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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2일 화요일

<동아일보>의 갑작스런 ‘박근혜 정부 때리기’


이글은 시사IN 2013-03-12일자 기사 '(동아일보)의 갑작스런 ‘박근혜 정부 때리기’'를 퍼왔습니다.
(동아일보)가 표변했다. 박근혜 정부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현 정부와의 소원한 관계, 구독부수 급감에 따른 위기감 탓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권과 가깝다는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변신이라는 견해도 있다.

시간을 반세기 전으로 되돌려보자.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최대 맞수는 (동아일보)였다. 선거 직전 (동아일보)는 박 의장의 친일 행적과 남로당 경력을 폭로했다. 막판 변수에 휘청했던 박 의장은 ‘다행히’ 이 보도에 대한 역풍으로 호남 지역에서 몰표가 나와 윤보선 후보를 15만여 표 차이로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당선된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동아일보)에 대한 회유에 나섰다. (동아일보) 사장 출신인 최두선씨를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거세지자 그를 희생양으로 내쳤다. 최두선의 기용과 퇴출은 ‘박정희표 용인술’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반세기 후 새로 출범하는 박근혜호의 암초로 다시 (동아일보)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대선이 끝나고부터다. (동아일보) 계열의 종합편성채널인 채널A에서 각종 문제가 제기된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사실상 추천한 사람이 박근혜 당선자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후 이재오 의원 등 친이계 정치인들이 이 후보자를 맹공격해 자진 사퇴하게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김용준 총리 후보자에 대한 집중 검증이었다. (동아일보)는 김 후보자 아들의 병역 문제와 위장전입 의혹 등에 대한 단독 기사를 쏟아내며 박 당선자를 궁지로 몰았다. 결국 김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고, 박 당선자가 ‘신상털기식 검증’에 문제 제기를 하고, (조선일보)가 이를 받아서 언론 검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동아일보)는 이를 공격하는 보도까지 쏟아내며 공세를 이어갔다. 

다음은 (동아일보)가 박근혜 정부 초대 청와대 참모와 내각의 검증과 관련해 쏟아낸 단독기사 제목이다. “허태열 박사논문, 학술지 논문 복사 수준 표절”(2월20일), “서승환 부인은 ‘대치동 사교육계 대모’”(2월19일), “김병관 국방 후보 사단장 때 비리보고 묵살해 경고받아”(2월16일), “여권, 인사 검증을 ‘신상털기’라며 화풀이…일부 언론 동조”(2월4일), “김(용준) 후보-친구, 부인들 명의로 농지 매입”(1월29일), “김용준 총리 후보자 장남, 고의 감량 병역면제 의혹”(1월28일). 

ⓒ시사IN 양한모

(동아일보)는 계열사인 채널A와 공동으로 30여 명의 기자가 인사 검증에 매달려 단독 기사들을 쏟아냈다. 한 (조선일보) 기자는 “(동아일보)가 경찰 라인의 기자들까지 빼서 내각 후보자들 인사 검증에 매달렸다.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한 (동아일보) 기자는 “국장 지시사항으로 ‘비판할 것은 비판하자’며 인사 검증에 대한 지침이 내려왔다. 취재한 내용이 가감 없이 보도되는 것을 보고 기자들도 내심 놀랐다”라고 말했다. 

친이계의 박근혜 공격과 궤를 같이해

(동아일보)의 이런 박근혜 견제 보도는 친이계 정치인들의 박근혜 정부 공격과 궤를 같이해 눈길을 끌었다.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보다 성시경(성균관대·고시·경기고) 내각이 더 편중되었다”라고 비난했다. 정의화·심재철·정병국 등 친이계 새누리당 의원들은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사퇴를 종용하는 등 박근혜 정부 초대 내각의 인선 실패를 기정사실화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정 지지율이 50% 이하로 떨어진 상황에서 여당 성향의 보수지로 분류되던 (동아일보)가 이탈하고 친이계가 ‘여당 내 야당’ 노릇을 하는 것이 박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수행에 장벽이 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친이계의 좌장 격인 이재오 의원은 “박근혜 정부가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친이계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친이 의원 10여 명만 결집해도 큰 장벽이 될 것이다”라고 예고한 적이 있다.  

대체로 역대 정권은 특정 언론사와 밀월관계에 있었다.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 두 군사정권 시절에는 (조선일보)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고, 김대중 정부 시절의 (매일경제)는 사주(장대환)가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기도 했으며, 노무현 정부 때는 (중앙일보) 사주(홍석현)가 주미 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동아일보)가 최시중 방통위원장, 이동관 홍보수석 등을 배출하며 정권과 밀월관계를 형성했다. 

이처럼 이명박 정권 때 권력과 한 몸이나 다름없던 (동아일보)가 표변한 것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하나는 이명박 정부 때와 달리 현 정부와 핫라인을 구축하지 못한 것에 대한 초조감 때문이라는 것. 부국장 출신인 김동철씨가 박근혜 대선캠프 공보위원으로, (주간동아) 기자 출신인 김시관씨가 공보팀으로 활동했지만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부사장 출신인 안병훈씨가 2007년 박근혜 후보의 경선캠프에서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조선일보)나, 박 당선자의 최측근 조언그룹으로 꼽히는 홍사덕 전 의원을 배출한 (중앙일보) 등과 비교하면 박근혜 대통령과의 고리가 약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조선일보) 부국장 출신 이종원씨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중앙일보) 여론조사팀장 출신인 김행씨가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된 것과 달리 (동아일보) 출신 중에 초대 청와대에 들어간 인물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 집권 기간 상대적인 ‘불이익’을 예상한 (동아일보)가 선제 조치로 비판의 날을 세운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권과 대립각을 형성해 이후 세무조사나 검찰 수사 같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탄압’으로 보일 명분을 축적한다는 것이다. 

ⓒ시사IN 조남진 서울 광화문에 있는 <동아일보> 사옥. <동아일보>는 새 편집국장 체제로 바뀐 뒤 박근혜 정부 비판에 집중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정권과의 각 세우기가 (동아일보) 내부 사정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동아일보)는 최근 몇 년간 발행부수가 급감했다. 2002년 153만 부였던 유료 구독부수(발행부수는 205만 부)는 2011년 74만9000부(발행부수는 119만8000부)로 급전직하했다. 2010년 86만7000부(발행부수는 124만9000부)였던 것과 비교해도 하락 폭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ABC협회 통계). 

구독부수가 줄어드는 것은 (동아일보)만의 문제는 아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도 줄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하락세가 두드러진다. 2010년과 2011년 자료를 비교해보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유료 구독부수가 4만 부 줄어드는 동안 (동아일보)는 그 3배인 12만 부 가까이가 줄었다. 발행부수 대비 구독부수 비율도 (동아일보)는 62.6%(2011년 기준)로 75.2%인 (조선일보)나 72.6%인 (중앙일보)에 비해 떨어진다.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동아일보)는 ‘부동의 3위’로 확실하게 내려앉았다. 부수가 줄자 지난해 10월에는 서울 오금동 인쇄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 71명을 정리해고하기도 했다.

비주류였던 기자의 편집국장 임명

이 때문에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 선생의 증손자로, 현재 (동아일보) 경영과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김재호 사장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지난해 10월 고려대 설립 이래 처음으로 교수 138명이 ‘고대의 위기 상황에 대한 교수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김재호 이사장은 취임 이래 지금까지 우리 대학의 발전 방향과 비전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현재 (동아일보)는 김재호 사장을 보좌하는 임채청 미디어전략담당 상무와 김승환 경영전략실장이 실세로 꼽힌다. 이들이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 (동아일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꺼낸 카드가 바로 최영훈 편집국장이다. 지난해 6월, 정치부장 경력이 없는 그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편집국장에 임명되자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대체로 최영훈 편집국장 체제에 호의적이다. 한 (동아일보) 기자는 “최 국장은 후배들에게 신망은 두터웠지만 사내에서 비주류였다. 그가 편집국장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권에 줄을 섰다가 신문이 망가졌다는 비난을 들은 경영진이 최영훈 카드를 앞세워 새 정권과 대립각을 형성함으로써 (동아일보)의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것으로 읽힌다. 최 국장 외에도 한직을 전전하던 기자들이 최근 취재 일선에 많이 복귀했다”라고 말했다. 

최영훈 편집국장은 (동아일보)가 인사 검증에 강한 것은 전통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사 검증 특종은 (동아일보)의 DNA 덕분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장관 3명과 서울시장을 낙마시켰고 이후 최형우 내무부 장관도 퇴진시켰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장대환·장상 총리 후보자 낙마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다시 1등 신문이 되기 위해 빛나는 전통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상털기식 검증’이라는 발언과 이를 옹호한 (조선일보)에 대해 곧바로 역공 보도를 한 것에 대해서도 최 국장은 “(조선일보)가 우리나라만 예의에 어긋나고 엄격히 검증한다는 듯 이상한 제목을 달았다. 우리 신문사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국도 우리보다 엄격하게 검증한다. 언론사끼리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정도를 얘기했다”라고 말했다.  

(동아일보)의 회생 모형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바로 채널A와의 협업이다. 처음 종합편성채널 사업자가 선정될 무렵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서 채널A는 ‘가장 빨리 망할 종편채널’로 꼽혔다. 그런데 지금 채널A는 시청률 수위를 다투고 있다. 한 채널A 기자는 “채널A를 살린 것은 (이영돈의 먹거리 X파일)이나 (박종진의 쾌도난마) 등 ‘용병’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외부 영입인물들이 성과를 내면서 조직문화가 유연해진 것 같다. 조·중·동 3사 중에서 지면 기자와 종편 기자들이 통합뉴스룸 체제로 운영되는 곳은 (동아일보)가 유일하다”라고 설명했다. 

김재호 사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신문기자와 방송기자가 함께 일하면서 다져진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뉴스 콘텐츠의 질을 확실하게 차별화해 나가자”라는 말로 이런 통합뉴스룸 체제를 강조하기도 했다. 

채널A의 부상과 관련해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바로 선정주의다. 대선 기간 ‘보수의 팟캐스트’라 불린 종편 중에서도 채널A의 선정성이 가장 심했다. 대선방송 심의규정 위반 건수는 10건(경고 5, 주의 4, 권고 1)으로 지상파 방송사 전체 위반 건수인 5건보다 많았다. 시청률 상승의 비결은 바로 이런 자극적인 보도에 힘입은 바 크다. (동아일보)의 냉정한 인사 검증 보도가 일시적인 흥행 전략으로 읽힐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런 (동아일보)의 공세에 대해 청와대는 일단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한 여권 인사는 “정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뼈아픈 일격이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생존전략 혹은 3등 마케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정권에 대한 비판을 통해 독자를 결집하려는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최초로 인터뷰한 언론사가 (동아일보)였다는 점을 상기했다(지방 언론사와 공동 인터뷰). 

“전 정권과 관련 있는 실세들 건재”

(동아일보)가 전 정권과 가까웠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일시적인 ‘이미지 변신 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동아일보)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전 정권과 관련 있는 (동아일보) 내부 실세들이 여전히 건재하다. 비판적 논조를 오래 유지하기에는 최영훈 국장의 입지가 불안하다. 정권과의 관계 개선 여부가 결국 변수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다시 반세기 전 (동아일보)와 박정희 정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언론권력과 정치권력의 대립은 결국 정치권력의 완승으로 끝났다. 1974년 10월24일 180여 명의 (동아일보) 기자들이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며 박정희 정권과 맞섰지만 결국 사주가 굴복해 1975년 3월17일 130여 명의 기자·PD·아나운서가 해직됐다. 이후 핵심 인력이 빠진 (동아일보)는 야성을 잃고 ‘어설픈 보수지’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40년 뒤 벌어진 ‘리턴매치’의 승자는 누가 될까? 정권이 출범하기도 전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안겨준 (동아일보)를 박 대통령이 품고 갈 수 있을까? (동아일보)는 언론인 고종석씨가 말했던 대로 ‘1단 기사나 행간을 통해서라도 시대의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던, 한국의 (아사히 신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떤 쪽이냐에 따라 정치권과 언론의 지형은 또 요동을 칠 것이다. 

고재열 기자  |  scoop@sisain.co.kr

2013년 2월 3일 일요일

‘담장’ 넘은 올드보이들


이글은 한겨레21 2013-02-04일자 제947호 기사 '‘담장’ 넘은 올드보이들'을 퍼왔습니다.
[특집2] 한화갑·한광옥·김경재 등 동교동 가신그룹의 드라마틱한 변신… ‘소외’와 인정 욕구 때문인가, 제자리 찾은 걸까

정치인에겐 정년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에 대한 욕망에는 끝이 없다. 노욕·변절·배신이라는 꼬리표보다 자신의 권한·입지·존재가 망각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더 크기 때문일까. 대의명분과 가치보다는 자리에 대한 욕심으로 옷을 바꿔입고, 진영을 넘나든다. 사회의 다른 분야보다 정치권에서 존경받을 만한 원로를 찾아보기 더욱 어려운 까닭이다.

» 한광옥·김경재·한화갑(왼쪽부터) 등 동교동의 가신들은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당선인을 지원했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배신자’라는 낙인보다 컸던 것일까. 한겨레 신소영 기자, 사진공동취재단

통합은커녕 되레 분열 낳는 언사 남발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신은 한화갑(74)·한광옥(71)·김경재(71) 등 동교동 가신그룹이 보여줬다. 평생의 주군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욕은커녕 슬그머니 담장을 넘어가 상대 진영 쪽에 줄을 섰다. 박근혜 당선인이 이들의 영입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명분은 ‘국민 통합’과 ‘동서 화합’이었다. 하지만 대선을 경과하는 동안, 그리고 이후에도 이들은 오히려 분열을 부추기는 언사로 논란을 몰고 다녔다.
물론 최악은 단연 김경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대통합수석부위원장의 몫이다. 그는 “광주 사람들이 문재인, 안철수를 뽑는 건 민주의 역적이고 정의에 대한 배반”이라는 등 각종 막말로 파문을 불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해 “노아무개는 싸가지 없는 발언이나 하고 호남 사람들을 한 맺히게 했다”는 말까지 했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48%도 중요하지만 우선 51%를 대변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등 통합과 거리가 먼 그의 독설은 대선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박근혜 당선인이 부산 유치를 공약한 해양수산부를 호남에 유치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두고 박 당선인의 박선규 대변인이 “그건 김씨의 사견일 뿐”이라고 공식 부인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한때 ‘리틀 DJ’라고까지 불렸던 한화갑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권노갑 상임고문과 함께 동교동의 ‘양갑’으로 통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선 권 고문의 그늘에 가린 ‘을’의 처지였다. 한 전 고문이 2001년 11월20일 대선 출마 선언에서 “나는 민주당에서 정통성, 정체성, 연속성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애써 강조한 건 다분히 권 고문을 의식한 발언이었다고 한다. 당시 동교동의 전반적인 기류는 한 전 고문의 출마를 만류하는 쪽이었다.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출마했고, 제주도에서 열린 민주당의 첫 대선 후보 순회 경선에서 1위를 기록하지만 광주에선 3위에 그쳐 후보직을 사퇴했다. 한 전 고문은 이 과정에 자신의 동지였던 동교동 그룹, 정확히는 권노갑 고문이 반대 쪽으로 막후에서 움직였다고 믿는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제주도에서 1위를 한 것이 나에게는 마이너스였다”며 “동교동은 내가 아니라 이인제를 밀었고, 거꾸로 광주에선 우리 세력이 나를 조졌다”고 주장했다.

그들 역시 지나가버린 과거의 유물

어쩌면 이들의 ‘변절’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열쇳말은 ‘소외’인지 모른다. 여야 정치권이 갖는 일종의 문화적 차이도 작용했을까. 새누리당에선 대선 전 이른바 ‘7인회’의 존재가 주목받은 적이 있다. 실질적인 영향력의 크기를 두고는 여권 내에서도 관측이 엇갈리지만 어쨌든 강창희 국회의장,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김용갑 전 의원,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최병렬 전 한나라당 부총재, 현경대 전 의원 등 보수 원로그룹은 박근혜 당선인에게 크고 작은 조언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강창희 의장을 제외하면 모두 정치의 현장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인물들이다.
반면 과거 동교동의 ‘올드보이’들은 주군과 함께 군사정권의 폭압을 견디며 김대중 정부의 탄생에 기여했지만, 영광은 한순간이었다. 그들 역시 지나가버린 과거의 유물로 간주된 탓이다. 노무현 정부와 불화했고, 열린우리당 창당과 함께 ‘구태정치 세력’으로 낙인찍혔다. 동교동 가신그룹이나 옛 민주계 인사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3김 시대의 종언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사실상 소멸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화갑 전 고문은 평화민주당을, DJP 연합 탄생의 주역이던 한광옥 전 고문은 정통민주당을 각각 창당하는 등 이들은 이미 낡아버린 깃발을, 그것도 거꾸로 잡은 채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는 걸 거부했다. 이번 대선에선 그마저도 던져버린 채 ‘박근혜 대통령’의 깃발 아래 섰다. 이런 이들을 바라보는 동교동의 옛 동지들은 참담한 심경을 숨기지 않는다. 한 전 고문의 오랜 친구인 김옥두 상임고문은 공개 편지를 통해 “나중에 우리가 저 세상에서 무슨 낯으로 대통령님을 뵙겠는가? 정녕 발길을 돌릴 수 없다면, 최소한 언제 어디서든 부디 더 이상 우리 대통령님을 거론하지는 말아주게”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권위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 때문인지 원로그룹을 대하는 야권 의 정치문화는 여권의 그것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 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일신의 안위 때문에 진영을 옮겨간 것뿐 이고 이념적으로 봐도 진보적이라거나 개혁적이라기보다 보수 에 더 가깝다. 김대중이라는 강력한 리더십이 사라지자 자기 자 리를 찾아간 것이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이념적으로 진보개혁보다 보수

여전히 가능해 보이지는 않지만, 다시 한번 비중 있는 정치인으로서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결국 이들을 움직였다. 한 전 고문은 대선 이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문재인을 지지할 수는 없었다. 노무현 정부가 나를 팽시켜서 내 정치 생명을 빼앗았다”고 했다. 결국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찾아 입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권위에 대한 생래적 거부감 때문인지 원로그룹을 대하는 야권의 정치문화는 여권의 그것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결국 이들은 일신의 안위 때문에 진영을 옮겨간 것뿐이고 이념적으로 봐도 진보적이라거나 개혁적이라기보다 보수에 더 가깝다. 김대중이라는 강력한 리더십이 사라지자 자기 자리를 찾아간 것”이라고 말했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김지하의 변신 혹은 변절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2-12-04일자 기사 '김지하의 변신 혹은 변절'을 퍼왔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세대의 영웅이고 나의 영웅이었다. 그의 감동적이고 해학적인 시와 글이 있었기에 20대의 우리는 지하 골방에 앉아서 마음껏 박정희 체제를 비웃을 수 있었고, 민주화 투쟁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그의 생명사상과 후천개벽 사상이 당시로서는 좀 뜨악하기는 했으나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 혜안이 있었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을 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때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보편적 담론을 펼쳤지만, 그것을 91년이라는 신공안정국의 국면에, 그것도 (조선일보) 지면에 실어서 보수에 큰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의 변신 혹은 전향은 시작된 것 같다. “인간은 후를 보아야 한다”고 하니 아직 인생 후반부가 남은 나도 큰소리는 못 치겠지만, 그의 변신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지식인은 자신을 알아보는 주군이나 군주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옛말이 있듯이, 그는 자신을 버린 옛 운동진영을 비판해왔고, 자신을 찾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 보수세력의 품에 안겼다. 보수세력이 돈과 권력과 위세와 여유, 모든 것을 쥐고 있는 한국 땅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똑똑한 지식인의 변신은 87년 이후 지금의 뉴라이트에 이르기까지 계속 있어왔고, 그의 변신도 그 흐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페이스북에 그의 행동을 ‘전향’이라고 했더니 어떤 페친(페이스북 친구)은 “지식인이라면 적어도 사상적 ‘전향’을 해야 하는데… 변절이라는 생각만 듭니다”라고 댓글을 달았고, 다른 친구는 “썩은 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머리를 조아리는 법… 공자는 이를 ‘소인배’라 했죠”라고 일갈했다.그렇다. 늙고 외로워지면 사람은 보수화된다. 특히 어려웠던 시절의 동료들이 자신을 따돌린 채 자기들끼리만 한자리씩 해먹으면, 명성도 잃고 지위도 갖지 못한 지식인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변절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이 힘들다고, 자신이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모든 사람이, 모든 노인들이 과거의 적에게 안기지는 않는다. “지초와 난초는 매우 깊은 수풀에서 자라지만,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의 향을 풍긴다. 군자가 도를 닦고 덕을 세우는데 곤궁하다고 해서 절개를 꺾어서는 안 된다”(芝蘭生於深林 不以無人而不芳 君子修道入德 不以困窮而改節)는 공자의 말씀이 기억난다. 남이 알아주지 않고 경제적으로 곤궁하다고 변절하는 것은 글 읽는 자가 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의 기본 교육과 인격도야가 중요하다는 경고로 들린다.70~80년대는 참으로 험악한 시대였고, 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소수의 잘나가는 운동권 출신 외에 대다수 과거 운동세력은 여전히 힘겹게 살아간다. 김지하를 고문했던 세력은 과거의 운동권 명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여유와 아량을 과시하지만, 여전히 날을 세워야 하는 운동세력은 민주화 이후 지난 20여년 동안 자기편의 약간의 차이를 참지 못하고 거친 공격을 해댔고, 결국 상처를 안은 수많은 동료를 적의 품으로 쫓아냈다.가버린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비난만큼이나, 그가 죽도록 고생하고 출옥했을 때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 운동세력의 좁은 품이 한탄스럽다. 그리고 늙어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 한 사람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의 척박한 정치현실을 한탄한다. 민주화운동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이렇게 취약했던가 되돌아보게 된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