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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7일 월요일

권리금 강탈하는 ‘갑’ ‘을’이 할 거라곤 꼬장과 절망뿐

이글은 레디앙 2013-05-27일자 기사 '권리금 강탈하는 ‘갑’ ‘을’이 할 거라곤 꼬장과 절망뿐'을 퍼왔습니다.
[창원 자영업 실태조사기-2]건물주에게 쫓겨나고 폐업하고 권리금은 날리고.....

지난 겨울은 지독히도 추웠다. 설사가상으로 창원에는 거의 10여년 만에 폭설까지 내렸다.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건 내가 창원에 온 게 1983년 봄이 오기 전이었으니 그 이후로는 처음이었을 거다.
몇 년 만에 내린 폭설에 온 시가지가 하얗게 점령 당해 거의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시내버스들은 10km 이하의 속도로 엉금엉금 기었으며 승용차는 물론이고 택시들도 아예 다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리는 텅텅 비었다. 한때 세상을 마비시켰던 눈덩이들이 그 이후로도 동네어귀나 아파트의 후미진 그늘에서 열흘 가까이 녹지 않고 버텼으니 얼마나 추운 겨울이었던가.
그 겨울에 나는 마음마저 동토의 호수처럼 꽝꽝 얼어붙었을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 검은 장갑 낀 손으로 왼쪽 옆구리에서 설문지 한 장을 꺼내 들이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느 식당이 철거되는 모습. 옆의 가게도 마찬가지이다.

“아이고, 수고 많습니더. 그래야지예. 이런 거 진작 했어야지예. 그렇지만 우린 이미 늦었습니다. 다음 주면 문 닫고 나갑니다. 우리 쫓겨난다 아입니꺼.”
그녀는 ○○○○○라는 이름의 횟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였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여기 장사한 지 l0년쨉니다. 들어올 때 권리금 1억 주고 들어왔지예. 그때 1억이면 큰돈이었습니더. 그런데 나가라카는 깁니더. 우리는 장사 더 하고 싶은데, 그냥 나가라카이 참 돌겠네요. 우리만 그런 기 아이고 우에 집도 나가라카는데, 저 집은 더 억울하지예. 젊은 여자들이 이자 장사한 지 4년밖에 안됐는데, 거도 권리금 1억 넘게 줬을 건데. 우리보다 평수도 두배나 넓고 하이.”
결국 그녀는 얼마 안 있어 문을 닫았다. 그녀의 남편과 함께 직원 한명을 고용해 10여년 가까이 장사를 했지만 나올 때는 이사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어느 찻집에서 다시 만난 그녀가 말했다.
“주인이 그러는 거라. 원상복구할라믄 돈도 많이 드는데 고마 집기 저런 거는 내가 팔아서 할게. 그래 우리 남편도 그러는 거라. 고마 다 주삐라. 욕심부리지 말고 다 주고 나가자. 그렇지만 그게 되나. 너무 억울해서 내가 철거하는 사람을 만났지. 계산을 뽑아보니까 답이 안 나오는 거라. 바닥이 온돌인데 이거 다 걷어내고 합판이며 벽돌 뜯고 하면 1톤 트럭이 열 몇대는 와야 된다카데. 그래 고마 다 하이소 카고 나와뿌다 아이가. 지돈 10만원은 아까버서 벌벌 떠는 사람이 남의 돈 1억은 어찌 그렇게 하는지.”


‘창업비용에서 권리금과 보증금의 비중이 50%’(2013 창원자영업 실태와 대책 자료집)

연산홍이 도시를 붉게 물들이던 4월 중순, 그녀는 세무서를 찾았다. 너무 억울했던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놔두어서는 다음 사람이 또 다음 사람이 당할 거라는 생각에 세무서에 고발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정의를 세워야지. 바꿔야 되는 기라. 이기 하나의 풍조가 되면 사회에 악이 그득히 차고 문란해지는 기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권리금도 내놔라 할 처지도 안 되니깐. 그냥 장사만 계속 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긴데 말이다. 할 거는 없고 내가 매달 월세 250만원씩 냈는데 세무서에는 아마 80만원만 낸 걸로 돼있을 거라. 엊그제 아는 이에게서 전화도 왔어요. 당신이 신고 안하면 당신도 같은 범죄자라고 하면서, 빨리 해라 하는 기라.”
그녀는 동병상련의 2층 삼겹살집 젊은 여사장도 설득해서 함께 세무서에 가서 탈세혐의로 건물주를 고발했다.
그 이후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녀들이 쫓겨난 건물은 지금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주변 부동산업소의 말을 들어 보니 대형 체인점이 들어올 거라고들 말한다.
이런 일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미 몇 년 전부터 상남동 지역에는 건물주가 임차인을 쫓아내고 새 임차인을 들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 “허, 저 집 또 쫓겨나는구먼!” 할 정도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어제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상남동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옛 동지요 형제와도 같은 선배가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라, 저도 곧 나가야 된다. 쫓겨나는 거지.” 그 집은 상남동에서도 상당히 큰 편에 속하는 일식형 횟집이었다.
나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내부 시설도 시설이지만 규모가 으리으리한 게 보통이 아니었었다. 옆에서 거드는 친구의 말이 가슴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갑이 나가라 그러면 힘이 있나? 을이 나가야지. 할 거라곤 전에 그 할매처럼 꼬장 부리는 거밖에 없어.”
자,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마치 하나의 트렌드처럼 번지고 있는 것일까? 문제의 발단은 권리금과 높은 임대료에 있었다.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대폭 인상하는 수단으로 기존 임차인을 내보내고(쫓아내고) 새로 임차인을 들이는 수법을 쓰는 것은 어쩌면 고전적인 방법이다.
새로 생긴 옆 건물에선 한 달 월세가 850만원인데 나는 300만원밖에 못 받고 있다 생각하면—이건 실제상황이다. 나는 잘 아는 그분이 왜 850만원씩이나 월세를 주고 장사를 하는지 그걸 이해 못한다. 목도 그리 썩 좋은 것도 아니고 1층이라지만 평수도 35평 남짓이다—아무리 돈이 많은 건물주라도 억울하게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더 쇼킹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건물주들이 기존 임차인을 내보내고 새로 들어오는 임차인에게 권리금을 수수하는 행위가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 예를 든 횟집과 삼겹살집도 그런 예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였다. 내 선거구인 대방동의 아파트단지에 사는 한 자영업자는 감자탕 식당을 시작하면서 권리금을 1억4천만 원을 주었는데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2년 만에 몽땅 날렸다.
그런데 이이는 지난 1월에 만났을 때만 해도 권리금은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왜냐하면 권리금을 건네준 이가 바로 건물주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예의 횟집과 삼겹살집 사장님들을 만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을 만나게 되면서 문제가 범상치 않음을 느꼈고 그에게 연락해서 술을 한잔 하자고 했다. 어렵게 나타난 그는 한껏 풀이 죽어있었다.
“다 날렸습니다. 한 푼도 못 준다 카데예. 이사비라도 좀 주라 했더니 그것도 안 준다 그러고. 따지니까 바로 명도소송장 날라오는데, 계산 바로 나오데예. 그래서 마 내가 돈 들여서 장만한 집기며 뭐며 다 놓고 나왔다 아입니까. 그거 철거하려면 돈이 더 드니께. 허허.”
근 20년 가까이 직장생활하며 알뜰히 모았던 돈이 허공으로 날아갔건만 그는 허허 웃으며 “다시 벌면 되지요”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듯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 그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부산 인근 어느 신도시의 부동산중개사무실에서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공고 출신인 그의 친구들이 인근 공단에서 자그마한 공장들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다시금 보란 듯이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장전문 부동산을 해보겠다는 건데, 그의 재기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잘 되었으면 좋겠다.


By 여영국

권리금 강탈하는 ‘갑’ ‘을’이 할 거라곤 꼬장과 절망뿐

이글은 레디앙 2013-05-27일자 기사 '권리금 강탈하는 ‘갑’ ‘을’이 할 거라곤 꼬장과 절망뿐'을 퍼왔습니다.
[창원 자영업 실태조사기-2]건물주에게 쫓겨나고 폐업하고 권리금은 날리고.....

지난 겨울은 지독히도 추웠다. 설사가상으로 창원에는 거의 10여년 만에 폭설까지 내렸다.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건 내가 창원에 온 게 1983년 봄이 오기 전이었으니 그 이후로는 처음이었을 거다.
몇 년 만에 내린 폭설에 온 시가지가 하얗게 점령 당해 거의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시내버스들은 10km 이하의 속도로 엉금엉금 기었으며 승용차는 물론이고 택시들도 아예 다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리는 텅텅 비었다. 한때 세상을 마비시켰던 눈덩이들이 그 이후로도 동네어귀나 아파트의 후미진 그늘에서 열흘 가까이 녹지 않고 버텼으니 얼마나 추운 겨울이었던가.
그 겨울에 나는 마음마저 동토의 호수처럼 꽝꽝 얼어붙었을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 검은 장갑 낀 손으로 왼쪽 옆구리에서 설문지 한 장을 꺼내 들이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느 식당이 철거되는 모습. 옆의 가게도 마찬가지이다.

“아이고, 수고 많습니더. 그래야지예. 이런 거 진작 했어야지예. 그렇지만 우린 이미 늦었습니다. 다음 주면 문 닫고 나갑니다. 우리 쫓겨난다 아입니꺼.”
그녀는 ○○○○○라는 이름의 횟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였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여기 장사한 지 l0년쨉니다. 들어올 때 권리금 1억 주고 들어왔지예. 그때 1억이면 큰돈이었습니더. 그런데 나가라카는 깁니더. 우리는 장사 더 하고 싶은데, 그냥 나가라카이 참 돌겠네요. 우리만 그런 기 아이고 우에 집도 나가라카는데, 저 집은 더 억울하지예. 젊은 여자들이 이자 장사한 지 4년밖에 안됐는데, 거도 권리금 1억 넘게 줬을 건데. 우리보다 평수도 두배나 넓고 하이.”
결국 그녀는 얼마 안 있어 문을 닫았다. 그녀의 남편과 함께 직원 한명을 고용해 10여년 가까이 장사를 했지만 나올 때는 이사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어느 찻집에서 다시 만난 그녀가 말했다.
“주인이 그러는 거라. 원상복구할라믄 돈도 많이 드는데 고마 집기 저런 거는 내가 팔아서 할게. 그래 우리 남편도 그러는 거라. 고마 다 주삐라. 욕심부리지 말고 다 주고 나가자. 그렇지만 그게 되나. 너무 억울해서 내가 철거하는 사람을 만났지. 계산을 뽑아보니까 답이 안 나오는 거라. 바닥이 온돌인데 이거 다 걷어내고 합판이며 벽돌 뜯고 하면 1톤 트럭이 열 몇대는 와야 된다카데. 그래 고마 다 하이소 카고 나와뿌다 아이가. 지돈 10만원은 아까버서 벌벌 떠는 사람이 남의 돈 1억은 어찌 그렇게 하는지.”


‘창업비용에서 권리금과 보증금의 비중이 50%’(2013 창원자영업 실태와 대책 자료집)

연산홍이 도시를 붉게 물들이던 4월 중순, 그녀는 세무서를 찾았다. 너무 억울했던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놔두어서는 다음 사람이 또 다음 사람이 당할 거라는 생각에 세무서에 고발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정의를 세워야지. 바꿔야 되는 기라. 이기 하나의 풍조가 되면 사회에 악이 그득히 차고 문란해지는 기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권리금도 내놔라 할 처지도 안 되니깐. 그냥 장사만 계속 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긴데 말이다. 할 거는 없고 내가 매달 월세 250만원씩 냈는데 세무서에는 아마 80만원만 낸 걸로 돼있을 거라. 엊그제 아는 이에게서 전화도 왔어요. 당신이 신고 안하면 당신도 같은 범죄자라고 하면서, 빨리 해라 하는 기라.”
그녀는 동병상련의 2층 삼겹살집 젊은 여사장도 설득해서 함께 세무서에 가서 탈세혐의로 건물주를 고발했다.
그 이후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녀들이 쫓겨난 건물은 지금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주변 부동산업소의 말을 들어 보니 대형 체인점이 들어올 거라고들 말한다.
이런 일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미 몇 년 전부터 상남동 지역에는 건물주가 임차인을 쫓아내고 새 임차인을 들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 “허, 저 집 또 쫓겨나는구먼!” 할 정도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어제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상남동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옛 동지요 형제와도 같은 선배가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라, 저도 곧 나가야 된다. 쫓겨나는 거지.” 그 집은 상남동에서도 상당히 큰 편에 속하는 일식형 횟집이었다.
나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내부 시설도 시설이지만 규모가 으리으리한 게 보통이 아니었었다. 옆에서 거드는 친구의 말이 가슴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갑이 나가라 그러면 힘이 있나? 을이 나가야지. 할 거라곤 전에 그 할매처럼 꼬장 부리는 거밖에 없어.”
자,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마치 하나의 트렌드처럼 번지고 있는 것일까? 문제의 발단은 권리금과 높은 임대료에 있었다.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대폭 인상하는 수단으로 기존 임차인을 내보내고(쫓아내고) 새로 임차인을 들이는 수법을 쓰는 것은 어쩌면 고전적인 방법이다.
새로 생긴 옆 건물에선 한 달 월세가 850만원인데 나는 300만원밖에 못 받고 있다 생각하면—이건 실제상황이다. 나는 잘 아는 그분이 왜 850만원씩이나 월세를 주고 장사를 하는지 그걸 이해 못한다. 목도 그리 썩 좋은 것도 아니고 1층이라지만 평수도 35평 남짓이다—아무리 돈이 많은 건물주라도 억울하게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더 쇼킹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건물주들이 기존 임차인을 내보내고 새로 들어오는 임차인에게 권리금을 수수하는 행위가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 예를 든 횟집과 삼겹살집도 그런 예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였다. 내 선거구인 대방동의 아파트단지에 사는 한 자영업자는 감자탕 식당을 시작하면서 권리금을 1억4천만 원을 주었는데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2년 만에 몽땅 날렸다.
그런데 이이는 지난 1월에 만났을 때만 해도 권리금은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왜냐하면 권리금을 건네준 이가 바로 건물주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예의 횟집과 삼겹살집 사장님들을 만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을 만나게 되면서 문제가 범상치 않음을 느꼈고 그에게 연락해서 술을 한잔 하자고 했다. 어렵게 나타난 그는 한껏 풀이 죽어있었다.
“다 날렸습니다. 한 푼도 못 준다 카데예. 이사비라도 좀 주라 했더니 그것도 안 준다 그러고. 따지니까 바로 명도소송장 날라오는데, 계산 바로 나오데예. 그래서 마 내가 돈 들여서 장만한 집기며 뭐며 다 놓고 나왔다 아입니까. 그거 철거하려면 돈이 더 드니께. 허허.”
근 20년 가까이 직장생활하며 알뜰히 모았던 돈이 허공으로 날아갔건만 그는 허허 웃으며 “다시 벌면 되지요”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듯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 그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부산 인근 어느 신도시의 부동산중개사무실에서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공고 출신인 그의 친구들이 인근 공단에서 자그마한 공장들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다시금 보란 듯이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장전문 부동산을 해보겠다는 건데, 그의 재기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잘 되었으면 좋겠다.


By 여영국

2012년 4월 7일 토요일

잊혀지지 않는 참사 '용산'..."MB, 주차장 하려고 사람 죽였나"


이글은 민중의소리 2012-04-07일자 기사 '잊혀지지 않는 참사 '용산'..."MB, 주차장 하려고 사람 죽였나"'를 퍼왔습니다.
[MB가 파괴한 한국] '용산학살'이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삶...남은 건 분노와 오기


ⓒ빈곤사회연대 제공 용산참사 당일 아침 현장.

"여보, 나 오늘 용산에 갔다 올게. 별일 없을 테니 일찍 자. 금방 내려올 거야."자신 뿐 아니라 모든 철거민들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갔던 故윤용헌 열사가 두툼하게 챙겨입고 집을 나서기 전 아내 유영숙씨와 대면하며 했던 마지막 말이다. 그게 남편의 생전 마지막 모습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남일당 건물 위 망루에는 그렇게 집을 나선 다섯명의 철거민이 올라섰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다른 곳에서도 장사를 하며 생존권을 지켜나갈 수 있게 보상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게 철거민들의 외침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건설사들의 배를 어떻게든 빨리 채워줘야 했다. 시너를 비롯한 발화물질들이 망루에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찰이 용역을 앞세워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망루 쪽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는 순간 남편 걱정에 잠을 설치던 영숙씨는 뭔가 심상찮은 느낌에 눈을 떴다. 영숙씨는 인태순 전국철거민연합 연대사업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걱정하지마. 승우 아빠(당시 순화동 철거민대책위 총무였던 지석준씨의 아들 이름) 말로는 오빠가 승우 아빠도 살려놓고 내려갔다고 그랬어. 살아서 어디 숨어있을 거래. 잠잠하면 나올 거라고 걱정하지 말래." 영숙씨는 인 국장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그 말 대로만 됐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하지만 영숙씨는 참혹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불에 탄 시신 다섯구가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미친듯이 달려갔다. 막는 경찰들을 온 힘으로 밀어가며 영안실로 들어갔다. 네번째 시신까지 확인했다. 남편은 없었다. 마지막 시신을 본 순간 영숙씨는 주저앉고 말았다. 어딘가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편은 딱딱한 시신이 되어 영안실에 누워있었다. 복부와 다리 살이 잘려나간 채로...

그렇게 다섯명의 열사가 세상을 떠났다. 용산에서 벌어진 그때의 참극이 열사들의 가족들과 철거민들에게 남긴 건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이다. 

영숙씨는 여기저기 살이 잘려나간 채로 영안실에 누워있던 그때 남편의 모습을 아직도 본다. 연대투쟁을 다니느라 항상 늦은 시간 귀가하던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가끔씩 생생하게 듣는다. 환각과 환청이라는 사실을 영숙씨 자신도 잘 알지만, 남편이 살아있을 때 그랬듯 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방문을 열고 현관문 쪽을 살펴보곤 한다.

"영안실에 누워있던 애 아빠 모습이 지금도 막 보여요. 길을 걸어다닐 때도 보일 때가 있고...병원에서는 '그런 게 보이는 건 좋지 않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도 집회 나가서 투쟁할 때는 애 아빠가 죽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내 가슴 속에 같이 있으면서 지켜준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남들이 보면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가끔 영숙씨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가슴 속에 살아 있는 남편의 존재는 영숙씨가 철거투쟁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민중의소리 故윤용헌 열사 부인 유영숙씨.

용산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1년 넘게 투쟁을 하던 과정에서 경찰과 용역들에게 당한 구타로 왼쪽 팔의 인대가 늘어났고, 대상포진은 어깨까지 퍼졌다. 시간이 갈수록 건강은 악화되어가고 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갑자기 찾아온 눈 출혈로 한쪽 시력을 잃었다. 나머지 한쪽 눈의 시력도 점점 약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영숙씨는 철거투쟁을 멈출 수 없다.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과 함께 생긴 건 분노와 오기다. 남편과 함께 지키려고 했던 순화동 지역의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제2의 용산참사를 막고, 철거민들이 생존권을 손에 쥐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용산참사는 정권이 경찰특공대를 이용해서 평범한 시민들을 학살한 거예요. 생각할 때마다 부들부들 떨려요. 용역이든 경찰이든 이젠 안 무서워요. 그들은 있는 사람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지만, 우리는 절박하거든요. 무엇이든 절박함을 이기진 못 해요."

마음은 더 단단해져 전철연과 유가협 활동을 병행하며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가끔 영숙씨를 괴롭히는 건 남편 생전의 단란했던 가족생활에 대한 그리움이다. 얼마 전엔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큰아들이 했던 말에는 가슴 한 구석이 쓰라렸다. '아빠와 함께 자주 갔던 빙어낚시를 가고 싶다'는 큰아들의 말에 그는 말없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아이들은 아빠와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한가 봐요. 주말이면 아빠가 일을 안 하니깐 애들이랑 나한테 아무것도 안 시키고 모든 살림을 도맡아서 했고, 놀러도 데리고 다녔거든요. 전국 방방곡곡을 차 타고 다녔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게 겨울에 다녔던 빙어낚시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들 아빠는 가족들한테는 일등 아빠였고, 일등 남편이었던 것 같아요."

용산참사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들의 삶을 이처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소중한 일상을 빼앗아갔고, 그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그때 그 일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살인 누명을 쓴 아들을 감옥에 보내야 했던 전재숙씨(故이상림 열사의 부인이자 이충연 전 용산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의 모친)도 마찬가지였다. 


ⓒ민중의소리 고 이상림 열사 부인이자 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인 이충연 위원장의 모친인 전재숙씨.

재숙씨는 남일당 뒷건물이자 용산참사 연대투쟁을 하던 이들의 아지트였던 카페 '레아'가 있던 자리에서 30년 동안 갈비집을 했었다. 별 탈 없이 장사를 했었고, 나이가 들면서 고기집을 더이상 운영하기 힘들어지자, 신혼인 아들 내외와 함께 카페 '레아'를 차렸다. 예쁘게 꾸며놓은 카페 '레아'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로 들끓었다. 재숙씨는 아들 내외와 함께 장사를 하면서 행복에 겨워 지냈다. 하지만 세상이 재숙씨에게 준 행복한 시간은 8개월이 고작이었다. 

"지금도 2009년 1월 20일로 시간은 묶여져 있어요. 그날이, 그 시간이,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에요. 여전히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아들은 벌써 감옥에서 겨울을 세번이나 났어요."

신혼생활의 단맛을 느낄 새도 없이 결혼 후 8개월 만에 남편을 감옥에 보내야 했던 며느리 정영신씨를 생각하면 재숙씨는 가슴이 미어진다. 남편과 시부모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던 정씨는 이제 전철연 회원이자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활동가로, 누구보다도 열심히 철거투쟁을 하고 있다.

"볼 때마다 애처로워요. 내 자식이죠. 얼마나 안타까워요. 감옥 간 남편 뒷바라지 하랴, 내 비위 맞추랴 고생스러운 데다 활동까지 하러 다니고 하니깐...아유,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네요. 오늘도 전화와서는 내일 면회 갈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내일 오전에 간다는데..."

참사 이후 1년여 동안 벌인 투쟁으로 이끌어낸 합의로 유족들은 남일당은 떠났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 재숙씨의 아들 이충연 전 위원장 등 7명은 '가족을 불에 태워 죽인 살인자' 누명을 쓰고 징역 생활을 하고 있고, 사건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진상규명을 위한 유일한 열쇠인 미공개 검찰 수사기록 3천쪽은 여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다. 

대법원 판결은 잔인했다. 지난 2010년 11월 대법원(양승태 대법관. 현 대법원장)은 이충연 전 위원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용산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에선 눈물도, 상식도 없었다. 사실상 재판부는 철거민의 불법적 행동만을 두고 판단했고, 공권력의 과잉 진압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았다.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재숙씨는 일흔이 넘은 몸을 이끌고 다른 유족들과 함께 전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해 여름 있었던 평택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옥쇄파업 현장, 2010년 충남 아산 유성기업 노동자 투쟁 현장, 지난해 부산에서 있었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투쟁,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 반대 투쟁 현장까지. 용산참사 유족들의 투쟁현장에 함께 있어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진상규명 투쟁에 힘을 보태줄 이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 혼자 힘으로는 힘드니께. 그 사람들이 힘들 때 나도 찾아가주고, 그 사람들도 나 힘들 때 찾아와주는 게 '우리'잖아요. 정신없이 돌아다녔어요. 사람들이 왜 살이 안 찌냐고 물어보는데, 내 입장이 살 찔 입장이 아니잖아요. 지 아버지랑 동지들 죽였다고 잡혀들어간 아들이 저러고 있는디. 우리가 밝혀내야 할 진상은 아들이 나와야 밝혀질 거고, 구속돼 있는 동지들이 나와야 밝혀져요. 그 사람들 나오게 하는 게 첫째 목적이에요."

참극의 현장 남일당 인근은 지금...

다섯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극의 현장 남일당 건물은 결국 철거됐다. 500평 남짓 돼 보이는 남일당 부지를 포함한 용산4구역 일부 부지는 주차장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3년 전 철거민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둘러댄 용역 직원들을 관리했던 용역회사인 'O○건설'이 주차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다섯 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허물어버려던 그곳이 고작 '용역깡패'들의 밥벌이용으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 남일당만 생각하면 아직도 재숙씨의 입가는 파르르 떨린다. "지금도 물어보고싶은 게 있어요. 사람 죽여서 얻어낸 그 땅을 왜 빈터로 만들어놨냐고. 그 자리에서 용역들이 주차장 해서 돈 벌고 있응께. 그놈들 밥 먹일라고 이렇게 사람들 죽여서 빈터로 만든거냐고. 그게 그렇게 급한 일이었냐고요."


ⓒ민중의소리 철거 이후 주차장으로 변한 남일당 부지. 이곳은 용산 재개발 4구역이다.

용산참사는 주변 상권까지도 몰락시켰다. 용산역을 바라보고 남일당 오른쪽에 있는 5구역은 철거 예정 지역이지만, 아직도 상가는 영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식당에는 파리만 날렸고, 카페에는 드문드문 손님이 들었다. 

남일당 부지에서 20여미터 떨어진 5구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주화(49)씨는 "재개발한다고 인근 상가도 빠지고 직장인들도 다 빠졌다. 그 사람들 보고 장사했었는데 지금은 80% 이상 손님이 줄었다"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개발 구역을 안내한 인태순 전철연 연대사업국장은 "구역별로 나눠서 순차적으로 철거를 하는 재개발 방식이 모든 상권을 몰락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철거 작업이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탓에 인근 상인들이 받는 매출 피해 규모도 점차 누적되는 것이다. 남일당 부지를 기준으로 재개발 1구역이 용산참사 직전에 철거되면서 나머지 2,3,4,5구역 상권 매출에 영향을 미쳤고, 남일당 부지가 포함된 4구역과 2구역이 순차적으로 철거되면서 나머지 구역 상권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철거작업이 완료된 4구역과 2구역 인근에 각각 위치한 5구역과 3구역 상권은 사실상 죽은 상태였다. 굳게 닫힌 셔터에 어지럽게 락카칠이 돼 있는 곳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3구역에서 옷가게를 하는 김인순(59)씨는 현재 상황을 '철거민 피 말리기 작전'이라고 표현했다. 

"구역별로 띄엄띄엄 철거를 하면서 상인들을 지치게 만들어요. 한구역씩 철거되면서 타격 받는 다른 구역 상인들이 하나둘씩 떠날 거 아니에요? 이곳에서 수십년 장사한 사람들은 어차피 이천만원 정도 쥐어주면 가게 접어버리고 웃으면서 나가요. 우리같은 사람들은 여기서 쫓겨나면 다른 데서도 비슷한 조건으로 장사하고 살아야 되니깐 남아 있으면서 보상금 투쟁을 하는데, 이 짓도 길어질 수록 지치거든요. 그러다가 하나 둘 떠나는 사람 생기고...결국 그게 목적이에요. 철거민 피 말리기 작전이죠."


ⓒ민중의소리 철거를 앞두고 있는 용산 3구역. 이곳 상인들 중 상당수가 2천만원 남짓 되는 보상금을 받고 떠났다.

적게는 1억, 많게는 3~5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권리금을 내고 장사를 시작한 이들에게 처음 제시됐던 이주 보상금 감정평가액은 2천만원 안팎에 불과했다. 앞으로 수십년은 더 장사를 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터무니 없는 금액이었다. 더군다나 권리금은 법적 보호를 받을 수조차 없다. 그들은 감정평가를 할 때마다 100~200만원씩 보상액을 올려가고 있지만, 권리금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싸움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씨와 인 국장은 이번 싸움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이기는 것 만이 또다른 용산참사를 낳지 않는 길이라는 걸 이들은 잘 알고 있다. 재개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엔 정치권의 역할도 중요하다. 무분별한 개발을 지양하고, 불가피한 개발이 이뤄질 경우 '수평이동'이 가능한 보상이 동반되도록 하는 법안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들은 오는 4.11 총선에서도 제대로 이명박 정권을 심판할 수 있는 투표를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우린 원래 정치인들 안 믿거든요.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번에는 꼭 투표 하려구요. 철거민들 다 데리고 투표하러 갈 거예요. 우리 문제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정당 찍어서 떳떳하게 요구할 겁니다. '우리가 뽑아줬으니 우리 문제 반드시 해결해 달라'고."

강경훈 기자 qwereer@v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