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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5일 금요일

일본의 환율조작, 편드는 강대국들


이글은 시사IN 2013-03-15일자 기사 '일본의 환율조작, 편드는 강대국들'을 퍼왔습니다.
일본의 양적완화로 환율이 내려가면서 한국과 개도국들이 타격을 입는다. 환율조작은 국제사회에서 범죄로 간주되는데도 G20 등 강대국과 국제 기구들은 묵인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범인’일지도 모른다.

어떤 노인이 수십 군데 자상(刺傷)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된다. 용의자는 있다. 피해자에게 사적 원한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알리바이도 없는 자다. 더욱이 눈물을 흘리며 “그놈을 죽여버리겠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그런데 모든 사건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용의자를 감싼다. 심지어 사건 자체를 은폐하려는 자도 있다. 탐정은 회색 뇌세포를 열심히 굴리며 고민에 빠진다. 스포일러 때문에 제목을 밝힐 수는 없으나 아주 유명한 추리소설의 줄거리다.

“일본이 그럴 의도는 아닐 거야”

위의 추리소설과 비슷한 사태가 최근 국제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다. 어떤 나라가 환율조작이라는 ‘범죄’를 일으켰고, 이 때문에 피해국이 속출한다. 이 나라 최고 지도자는 잔뜩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나라 통화가치를 내리고 말겠어요’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나 중국 등 개발도상국의 환율조작에 이를 갈던 초강대국의 최고위급 관료, 국제기구, 세계 금융시장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거대 언론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에이~ 설마! 그런 무서운 일이 벌어졌겠어요….”

ⓒAP Photo 2월26일 의회 예산위원회에 참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그는 선거 전부터 무제한 양적완화를 공언했다.

국제무대를 배경으로 한 이 추리소설의 용의자는 일본이다. 이 나라 아베 총리는 집권이 유력시되던 지난해 9월부터 ‘무제한 양적완화’를 공언해왔다. 간략히 표현하자면,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무제한으로 엔화 공급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공급이 늘면 가격은 떨어지는 법이다. 이는 통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은행이 엔화를 무제한 공급한다는 것은, 이 나라 내외의 경제주체들이 소비나 투자하기가 예전에 비해 상당히 쉬워진다는 소리다. 이에 따라 당연히 ‘엔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는 (실질) 금리는 내려갈 것이고, 다른 나라 돈(달러 등)에 대비한 엔의 가치도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엔화 가치가 내려가면, 자연스럽게 일본 제품의 수출 가격이 떨어지면서 이 나라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은 대폭 강화될 것이었다. 그리고 아베 정부가 출범한 이후 실제로 그렇게 됐다.

최근 세계적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 추계에 따르면, 엔화는 지난해 9월(아베와 자민당의 집권이 확실시되기 시작한)부터 올해 2월 중순 사이, 달러화에 비해 16%, 유로화에 비해 19%나 떨어졌다. 이에 비해 닛케이평균지수는 지난해 12월 초에서 2월 말 사이 19%나 치솟았다. 엔화가 크게 떨어져 일본 대기업들의 수출 실적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주가가 크게 오른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엔화 급락의 최대 피해자로 전망되는 한국 수출업계의 경우, 전자와 자동차를 중심으로 상당수 대기업의 주가가 하향세로 반전되고 있다. 한국의 수출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이 많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엔화 급락에서 의심할 수 있는 환율조작은 국제사회에서 일종의 경제 범죄로 간주된다. 물론 변론은 가능하다. 그냥 국내 경기를 활성화하려는 순수한 의도로 유동성을 풀었을 뿐인데, ‘뜻하지 않게’ 통화가치가 내려가는 바람에 ‘우리도 깜짝 놀랐다’고 하면 된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그렇게 주장한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오히려 최근 놀라운 일은, 이런 변명이 국제사회에 자연스럽게 먹히더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국제사회가 설득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지난 2월15~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회의는 한창 일본의 환율조작 의혹이 짙어지는 시기에 열린 행사라서, 뭔가 화끈한 경고나 대책이 기대되었다. 멕시코 같은 나라는 일본에 대해 ‘고의로 엔화 가치를 떨어뜨렸다’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일본 재무장관(부총리)인 아소 다로는 “우리 통화정책의 목표는 환율조작이 아니라 만성적 디플레이션에 대한 처방일 뿐이다”라며 하나마나한 변명을 했다. 국내경제 살리기 정책인 양적완화가 우연히 엔화 가치를 떨어뜨려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었지만, ‘본의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용의자(예컨대 아소 다로)의 변론을 뒤집을 결정적 증거들이 많다. 엔화 가치 내리기야말로 양적완화의 직접적인 목표였던 것이다. 아베 총리는 수차례에 걸쳐 “엔화가 1달러당 90엔이 되어야 비로소 일본 수출업자들이 이윤을 낼 수 있다” 등 구체적인 절하 규모까지 말한 바 있다. 다른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범의(犯意)’가 매우 뚜렷하다. 그러나 G20은 일본에 면죄부를 발부했다. 일절 일본을 거론하지 않은 채 다음 같은 성명서를 발표한다. “우리들은 자국 통화 가치를 절하시켜 세계 외환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의 수출 경쟁에서 이길 목적으로 환율을 조작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양적완화는 환율조작이 아니라는 거다. 심지어 G20 재무장관 회의 직전에는 브레이너드 미국 재무부 차관이 자민당 정권의 통화정책을 “디플레이션에서 빠져나오려는 일본의 노력”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Reuter=Newsis 2월16일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각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찍은 단체사진. 일본의 환율조작에 대한 경고는 나오지 않았다.

개도국 환율 인하만 용인 못해?

세계 최고의 경제 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는 심지어 일본과 미국의 양적완화를 찬양하기까지 한다. 이 잡지는 ‘가짜 환율전쟁’(phoney currency war, 2월16일자) 제하의 기사에서, “미국과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을 욕하기보다는 칭찬하자”라며 특히 “유로존은 그 나라들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코노미스트)의 논리 역시, 일본은 단지 국내 지출과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을 사용한 것뿐인데, 그 부산물(by-product)로 엔화가 절하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일본이나 미국 같은 대국이 ‘공격적 통화정책’(양적완화와 이에 따른 통화가치 절하)으로 국내 경기를 살리면 이 나라들의 수입 역시 늘어나 세계경제 전체에 이롭다고 주장한다. 다만 브라질 같은 나라엔 많이 다른 처방을 내민다. “이런 옵션(양적완화와 통화가치 내리기)은 이머징마켓(신흥시장)에는 유용하지 않다.”

(이코노미스트)의 논조는, G20을 지배하는 미국·일본·EU의 논리를 축약한 것이다. 말하자면, 현재 일본의 엔화 가치 절하로 ‘환율전쟁’이라도 벌어진 것 같지만, 그것은 환영(幻影) 즉 ‘가짜 환율전쟁’일 뿐이다. 그리고 숭어가 뛰면 망둥이도 날뛴다고, 브라질이나 한국 같은 나라들까지 이 판에 끼어들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참고로 이 기사 서두에 나온 추리소설의 진범은, 탐정을 제외한 관계자 전원이었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2012년 9월 6일 목요일

식량주권 포기한 강대국은 없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06일자 기사 '식량주권 포기한 강대국은 없다'를 퍼왔습니다.
[민생복리가 경제민주화다] FTA와 농축산업

1994년 1월 미국은 멕시코와 캐나다를 묶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를 출범시켰다. 멕시코는 당시 FTA(자유무역협정)를 통한 수출증가가 경제성장을 견인하리라고 믿었다. 미국은 교역확대로 멕시코 경제가 성장하면 미국으로 몰려드는 불법이민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결과는 거꾸로 나타났다. 농업기반이 붕괴하면서 농민들이 도시의 걸인으로 전락하여 불법이민이 오히려 더 늘어나는 실정이다.

미국이 경제난민의 물결을 막으려고 멕시코와의 국경선에 장벽을 치고 방위군을 투입하고 있다. 1996년 미국 내 불법이민은 500만 명이었다. 그런데 NAFTA 출범 이후 12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중 78%가 멕시코와 남미에서 가난을 피해 목숨을 걸고 넘어온 사람들이다. 미국의 값싼 농축산물이 멕시코의 농업을 망쳤다.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미국으로 밀입국을 감행하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스위스와도 FTA를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스위스가 농업시장 개방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2006년 2월 1일 스위스는 미국과의 FTA를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한-미 FTA 협상개시가 발표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미국이 농업을 포함해 예외 없는 개방을 주장하면서 농산물에 GMO(유전자변형식품) 표시에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스위스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이다. 한국은 70%인데 스위스는 77%에 달한다. 농업인구비중은 2.9%로 한국의 7.8%에 비해 훨씬 낮다. 농업이 GDP(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5%로 한국의 3.2%에 비해 절반 수준이다. 그런데도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과의 FTA를 포기했다. 같은 이유로 스위스는 EU(유럽연합)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1994년 1월 NAFTA를 출범시키기까지 35개월이 소요됐다. 미국은 이어 남-북아메리카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작업에 나섰다. 그것이 FTAA(미주자유무역지대)이다. 1995년 11월 마이애미에서 34개국 정상회담을 열고 10년 이내에 성사시키기로 합의했다.

미국이 10년간이나 FTAA를 추진해왔지만 막상 10년만인 2005년 11월 열린 미주정상회담에서 남미의 5개 좌파정권 국가들이 반대하여 FTAA가 좌절됐다. 미국이 '2002 농촌법'에 따라 기업농한테 막대한 정부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어 FTAA가 체결되면 남미국가의 농업이 붕괴된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다.

미국은 남미국가들이 FTAA에 소극적이자 압박수단으로 중미 5개국과 도미니카를 엮는 CAFTA를 추진했다. 비준까지는 32개월이 소요됐다. 이어 미국은 FTAA 대신에 호주, 싱가포르, 한국에 FTA를 맺자고 강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은 단시일 내에 한-미 FTA를 체결하겠다고 앞뒤도 가리지 않고 서둘렀다.

한-미 FTA를 추진할 즈음 2년 동안에만도 40여 개 국가가 미국과 FTA 협상을 추진하다 중단했다. 2007년 3월 24일에는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과 FTA 협상을 개시한 말레이시아가 그 대열에 섰다. 말레이시아는 정부조달에서 경제적 약자인 말레이족과 원주민에게 우대조치를 해왔다. 그런데 미국이 그것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또 협상선결조건으로 이란과의 가스개발계약을 취소하도록 강압했다.

결국 말레이시아가 내정간섭이라고 항의하며 협상을 포기했다. 그러자 당시 스티브 노튼 USTR(미국 무역대표부) 대변인은 말레이시아와 협상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협상을 결정하는 요소는 내용이지 시한이 아니라는 발언이었다. 반면에 한국은 미국의 TPA(무역촉진권한)에 목을 매고 양보로 일관했다. 한국이 미국법이 규정한 시한에 얽매여 협상에 끌려다녔던 것이다. 이것은 독립국가의 주권을 포기한 것이나 진배없는 짓이다.

미국이 FTA에 매진한 까닭

'국경 없는 세계경제'는 미국의 국가발전전략이다. 미국의 상품-용역-자본-노동의 이동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군사력을 배경으로 철폐하겠다는 것이다. 그 첫째가 다자 간 협정인 WTO(세계무역기구)로 대표되는 세계화이다. 그 다음이 양자 간 협정인 FTA(자유무역협정)이다.

그런데 WTO가 농업부문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미국이 FTA에 매진하는 것은 그 까닭이다. 개별국가를 상대로 시장개방이 미흡한 분야를 열어젖힌다는 전략이다. 한국에 대한 주요목표는 농업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 뒤에는 세계식량시장을 장악한 초국적 기업들이 도사리고 있다.

2006년 2월 2일 한-미 FTA 협상개시를 선언하면서 데니스 하스터트 USTR 대표가 상-하양원 의장에게 보낸 장문의 공한(公翰)에서도 그 뜻이 드러났다. 이 협정의 이익이 농민, 노동자, 기업인과 그 가족에게 돌아가도록 추진하겠다며 농민을 먼저 강조하고 나섰다. 분야별로도 농업을 앞세워 개방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한국은 미국의 6번째로 큰 농축산물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또 협정이 체결되면 한국은 미국산 농축산물에 대한 관세철폐와 함께 모든 무역장벽을 시정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무엇보다도 협상과정에서 의회 및 농업계와 긴밀하게 협의할 것임을 천명했다. 농업계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의 가장 경쟁력 있는 산업은 농업이다. 경작지가 세계에서 가장 넓다. 미국의 농업은 초국적 기업농이 영위한다. 비행기로 파종하고 비행기로 농약을 살포한다. 그런데 한국은 식구끼리 먹고살려고 농사짓는 가족농이다.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 값싼 미국산 밀에 밀려 이 나라에서 밀밭이 사라졌다. 미국산 오렌지가 제주도에서 감귤나무를 뿌리째 뽑아내고 있다.

미국은 또 세계최대의 축산물 수출국이다. 미국은 쇠고기 세계 2위, 닭고기 1위, 돼지고지 2위의 수출물량을 자랑한다. 미국의 최대관심품목은 축산물이다. 한-미 FTA 체결에 따라 관세가 철폐되면 이 나라에서 축산업도 설 땅이 없어진다. 육류도 유제품도 수입해서 먹어야 하는 세상이 된다. 미국에서 밀, 옥수수를 수입해서 사료를 만들어 그것을 먹여서 소, 닭, 돼지를 키워야 하니 미국 축산업자와 경쟁할 수 없다.

지금은 모든 농축산물을 싸게 수입해서 먹는다. 하지만 농업기반이 붕괴한 다음에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면 큰 오산이다. 전두환 일당이 정권을 찬탈한 1980년에는 하늘도 울었던 모양이다. 그해 여름은 냉기를 느낄 만큼 서늘했다. 냉해로 대흉년이 들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동남아를 휩쓸고 멀리 스페인까지 가서 쌀을 사왔다. 값을 몇 배나 더 쳐줬는데도 장기도입계약을 맺으라는 바람에 해를 넘기면서 더 사야만 했다. 그 쌀이 남아돌아 재고미로 쌓여 오랫동안 쌀값 파동으로 이어졌다.

미국산 농축산물 수입가격은 한국산에 비해 20~50% 수준으로 싸다. 그 미국산이 관세를 물지 않은 채 들어오면 한국시장을 싹쓸이하고 만다. 쌀은 물론이고 옥수수, 감자, 과일류, 쇠고기, 닭고기 등 어느 것 하나 살아남기 어려워 밀의 운명이 따로 없다. 한마디로 이 나라에서 농업이 사라진다.

철옹성 같던 공산주의가 일순간에 붕괴했다. 동구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한 데 이어 소련이 해체되자 공산주의가 삽시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세계의 절반을 둘러친 철의 장막이 도미노의 모습을 연출하며 쓰러져버린 것이다.

원인이야 복합적이지만 그 첫째가 만성적인 식량난이었다. 먹을 것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무작정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다 베를린 장벽에 부닥쳤다. 그 장벽을 깨는 망치소리가 주술을 부렸는지 그 충격파에 세계를 지배하던 양대축의 하나가 맥없이 무너졌다.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에 대적하던 소련은 무기강국이기는 하나 경제강국은 아니었다. 짧은 기간 안에 공업화는 성공했지만 집단농장이 실패한 까닭이다. 시베리아의 식량난은 겨울의 혹한보다 더 무서웠고 구상무역으로 들여온 쿠바의 감자로 허기를 채워야 했다.

구조적인 식량난은 미국과의 대결국면에서도 서방세계에 구호의 손길을 내밀게 만들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곡물수출금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식량무기화로 소련의 목덜미를 죄었던 것이다. 냉전시대에 미국의 최대무기는 식량이었다.

ⓒ뉴시스

식량안보의 중요성과 농업의 다원적 기능
냉전체제 이후 세계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지만 21세기 국제정치 판도에 변화가 예고된다.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함으로써 미국과의 대결은 필연적이다. 중국이 고속성장의 가도를 질주하지만 자원부족이란 아킬레스건에 걸려 있다.

그 까닭에 성장의 원동력인 석유자원을 확보하려고 미국의 뒷마당인 남미는 물론이고아프리카, 중앙아시아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세력확장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갈등이 증폭되는 가운데 미국이 견제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중국의 또 하나의 고민은 식량이다. 중국이 5000년 만에 식량자급을 이룩했다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산업화-도시화-사막화가 진행되면서 농지를 급속하게 잠식하고 있다. 여기에다 젊은이들이 돈벌이를 찾아 농촌을 떠나면서 이농민이 해마다 1500만 명씩 발생했다. 중국의 곡물수요는 4억8500만t이나, 1998년 5억1200만t을 생산한 이후 줄곧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다. 곡물순수출국에서 곡물순수입국으로 전락하여 미국에서 밀을 수입하는 실정이다.

식량공급을 해외에 의존하는 경제대국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중국이 식량증산에 나섰다. 농지세를 2006년부터 아예 없애버렸다. 휴경지에서 생산을 재개하고 이농민의 귀농을 독려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농촌의무교육을 무료화하고 의료혜택을 확대했다. 증산정책은 고도성장에 따른 도시-농촌 간의 소득격차를 완화하려는사회-경제정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양극화를 중농정책으로 완화하려는 것이다.

일본은 식량안보를 현실적 위기로 판단하고 자급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40% 수준인 식량자급률을 45%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2005년 '21세기 신농정-공격적인 농정으로 전환'을 선언하고 농업체질 개선에 착수했다. 이어 농업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관계부처를 망라한 '21세기 신농정 2006'을 추진했다. 일본은 유사시에 휴경지 100만㏊를 삽질하면 식량위기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이 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5%에 불과하다. 쌀을 자급하니 그나마 유지된다. 농업이 죽어 식량을 전적으로 외국에 의존한다면 수출국이 절대로 싸게 팔지 않는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식량안보의 중요성도 깨달아야 하지만 농업은 생산기능 이외에도 다원적 기능을 가졌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농업은 식량안보와 함께 홍수조절, 대기정화, 환경보존이라는 가치를 지녔다.

FAO(세계식량기구)는 이것을 농업의 다원적 기능이라고 말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1998년 농업각료회의에서 이 기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회원국이 확보해야 할 공동목표로서 선언문에 채택했다. WTO는 이 기능을 비교역적 관심사항(non-trade concerns)이라고 규정하고 농업의 가치를 존중하고 있다.

논밭이 없다면 비가 와도 그대로 강으로 흘러 바다로 간다. 이 경우 심각한 용수난이 예상된다. 논둑의 높이는 대게 20㎝이고 평소에는 3㎝가량만 물을 담는다. 나머지는 비가 오면 저수지 노릇을 하는 셈이다. 논 면적이 계속 줄어들어 100만㏊가 될까 말까하다. 이렇게 계산하면 17억t쯤 된다. 이 저수량은 대형 댐 6개의 홍수조절수량보다 많다. 밭의 저수량은 이보다 훨씬 작지만 그 기능 또한 크다.

논밭에서 증발하는 수분은 대기 중에서 열을 뺏어 기온을 낮춰준다. 그 까닭에 농촌이 도시보다 시원하다. 물론 도시에서는 빌딩과 자동차에서 열 배출이 많기도 하지만 말이다. 논밭이 없다면 여름이 훨씬 무더울 것이다. 논밭은 이것 말고도 수질을 정화하고 지하수도 보존한다. 연중 강우량의 65%는 6~9월에 집중되어 홍수가 잦다. 논밭이 있어 웬만큼 큰비가 내려도 토사유실을 막아준다.

공업화-도시화로 산림이 줄어들고 화석연료 사용이 늘어난다. 탄소동화 작용을 통해탄산가스를 산소로 바꾸는 지구의 자정능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뜻이다. 기상이변이 잦자 지구적 차원에서 온난화 가스 배출을 규제하려는 노력이 강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논밭에서 뿜어내는 산소량을 공업적 가치로 환산한다면 이 또한 막대할 것이다. 논밭이 대기를 정화하며 국민의 허파 노릇을 하는 셈이다.

역대정권이 근시안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농업의 가치를 모른다.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모르니 개방농정을 부르짖는다. 수자원 확보와 대기정화라는 가치는 더욱더 모를 것이다. 자연경관을 보존하고 전통문화를 유지하는 가치 또한 하찮게 여길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농업이 지닌 다양한 공익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농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생명산업이자 환경산업인 농업을 교역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김영호 언론광장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