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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9일 목요일

전두환은 왜 531명 죽어 나간 그곳을 칭찬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3-05-09일자 기사 '전두환은 왜 531명 죽어 나간 그곳을 칭찬했나'를 퍼왔습니다.

[26년, 형제복지원] (1) 전두환과 형제복지원의 커넥션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 부산시 북구 주례동 산18번지에 자리 잡은 옛 형제복지원. 한때 3000여 명의 부랑인을 수용하던 수백억 원대의 대지 및 시설이었다(1990년 1월 13일 모습). ⓒ연합뉴스


총체적 인권 유린 사건으로서 형제복지원 사건
국가기록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부산시 진구 당감동의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인권 유린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전국 최대의 부랑아 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구타로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 결과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하고 강제 노역을 시켰으며,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하여 암매장까지 하였다. 이렇게 하여 12년 동안 무려 531명이 사망하였고,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원장 박인근은 매년 20억 원의 국고 지원을 받는 한편, 원생들을 무상으로 노역시키고 부실한 식사를 제공하여 막대한 금액을 착복하였다. 또한 자신의 땅에 운전 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하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시켰다. 이 사건으로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을 비롯한 직원 5명이 구속되었으며, 형제복지원 원장은 1989년 9월 14일에 2년 6월형이 확정되었다."

이 정도면 형제복지원 사건을 사회적 주변인으로 상정된 부랑인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이며 반문명적인 인권 유린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형제복지원에 강제 구금되었던 부랑인들은 누구인가
대법원의 형제복지원 사건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부랑인 단속과 강제 구금의 근거가 된 것은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이다.

이 훈령에 의할 경우 "일정한 정주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터미널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해하는 모든 부랑인"(규칙 제1장 제2절)이다. 심지어 이 훈령은 "노변 행상, 빈 지게꾼,성인 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들"을 준부랑인으로 규정하여 부랑인 대책에 준하여 단속 조치하였다(규칙 제1장 제3절 6호). 거리에서 외관상 아름답지 못한 모든 사람이 단속과 강제 구금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노동력 창출 위해 부랑인을 처벌했던 초기 자본주의
사실 부랑인 문제는 자본주의 모순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노동력 확보는 농민을 토지로부터 추방하고 무일푼의 프롤레타리아를 만듦으로써 이뤄진다. 그래서 영국에서 본격적인 부랑인법은 1349년 노동자법령(the Statute of Labourers)으로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1348년 흑사병은 노동력을 급감시키고 노동 임금을 현저히 상승시켰다. 이에 따라 영주는 상승한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농노에게 더 무거운 부담을 지우게 되고, 농노는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좇아 도망간다.

이러한 배경에서 1349년 노동자법령은 영주에게 자기의 농노와 소작인에게 대한 우선권을 보장하여 영주 상호 간의 농노 쟁탈전을 제한하고, 농노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걸식과 유랑을 금지시키고 걸인에게 자선을 하는 것도 처벌하였다. 15세기의 폭력적 토지 수탈인 인클로저 운동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은 도시 빈민을 형성하고 대규모 부랑자가 되었다. 첫 '부랑인법'인 헨리 8세 시대의 1530년 법률에 의하면, 노동력이 있는 자가 구걸하거나 부랑자이면 초범인 경우 태형과 감금형으로, 2범인 경우 태형에 처하고 귀를 절반 자르며, 3범인 경우 중죄인으로 또는 공동체의 적으로 사형된다.

이후 부랑인법은 처벌 규정을 더 강화하여 가슴이나 이마에 낙인찍기, 부랑인 신고자의 종신 노예화, 부랑인 자녀의 도제화·노예화, 재범으로 18세 이상이며 2년간 이들을 사용할 사람이 없는 경우 사형, 3범인 경우는 반역죄로 사형시킬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17세기 중엽 파리에 '부랑자 왕국'이 만들어지자 루이 16세는 칙령(1777년 7월 13일)으로 16세부터 60세에 이르는 건강한 사람이 생활 수단과 일정한 직업이 없을 경우 갤리선을 젓는 형벌에 처했다.

미국의 부랑인법도 영국의 부랑인법을 이어갔다. 이 시대의 부랑죄의 법률적 특징은 부랑자는 범죄자가 된다는 점에서, 일정한 부류의 인간에 속하면 범죄의 위험성이 있다는 '신분 범죄'의 특성이 있다. 또한 임금 노동 제도에 필요한 규율을 익히도록 징벌을 가한 특징이 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한국 부랑인 정책 변화
한국의 경우도 해방 이후 '거지'라는 개념의 부랑자들, 그리고 한국전쟁과 함께 상이군경을 비롯한 '양아치로 불리던 무리가 1970년대에 부랑인 개념으로 변해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의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 집약적 경공업 분야는 수출 전략을 펼쳤고, 농민의 이농을 부추겨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농촌의 빈농들이 대규모로 도시로 이주하였고, 이 중 아무리 일을 하려고 간청해도 일자리를 잡지 못한 유휴 노동력이 부랑인 계층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도시 문제로 지목되고, 무허가 판자촌 철거 등 대규모 도시 정비 사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주거 불안정이 취업 불안정과 함께 들이닥쳐 대규모의 부랑인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정당하게 배려 받지 못하고 배제된 가장 비참한 레미제라블이 부랑인 또는 준부랑인들로 규정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부랑인에 대한 어떠한 법제적 정비 없이 보안 처분으로 부랑인을 강제 수용하고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고 단속과 강제 수용, 정신교육과 징벌적 강제 노동을 부과했다. 유신 독재시대인 1975년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지침'(1975.12.15. 내무부 훈령 제410호)의 제정은, 법령이 아니라 훈령이지만 국가가 경찰법 차원에서 부랑인 문제에 적극 개입한 최초의 공식 문서이다. 물론 법률이 아니라 행정규칙이므로 강제 수용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전두환 정권은 '부랑인 복지 시설 운영 개선 종합 대책'을 마련하고, 내무부 훈령 제410호를 폐지하고, 관할 부서도 보건사회부로 변경하였다. 새로 제정된 '부랑인 선도 시설 운영 규정'(보건사회부 훈령 523호.1987.4.6.)에서도 "부랑인을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무의탁한 사람 또는 연고자가 있어도 가정 보호를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리를 방황하면서도 시민들에게 위해와 혐오감을 주는 등 건전한 사회 질서의 유지를 곤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신체적·정신적 결함으로 정상적인 사고와 활동 능력이 결여된 정신착란자, 알코올 중독자, 걸인, 앵벌이, 18세 미만의 불구 폐지자 등"으로 규정했다.

내무부도 '부랑인 등에 관한 업무 처리 지침' 훈령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경범죄처벌법, 경찰관직무집행법 등에 의거하여 치안 차원에서 처벌·조치하도록 되어 있다.


전두환 정권의 통치 전략이 빚어낸 형제복지원 사건
형제복지원 사건은 이와 같이 한국의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드러난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배경으로 하여, 독일의 히틀러 시대와 같은 한국 현대사의 전체주의적 정치 권력의 특수성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히틀러 시대에도 부랑인을 반사회적 행위자로 규정하여 예방적 강제 구금을 벌이는 노동 기피 왕국 작전(Aktion "Arbeitsscheu Reich")이 있었다. 즉, 당시 파행적인 정치 권력의 반민주성·반민중성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사회 불안을 이용하여 체제의 모순을 특히 가난한 미망인이나 독거노인, 장애인 등 일반적으로 빈곤층에게 돌리고 공동체에서 그들의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체제 안정을 도모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이 정치적 정당성이 취약한 통치 권력은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는 통치 수단으로서, 적과 친구를 구별하거나 생성하고, 그 적을 박멸함으로써 권력의 안정성과 함께 정당성을 획득하는 전략을 필사적으로 구사한다. 적의 실체가 없으니 내키는 대로 조작하고 가공할 수 있다. 불법적 군사정부에서 부랑인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교란하는 게으르고 나태하며 반사회적인 '적'으로 항상 등장한다.

불법적 파시스트 정권이던 전두환 정권도, 형님 독재자 박정희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흠결 있는 정치적 정당성에서 벗어나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우고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정화와 사회악 일소를 내세웠다. 그 이름으로 삼청교육, 사회정화위원회의 조직과 사회 정화 국민 운동, 학원 정화 사업인 녹화사업을 실시하였다.

또한 2차례의 대통령 훈령에서 볼 수 있듯이 무질서를 낳는 원인 제공자로 부랑인을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강제 구금과 사회 격리의 통치 전략을 수립·시행하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전후로 벌인 '거리 정화 프로그램'을 통해 부랑인에 대한 단속과 강제 구금은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부랑인에 대한 일제 단속과 강제 구금 결과 수용 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수용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게 된다. 이러한 전두환 정권의 부랑인 정책으로 부랑인은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인데 법적으로는 인간실격(人間失格)의 더러운 물건에 불과한 취급을 받으며 말끔히 청소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 없는 법적 무지위 상태 그 자체였다. 이 기간에 수용된 사람들이 거의 퇴소를 하지 못하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설에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도 이들은 형기 없는 감옥에 갇혀 있다.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
전두환이 형제복지원의 박 원장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해 한 말이다. 이 평가 한마디에 형제복지원 사건의 뒷배를 책임진 권력이 드러난다. 나아가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청와대, 내무부, 법무부, 보안사, 안기부, 검찰, 부산시장 등의 위법한 정치적 압력을 가하며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축소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 

형제복지원 사건은 불법적 군사정권이 정권 보위를 위하여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대량적으로 자행한 '총체적 인권 침해'이다. 국가 범죄란 국가 권력에 의하여 자행된 중대한 인권 유린 행위를 말한다. 정부 범죄, 인권 범죄, 국가에 의해 조종된 범죄, 국제법상의 중대한 범죄, 중대한 인권 침해 행위 등이 국가 범죄와 유사 내지 동일한 의미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제5공화국의 헌법에서도 법률에 의해서만 국민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당시 경찰관직무집행법, 경범죄처벌법, 사회복지사업법, 생활보호법 등 어떠한 법률에도 근거함이 없이 오직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국가 조직에 의한 '단속 체계'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대량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자행된 불법적인 강제 구금 사건이다. 내무부 훈령은 행정규칙에 지나지 않으며 법률이 아니므로 부랑인의 강제 구금에 대한 법적 근거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국가 범죄의 주체에는 제한이 없다.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국가 기구나 국가의 후원을 받는 단체뿐만 아니라 사기업이나 민간 조직조차 국가 범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국가의 지원과 감독을 받는 사회복지법인인 형제복지원의 법적 지위나, 국가와 사회복지법인의 업무 위탁의 법률 관계상 국가는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된 인권 유린에 대하여 관리·감독자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자기 책임으로 국가 책임을 져야 한다. 또한 형제복지원 사건은 정권이 은폐·축소하여 진상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효과적 구제 조치가 가로막혔다는 점에서 체제의 범죄이기도 하다.

국가 폭력과 국가 범죄는 독일의 히틀러 시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수 국민의 동의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같은 시대를 살면서 묵인하고 방조했던 우리 역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 대하여 시민으로서 책임이 있다. 더구나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 규명과 국가 책임이 아직도 인정되지 않은 2013년, 우리가 성찰하고 풀어야 할 일이 여전히 많다.

2013년 2월 10일 일요일

‘누나는 성폭행·아빠는 정신병원’ 살아남은 아이는 묻는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3-02-09일자 기사 '‘누나는 성폭행·아빠는 정신병원’ 살아남은 아이는 묻는다'를 퍼왔습니다.

부산 형제복지원의 생존자 한종선씨는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기 위해” 책 ‘살아남은 아이‘를 썼다. 지난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시위를 하다가 우연히 만난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글쓰기를 권유한 게 계기가 됐다. 경북 구미에 사는 한씨는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국회 앞에 선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사람과사회] 531명 폭행·암매장 당한 형제복지원, 지옥 같은 기억을 자서전 (살아남은 아이)
피해자 한종선씨… 1988년 “감금은 무죄”라고 판결한 대법원 재판장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에게 “올바른 판결이었냐” 묻고 싶었지만

“야간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취침시간 중 감금한 것은 사회적 정당성이 인정된다.”1988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대법원은 감금죄에 대해 이렇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장은 총리 후보자로 지목됐던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었다. 민주통합당 이언주 대변인은 “‘부산판 도가니’라고 불리는 이 사건에서 재판장이 ‘사회적 약자의 상징’인 김 후보자라는 것은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총리 후보자에서 사퇴한 다음날인 1월30일,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38)씨는 “김 위원장이 국회 청문회에 나오면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는데”라며 그의 사퇴를 아쉬워했다.

살해돼 해부용으로 팔려간 주검

987년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인 부산 형제복지원(수용인원 3146명)에서 직원의 구타로 수용자 1명이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검찰 조사 결과 복지원이 부랑아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이 없는 사람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해 암매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12년 동안 무려 531명이 사망했다. 대부분 “굶어 죽거나 맞아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일부 주검은 300만∼500만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선 게 사건의 배경이었다.한종선씨는 1984년, 9살 때 12살인 누나와 함께 복지원에 끌려갔다. 그로부터 3년 뒤 복지원이 폐쇄됐지만 그는 짐승의 눈빛과 끔찍한 기억을 지닌 아이가 됐다. 한씨의 누나는 성폭행을 당해 정신분열증을 얻었고 구두닦이였던 아버지 역시 술에 취해 거리에서 자다가 복지원에 끌려온 뒤 지금까지 정신병원을 떠돌고 있다. 이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지난해 11월 펴낸 저서 (살아남은 아이)에서 한씨는 지옥과도 같은 삶을 증언했다. “우리들의 의복은 하얀색 팬티와 러닝셔츠, 감색 추리닝 한 벌, 그리고 검정 고무신이 전부였다. 몸이 꽝꽝 얼어붙는 추위가 겨울 내내 이어졌다. 거의 모든 원생들의 손과 발이 퉁퉁 부어 동상에 걸렸다. 우리는 항상 새벽 4시에 기상했다. 식단은 언제나 꽁보리밥에 생선 썩은 전어젓과 소금 뿌린 깍두기. 우리는 매일같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새벽부터 군가를 부르며 구보를 돌았다.”형제복지원은 상명하복이 지배하는 군대였다. 장기 복무 헌병 부사관 출신인 박인근 원장이 중대장-소대장-총무-조장-소대원을 지휘했다. 언제든지 그들의 자리를 교체할 수 있는 박 원장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군기를 잡기 위해” 조장은 매일 때렸다. “때리는 조장들은 아무 꼬투리나 잡아서 때린다. 맞는 소대원들은 왜 맞는지도 모른 채 맞는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연발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복지원을 맴돌았다. 한씨는 죽어나가는 원생들을 서너 번 정도 목격했다.복지원은 어린아이건 어른이건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왔다. 국고보조금이 사람 수대로 나왔기 때문이다. 갇힌 이들 중에는 밤늦게 귀가하던 회사원, 바람을 쐬러 나온 여성, 자갈치시장의 노점상, 농촌에서 흘러든 일용직 노동자, 심지어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있었다. 자활 능력이 없는 사람은 10% 정도뿐이었다. 나머지는 멀쩡한 상태로 잡혀와 복지원에서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지체장애인이 됐다. 한씨의 누나와 아버지처럼 말이다. 복지원은 운영자금 명목으로 1985년 18억원, 1986년 20억원 남짓을 중앙정부와 부산시에서 지원받았다.

박인근 한 명의 문제가 아니었다

박인근 원장도 승승장구했다. 1981년 1월 장애자의 날 석류장을, 1984년 11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전두환 대통령에게서 받았고 전국부랑인복지시설연합회 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던 1987년 1월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밝혀진다. 당시 울산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가 그해 1월16일 형제복지원을 압수수색했다. “교도소를 뺨치는 어머어마한 철문과 성곽 같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복지원의 원장실에서는 20억원이 넘는 각종 예금증서와 달러, 엔화가 쏟아졌다. 박 원장은 2년간의 국고보조금 39억원 가운데 11억원을 횡령했고 수용자들을 감금했음이 드러났다. 형제복지원은 폐쇄됐고 고아를 제외한 2천여 명이 한꺼번에 풀려났다. 인권유린의 피해자인데도 아무런 보상도, 재활 교육도 없었다.김 변호사는 1993년 펴낸 저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에서 당시 외압에 시달렸음을 고백했다. 수사 검사는 원래 징역 20년을 구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검찰총장 등 ‘윗분들’은 징역 15년 혹은 징역 10년을 요구했다. 횡령 액수도 6억원으로 축소해야 했다. 1987년 6월 검찰은 박 원장에게 징역 15년과 벌금 6억원을 구형했고 1심 재판부는 징역 10년과 벌금 6억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박 원장의 형량이 점점 줄어들었다. 대법원이 감금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두 차례나 원심을 파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장은 1987년 11월 1차 항소심에서 벌금이 사라진 징역 4년을 선고받더니 1988년 7월 2차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88년 3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한 사건이 일곱 번의 재판을 거치는 사이 원장에 대한 형량은 당초의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원장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감금한 행위는 대법원의 고집에 의해서 무죄로 확정됐다.”([브레이크 없는 벤츠]에서) “대법원의 고집”에는 김용준 위원장도 당연히 포함된다.한종선씨는 “감금은 폭행·살인을 증명하는 첫 단추였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그걸 무죄로 만드니까 폭행·살인죄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인권유린이 분명히 있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김용준 위원장이 청문회에 서면 ‘당시 무죄를 선고한 게 올바른 판결이었다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 대답마저도 이제 못 듣게 됐다.” 그는 또 당시 형제복지원의 감금이 불법이 아니었다면 정부가 왜 시설을 폐쇄하고 수용자를 풀어줬느냐고 반문했다.

지금도 복지재단 운영하는 박인근 일가

벌금도 선고받지 않고 2년6개월 만에 풀려난 박인근 원장은 재기했다. 법인의 이름만 수차례 바꿔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이 됐다. 1929년생인 박 원장은 2011년 4월7일까지 형제재단의 이사로 활동했다. 현재는 3남 박천광(37)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박인근 원장은 2008년 8월 ‘대안학교’인 신영중·고교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뒤 2010년 12월 첫째딸에게 넘겼다.“사이코패스가 되지 않기 위해” 책을 썼다는 한종선씨가 말한다. “도가니 사건이 지금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부터 바로잡아 다시는 이런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대로 된 법치국가라면 피해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반만이라도 가해자가 죄를 씻을 수 있도록 벌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