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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6일 토요일

4대 권력기관장 ‘대탕평’보다 ‘강력한 사정라인’ 무게


이글은 한겨레신문 29-013-03-15일자 기사 '4대 권력기관장 ‘대탕평’보다 ‘강력한 사정라인’ 무게'를 퍼왔습니다.


지역편중 비판 피하려 ‘비 TK·비 호남’…4명 중 3명 서울 출신
신상필벌·엄단 중시’ 국정운영 스타일 반영할 ‘친위체제’ 구축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검찰총장과 국세청장, 경찰청장 후보자를 지명하면서, 3일 지명한 남재준 국정원장 후보자를 포함해 이른바 ‘4대 권력기관장’의 인선을 마무리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박 대통령은 대선 때 약속했던 ‘지역 안배-대탕평 인사 원칙’보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뜻이 명확하게 반영되는 ‘강력한 사정라인 구축’에 무게를 실었다.가장 관심을 모았던 검찰총장엔 서울 출신 채동욱 서울고검장이 전남 출신인 소병철 대구고검장을 제치고 지명을 받았다. 박 대통령이 예고한 ‘대탕평 인사’ 차원에서 소 고검장의 낙점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결국 박 대통령의 가장 큰 지원군인 영남 주류 인사들의 반대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대신 박 대통령은 지역 편중 비판을 피하기 위해 ‘비 티케이(TK·대구경북)-비 호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국세청장 후보자에 티케이의 지원을 받은 조현관 서울지방청장 대신, 대전 출신인 김덕중 중부지방국세청장을 지명했다. 경찰청장도 서울 출신 이성한 부산경찰청장을 택했다. 4대 권력기관장 중 3명을 서울 출신으로 배치해 지역색을 아예 빼버린 것이다. 다만 관가에서는 ‘대통령이 지역 안배를 하지 않으면, 이후 기관장들도 조직 인사 때 지역 안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신상필벌’과 ‘엄단’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이 반영된 만큼, 사정라인은 한층 강력해졌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의 의중이 실린 ‘친위체제’라는 분석도 있다.우선 채동욱 검찰총장 후보자가 기업 수사 경험이 많은 ‘특별수사통’인 만큼, 향후 박 대통령이 강조했던 주가조작 사범이나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 등에 ‘칼날’을 겨눌 것으로 예상된다. 국세청은 이미 숨은 세원을 찾아나서는 등 ‘지하경제 양성화’에 팔을 걷어붙인 상황이다. 김덕중 국세청장 후보자는 2007년 국세청 기획조정관 시절 대국회 업무를 하며 당시 기획재정위원이던 박 대통령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앞으로 김 후보자가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와 함께 ‘경제분야 사정라인’을 형성하며 박 대통령의 의중을 충실히 반영할 것으로 전망된다.박 대통령이 ‘경찰청장 임기보장’이라는 약속을 뒤집고 경찰청장을 교체한 것은 ‘4대 사회악 척결’을 책임지는 경찰 조직을 일신해 긴장감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세평에서 순위가 밀렸던 이성한 경찰청장 후보자가 발탁된 배경에는 친박 핵심 참모들과의 두터운 친분이 작용했다는 뒷말도 있다. 오는 18일 청문회가 예정된 남재준 국정원장 후보자도 2005년부터 박 대통령을 도운 핵심 참모로 분류된다. 남 후보자는 일찌감치 국정원 내부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예고한 바 있다.4대 권력기관 외에 국무총리실과 행정안전부, 감사원도 전방위적인 공직복무 감찰활동에 나서면서 정부 출범 초기 ‘기강 잡기’ 국면이 예상보다 길게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감찰→기관장 물갈이→수사와 처벌’ 등의 수순을 밟는 역대 정부 초반의 사정 작업이 애초 예상보다 고강도로 진행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국무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실은 35명의 직원들이 동원돼 감찰 활동을 벌이고 있고, 행정안전부도 자치단체 공무원들을 감찰 중이다. 양건 원장의 유임이 결정된 감사원도 ‘고삐 죄기’에 나서고 있다. 감사원은 현재 공직감찰본부 소속 감찰인력 85명을 투입해 ‘비상시기 복무기강 특별점검’에 들어가 있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2013년 2월 20일 수요일

박근혜 인사에 약속했던 ‘대탕평’ 실종


이글은 경향신문 2013-02-19일자기사 '박근혜 인사에 약속했던 ‘대탕평’ 실종'을 퍼왔습니다.

ㆍ내각·청 발탁 30명 분석… 여성은 2명 뿐

19일 마무리된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내각 인사의 특징은 ‘수도권·영남’ ‘관료·학자’ ‘서울대·성균관대’ 편중으로 요약된다. ‘지역·직업·학교’ 등의 인사 고려 요인이 한두 가지에만 집중되면서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국민대통합 의지를 담은 ‘대탕평 인사’ 의지를 보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무총리와 17개 부처 장관을 포함한 국무위원 18명과 청와대 ‘3실장 9수석’ 12명 등 30명의 이력을 분석하면 이 같은 ‘지역·직업·학교’ 편향 현상이 뚜렷이 드러난다.

우선 30명 중 수도권 출신이 12명으로 3명 중 1명꼴이다. 17개 부처 장관 중 7명이 서울, 2명이 인천 출신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이명박 정부 초대 내각 당시는 15명 중 서울과 수도권이 3명이었다. 청와대 수석 중에서는 모철민(교육문화)·최순홍(미래전략)·최성재(고용복지) 수석이 서울 출신으로, 이를 합하면 서울 출신이 10명으로 역대 정부 최다다. 영남 출신 8명을 고려하면 수도권과 영남 2개 지역 출신이 20자리를 차지한다. 호남 인사는 5명이 포함됐지만 진영(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이정현(청와대 정무수석) 등 사실상 ‘친박’ 인선으로 실질적 의미는 퇴색된다. 

직업으로는 관료 출신에 대거 쏠렸다. 절반이 넘는 16명은 관료(군 포함) 출신이다.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와 청와대 3실장(허태열·김장수·박흥렬) 등 두 갈래 인선의 ‘수장’이 모두 관계에 몸 담았다. 내각에서는 현오석(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윤병세(외교)·서남수(교육)·황교안(법무)·유정복(안전행정)·유진룡(문화체육관광)·윤상직(산업통상자원)·김병관(국방) 후보자 등이 포함된다. 청와대 수석진에서는 주철기(외교안보)·조원동(경제)·모철민(교육문화)·곽상도(민정) 내정자 등이다. 학계 입문 전 상공부에서 근무한 유민봉 청와대 국정기획수석까지 더하면 17명으로 늘어난다. 이 외 교수·연구자 등 학자 출신이 8명으로 ‘전문가 기용’이라는 박 당선인의 인선스타일을 보여줬다.

출신 대학은 전통적으로 다수를 차지해온 서울대와 함께 성균관대가 약진했다. 서울대 출신 10명에 성균관대 출신이 7명이다. 특히 청와대는 ‘성균관 학파’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허태열 비서실장 내정자를 비롯해 유민봉·모철민·곽상도·이남기 수석 내정자가 성대선후배 사이다. 이와 함께 서울지역 명문고 2곳(경기·서울고) 출신이 12명, 고시 출신이 17명으로 ‘성시경(성균관대-고시-경기고 출신) 인사’임을 확인했다. 인수위 출범 당시의 ‘원대복귀 원칙’과 달리 청와대 참모진 6명과 부처 장관 7명 등 13명은 인수위 출신이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2013년 1월 15일 화요일

박근혜, 사도세자를 두 번 죽이지 말기를...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3-01-14일자 기사 '박근혜, 사도세자를 두 번 죽이지 말기를...'을 퍼왔습니다.
[게릴라칼럼] 진정한 '탕평' 원한다면 특권층 1%와 싸워야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12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교부받은 당선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박근혜 당선인은 취임 직후부터 '대탕평 인사'를 국정 키워드로 표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민 모두가 행복한 '100% 대한민국'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이 그의 약속이다. 

탕평은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의 '홍범' 편에 나오는 정치이념이다. 여기에는 군주가 지켜야 할 9가지 정치원칙인 홍범구주가 나온다. 이 중에서 제5원칙이 탕평과 관련된 내용이다. 

제5원칙의 핵심 내용은 군주가 국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5원칙을 다룬 부분은 "황극(皇極)은 임금이 표준을 세우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군주가 표준을 세우는 상태' 즉 '군주가 중심이 되는 상태'가 황극이며, 이 황극에 관한 내용을 다룬 것이 제5원칙이다. 황극의 실현 방법과 관련하여 다음 두 문장이 특히 관심을 끈다. 

"일반 백성들이 은밀히 뭉치지 않고 높은 사람들이 뭉치지 않는 것은 임금이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제1문장."치우침이 없고 당을 만들지 않으면 왕도가 탕탕(蕩蕩)하고, 당을 만들지 않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평(平平)하다."-제2문장. 

제2문장의 '탕탕'과 '평평'을 압축한 게 탕평이란 두 글자다. 탕평의 의미는 제1문장에 나온다. 백성들이 파벌을 만들어 끼리끼리 뭉치는 상태를 배격하는 것이 바로 탕평이다. 바꿔 말하면, 여러 집단과 계층이 골고루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탕평이다. 이 같은 탕평을 통해 '임금이 중심이 되는 상태'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탕평의 본질, 국가가 특정 파벌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것
 
 
▲ 영조의 어명으로 세워진 탕평비가 보관돼 있는 탕평비각.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정문에 있다. ⓒ 김종성

'군주가 국가의 중심이 되는 것이 탕평이라면, 이것은 군주 독재를 위한 논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탕평의 본질은 국가가 특정 파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백성들이 끼리끼리 뭉치지 않도록 군주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특정 당파가 아닌 백성 전체의 이익을 위해 국가 조직이 움직이도록 군주가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보다는 '높은 사람들' 즉 특권층이 당파를 만들 위험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제5원칙의 궁극적 목표는 특권층 내의 파벌이 국가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모으는 것은 탕평이 아니다. 국가가 백성 전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탕평이다. 이것은 인사조치에만 국한하지 않고 국가의 법률제도까지 과감히 뜯어 고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1% 귀족의 나라'가 아닌 '100% 만백성의 나라'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왕권도 자연스레 강해질 것이라는 게 옛날 왕들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왕권이 비교적 강했던 중국과 달리, 귀족이 더 강했던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탕평의 원리가 제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1%를 규제하고 100%를 위하는 군주는 1%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임금은 폭군이란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1%가 99%보다 훨씬 더 강했기에, 옛날 우리나라의 왕들은 탕평을 감히 추진하기 힘들었다. 

탕평이 공식적으로 추진된 것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초반부터였다. 숙종 임금(재위 1674~1720년) 때에 당파 투쟁이 최고로 격렬해지고 이 틈을 타서 숙종이 당파들을 교묘히 대립시키고 지치게 만들면서, 당파 정치는 이전과 달리 크게 약해졌다. 물론 그 후에도 보수파인 노론당 계열이 여전히 제1당이었지만, 숙종시대 후반부터는 노론당을 포함한 당파들의 힘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렇게 당파 정치가 약화된 틈을 타서, 숙종의 아들인 영조가 선언한 것이 바로 탕평정치였다. 그는 '1% 양반 귀족의 나라'가 되어 버린 조선을 '100% 만백성의 나라'로 바꾸려면 특정 당파의 독점을 깨고 당파 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왕권이 자연스레 강해질 것이라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이런 시도의 결과로 영조가 즉위한 1724년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는 '1% 조선' 이 아닌 '100% 조선'을 위한 탕평정치가 추진되었다. 물론 그것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도 아니고 또 노론당이 힘을 잃은 것도 아니지만,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이 시대의 정치는 분명히 진일보한 것이었다. 

▲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었던 경모궁 터. 서울대병원 뒤편에 있다. ⓒ 김종성

▲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장소인 창경궁 문정전 앞뜰. ⓒ 김종성

그런데 이 시대에 영조나 정조보다 훨씬 더 교과서적으로 탕평을 추진한 인물이 있었다.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그 주인공이다. 

사실, 영·정조는 약간 타협적으로 탕평을 추진했다. 탕평을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특정 당파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특히 영조는 정권 유지를 위해 외척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처럼 완벽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전의 왕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한 것을 그들이 용감하게 시도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특권층과 죽기 살기로 싸운 이유 

다소 타협적인 영·정조에 비해 사도세자는 매우 원칙적으로 탕평의 이념을 고수했다. 그는 1749~1762년의 13년 동안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권한대행)을 수행했다. 따라서 탕평정치가 시행된 76년 중에서 13년 동안은 실질적으로 사도세자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탕평정치의 계보는 영조-정조가 아니라 영조-사도세자-정조였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사도세자는 '100% 조선'을 이루려면 특권층인 노론당과 외척세력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노론당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는 나이 열 살 때부터 노론당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노론당을 비호한 영조의 태도까지 비판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처가인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선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그는 외척세력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견제했다. 노론당과 외척으로 이루어진 '1%'를 견제했던 셈이다. 한마디로, 그는 '100% 조선'에 목숨을 건 용감한 사나이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13년 만에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것은, 그가 교과서적인 탕평을 추구했고 그것이 특권층에게 공포심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화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뒤주에 갇힌 본질적 요인은 '1%'와의 갈등이었다.   

▲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의 복원품.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사도세자가 1%로부터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는, 그가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죄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정조가 왕의 자리에 있을 때도 왕으로 추존되지 못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왕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면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정조는 끝내 이 일을 하지 못했다. 사도세자에 대한 특권층의 거부감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된 것은 구한말 때인 1899년이었다. 100%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1% 때문에 얼마나 곤욕을 치를 수 있는지를 사도세자는 온몸으로 보여줬다. 

사도세자는 251년 전에 죽은 사람이지만, 그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 탕평을 외치고 있다. 서울 시민은 물론이고 지방 사람들도 많이 찾는 대학로 서울대병원의 바로 뒤편에는 그의 위패를 모셨던 사당인 경모궁의 터가 남아 있다. 또 경모궁 터에서 왼쪽으로 직경 500미터 거리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곳인 창경궁 문정전 앞뜰이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탕평을 원한다면, '1% 대한민국'이 아닌 '100% 대한민국'을 정말로 원한다면, 경모궁 터와 문정전 앞뜰에서 울려퍼지는 사도세자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의 정치환경에서는 사도세자처럼 특권층과의 대결을 불사하지 않고서는 탕평을 추진할 수 없다. 한여름 날씨에 8일간 뒤주에 갇혀 세상과 작별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탕평이다. 

박 당선인이 '100% 대한민국'을 위한 대탕평을 하고자 한다면, '죽기 살기로' 1%와 싸울 각오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진정성 있는 탕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김종성(qqqkim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