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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3일 토요일

가습기 연쇄 살인, 복지부 진상 규명은커녕 훼방만…


이글은 프레시안 2013-04-12일자 기사 '가습기 연쇄 살인, 복지부 진상 규명은커녕 훼방만…'을 퍼왔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분노…"혹시 대통령 뜻인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법적 근거가 없는데 조사위원회는 왜 구성했나? 피해 신고는 왜 받았나? 대한민국 정부가 몇천만 원이 없어서 수백 명이 죽고 다친 사건을 조사도 하지 않는단 말이냐? 이걸 나라라고 할 수 있느냐."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잃은 안 아무개 씨)

"(지난 1월 22일) 인수위원회 직원이 우리가 전한 피해 조사 및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공문을 받아갔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운동을 하면서 국민 생활 안전을 공약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대표적인 생활용품 안전사고인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피해 실태 조사마저 안 한다는 것인가? 이게 복지부 장관의 뜻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뜻이라고는 차마 믿을 수 없다." (부인을 잃은 최 아무개 씨)

보건복지부를 향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원성이 빗발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관한 조사를 총괄하는 보건복지부가 사건을 조사해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되레 딴죽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민·관 합동으로 구성된 '폐손상조사위원회'가 추가 보완 조사를 하자고 나섰지만 보건복지부는 이를 저지하고 나선 것.

조사위원회는 진상 조사와 사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가진 피해자와 시민단체의 요구로 만들어졌다. 질병관리본부(보건복지부 산하)와 시민단체가 추천한 의학환경 보건학, 환경 독성학 등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위워회는 지난해 12월에 출범했다.

조사위원들은 신고자들의 건강 상태 등을 알아보기 위해 임상 검사, 설문 조사, 폐 CT촬영,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법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폐 CT 촬영 등의 추가 보완 조사는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11일 조사위원회는 "지금 파악된 자료만으로는 사례의 기본적인 분류조차 어렵다. 더 이상의 활동이 무의미하다"며 전원이 사퇴한다는 의견서를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기본적인 사례 조사와 증거 수집 작업에조차 제동을 거는 보건복지부에 대한 강력한 집단 항의로 풀이된다.

이에 가습기살균제피해자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환경운동연합은 12일 공동으로 성명서를 내고 "박근혜 정부는 국민 생활 안전을 외면할 셈인가"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부가 하루속히 피해 신고 사례에 대한 정밀 조사를 시행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 심각한 폐 질환을 유발해 약 100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 ⓒ프레시안(남빛나라)


/남빛나라 기자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고작 주차장 만들려고 6명 죽였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3-01-19일자 기사 '"고작 주차장 만들려고 6명 죽였나"'를 퍼왔습니다.
[현장] 용산참사 4주기 추모대회…"구속자 석방하고 진상 규명하라"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 4주기를 하루 앞둔 19일, 용산참사 현장과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노동·시민단체 143곳이 꾸린 '용산참사 4주기 범국민추모위원회'는 이날 참가자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구속자 석방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범국민추모대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대회에 앞서 서울 용산구 남일당 터에 모여 '구속 철거민 석방, 용산참사 진상 규명, 강제퇴거금지법 제정' 등의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서울역 광장까지 행진했다.

오후 2시께 참가자들이 결집한 남일당 터는 텅 빈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들은 "이 학살의 터는 4년이 넘도록 빈 터로 남아 있다"며 "고작 주차장을 만들려고 사람을 죽였나"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4년이 지나도 아픔이 가시지 않는 듯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관련 기사 : "사람도 안 사는 저 아파트 때문에…사람이 죽었나")

참가자들은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리 측근 인사들이 아니라 용산참사 구속자부터 특별 사면을 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서울역 광장까지 걸었다.

▲ 남일당 터에서 서울역 광장으로 행진하는 유족들 ⓒ프레시안(최형락)

"용산참사 해결 없이 국민 대통합 없다"

이어 열린 본 대회에서, 용산참사 당시 구속됐다가 지난해 10월 3년 8개월간의 옥살이 끝에 가석방된 김재호 씨는 "마지막까지 망루에 있다가 내려온 죄로 징역 4년형을 받았다"며 "장사밖에 모르는 저희에게 무슨 큰 잘못이 있기에 4년이나 살게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김 씨는 "추운 겨울 교도소에서 고생할 동료들을 생각하니 먼저 나와서 부끄럽다"며 "구속자가 사면되고 용산참사 문제가 해결돼서 하루빨리 함께 생활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징역형을 받고 수감 중인 철거민은 6명이다. 수감됐던 8명 중 김재호·김대원 씨는 지난해 10월 가석방됐으나, 나머지 6명은 짧게는 올해 10월, 길게는 2015년 1월까지 수감 생활을 해야 한다.

용산참사로 남편 이상림 씨를 잃고 아들 이충연 씨를 감옥에 보낸 전재숙 씨는 "철거민은 누구를 죽이거나 해치러 간 게 아니고 단지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며 "용산참사 해결 없이는 (박근혜 당선인이 말하는) 100% 국민 대통합도 없다"고 말했다.

연대 발언에 나선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은 "대통령 인수위원회 앞에서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사람들이 단 5분만 박근혜 당선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며 "인수위 시절도 이런데 앞으로 5년간 한국이 어떻게 돌아갈지 생각하면 참담하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 [용산참사 유족들 "박근혜 당선인, 우리 만납시다"] [멈추지 않는 눈물…"박근혜 당선인 용산참사 해결하라"])

유가족들과 함께 희생자 영정에 분향한 문정현 신부는 유가족들을 향해 "이들이 2000년 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죽어간 예수의 어머니이고,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의 어머니"라며 "용산참사 유가족들은 이미 용산참사 희생자들만의 어머니를 넘어 쌍용과 강정과 한진에서 모든 탄압받는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어머니가 됐다"고 말했다.

▲ 희생자들의 영정에 분향하는 용산참사 유족들 ⓒ프레시안(최형락)

그밖에 추모대회에서는 이강서 신부와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장 등이 추모사를 했다.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만든 김일란 감독은 김선우 시인이 쓴 추모시를 낭송했다.

참가자들은 오후 5시 20분께 추모 대회를 마치고 6시까지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노조 탄압 분쇄 비상시국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시청 광장으로 행진했다.

추모위원회는 참사 기일인 20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희생자 묘역에서 추모제를 열 예정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김윤나영 기자

2012년 8월 26일 일요일

죽은 장준하, 산 박근혜 발목 잡을까


이글은 한겨레21 2012-08-27일자 제925호 기사 '죽은 장준하, 산 박근혜 발목 잡을까'를 퍼왔습니다.
[초점] 37년 만에 유골에서 발견된 새로운 ‘타살 증거’… 박 후보 쪽 “새로울 게 없다”지만 재점화된 의혹이 끼칠 영향 예측 불허

» 1975년 8월25일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장례식을 마친 뒤 명동성당을 나서는 장준하의 장례 행렬(위)과 지난 8월1일 이장을 위해 37년 만에 관 밖으로 나온 장준하의 두개골. 뒷머리 부위에 원형의 함몰 흔적이 남아 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현대사 연구자들은 대통령 박정희를 위협한 난적(難敵)으로 세 사람을 꼽는다. 첫 번째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었던 김대중이다. 지역주의와 조직적인 관권(官權)의 동원이 없었다면 박정희는 그해 선거에서 당선을 자신할 수 없었다. 김대중에 대한 두려움과 견제 심리는 훗날 일본에서의 납치·살해 기도로 이어진다. 두 번째는 시인 김지하다. 1970년 당시 29살의 청년 김지하는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통해 부패한 독재정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폭로해 박정희의 눈엣가시가 된다. 결국 김지하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나서야 옥문을 나올 수 있었다. 세 번째 적수가 광복군 출신의 재야 정치인 장준하다. 반정부 지식인 잡지 (사상계)의 발행인이자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그는 셋 가운데 유일하게 박정희의 재임 기간에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숱한 의혹이 제기됐으나, ‘박정희가 죽였다’는 심증뿐 결정적 물증이 없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사후 37년 만에 재점화됐다. 지난 8월1일 그의 묘를 이장하며 이뤄진 유골 검시를 통해서다.

지름 6cm 구멍과 충격에 의한 균열

장준하의 유골에 대한 의료진의 검시가 이뤄지기는 1975년 8월 그가 숨지고 나서 처음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그의 유골 감정을 추진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좌절됐다. 하지만 올해 그의 유골을 경기도 파주의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파주시 탄현면에 조성한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하며 자연스럽게 검시가 이뤄지게 됐다. 검시 결과 유골의 머리 뒤쪽에 지름 6cm 깊이 1㎝ 크기의 함몰 자국과 함께 외부 충격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 균열이 발견됐다. 검시한 의사는 “인위적인 상처로 보인다”는 1차 소견을 냈다. “등산 중 실족에 의한 추락사”라는 사망 당시의 검찰 발표를 뒤집는 결과다.
사건의 후폭풍은 정치권으로 번졌다. 그의 죽음이 당시 유족과 재야의 주장대로 ‘정권에 의한 타살’이 맞다면, 박정희의 딸이자 새누리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박근혜 의원에게 정치적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민주통합당이 보도 이튿날인 8월16일 ‘고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조사위’를 구성하는 등 발빠른 대응에 나선 것도 이런 상황을 의식해서다. 민주당 대선주자들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잃었는지 꼭 밝혀져야 한다.”(문재인 후보 트위터) “장준하 선생 가족이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구순을 앞둔 부인은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20만원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이래도 아버지의 뜻을 잇겠다는 것인지 박근혜 의원에게 묻고 싶다.”(김두관 후보 트위터) 정세균 후보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과오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침묵을 옛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딸이 보여준 성찰적 행보와 대비시키며 박 후보를 압박했다.
공천 헌금 파동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새누리당은 사건의 정치적 휘발성을 의식해서인지 말을 아꼈다. 일각(친박 진영)에선 “새로울 게 없다”며 평가절하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박근혜 캠프의 핵심 관계자는 “(박 후보가) 5년 전 (장준하 선생의) 유족을 만났다”며 “지금 그게 나왔다고 어떻게 될 게 있겠느냐”고 했다. 박 후보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씨를 만나 화해를 모색했고, 타살 의혹이 제기된 것도 처음이 아닌 만큼 박 후보의 대선 행보에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2004년 ‘진상규명 불능’의 이유

새누리당의 이런 반응에는 의학적 정밀 검사를 통해 단순 실족사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사망 당시 고인과 주변 인물의 행적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새로운 목격자의 증언이 나오지 않는 이상, 2004년 의문사위 발표 내용 이상의 정치적 파괴력을 갖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2004년 의문사위가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린 것도 의학적 소견이 불충분해서라기보다, 장준하가 타살됐다면 ‘누가,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를 밝힐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최대 정적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장준하가 처음부터 박정희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1961년 5·16 직후에는 (사상계) 권두언과 편집후기를 통해 쿠데타 세력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개혁을 이끌던 나세르가 청년장교들의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사실도 장준하의 오판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한-일 협정(1965년)과 3선개헌(1969년)을 거치며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성이 표면화되자 그는 누구보다 비타협적인 ‘반박정희 투사’로 돌아섰다. 1960~70년대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경험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장준하의 죽음을 두고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은 것은 주검의 상태와 사망 경위를 둘러싼 의문점 외에도, ‘사고’를 당하기 전 장준하가 보여준 행적에서도 의미심장한 대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 아래서 숨진 채 발견된 1975년 8월17일을 며칠 앞두고 30년 넘게 보관해온 충칭 임시정부의 태극기를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는가 하면, 아내와 갑자기 천주교식 혼례의식을 치르고 백범 묘소와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등 신변 정리를 서둘렀다. 평소 왕래가 뜸했던 김대중을 은밀히 만나는가 하면, 재야 원로 함석헌을 찾고 광주의 홍남순과 무등산을 등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가 광복 30돌(1975년 8월15일)을 전후해 중대한 정치적 거사를 준비하다 기관의 정보망에 포착됐고, 정치적 위협을 느낀 정권 수뇌부의 지시로 실족사를 가장한 ‘모살’(謀殺)을 당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삼웅 지음, 2009년).

‘사고’당하기 전의 의미심장한 행적

장준하의 죽음을 둘러싸고 재점화된 의혹이 박근혜 후보와 그의 집권을 바라는 ‘박정희족(族)’의 정치적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불확실하다. 37년 만에 무덤을 열고 나온 고인의 원혼은 혹시나 알고 있을까.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