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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9일 수요일

핵을 사랑한 아버지와 딸, 끔찍하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3-01-09일자 기사 '핵을 사랑한 아버지와 딸, 끔찍하다!'를 퍼왔습니다.
[초록發光] 박정희와 박근혜의 평행 이론

사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비교를 도무지 안 할 수가 없다. 박근혜 당선인의 선거 승리 요인 중 하나가 새마을 시대와 권위주의적 효율성에 관한 향수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아쉬운 인식이긴 하지만 여하튼 51퍼센트라는 지지율은 누구도 무시하기 힘들다. 하지만 경제 성장이 세상 유일한 가치인줄로만 아는 불통 의식이나 '이것이 구국이다'하는 인식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는 건 도무지수용하기가 너무 힘들다. 바로 핵에너지(핵에너지)를 보는 시각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얼마 전 발표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는 대표적인 핵공학자이자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역임했던 인사가 포함되었다. 지난 4·11 총선에서 비례 대표 1번으로 핵공학자를 넣었을 때 이미 암운을 직감하긴 했지만,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참담한 심정이다.

박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핵 발전이나 에너지 정책 관련해 특별한 비전이나 정책을 내놓은 바가 없다. 시대적으로 비전과 정책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안에 대해 언급이 거의 없었던 것도 심각하지만, 당선이 되자마자 보란 듯이 '핵 마피아'로 꼽히고 있는 인사를 선발한 것은 끔찍한 수준의 현실 인식이다.

찬핵도, 반핵도 표명한 바 없다고 둘러댈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에게 투표한 51퍼센트 역시 당선인의 에너지 정책에 찬성했다는 뜻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핵 발전과 에너지에 대한 공약을 명확히 걸지 않았다면 지금 새 정부가 추진할 정책은 당연히 사회적 토론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예민한 사안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형국이 되고난 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건 비겁한 행동이다. 이건 누가 봐도 핵 발전을 확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고, 국민에게는 혹독한 불통의 리더십이다.

 
ⓒ프레시안

겨울철 전력난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는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고 따라서 핵 발전이 대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때문에 시급히 추진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양해를 구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당선인에게 닳고 닳은 '구국의 일념'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건 수십 년에 걸친 장기적인 문제고, 따라서 사회가 동의하는 비전이 필요하다. 즉 판단은 국민이 한다.

더 우려스러운 건 문제가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올해는 제6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과 제2차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이 발표된다. 특히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은 작년에 발표되었어야 하는데 아직 계획조차 완성되지 못한 상황이다. 따라서 시간이 없는데다가 박 당선인이 찬핵론자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핵 발전이 중심이 된 이전 계획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태로 나올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기반으로 작성될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정책 결정권자들이 법으로 정해진 시한을 넘기면서까지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부가 무능했거나 누가 새로운 권력이 될 것인가 하는 눈치를 보았거나 둘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대선 후보 중 1인은 사실상 찬핵을, 1인은 탈핵을 걸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1~2년 계획도 아니고 십수 년을 목표로 하는 장기 계획이 누군가의 무능이나 눈칫밥으로 좌지우지된다면 그 자체가 난센스다.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대체 계획을 세우는 목적이 무엇이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일련의 과정과 거의 흡사한 일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정시기였던 1962년에 '원자력 발전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고, '원자력 발전 추진 계획'을 수립했다. 군정 시기답게 국민 동의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것이 핵발전소 밀집도 세계 1위, 전력 사용량 세계 9위, 1인당 사용량 선진국 추월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핵 발전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 결정이야말로 경부고속도로에 버금가는 탁월한 혜안이라며 사또에게 설레발 떠는 이방처럼 성찬할지 모르겠지만, 중앙 집중형 에너지 체계가 지금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핵심 요인이 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대는 변한다. 백 번 양보해서 당시에는 집중된 에너지원이 필요했다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 발전 추진 양상이 군정 시기와 너무 똑같아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국민적 동의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 혼자 판단하고 혼자 추진하는 이런 상황을 다시 5년이나 지켜볼 자신감이 없다. 어쨌든 에너지·기후 변화 문제는 이제 돌려막기가 가능한 수준도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 나치스의 나팔수 역할을 했던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다."

난 우리의 미래를 그들에게 위임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런 시도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이 아닌 '초록 대안'을 찾으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활동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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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2012년 9월 27일 목요일

액세서리 취급도 못 받는 녹색…환경 운동은 뭐하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2-09-27일자 기사 '액세서리 취급도 못 받는 녹색…환경 운동은 뭐하나?'를 퍼왔습니다.
[초록發光] 녹색의 가치는 죽었는가?

그린란드(Greenland).

'녹색의 땅'이라는 뜻이지만, 경작 가능한 전체 땅은 2퍼센트에 불과한 얼음의 땅이다. 심지어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섬은 아이슬란드(Iceland)라고 부르는데 유독 북쪽 끝에 위치한 거대한 대륙에는 왜 그린란드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지금 스칸디나비아의 이주민이었던 에리크(Erik)가 연안 지역의 푸른 풀을 보고 이름을 붙였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의도된 작명설(作名說)'이다. 범죄를 저지르고 수배 중이던 에리크가 푸르고 사람이 살만한 땅이란 환상을 심어 이주민을 끌어들인 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세기의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최근 일고 있는 '녹색'과 '초록'의 붐을 보고 있자면, 혹한의 땅에 '그린'이란 이름을 붙인 에리크의 거짓말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과연 그 중에 정말로 녹색의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녹색'을 가장 명시적으로 사용하는 곳은 지난 3월 창당했던 녹색당이다. 총선에서 정당등록 유지 조건을 맞추지 못해 지금은 '녹색당+'로 이름을 바꾸고 재창당 준비에 여념이 없지만 여전히 전망은 암울하다. 현실 정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운동권 정당, 혹은 등대 정당으로 취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녹색당이 정책 정당으로서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방증한다. 지난 얘기긴 하지만 녹색당 창당 당시에도 아직 이르다는 입장을 수차례 피력했다. 대중적으로도 정치, 정책 능력으로도 더 추슬러야 할 것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녹색당의 행보는 "논의의 효율성보다는 소통과 과정을 중시"하는 정당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지난 창당 과정이나 작금의 재창당 과정의 다양한 의견 대립이 이를 보여준다. 그래도 녹색당은 생태적 지혜와 사회 정의, 비폭력 평화와 풀뿌리 민주주의 등 누구나 다 인정할 만한 녹색의 가치를 표방하고 있다. 다소 미련해보이지만 끊임 없는 걸음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녹색당은 능력이 없을지언정 에리크의 그린란드는 아니다.

또 하나의 진보 정당인 '진보신당'은 어떨까? 정책은 여전히 '적색'에 가깝고 현실 정치에선 무능하다. 진보적 가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진보가 몰락하는 것을 무력하게 방임했다. 그래도 스스로를 "녹색 가치의 깃발을 든 전태일"(홍세화 대표)을 표방하기도 하고, 당내에도 적록 연대를 위한 정책을 제시하는 등 녹색의 가치를 포괄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 지난 3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수명 만료 핵발전소 폐쇄 법안' 발표 기자 회견에서 녹색당 비례대표 이유진 씨를 비롯한 당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두 정당이 우리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또 한 번 죽어가고 있다. 대선 이슈에 묻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해도 두 정당 모두 재창당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작금의 무관심은 다소 놀라울 정도다. 그간 같이 녹색을 주창하던 우리는 마치 그들이 내세웠던 녹색의 가치는 처음부터 녹색의 가치가 아니었다는 듯 관심조차 황급히 거둬버렸다. 그들이 대선 후보를 낼 가능성이 낮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녹색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약한 외침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긴 하지만 대선 정국에서 정책 활동을 벌일 계획도 가지고 있다. 왜 이런 안타까운 상황까지 오게 된 걸까?

문제는 사회의 녹색 담론을 주도하는 세력에게 있다. 그간의 발전 혹은 개선만으로도 주류 녹색 세력은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력주의나 자연 파괴 문명을극복해야 한다는 거대환 전환, 즉 녹색의 가치를 도외시하기 시작한다면 사회는 그들의 영향력을 인정해주고 활동을 지지해줄 이유가 사라진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도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에는 정책 제안이나 협조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녹색의 가치를 표방한 녹색당과 진보신당은 각각 0.48퍼센트와 1.13퍼센트의 처참한 성적표를 손에 얻었다. 가장 큰 문제야 두 당의 능력 부족인 게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녹색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해줬다는 이야기 역시 들어본 적이 없다. 녹색은 선거를 위해 존재하는 가치였던가. 현실화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스스로 녹색을 액세서리로 만드는 것 아닌가 우려스럽다.

녹색당이나 진보신당에 대한지지 선언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 프레임은 도저히 녹색의 가치를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국회나 정부로 보내는 관심 중 일부는 프레임 자체를 뜯어고치려는 노력에 주어야 함이 마땅하다. 풀뿌리 변화를 지향한다면 이를 표방하고 있는 그들에게 도와주겠다, 관심이 있다는 제스처 정도는 있어야 한다.

단지 지인 관계라는 이유로 지나가는 말로 '고생한다' 치하해 주는 수준은 너무 고약하지 않은가. 그들은 우리가 '선거'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가치'에 주력하고 있는데 말이다. 만약 근본적인 것은 외면하고, 녹색인양 꾸미는 목소리에 집중한다면 그 때 우리는 에리크의 그린란드가 될 것이다.

먹물 좀 먹은 사람인양 녹색의 가치를 중언부언 설명할 생각은 없다. 그런 지적 능력은 있지도 않거니와 내가 이해하는 녹색의 가치와도 상충된다. 내가 알고 유일한 건 녹색이 거대한 전환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녹색당과 진보신당은 무능하다. 그래서 느리고 힘들다. 그래도 현 대선 정국에서 녹색의 가치가 현실화될 가능성보다는 높지 않을까? 짐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건 녹색이 아니다. 미몽에서 깨어날 순간이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 진행하는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런 시도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이 아닌 '초록 대안'을 찾으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활동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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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