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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6일 화요일

말 바꾼 박근혜, 정말 믿어도 될까?


이글은 프레시안 2013-02-26일자 기사 '말 바꾼 박근혜, 정말 믿어도 될까?'를 퍼왔습니다.
['박근혜 시대' 개막·②] 시험대 오른 박근혜 복지

"진보가 10년간 고민했던 어젠다를 박 당선인이 가져가 버렸다." "당선인의 (복지정책에 대한) 포용력에 따라 민주당은 앞으로 20년 가까이 집권하지 못할 수 있다." (동아일보, 2월 6일)

대표적 진보지식인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들에는 진보의 정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서려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비단 우 교수의 것만이 아니다. 진보진영 전체의 고민이다.

지난 18대 대선은 진보 진영에 적잖은 충격을 가져다줬다. 권력을 가져오지도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간판 어젠다를 보수 정권에 넘기고 말았다. 진보의 전통적 어젠다인 복지를 보수 진영에 빼앗긴 건 아쉬움을 넘어 허탈함마저 들게 했다. 진보 진영이 대선 패배 후 '멘붕'에 빠진 건 때문이었다.

복지에 대한 요구는 높지만, 진보의 정치력을 믿지는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러한대중의 심리를 꿰뚫었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보수 진영에선 무상급식 등 복지 정책에 '퍼주기'라며 철퇴를 날리는 사이, 박 대통령은 '복지 완전 정복'에 나섰다. '한국형 복지'를 내걸고 생애주기별 맞춤복지를 제시했다. 이러한 정치적 판단은 3년 뒤, 마침내 그를 취임식장으로 인도했다.

박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 2013년을 '한국형 복지 원년'으로 만들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취임 하기도 전부터 박 대통령의 복지 정책을 두고 "말 바꾸기"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불과 3개월 전 진보진영을 위기감에 몰아넣었던 박 대통령, 이번엔 그가 위기다. 위기의 내용은 무엇이며, 위기 극복 앞에 놓인 과제들은 무엇인가.

▲ 취임식장인 국회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박근혜 대통령 ⓒ프레시안(최형락)

취임도 전에… '반쪽' 된 복지 공약

지난 21일, 인수위는 5대 국정목표, 21개 국정전략, 140개 국정과제를 선정해 발표했다. 5대 국정 목표는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 △맞춤형 고용·복지, △창의교육과 문화가 있는 삶, △안전과 통합의 사회, △행복한 통일시대의 기반 구축이었다. 대선 기간 동안 강조한대로 복지를 5대 국정 목표에 포함시키면서 박 대통령은 복지 국가 건설에 대한 의지를 내보였다.

김용준 인수위원장 복지 정책과 관련,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선진국 수준으로 커졌으나 국민 개인의 행복수준은 낮은 상황"이라며 "이제는 국민행복과 국가발전이 선순환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복지 정책을 국가의 총량적 차원이 아닌 국민 개개인 차원에 맞춰 만들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총론은 좋았다. 그러나 각론이 문제였다. 지난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의 복지 분야 최대 공약이었던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관련 공약은 이날 발표에서 상당 부분 바뀌어있었다.

기초연금

우선 기초연금부터 살펴보자. 인수위는 기존의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으로 바꾸고, 이를 국민연금과 통합해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국민행복연금'으로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에서, 최소 4만 원~최대 20만 원의 차등 지급으로 수정됐다.

소득 하위 70%에 국민연금 미가입자는 원안대로 20만 원 전액을 받는다. 소득 상위 30%에 속하는 국민연금 미가입자도 약 4만 원을 받는다. 국민연금 가입자의 경우 가입기간에 따라 복잡한 계산식이 따른다. 결과적으로 인수위 안에 따르면, 국민연금을 받고 있는 소득 하위 70% 노인들은 14만 원~20만 원의 연금을, 소득 상위 30%에 국민연금을 받고 있으면 4만 원~10만 원을 받는다.

이같은 안은, 인수위가 '모든 사람에게 기초연금을 준다'는 기준과 '국민연금 가입자가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겠다'는 기준을 합친 결과다.

그러나 인수위 안에는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따른다. 인수위는 연금가입자들의 박탈감을 무마하기 위해 가입기간에 따라 기초연금 지급액수를 달리한다고 밝혔지만,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길수록 안정적으로 노후대책을 세워왔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서민들에게 덜 주고 여유 있는 사람에게 더 주게 되는 꼴이다.

저소득층의 국민연금 이탈 현상도 우려된다. 국민연금을 한 푼 내지 않아도 기초연금 20만 원을 받게 되는 것을 감안하면 저소득층의 경우 국민연금을 내지 않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계산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강제가입자와, 고소득자 위주로 국민연금이 축소돼 장기적으로 국가적 부담이 커질 뿐 아니라 노후 보장의 의미가 크게 퇴색된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금연구센터장은 "자칫하다간 저소득층이 대거 국민연금에서 빠져나가면서 반쪽짜리 연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보영 영남대학교 지역및복지행정학과 교수는 기존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경우, 국민연금과 별도로 기초연금을 통해 얻는 '인센티브'를 기대했는데, 이 부분이 사라지면서 근로 의욕 부진에 따른 생산성 저하 등이 우려된다는 점도 짚었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 운영하겠다는 계획도 근본적으로 불씨를 안고 있다. 세금으로 충당하는 공적부조 성격의 기초연금과 보험 성격의 국민연금을 한 틀에 묶으면, 제도 정체성에 혼선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 9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대한노인회를 방문해 임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4대 중증질환 外

인수위는 "4대 중증질환 치료에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는 2016년까지 100% 건강보험에서 부담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2016년부터 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성 질환 등 4대 중증질환에 대해 2016년까지 100% 건강보험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핵심쟁점이었던 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간병비 등 '3대 비급여 항목'은 현행대로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게 됐다.

인수위는 여기에 "상급병실료, 선택진료비 등에 대해서는 실태조사를 통해 실질적 환자 부담 완화 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완화 대책'이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지금도 4대 중증질환의 본인부담금은 5~10%로 다른 질환에 비해 낮다. 4대 중증질환의 본인 부담 완화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따라서 중증질환 환자들을 가장 괴롭히는 상급병실료·선택진료비·간병비를 제외하고 건강보험 보장을 강화한다는 것은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밖에 어르신 임플란트 공약, 건강보험 본인부담 상한제도 다소 후퇴했다.

박 당선인은 '노인 임플란트에 건강보험을 적용한다'는 공약을 내세운 바 있지만, 이날 발표에선 다시 75세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하기로 했다. 어금니만 할지, 모든 치아에 적용할지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건강보험 본인부담 상한제의 경우, 현재 소득에 따라 3단계로 나뉜 본인부담 상한제를 50만 원~500만 원으로 나눠 지급한다고 공약했지만, 인수위에서는 저소득층의 상한액은 120만 원으로 높이기로 했다.

"국민 맞춤형 아닌 '예산 맞춤형' 국정 전략"

이날 발표내용은 충분히 예견된 시나리오였다. 인수위는 이같은 '공약 후퇴'를 인수위 출범 후 조기 예고하기도 했다.

박근혜 선거 캠프의 민생경제대응단장을 맡았던 나성린 당 정책위부의장은 기초연금 관련, "대선 공약에서 기초노령연금을 2013년부터 65세 이상 노인 전부에게 20만 원씩 지급한다고 한 적이 없다(1월 14일)"고 한 데 이어 "공약 '말 바꾸기 비판'은 대선 공약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1월 16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근혜 표' 복지 공약이 줄줄이 후퇴한 이유는 재원 때문이다. 실제 인수위 업무 보고 과정에서 각 정부 부처는 재원을 이유로 복지 공약에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지하경제 양성화, 비과세 감면 등으로는 훌쩍 늘어난 복지 예산을 감당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정부 출범을 앞두고 '증세'를 공언하기도 부담스럽다는 판단 하에 공약을 차등적으로 바꿔 재원을 줄여보려는 의도인 셈이다.

재원을 핑계로 복지 정책을 후퇴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뒤따른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는 24일 논평을 통해 복지정책 국정비전 전략에 대해 "국민 맞춤형이 아닌 예산 맞춤형으로 변질됐고 대선공약의 핵심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국민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야 할 국가의 책무보다 재정 건전성을 내세워 있어 유감"이라고 밝혔다.

또한 "국정과제는 이행시기를 늦추거나 단계적 도입을 제시하는 등 명시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공공성보다는 시장을 통한 효율성을, 보편적 복지보다는 선별적·잔여적 복지를 강조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김보영 교수 역시 "재원 방안은 증세가 아니더라도 재정 구조 조정, 세출 조정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조율 가능하다"며 "재원 고민 이전에 복지 정책 수행에 대한 의지를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지난해 6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노동·농민·여성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노인 빈곤 해소와 기초노령연금 인상을 위한 운동본부(준)'를 발족하고 기초노령연금 인상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다음번 '공약 후퇴' 요구에 대한 朴 처신이 관건"

과거 역대 정부들은 대부분 복지 정책에 있어 첫 목표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내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2006년 '참여정부 보건복지 핵심공약 이행 평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참여정부의 대표적 의료 공약으로 꼽았던 공공의료 확대 공약은 도시형 보건지소의 시범사업만 실시하는 등 10% 수준이었고, 치매 중풍노인을 위한 요양시설확대 공약 역시 기존 계획보다 크게 축소됐다. 경실련은 2011년 비슷한 취지의 'MB정부 보건복지 공약 및 국정과제 평가 보고서"를 통해 84개 세부과제 중 성과가 인정된 B등급은 16개(19%), 사업이 매우 부진하고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 낙제수준 D등급이 24개(29%)라고 평가했다.

전례에 비춰봤을 때 '복지 대통령'을 꿈꾸는 박 대통령 역시 험로가 예상된다.

복지 분야는 정권 내에서 확장보다 축소되기 쉬운 영역이다. 복지는 사람에 대한 투자이기 때문에 토목사업 등과 같이 가시적인 성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복지에 '퍼주기'라는 오명이 붙은 이유도 이같은 특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복지 대통령을 꿈꾼다면, 무엇보다 끈기를 갖고 뚝심 있게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취임하기도 전에 공약을 수정하는 등 복지 정책 이행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오건호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출범도 하기 전에 (수정안을 밀고 나가는 것은) 국민에게 '실패한 정부'라는 낙인이 찍히는 일"이라며 "앞으로 5년간 국정을 이끌기가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창수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앞으로도 계속 주변에서 '후퇴 요구'가 들어올 텐데 이때 박 대통령의 결단을 봐야 한다"며 "(의지 부족 비판을 극복하려면) 현재 애매하게 남아있는 공약들을 서둘러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복지 공약에 대한 이행 의지가 높다는 점을 직접 국민들에 알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약 수정에 대한 '대국민 해명'이 먼저라는 의견도 있다.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공약을 축소하거나 다소 변경할 수는 있지만 국민들에게 왜 바뀌었는지 해명을 해야 한다"며 "박근혜 당선인이 강조했던 국민과의 약속, 신뢰에 흠집이 나 버리면 추후 정국 운영에도 발목을 잡힐 수 있다"고 비판했다.

복지 정책 관계자들 간에 불필요한 잡음을 조기 차단하는 것 또한 과제다. 박 대통령은 복지공약 실행의 컨트롤타워인 보건복지부 장관에 진영 전 인수위 부위원장을 내정했다. 대표적 친박계 인사인데다 여야에 두루 덕망이 높은 진 부위원장을 내정한 것은 새 정부의 복지 공약 이행을 상징하는 인선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새 정부의 경제팀을 이끄는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 후보자가 정치권의 복지확대 논의에 비판적이었던 현오석·조원동 후보자라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 일부 엇박자가 나오지 않겠냐는 우려가 나온다. 기본적으로는 총리실 사회보장위원회가 복지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되겠지만, 결국 복지재원 논의로 들어가면 예산을 총괄하는 경제팀이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취임 연설 중인 박근혜 대통령 ⓒ프레시안(최형락)

성공한 대통령-'대통령이 된' 성공한 정치인, 朴 선택은?

박 대통령은 지난 25일 취임사에서 "어떤 국민도 기초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맞춤형의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으로 국민들이 근심 없이 각자의 일에 즐겁게 종사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 천명했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기초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 믿고 박 대통령을 밀었던 국민들은 그의 '공약 수정' 이후 믿음이 깨질까 두려워한다.

일단 한 발짝 물러섰다. 물러섰다가 다시 크게 뛰어오를 것이냐, 아니면 물러선 상태 그대로 뒷걸음질칠 것이냐. 그에 따라 그는 '대통령이 된 성공한 정치인'으로 남을 수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설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의 태도에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서어리 기자

2013년 2월 12일 화요일

암 걸려도 걱정 말라더니, 박근혜 국민 속였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3-02-12일자 기사 '암 걸려도 걱정 말라더니, 박근혜 국민 속였나?'를 퍼왔습니다.
[시험대 오른 박근혜 복지‧下] 말 바꾼 4대 중증질환 공약

복지 공약은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선인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2010년 '무상급식' 이후 야권의 이슈였던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박 당선인은 자신의 이슈로 끌어들이는 탁월한 정치 감각을 선보였다.

그러나 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박근혜 당선인의 복지 관련 공약이 휘청거린다. 특히 표심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기초노령연금 2배 인상'과 '4대 중증질환 치료비 100% 국가 보장', 이 두 가지 간판 공약이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선거가 급하다보니 공약이 졸속으로 제시된 데에 따른 예정된 수순이기도 하고 복지 정책이 새 정부 국정운영의 중심 축으로 자리잡는 것이 불편한 일부 언론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 때문이기도 하다. 당선인 주변에 뚝심있는 '복지 전도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박 당선인에게 돌아간다. 복지 정책에 대한 체계화된 이해와 그에 따른 실천 의지가 과연 있느냐는 물음이다. 시대적 화두인 복지 문제가 인수위 단계에서부터 축소·왜곡 조짐을 보이면서 박근혜 정부에 대한 기대감도 식어간다. 박 당선인이 이런 안팎의 저항을 견뎌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라고 했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전편에 이어 4대 중증질환 치료비 국가 보장 공약의 속내를 살펴본다. 편집자

설 나흘 전인 지난 6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짤막한 보도자료를 냈다. 내용은 "4대 중증질환 관련 공약 수정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현재 인수위는 공약 취지에 맞게 서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드리는 4대 중증 질환 공약 이행 계획을 수립 중이다"는 것이 전부였다.

인수위가 언급한 '공약 수정 보도'란 언론에서 크게 다뤄진 여권 고위관계자의 발언을 지칭한다. 이날 언론들은 '인수위가 2016년까지 4대 중증질환 건강보험 혜택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되 본인부담금제는 현행대로 유지하며,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 간병비는 보험 혜택을 주지 않기로 했다'는 거의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때문에 인수위의 보도자료는 이같은 보도 내용을 부인하는 것으로 비쳤다. 마침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도 "인수위에서 그같은 결정을 내린 바가 없음을 공식 확인한다"며 보도를 부인한 다음이었다.

그러나 2시간 후, 인수위는 보도자료를 수정해 다시 발송한다. 인수위는 "'4대 중증질환 전액 국가부담' 공약에는 당연히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가 포함되지 않는 것"이라며 "공약의 취지는 질병치료에 꼭 필요한 비급여 항목을 급여로 보장하는데 있으며, 필수적 의료서비스 외 환자의 선택에 의한 부분은 보험급여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본인부담금에 대해서도 "(건강보험) 급여항목에 적용되는 법정본인부담금 제도는 합리적 의료이용을 위한 장치로 보장성 확대와는 별개 사안"이라고 선을 그었다. 부담금 제도를 유지하겠다는 얘기다. 결국 보도 내용을 시인한 것이다.

ⓒ연합뉴스

인수위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 부분은 단지 '공약 수정이 아니다'라는 뜻이었던 셈이다. 왜? 원래 공약이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인수위는 "당선인도 보도자료와 언론 답변 등을 통해 이 점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며 대선 전날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회가 보낸 보도자료를 발췌해 첨부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시 보도자료나 언론사의 정책질의답변, 당선인의 후보 시절 유세 연설 내용과 TV 방송연설, 야당 후보와의 TV토론 등에서 나온 발언들이 일반 유권자들에게 과연 그렇게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었을까?

4대 중증질환 관련, 박 당선인의 공약집 내용 및 발언 내용

△ 4대 중증질환(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성질환)에 대해 총 진료비(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비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를 모두 포함)를 건강보험으로 급여 추진. 현재 75% 수준인 4대 증증질환의 보장률(비급여부문 포함)을 (2013년 85%, 2014년 90%, 2015년 95%, 2016년 100%)로 확대 (박근혜 대선후보 공약집, 2012.12.10.)

△ 후보는 간병비가 진료비에 포함되지 않음을 명확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음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음. 간병비는 개인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며, 이는 진료비나 급여, 비급여 항목에 포함되지 않음. 다만, 비급여 항목인 선택진료, 상급병실료와 간병비와 같은 환자의 부담이 큰 항목에 대해 재원이 마련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단계적으로 건강보험에 적용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분명히 밝힘. (박근혜 대선후보 보도자료, 2012.12.18.)

△문재인 : 간병비는 보험 대상이 되나?박근혜 : 치료비에 전부 해당이 되니까 그런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문재인 : 지난번에는 기본급여는 해당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박근혜 : 왜요? 비급여를 커버해서 거기에 대해 100% 책임진다고 했다.문재인 : 그런 간병비, 선택진료비를 다 보험급여로 전환하는 데에도 1조5000억으로 충당(가능)하나?박근혜 : 네.문재인 : 어떻게 충원하나, 암 질환만 갖고도 1조5000억인데?박근혜 : 암 질환만 1조5000억 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3차 대선후보TV토론, 2012.12.16) △ 암이나 중풍 같은 4대 중증질환에 대해서는 100% 건강보험을 적용하게 하여 돈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거나, 병에 걸리면 가정경제가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만들겠다. (박근혜 대선후보 서울 코엑스 유세 연설, 2012.12.15.) △ 병원비 때문에 가장 경제가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암과 같은 4대 중증 질환은 100% 건강보험이 책임을 지도록 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박근혜 대선후보 서울 마천시장 유세 연설, 2012.12.7.)이같은 박 당선인의 발언을 '현재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주사비 등에 한해 건강보험으로 보장하되, 선택진료비와 간병비, 4인 이하 병실료 등은 지금처럼 알아서 각자 부담해야 하고, 본인부담금도 유지된다'라고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지는 의문이다.

'4대 중증질환 공약'의 현주소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 등 이른바 '3대 비급여' 항목이 중요한 것은 중증환자 발생시 가계에서 차지하는 부담이 가장 큰 항목이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운영위원인 김종명 내과의사는 지난 4일 (프레시안) 기고에서(☞바로보기) "암질환과 희귀난치성 질환의 법정본인부담률은 현재도 5~10% 정도에 불과하지만, 암질환의 보장률은 현재 70.4%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는) 높은 비급여 진료비 비중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건강보험공단의 진료비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암질환의 비급여진료비 항목 비중은 선택진료비 34.6%, 병실료 14.4%, 치료재료비 11.4%, 처치수술료 10.4%, 주사료 8.3%, 초음파 6.6% 등이다.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드는 암 진료비 가운데 본인 부담분이 30%나 되고, 그 가운데 절반을 선택진료비와 병실료가 차지하는 것이다. 한 달200만 원 수준인 간병비는 아예 비급여진료비에서도 빠져 있는 비보험 비용이다.

암을 포함한 '4대 중증질환'으로 넓혀 봐도 비슷하거나 더 나쁜 형편이다. 4대 중증질환 전체의 건보 보장률은 2010년 기준 71.4%(2009년 67.8%)다. 병종별 보장률은 심장질환 69.2%, 뇌혈관질환 66.1%, 희귀난치성질환 74.6% 등이다. 이들 질환의 비급여진료비 가운데 선택진료비와 병실료 비중을 보면 심장질환 환자의 경우 선택진료비가 41.4%, 병실료가 10.4%로 나타나 암과 마찬가지로 50%를 넘었고, 뇌질환의 경우 각각 33.1%-12.2%(선택진료비-병실료), 희귀난치성질환은 28.1%-14.2%였다.

이 때문에 김종명 운영위원은 "(선택진료비, 병실료, 간병비 등) '3대 핵심 비급여'를 제외하겠다는 것은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약속에서 약간 후퇴하는 정도가 아니다. 사실상 공약 폐기에 가깝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예비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4대 중증질환 관련 공약 실천 방안이란 뭘까? 일부 언론에 따르면 현재 비급여 진료비로 돼 있는 치료재료대, 검사료, 주사료, 고가 표적항암치료제 등의 약제비와 같은 일부 항목을 보장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현행 200~400만 원(소득하위 50%는 200만 원, 50~80%는 300만 원, 상위20%는 400만 원)인 건강보험 본인부담금 상한액의 경우 최소 50만 원~최대 500만 원으로 구간을 조정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과 마찬가지로 소득 수준에 따라 더 가난한 사람이 더 적게 부담하는 구조다.

이 방안대로라면 환자 부담은 얼마나 경감할까? 복지 분야 전문가로 꼽히는 김연명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부)는 7일 문화방송(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이 부분에 대해 "선택진료비나 상급병실료를 빼고 나머지 모두(식대, 주사료, 처치 및 수술료, 검사료, 치료재료대, MRI, 초음파, 기타)를 급여화해도 (의료비 보장률이) 현재의 75%에서 80% 정도(로 높아지는) 선이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5개 의료단체들의 연대체인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도 "3대 비급여가 빠진 '전액국가보장' 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며 "대부분의 중증질환 환자들이 빈곤층으로 추락하며 남은 재산을 팔아 의료비를 대게 되는 이유는 3대 비급여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박 당선인의 말 바꾸기는 예견된 일?

하지만 박 당선인의 이러한 '말 바꾸기'는 이미 예견된 일이라는 지적이다. 일부에서는 4대 중증질환 100% 무료 공약에서 3대 비급여 부분이 빠진 것을 두고 대폭 선회한 후퇴가 아니라 합리적 선택이라고 평가한다. 공약을 그대로 추진할 경우 막대한 돈이 들지만 이에 대한 대비는 전무했다는 게 이유다.

건강보험에 대한 재정부담액이 2010년 기준으로 6조3000억 원에 이르는데, 4대 중증질환을 100% 보장하려면, 지금보다 국가부담이 50% 가량 늘어나야 한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건강보험료 인상은 없음을 누차 강조했다. 복지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재정마련임에도 이에 대한 해법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셈이다.

더구나 이 공약을 진행하기 위한 예산 계획도 미흡했다. 실제 지난 달 1일 통과된 2013년 예산안에는 '4대 중증질환 국가부담' 관련 예산은 반영되지 않았다. 박 당선인 계획대로라면 4대 중증질환을 위해 올해 최소 8400억 원의 비용이 들어가지만 이에 대한 예산 책정은 없었다.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정책은 수정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의지가 없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다.

이번 공약 수정으로 박 당선인 복지정책에 '빨간불'이 켜진 게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박 당선인의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정책은 큰 시각에서 '무상의료'가 아닌 '선별의료'다. 특정 질병에 한해 100% 보장을 해주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총 진료비(비급여 포함)가 500만 원 이상인 고액 진료비 환자 중 45%가 일반 질환 환자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55%가 중증질환을 앓지 않는 환자인 셈이다.

박 당선인의 공약은 이들 55%를 배제한 공약인 셈이다. 참고로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제시한 100만 원 상한제 공약은 질병에 상관없이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데 방점을 찍고 있기에 무상의료에 거의 접근했다고 평가됐다.

ⓒ연합뉴스

사라진 복지국가로 가는 교두보

그간 무상의료를 주장해온 전문가들은 박 당선인의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공약이 마뜩잖으나 첫 술에 배가 찰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김종명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은 "아쉽긴 했으나 3대 비급여 부분을 급여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은 무상의료로 가는 교두보로서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박 당선인의 공약을 평가했다.

하지만 비급여 부분이 빠지면서 중간단계는 사실상 물 건너 간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건강보험가입자포럼은 성명서을 통해 "4대 중증 질환처럼 특정질환 중심의 보장성 강화는 보편을 원칙으로 하는 건강보험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형평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질환과의 보장률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그렇게 한계가 있는 공약이지만 그럼에도 의료비 부담의 주범인 3대 비급여를 급여로 전환하고 중증 질환부터 단계적 실현방안을 제시한다면 지지부진했던 건강보험 보장률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거기다 지금 비중이 큰 3대 비급여 항목을 급여로 전환시키지 않는다면 하루에도 몇 가지씩 새로 만들어지는 비급여 항목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김종명 운영위원은 "수천가지나 되는 비급여 항목은 병원에서 작위적으로 만들고 있다"며 "병원의 돈벌이 수단으로까지 이용되고 있는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건강보험에서 지급하지 않고 환자 본인이 부담하는 비급여 항목은 현재 1~2인실 등 6인 이하 병실료나 특정 의사를 지정해 진료를 받는 선택 진료비를 비롯해 600여 개에 이른다. 김 위원은 "인수위는 여기서 몇 개의 비급여 항목을 급여항목으로 전환시킨다는 계획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3대 비급여 항목을 급여항목으로 개선하지 않는 이상은 병원에서는 지속해서 또 다른 비급여 항목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당선인이 3대 비급여의 급여화를 포기함으로써, 의료 복지로 가는 최소한의 교두보마저 사실상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냉랭한 여론, 임기 내내 발목 잡을 듯

이유야 무엇이든 3대 비급여의 급여화 공약 포기는 앞으로 박근혜 정부 임기 내내 발목을 잡을 듯하다. 이명박 정부도 5년 임기 내내 반값 등록금 거짓말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더구나 '약속은 지킨다'을 강조해온 박 당선인이기에 그 여파는 이전 정부보다 더 심하면 심하지 덜 하진 않을 거라는 분석이다.

8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따르면 인수위는 설 연휴(9~11일) 이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주재하는 분과별 국정 과제 토론회를 마무리하고 이달 중순께 100개 안팎의 국정 과제를 발표할 예정이다. 국정 과제에는 그동안 박 당선인이 국정 과제 토론회에서 강조했던 복지와 직접 연관된 정책들이 대부분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 당선인의 복지 관련 핵심공약인 기초연금과 4대 중증질환 공약이 원상 회복되지 못할 경우 새 정부는 여론의 상당한 질타를 감수하고 출범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곽재훈 기자,허환주 기자

[‘박근혜 복지’ 어디로]“희귀병 1년도 안돼 빚더미 올랐어요”


이글은 경향신문 2013-02-11일자 기사 '[‘박근혜 복지’ 어디로]“희귀병 1년도 안돼 빚더미 올랐어요”'를 퍼왔습니다.

ㆍ중증질환 치료 안정숙씨의 경우ㆍ남편 김씨 “월급 200만원에 간병비는 300만원, 결국 직장 그만둬”

지난해 12월 어느 날이었다.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는 안정숙씨(45·여)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TV를 타고 그의 귀로 전해지는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18대 대선 후보의 말은 그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박 후보는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 “암·심장·뇌혈관·희귀난치성 질환 등 4대 중증질환은 국가가 100%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안씨는 박 후보 공약집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살길이 열리겠어. 세 아이와 함께 살 수 있겠어….”

안씨의 염원은 이뤄졌다. 박 후보는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당선인’이 된 박 후보는 말을 바꿨다. “국가 지원 대상에 선택진료비(특진비), 상급병실(1~4인실)료, 간병비 등 ‘3대 비급여’ 항목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난 8일 충북 청주의 한 병원에서 만난 안씨 부부는 절망했다. “3대 비급여 부문이 지원되지 않는다면 우리 같은 중증질환 환자들에게는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난 8일 청주의 재활병원에 입원해 있는 안정숙씨(왼쪽)의 손을 남편 김재식씨가 주물러 주고 있다. | 박민규 기자

2008년 5월. 딸의 생일날 안씨는 목 부분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동네 병원 의사는 “물리치료를 받으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통증은 날로 심해졌다. 대학병원을 거쳐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4개월 만에 밝혀진 병명은 다발성경화증.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희귀난치병으로 면역체계가 신경을 파괴해 근육과 장기를 마비시키는 질환이다.

“수시로 사지가 마비돼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던 날이 많았습니다. 시신경이 파괴돼 이미 오른쪽 눈은 실명 상태에 가깝습니다. 우울증까지 겹쳐 자녀들이 죽는 환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10여가지 합병증이 겹친 결과였다. 의사는 내성이 생길 것을 우려해 “진통제 양을 줄이라”고 권했다. 하지만 안씨는 “마치 감전되는 듯한 고통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고통 때문에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수십번씩 되뇌었습니다.”

옆에서 안씨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 김재식씨(53)는 “ ‘아내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수 있겠지’라며 자살할 만한 곳을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25년 전 직장 선후배로 만나 결혼했다. 안씨에게 병이 찾아오기 전까지 가진 건 많지 않아도 이 가정에는 웃음이 늘 넘쳤다. 하지만 안씨가 병을 얻은 지 1년도 안돼 이 가정은 ‘빚쟁이’가 됐다. 안씨는 치료비로 쓴 1000만원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집을 팔아 마련한 2000만원과 형제와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준 돈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김씨는 “일산의 한 병원에 3개월간 머물면서 200만원짜리 항암주사를 5번 맞았고, 자기공명영상(MRI), 컴퓨터단층촬영(CT), 유발전이검사, 혈장교환, 세포추출 등 30만~50만원에 달하는 각종 검사를 15차례 했다”고 말했다. 검사비는 모두 건강보험이 지원되지 않았다.

안씨는 “하루 자고 나면 300만원, 또 하루 자고 나면 500만원꼴로 치료비가 나갔다”며 “돈이 손으로 쥐어지지 않는 모래처럼 빠져나가 5000만원 쓰는 게 순식간이었다”고 말했다. 치료비 때문에 유망주였던 막내딸은 양궁을, 둘째아들은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남편 김씨는 2009년에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 간병인 비용을 부담할 수 없었다. 대소변까지 돌봐줘야 하는 중증환자의 하루 간병인 비용은 10만원. 김씨는 “월급 200만원인 내가 300만원짜리 간병인을 둘 수 없어 일을 그만두게 됐다”고 말했다.

안씨는 희귀난치병 질환자로 등록돼 외형상으로는 진료비의 95%를 건강보험에서 지원받는다. 하지만 건강보험 지원에는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 등 3대 비급여 항목은 제외된다. 김씨는 “해당 분야의 전문 의사에게서 진료를 받는 선택진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환자 입장에서 마다할 수 없다”며 말이 ‘선택’이지 무엇을 선택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상급병실료도 마찬가지로 사실상 선택사항이 아니다. 안씨는 “병원에서 비어 있는 5~6인실이 없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2인실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안씨 가족은 현재 매달 국가에서 지원받는 간병인비 30만원과 장애인 수당 15만원이 수입의 전부다. 여기에 환우회나 지인들이 가끔씩 도와주는 것에 매달리고 있다. 안씨는 지금은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동네 재활병원의 8인 병실에 머물고 있지만 언제 ‘항암주사를 맞아야 된다’는 말을 들어야 할지 두렵다. 주사투여 시기를 놓치면 신체장기는 영구 마비가 된다. 200만원짜리 항암주사를 맞는 것이 예정되면 남편은 며칠간 돈 빌릴 만한 곳을 찾아다녀야 한다.

안씨 부부는 두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돼 병이 완치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 당선인의 공약이 실현되는 것이다. 안씨 부부는 “오래전에 치료비는 이미 우리가 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게 됐다”고 했다.

곽희양 기자 huiyang@kyunghyang.com

[‘박근혜 복지’ 어디로](1) 4대 중증·기초연금 공약 수정인가


이글은 경향신문 2013-02-11일자 기사 '[‘박근혜 복지’ 어디로](1) 4대 중증·기초연금 공약 수정인가'를 퍼왔습니다.

ㆍ돈 때문에 이중고 겪는 ‘4대 중증질환’ 환자들
ㆍ“자가골수이식 끝에 기증자 찾았지만 세번째라 건보적용 안돼 포기”

한국에서 가족 중 한 명이 암·심장·뇌혈관·희귀난치성질환 등 4대 중증질환에 걸린다는 것은 가정이 한순간에 몰락할 수도 있다는 신호다. 대부분의 환자 가정은 건강보험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비싼 검사비와 약값, 선택진료비(특진비), 상급병실(1~4인실)료, 간병료로 1~2년 사이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써야 한다. 특히 가장이 병에 걸리면 주수입원마저 끊겨 ‘가계의 몰락’은 가속화된다.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골수종’으로 4년 째 투병하고 있는 김규원씨가 지난 8일 서울 중계동 집에서 치료과정과 자신이 먹는 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 ‘다발성골수종’ 앓는 김규원씨
매일 먹는 약 내성 생겨 비급여 처방약으로 변경
약값 수십배씩 더 들어

김규원씨(44·서울 노원구)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골수종’으로 4년째 투병 중이다. 온몸의 뼈에 통증이 오는 이 병은 지속적인 치료를 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른다. 김씨는 자신의 뼈를 녹이는 혈액 속의 나쁜 단백질인 ‘M-단백’ 수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많은 양의항암제를 투여한 후 미리 저장해 놓은 환자의 골수를 재주입하는 자가골수이식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병은 재발했다. 의사는 “타인의 골수를 이식하면 효과가 좋다”고 말했다.

지난해 봄 기적적으로 유전자형이 일치하는 골수 기증자가 나타났다. 수술비가 2000여만원이나 됐지만 김씨는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수술 직전 김씨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 수술비가 6000만원이라는 말이었다. 담당의사는 “골수이식은 평생 2차례만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어, 세 번째 수술은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는 결국 수술을 포기했다. 김씨는 “보통사람이 통장에 6000만원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김씨는 아프기 전만 해도 빔 프로젝터 판매·설치를 하는 개인사업자였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발병한 다발성 골수종은 그의 현재와 미래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투병 후 일을 할 수 없는 김씨 가족은 미리 들어둔 민간보험에서 매달 입원보험금명목으로 나오는 100여만원으로 생활한다. 통장은 수천만원에 달하는 치료비 때문에 마이너스로 돌아선 지 오래다. 이제 그가 가진 재산은 서울 노원구의 집 한 채가 전부다. 

암환자는 병원비의 5%만 내면 된다고 하지만 건강보험에서 제외되는 항목이 너무 많다. 

두 차례 자가골수이식 수술을 받았을 때도 특진비에 비급여 약품 값으로 적지 않은 돈을 썼다. 김씨가 현재 매일 먹는 약인 ‘탈리도마이드’의 한 달 치 약값은 2만7000원이다. 그러나 치료 목적이 아닌 유지 목적으로 먹으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약값이 60만원으로 뛴다. 김씨는 2010년 말부터 1년여 동안 이 약을 먹어도 M-단백 수치가 떨어지지 않아 ‘유지 목적’이 됐다는 이유로 약값을 한 달에 60만원씩 냈다.

김씨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했다. 탈리도마이드는 언젠가 내성이 생기는 약이다. 그때는 ‘레블리미드’라는 약을 먹어야 하는데건강보험공단이 약값이 너무 비싸다며 건보 적용을 거부했다. 이 약은 한 달 치 값이 500만원에 달한다.

▲ ‘결절성경화증’ 앓는 조수영양
작년 뇌 결절 제거 수술… 남은 치료 방법은 신약뿐
월 280만원 감당못해 포기

충남 금산군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생 조수영양(12·정신지체1급)은 소아희귀질환인 ‘결절성경화증’을 앓고 있다. 피부나 중추신경계 등 다양한 신체 부위에 결절이 발생하는 이 병을 앓는 상당수 환자들은 정신지체와 뇌전증(간질) 증상을 보이고 피부에 병변(피지선종이나 흰색 반점)이 나타난다. 결절이 뇌에 발생해 뇌척수액의 흐름을 막거나 뇌압을 상승시키면 사망으로도 이어진다. 

수영양은 지난해 10월 오른쪽 뇌의 결절을 제거하기 위한 수술을 받았다. 왼쪽 뇌와 얼굴 등 몸 곳곳에 아직도 결절이 남아있지만 더 이상의 수술은 불가능한 상태다. 결절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최근 새로 개발된 신약을 쓰는 것뿐이다. 

어머니 박민옥씨(44)는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약값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 신약을 투약하기 위해서는 매월 최대 280만원까지 든다. 하지만 박씨가 미용실을 하며 버는 돈과 남편(44)이 농사를 지으며 버는 돈을 합해봐야 월수입이 100만원에 불과, 투약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박씨 부부가 요즘 수영양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월 5만~6만원을 들여 뇌전증(간질) 약을 사먹이는 등의 ‘간이 치료’뿐이다. 박씨는 “비싼 신약 값이 비급여진료비에 해당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치료는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특진비’이다. 난치병은 특성상 병원에서 특진을 많이 받게 되지만 모두 비급여항목으로 정해져 있다. 박씨는 “지난해 수술비 2000만원 중 자부담 비용 900만원은 대부분 특진비와 1인 병실 비용이었다”며 “특진비 등은 국가가 책임을 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씨는 “특별학급에 다니는 수영이가 한번 들은 노래를 바로 따라서 흥얼거릴 정도로 음감이 좋고,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해 뮤지컬 배우로 키우고 싶은데 몸속 곳곳에서 자라고 있는 결절이 너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윤희일·남지원 기자 yhi@kyunghyang.com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박근혜, 노인들 상대로 '먹튀' 하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3-02-10일자 기사 '박근혜, 노인들 상대로 '먹튀' 하나?'를 퍼왔습니다.
[시험대 오른 박근혜 복지·上] 누더기 된 '어르신 20만 원', 배경은?

복지 공약은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선인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2010년 무상급식 논란 이후 야권의 이슈였던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자신의 이슈로 끌어들이는 탁월한 정치 감각을 선보였다.


그러나 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박근혜 당선인의 복지 관련 공약이 휘청거린다. 특히 표심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기초노령연금 2배 인상'과 '4대 중증질환 치료비 100% 국가 보장', 이 두 가지 간판 공약이 모두 위기에 처했다. 선거가 급하다보니 공약이 졸속으로 제시된 데 따른 예정된 수순이기도 하고, 복지 정책이 국정 운영의 중심 축으로 자리잡는 것이 불편한 일부 언론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 때문이기도 하다. 당선인 주변에 뚝심있는 '복지 전도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박 당선인에게 돌아간다. 복지 정책에 대한 체계화된 이해와 그에 따른 실천 의지가 과연 있느냐는 물음이다. 시대적 화두인 복지 문제가 인수위원회 단계에서부터 축소·왜곡 조짐을 보이면서 박근혜 정부에 대한 기대감도 식어간다.


박 당선인이 이런 안팎의 저항을 견뎌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라고 했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먼저 박 당선인의 핵심 복지 공약이었던 기초노령연금의 '퇴행' 과정부터 뜯어봤다. (편집자)


"국민께 드린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대선 기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거의 모든 유세 현장에서 반복했던 말이다. 실로 그는 '약속의 아이콘'이었다. 정치인생 15년 동안 늘 그를 따라붙던 '약속의 정치인'이란 수식어도 낯설지 않다.


그런데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겠다'던 그가, 불과 한 달 만에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대표적인 것이 대선 기간 "2배로 인상하겠다"고 약속한 기초노령연금이다.


기초노령연금, 공약 발표부터 '말 바꾸기' 까지


"기초노령연금은 급여 수준(2012년 9만4600원)이 너무 낮아 일생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애쓰신 어르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지 못하고 있음. (…) 기초연금은 도입 즉시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과 중증 장애인에게 현재의 2배 지급."


박근혜 당선인의 공약집에 담긴 기초노령연금 인상 내용이다. 현행 기초노령연금을 보편적 기초연금화해 국민연금과 통합 운영하겠다는 것인데, 핵심은 '모든 어르신'께 지급한다는 것에 있다. 지난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당시만 해도 "보편적 복지는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며 쌍심지를 켜고 야권을 공격했지만, 대선을 앞두고 기초노령연금에 있어선 사실상 '보편적 복지'를 선언한 셈이다.

▲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지난해 11월5일 서울 용산구 대한노인회를 방문한 박근혜 당선인. 박 당선인은 이 자리에서 "기초노령연금 20만 원"을 직접 약속했다. ⓒ연합뉴스

실제 박 당선인이 선거를 직접 도왔던 그해 서울시장 보궐선거만 해도, 당시 가장 첨예한 이슈는 무상급식을 둘러싼 '보편·선별 복지' 논란이었다. 여야 모두가 최대 화두였던 복지의 '적임자'를 자청하며 날카로운 입장 차를 보였다. 선별 복지를 강조해온 박 당선인도 새누리당과 입장이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 당선인이 비대위원장을 맡아 진두지휘했던 지난 총선에서도 보편적 복지 수준의 기초노령연금은 새누리당 공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역시 야권의 보편 복지 공약을 '포퓰리즘'으로 공격하던 때라, 자칫 역공을 당할 수 있음을 박 당선인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대선이 다가오면서 새누리당은 대대적인 '탈색' 작업을 벌인다. 기존의 '선별 복지'란 표현 대신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웠다. 복지를 차별적으로 제공하는 이미지를 벗고,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연상케 하는 용어를 사용한 셈이다.

600만에 이르는 노인 표를 사로잡을 공약도 제시됐다. 박근혜 당선인은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대한노인회를 방문해 "기초연금 20만 원"을 직접 언급했다.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을 불과 열흘 앞두고 같은 장소를 찾아 "기초노령연금을 20만 원까지 드릴 수 있다"고 약속했던 것과 똑같다.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곧바로 폐기한 공약임을 박 당선인이 모를 리 없었겠지만, 지킬 수 있는지 여부는 당시로선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야권 단일화가 임박한 시기였다보니, 박 당선인 입장에서도 한 표가 급한 상황이었다.

실제 지난 대선 기간 내내 복지에 대한 박 당선인의 '진정성 증명'은 실로 눈물겨운 수준이었다.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라던 그는 공약의 대다수를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채우며 야권의 '브랜드'였던 복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박 당선인의 핵심 측근조차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기자들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성장을 통해 나라를 일으켰다면, 박근혜 후보는 성장의 그늘을 복지로 채워 아버지의 꿈을 완성하고 싶어한다"고 설득에 나설 정도였다.

그런데 대선 이후, 또 다시 말이 바뀌었다. 박 당선인이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에게 던진 유명한 표현에 빌자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대선 전엔 "모든 노인에 20만 원", 이제 와 "모든 노인은 아니고…"

우선 '모든 어르신께'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기초노령연금부터 말이 바뀌어 '차등 지급'으로 결론이 났다. 새누리당 일각의 거센 공약 수정론에 "(공약 수정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라며 의지를 보이던 박근혜 당선인이 사실상 '백기'를 든 셈이다.

2013년 현재 기초노령연금은 국민연금 가입자의 월 평균 소득(A값)의 5%인 9만7000원으로, 만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소득 하위 70%(약 300만 명)에게만 지급된다. 박 당선인은 이 연금액을 2배(A값의 10%)로 올려 월 20만 원을 주겠다고 공약했었다. 실천 방향으론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적으로 운영하겠다"는 방침만 밝혔다.

그러나 당선 직후 말이 바뀌었다. 조짐은 박근혜 선거 캠프의 민생경제대응단장을 맡았던 나성린 당 정책위부의장이 "대선 공약에서 기초노령연금을 2013년부터 65세 이상 노인 전부에게 20만 원 씩 지급한다고 한 적이 없다"고 말을 바꿀 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박 당선인도 지난달 28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고용·복지분과 토론회에서 "국민연금에 가입되지 않아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분들에게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깔아주고, 국민연금에 가입돼 있는 분들은 현행 국민연금 제도의 기초 부분(균등 부분)이 20만 원이 안 되는 부분만큼 재정으로 채워주는 방식"으로 기초연금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20만 원'이란 금액은 맞추더라도, 국민연금 가입자에겐 차등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현재의 2배를 주겠다"던 약속은 폐기되고, 빈곤층에게만 집중되는 '선별적 복지' 성격으로 후퇴한 것이다.

현행 국민연금은 가입자 개인의 소득에 연동되는 '소득비례 부분'과 가입자 전체의 평균 소득에 연동되는 '균등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박 당선인이 언급한 '기초 부분'은 여기서 균등 부분을 지칭한 것으로, 사실상 국민연금의 균등 부분을 기초연금으로 전환하겠다는 말이다. 결국 국민연금에 미가입한 빈곤층 노인에게만 기초연금 20만 원이 온전히 제공되고, 국민연금 가입자에겐 균등 부분 몫을 빼고 지급한다는 얘기다. 국민연금 가입자의 '형평성 논란'이 나오는 이유다.

논란이 이어지자 인수위는 대상자를 4개 그룹(△국민연금 미가입 한 소득 하위 70% 그룹 △국민연금 가입한 소득 하위 70% △국민연금 가입한 소득 상위 30% 그룹 △국민연금 미가입한 소득 상위 30% 그룹)으로 나눠 차등 지급하는 방향을 논의하고 있지만, '말 바꾸기'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애초 기초연금에 필요한 재원을 국민연금에서 빼서 쓴다고 했다가 "조삼모사(朝三暮四)"란 비판이 일자 "세금으로 주겠다"고 말을 바꾸며 급한 불은 껐지만, 국민연금에서 일부를 '충당'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은 셈이다.

누가 박근혜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나

대선일부터 공약 수정까지 고작 한 달 남짓, 그 사이 박 당선인을 향한 압박도 많았다. 먼저 '아군(我軍)'의 공격이 시작됐다.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은 연일 기사와 사설을 통해 공약 수정 필요성을 언급했고, 기초노령연금은 언제나 '수정 1순위'에 꼽혔다.

박 당선인의 조력자였던 새누리당에서도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당 지도부와 중진 의원이 총대를 메고 연일 난타전을 벌였다. 심재철 최고위원은 공식 회의석상에서 "이건희 회장에게도 노령연금을 주는 것이 올바르냐. 선별 복지의 대원칙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당선인에게 "버릴 건 버리고 미룰 건 미루는 냉철한 용기"를 주문했고, 선거 당시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정몽준 전 대표 역시 "공약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우선 순위를 정해 추진해야 한다"며 '속도 조절론'을 제기했다. '증세 없는 복지'를 내세운 박근혜 당선인이 보수 진영의 저항에 먼저 부딪힌 셈이다.

관료 집단의 '몽니'도 한 몫 했다. 여러 정부 부처가 인수위 업무보고 과정에서 재원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고, 이에 지난달 12일 박선규 대변인이 나서 "복지 정책에 대해 특정 부처가 '재원상 어렵다'고 하는 기사가 나오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 (각 부처가) 과거 관행에 기대 문제를 유지해가려는 부분에 대해 당선인이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하기도 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이미 공약을 뱉어 놓은 박 당선인과 새누리당, 정부가 '공약 폐기'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는 것이다.

朴 당선인 측, 이제 와 "오해였다"는데…

상황이 이런데도 새누리당과 인수위는 '말 바꾸기 논란'이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애초에 '기초노령연금 20만 원'을 공약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공약에서 선택진료비·상급병실료·간병비를 지원 대상에서 삭제한 게 "공약을 바꾼 게 아니라 처음부터 공약이 아니었다"고 항변한 논리와 유사하다. (4대 중증질환 관련 자세한 내용은 2편에서 소개)

▲ 노년유니온 등 노인 및 복지단체 회원들이 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인수위원회 앞에서 최근 줄줄이 수정된 박근혜 당선인의 기초연금 및 4대 중증질환 공약 이행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논란이 커지자 나성린 부의장은 지난달 16일 기자회견을 자처해 "공약 '말 바꾸기 비판'은 대선 공약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만 원으로 책정된 것은 '기초노령연금'이 아니라 국민연금과 통합된 '기초연금'이라는 것이다. 그는 "새누리당이 제시한 대선 공약은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에 편입, 기초연금화해서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항변'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나 부의장의 주장과 달리, 박 당선인은 지난해 12월 TV토론에서 직접 '기초노령연금' 20만 원을 못 박았었다.

"기초노령연금을 보편적인 연금으로 확대해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에게 내년(2013년)부터 20만 원을 드리려고 한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2차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나 부의장은 이런 지적에 대해 "녹화해 놓은 것이 있나…"라고 말끝을 흐려야만 했다.

공약 이행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제시없이 '슬로건' 수준의 공약을 내놓다보니, '말 바꾸기 논란'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문제가 된 기초노령연금만 해도 대선 공약집엔 단 5줄로 설명돼 있다. 새누리당은 '공약을 수정한 게 아니다'라고 항변하지만, 박 당선인이 선거 유세마다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께 20만 원!"을 되풀이했으니, '다른 해석의 여지'는 당선인 쪽에서 제공한 셈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박 당선인 쪽에선 계속 '오해'라는 말만 반복한다. 대선 후 "모든 노인에게 20만 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공약을 오해한 것"이고 해명하면서도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선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박 당선인 주변 인사들도, 인수위원들도 굳게 입을 다문 채 같은 말만 되풀이 한다. '오해'. 지난 5년 이명박 정부를 겪은 국민들에겐 꽤 '익숙한' 데자뷔다.

'국민 신뢰'와 '돈 끌어오기'…갈림길 선 박근혜

이제 박 당선인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다. "국민이 오해했다"며 기초연금 차등 지원을 강행하느냐, 아니면 '국민이 이해한대로' 모든 노인에게 현행보다 2배 씩 인상해 지급하느냐다.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는 박 당선인에게 두 가지 방안 모두 위험 부담이 크다. 전자는 국민의 신뢰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후자는 재원 마련 방안이 녹록치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번 논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기초연금 차등 지급에 대한 국민적 지탄은 단순히 '말 바꾸기'에 대한 실망 때문만은 아니다. '복지'를 선거 의제로 내걸었음에도, 보편적 복지 등 전향적인 복지 정책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탓도 크다.

박 당선인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시대정신"이라고 할 정도로 대선 과정에서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이에 많은 복지 전문가들은 "기초연금을 보편적 지급 형태가 아닌 빈곤노인 구제를 위한 '공적 부조' 성격으로 설명하는 것은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처사"라고 말한다. '국민이 오해한'의 방안인 '보편적 기초 연금'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김보영 영남대학교 지역및복지행정학과 교수는 "이번 선거는 우리 사회가 갖는 문제들을 성장이 아닌 분배의 문제로 풀자는 합의가 최초로 이뤄진 선거"라며 "보편급여 방식이 아닌 선별급여 방식으로 입장을 선회하는 것은 시대정신과 맞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박 당선인 공약집에서 그나마 구체적으로 나온 부분이 보육, 노인 소득보장, 의료 등"이라며 "구체적일수록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일 텐데 그렇다면 '모든 노인에게 지급한다'고 말한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도리이며, 민주주의 과정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박근혜 당선인의 핵심 복지 공약인 기초노령연금 2배 인상이 갈림길에 섰다. 문제의 핵심은 '재원 마련'이다. ⓒ연합뉴스

오건호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도 정치적 위험부담 측면에서 "공약을 바꾸는 것보다 재정 확충 방안을 강구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공약 수정' 방안에 대해 "최근 발표(차등지급 방안)대로 밀고 나간다면, 출범도 하기 전에 국민에게 '실패한 정부'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5년간 국정을 이끄는 데 매우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증세, 가장 현실적 방안" VS "증세보다 예산 조정이 먼저"


기초연금을 공공부조 성격이 아닌 보편 지급 형태로 간다면, 이제 관건은 재원 조달 방식이다.


한 때 인수위에선 기초연금 재원을 연금기금과 재정을 통합해 지급하는 방안을 논의했었다. 그러자 기존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역차별 문제'를 제기하며 거세게 반발했고, 이에 박 당선인은 지난달 28일 "모든 재원은 세금으로 마련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민연금을 활용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에 쐐기를 박은 것.


그러나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박 당선인은 조세를 통한 재원 조달을 약속하는 동시에 "세금을 새로 걷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씀씀이를 줄이고 비과세 감면 조정 등의 노력으로 재정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증세 없는 기초연금'을 공언한 셈이다.


박 당선인의 이 같은 구상에 대해 오건호 연구실장은 "현실적으로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학계에 따르면 기초노령연금 지급액은 현행대로 운영된다고 가정하더라도 2015년 7조2500억 원, 2030년 30조72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두 배로 확대할 경우 정부의 재정 부담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오 연구실장은 증세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세계적으로 낮은 편이기 때문에, 증세하자는 주장은 조세부담률을 정상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지난해 말 기준 19.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조세부담률(25%)의 80% 수준이다. 다만 그는 "국민적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여러 사실을 토대로 '대국민 담화 발표' 등의 증세 설득 작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구체적인 증세 방안에 대해선 "시민사회계에서 법인세 등 직접세 중심의 증세와 간접세인 부가가치세에 토대를 둔 증세 두 가지 방안을 고민 중"이라면서 "박 당선인도 머잖아 이들 방안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증세론은 위험하다는 주장도 있다. 김 교수는 "새 정부의 실천 의지 자체도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증세 논의부터 나오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국민들 입장에선 '일단 돈부터 내라'는 식으로 들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정부 예산 조정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그는 "증세는 결국 이미 고정된 예산에 추가로 세원을 걷는 것이므로, 단기적 해법이 될 수밖에 없다"며 "경제개발예산 등 과도 책정돼있는 예산을 사회복지 예산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또 "증세는 그 뒤에 논의해도 충분하다"며 "증세를 한다 해도 순차적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나아가 복지 이슈가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만큼 장기적 사회적 합의를 위해 정치권·노동계·학계가 모이는 '다자간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그는 "사회복지 문제는 정치적 해결 과정이 중요하다"면서 "외국에서 이미 운영 중인 '연금위원회' 등을 꾸려 독립적으로 합의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선명수 기자,서어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