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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2일 일요일

국가가 키운 폭력을 파는 괴물


이글은 한겨레21 2012-08-13일자 제923호 기사 '국가가 키운 폭력을 파는 괴물'을 퍼왓습니다.
[특집]무선조종 헬기 등 첨단장비 갖추고 파업 진압부터 대체 인력까지 일괄 제공하는 ‘기업형’ 민간용역 업체2008~2010년 노동자 등 3832명 기소하며 용역직원 0명 구속한 공권력이 키운 통제 불가능한 괴물의 실체

» 용역경비업체들은 진화하고 있다. 국가의 ‘묵인’ 아래 세련된 폭력을 돈 받고 제공한다. 폭력으로 노동자들을 내쫓은 뒤 공장 앞을 지키고 있는 용역경비업체 컨택터스 직원들. 한겨레 류우종

“지상에 더 힘센 자가 없으니 누가 그와 겨루랴.”
토머스 홉스가 쓴 (리바이어던)은 국가의 탄생을 이렇게 전한다. 성서 욥기 구절에서 따온 이 말은 ‘리바이어던’의 절대권력을 보여준다. (리바이어던) 초판 속표지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 거대한 사람의 형상을 이룬 그 유명한 그림이 실려 있다. 국가이자 절대군주인 리바이어던은 교회의 첨탑과 집, 산과 들, 바다를 내려다본다. 왕관을 쓴 리바이어던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검이 들렸다. 폭력을 통할하는 국가의 힘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통을 이룬 개개인들의 눈은 리바이어던의 얼굴, 즉 국가만을 ‘올려다보고’ 있다. “국가는 모든 사람이 포기한 권리, 모든 사람이 사용을 유보한 폭력의 집합적 구성물이다. 국가는 그 모든 폭력을 자신 안으로 흡수함으로써 그 자신이 폭력이 되고, 압도적인 힘의 비대칭성 속에서 감히 어느 누구도 폭력을 사용할 수 없게끔 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한다.”(공진성, [폭력]) 자신들이 양도한 작은 폭력들, 그렇게 모인 거대한 힘에 의탁해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는다. 폭력의 합법적 독점체, 국가의 탄생이다.

철거와 파업, 용역들의 오랜 일터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욥기 41장)이라던 리바이어던은, 이제 모든 것을 내다파는 왕이 되었다. 국가의 권능은 ‘민영화’한 수많은 영역들로 쪼개지고 대체됐다. 리바이어던이 내려다보는 것은 이제 ‘시장’이다. 마침내, 손에 든 자신의 검마저 좌판에 올려놓았다. 모든 것을 내다파는 시대에, 국가만이 소유했던 ‘폭력’마저 시장의 매대에서 돈으로 거래된다. 공권력의 민영화, 폭력의 외주화다.
지난 7월27일 새벽 4시50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반월공단에 있는 자동차 부품업체 SJM 공장에 진압봉과 방패, 헬멧으로 무장한 사설 용역경비업체 직원 200여 명이 “진격, 뚫어”를 외치며 ‘진압 작전’에 들어갔다. 사업주가 전격적으로 직장폐쇄를 단행한 공장 안에는 임금·단체 협상 문제로 농성 중이던 노조원 150여 명이 있었다. ‘CONTACTUS’(컨택터스)라는 용역경비업체명이 인쇄된 방패를 든 이들은 길이 1m 정도의 진압봉을 마구 휘둘렀다. 공장 안에 있던 쇳덩어리까지 집어 던졌다. 노조원들의 치아가 함몰되고 머리가 깨졌다. 흡사 1990년대 ‘구사대’를 연상케 하는 폭력이 이어졌고 노조원 수십 명이 쓰러졌다. 여성 노동자가 “살려달라”며 112 신고를 네 차례나 했지만, 출동한 근처 파출소 소속 경찰관들은 공장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용역경비업체와 회사 쪽 관계자의 말만 듣고 돌아갔다. 새벽 5시30분에야 경찰기동대 3개 중대가 공장 정문 앞에 배치됐지만 노조원에 대한 불법적인 폭력은 사실상 ‘묵인’됐다. 현장에 있던 경찰 중대장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등 현장 소란을 확인하고도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컨택터스는 징후적 현상이다. 한국 사회에서 거래되는 ‘폭력’이 파업 진압부터 대체 인력 투입까지 논스톱으로 처리해주는, 나름의 시스템을 갖춘 ‘기업형 폭력’으로 진화하는 어떤 지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때그때 일당을 주고 동네 깡패들이나 동원하던 기존 용역업체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얘기다.

황당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흔한 일이다. 낯설지 않다. 개발연대를 거치며 수없이 목격된 일이다. 1970년대까지는 도시 재개발 현장에서 국가가 직접 자신의 힘으로 밀어붙이던 철거폭력이 횡행했다. 그러던 도시개발사업이 1983년 합동재개발이라는 형식으로 민영화한다. 건설자본이 재개발사업에 끼어들게 되자 ‘빠른 회전’을 생명으로 하는 돈의 논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철거폭력 역시 빠른 시간 안에 확실히 끝내는 무자비한 용역들의 완력으로 대체된다. ‘용역폭력’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노동 현장에서의 용역폭력은 철거 현장보다 시기적으로 조금 늦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밀어닥친 1990년대 말, 노동쟁의 현장에서 회사 쪽이 고용한 용역경비업체 직원들의 물리적 폭력 행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노조집회 해산, 노조사무실 봉쇄 과정에 ‘용역깡패’가 난입해 폭력을 휘둘렀다. ‘시설 경비’라는 명목으로 각목과 자전거 체인을 휘두르는 용역경비업체 직원들이 공장을 점령하고 노동자를 내쫓았다. 지난해 충남 아산의 자동차 부품회사인 유성기업 노동쟁의 과정에서 용역경비업체가 저지른 폭력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2010년에는 경북 구미의 반도체 회사 케이이씨(KEC), 대구와 경북 경주의 자동차 부품 회사인 상신브레이크·발레오전장에서도 직장폐쇄 뒤 곧바로 용역업체 직원들이 ‘작전’에 투입되거나 경비로 배치됐다.
‘노조 집단행동→직장폐쇄→용역 투입’은 회사 쪽이 노조를 파괴하는 시스템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폭력적으로 컨트롤하는 용역경비업체의 ‘전문성’이 시장에서 사고팔린다. 이계수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행정법)는 지난 1월 발간한 (용역폭력 근절을 위한 정책대안보고서)에서 “용역깡패들은 국가가 허가한 기업에 고용되어 영업의 일환으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고 지적했다. “폭력·물리력의 행사가 하나의 자본주의적 사업이 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용팔이, 양아치가 아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컨택터스는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자신을 ‘용역깡패·용역양아치’가 아닌 ‘시위·집회 솔루셔너·시추에이션 매니지먼트’로 불러달라고 했다. 세련되게 주먹질을 한다는 얘기다. 이들은 최대 3천 명까지 경비·경호 인력을 동원할 수 있으며 시위 진압용 물대포차, 손해배상 청구를 위한 불법행위 채증용 무선조종 헬기, 경비견 등 ‘국내 최대 규모의 시위 진압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파업 등으로 조업에 차질이 생기면 즉시 ‘대체 인력’을 투입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갖췄다고 홍보했다. 2009년에는 노동쟁의가 진행 중이던 자동차 부품업체에 자기네 직원들을 위장취업시켜 노조파괴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컨택터스는 징후적 현상이다. 한국 사회에서 거래되는 ‘폭력’이 파업 진압부터 대체 인력 투입까지 논스톱으로 처리해주는, 나름의 시스템을 갖춘 ‘기업형 폭력’으로 진화하는 어떤 지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때그때 일당을 주고 동네 깡패들이나 동원하던 기존 용역업체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얘기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인권법)는 “과거 용역깡패는 애교 수준”이라며 “경찰이 맡은 업무 중에 가장 폭력적 분야인 진압의 영역에까지 조직화된 형태로 뛰어들었다”고 평했다. ‘진화’를 했다는 것이다. “노사가 법적으로 대등하게 싸우도록 힘의 균형을 맞춰준 것이 파업권과 직장폐쇄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균형을 국가가 컨트롤하는 것이 노사관계의 룰이었다. 그런데 돈 있는 쪽이 공권력의 영역인 폭력을 사들이자 힘의 불균형이 극대화했다.”
제대로 된 혁명 한 번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국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유혈 낭자한 노동운동의 역사를 가졌다. 이를 폭력으로 찍어 누른 것이 용역경비업체들이었다.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반발이 극심해지던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 용역경비업체 핑커턴사는 노조 파괴로 악명을 떨쳤다. 대표적인 것이 1892년 펜실베이니아주 홈스테드시에 있던 카네기 제철소 파업 진압이다. 깡패와 부랑자 등으로 구성된 핑커턴 소속 경비원 300여 명과 노동자들이 무력으로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10여 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다쳤다. 탐정 업무도 했던 핑커턴의 로고는 커다란 눈이었다. 눈 밑에는 ‘우리는 잠들지 않는다’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핑커턴은 무력 진압 외에 공작원들을 활용한 노조 침투, 유령노조 설립, 폭력 선동 등을 전문적으로 수행했다. 한 세기 뒤 한국에 나타난 컨택터스가 하는 짓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후 미국 최대의 보안업체로 자리잡은 핑커턴은 1999년 세계적 보안업체인 스웨덴의 ‘시큐리타스AB’에 인수됐다.

“우파와 보수가 말하는 이른바 ‘국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은 경찰과 충돌한 서울 용산 참사나 쌍용차 파업보다, 오히려 폭력을 돈으로 사고팔아도 국가가 이를 문제 삼지 않는 용역폭력 현상에서 훨씬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공진성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용역경비업체의 폭력이 문제가 될 때마다 경비업체에 대한 허가·관리·감독 권한을 가진 경찰은 ‘허가·관리·감독을 강화하겠다’는 뻔한 답을 내놓는다. 지난해 9월 경찰청은 유성기업 용역폭력 사건의 대책으로 “앞으로 폭력을 행사한 경비·용역 업체는 조직폭력에 준해 엄정하게 처리, 고용한 사업체도 청부폭력에 준해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초기부터 경찰권을 발동해 용역폭력을 예방·제지·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불과 10개월 뒤 리바이어던에서 폭력을 떼어받은 컨택터스라는 ‘괴물’은 경찰이 보는 앞에서 흉기를 들어 사람들을 팼다. 이계수 교수는 “철거 현장, 노동 현장에서 폭력이 행사되거나 행사 가능성이 예견되는데도 경찰이 개입하지 않는 것은 경찰이 그 문제를 사적 소유권의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폭력의 민영화는 책임과 처벌, 통제를 어렵게 만든다.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 공권력의 일부로 경찰이 행사하는 폭력은 비교적 통제가 용이했다. 노사문제에 경찰력이 발동할 때, 국가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인사·예산·정보공개 등 다양한 방식의 민주적 통제를 가할 수 있다. 홍 교수는 “경찰력을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이 계속 만들어져왔다. 반면 이윤 창출이 목적인 자본에 풀려버린 폭력을 제어할 수단은 마땅히 없다”고 했다.

» 지난 7월29일 경기도 안산시청 앞. 자동차 부품업체 SJM 노조원들이 용역경비업체 컨택터스 직원들의 폭력으로 부상당한 노조원들의 사진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용역폭력 사들이는 사용자 처벌해야 근절”

직장폐쇄 등 법적·행정적 ‘절차’를 밟은 뒤 이뤄지는 폭력에 대해 경찰·검찰·법원은 무한한 관용을 베풀어왔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그전 3년간 처벌받은 노동자·철거민과 용역경비업체 직원 현황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노동자 등은 무려 4197명이 입건된 뒤 3832명(91.3%)이 기소(구속 43명 포함)된 반면, 폭력을 휘두른 용역업체 직원들은 288명만이 입건됐고, 그나마 재판에 넘겨진 사람도 116명에 불과했다. 구속자는 단 1명도 없었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는 “폭력을 방기하고 느슨하게 조사하고 헐렁하게 처벌하는 경찰·검찰·법원의 책임이 크다”며 “용역폭력을 사들이는 사용자(회사)를 처벌하지 않는 이상 이런 폭력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노동보다 자본에 기울어져 있다. 자본은 이를 믿고 폭력을 사들이고 사병화한다. 방조와 묵인 아래 공공연히 폭력을 행사한다. 이계수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시기와 민간 경비산업의 ‘발흥’을 연결짓는다. 공진성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서양정치사상 전공)는 ‘친자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는 “국가성이 약한 사회부터 먼저 무력 독점이 약해지는 현상이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유럽에서는 여전히 국가가 시장 통제를 하고 있다. 폭력 통제도 마찬가지다. 반면 미국은 건국 과정에서도 무력 통제를 담보하지 못했다. 미국식 자유주의 문화가 이식된 나라일수록 시장이 밀고 들어오면 쉽게 무장해제된다.” 공 교수는 “영주들이 사병을 거느렸던 중세라는 특권적 시대가 끝나고 근대국가가 등장하며 민주주의가 가능해졌다. 기업들이 공장이 사유지라는 이유로 마치 치외법권이 있는 것처럼 사사로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국가 안의 국가’ ‘새로운 중세’가 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우파와 보수가 말하는 이른바 ‘국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은 경찰과 충돌한 서울 용산 참사나 쌍용차 파업보다, 오히려 폭력을 돈으로 사고팔아도 국가가 이를 문제 삼지 않는 용역폭력 현상에서 훨씬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2010년 9월 한국의정연구회가 국회사무처 정책연구과제로 제출한 보고서는 ‘경찰업무와 민간 경비업무의 상호협력 방안’이었다. 보고서는 용산 철거민 참사를 거론하며 “민간 경비업체 역시 민간 분쟁에 있어서 제3자에 해당하지만 경찰과는 다르게 좀더 원활하고 갈등 없이 민간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고 썼다. ‘노사분규 등에 경호경비 요원을 투입, 신속히 재산권 보호 및 신변안전과 시설보호 업무를 수행하겠다’는 컨택터스의 사업모델이 이에 대한 모범 사례로 제시됐다.
경비업계는 불만이다. 일부 불법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업체들 때문에 본연의 경비·경호 업무를 맡은 자신들까지 싸잡혀 욕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전의 시장화’는 ‘폭력의 민영화’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홍성수 교수는 “홉스부터 이어온 국가 정당성의 가장 기초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 기능에 생긴 공백을 ‘에스원’이나 ‘세콤’을 통해 돈 있는 사람들이 사들이게 되면 안전에 대한 불평등이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시장보다 국가를 더 신뢰한다는, 혹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누군가의 집에 달려 있는 보안벨과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게 한때는 경찰의 영역이었다는 생각은 이제 들지 않는다. 돈만 있으면 더 안전해질 거라는 믿음은 무의식적인 그 무엇이 됐다. 공진성 교수는 “능력껏 자기를 지키는 세상, 자신들만의 보안 시스템을 따로 가지게 된다면 국가의 의미는 사라진다”고 봤다.

빈익빈 부익부, 안전의 양극화

국가만이 안전을 보장하고 폭력을 독점한다는 홉스·베버식 정치철학은 논쟁적 주제일 수 있다.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는 그의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한다. 그는 폭력과 안전을 돈으로 전유하는 민간군사기업과 사설 경호원 등을 언급한다. “부유함이 지닌 유일한 장점이, 요트나 스포츠카를 사고 환상적인 휴가를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면 수입과 부의 불평등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의 상품화로 인해 돈이 더욱 중요해지면서 불평등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이 깊어지고 있다.” 이계수 교수도 같은 지적을 한다. “안전은 점차 각자가 알아서 챙겨야 할 그 무엇이 된다. 안전의 자기책임화가 초래하는 결과는 안전의 시장화와 상품화, 그로 인한 안전 향유의 양극화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누가 그와 겨루랴.” 리바이어던으로 탄생한 국가는, 그렇게 스스로 죽어간다. 국가의 자살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2012년 6월 10일 일요일

의료계 무한 포식자, 5마리 황소 개구리


이글은 한겨레21 2012-06-04일자(제913호) 기사 '의료계 무한 포식자, 5마리 황소 개구리'를 퍼왔습니다.
[표지이야기] 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 등 ‘빅5’ 병원, 급속 확장해 고가 로봇 수술부터 경증 외래 환자까지 집어삼켜… 30억 고가장비, 잉여병상 등으로 소비자 지출 커졌지만, 동네 병원은 물론 다른대형병원까지 ‘빈익사 부익생’

» 2005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입한 다빈치 로봇은 한동안 첨단 시술의 상징이었다. 동시에 병원 사이 처절한 물량 경쟁을 상징하기도 했다. 대형 병원들은 앞다퉈 30억원이 넘는 기기를 사들였다. 원가를 뽑으려고 무리한 시술을 한다는 비판도 함께 샀다. 세브란스병원 제공

“가천의대 길병원, 국내 5위 초대형 병원”(2011년 10월11일)
“서울서 여섯째 규모 이화의료원, 2016년 마곡지구에 들어선다”(2012년 1월3일)
“고대구로병원, 1600병상 빅5 병원 규모로 시동”(2012년 3월6일)
“전남대병원, 전문센터 내세우며 빅5 병원 도약 꿈”(2012년 3월23일)
“중앙대, 인천에 1000병상 이상 대형 병원 건립 계획”(2012년 5월3일)
“한양대병원, 1000병상으로 늘려 삼성서울병원 등과 경쟁 계획”(2012년 5월4일)
이쯤 되면 전쟁이다.
병원들이 앞다퉈 몸집 부풀리기에 나서고 있다. 모두 ‘빅5’로 도약하거나 근접하겠다는 구상이다. 물론 빅5란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이다. 1990년대 이후 의료시장에서 ‘과점적’ 입지를 다진 병원들이다. 5곳에 이어 후발주자들까지 일제히 물량 경쟁에 뛰어드는 상황을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의료계 군비경쟁’(Medical Arms Race)이라 부른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벌어진 군비경쟁에 빗댄 말이다(상자 기사 참고). 사람을 살리는 의료 현장이 어쩌다 전쟁터로 돌변했을까? 사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 vs 6%, 끝없는 재벌 병원의 증식
1990년을 전후해 두 재벌이 나란히 의료시장에 뛰어들었다. 현대그룹이 1989년, 삼성은 1994년 서울 강남에 대형 병원을 지어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특히 삼성은 이른바 ‘기다림, 보호자, 뒷돈’이 없다는 ‘3무(無) 경영’을 내세우며 의료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두 병원은 불과 10여 년 사이에 100살이 넘는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막대한 자본력이 자양분이 됐다. 서울 송파구 강변에 터를 잡은 서울아산병원은 병상 2000개를 넘게 갖춘 국내 최대 병원으로 순식간에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 한동안 잠잠하던 병원업계는 2005년부터 다시 변화를 겪는다. 빅5는 암센터, 심장병센터 등을 지으며 다시 규모 경쟁에 나섰다. 병원들의 자체 통계와 업계 자료를 종합하면, 2005~2011년 다섯 병원은 병상을 2112개 늘렸다. 빅5의 병상을 합하면, 지난해 기준으로 1만 병상(9839병상)에 육박한다. 불과 5년 사이에 병상이 30%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빅5의 약진은 다른 대형 병원들의 성장세와도 대조된다. 같은 기간 빅5를 제외한 나머지 39개 상급종합병원들이 늘린 병상은 모두 합해야 고작 1666개뿐이다. 증가율로 치면 6%다. 빅5와 다른 병원들의 격차가 그만큼 벌어졌다. 서울삼성병원(689병상), 서울아산병원(540병상) 두 재벌 병원이 병상 수 확장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선두 주자들의 확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단지에는 지난해부터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2014년에는 15층 규모의 암전문병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서울대병원도 서울 대학로의 옛 한국국제협력단(KOICA) 터에 심장뇌혈관병원을 짓고 있다. 지난 5월16일 시작된 공사는 2014년에 마무리된다. 삼성서울병원도 2015년 완공을 목표로 국제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에 병상이 부족해서일까. 딱히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지난해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낸 보고서 ‘병상자원 관리방안’을 보면, 2009년 우리나라 병상은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섰다. 우리나라 전국 병상 수는 33만개로 적정 규모(29만2600병상)보다 많다. 지금부터 지어지는 모든 병상은 사실상 ‘잉여’인 셈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지금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2020년에는 병상 수가 55만5천 개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병원의 침대가 늘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비자가 걱정할 일은 아닌 듯도 하다. 상식적으로 보면, 시장에서 공급자 사이에 경쟁이 치열하면 가격은 내려가고 서비스는 나아진다. 나쁘지 않다. 그런데 의료시장에서는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이 흔히 보는 교과서를 펼치면, 이런 대목이 있다. 조금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면 이렇다. “소비자의 무지는 의사가 의료 수요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보건의료 부문에서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법칙이 적용되기도 한다. 보건의료는 도덕적 해이가 수요자뿐 아니라 공급자에 의해서도 발생하는 특이한 분야다.” 조금 더 쉽게 풀어보자. 보건의료계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병원이 지어지면 입원실은 차게 마련이다.” 진찰실을 찾아온 환자를 입원시킬지 말지 결정하는 이는 의사다. 입원실이 비어 있다면 상업적인 이해 때문에라도 의사는 환자를 입원하도록 ‘유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의사 마음이다. 물론,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실제로 지금껏 어느 대형 병원도 ‘염가’나 ‘저가’ 등을 내세워 마케팅을 하지 않았다. 소비자 처지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늘어난 병원에서, 필요 이상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필요 이상의 돈을 낼 여지도 커졌다.
아시아 최다 로봇 수술 기기 보유국
1963년 케네스 애로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경제학)는 라는 학술지에 역사적인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으로 보건경제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생겨났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논문에서 보건경제 분야의 여러 특징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 두가지가 흥미롭다. 첫째, 의사의 전문적 판단에 따라 공급이 결정된다. 둘째, 가격경쟁이 상대적으로 결여된다.
의료 분야의 공급에 관한 학술적 분석은 한국의 병원 현실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에서 병원이 필요 이상 지어져도, 시장 원리에 따라 병원이 문을 닫거나 가격이 떨어질 여지가 적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금껏 어느 대형 병원도 ‘염가’나 ‘저가’ 등을 내세워 마케팅을 하지 않았다. 소비자 처지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늘어난 병원에서, 필요 이상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필요 이상의 돈을 낼 여지도 커졌다. 병원들의 외형 경쟁이 환자들에겐 반갑지 않은 이유다.
대형 병원 사이의 경쟁은 이미 상업화로 이어졌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병원들은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해 더 큰 수익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고가의 장비를 동원한 비싼 수술은 ‘생존’을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2005년 국내에 도입돼 지금껏 논란을 낳고 있는 ‘다빈치 로봇 수술’이 대표적인 예다. 로봇 수술이란 의사의 손 대신 로봇이 환자의 배 속에 들어가 수술 부위를 절제·봉합하는 등의 시술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빈치는 브랜드 이름이다. 2005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처음 도입한 이래, 로봇 수술은 마법의 시술인 양 주목받았다. 신기술이 없는 병원은 구식 취급을 받았다. 30억원이 넘는 고가의 장비를 대형 병원들은 앞다퉈 사들였다. 2010년까지 우리나라는 33대나 수입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다빈치 로봇 수술 기기를 갖춘 나라다.
고가의 기기는 짭짤한 벌이도 보장해줬다. 시술 한 건에 1천만원을 훌쩍 넘기도 했다. 일반 수술의 6~10배 가격이었다. 병원에서는 기계의 ‘원가’를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환자들을 로봇 수술로 유인했다. 2010년까지 수술 건수가 7천 건이 넘었다는 추정치도 나왔다. 그렇지만 시술의 효과에 대해서는 종종 물음표가 뒤따랐다. 상관은 없었다. 병원은 적잖은 수입과 최첨단의 이미지까지 덤으로 가지게 됐다. 후발 병원들은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싼 기계를 샀다.
로봇 수술의 아버지, 양심 고백하다
거품은 2010년 12월에 터졌다. 한국에 로봇 수술을 처음 도입한 양승철 연세대 비뇨기과학교실 교수가 나섰다. 그는 당시 한 토론회에서 “환자에게 일반 수술을 하면 ‘피가 철철 난다’ 등 잘못된 정보를 주면서 로봇 수술로 강요하는 경우를 봤다. 솔직히 로봇 수술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로봇 수술을 들여온 장본인으로서 국민에게 무엇을 한 것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했다. 의학과 과학의 잘못된 만남이 ‘돈벌이’로 전락한 것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었다.
지난해 6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국내·외 연구를 분석한 결과, 다빈치 로봇 수술이 장기생존율이나 재발률, 합병증 발생률 등에서 일반 개복 수술에 비해 효과가 낫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만 일부 질환에서 출혈량이 적고 입원 기간이 짧다는 단서는 달렸다. 지난해 탤런트 박주아씨가 다빈치 로봇 수술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병원들의 상술과 맞물린 로봇 수술의 ‘광풍’은 그렇게 잦아들었다.
환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빈치 로봇 수술을 권한 사람은 장사꾼도 아니고, 업자도 아니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맞는 의사들이었다. 의사들은 어떻게 상업화의 전선에까지 나서게 됐을까. 진찰실에서 감지되는 변화는 서글프다. 한 사립대 교수의 이야기다. “병원에서는 해마다 과에 매출 상승 목표치를 적어 내라고 한다. 최소한 10% 이상 적어 내야 한다. 그걸 달성해야 한다. 옛날에는 사람을 잘 고치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였다. 이제는 돈 잘 버는 의사가 훌륭한 의사다. 10년 전부터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 수익은 병원장이나 신경 쓰는 거였다. 이제는 모든 교수가 매출과 실적에 쫓긴다. 1년에 서너 번씩 개인별·과별 매출 실적이 통보된다. 그에 따라 승진이나 평가도 달라진다. 어떤 교수도 자유롭지 않다.”
다른 수도권 사립대 교수의 증언도 다르지 않다. “우리 병원은 그나마 덜 상업화하는 축이다. 그렇지만 병원에서는 매출 실적을 정기적으로 교수들에게 알린다. 그걸 보고 다른 대학, 다른 과와 경쟁하도록 한다. 주변 동료 교수들과도 경쟁하게 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평가가 채찍이라면, 인센티브는 당근이다. 매출의 일정 부분을 교수들에게 떼어준다. 인센티브가 없는 대학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의료 상업화 현장에서 의대 교수들은 매출에 쫓기는 ‘영업맨’으로 위축됐다. 의대 교수들이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의료 행위를 할 것이라는 일반의 기대는 어쩌면 조금씩 접는 게 나을지 모른다.
탐욕이 낳은 낭비로 파괴되는 의료 생태계
거대 병원들이 돈벌이에 매달리자 의료의 ‘생태계’도 교란되고 있다. 의료전달 체계에서 대형 병원은 보통 1·2차 의료기관에서 다루지 못한 중증·희귀성 질환을 다루는 역할을 맡는다. 2011년 3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의료기관 기능재정립 기본계획’을 보면, 동네 병원은 가벼운 질환을 가진 외래 환자를 주로 맡고, 거대 병원들은 중증 입원 환자를 맡도록 돼 있다.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거대 병원이 굳이 감기 같은 경증 질환 환자를 맡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인 낭비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거대 병원의 탐욕이 거대한 ‘낭비’를 낳고 있다. 최영희 민주통합당 의원실을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를 넘겨받았다. 통계를 보면, 전국 44개 대형 병원의 외래 내원 일수는 2007~2011년 45%나 증가한 반면, 동네 의원은 10%만 늘었다. 큰 병원들은 입원 환자도 더 많이 유치했다. 같은 기간 거대 병원의 입원 일수가 19% 증가한 사이, 동네 의원의 입원 일수는 5% 늘었을 뿐이다.
거대 병원들의 횡포 속에서 작은 병원들은 고사하는 분위기다. 대한병원협회를 자료를 보면, 2010년 한 해 동안 100병상 미만 규모의 작은 병원은 9곳 가운데 1곳이 문을 닫았지만, 300병상 이상 대형 병원은 280곳 가운데 5곳(1.8%)만 문을 닫았다. ‘빈익빈 부익부’는 ‘빈익사 부익생’으로 이어졌다.
대형 병원도 처지가 같지는 않았다. 빅5와 나머지 39개 대형 병원 사이에도 격차는 컸다. 최영희 의원실에서 받은 자료를 분석해보면, 2007~2011년 빅5의 외래 내원 일수는 44%나 늘었다. ‘나머지’는 같은 기간 28%만 증가했다. 특히 빅5는 경증 외래 환자까지 빨아들였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비교적 가벼운 질환을 대상으로 ‘약국 본인부담 차등제’를 실시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감기 등 가벼운 질환을 가진 환자가 큰 병원에 와서 진단을 받으면 약국에서 돈을 내도록 하는 제도다. 경증 환자를 작은 병원으로 돌리려는 유인책이었다.
그래도 빅5의 위력은 여전했다. 2007~2011년 빅5의 경증 외래 환자의 내원 일수는 26%나 증가했다. 나머지 39개 대형 병원의 경증 외래 환자 내원 일수가 30% 가까이 준 것과 대조적이다. 같은 기간 동네 의원을 찾은 경증 환자 내원 일수 증가율(22%)보다도 높았다. 병원들의 맏형 격인 빅5가 가장 작은 막내동생들의 밥그릇까지 빼앗는 격이었다. 빅5의 횡포가 작은 병원만 다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벼운 질환으로 빅5를 찾은 환자들은 더 많은 의료비를 부담한다는 뜻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건자료 2011’을 보면, 우리나라 국민이 2000~2009년 외래 진료에 지출하는 액수가 해마다 7.9%씩 늘었다. OECD 회원국 평균(3.4%)의 2배가 넘었다.
“건강보험, 의료체계 전반 수술해야”
빅5가 주도하는 물량 경쟁을 바라보는 정부는 무기력하다. 지난 1990대 초반 병상 설립을 제한하는 규제를 폐지해 재벌 병원들이 주도하는 물량 경쟁의 길을 터줬다. 정부는 급격하게 대형 병원으로 무게중심이 쏠리는 것을 막으려고 지난해부터 ‘약국 본인부담 차등제’ 등을 도입했다. 그나마도 부분적인 성과만을 거두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병상 경쟁이라도 막으려면 ‘병상총량제’라도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정 권역 내에 지을 수 있는 병상의 총량을 정해서 규제하자는 안이다.
한두 건의 정책만으로는 폭발하는 의료시장을 제어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박형근 제주대 의대 교수는 “환자들은 의료기관에 대한 신뢰 없이 병원의 규모와 명성만으로 의료기관을 선택하고, 병원은 외형 경쟁에만 몰두하는 기형적인 상황이다. 의료시장에서 공급량의 무한 증가를 막으려면 건강보험 체계와 서비스 공급 체계를 함께, 새롭게 개편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워낙 의료계의 병이 깊으니, 처방도 간단하지 않다. 우리 병원들, 심하게 아프다.


‘의료계 군비 경쟁’(Medical Arms Race)이란?
첨단 장비, 고급 시설 도입 위한 의료계의 무한 경쟁
‘의료계 군비 경쟁’(Medical Arms Race)이란?
1960~90년 미국에서 의료비 지출액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연평균 증가율이 11.5%였다. 미국 사회의 골칫거리였다.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왔다. 의료보험 가입자가 늘어나 의료 수요가 늘어났다는 설명도 있고, 의료사고에 따르는 법적 소송 비용이 커서 ‘방어적 진료’가 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방어적 진료란 의료사고에 따르는 소송의 위험을 줄이려고 추가적으로 하는 의료행위를 가리킨다. 미국의 의사 공급이 부족해서라는 설명도 있었다.
당시 의료비 지출이 늘어난 이유에 대한 유력한 설명 가운데 하나가 ‘의료계 군비 경쟁’ 현상이었다. 1960~70년대 미국 병원들은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하려고 호텔처럼 쾌적하고 세련된 시설을 구비하고, 첨단장비를 서둘러 도입했다. 이런 경향은 병원 사이의 경쟁이 치열한 곳일수록 두드러졌다. 환자들은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쾌적하며 고가의 장비를 갖춘 병원을 찾게 된다. 그리고 병원들은 투자를 회수하려고 진료비를 올리게 됐고, 이는 의료비 지출을 늘리는 결과를 낳게 됐다. 경쟁이 심화하면 가격이 떨어지는 일반적인 경쟁이론과는 조금 다른 얘기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