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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9일 금요일

4대강 공사 전후, 사진으로 비교해보니…


이글은 프레시안 2012-06-29일자 기사 '4대강 공사 전후, 사진으로 비교해보니…'를 퍼왔습니다.
[4대강은 지금] 습지와 모래톱은 사라지고 호수가 된 강변들

김소월 시인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묘사된 강변은 이제 사라졌다. 4대강 사업 이후, 강변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4대강 사업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사진들이 공개됐다. 사진작가 박용훈 씨와 녹색연합, 생태지평, 대전충남녹색연합, 여주환경운동연합 등은 2012년 봄, 4대강 사업이 완료된 이후의 강변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전 사진과 다른 점은 4대강 사업이 한창이던 2008~2009년에 4대강 사업 지역을 돌아다니며 찍었던 장소와 동일한 장소를 사진으로 다시 찍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찍은 비교사진들을 통해 한강, 낙동강, 금강의 주요한 습지와 아름다운 경관을 간직했던 장소들이 4대강 사업 이후, 어떻게 변모했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상태는 심각했다. 4대강 사업으로 하천생태계에 중요한 각종 습지와 모래톱은 심각하게 파괴됐고 수천, 수 만년 동안 한반도 기후와 지형에 따라 형성된 자연하천의 모습은 보로 가로막힌 거대한 호수로 변했다. 게다가 다양한 어류들의 서식지인 여울들은 준설로 사라졌다.

습지와 모래를 퍼내고 물만을 가득 채웠지만, 그렇게 확보한 수자원은 최근 가뭄 사태에서 볼 수 있듯 물 부족 해소에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에 담긴 장소는, 하천생태계 종 다양성의 보고였던 습지들(한강의 이포습지, 바위늪구비 습지, 낙동강의 해평습지, 구담습지 등), 그리고 하천수질정화에 필수적인 모래톱이 잘 발달했던 지역, 뛰어난 경관적 가치를 지녔던 장소들(낙동강 경천대와 금강 곰나루터 등)이다.

아래는 4대강 사업 이전과 이후 사진들이다.



▲ 사진 1. ⓒ박용훈
▲ 사진 2. ⓒ박용훈
사진 3. ⓒ박용훈

남한강 바위늪구비. 사진 1은 4대강 사업이 진행되기 전인 2009년 찍은 사진이다. 사진 2는 4대강 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2010년 당시 사진이다. 사람들이 다니던 길은 흔적만 남았고 주변에 있던 나무와 풀들은 모두 사라졌다. 사진3은 4대강 사업이 완공된 2012년 봄에 찍은 사진이다. 건설된 보로 인해 사람들이 다니던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진 1. ⓒ박용훈
사진 2. ⓒ박용훈

남한강 상류 지역. 역시 보로 인해 아이들이 생태학습을 하던 공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사진 1. ⓒ박용훈
사진 2. ⓒ박용훈

낙동강이 흐르는 안동 마애습지. 2010년에 찍은 사진 1에는 마애습지가 온전히 보존돼 있지만, 4대강 사업이 완료된 2012년 봄에 찍은 사진 2에는 마애습지가 사라졌다.

환경단체에선 습지가 훼손되면 생태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한다. 습지는 다양한 서식 환경을 제공하여 지구상의 그 어느 지역보다 생물학적 생산성이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기나 가뭄에 훌륭한 자연 댐의 역할을 하거나 토양 침식을 방지하는 수문학 및 수리학적 기능을 갖는다.

게다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양을 적절히 조절하는 등의 기후 조절 기능도 가지고 있고, 뛰어난 자정능력을 가져 수질정화의 기능도 한다. 이에 습지를 효과적으로 보존하면 생물 종의 다양성을 증대시킬 수 있고, 연안과 내수면의 수질을 정화할 수 있으며, 각종 수산 및 어족자원을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 서식처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런 습지가 4대강 사업 이후 사라졌다.

사진 1. ⓒ박용훈
사진 2. ⓒ박용훈

금강 왕진교 근처. 사진 1은 200년 모습이고 사진 2는 2012년 모습이다. 모래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래톱은 생물 서식지를 제공하고 보호하며 위기종의 보전과 물질순환이 가능하게 하는 생물 다양성 유지 기능을 한다. 또한, 오염물질을 거르고 정화하는 자연의 정화조로서의 기능을 한다. 뿐만 아니라 범람시 물을 저장해 완충작용을 하는 홍수방지 기능을 한다. 4대강 사업 이후, 금강에선 모래톱을 보긴 어렵게 됐다.

사진 1. ⓒ박용훈
사진 2. ⓒ박용훈

사진 1은 금강 벽제보가 설치되기 전인 2008년 사진이고 사진 2는 벽제보가 건설된 이후 찍은 사진이다. 보는 흐르는 물을 가두는 역할을 해 물을 썩게 만든다고 환경단체는 주장한다.

사진 1. ⓒ박용훈
사진 2. ⓒ박용훈

경남 의령군 지정면에 위치한 낙동강 남강합수부. 4대강 사업이 진행되기 전에는 습지가 넓게 분포돼 있었으나 4대강 사업 이후 습지는 사라졌다.

사진 1. ⓒ박용훈
사진 2. ⓒ박용훈

사진 1은 낙동강 해평습지 사진으로 정부 홍보사진이다. 수많은 새들이 찾아들던 해평습지는 4대강 사업 이후 사라져 새들이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는다. 사진 2는 2012년 4대강 사업 이후 사진이다.

☞ 사진 더 보기 :

 /허환주 기자

2012년 4월 29일 일요일

살아있는 강을 걷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홍섭기자 블로그 물바람숲 2012-04-23일자 기사 '살아있는 강을 걷다'를 퍼왔습니다.
채색과 유하의 한반도 도보 여행기 ⑧ 영월
심장 간지르는 여울 소리, 속까지 비치는 투명한 강…코끝 찡하게 그리웠던 강
'생명'과 '평화' 배너를 붙였다, 배낭은 무거워졌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흐르는 강을 보는 것 자체가 신비로웠다. 몸 안의 멈춰선 기운의 흐름이 물과 함께 뻥하고 뚫리고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울에서부터 온갖 인공물에 갇히길 반복하며 강은 얼마나 호되게 당했던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여울소리가 심장을 간지럽히는 듯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나 강을 파괴하는데 일조한 강변도로도, 거세게 달리는 트럭마저도 강의 강력한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물은 단양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초록빛이긴 했지만 훨씬 더 영롱했다. 충주댐의 강물이 마치 포식자에게 육체와 영혼을 빼앗긴 뒤 내팽개쳐진 초식동물 같은 물이라면, 흐르는 강의 물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첫 울음을 터트리는 아기 같은 물이었다. 

심지어 강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였다. 깊은 계곡의 물만 속이 보이는 줄 알았건만, 이토록 넓고 깊은 강도 속이 들여다 보이는 줄은 처음 알았다. ‘뻥’처럼 들렸던 “내가 어렸을 땐 서울의 한강물도 속이 훤히 보였다.”는 누군가의 말이 과한 표현이 아닐 거라고 믿게 되었다.


▲강이 흐르는 곳에는 아름다운 모래톱이 드러났다. 깊은 강 물 속도 훤히 보였다.

발에 물집이 또 크게 잡힌 유하 덕분에 더 많이 쉬고, 더 많이 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가방엔 특별한 의미의 천을 붙였다. 유하 가방에는 ‘평화’, 내 가방에는 ‘생명’이 적힌 천을 달았다. 한글 아래에는 혹시나 외국인들이 ‘What’s mean?‘이라고 물으면 답하기 곤란할 것 같아서 ‘FOR PEACE’, ‘FOR LIFE’를 함께 적어 두었다.

사실 걷기 전부터 가방에 뭔가를 달고 여행하는 것에 의견을 나누었다. 처음에는 ‘녹색’, ‘생태’, ‘자연’ 등 여러 의견을 나누었지만 그냥 떠나자는 것이 우세했다. 뭔가 달고 다니는 것을 거추장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자연스러운 삶’을 위해서 걷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표현하는 문장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걷던 중에 ‘생명’과 ‘평화’를 떠올리게 됐다. 온 생명이 평화를 이루고 사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거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상태는 더이상 생태적일 수도 없고, 더 평화적일 수도 없다. 우릴 보게 될 사람들이 생명과 평화를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길 바랐다.

우리를 달리는 차 안에서 보게 되거나, 거리에서 보게 되거나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뭐지?’라는 의문 다음에 분명히 ‘생명과 평화가 뭔데 저러지?’라고 떠올리게 될 것이다. 바람이지만 그들이 ‘생명과 평화’라는 키워드에 대해 검색을 해 보거나 생각해 본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이 된 것이다.

손수건 크기의 천이었지만 어깨엔 운동장만한 천이 더 얹혀진 것 같았다. 그 전에는 그저 여행자였지만 이제는 생명과 평화에 관심 없는 누가 보더라도 ‘생명과 평화를 위한 여행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눈동자는 더 부리부리해지고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어깨는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걷는 것인지 좀 더 뚜렷해졌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들이 ‘생명과 평화’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고 했지만 정작 우리가 그것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강은 그들의 흐름 만큼이나 금세 지나가고 있었다.


▲배낭에 '생명'과 '평화'라는 글자를 붙였다. 배낭이 훨씬 더 무거워진 듯하다.

단양과 다르게 영월에 이르는 이틀 밤은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영춘면의 상리 이장님과 영월성당 신부님의 따뜻한 배려 덕분이었다. 게다가 신부님은 응원의 저녁식사도 사 주셨다. 단양에서 잃어버린 힘을 되찾은 것 같았다. 역시나 자연이 살아있는 곳은 사람도 살아있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사람의 따뜻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양을 떠나 영월로 이르는 강의 모습도 신비로웠지만 영월을 지나 상류로 향하는 길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성형수술을 한 ‘그녀’의 순수했던 과거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마음 아닐까? 더군다나 평창, 정선에 이르는 동강 지역은 ‘영월(동강) 댐’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댐으로 사라질 뻔했던 곳을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영월 읍내를 벗어나 본격적인 강변에 이르는 곳에는 국도 38호선의 터널과 교량이 있었다. 그 도로는 엄청난 소음장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그 벽을 뚫고나니 숲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강에서 은은히 들리는 물소리만 남아 있었다.

동강은 동강 댐 반대운동이 한창일 때 유명해졌다. 한 신문기사를 보면, 2000년 6월 5일 동강 댐 백지화가 결정된 후 하루 수천명에 달하는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평일에는 천 명 내외, 주말에는 6000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고.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동강을 누가 보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댐을 건설한 것보다 더 나쁜 상태에 이를 것 같다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니 쉽게 짐작이 안 된다. 

그 때의 흔적인지 지나가는 마을에는 펜션과 민박이 가득했다. 색이 바랜 구명조끼와 보트들은 오래 전부터 래프팅 사업을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몇몇 시설은 문을 닫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있었는데, 아무래도 신문기사처럼 ‘댐을 짓는 것보다 더 나쁜 상태’로 될 만큼은 이젠 찾아오지 않는 듯하다.

강 건너편에는 시스터인지 시스타인지 거대란 리조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마을을 연상케 했는데 그 안쪽에는 골프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덕 너머로 얼핏 나무가 다 깎여나가고 황토가 벌겋게 드러난 곳도 보였는데 지나는 길의 작은 철판으로 된 이정표에는 ‘동강 영월온천 리조트 조성공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이곳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려고 들어온 것 같았지만, 그들로 인해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있었다. 아름답다고 쥐었다가는 톡~하고 터져버리는 비누방울처럼 그렇게 자연을 조금씩 터트리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작은 펜션들은 ‘차라리’ 아름다웠다. 주변과 어울리지는 않더라도 그 자체를 크게 훼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곧 싹을 틔우려는 나무와, 초록 영롱한 빛깔의 강물.
▲흐르는 강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강변을 다 망쳐놓은 시스타 리조트.

얕은 물과 자갈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내 마음을 이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에 먼저 이끌려 온 한 식구가 아직은 차가운 물가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물수제비를 뜨고 있었는데, 손을 벗어난 작은 돌은 몇 번 튕기지 않고 물에 풍덩 빠지기 일쑤였다. ‘내가 시범을 보여줘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은 강 건너편에 있었다.

도로를 따라 걷는 것이 좀 불편해질 때쯤 거운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개 합쳐놓은 것 만큼이나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성수기 때의 관광객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입구에 있는 화장실은 굳게 잠겨져 있어 소변을 보러 떠났던 유하가 금세 돌아와야만 했다. “평소에는 관광객이 없나 봐.” 유하가 말했다.

센 바람이 불고 비까지 왔다. 불편은 했지만 주차장 한 켠에서 밥을 해 먹었다. 바람 때문에 현미쌀로 한 밥이 더 딱딱하고 질기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점심을 먹은 뒤부터 걷는 길은 차도는 없고 걷는 길만 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다리를 건넜다. 길 입구의 마을은 조용했다. 길 안쪽 어딘가에서 노숙을 해야했으므로 물을 떠야 했다. 누군가를 불러 부탁해야했지만 집 앞마다 수돗가가 있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잠깐 오르막을 거친 길은 다시 가파른 내리막을 지난 뒤 강변으로 내려섰다. 걷는 길만 있는 줄 알았는데 길에는 두 개의 선이 깊게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차량들도 다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승용차 한대가 힘겹게 우릴 비켜갔다. 

그럼에도 이 길은 아름다웠는데 차량들도 천천히 가야만 하는 ‘느림의 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빠른 속도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지반을 튼튼히 만드느라 더 넓게 해야 하고 그 만큼 산 안쪽을 깎아내야 한다. 비포장 도로는 그렇지 않다. 이곳은 도로를 냈다기보다 다니다 보니 다져졌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물론 군데 군데 자갈을 붓는 등의 수고는 있었을 것이다. 

바쁠 것이 전혀 없었으므로 지금까지의 어떤 속도보다 천천히 걸었다. 유하와 나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의 미소 속에 다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성대를 떨어 입밖으로 나온 음성은 그저 “와~”, “우와~”, “이야~”, “죽인다.”하는 감탄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짙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태양은 이따금씩 우릴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빛으로 강과 숲의 명암이 분명해 졌을 때는 느린 걸음마저도 멈추게 만들었다. 어깨 끈에 매달린 카메라를 양 손으로 붙들고는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두면 이렇게 아름다운 강을 왜 사람들은 파괴하려고 안달이 났을까!

단단한 차 바퀴자국이 끝나는 지점에는 작은 집들이 몇 채 있었다. 우리 키 높이의 몇 배나 되는 높은 곳에 있었는데 여름철 불어난 강물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기울어가는 햇살은 우릴 움직이게 만들었다.

자갈밭이 넓은 곳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쉬었다. 드디어 나도 물수제비를 떠 보았다. 동심이 사라졌는지 금세 질려버렸다. 사진을 몇 컷 대강 찍고는 쭈그려 앉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우리뿐인 것 같았다. 졸졸거리는 작은 물소리마저도 이 산 저 산 부딪히고 부딪혀 메아리가 되어 증폭되었다. 물은 앞에서 흘렀지만 소리만큼은 옆은 물론 등 뒤까지 주변 모든 곳을 감쌌다. 이 느낌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라연 계곡으로 향하는 비포장 길.

▲자동차 도로가 전혀 없는 강 길!

▲동강 댐이 생겼다면 이 아름다움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걷기에 불편하지 않던 길이 외길로 변하며 다소 불편해졌다. 때로는 돌을 밟아 지나가야 하는 길도 있었는데 짐이 무거운 우리에겐 버거웠다. 등에 달린 짐들이 정말 ‘짐’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지지 않고 온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우린 이게 다잖아”라는 말로 위안했다. ‘집도 절도 자동차마저도’ 없는 우리들이다.

‘어라연’이라고 표시된 곳에서 긴 휴식을 했다. 강물이 짧게 휘감아 도는 지역인데, 영월 곳곳에는 이곳 사진이 도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사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그곳을 휘돌아 나온 강물의 멋진 모습은 보았다. 더는 순수할 수 없는 조그마한 조카가 또한 순수하고 맑은 웃음을 띤 채 문 안쪽에 숨어있다가 까꿍하며 놀래키며 나오는 모습 같았다.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걸을 때 즐겨부르는 ‘천리길’이다. 나도 모르게 나온 휘파람을 두고 유하는 “좀 조용히 해줘~”라며 날 막아섰다. 난 결국 1절을 끝까지 부르며 유하의 미움을 샀다. 역시 조용한 가운데 자연은 더 다가온다.

포털사이트 지도에는 어라연을 휘감아 돌아 강변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와 있었지만 그저 절벽일 뿐 길은 흔적도 없었다. 이정표는 우릴 ‘잣봉’으로 안내했다. 마땅히 그 주변에서 잘 만한 곳도 없었다. 사실 강변에서 야영하려 했으나 이곳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야영은 불가하다. 강변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흔적 없이 자고 떠나는 건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는 건 거의 처음이라 유하도 나도 힘들었다. 저녁 때가 지나서인지 배도 고팠다. 잣봉으로 향하는 능선에 겨우 닿으니 딱 텐트가 설 만한 공간이 있었다. 주저없이 임시 집을 만들었다. 유하와 나는 산 속의 고요와 함께 잠들었다.

글·사진 김성만(채색)/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생태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