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국가부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국가부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5월 23일 수요일

핵발전소 멈추면 국가 부도? 진실은 이렇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5-23일자 기사 '핵발전소 멈추면 국가 부도? 진실은 이렇다!'를 퍼왔습니다.
[초록發光] 녹색의 모순, 핵

"핑크색 여자 돼지가 접시를 들고 웃고 있는 사진이 붙어 있는 삼겹살 가게는 정말 잔인하지 않아요?" "얼마 전에 양떼 목장을 갔는데 글쎄 그 앞에서 양털 모자, 양 꼬치를 파는 거예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최근에 개봉한 한 영화의 여주인공이 살면서 지나칠 법한 세상의 모순을 깨알같이 잡아내 뱉었다. 그런 말들에 관객을 폭소를 터트렸다. 생각지 못했던 것 그래서 누군가가 알려주면 깨닫게 되고 그것이 너무 사소해서 웃기기까지 한 그런 것들은 일상에 널려 있다. 하지만 가끔은 오히려 웃음을 사라지게 하는 끔찍한 모순들도 있다.

그중 단연 으뜸은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이다. 실로 끔찍하고 잔인하고 이중적이다. 대한민국 건국 60년 경축사에서 '저탄소 녹색 성장'을 선언하고서 보란 듯이 4대강사업과 핵발전소를 확대한 이 정부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핵에너지와 관련해서는 푸른 들판 위에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 뒤로 핵발전소가 등장하는 홍보 영상, 평화를 운운하며 핵 마피아들의 축제의 자리를 만들어준 '핵 안보 정상 회의', 이웃 나라 일본에서 54기 모든 핵발전소를 중지시킨 역사적인 날 진행한 신울진원자력발전소 1, 2호기 기공식과 함박웃음을 지으며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 등 하나하나 열거하려 해도 끝이 없다. 소도 웃을 말도 안 되는 핵에너지를 둘러싼 녹색의 모순을 왜 우리는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걸까?

실제 일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에 대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설문 조사가 있다. 지난 3월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원자력 에너지 안정성에 대한 대국민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89.9퍼센트가 전력 공급원으로써 핵에너지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응답하면서도 46.1퍼센트는 보상이 있더라도 자신의 거주 지역 내 핵발전소 건설에는 반대한다고 답했다.

핵발전소 확대에 대해서도 10명 중 7명이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고 핵에너지에 대해 에너지 자립이나 경제 성장 같은 긍정적인 측면을 떠올리는 비율보다 핵 방사능 사고나 두려움을 연상하는 비율이 높았다. 분명 핵에너지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고 더 이상 확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에 공감대가 형성 되고 있지만 핵발전소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하는 모순적인 모습.

이 모순은 끊임없이 주입되어 고착화 된 핵에너지에 대한 믿음과 핵 발전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 그리고 그 안에서 만들어진 핵 없는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다.


ⓒ프레시안

전기를 쓰는 일이 목숨보다 중요한 사회

올 여름의 전력 수급 문제가 연일 화두다. 올 여름은 유독 더 더울 것으로 예상 되고 기온이 오른 만큼 전력 사용량도 늘어날 것이다. 작년의 대규모 정전을 격은 정부는 이미 국무총리를 주재로 장관회의를 갖고 '하계 전력 수급 및 에너지 절약 대책'을 내놓았다.

현재 우리나라 21기 핵발전소 중 영광 5호기(100만 킬로와트), 고리 1호기(60만 킬로와트), 울진 4호기(100만 킬로와트), 신월성 1호기(100만 킬로와트)가 가동이 중지된 상태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 여름 최대 전력 공급 능력(1일 기준)이 7854만 킬로와트 정도에 머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최대 전력 수요는 8월 셋째 주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0만 킬로와트나 늘어난 7707만 킬로와트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되어 예비 전력이 147만 킬로와트로 떨어지게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작년과 같은 기습적인 정전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 가동이 중지된 원자로 중에 영광 5호기를 제외하면 모두 핵발전소에 문제가 생겨서 당장은 가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핵발전소의 끔찍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이런 문제가 있는 핵발전소들에 대해 면밀한 점검을 요구하고,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핵발전소를 폐쇄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방송과 신문은 핵발전소의 중지로 전력 수급의 이상이 생겨 그야말로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의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말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 게다가 만약 대규모 정전이 발생하면 엄청난 경제 손실이 일어날 것이라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핵발전소를 돌려서 국민들의 목숨을 걸로 도박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국민의 안녕을 위한 정당한 요구도 다 침묵해야 마땅한 걸까? 일본의 핵발전소가 전면 가동 중지에 들어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날은 우리나라 신울진 핵발전소의 기공식이 있던 날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대해 보수 언론은 핵발전소 가동 중지로 결국 일본의 경제가 몰락할 것이라 전망하면서 핵 발전이 없으면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이 말을 찬찬히 곱씹어 생각해 보면 단순해진다. 한 국가의 에너지 시스템이 핵이라는 단일 에너지원이 없을 때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오히려 매우 심각한 에너지 믹스의 오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만큼 그 나라가 핵이라는 에너지에 하나에만 의존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은 그렇기 때문에 하루 빨리 단일 에너지원의 의존을 낮추고 다양한 에너지 믹스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그리고 안전한 재생 가능 에너지로의 전환해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탈핵의 목소리를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방사능 물질의 확산은 분명 한국 시민들이 핵에너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실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 먹는음식들에서 방사능 물질을 확인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이은 국내 고리 핵발전소 사고와 이에 대한 은폐 사건은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핵발전소에 대한 불신을 만들어 내기 충분했다.

핵발전소의 안전이 문제가 될 때마다 핵 마피아들은 당장 모든 핵발전소를 가동 중지하면 전기 요금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될 것이라는 협박 한다. 일반 국민들에게 생계비가 오른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에서는 실제 핵발전소 축소시 전기료 인상에 대해 78.6퍼센트가 전기료 인상에 대해 감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핵에너지에 대해 편치 않은 지지를 보내던 국민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몫을 감내하더라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탈핵을 위한 사회 분위기가 충분히 조성된 것 아닐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국민의 마음, 사회 분위기를 담아낼 그릇은 아직 마땅치 않다.

꾸준하게 탈핵, 반핵을 외치는 시민 사회 진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일반 국민의 가슴을 울리기에 너무 멀다. 정치적 화두로 탈 원전을 던져 줄 정치권 역시 지난 총선에서 다양한 진보의 깃발을 들었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 수준에 만족해야만 했다.

서두에 언급한 시시콜콜한 모순을 끊임없이 뱉어 내던 영화 속 여주인공은 현실에서 가장 슬픈 순간에 "침묵에 길들여지지 마세요, 침묵은 무서운 거예요" 하는 말과 함께 앞으로도 독설을 계속 하겠다고 다짐한다. 다 알겠지, 하고 생각하고 말을 하지 않다보면 침묵하게 되고 결국 모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식상하고 지겨운 탈핵의 이야기를 더 지속적으로 더 크게 외쳐야 한다. 그리고 그 아우성 안에서 탈핵의 변화를 이끌 주체가 된 국민들과 이 열망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녹색의 모순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변화를 이끌어 낼 그릇, 침묵 하지 않을 목소리가 필요하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런 시도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이 아닌 '초록 대안'을 찾으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활동의 일부분입니다.

☞바로 가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조보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2012년 4월 3일 화요일

'국가 부도' YS는 손도 못 대면서 도덕 타령이라니!


이글은 프레시안 2012-04-03일자 기사 ''국가 부도' YS는 손도 못 대면서 도덕 타령이라니!'를 퍼왔습니다.
[기고] 도덕의 덫에 갇힌 한국 정치

1

이응신(1817~1887년)의 '유속을 징계한다'는 글을 읽으면 한국 자본주의의 인간형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이응신은 당대의 인간형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군자와 소인 그리고 유속이다.

유속(流俗)은 한마디로 군자의 너울을 뒤집어쓴 소인이다. 이응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옳고 그름의 중간에 몸을 두고 맑고 더러움의 중간에 발을 붙인다. 의상이나 취미는 남들을 따라하고 말과 행동은 시세와 부합하게 한다. 표 나게 정직해서 명성을 취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행동해서 미움을 받지 않는다. 사교에 정성을 기울이고 온화하게 공손하며 정보에 밝아 두루 통해서 비방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재물의 이득을 얻으려는 욕심과 남의 재물을 취하려는 속셈으로 밤낮 일을 꾸미는 버릇이 몸에 단단히 붙어 여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심성이 무너지고 풍속이 점점 물들어 더럽고 비루해 더불어 일할 수 없다. 이것이 유속의 환난이다.

이응신은 이러한 유속이 앞으로 온천지를 뒤덮게 되리라 예견하며 후세에 소인이라도 나오면 그래도 볼 만한 세상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유속을 소인보다 더 심각한 악으로 보았다. 소인은 드러나니 박멸할 수 있지만 유속은 물(水)이라 빠져들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국 자본주의의 인간형을 이응신이 말한 '유속'에서 찾는다.

2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유속은 군자의 도덕에 배치되는가? 이응신의 시대는 자본주의가 싹트는 19세기의 한가운데서 세도 정치와 민란과 외세로 격변했다. 이 격변의 와중에서 '유속'의 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사대부 관료들과 아전, 부농, 부상 등 정경 유착 세력이었다. 이들의 수탈과 학정에 민란은 필연적이었으며, 이후 식민지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정경 유착 세력은 한국 자본주의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여기서 두 가지가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다. 하나는 유속의 가치관이 군자의 도덕에 배치되지 않는 점, 다른 하나는 한국 자본주의의 비주류(소외 계층) 역시 유속에 전염되어 유속의 가치관을 자신의 생체 속에 이식하고 있는 점이다.

3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도덕'이 '자본주의 정신'을 이룬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였다. 자본주의는 탐욕적이고 프로테스탄트는 도덕적이라는 상식에 비추어 이는 놀라운 발견이다.

나는 전부터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한국의 유학과 자본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저명한 동양학자 오웬 라티모어가 동아시아의 자본주의를 유교 자본주의라고 말한 내용도 중요한 계기였다. 그 뒤 이응신의 글을 접하고 '유속'이 유학과 한국 자본주의의 관계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고리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이응신의 군자-소인관은 멀리는 공자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직접적으로는 조선의 주자학인 성리학에서 나온다. 붕당 정치와 당쟁의 명분이었던 성리학의 예론은 조선의 주자라고 불리는 송시열의 노론을 중심으로 활짝 꽃피웠다. 당시, 군자는 성리학의 예론을 따르는 사대부 양반들이었다. 이들은 정경 유착의 검은 거래로 '방납(防納)의 폐해'를 조장해 백성들을 수탈했는데, 이를 혁파하기 위해 실시한 '대동법' 요즘 말로 하면, 경제 민주화 조치를 불온 사상이라 하여 극력 막았다.

성리학의 도덕을 동원해 사익(私益)을 극대화한 점에서 이들은 후대의 '유속'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들 군자가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 새로운 인간형으로 나타난 게 '유속'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4

나는 한국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에는 성리학, 특히 노론의 도덕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공자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도그마'다. 마치 로마 공인 기독교가 원시기독교의 예수와 거리가 멀 듯이.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나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하였다. 화이부동(화합하되 같지 않음)하려면 남을 인정해야 하므로 화(和)는 타자를 전제한다. 반면, 동(同)은 타자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예컨대, 나는 '다른 나'가 있어야 나를 인식할 수 있고 나에 대해 화(대화)할 수 있다. 나에게 '타자 나'가 없는 경우를 우리는 정신병 상태라 한다.

소인이 동이불화하는 건 도덕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반면, 공자의 군자는 윤리를 통해서 화이부동 한다. 도덕은 신의 심판이고 심판의 체계이다(아담아 이 열매를 먹지 마라!). 반면 윤리는 이 도그마를 전도시킨다(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느니라!). 윤리는 사회 내에 내재한 신의 뜻을 따름으로서 존재를 초월적 가치들에 관계시키는 도덕을 대체한다.

공자가 죽기 전까지 탐독한 책이 인데, 은 바로 하늘의 뜻을 알려주는 책이다. 다산도 동이불화를 강요하는 노론의 세상에서 귀양살이 18년 끝에 도달한 학문이 이었다. 노론의 도덕을 최종적으로 부정하는 근거가 에서 나왔다. 은 사회가 화이부동하기 위해 '나'와 '타자' 사이에서 하늘의 뜻을 찾도록 돕는 윤리학인 것이다.

종교가 '하늘의 뜻'을 선택받은 백성의 전유물로 만들 때 이것은 전형적으로 타자가 없는 동이불화의 도덕이 된다. 동이불화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초월적 가치들에 준거해 선악적인 판단 즉, 도덕적인 판단을 한다. 이는 구성원 스스로 예속이 마치 자신들의 안녕이기라도 하듯이 예속을 위해 투쟁하게 만든다. 도덕은 이처럼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 복종을 통해 지배자가 자신의 권력과 체제를 안정화하는 정치 신학이다.

5

데이비드 소로가 에서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것은 공자의 화이부동의 행동 윤리와 같다.

시민 불복종 운동이 저항하는 '법'은 공동체의 도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운동은 사회적 약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현실 고착적인 법과 도덕 앞에서 좌절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나는 아주 강력한 윤리적 행동이다. 그런데도 도덕성을 진보의 생명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전도된 의식이 만들어낸 희극이다. 도덕과 윤리가 구별 없이 사용되는 현실을 감안해도 최근의 사건은 확실히 도덕성을 문제 삼고 있다.  비키니 사건 그리고 이정희 경선 부정 사건을 보자.

6

비키니 사건은 사건 자체보다 부적절한 대응과 수습이 더 문제가 됐다. 진보 쪽은 "비키니 사진의 성적인 의미를 무시하지도 않고, 시위 방식의 발랄함을 인정하는 방식"을 원했다. 역시 같은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차원에서 해명하려 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제를 던지고 받는 과정에서 완전히 꼬여버리고 말았다.

사건 당시 는 도덕적 프레임을 지나치게 의식한(=반발한) 나머지 '가장 심오한 것은 피부다'(발레리)라는 선을 넘어버렸다. 무슨 말이냐면, 정봉주를 감옥에 처넣은 이명박 정부의 새디스트적 쾌감에 성 유머로 통쾌하게 한방 먹인 건 사실이지만 성적으로 치닫는 팬들의 농담이 성 도덕주의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자각을 놓쳐버린 것이다.

때문에 수구와 진보 양쪽의 공격을 받았다. 조롱하려던 성 도덕의 프레임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보수 언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다른 한편 페미니스트의 비판에 대해서 피해자 프레임 운운하는 악수를 둔 것이다. 여기에는 수준에 해당하는 성 윤리 의식의 피상성이 자리 잡고 있다(피상성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를 성 도덕주의로 몰아붙이는 건 언어도단이다. 성 도덕주의에 대한 반발이 의 의도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 만약 자신들이 관계되지 않았다면 가 이런 사건에 페미니스트적 견해를 취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페미니스트들의 문제는 를 마초적인 성 도덕주의자로 몰아붙임으로써 일찌감치 도덕적 판결을 해버린 것이다. 아무리 자신들이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타자와 대화하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낙인찍는 것은 동이불화이다.

7

비키니 사건과 관련해서 에 실린 서울대학교 교수 이근의 글이 가장 황당했다.

비키니 사건은 저항적 매체의 남성적 특성에 심취하면서(마초이즘) 제대로 된 피아(彼我)의 구별을 상실한 를 보여준다. 즉, 우리 편이 아닌 저편이라는 범주에 이명박 정부뿐만이 아니라 남성의 지배 대상과 도구로서 여성을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예견된 사건이다. 왜냐하면 가 처음부터 매우 남성적인 프로였기 때문이다. 이는 진행자의 구성과 사용되는 언어와 표현에서 알 수 있으며, 처음부터 남성성이 필요한 저항적 매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 남성성을 통해 권력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여성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무뎌진 것이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가 왜 이처럼 초호황의 인기를 누리는 걸까? 내 생각이 옳다면, 심층적인 것을 표면으로 끌어올림으로서 도덕적 허위와 위선을 벗겨내고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스타일은 가장 현대적인 문학과 공명한다. 미하일 바흐친은 웃음, 광장의 언어, 축제적 형식, 육체적 하부의 이미지 등을 위대한 문학의 조건으로 꼽았다. 이 조건은 심층이 아니라 표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가장 심오한 것은 피부'일 수밖에 없다.

이근은 이런 의 표현 스타일을 남성성의 젠더로 오해한 모양이다. 더 할 말이 없다. 심층적으로 파악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건을 얼마나 도덕적으로 재단하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다.


▲ 민주주의를 이유로 이정희를 단죄하는 것은 옳은가? 혹시 지금 한국 정치는 도덕의 덫에 갇힌 것은 아닐까? ⓒ뉴시스

8

국회의원 이정희의 경선 부정 사건에 대해서. 이 사건을 경기동부연합(주사파)과 연계시키는 보수 언론 등의 색깔 공세를 필두로 진보 쪽에서도 많은 비난과 논란이 있었다. 그중에서 에 실린 박권일(의 저자)의 칼럼에 대해 말하려 한다. (☞관련 기사 : 박정희와 싸우다 박정희가 될 뻔한 이정희!)

보수 언론 등은 아니면 말고 식의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이지만 박권일은 이 사건을 민주주의의 룰을 어긴 중대 사범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비판이 훨씬 더 가혹하다.

모든 사건이 그렇듯 이 사건도 콘텍스트가 중요하다. 그가 자신의 글보다 닷새 전에 게재된 김주언의 칼럼을 읽어 보고서도 그렇게 썼다면 지독한 형식주의자요 도덕주의자다. 그러나 칼럼을 쓰고 있는 분이 이런 사실을 모르긴 어렵다. (☞관련 기사 : 이정희 사태, '여론 조사'와 '여론 조작'은 한 끗 차이)

문제는 민주주의에서 절차와 룰이 그의 생각처럼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꿈꾸었지만 민주적 절차를 이해하지 못해서 독재를 했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인식은 상당수 민주주의자들과 그들을 탄압하던 반민주주의자들이 사실상 공유하던 인식"이라고 강조한다.

나로선 납득이 가질 않는 소리다. 현재 민주주의 문제는 자유, 평등, 인권 등의 실질적 내용이 사라지고 형식적인 절차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런 절차 민주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진전이다.

룰과 절차를 우선시하는 원조는 소크라테스다. 이런 형식주의자들은 언제나 사태의 본질에 입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을 향해 심층으로 하강하는 태도는 본말을 전도시켜 사태를 그르친다. 악법도 법이란 유명한 말은 마치 법이란 본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현실에서 '악법은 악법이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물론 박권일이 이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정희를 박정희와 싸우다 박정희가 될 뻔한 사람으로까지 몰아세우는 건, "어느 정권 없이 불법 사찰"이라고 말한 박근혜와 유사한 정신상태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물론 나는 이정희의 경선 부정 사건을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 이글의 초점은 도덕적 잣대의 불편한 진실에 맞추어져 있다.

9

'국가 부도를 낸 YS나 서울 시민에게 수십조 원의 빚을 안겨준 오세훈'과 '수억 원대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정치인'. 과연 누구 죄가 더 중한가? 수많은 사람을 실직시키고가정을 파탄시키고 사회를 후퇴시킨 것에 비하면 비리 정치인의 죄과는 미미하다.

하지만 후자는 도덕적 비난을 뒤집어쓰고 구속과 벌금을 내야 하는데 김영삼이나 오세훈은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 절차 민주주의의가 갖는 심각한 문제이다.

언론이 정치인의 비리를 머리기사로 다루는 가장 큰 이유는 '의제' 설정의 파워를 장악하기 위해서다. 국민의 알 권리보다는 자신들의 파워를 유지 확대하려는 목적이 더 일차적이다. 사실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인의 비리에 대해서 언론과는 다르게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이명박 정부가 비리 백화점이란 걸 국민들이 몰라서 지난 선거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건 아니다.

국민들의 관심은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의 효과다. 소위 이 '피부 효과'를 '심층의 본질'로 대체하려는 게 도덕이다. 이것은 무상 급식을 둘러싸고 포퓰리즘 논의가 진보, 보수 양쪽 진영에서 어떻게 쟁점화되었는가를 상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일반 국민에게도 피부에 닿지 않고 수구 세력에겐 사익을 챙기는 명분이요 정적을 치는 무기일 뿐인데도 누구를 위해서 도덕을 지행합일의 가치로 믿어야 하는가?

나에겐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상대로 대결하는 꼴, 혹은 회사 돈은 오너가 다 빼갔는데 업무 합리화에만 목메는 꼴. 진보 쪽 정치인에게 결벽증처럼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식자우환이다.

10

이 글을 쓰면서 마키아벨리의 을 다시 읽었다.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결과 도덕을 제거하고 권력을 순수하게 실익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군주론은 귀족한테 휘둘리는 왕권을 굳건히 세워 나라를 외세로부터 지키고 백성들을 수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쓴 책이다. 만약 이런 목적이 없었다면 이 책은 비정한 정치공학 책에 불과했을 것이다.

독서 중에 우리의 역사와 현실이 겹쳐서 지나갔다. 조선 후기 사회도 사대부가 왕권을 좌지우지해 나라가 넘어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신음했다. 마키아벨리와 같은 탈도덕의 관점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권력은 도덕을 명분으로 내걸면서 실익을 추구하고 또, 언제든지 실익을 위해서 새로운 명분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게 정치의 현실이다.

마키아벨리 정치론은 그 자체만으론 악용되기 쉽고 인민 권력론이 뒷받침돼야만 제몫을 다할 수 있다. 전자는 도덕을 배제하는 칼이고 후자는 윤리를 행동화하는 양심이다. 둘의 관계가 '뱀처럼 영리하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라는 성서의 비유처럼 될 때 상생한다.

이 문제는 다시 정치와 도덕의 문제로 돌아온다. 사실 도덕성 시비는 네거티브 전략이다. 비전이 없을 땐 네거티브 전략만 난무한다. 네거티브 공세를 뚫고나갈 수 있는 힘은 비전에서 나온다. 곽노현 사건은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비전은 건강한 시민의 활력을 먹고 자란다. 광장에서건 마을 회관에서건 시장에서건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때 시민 사회가 활력에 넘치며 윤리적 가치가 의제로 등장한다. 이것이 비전이다.

11

이응신은 '유속'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세상에 알린 공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가 신봉한 군자는 비전이 없기 때문에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식민지 시대 이래 한국의 지배 권력은 이응신의 군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운 한국의 성인(聖人)들은 성리학적인 군자상이다. 학교에서는 시민의 윤리가 아니라 이런 성인의 도덕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교육은 비전 없는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기름진 토양이다. 식민지 통치와 해방 후 독재 정권은 비전을 금지했다. 재벌 중심의 신자유주의도 비전을 불허한다. 노무현 정권은 비전이 없는 정권이었다.

민주통합당은 노무현을 벗어난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비전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를 보내지도 못하고 있다. 오직 이명박 정부 심판에만 의존하고 있으므로 불가피하게 도덕성이 정권 교체의 최대 무기가 됐다. 이 때문에 도덕성은 전략 전술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무엇보다도 진보의 생명은 '윤리에 기초한 비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봐도 도덕성은 엘리트의 전유물이다. 또, 이것은 우월성과 직결된다. 더 나은 교육을 받을수록 사익을 탐하고 거기에 걸맞은 도덕으로 분식하는 유속과 같은 인간이 된다. 고학력 사회가 된 한국은 이응신의 우려대로 누런 띠풀(삘기)이나 하얀 갈대 같은 유속이 땅을 온통 뒤덮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의 자화상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마저 이응신의 목소리다. 즉, 성리학 군자의 꾸짖는 음성이다. 출구 없는 이런 폐쇄 회로가 우리 사회의 비전을, 진전을 결정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김영종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