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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일 월요일

‘미쓰비시 불매 범국민선언 운동’을 시작하며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9-30일자 기사 '‘미쓰비시 불매 범국민선언 운동’을 시작하며'를 퍼왔습니다.

 
ⓒ민중의소리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25일 오전 광주시의회 기자실에서 전범기업 미쓰비시에 대한 불매운동을 선언하고 있다. 이들은 해방 70여년이 되도록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외면한 미쓰비시와 그 계열사의 니콘 카메라, 미쓰비시 자동차, 기린 맥주 등 제품 불매운동에 나서면서 국민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를 아시나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전범기업 후지코시, 미쓰비시 등에 강제 연행되어 군수공장에 배치돼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온갖 차별과 배고픔에 고통당하고 임금 한 푼 받지 못한 조선의 어린 여학생들을 말합니다.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오인 받아 결혼에도 어려움을 당하고 했다하더라도 나중에 파혼의 아픔을 당한 가난한 여성들을 말합니다.

'일제와 전범기업의 강제 연행, 강제 노동, 임금체불에 피해당하고 희생당한 조선의 미성년 여성 아동'이 바로 조선여자근로정신대입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 패전으로 기울어진 상황에다가 인적, 물적 자원의 고갈로 전쟁 수행이 어려워진 일제와 전범기업들은 조선의 어린 여학생들(당시 12세 ~ 15세)에게 까지 “일본에 가면 돈도 벌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현혹하여 군수공장에 배치합니다.

하루 10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은 어린 여학생들에겐 감당키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온갖 차별과 배고픔은 견디기 어려운 설움이었습니다. 지진에 죽은 어린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여 고국으로 돌아올 땐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고국에서의 삶은 더욱 기구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어렵게 한 결혼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폭언과 폭행, “일본에서 몇 놈이나 상대했느냐?”며 군위안부로 오인하여 결국 파혼에 이르게 된 경우도 많습니다. 이웃들에게 알려 질까봐 몰래 살았던 아픔에 가난까지 겹쳐 한 많은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 이런 고통의 세월에 이미 많은 분들은 돌아가셨고 살아계신 분들도 팔순이 넘은 고령의 할머니들이 되어 있습니다.

일본 제1의 전범기업 미쓰비시를 아시나요?

미쓰비시는 조선인 10만 명을 강제 연행해 간 대표적인 전범기업입니다.탄광, 조선소, 군수공장 등에 배치하여 강제 노동을 시키고 임금 체불한 기업입니다. 

혹시 '군함도'를 아십니까?미쓰비시는 그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일본 최대 군수산업체입니다.전쟁 물자를 생산해 언제든지 평화를 깰 수 있는 침략을 뒷받침하고 있는 기업입니다.일본 정부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침략과 수탈을 시인하지 않고 사죄하지도 않으며 배상도 하지 않는 반인륜 악덕 기업입니다.

미쓰비시와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들로 구성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나고야 지원회)입니다. 이 분들은 26년 전부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미쓰비시와 일본 정부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의 피해자들을 원고로 세워 10년 동안 재판투쟁을 해 왔고 그 뒷바라지를 감당해 왔습니다.

기각, 패소 후에도 끈질긴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3년 동안 '금요행동'을 실천해 왔습니다. 금요행동은 매주 금요일 나고야에서 도쿄(왕복 720Km)까지 올라와 미쓰비시 본사 앞에서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여 왔습니다. 수차례 협박을 받는 위협 속에서도 꾸준히 투쟁해 오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광주에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시민모임)입니다. 너무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광주시민들은 부끄러움과 친일매국원흉 청산이라는 역사적 사명으로 반미쓰비시 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왔습니다.

2009년 3월 결성 후 곧바로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미쓰비시 자동차 광주판매장 앞에서의 208회 동안의 1인 시위도 감당했습니다. 이 투쟁은 결실을 보았습니다. 바로 미쓰비시자동차 광주판매장의 영업 포기와 철수입니다. 또한 10만 명 서명운동을 전개해 13만 5천 명에 이르게 되었고 이 서명용지는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에 전달했습니다. 이런 투쟁의 결과 미쓰비시를 협상장에 끌어내는 해방 후 최초의 일도 해 냈습니다.

나고야 지원회와 시민모임은 '근로정신대 할머니 협상단'을 꾸려 미쓰비시와 16차 본 협상을 추진해 왔습니다. 이 협상을 지원하기 위해 '10만 희망릴레이'를 전개했습니다. 이 또한 목표를 초과 12만 2천 명이 넘는 참여를 이끌어 냈습니다. 

미쓰비시와의 협상은 의미 있는 성과를 냈지만 배상에 대한 미쓰비시의 반역사적이고 오만한 태도에 협상은 결국 결렬에 이르게 됩니다. 미쓰비시는 “피해 할머니들에게 금전적인 직접 보상은 할 수 없다. 일본에 공부하러 온 한국의 유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무관심과 비협조로 일관해 왔다는 것을 밝히는 바입니다.

다시 투쟁을 전개하며 동참을 호소 드립니다

3년 여 기간 동안 미쓰비시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금요행동을 잠정중단 했던 나고야 지원회는 또 다시 금요행동을 재개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시나가와 역엔 나고야 지원회원들의 여론전과 전단지 배포 등 실천이 있습니다. 미쓰비시 본사 앞에서의 항의 시위가 있습니다. 

광주의 시민모임은 '제1의 전범기업 미쓰비시 불매 범국민선언 운동'을 시작합니다.불매운동의 대상은 니콘(nikon) 카메라, 미쓰비시 자동차, 미쓰비시 예초기, 미쓰비시 엘리베이터, 기린맥주입니다.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참여, 실천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또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발주 사업 입창에 원천적으로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 운동, 전범기업과의 계약대금 즉시 유예 촉구, 입국 금지 조치 촉구 등도 전개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뼈 속까지 친일'인 자를 대통령으로 두고 있습니다. 또한 친일과 배신과 반인권 반민주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있는 상황입니다. 분단과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저들 1%를 몰아내지 않는 한 우리 조국의 미래는 여전히 암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조국, 동아시아는 물론 지구촌의 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해서도 전범기업은 물리쳐야 할 대상입니다. 이에 반미쓰비시 불매운동에 적극 동참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역사입니다.

김희용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

2012년 6월 6일 수요일

‘정신대 자매’ 멍에 안고…다시 일본서 외치는 “사죄하라”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6-05일자 기사 '‘정신대 자매’ 멍에 안고…다시 일본서 외치는 “사죄하라”'를 퍼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근로정신대로 강제징용돼 일본 후지코시강재로 끌려간 김정주(오른쪽) 할머니와,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동원됐던 언니 김성주(왼쪽) 할머니가 지난달 31일 서울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일제 강제동원 피해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강제징용 피해 김정주·김성주씨 이야기
점심으로 먹었던 ‘삼각빵’은 금세 허기를 불러왔다. 베어링을 깎는 일을 하던 열네살 소녀는 숙소 옆의 풀을 뜯어 먹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머리카락이 빠졌다. 일본 소녀들이 도시락을 먹는 걸 보며 참 많이 울었다. 신발을 신고 자다가 폭탄이 뚝 떨어지면 살기 위해 뛰었다. 1945년 10월 귀국할 때까지 중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김정주(81·서울 송파구)씨는 1945년 2월 일본 도야마현 후지코시강재공업㈜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전남 순천 남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일본에 간 언니를 볼 수 있다’는 일본인 담임교사의 말에 속아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됐다. 언니 김성주(83·경기도 안양시)씨는 1944년 5월 열다섯살 나이로 근로정신대에 동원돼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항공제작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학교 보내준다더니…
14살 언니는 미쓰비시로언니
볼 수 있단 말에…
12살 동생은 후지코시로

언니 성주씨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여학교에 보내준다’는 일본인 교사의 말에 속아 일본에 건너가 말 못할 중노동에 시달렸다. 임금 한 푼 받지 못했다. 지진 때 넘어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바람에 잘 걷지도 못하게 됐고 선반에 왼손 집게손가락도 잘렸다.
김 할머니 자매의 삶은 일본에서 돌아온 뒤 더욱 처참해졌다. ‘정신대’라는 명칭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았던 탓이다.
19살에 결혼한 동생 정주씨도 ‘정신대’ 이력 때문에 남편과 불화를 겪어야 했고, 서른다섯살 때 아들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 2003년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참가한 것을 안 아들(50)과 손자(고3)에게 진실을 차마 말 못했던 것에 용서를 구했다고 했다. 정주씨는 5일 “원통했다. 어디다 말도 못하고…. 정부도 우리 심정을 알아주지 않았다. 내 가슴의 상처는 억만금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귀국 뒤엔 위안부로 오해
상처 억만금 줘도 안된다
대법원 판결 반갑고 기뻐
8일엔 후지코시 앞서 집회”

김 할머니 자매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과 함께 후지코시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모두 패소했다. 김정주씨 등 23명은 2003년 4월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끝내 2011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들의 패소를 확정했다. 정주씨는 지난달 24일 대법원이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개인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판결했다는 소식에,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고 반갑고 기뻤다”며 “정부나 국회에서 서둘러 해결해줬으며 좋겠다”고 말했다.
김정주씨는 오는 8일 낮 도쿄 후지코시㈜ 본사 앞에서 열릴 ‘한·일 공동행동’ 집회에 참가해 일본 정부와 후지코시 쪽의 사죄를 요구할 참이다. 김씨 등 후지코시 피해자 3명,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김희용 대표 등 5명이 함께 7일 출국한다.
1944년 8월 여자정신대근무령이 공포돼 1944~45년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끌려갔던 13~15살 소녀들은 후지코시 도야마공장(1089명)과 미쓰비시중공업(288명), 시즈오카현의 도쿄아사이토방적㈜ 누마즈공장(300여명) 등에서 중노동을 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한 채 귀국했다. 후지코시강재공업㈜은 1928년 베어링 등을 생산하는 업체로 출발해 태평양전쟁 때 급성장했고, 지금은 산업용 로봇 등을 생산하는 후지코시㈜로 바뀌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2012년 5월 30일 수요일

귀신섬 끌려가 못돌아와도…미쓰비시는 “책임없다” 발뺌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5-30일자 기사 '귀신섬 끌려가 못돌아와도…미쓰비시는 “책임없다” 발뺌'을 퍼왔습니다.

10만명 징용·배상은 0원
조선인 임금 가장 많이 떼먹은
‘제1 전범기업’
“전쟁전 기업과 별개” 회피…홍보땐 “역사 100년
”협상단, 연계성 인정한 대법판결로 압박 계획

일본으로 떠난 아버지의 흔적은 사망증명서로 돌아왔다. 1910년 6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표상만씨는 1940년 장남이 태어난 뒤 일본으로 강제징용됐다. 일본 나가사키현 미쓰비시광업㈜ 다카시마광업소에서 일하던 표씨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표씨 가족들은 1971년 6월에야 ‘표씨가 1942년 낙반사고로 숨졌다’는 사망증명서를 받았다. 미쓰비시 쪽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 조사를 하던 일본 시민단체가 끈질기게 요구하자 그제야 표씨 사망을 인정했다.

귀신섬의 하나인 하시마. 1974년 폐광된 이래 무인도로 방치됐다.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KBS 역사 스페셜 화면 캡쳐.

다카시마엔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탄광이 있었다. 지하로 수백m를 파고 들어가 채굴하는 해저탄광은 인권 사각지대로 ‘귀신섬’(지옥섬)이라고 불렸다. 미쓰비시는 전쟁 때 조선소와 항공기 제작소 등을 운영했던 대표적인 군수산업체였다. 일본인 학자 다케우치 히로야스가 쓴 ‘미쓰비시 재벌에 의한 강제연행, 전시노동노예제에 대하여’(2004년)를 보면, 미쓰비시는 1939년 이후에만 조선인을 최소 10만명 강제징용한 ‘제1의 전범기업’으로 꼽힌다. 미쓰비시는 일제 때 일본뿐 아니라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미크로네시아와 사할린 등에 작업장을 125곳 뒀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징용령을 제정해, 조선인을 미쓰비시 등 일본 전범기업들의 작업장에 배치했다. 조선인 노무자들은 푼돈을 임금으로 받고서 중노동과 구타 등에 시달렸고, 사고와 질병 등으로 숱하게 숨졌다.

일본 나가사키현 미쓰비시탄광㈜ 다카시마광업소에서 1971년 6월10일 발급한 조선인 강제징용자 표상만씨의 사망 증명서. 다카시마광업소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실태 조사에 나선 일본 시민단체의 요구에 따라, 표씨가 1942년 낙반사고로 사망했다는 증명서를 뒤늦게 발급했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제공
일본 국립공문서관 쓰쿠바 분관에 보관된 ‘노동성 조사 조선인에 대한 임금 미불 채무조’(1950년 10월6일) 문건을 보면, 조선인 노무자 등에게 주지 않은 임금을 공탁 형태로 일본 법무국에 맡긴 기업 가운데 미쓰비시가 1만935명으로 가장 많았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는 조선인 406명분의 급료·퇴직금 등 85만9770엔을 공탁했다. 이 돈은 현재 일본은행에 예치돼 있다.
미쓰비시조선소가 있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투하돼 조선인 거주자 7만명 가운데 약 4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조선인은 미쓰비시조선소에 4700명, 다카시마 탄광에 3500명이 있었는데, 정확한 사망 실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전쟁 전의 회사와 별개’이고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는 논리로 사죄 및 피해 배상 요구를 외면해왔다. 양금덕(83·광주광역시 서구 양동)씨 등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제작소에서 일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했던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면서 근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1998년 일제 때 후생성에 냈던 연금기록 확인을 요청하자, 미쓰비시는 11년 뒤인 2009년 9월에야 양씨 등의 근무 사실을 인정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일본 후생성이 양씨 등 8명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겨우 99엔(1250원)을 지급해 국민적 분노를 불렀던 단초를 제공했던 기업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지난해 11월부터 ‘근로정신대 미쓰비시 공동협상단’의 요구에 따라 손해배상 협상장에 나오면서도 종전의 태도를 고집하고 있다.

미쓰비시중공업에서 강제 노역을 한 양금덕 할머니가 2009년 광주광역시 미쓰비시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매장 개설에 항의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미쓰비시는 미 군정 때 해체됐으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기업들을 다시 합쳤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전쟁 전후 미쓰비시는 연계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근로정신대 미쓰비시 공동협상단 한국 쪽 공동대표인 이상갑 변호사는 “다음달 5일 협상에서도 미쓰비시중공업이 외면하면, 결국 한국 법정에서 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미쓰비시그룹의 중핵은 미쓰비시중공업과 은행 등이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차량·선박·터빈·발전기 등을 제조하는 대형 기업이다. 종업원은 계열사까지 6만2000명이며, 전체 매출은 4조4000억엔에 이른다.(2008년 기준) 또 미쓰비시는 한-일 근현대사 왜곡으로 알려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후원금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정혜경 조사2과장은 “독일의 폴크스바겐 같은 전범기업들은 정부의 손해배상과 별도로 주변 나라 노동자 160만명에게 614억600만유로(2003년)를 개별 보상했다”며 “미쓰비시도 독일 기업들의 전례를 참고 삼아 과거를 털고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2012년 5월 28일 월요일

‘징용배상 외면’ 미쓰비시, 올해 한국서 수천억대 수주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5-28일자 기사 '‘징용배상 외면’ 미쓰비시, 올해 한국서 수천억대 수주'를 퍼왔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
율촌 등 발전소4곳 가스터빈 공급
‘전범기업 입찰제한’ 지침 효과 없어

일제 강점기에 강제징용당한 한국인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외면해온 미쓰비시중공업이 올해 한국에서 수천억원대의 발전소 설비 수주 실적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미쓰비시중공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계속 응하지 않을 경우 한국에서 거둔 사업이익의 압류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27일 한국전력 산하의 주요 발전회사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확인한 결과, 미쓰비시중공업은 올해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동서발전과 서부발전 등이 발주한 발전소 4곳에 가스터빈(M501 J형) 10기를 납품하는 계약을 맺었다. 4곳의 발전소는 율촌발전소(2기), 신울산발전소(2기), 평택복합화력발전소(2기), 동두천발전소(4기)로 모두 95만~190만㎾급의 대규모 발전소들이다. 이 가운데 평택복합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서부발전은 지난 1월 미쓰비시중공업과 마루베니상사로 구성된 컨소시엄과 4342억원에 납품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회와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8월 마련한 ‘일제 전범기업 입찰 제한 조처’가 한국 시장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이 수주 활동을 하는 데 아무런 제약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국회와 재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정부 조달협정상 개방 대상 공공기관이 아닌 중앙부처 7곳과 전국 기초자치단체, 263개 공공기관 등이 발주하는 사업에서 일제 전범기업의 입찰 자격을 제한하기로 합의했으나, 지침 수준인데다 그나마 한국전력 등을 제외했다. 한 발전회사 관계자는 “국제 입찰인데다 이전부터 진행해오던 것이어서 특정업체(미쓰비시중공업)의 참여를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국언(44)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은 “재정부에서 해당 기관에 전범기업 입찰 제한 관련 협조공문을 보낸 뒤 참고자료로 삼으라는 정도로는 효과를 전혀 거둘 수 없다. 중국 정부가 일제의 과거사 문제 해결 없이는 일본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 진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입장을 단호하게 밝힌 뒤 니시마쓰건설이 백기를 든 것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 정부도 전범기업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압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니시마쓰건설은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한 중국인 징용 피해자 543명에게 개별 협상을 통해 2009~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약 47억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니시마쓰건설은 같은 건설 현장에서 중국인과 함께 강제노동을 한 한국인 110명에겐 단 한푼의 보상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미쓰비시중공업이 대법원 판결에 따른 파기 환송심에서 배상 또는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확정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이 한국에서 수주한 공사대금이나 이익에 가압류를 신청하는 등 법적 대응에 나설 방침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이끈 최봉태 변호사는 “공사대금이 있다면 지급을 못하도록 할 수 있고, 채권에 대해서는 추심 명령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이승준 김정필 기자 daeha@hani.co.kr

2012년 5월 25일 금요일

미쓰비시 등 한국내 자산에 청구가능 독립법인이면 일본서 다시 재판해야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05-25일자 기사 '미쓰비시 등 한국내 자산에 청구가능독립법인이면 일본서 다시 재판해야'를 퍼왔습니다.

배상금은 파기 환송심서 결정

대법원이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강제징용에 대해 일본 기업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함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이들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대상으로 국내법에 따라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체불임금과 손해배상금을 받으려면 먼저 고등법원에서 손해배상금 등을 확정해야 한다. 대법원은 ‘미쓰비시중공업 등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리 판단을 했을 뿐 구체적인 금액은 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건의 원심 법원인 부산고법과 서울고법에서 체불임금 등을 고려해 배상금을 결정하고, 미쓰비시중공업 등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배상금은 확정된다. 소송을 낸 피해자들은 각자 1억~1억1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상태다.
금액이 확정되면 피해자들은 해당 기업에 배상금 지급을 요구하면 된다. 해당 기업이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면 가압류 등의 법적 절차를 밟아 강제로 배상금을 받을 수 있다. 해당 기업의 한국지사 재산 또는 국내 은행 예치금 등이 대상이며, 국내법에 따라 부동산 경매와 예금 추심(대금 지급을 요청하는 절차) 등의 절차를 거쳐 배상금을 받으면 된다.
그런데 국내 지사가 일본의 본사와 전혀 별개로 설립된 ‘독립법인’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독립법인은 회계·결산이 따로 운영되는 전혀 다른 회사로,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는 일본 본사이기 때문에 한국지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들은 일본 내 재산에 대해 강제집행을 해야 하고, 일본에서 또다른 법적 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윤성식 대법원 공보관은 “일본 법원에서 이미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난 만큼 한국 법원의 판결을 승인해줄 것이라고 낙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기호 경희대 명예교수는 “강제징용 당시 일본인들은 피해자들에게 강제저축을 시켰는데, 이런 미불임금 등을 포함한 돈이 현재 일본 은행에 공탁돼 있는 상태”라며 “수조원 규모에 이르지만 일본 정부는 이 공탁금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제동원 피해자 쪽은 판결 집행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 소송 대리를 맡은 최봉태 변호사는 “이들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이 충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아리랑 3호 위성 관련 용역을 수주하는 등 한국과 잦은 거래를 하는 일본 기업이 비도덕적으로 재산을 은닉하거나 배상 책임을 회피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실제로 국내에 있는 한국미쓰비시중공업은 일본 본사가 100% 출자한 현지법인으로, 1986년부터 한국 기업의 일본수출용 자재 구매 업무를 하고 있다. 신일본제철도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 등 조선소와 국내 자동차업계에 많은 물량을 수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쪽은 와 한 통화에서 “판결 결과는 전해 들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을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라 현재로서는 특별히 언급할 만한 게 없다”고 밝혔다.
일제피해자공제조합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 피해자 단체들은 24일 성명에서 “이번 판결로 피해자들과 관련한 줄소송이 예상되지만, 구순에 이른 피해자들은 판결을 기다릴 만큼의 시간이 없다”며 “독일처럼 전범 기업들이 손해배상 기금을 출연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황춘화 기자, 도쿄/정남구 특파원 sflow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