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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9일 일요일

살아있는 강을 걷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홍섭기자 블로그 물바람숲 2012-04-23일자 기사 '살아있는 강을 걷다'를 퍼왔습니다.
채색과 유하의 한반도 도보 여행기 ⑧ 영월
심장 간지르는 여울 소리, 속까지 비치는 투명한 강…코끝 찡하게 그리웠던 강
'생명'과 '평화' 배너를 붙였다, 배낭은 무거워졌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흐르는 강을 보는 것 자체가 신비로웠다. 몸 안의 멈춰선 기운의 흐름이 물과 함께 뻥하고 뚫리고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울에서부터 온갖 인공물에 갇히길 반복하며 강은 얼마나 호되게 당했던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여울소리가 심장을 간지럽히는 듯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나 강을 파괴하는데 일조한 강변도로도, 거세게 달리는 트럭마저도 강의 강력한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물은 단양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초록빛이긴 했지만 훨씬 더 영롱했다. 충주댐의 강물이 마치 포식자에게 육체와 영혼을 빼앗긴 뒤 내팽개쳐진 초식동물 같은 물이라면, 흐르는 강의 물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첫 울음을 터트리는 아기 같은 물이었다. 

심지어 강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였다. 깊은 계곡의 물만 속이 보이는 줄 알았건만, 이토록 넓고 깊은 강도 속이 들여다 보이는 줄은 처음 알았다. ‘뻥’처럼 들렸던 “내가 어렸을 땐 서울의 한강물도 속이 훤히 보였다.”는 누군가의 말이 과한 표현이 아닐 거라고 믿게 되었다.


▲강이 흐르는 곳에는 아름다운 모래톱이 드러났다. 깊은 강 물 속도 훤히 보였다.

발에 물집이 또 크게 잡힌 유하 덕분에 더 많이 쉬고, 더 많이 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가방엔 특별한 의미의 천을 붙였다. 유하 가방에는 ‘평화’, 내 가방에는 ‘생명’이 적힌 천을 달았다. 한글 아래에는 혹시나 외국인들이 ‘What’s mean?‘이라고 물으면 답하기 곤란할 것 같아서 ‘FOR PEACE’, ‘FOR LIFE’를 함께 적어 두었다.

사실 걷기 전부터 가방에 뭔가를 달고 여행하는 것에 의견을 나누었다. 처음에는 ‘녹색’, ‘생태’, ‘자연’ 등 여러 의견을 나누었지만 그냥 떠나자는 것이 우세했다. 뭔가 달고 다니는 것을 거추장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자연스러운 삶’을 위해서 걷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표현하는 문장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걷던 중에 ‘생명’과 ‘평화’를 떠올리게 됐다. 온 생명이 평화를 이루고 사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거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상태는 더이상 생태적일 수도 없고, 더 평화적일 수도 없다. 우릴 보게 될 사람들이 생명과 평화를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길 바랐다.

우리를 달리는 차 안에서 보게 되거나, 거리에서 보게 되거나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뭐지?’라는 의문 다음에 분명히 ‘생명과 평화가 뭔데 저러지?’라고 떠올리게 될 것이다. 바람이지만 그들이 ‘생명과 평화’라는 키워드에 대해 검색을 해 보거나 생각해 본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이 된 것이다.

손수건 크기의 천이었지만 어깨엔 운동장만한 천이 더 얹혀진 것 같았다. 그 전에는 그저 여행자였지만 이제는 생명과 평화에 관심 없는 누가 보더라도 ‘생명과 평화를 위한 여행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눈동자는 더 부리부리해지고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어깨는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걷는 것인지 좀 더 뚜렷해졌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들이 ‘생명과 평화’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고 했지만 정작 우리가 그것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강은 그들의 흐름 만큼이나 금세 지나가고 있었다.


▲배낭에 '생명'과 '평화'라는 글자를 붙였다. 배낭이 훨씬 더 무거워진 듯하다.

단양과 다르게 영월에 이르는 이틀 밤은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영춘면의 상리 이장님과 영월성당 신부님의 따뜻한 배려 덕분이었다. 게다가 신부님은 응원의 저녁식사도 사 주셨다. 단양에서 잃어버린 힘을 되찾은 것 같았다. 역시나 자연이 살아있는 곳은 사람도 살아있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사람의 따뜻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양을 떠나 영월로 이르는 강의 모습도 신비로웠지만 영월을 지나 상류로 향하는 길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성형수술을 한 ‘그녀’의 순수했던 과거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마음 아닐까? 더군다나 평창, 정선에 이르는 동강 지역은 ‘영월(동강) 댐’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댐으로 사라질 뻔했던 곳을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영월 읍내를 벗어나 본격적인 강변에 이르는 곳에는 국도 38호선의 터널과 교량이 있었다. 그 도로는 엄청난 소음장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그 벽을 뚫고나니 숲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강에서 은은히 들리는 물소리만 남아 있었다.

동강은 동강 댐 반대운동이 한창일 때 유명해졌다. 한 신문기사를 보면, 2000년 6월 5일 동강 댐 백지화가 결정된 후 하루 수천명에 달하는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평일에는 천 명 내외, 주말에는 6000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고.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동강을 누가 보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댐을 건설한 것보다 더 나쁜 상태에 이를 것 같다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니 쉽게 짐작이 안 된다. 

그 때의 흔적인지 지나가는 마을에는 펜션과 민박이 가득했다. 색이 바랜 구명조끼와 보트들은 오래 전부터 래프팅 사업을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몇몇 시설은 문을 닫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있었는데, 아무래도 신문기사처럼 ‘댐을 짓는 것보다 더 나쁜 상태’로 될 만큼은 이젠 찾아오지 않는 듯하다.

강 건너편에는 시스터인지 시스타인지 거대란 리조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마을을 연상케 했는데 그 안쪽에는 골프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덕 너머로 얼핏 나무가 다 깎여나가고 황토가 벌겋게 드러난 곳도 보였는데 지나는 길의 작은 철판으로 된 이정표에는 ‘동강 영월온천 리조트 조성공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이곳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려고 들어온 것 같았지만, 그들로 인해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있었다. 아름답다고 쥐었다가는 톡~하고 터져버리는 비누방울처럼 그렇게 자연을 조금씩 터트리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작은 펜션들은 ‘차라리’ 아름다웠다. 주변과 어울리지는 않더라도 그 자체를 크게 훼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곧 싹을 틔우려는 나무와, 초록 영롱한 빛깔의 강물.
▲흐르는 강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강변을 다 망쳐놓은 시스타 리조트.

얕은 물과 자갈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내 마음을 이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에 먼저 이끌려 온 한 식구가 아직은 차가운 물가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물수제비를 뜨고 있었는데, 손을 벗어난 작은 돌은 몇 번 튕기지 않고 물에 풍덩 빠지기 일쑤였다. ‘내가 시범을 보여줘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은 강 건너편에 있었다.

도로를 따라 걷는 것이 좀 불편해질 때쯤 거운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개 합쳐놓은 것 만큼이나 넓은 주차장이 있었다. 성수기 때의 관광객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었다. 그런데 입구에 있는 화장실은 굳게 잠겨져 있어 소변을 보러 떠났던 유하가 금세 돌아와야만 했다. “평소에는 관광객이 없나 봐.” 유하가 말했다.

센 바람이 불고 비까지 왔다. 불편은 했지만 주차장 한 켠에서 밥을 해 먹었다. 바람 때문에 현미쌀로 한 밥이 더 딱딱하고 질기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점심을 먹은 뒤부터 걷는 길은 차도는 없고 걷는 길만 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다리를 건넜다. 길 입구의 마을은 조용했다. 길 안쪽 어딘가에서 노숙을 해야했으므로 물을 떠야 했다. 누군가를 불러 부탁해야했지만 집 앞마다 수돗가가 있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잠깐 오르막을 거친 길은 다시 가파른 내리막을 지난 뒤 강변으로 내려섰다. 걷는 길만 있는 줄 알았는데 길에는 두 개의 선이 깊게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차량들도 다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승용차 한대가 힘겹게 우릴 비켜갔다. 

그럼에도 이 길은 아름다웠는데 차량들도 천천히 가야만 하는 ‘느림의 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빠른 속도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지반을 튼튼히 만드느라 더 넓게 해야 하고 그 만큼 산 안쪽을 깎아내야 한다. 비포장 도로는 그렇지 않다. 이곳은 도로를 냈다기보다 다니다 보니 다져졌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물론 군데 군데 자갈을 붓는 등의 수고는 있었을 것이다. 

바쁠 것이 전혀 없었으므로 지금까지의 어떤 속도보다 천천히 걸었다. 유하와 나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의 미소 속에 다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성대를 떨어 입밖으로 나온 음성은 그저 “와~”, “우와~”, “이야~”, “죽인다.”하는 감탄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짙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태양은 이따금씩 우릴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빛으로 강과 숲의 명암이 분명해 졌을 때는 느린 걸음마저도 멈추게 만들었다. 어깨 끈에 매달린 카메라를 양 손으로 붙들고는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두면 이렇게 아름다운 강을 왜 사람들은 파괴하려고 안달이 났을까!

단단한 차 바퀴자국이 끝나는 지점에는 작은 집들이 몇 채 있었다. 우리 키 높이의 몇 배나 되는 높은 곳에 있었는데 여름철 불어난 강물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기울어가는 햇살은 우릴 움직이게 만들었다.

자갈밭이 넓은 곳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쉬었다. 드디어 나도 물수제비를 떠 보았다. 동심이 사라졌는지 금세 질려버렸다. 사진을 몇 컷 대강 찍고는 쭈그려 앉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우리뿐인 것 같았다. 졸졸거리는 작은 물소리마저도 이 산 저 산 부딪히고 부딪혀 메아리가 되어 증폭되었다. 물은 앞에서 흘렀지만 소리만큼은 옆은 물론 등 뒤까지 주변 모든 곳을 감쌌다. 이 느낌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라연 계곡으로 향하는 비포장 길.

▲자동차 도로가 전혀 없는 강 길!

▲동강 댐이 생겼다면 이 아름다움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걷기에 불편하지 않던 길이 외길로 변하며 다소 불편해졌다. 때로는 돌을 밟아 지나가야 하는 길도 있었는데 짐이 무거운 우리에겐 버거웠다. 등에 달린 짐들이 정말 ‘짐’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지지 않고 온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우린 이게 다잖아”라는 말로 위안했다. ‘집도 절도 자동차마저도’ 없는 우리들이다.

‘어라연’이라고 표시된 곳에서 긴 휴식을 했다. 강물이 짧게 휘감아 도는 지역인데, 영월 곳곳에는 이곳 사진이 도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사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그곳을 휘돌아 나온 강물의 멋진 모습은 보았다. 더는 순수할 수 없는 조그마한 조카가 또한 순수하고 맑은 웃음을 띤 채 문 안쪽에 숨어있다가 까꿍하며 놀래키며 나오는 모습 같았다.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걸을 때 즐겨부르는 ‘천리길’이다. 나도 모르게 나온 휘파람을 두고 유하는 “좀 조용히 해줘~”라며 날 막아섰다. 난 결국 1절을 끝까지 부르며 유하의 미움을 샀다. 역시 조용한 가운데 자연은 더 다가온다.

포털사이트 지도에는 어라연을 휘감아 돌아 강변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와 있었지만 그저 절벽일 뿐 길은 흔적도 없었다. 이정표는 우릴 ‘잣봉’으로 안내했다. 마땅히 그 주변에서 잘 만한 곳도 없었다. 사실 강변에서 야영하려 했으나 이곳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야영은 불가하다. 강변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흔적 없이 자고 떠나는 건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는 건 거의 처음이라 유하도 나도 힘들었다. 저녁 때가 지나서인지 배도 고팠다. 잣봉으로 향하는 능선에 겨우 닿으니 딱 텐트가 설 만한 공간이 있었다. 주저없이 임시 집을 만들었다. 유하와 나는 산 속의 고요와 함께 잠들었다.

글·사진 김성만(채색)/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생태활동가

기진맥진 밤길 산행, 반가운 곤드레 막걸리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홍섭 기자 블로그 물바람숲 2012-04-27일자 기사 '기진맥진 밤길 산행, 반가운 곤드레 막걸리'를 퍼왔습니다.
채색과 유하의 한반도 도보 여행기 ⑨ 평창 동강
애정남에 물어야 할 '다 왔다'…오르락 내리락 끝없는 산길
있는 대로 땀 흘리고 다리가 풀릴 만큼 걸은 뒤 털어넣는 막걸리 한 잔

숲 속의 아침은 어찌나 개운한지! 장성산 정상으로 향하는 도중 한번은 우리 둘 다 “쉬었다 가자!”라는 말도 없이 그냥 앉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가좌 자세를 하고선 눈을 감았다.

꼬리뼈에 구멍이 난 것처럼 바람이 들어와선 정수리로 나가는 느낌이었다. ‘명상’의 ‘명’자도 모르는 나였지만 자연의 기운이 내 몸을 통과해 흐른다는 것 쯤은 알 것 같았다. 유하는 혼잣말을 했다. “마음이 달콤해졌어.” 도시의 긴장됐던 얼굴 근육이 다 풀어진 것 같았다.

오르막을 올랐다가 또 내려가고, 또 올라가길 몇 번 반복했지만 전날처럼 무리가 가진 않았다. 아무래도 자연의 기운을 듬뿍 받은 덕일 테다. 잣봉 정상에서나 장성산 정상에서나 쌍쥐바위 전망대에서나 아름다운 풍경도 힘을 보탰다. 산길은 문산리에 닿으며 끝이 났다. 거기서 강을 다시 만났다.

마을회관 옆 정자에서 허기를 달랬다. 강바람이 세 판초 우의를 입어 보온을 했다. 마을회관으로 향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들은 우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꼭 눈앞에 떨어진 외계인을 쳐다보는 것 같다. 유하가 “안녕하세요? 도보여행중이에요~”라며 말하니 그제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다. 끄덕거림의 의미는 ‘지구인 인증’이었을 게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지역 에너지 학교’라는 워크숍에서 만난 김영주님께 전화를 했다. 그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활동가로 제장마을에 있는 ‘동강사랑’이라는 곳의 지킴이다. 내셔널트러스트는 동강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제장마을의 땅 오천평을 구매해 파괴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 마을에 오면 잘 곳이 있을거에요.”라며 여행 중에 제장마을에 꼭 들르라고 했다.

다행히 우리의 코스는 그곳을 지날 참이었고 잘 됐다 싶었다. 며칠 전 전화를 했을 때는 “월요일에 도착할 것 같아요.”라고 했는데 문산리까지의 경로가 험해 하루를 더 걸은 뒤 화요일에 갈 참이었다. 그런 얘길 하자 그는 “월요일이 휴무”라며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폐를 끼치게 된 것 같아 오늘 이동하기로 급 마음을 먹었다.


▲숲 속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았다.

▲잣봉 정상

▲소나무. 숲 속에서 쉴 땐 기운이 우리 몸속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지도상으로 그곳까지의 길은 복잡했다. 강 길은 끊겨 있었고 돌아가려면 차로도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우리가 왜 간다고 했지?” 스스로 반문해 보았지만 한 가지 방법은 있었다.
  
다리를 건너고 강을 따라 조금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서 계곡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난 고개를 넘는다. 고개 반대편에는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가 있고, 그곳에서 다시 동강을 따라 백룡동굴이 있는 문희마을까지 걸어간다. 그곳에서 칠족령을 넘어 제장마을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김영주님도 “문희마을까지만 오면 금방 올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미 하루의 체력을 대부분 소모해버린 우리였지만 휴일 나온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밥은 입 안으로 쏟아 넣듯 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만 해도 가장 느린 걸음을 즐겼지만 이 때만큼은 가장 빠른 걸음을 선보여야 했다. “컥~”, “헉~” 서로 경쟁하듯 격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문제는 고개를 넘는 일이었다. 지도에도 길이 없었고 눈으로 보기에도 길이 없어 보였다. 산길에 대한 경험이 조금 더 있는 내가 길을 살폈다. “저 능선 보이지? 주변에서는 저기가 제일 낮아보이네.” 유하는 반신반의 했지만 해는 기울고 있었으므로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고개로 오르는 골짜기에 이르니 주변과 다르게 잡목이 우거지고 돌들이 널려 있었다. 집터와 밭터의 흔적이었다. “여기에 화전민들이 살았나봐. 길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지만 끊임없이 숲을 헤치고 걸어야만 했다. 사람이 살았던 것은 분명했지만 터와 길은 남김없이 자연으로 돌아와 있었다.

길이 아닌 숲속은 발을 깊숙히 빨아들였다. 무거운 짐을 진 탓에 더 그랬다. 종아리와 허벅지에는 불끈 불끈 힘이 들어갔다. 경사는 얼마나 가파른지 눈앞의 나무를 잡지 않고서는 안 될 정도였다. 유하는 장갑을 낀 상태로 팔을 짚으며 기듯 걸었다. 배고프고 분노한 살쾡이가 어슬렁거리는 모양새다.

나는 “이제 다왔다.”하며 힘내라는 뜻으로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만 유하는 ‘네가 다 왔다는 건 가나다…타파하 중 다까지 왔다는 거냐?’라는 식으로 노려보았다.
  
능선에 이르렀을 땐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 있다는 것에 기뻤지만 후들거리는 유하의 다리는 ‘이곳을 넘는 건 아니었다’는 후회가 밀려오게 만들었다. 한숨을 돌리는 유하는 뭔가 중요한 말을 하듯 낮고도 힘있게 내뱉었다. “다 왔다는 말은 언제 할 수 있는 건지 개콘 애정남에 물어 봐야겠어!”

능선은 동강의 다른 지역처럼 날카로웠는데 중간중간엔 ‘시멘트’ 빛깔의 석회암이 드러나 있었다. 나만 생각했던 것일까, 유하의 불안한 걸음걸이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시간은 지체되고 있었지만 결코 재촉할 수 없었다. 거의 입을 닫은 채 걷고 기다리길 반복했다. 

능선을 조금 돌자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가 보였다. 능선을 따라 길은 나 있었지만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게 더 나을 듯 싶었다. 오르막을 더 오를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시 완만한 부분을 찾아 그리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내려가. 중심을 절대 앞으로 두지 말고.”라며 앞장섰다.

나무 사이로 느린 스키를 타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부드럽고 무른 숲 속의 흙은 미끄러지는 대로 흘러내렸다. 구르더라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던 유하는 “채색이 먼저 가서 미끄러질 흙이 없어.”라는 푸념에 “그 옆으로 똑같은 식으로...”라고 답했다. 한번 미끄러져 보더니 “내려가는 건 재밌네!” 라며 금방의 고생을 잊었다. 나는 ‘다행이다’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점점 완만해지더니 숲이 끝나고 밭이 나왔다. 그리고 밭 사이에 난 길을 밟았다. 딱딱한 길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둥실거리는 파도 위를 떠다니는 배를 타고 먼 육지에 도착해 다시 땅을 밟는 느낌이었다. 바지와 신발을 신나게 털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에서 문희마을까지는 시멘트로 된 1차선 도로가 나 있었다. 그 길을 경보하듯 빠른 속도로 걸었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내게 유하는 평소와는 다른 눈빛을 보냈다. 그녀를 한번 쳐다본 뒤 “어, 이것만 찍고.” 라고 말했다. 내 말에 “어? 아무말 안했는데?” 한다.

어스름이 시작될 쯤 문희마을에 도착했다. 도로를 더 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마을에는 일반적인 집보다 펜션이 더 많았다. 아무래도 백룡동굴을 개방하면서 관광지화 하려는 듯 보였다. 마을 벤치에 앉아서 기운이 쏙 빠진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뭐라도 먹어야겠다!” 

민박에 딸린 작은 가게가 있었다. 불이 꺼져 있어 아무도 없는 줄 알았건만 문 옆의 ‘벨을 누르시오’가 사람을 불렀다. 주인도 나도 깜짝 놀랐다. 쵸코바 두 개랑 이온음료 두 개를 샀다. 아저씨는 “등산을 하기엔 너무 늦었는데….”라며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칠족령 넘어 제장마을 가려구요.” 조심하라는 두 분의 걱정을 뒤로하고 유하에게 돌아갔다.

초코바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이거 없었으면 우린 여기서 끝이었어.” 정말이었다. 그도 나도 움직일 힘이 없었다. 더군다나 땀을 많이 흘려 물만으로는 수분 보충이 안 되는 상태였다. 꿀맛 같은 '불량음식'을 다 처리한 뒤 칠족령으로 향했다.


▲길이 없는 가파른 산길. 나무의 도움 없이는 오르기 힘들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강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등에 벽돌을 가득 진 일꾼처럼 한 발 한 발 힘겹게 옮겼다. 흘릴 땀도 없을 것 같았지만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바닥만 쳐다봤다. 잣봉에 장성산, 길없는 고개에 이어 네번째 산을 오르는 길이다. 하루 동안 이토록 걷는 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길 바랐다. “백두대간 타기 전에 훈련하는 거라고 생각하자.” 서로를 응원했다.

칠족령을 앞두고 한 사람이 하산하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나머지 잘 보이지 않았는데 누군가 싶었다. 우리 앞에 이르러서야 그가 김영주님인 걸 알게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올 때가 됐는데 안 와서 나와 봤어요. 아까 문자 받을 때도 칠족령에 있었거든요.”라며 우리가 힘든만큼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희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금방 가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는 유하의 가방을 뺏어 메고, 유하는 내 카메라 가방을 뺏어 들었다. 몸이 반이나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속도도 두 배나 빨라졌다. 김영주님은 더 늦어지면 안 된다는 뜻인지 빠르게 우릴 앞서 갔다. 어둠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잠깐씩 잠깐씩 숨을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김영주님은 “칠족령에 가면 전망대가 있거든요. 거기서 오래 쉬어요.”라며 이유를 붙였다. 가벼웠던 걸음도 조금 지나니 다시 무거워졌다.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오르막을 오를 때쯤 칠족령에 닿았다. 

먼저 도착한 김영주님은 툭 불거져 나온 전망대에 서서 “가방 내려놓고 이리 내려오세요.” 라고 외쳤다. 가방을 던지고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난 전망대에 서자마자 “와! 우리나라 최고의 풍경이네요!” 라고 했고, 영주님은 빛이 남아있을 때 온 게 다행이라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은 왼쪽에서 부터 반바퀴를 돌아 우리 발 아래에서 한바퀴 또 돌고, 길고 높은 뼝대를 오른쪽에 끼고 남쪽으로 쭉 뻗다가 다시 돌아 나갔다. 절벽을 이곳말로 뼝대라고 한단다. 그러니까 눈 앞에서 강이 세 번이나 돈 셈이다. “독수리 발톱 모양이에요.” 영주님이 말했다.

검푸른 하늘 빛밖에 없었지만 가슴에 ‘팍!’하고 꽂히는 풍경이었다. 이곳까지의 고생이 하얗게 사라져 버렸다. 맹하고 바보 같은 목소리로 “오~”, “와~” 이런 소리를 반복했다. 코와 입으로 동시에 그곳의 풍경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는 동안에 어둠이 넓게 내려 앉았다.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손전등을 배낭을 뒤적거려 꺼냈다. “바로 옆이 절벽이라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영주님의 주의령에 긴장이 됐다. 슬금 슬금 뒷걸음 치듯 내려갔다. 서로 갈 길을 비춰주길 반복하다보니 금세 내려설 수 있었다.

짐은 영주님이 소개시켜 준 민박집에 풀고 식사는 ‘동강사랑’에서 했다. 동강사랑은 우리나라 제1호 스트로베일 집이다. 볏짚과 황토를 섞어 벽체를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앞으로의 꿈 중에는 우리 스스로 집을 짓는 것도 포함돼 있었으므로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탄사가 연신 나왔다. “와~” 

우리가 만든 카레와 밥을 영주님이 미리 사 놓은 막걸리와 함께 먹었다. “곤드레 막걸리는 이 지역 막걸리예요. 정말 맛있어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는 마셔보기도 전에 이 막걸리를 그저 ‘맛있는’정도가 아닌 ‘최고’라고 단정지었다. 땀이 더는 흐를 수 없을 때까지 흘리고, 다리가 풀릴 수 없을 때까지 걸은 상태여서 어떤 형태, 맛을 가진 것과는 상관 없이 시원한 액체는 뭐든지 최고가 될 수 있는 때였다. 후에 내가 곤드레 막걸리에게 ‘최고의 막걸리 상’을 수여한다면 그는 ‘그저 다 차려진 밥상에 밥숫가락만 얹었을 뿐입니다.’라는 소감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반갑습니다!”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눈 뒤 막걸리 한사발을 한 번에 털어넣었다. 플라스틱 밥그릇을 아랫니에 툭툭치며 마지막 한방울까지 넣고선 “진짜네요!”라고 말했다. 뭐가 진짠지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은 채 웃음만 넘쳤다.

글·사진 김성만(채색)/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생태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