 도로명에 절 등 종교시설이 포함되거나 지폐 도안에 태극무늬 등이 사용된 것도 괴로워하는 이가 있다. 광장에 서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나 불교 장식물, 학교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고, 특정 종교시설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것도 말썽이 생기고, 법원이나 헌법재판소를 향한다.

‘장로 대통령’ 이후를 생각해야

한국 사람들은 자기 종교가 무엇이 됐든 어쩔 수 없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 혹은 종교가 없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악마의 권세’를 떨쳐버리라는 얘기다. 김진호 실장은 하나 더 주문한다. “장로 대통령이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계에 얼마나 상처가 됐는지 반성적으로 성찰해보자는 흐름이 있다. 장로 대통령 이후를 생각해보자.”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2012년 1월 15일 일요일

‘신앙 좋은’ 사람은 왜 거품 물고 독기 뿜을까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 2012-01-13일자 기사 '‘신앙 좋은’ 사람은 왜 거품 물고 독기 뿜을까'를 퍼왔습니다.

종교는 집단적인 현상으로 필연적으로 배타성 띠어
  영성 억압 받고 고갈된 종교는 거대한 시체 덩어리


 지난 2004년 서울광장 구국기도회 장면 사진 <한겨레> 자료

평생 종교 공부를 해 온 사람인데 요즈음 나는 내가 왜 하필 그 많은 학문 가운데서 종교라는 것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살아왔는지 자문해볼 때가 많다. 또 개인적으로도 평생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해 온 사람인데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거기에 소비해왔는지 묻게 된다.
종교라는 것이 매우 복잡다단한 현상이기 때문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해야 할지 늘 고심하게 된다. 한편 관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자기가 정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과연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순수’한 종교 현상은 없지만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는 게 영성
  종교는 인류 역사를 통해 사회, 문화, 도덕, 정치, 경제, 철학 사상, 예술, 건축, 공예 등 삶의 다양한 분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기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종교가 부차적 관심이 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순수한’ 종교 현상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언제나 삶의 다양한 활동들과 연계되고 섞이면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의 가장 순수한 면,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며 종교만의 고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영성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는 인간은 영성을 지닌 영적 존재로서 어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초월적 실재가 인간과 세계를 초월한다고 믿든 아니면 인간의 마음이나 세계에 내재한다고 믿든, 종교는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에 관여하는 감성과 사고 활동을 하는 이성과는 다른 영성이라는 또 하나의 성품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영성을 자각하고 실현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 목적이라고 가르친다. 이에 비하면 종교와 관련된 여타 현상과 관심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종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면, 한 종교가 얼마나 많이 영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계를 보면 회의를 넘어 절망감마저 들 때가 많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대체로 종교생활은 무척 열심인데 정작 영성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오히려 신앙이 아주 ‘좋고’ 신앙생활에 열성인 사람일수록 영성과는 거리가 멀고 아집, 독선, 편견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나 종교생활에 열심인 사람 하면 왠지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특이한 경우일까?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입에 거품을 물고 얼굴에는 독기마저 품은 듯 열심히 자기 이야기만 하려는 신자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무엇이 두려워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살까

여하튼 영성은 고사하고 일반적 상식과 도덕성에도 못 미치는 신자들로 넘쳐나는 것이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이다. 뉴스 매체를 통해 접하는 한국 종교계의 모습은 어떠한가? 온갖 탐욕과 비리가 판을 치며 이권다툼, 교권다툼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 세속의 법정에까지 끌고 가는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과연 정상적인 생각과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종교단체에 몸을 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이 종교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중세시대도 아니고 웬만한 사람은 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 문턱에 진입했다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사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냥 보기 싫다고 떠나버리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여하튼 우리나라 종교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와 영성이 유리되어 따로 논다는 것이다. 가장 영적이어야 할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영성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새해 벽두부터 우리 종교계를 이렇게 싸잡아 매도할 생각은 없고 또 이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순수한 영성을 지닌 다수의 성직자들과 양식 있는 신도들이 묵묵히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기에 우리 종교계, 우리 사회가 그나마 이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또 어디든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종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고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의 존재 이유 자체가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에게 적어도 평균 이상의 도덕적 수준과 영적 수준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더군다나 종교에 투입되는 엄청난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고려해 볼 때 한국종교계는 아무래도 후한 점수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로마 가톨릭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성탄 미사를 드리는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창시자는 유연한데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억압…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
  요즈음 우리 사회와 종교계에 ‘영성’이란 말이 제법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지금 나 자신도 그렇게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영성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쓰이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영어의 ‘spirituality’에 해당하는 말이라 여겨지며, 초월적 실재 혹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서 초월적 시각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본성 내지 성품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하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소하게 들리던 이 단어가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연구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저 감으로 느끼기에는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종교’라는 말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 자신의 경우는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종교라는 말보다 영성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특히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서 ‘종교’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그러할까?
  종교는 우선 집단적인 현상인 반면 영성은 개인적이다. ‘나 홀로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종교는 집단적이기 때문에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며,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도자와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종교도 집단이고 체제인 한 타 집단들로부터 자기를 차별화하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과 제도를 갖추고 신자들을 관리해야 하면 사상과 교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필연적으로 테두리를 긋고 배타성을 띨 수밖에 없다.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한 카리스마적 창시자들은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개혁적이며 사상이나 행동에서 자유롭고 유연하지만,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추종자들이 늘면 각종 규율이 생기고 제도와 체제를 강화하게 된다. 어쩌면 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초창기 운동이 지녔던 자유로움과 창조성은 사라지고 신도들을 관리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게 되면서 억압적 기제로 작용한다. 이것이 대체로 종교들이 걷는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코스이다. 종교들마다 초창기의 정신과 비전을 선양하면서 개혁을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음 고독 허무 불안 소외와의 대면이 되레 본래적인 삶 이끌어
  이와 대조적으로 영성이라는 것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 관한 것이고 자기 체험적이고 자기 반성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개인적일(personal) 수밖에 없다. 종교가 집단화되고 제도화되면 될수록 종교를 떠받히고 있던 개인의 영성은 진정성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관습적이 되며 세태와 타협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되면 될 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란 한 개인이 자신의 고독과 상대하는 것이다.” 라는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은 종교의 사회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 그 반대로 종교란 집단적 흥분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며 한 집단의 사회적 정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고 신성화해주는 기재라고 종교사회학자 뒤르켕은 주장한다 - 깊이 새겨볼만 하다.


 사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독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절망의 터널을 홀로 통과해 본 일이 없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갑자기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 인생의 덧없음을 깊이 느껴 본 일이 없거나 초월자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은 단독자로 서 본 경험이 없는 사람,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고 세상만사가 모두 무의미하게 보이는 경험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과연 영적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죽음, 고독, 허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무의미성, 소외감 등은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루 종일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며 세상사에 몰두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과의 대면은 오히려 우리를 비본래적인 삶에서 본래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 영성을 일깨우는 영혼의 음성 혹은 신의 부름과도 같이 우리를 찾아온다.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섞이다 보면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홀로 있다 보면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든다. 영성은 홀로 있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은 일상적 자아, 사회적 자아에 매몰되었던 영적 자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이다. 영성의 각성과 함양에는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 있을 줄 아는 자만이 남과도 함께 있을 수 있다.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이 때때로 자발적 고독을 선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법정, ).

자기성찰을 위한, 생각마저 멈추는 자발적 침묵이 영성 함양의 필수
  영성과 고독이 함께 간다면 영성과 침묵도 떼어놓을 수 없는 짝을 이룬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는 사귐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서 대화를 거부하거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래서도 안 된다. 공연한 오해를 사기가 쉽다. 이와는 달리 고독과 침묵은 같이 가며, 자발적 고독은 사실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다. 물론 침묵이 반드시 말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혼자 있어도 끊임없이 말을 한다. 홀로 있어도 생각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은 홀로 하는 말이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침묵은 생각마저 멈추는 무념의 경지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 자신과 홀로의 대화는 타인과의 대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타인과의 대화는 좋든 나쁘든 남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며 자기 체면에 신경을 쓰게 되므로 정직한 대화가 되기 어렵다. 때로는 원치 않는 말이나 불필요한 말도 해야 하며,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 오해와 다툼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많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 잘 모르는 것까지도 아는 체 하기도 하며, 자기가 옳다는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일단 내뱉은 말이 문제가 있음에도 열심히 옹호하려 든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 정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 해도 속이기 어렵고, 내면의 소리를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기 어렵다. 자발적 고독은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며 자발적 침묵은 자발적 자기성찰을 위함이다.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 없는 영성이란 있을 수 없다.
  묵언의 수행이 영성의 함양에 필수적인 이유는 단지 자기성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영성이 추구하는 초월적 실재, 궁극적 실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불가언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삶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특히 사회/문화적 세계는 언어로 구성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을 식별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통해서 의 세계를 으로 가르고 쪼갠다. 영성이 추구하는 무한한 실재는 유한한 사물이 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이름과 형상, 속성과 특징들을 여이고 텅 빈 고적한 세계이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이 실재는 대립과 차별의 세계를 넘어 모든 유한한 것들을 품을 수 있고 사물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며 만물을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예수원에서 묵상중인 기독교인 사진 조현

 자기를 놓아버리고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이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어

 그래서 영성은 일차적으로 다수성보다는 단일성, 차별성보다는 무차별성을 선호하며, 일체의 상(像, 相)과 관념들을 초월하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선호한다.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는 듯한 이 부정은 그러나 모든 것을 다시 품기 위한 부정이지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차별의 세계에 갇혀 대립하고 갈등하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부정이며 초월적 시각에서 세계와 인생을 다시 발견하고 품게 하는 부정이다. 영성이 선호하는 고독, 침묵, 부정은 모두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성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결코 세계 도피가 아니다. 영성이 도피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 곧 자기 자신 뿐이다. 영성이 혐오하는 것은 세계 자체나 인생 자체가 아니라 이기적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추한 모습뿐이다. 영성의 대가들은 우리가 좁다란 이기적 자아에 매여 있는 한 진정한 행복을 모르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매사에 걸려 넘어진다고 말한다. 삭발입산을 해도 소용없고 교회나 수도원을 찾아도 소용없다. 그러나 자기를 놓아버린 자, 진정으로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은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는다고 증언한다. 임제선사가 말하는 대로 “처하는 곳마다 주인 노릇 하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된”(隨處作主 立處皆眞) 경지가 열린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지만 영성은 나만이 알고 하느님만이 아는 세계이다. 물론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남에게 보이려는 가식과 위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영성의 세계에서 자기기만이 차지할 공간은 크지 않다. 종교는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사상의 통일이 필요하기에 교리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지만, 영성에는 강요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과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집단적 동질성을 요구하는 종교는 때때로 철저한 영성가들의 정직한 말과 행동을 위험시하지만, 영성적 관점에서 보면 종교는 순수성을 상실한 타협 아니면 타락으로 보인다. 개인적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출발한 종교는 집단화되는 순간부터 순수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영성을 키우기는커녕 장애가 되기 쉽다. 종교는 일정한 경계와 울타리를 치고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차이와 자유에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고 자발성과 진정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성찰을 본질로 하는 영성에는 항시 정직성과 진정성이 살아 있으며, 이러한 영성이 살아 있는 한 종교도 생명력을 지니며 자체를 정화하고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반면에 영성이 억압받고 고갈된 종교는 아무리 덩치가 커도 거대한 시체 덩어리나 다름없다.

종교는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하며 그 사명은 영성을 일깨우는 것
  개인의 끝없는 정직성과 진정성을 요구하는 영성은 쉽게 교리나 도그마에 가둘 수가 없다. 영성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내적 경험이다. 교단이나 교권은 개인의 영성을 규제하고 획일화하기 원하지만 어떤 종교도 완전히 성공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완전히 성공하는 순간 그 종교는 망한다. 종교와 영성의 완전한 일치는 본질상 불가능하며, 양자 사이의 창조적 긴장은 종교 자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종교는 체제 유지를 위해 정치권력과 유착하기도 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하며 때로는 전쟁을 부추기지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영성은 권력이나 부와는 거리가 멀다. 종교는 교리를 정립하고 정통을 수호하려고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지만, 영성은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성찰하며 물리적 힘에 의존하기보다는 자기 비움을 우선시하며, 우리와 저들을 가르기 전에 모두를 하나로 감싸 안는다. 종교 지도자들은 때때로 하느님의 뜻을 들먹이면서 집단적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성전(聖戰)을 독려하지만, 영성가는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집단적 광기에 휩싸이지 않는다. 종교는 종종 전쟁의 원인이 되지만 진정한 성전(jihad)은 오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뿐이라고 이슬람의 수피 영성가들은 말한다. 종교는 빠지면 빠질수록 위험하지만 영성은 깊으면 깊을수록 자유롭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종교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영성을 무비판적으로 미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의도성은 종교를 비판하고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증폭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종교를 옹호하려는 데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종교와 영성을 지나치게 차별화한 것은 사실은 종교와 영성이 동일시됨으로써 행여 영성이라는 진주가 종교라는 진흙에 묻혀서 함께 외면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하며, 종교의 목적과 사명은 어디까지나 각 사람의 영성을 일깨우고 함양하는 데 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영성은 실제로 특정한 종교 전통들 속에서 함양되어 왔다. 하지만 강력하고 순수한 영적 운동으로 시작한 종교들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전통의 무게가 더해지고 제도가 공고해지면 ‘정통’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양심을 짓누르고 영적 진정성을 훼손하는 기재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는 영성 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한 종교를 절대화하지 않고 비종교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제3의 영성

 순수한 영성 운동도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제도화 되고 권력화 된다. 동서양 수도원의 역사가 이를 보여주며 오늘날도 많은 수도 단체들이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수도원도 개혁 운동이 필요하며, 스님들 가운데는 절을 떠나 토굴에서 수행하는 제2의 출가를 감행하기도 한다. 종교도 처음에는 순수한 영성운동으로 출발했다는 사실, 종교 안과 밖에서 출발한 각종 영성운동도 ‘성공’에 비례하여 종교의 길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종교와 영성의 차이를 결코 과장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종교는 본성상 집단적이고 영성은 본성상 개인적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타당하다.
  개인의 발견과 더불어 주체적 인간이 출현하는 근현대 세계로 들어오면서 종교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라는 의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현대인들에 의해 외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는 외면당할지언정 인간의 영성이 사라지거나 무시되는 일은 없다. 영성이 감성이나 이성과 더불어 인간 본성의 일면인 한, 현대인이라고 해서 영성을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종교의 전통과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짐에 따라 다종교적 영성, 초종교적 영성, 또는 비종교적 영성을 키울 수 있는 공전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종교 간의 벽을 넘고 종교와 비종교의 구별마저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고 실현할 수 있는 초유의 기회를 누리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은 제도 종교들이 더 이상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영적 공허 속에 방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영적 실험을 하면서 이전 시대의 인간들이 누려보지 못했던 영적 자유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종교를 넘어 영성으로, 한 종교에 갇혔던 시야를 벗어나 인류 전체의 영적 자산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현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는 이것을 ‘제삼의 영적 세계’라고 부르고 싶다. 한 종교의 언어와 전통에 사로잡혀 절대화하지 않는 영성,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세속주의도 아닌 영성, 나아가서 종교와 비종교 - 성과 속, 진과 속 - 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비종교적 영성이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구 사회들의 경우 이러한 초종교 영성은 동양 종교들에 대한 관심 혹은 환경/생태적 영성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서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대형 서점의 종교 서적 코너를 한 번 방문해 보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동양종교들에 대한 책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만큼 수요가 있기에 출간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의식 수준은 이제 더 이상 한 종교에 묶일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 뜨여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지독한 종교적 배타주의의 목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린다 해도, 침묵하는 다수의 의식 속에는 종교란 결국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생각이 일반화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들은 길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일종의 직관적 종교다원주의론을 펴기도 한다.
  영적 인간관에 의하면 영성은 우리 마음 속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 대면해야 하고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성 그 자체에 속한다. 표피적 자아 아래 숨겨진 심층적 자아, 영적 자아, 참 자아(진아)와의 대면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겹겹으로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이 뜨인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개안의 경험을 돈오(頓悟)라고 부른다. 선에만 돈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유사한 영적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며, 종교와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욕심이 만든 허상에서 벗어나 세계와 인생의 실상을 보게 되며 자기 존재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한다. 소유보다 존재에, 성취보다 살아 있음에 더 큰 행복을 느끼며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되어야 할 자기와 현실적 자기, 본래적 자기와 비본래적 자기, 본질과 실존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한다. 부처와 예수, 공자나 노자 같은 성인은 이러한 괴리와 소외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터운 표피적 자아를 뚫고 들어가 영혼의 심층에 깔려 있는 깊은 자아를 만나 거기로부터 사는 진정한 사람들이다. 이 심층적 자아는 이런 저런 우연적 특성을 지닌 표피적 자아,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하는 차별적 자아가 아니라 무차별적 자아, 순수한 자아, 보편적 자아, 초월적 자아로서 만인을 품을 수 있고 만물과 하나 되는 우주적 자아이며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적 자아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의 현실적 모습을 거부하도록 추동하는 자아로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 혹은 씨앗, 하늘로부터 품수 받은 천성, 부처의 성품, 아트만, 내면의 빛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영성의 세계에서는 하느님과의 대면은 곧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며 자기를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길이다. 영성의 완전한 실현은 하늘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천인합일(天人合一) 또는 신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신화 혹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이다. 이렇게 우주와 하나 되고 신과 하나 되며 부처와 하나 되는 영성이야말로 인간의 지고선이며 존엄성의 진정한 근거이다. 그리고 영성이 인간의 본성인 한, 영성의 자각과 실현은 곧 참다운 인간이 되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일치의 경지는 죄악으로 덮여 있는 범부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비적 일치의 영성보다는 초월적 타자로부터 오는 은총에서 인간의 희망을 보는 신앙적 영성도 있다. 이른바 ‘타력’ 신앙적 영성으로서, 자신의 노력과 수행으로 자기의 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성에서 자력과 타력의 구별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영성의 세계에 ‘자력’의 오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데 있다. 자기포기 없이 은총은 주어지지 않으며 은총의 도움 없이 자기초월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은총을 은총으로 깨닫는 것은 영성이며, 영성이 일깨워지는 계기는 은총으로 주어지고 영성의 완성 또한 자신의 힘보다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참 인간’(ein wahrer Mensch)이라고 부르는 사람, 임제 선사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떤 모습의 사람일까? 욕심이 없으니 다툴 일이 없고, 소유하지 않으니 잃을 것이 없으며, 잃을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다. 성과 속, 진과 속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으며 언제나 자유롭다. 성직자들처럼 유별난 복장을 하지 않으며 특별히 근엄한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말투로 말하지도 않는다. 상식을 무시하지 않으며 권위로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으며 목에 힘주는 일이 없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럽고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되 슬픔과 기쁨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많은 것을 알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부지런히 일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모든 것을 누리지만 하나도 소유하지는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영성을 사랑하는 자들이 흠모하는 참사람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