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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9일 일요일

헌신 없는 종교


이글은 한겨레신문 종교전문 조현 기자 블로그 휴심정 2013-05-15일자 기사 '헌신 없는 종교'를 퍼왔습니다.

소백산 산위의마을 촌장 박기호 신부 사진 조현

자신의 명예와 소유 안내려놓고 
대물림까지 하려드는 종교인들
인간 삶에 기여 망각하면 ‘사회악’ 
희생과 헌신, 근본으로 돌아가자


종교인들의 문제나 교회 내 갈등이 종종 세간의 화제다. 그 때마다 필자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존 시 사제피정에서 했던 말씀을 회상하곤 한다.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사제생활 하기 좋은 나라가 없다고 해요. 외국인 선교사가 내게 말하기를, ‘한국은 성직자 생활의 파라다이스다!’ 하더라고.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부족해서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종교에 대한 공경심과 교직자에 대한 우대의 정서는 남다른 전통이다.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에서 마치 종교 엑스포를 이룰 만큼 성장하게 만든 배경이자 동시에 다종화 대형화 기업화 하는 부정적 현상의 환경이라고도 생각된다.
근래 한국의 종교사회는 지성의 뭇매를 맞고 있다. 종교 자체가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종교 교직자, 지도자들의 생활과 운영과 이념적 태도들이 그 대상으로 보인다.  인터넷 등 새로운 환경으로 불특정 다수의 견해가 여과도 예의도 없이 출몰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원천적 사실들까지 관면 받을 수는 없다.  폭로와 질책으로 상처받고 권위가 망가지는 것은 물론 두려움의 위협도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비판하고 질책한다는 것은 애증을 전제로 한 것이니 무관심보다 더 무섭기야 하겠는가? 종교인에 대한 지탄을 넘어 종교 자체에 대한 무관심의 계절이 올 것만 같다. 이 준엄한 죄업을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고. 두렵다! 
동서고금의 종교 역사가 늘 그런 질곡과 부침의 궤적을 가지고 있다. 민중 혁명의 불세례를 받아 개처럼 패대기 당해 쫓겨나기도 했고 더러는 처형도 당했다. 교단에서는 ‘증거와 순교의 역사’로 미화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궁색하다. 종교가 권력과 부자의 편에서 억압과 불평등을 동조 방관했던 태도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더러는 민중의 희망과 신뢰의 유일한 의지처가 되어준 역사도 있다.  
마하비라, 공자, 석가, 예수, 모하멧에서 현대 종단까지, 종교의 숭조들은 역사의 실존 인물이면서 동시에 시대가 낳은 정신이기도 하다. 사회적 삶이 도탄에 빠지고 순리가 부정되는 현상이 지속될 때는 어김없이 예언자와 성현과 선각과 큰 스승들이 나타났었다.  종교 지도자라면 모름지기 시대 현상에 나타난 영적 정신적, 문화적 징표를 읽는 영성의 눈을 가져야 대안의 지혜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니 그 영성을 얻으려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다. 무욕과 청빈에 담긴 영성의 삶은 재물이나 권력 명예와는 공존불가의 물건이다.
신도들은 자기 신앙을 향도하는 교직자들이 오로지 영성의 삶에 전임 진력을 요구하며 대신 수행과 증거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부담하겠다는 의무감으로 예물을 봉헌한다. 청원기복의 제물이건 건축기금이건 감사예물이건 성격은 동일하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 기능이 종교에서 지성들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려고 돈 들여 공부한 것이니 마땅하고 옳은 현상이다. 문제는 시대를 읽어야 할 종교인들의 눈에 실명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수행에만 너무 전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의 향유에 정신 팔고 있기 때문일까?  따악! 내리치는 죽비 소리가 크다.  
종교인이 신도의 예물을 받을 때라면 늘 자신이 받은 돈의 성격을 관상(觀想)해볼 의무가 있다. 돈에는 초상화의 눈이 있고 혼이 담겨 있다. 신자가 땀 흘려 노동하여 내는 예물의 혼과 부정한 재물에서 떼어내 바치는 돈의 혼이 결코 같지 않다. 부와 권력을 가진 상류 인텔리 계층의 신자가 내는 예물에는 그들의 혼과 소망이 담겨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파출부와 편의점 알바를 하는 젊은이가 내는 예물에는 그들의 눈물과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레를 돌리는 간디

그들은 신의 제단 앞에서 공평하다. 모두가 한 분 아버지의 자녀이고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다른 것은 예물의 금액이다. 교직자들은 과연 그들 모두를 형제로서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까? 누구를 편들게 되어 있을까? 정답은 ‘평소에 누구와 더 자주 만나고 식탁에 자주 앉고 값진 선물을 자주 받는가?’ 이다. 두 형제 중에 누구의 소망과 정서가 교직자의 마음을 얻고 뼈 속까지 차지할 것 같은가? 이것은 종교인들의 불편한 진실이다.
이렇게 해서 같은 교단의 교직자로서 운명이 갈라지는데, 어떤 이는 체육관처럼 모인 신도들 앞에서 진보 좌파를 신앙의 적으로 선포하는 열광적인 설교를 하고, 외제 승용차와 고급 레스토랑의 고품격 식사를 대접받고 최고 상류층과 교재 한다. 그들은 교직자의 기념일을 잘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정성도 있다.  반면에 어떤 교직자는 주일인데도 겨우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신도들과 예배를 드리며 북녘 동포 돕기 저금통을 돌리고, 잔치국수를 나누어 먹고 헤어진다.  그런데 신자들 사이에 정치적 논쟁이 생기고 선거 때가 되면 교회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단, 예수에게는 중립이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이 씨가 된 듯하다. 바오로 사도는 “대사제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고 했다. 사제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내어놓는 자다. 그래서 예수를 ‘대사제’라고 부른다. 세상과 하늘을 화해시키고자 자기 목숨을 제물로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종교인들은 자신의 결정권과 명예와 소유는 결코 내려놓지 않고 외려 대물림까지 하려 든다. 신도들에게는 헌신과 헌납을 독려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내어 놓지 않는다.
인도의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면서, 희생 없는 제사, 헌신 없는 종교를 ‘사회악’이라 지탄하였다. 예수와 그 추종의 집회 사이에 큰 간극이 벌어져 있음을 통박하는 말이다. 이미 70여 년 전 간디의 생각일진데 오늘날 우리 종교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데 왜 이렇게도 낯부끄럽고 민망스러운가?
우리 사회는 정신세계의 붕괴로 인한 중증 질환으로 신음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의 착취와 압제가 진군한다. 성과주의 사회의 피로 누적과 좌절감으로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닌 집단 우울증과 자살이 집단 증후군을 이루고 있다. 물신의 우상과 향락과 명품주의 소비문화로 영혼과 정신을 포박하고 가위 누르는 악령의 손길이 바이러스처럼 창궐하고 있다.
대가족과 노동의 삶은 해체되어 집은 있어도 삶이 없고 가족은 있어도 가정이 없다. 시민의 권리와 자유는 있으되 책임은 없다. 공동체적 가치들이 샅샅이 해체되고 있다. 남북분단에 동서로 갈라지고, 보혁 빈부(保革 貧富)로, 명문 학벌주의와 지역우월주의로 갈라져 투석전을 벌이는 시대, 이념도 사상도 아닌 막연한 편견과 감성적 선정적 호불호의 아집으로 정치의식이 파멸을 맞고 있다. 천명을 받든 종교인이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시국일진데 기껏 생활 태도를 놓고 다툼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하지 않는가? 이건 정말 낭패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어디서부터 문제일까? 바둑에는 복기라는 것이 있다. 수를 잘못 읽은 지점을 찾는 것이다. 존경도 받고 제물도 받는 것에 익숙해지고 관성에 빠져 자기다움과 목적성을 잃어버린 문제로 보인다. 종교가 종교다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이유가 없는 사형선고다.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 성장을 계속하면 괴물 밖에 더될까? 어떤 이는 영상에 등장한 모습이 실제 괴물로 보였다는 이도 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낙원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살게 하였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만족의 유혹에 넘어가 파라다이스의 완성을 추구했고, 즉시 추방당했다. 바벨탑도 소돔과 고모라 도시도 모두 자신들의 천국을 누리고자 함에 내린 재앙이었다. 종교인은 종교를 파라다이스로 여기는 순간 타락이란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간디의 일곱 가지 사회악, 그 어떤 사회적 가치도 인간 삶의 발전에 기여하는 목적성을 잃어버리면 악의 기능만 남는다는 훈화를 기억해 두자.
근본으로 돌아가자!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는 희생과 헌신에 종교의 정체성이 빛난다.  거듭남을 위해 살을 깎는 각오는 그 자체로 고행이다. 그러나  고행 극기란 모든 종교의 필수적 전통이며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 종교의 거듭남의비방(秘方)으로 ‘100일 동안 쑥만 먹어야 한다!’ 면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

박기호 신부

박기호 신부1991년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1998년 ‘소비주의 시대의 그리스도 따르기’를 위해 예수살이공동체를 만들어 실천적 예수운동을 전개했다. 소비주의 시대에 주체적 젊은이를 양성하기 위한 배동교육 실시했고, 5년 전 충북 단양 소백산 산위의 마을에서 일반 신자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이메일 : sanimal@catholic.or.kr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내 생의 짐과 멍에는 무엇인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종교전문 조현기자의 블로그 휴심정 2012-12-27일자 '내 생의 짐과 멍에는 무엇인가?'를 퍼왔습니다.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인 강제균 할아버지와 소. 사진 강재훈 기자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30).”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시오. 내가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시오. 그러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나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행복한 일’이 없어서 인가? 아니면 ‘행복감’이 없어서 인가? 행복과 행복감이 같은 건가요? 평균 성적이 60점 밖에 못 받던 아이는 65점만 되어도 행복해 하는데 늘 1~2등을 다투는 아이들은 행복감이 없이 긴장으로 살아갑니다. 삶의 멍에와 무거운 짐도 그 자체가 불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무엇이 무거운 짐이고 멍에인가? 번뇌와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우환과 불행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것들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대면(對面)이 필요합니다. 내 삶의 정황들을 정확하게 목격하는 것이지요.

가정이나 사업에서나 내게 요구되는 것들이 고난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자녀, 노부모의 치매와 병환, 부채, 알콜 도박 게임 중독, 저질러 놓은 사고...

돌발적이거나 일시적 사태는 누구나 기꺼이 감당합니다. 그러나 기약 없이 반복 지속되고 개선될 징조가 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사태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해보지 않고서야 이해불급이지요. 허덕이고 지치고 좌절합니다. 무거운 멍에에 짓눌립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 내 운명이나 팔자가 이런 걸까? 슬픔이고 분노이고 고통입니다.

내 무거운 멍에의 실체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고 싶다면, 이렇게 내 삶을 압도해 오는 사태들을 대면하십시오. ‘대면(對面)’이란 감정이 아닌 이성의 작용입니다. 슬픔이나 분노에 묶여서는 실체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냉철하게 관조하고 목격하는 것이 대면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자기 성찰 능력’입니다.

자세히 바라보면 네 가지가 보입니다. 1) 내 행위에서 생긴 일 2) 내 행위와 상관없이 나에게 다가온 일 3) 현재 진행 중인 일 4) 앞으로 다가올 일 등입니다.

어떤 일이건 나와 어떤 상관이 있을 때만 내게 짐이 되고 멍에가 됩니다. 그러므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란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제 3자라면 누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신경이 쓰여진다는 사실 자체로 나와 상관을 갖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짐이 되는 것은 두 가지 때문인데 ‘의무감’ 과 ‘두려움’ 입니다. 고통도 번뇌도 분노도 미움도 모두 의무감과 두려움에서 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의무감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의무감은 현재의 것이고 두려움은 미래의 유형이지요.

일어난 일, 내게 요구되는 일의 요청이 내 자신에게 있었건 가족에게 있었건 국가 사회로부터 왔건 간에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 혹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가 바로 의무감입니다. 의무감이란 법적 책임의 의무가 가장 낮은 단계이고 관습적 사회적 의무도 있고 도덕적 의무가 가장 고결한 의무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측은지심에서 도와줘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도덕적 의무감이고요, 세금을 내고 군대에 가고 교통신호를 지키는 것은 법적 의무감이고요, 결혼을 한다. 부모님을 모신다. 관혼상제에 참석한다든가 하는 것은 관습적 사회적 의무감입니다. 의무를 피하면 뭔가에 걸리게 되므로 걸리지 않으려다보니 멍에로 느껴집니다.

두려움이란 아직 현실화 되지 않은 어떤 문제가 다가오고 있는 미래의 실체입니다. 부채 상환 독촉 날이 다가온다. 죄를 지었는데 밝혀질 것 같다. 내 자녀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직장을 잃게 되면, 승진에서 탈락되면... 일이 어떻게 될런지 알수 없는 미궁 때문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확정된 일이라도 현재로 실행되기 전까지는 미래의 일이니까 100%가 아닙니다. 미래의 일 중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겠지요. 내 생애의 무거운 짐과 멍에는 무엇인가요?

의무감과 두려움 문제를 해결하면 짐이 가볍게 되겠지요. 가볍다는 것은 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감당할 힘을 갖는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해답을 당신에게서 찾으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배워라.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편하다.”

박기호 신부
 1991년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1998년 ‘소비주의 시대의 그리스도 따르기’를 위해 예수살이공동체를 만들어 실천적 예수운동을 전개했다. 소비주의 시대에 주체적 젊은이를 양성하기 위한 배동교육 실시했고, 5년 전 충북 단양 소백산 산위의 마을에서 일반 신자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이메일 : sanimal@catholic.or.kr 

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이글은 한겨레신문 종교전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 2012-11-20일자 기사 '“하느님 사랑과 이웃...'을 퍼왔습니다.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평생 이웃사랑을 실천한 마더 테레사 수녀. 지난 1988년 남아프리카를 방문해 한 보육원에서 아이를 안고 있다. 사진 <한겨레> 자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8~34).”

‘보수(保守)란 전통적 관습 안에 담겨있는 도덕과 윤리의 가치를 지키려는 신념과 태도’ 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인간의 도리로 여기고 중요한 가치로 삼고 보호하고 관습이나 전통으로 물려주려는 것이 보수주의 입니다.

도덕은 사물을 대하는 바른 마음입니다. 양심이고 내면의 법입니다. 도덕이 관계가 되면 윤리라고 합니다. 행위이고 태도입니다. 도덕은 인격이며 품성적 차원의 도(道)이고, 윤리는 공중(公衆)의 차원이며 공생의 도입니다.

밥을 굶고 있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혼자 배불리 먹는 것은 마음에 찔리게 되는데 그래서 조금만 먹자!로 판단함이 도덕적 행위입니다. 다음에 굶고 있는 사람에게 같이 먹자고 하거나 누룽지 한 조각이라도 나누는 것은 윤리입니다.

전철에 앉아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도리가 아니고 그러면 못씁니다.

사람의 도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대한 존재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하늘과 조상과 위인의 삶을 기념하고 경신례와 지성과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숭천경신(崇天敬神)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도리는 인정(人情)입니다. 이웃과 사이좋음으로 지내고 특별히 약자에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하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한다) 추식해의(推食解衣:밥을 내어주고 옷을 벗어준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전승받아 살고 가르쳐서 바른 성품을 만들고 관습을 따르게 하는 것이 가부장의 역할이고 사회적으로는 종교의 역할입니다.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뜻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하느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원수를 사랑하고 약자를 섬기라.”

초월적인 대상, 하늘을 숭상하고 공동체적 질서와 예의를 강조하는 이념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절제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교육’이란 개념은 ‘본능적 욕구에 대한 자기 절제의 능력을 가르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주변에 사람들이 있건 말건 상관 않고 애정 행위를 하는 것을 예의 없는 부당한 짓으로 단정합니다. 개인의 자유보다 관계적 삶의 절제, 이웃의 아픔에 배려하는 공동체적 의무를 강조하는 것을 인문학에서 말하는 보수(保守)의 가치입니다.

물질 숭배가 아닌 하느님 사랑,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아닌 사랑의 실행을 강조하신 예수님은 보수주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 가르침을 유대교의 전통(레위기와 신명기)에서 끌어내시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지요.

공동체 삶은 정직하고 생명과 자연의 섭리에 따르며 소유와 물질주의를 거절합니다. 모두를 사랑할 수 없다면 가까운 이웃을 가족으로 여기는 공동생활로 삽니다.

공동체는 현대에서 하느님의 법과 인간의 도리를 따라 사는 가장 원리적이고 도덕주의로 사는 삶이기 때문에 공동체는 근본주의이고 보수주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정치적 입장에서 공박하는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은 개념의 짝퉁에 불과합니다. 자본과 권력을 절대시 하면서 사상과 이념이 다른 이를 적대시하고 타종교와 교파를 박멸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은 종교적 계명으로도 인간의 도리로도 잘못된 것입니다. 보수주의란 개념의 변질과 오염, 이념의 짝퉁이 진짜 너무 심하고 너무 많습니다.

오늘 주일미사에 입촌선서를 한 최석봉 데시데리오 형제에게 건강과 평화의 공동생활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박기호 신부1991년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1998년 ‘소비주의 시대의 그리스도 따르기’를 위해 예수살이공동체를 만들어 실천적 예수운동을 전개했다. 소비주의 시대에 주체적 젊은이를 양성하기 위한 배동교육 실시했고, 5년 전 충북 단양 소백산 산위의 마을에서 일반 신자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이메일 : sanimal@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