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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열네 살 아이가 '여한이 없다'며 자살, 그런데도…"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24일자 기사 '"열네 살 아이가 '여한이 없다'며 자살, 그런데도…"'를 퍼왔습니다.
['학교폭력'을 말하다] 이계삼(오늘의 교육)편집위원

"교육의 중요한 주체인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실상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굴욕감에 절어 있다. 아주 기계적인 문제 해결 과정을 답습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서 이 문제들이 안 벌어지기만을 바랄 정도로, 우리는 극도로 수동화되어 있다."

지난 17일 '교육공동체 벗'과 '알라딘'이 주최한 강연 "누가 진짜 일진인가 - 학생인권과 학교폭력"에서 이계삼 편집위원은 "학교가 갈수록 전체주의화, 파시즘 체제가 되어 가고 있다"며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육주체들의 무능한 자화상을 한탄했다. (☞바로 가기: '교육공동체 벗' 온라인 커뮤니티)

이 편집위원은 특히 '학교폭력과 밀양 송전탑 건설 문제가 결코 다르지 않다'며 미국정치학자 더글라스 러미스(C. Douglas Lummis)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이미 인민이 무력감을 느끼는 체제가 돼 있다'라고 지적했다. 얼마 전까지 일선 교육 현장의 교사, 지금은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현장 활동가인 그의 말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무력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지난해)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학교폭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공허한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사람들은 답이 있을까' 해서 찾아오는데, 답이 없는 얘기를 계속해야 하는 공허함"과 "'10년이 넘는 교사 생활 동안 학교폭력 문제에 존재를 걸고 고민하지 않았다'는 반성" 때문이었다. 그는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폭력에 관해 중병이 걸려 있지만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이 폭력을 생각해보게 하는) 출발선이 됐다"고 말했다.

▲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은 지난 17일 "누가 진짜 일진인가 - 학생인권과 학교폭력"을 주제로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폭력에 관해 중병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교육공동체 벗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상처의 존재다"

'교육'은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이계삼 편집위원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의 상처는 그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얻은 것"이라며 "아이의 것과 아이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학교'이전에 가정환경에서부터 기본적인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학교와 사회가 이런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겠다"며 나서서 제도화하려는 것.

"치유해주겠다, 혹은 없애주겠다는 발상이 더 문제가 아닌가. 상처와 같이 대화하고 어루만져주고, 그러면서 견딜만한 것으로 보듬어 주는 게 교육이다. 그런데 이런 원천을 아예 없애버리거나 기구나 전문가에게 떠넘기려는 방식으로 자꾸 제도화시키려 한다. 나는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학교폭력의 증상보다 훨씬 가공할 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네 상처에 관심이 없다, 당장 우리 눈앞에서는 이런 일 보고 싶지 않으니 잠시 꺼져달라'라는 것이다."

그는 또 "학교가 파출소가 되어 가고 있으며, 다른 한 축으로는 병원이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가 "(학생이) 잘못하면 잘못한 만큼 처벌하고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숙의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다른 곳으로 이월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권고 전학, 즉 쫓아 보내거나 학교생활기록부에 빨간 줄을 남겨서 낙인을 찍거나, 아니면 상담전문가나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서 치료받아라"라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파출소로 보내든, 병원으로 보내든 학교에서 문제시 된 아이들은 눈앞에서 사라지겠지만, 이 일에 연루된 아이들의 상처도, 거기서 발생한 폭력의 크기도, 눈덩이처럼 굴러서 커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다만 자기 눈앞에서만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 안락한 정서, 내 학교, 내 새끼만 아니면 괜찮다는 사회적 연대의식의 파탄"에 오늘날 학교 폭력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처 난 아이들을 견딜만한 것으로 보듬어 안아주기 위해서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부터 달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학교폭력을 원근법으로 바라보라"는 것. 학교폭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 중 멀리 있는 것은 멀리, 가깝게 있는 것은 가깝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멀리 볼 줄 아는 시선도 없고, 가까운 문제의 핵심을 볼 줄 아는 능력도 없는 것 같다"며 정부와 경찰 등 제도권의 학교폭력 문제 해결 방법을 비판했다.

IMF 체제, 양육방식의 변형

▲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진 리들로프 지음, 강미경 옮김, 양철북 펴냄) ⓒ양철북

학교폭력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 편집위원은 멀리 "IMF 체제 이후 변형된 양육방식"에서부터 찾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가 IMF를 거치면서 진 리들로프가 주장하는 '연속성 개념'(The continuum concept)이 가장 극명하게 깨졌다는 것이다. 리들로프는 책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강미경 옮김, 양철북 펴냄)에서 아마존 예콰나 부족을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육아법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예콰나 부족 육아법은 한마디로, 가족, 또래 집단, 마을과 같은 인간관계, 그리고 아마존 밀림의 자연세계와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이기에 가능했다"며 "예콰나 부족의 아이들은 품성이 좋고, 화를 낼 줄 모르며, 타자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등 성숙한 인간관계의 기술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인간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즉 가족, 또래 집단, 마을, 자연세계와 조금도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라고 되물었다.


"IMF 이후, 엄마가 일하러 가면서 아이는 혼자 있게 된다. 실질소득은 감소하는데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 일하러 나간다. 엄마들은 계산원·조리원 등을 하며 돈을 벌고, 아이들은 혼자 지내며 컴퓨터를 하거나 학원에 다닌다. 그나마 학원에 가야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연결고리가 다 끊어져 버렸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이런 그의 문제 인식은 책 (교육 불가능의 시대)(교육공동체 벗 펴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IMF 구제금융 체제 이후에 사교육이 번성했다는 것은 비상한 의미가 있다"며 "오늘날 사교육의 번성은 부모가 먹고사는 일이 너무나 강파른 곡예가 되어 버린 현실과 그 개선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공부에서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한 공포감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에 이어 초등학교, 중학교 교실마저 무너지고 있는 것은 많은 부분 학원과 과외에 시달린 아이들의 정서, 너무나 이른 시기부터 경쟁으로 내몰린 아이들의 스트레스와 이를 풀어내려는 충동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며 "학교는 이제 보육(保育) 시설도 되지 못하고, 보육(保肉) 시설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23~24쪽)


학생 자살 문제에 덤덤한 이유


인생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긍정적이며 수용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지금 죽음으로써 가장 격렬하게 이 체제를 들이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자살한 대구 중학생은 유서에서 "이제 여한이 없다"고 했다. 열네 살 아이가 '여한이 없다'고 하는 사회, 그러나, 그게 우리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 편집위원은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자살 행렬은 인류사의 그 어떤 사회, 그 어떤 문화에 견주어도 어마어마한 사건인데, 유독 한국사회에서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다"며 우리 사회의 폭력 구조를 꼬집었다.


"밀양 송전탑 사건처럼 국가 폭력이라는 게 있잖아요. 사실 우리는 날마다 힘 있는 존재가 힘없는 존재를 끊임없이 착취하고 두드려 패고 배제시키는 것을 목격하며 살고 있어요. 조현오가 경기도 경찰청장이던 시절에 쌍용자동차 노조가 파업하고 있는 옥상에 가서 발암물질이 섞여 있는 최루액을 뿌리고 경찰 특공대 투입해서 노동자를 두드려 잡았잖아요." ( [오늘의 교육]3·4월호 56쪽)


지난 2월 22일 대구의 한 강연에서 그가 말한 "사회폭력, 국가폭력"의 한 단면이다. "우리 자체가 폭력적인 사회에 깊이 길들어 있어 이런 정도(학생 자살)의 폭력에는 덤덤"해진 이유를 말해준다. 이미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폭력 과잉의 사회에서 조금씩 폭력적인 개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


우리 각자가 폭력적인 개체가 된 상황에서 이 편집위원은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를 고민하자며 "아이들을 위해 뭘 더 해보겠다고 나서지 말고, 차라리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리스트화해서 하나라도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억압의 목록을 지워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거꾸로 해보자는 것이다.

▲ <학교 없는 사회>(이반 일리치 지음, 박홍규 옮김·해설, 생각의나무 펴냄) ⓒ생각의나무

그는 '학교화(化)'된 사회를 비판하며 '자율적 공생'을 외치는 이반 일리치의 (오늘의 교육)(박홍규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 마지막 장에 예시된 에피메테우스에 주목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와 결혼해 상자를 열어버리는 바람에 인간에게 헛된 희망을 품고 살게 만든 신이다. 에피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고 진보의 상징으로 이야기되는 형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얼간이 취급을 받는 존재다.

그는 "일리치가 '에피메테우스'를 강조한 이유는 그의 이름처럼 '뒤를 바라보자, 나중을 생각하자'는 의미가 아닐까"라며 "그것은 우리가 옛날에 했던 것, 지금은 하지 않는 어떤 것을 통해 아이들 안에 있는 선한 어떤 것을 이끌어 내자는 주문"이라고 강조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서도 그는 "중요한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사유"라고 말했다. "어설픈 희망의 언사, 개선의 노력들, '그래도 학교가 희망이다'는 식의 언술은 그것의 현실적인 의미와 도덕적 가치를 떠나 이 교육 불가능을 치유 불가능한 상태로 악화"시킨다며 "아이슈타인이 말했듯이 '문제를 일으킨 그 마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28쪽)고 단정했다.

'교육 불가능'은 '절망'과 '해방'의 양가적 감정

'교육공동체 벗'이 발행하는 (오늘의 교육)은 창간호에서부터 '오늘날 교육이 가능한가?'를 물었다. 암담한 교육 현실을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다는 외침이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맞다. 우리 교육 현장은 지금 교육 불가능이다'라고 공감했다.

이 편집위원은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을 처음 썼을 때 '양가적인 감정'이 있었다고 했다.

▲ <교육 불가능의 시대>(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엮음, 교육공동체 벗 펴냄) ⓒ교육공동체 벗

하나는 '절망'. 아이들이 수업도 안 듣고, 학교를 졸업해도 더 이상 물질적인 유익도 찾을 수 없는, 대학 졸업장이 부도수표가 되고, 증권으로 치면 깡통계좌가 된 상황에서 여전히 입시 교육이 맹위를 떨치고 경쟁이 활개치는 것은 다만 사회적인 '아비투스(Habitus,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경쟁 교육은 다른 가능성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런 물질적 유익에 대한 보장이 없지만 그저 다른 사람들도 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하는 습관"이라며 "그런 의미의 '교육 불가능'은, 절망과 체념의 의미"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해방적 측면'이다. 그는 "이제는 입시 교육을 하면 할수록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이 너무 명백하다"며 "예전에는 아이들을 공부라도 시켜 대학에 보내 취직시키는 게 (내가) 교사라는 직업인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끈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끊겼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하지 말고, 내가 믿는 바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역설적인 해방의 공간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는 단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밀양이라는 소도시의 산업공동화 현상을 예로 들었다. 대낮에 자전거를 타고 시내 상가를 돌아다니면 그 많은 시내 가게에 손님이 정말 아무도 없다며, 이미 지방 소도시에서부터 '공황'은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공황에 준하는 과도기"에 와 있기 때문에 그는 "교육하는 사람들은 과도기가 주는 해방적 측면, 아이들이 자면 굳이 깨워서 수학 문제 풀게 하지 않아도 되는 분명한 물질적 근거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측면을 우리가 잘 이야기하고 언어화해, 사회에 의제로써 제출하고, 그 대안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형편없는 체제, 역설적이게도 길이 있다

그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 이 편집위원은 "일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는 눈과 행동, 그리고 언어"라며 "'일상의 재조직'이라고 하는 묵직한 화두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상의 재조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소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합법화 초창기 당시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분회가 양심적인 교사들의 학교생활과 일상을 조직해주었던 생활공동체였듯이, 학교의 교무실이든 아이들끼리의 학급이든 이런 소공동체의 형성이 결국 문제 해결에 있어서 관건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 곧장 혼내거나 징벌 체제 속으로 밀어 넣지 않고 이 문제를 차분하게 한번 응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하여, 그 아이의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알 때까지 어떤 집행을 유예하는 것, 그리고 집행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의 종용을 버텨보는 것. 그리고 그런 말들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동료, 또래, 공동체 등에서 이를 교육적인 언어로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위해 '형편없는 체제의 버팀목이 되어 달라'는 주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과오를 뉘우친 아이와의 만남이 "우리를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이는 "(학교폭력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아이들은) 대개 상처를 갖고 있는 아이이기 때문에 교육적 의미를 갖는 시선과 행동들이 비록 1%의 무게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99%의 상처를 들어 올릴 수 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학교폭력에 대해 극심하게 느끼고 있는 지금의 무기력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교사로서의 내 주권, 부모로서의 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교육과정의 혁신적 재구성, 오후 3시부터는 '몸'을 쓰게 하라"

마지막으로 그는 대선을 앞두고 교육정책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학교폭력을 풀어나갈 정책적 대안은 교육과정을 혁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따돌림은 학교폭력의 바탕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도 따돌림당하는 게 두려워서 약한 아이에 대한 폭력을 모른척하거나, 가담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존 교육과정과의 단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가해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렇다. 짜증나고 재수 없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열네 시간 동안 계속 한 교실에서 봐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 부분이 따돌림을 구조화시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오후 3시가 되면 자연스럽게 헤어져서 가해자 A는 클라리넷 배우러 음악실로 가고, 피해자는 학교농장에 일하러 가고, 가해자 B는 각각 농구클럽에 나가면 그 따돌림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시간의 7/14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는 또 "혁신의 진정한 내용은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라며 "너무 급진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김대중 정부의 교육개혁안이나, 참여정부에서 구상했던 '교육이력철'을 생각하면 그리 급진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정도의 교육과정 혁신을 지금 문재인, 안철수 캠프에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 '교육공동체 벗'과 '알라딘'이 주최한 "누가 진짜 일진인가" 강연 모습 ⓒ교육공동체 벗

다음은 강연 후 진행된 일문일답이다.

질문 1. 주변에 교사가 여럿 있는데 무력감을 느낀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학생들의 속 얘기를 듣다 보면 무당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저 원(怨)을 달래주다 끝나는 것 아닌가'라는 회한이다. 그 순간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자괴감 또한 섞여 있다. 아이들에게 언제까지 견디라고만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이계삼 : 학생들만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교사들도 견디고 있다. 한 교사가 메일을 보냈는데, 주변 교사들에게 아이들을 장악하지 못 한다고 비난을 듣는다는 내용이었다. '장악'(掌握)이라는 말은 손바닥에 꽉 쥔다는 표현인데, 교육학에 없는 말이다. 학생을 장악한다는 것은 파시즘적인 발상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선생님들은 아주 중요한 사상적 투쟁을 하고 있다. 몸이 아픈데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억지로 야자를 해야 했던 체험은 아이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 자신의 절실한 바람을 '힘'에 눌려 유보했던 이들은 절실한 문제를 유보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힘센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심리적 기반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들은 두발이든 야자든 아이들의 절실한 바람을 존중해 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반파시즘 투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학교에서 '호구'로 지냈다. 교사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허용적인 태도는 다른 말로 '무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호구로 지낸 교사 생활 11년에 전혀 후회가 없다. 이 자리에 온 교사들에게 '저처럼 호구가 되어 주십사' 부탁하고 싶다. 또 같은 학년 안에 '호구 동맹'이 맺어졌으면 좋겠다, 야자가 되든, 두발이 되든, 학교라는 체제의 억압적인 것들로부터.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의 또 한 가지는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게 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민주주의는 원래 복잡하고 '불순물'이 많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학교도, 학생도 민주주의가 되려면 늘 자기 말이 많고 다소 어지러운 상태여야 한다. 그게 정직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교사들이 그것을 못 견뎌 한다. 타인의 시선, 자기의 평가, 자기 에고의 문제다. 흔들린다는 것은 출렁이는 것이고, 굉장히 기분 좋은 교육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사불란한 체제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에너지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교사들이 좀 더 무능한 호구였으면 좋겠다,

질문 2. 딸이 6학년인데, 반에서 일어난 몸싸움을 아이가 경찰에 신고했다. 결국 당시 현장에 있던 학생들의 학부모가 경찰에 불려 가 쓴소리를 들었다. '학교폭력 신고하라'며 배운 대로 한 행동이지만, 그 일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엄마 입장에서도 과연 옳은 행동이었는지 판단이 안 선다. 어떤 일이든 자기 자식에 대한 것은 상황판단을 하기 어렵더라. 부모로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나.

이계삼 : 우리 아이도 지난 1학기 때 따돌림을 당했다. 그 반은 힘이 센 아이 중심으로 돌아갔는데, 아이가 그런 상황이 불편했는지 다른 반으로 도니까 힘이 센 아이가 따돌림을 명했다. 아이가 계속 아프다며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길래, 어른이 개입해야 되느냐를 놓고 아내와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조금 더 가면 우울증 걸리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는데 결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 기간이 열흘 넘게 2주 정도 지나니 풀렸다. 아이도 견뎠고, 우리도 견뎠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힘이 센 아이가 해제를 명했다고 한다. 2주 동안 아이는 쉬는 시간에도 다른 반에 가지 못하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조증으로 보일 만큼 활발해졌다.

부모가 아이 상태를 직접 검사하려는 것은 안 좋다고 본다. 사실 말이지만, 오늘날 어른들도 조금씩은 다 ADHD(주의력결핍장애)가 있지 않나. 특히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로는 더 그렇지 않나. 그런데 아이가 그렇다고 낙인을 찍으면, 언어가 존재를 규정하게 된다.

부모 입장에서 아이에게 우울증이 생길 만큼 바라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아이도 그 과정을 견디면서 한 단계 성숙해졌다고 본다. 아이는 그 경험을 계속 기억하며 살 것이다. 이런 상처가 거세된 시공간을 상정해서 쉽게 가려고 피해 가려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 사실 말이지만,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지켜봐 주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교사로 부모로 지내는 시간은 기본적으로 고통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고, 주고받고 공감하는 그 언어 속에서 다른 행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질문 3. 이계삼 선생님이 사직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좋은 교사를 잃어 슬프다라고도 생각했지만, 좋은 학부모를 얻어 기쁘다라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교사 생활 중 안타까웠거나 기억에 남는 일은?

이계삼 : 학교에 있으면서 교사 집단과 잘 안 맞았던 게, 교사성(性), 교사됨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교사들은 늘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고, 자신 아닌 누군가를 탓하지만, 잘 듣다 보면 결국 자신이 '교사'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이야기로 귀결되더라. 결국 현실이 어떻다, 교육이 어떻다 말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안전한 정규직 교사'라는 계층적 안정감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게 불편했다.

기억에 남는 일은 아이들하고 야자하면서 떡볶이와 오뎅을 먹던 시간이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그림을 참 좋아하는데, 슬프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그렇다. 여럿이 모여서 같이 먹는 게 그냥 좋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동(大同)' 사회도 결국 '모두 모여서 함께 밥 먹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않나.

▲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 '학교폭력'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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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선 기자

2012년 10월 4일 목요일

"'놀이밥'에 굶주린 아이들, 닭장 속에서 괴롭히며 논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10-04일자 기사 '"'놀이밥'에 굶주린 아이들, 닭장 속에서 괴롭히며 논다"'를 퍼왔습니다.

편해문 씨는 놀이운동가다. 

우리나라 전래놀이를 집대성한 놀이연구가, 놀이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결국 놀이'운동가'다. 평화운동, 인권운동이 필요한 것처럼, 놀이운동 역시 절실하다는 게 편 씨의 생각이다. 평화, 인권 등이 삶의 기본 조건이듯, 놀이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리고 평화, 인권을 억누르는 구조가 있는 것처럼 놀이를 짓밟는 구조가 있다. 이런 구조에 맞서 놀이를 지켜내는 게 놀이운동이다.  그는 '놀이밥'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밥을 제때 먹지 않으면 탈이 나듯, 아이가 제때 충분히 놀지 않으면 결국 탈이 난다. 특히 '놀이 허기', '놀이에 대한 굶주림'이 강력한 어린 시절에 충분히 놀아야 한다. 그때 채워지지 않는 '놀이 허기'는 아이의 몸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건 표출된다. 밥과 다를 게 전혀 없다. 어릴 때 혹독하게 굶주렸던 기억은 어른을 과식하게 하고, 결국 성인병을 일으킨다.  "아이가 '놀이밥'을 제대로 먹었는가"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그를 만났다.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줬던 학교폭력, 왕따 사건들도 이런 프레임으로 보면 핵심이 명료하게 잡힌다. 어른들은 흔히 왕따, 괴롭힘을 놀이처럼 여기는 아이들을 보며 경악한다. 하지만 이는 어릴 때 충분히 놀지 못해서 생긴 '놀이 허기'를 뒤늦게 나쁜 방식으로 채우려 해서 생긴 일이다. 놀이에 너무나 굶주렸는데, 닭장 같은 학교는 놀이에 접근하는 통로를 모두 막아버렸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아이들은 자기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며 논다. 마치 닭장 속의 닭이 서로 쪼아대는 것처럼 말이다. 배가 너무 고픈데, 밥이 차단돼 있다면 결국 쓰레기라도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놀이밥'을 푸짐하게 차려 주는 게 답이다.  학교폭력이 부각되면서 함께 문제로 떠오른 온라인 게임 중독 역시 '놀이밥'이 답이다. 편 씨가 보기에 보수 언론이 연일 공격하는 온라인 게임의 선정성, 폭력성은 큰 문제가 아니다. '짐승의 시기'를 지나는 아이들은 원래 어느 정도 폭력적이기 마련이다. 다만 문제는 아이들이 놀이에 너무 굶주린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온라인 게임을 만나면 '빛의 속도'로 중독이 된다. 반면, 어릴 때부터 '놀이밥'을 충분히 먹고 자란 아이는 쉽게 중독이 되지 않는다. 밖에서 하는 놀이와 안에서 하는 놀이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라고 하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한다. 이게 정상이다.  '놀이운동가'이면서 아이들에겐 '놀이밥 삼촌'으로 통하는 편해문 씨를 지난달 말 서울서교동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만났다. (편집자)

▲ 놀이 운동가 편해문 ⓒ프레시안(이명선)

"학교폭력, 아이들이 '놀이밥' 충분히 먹었는지부터 살펴야"

프레시안 : 학교폭력이 교육계의 화두로 떠오른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교육당국은 가해학생만 찾아내 격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학교폭력'을 말하다" 연속 인터뷰를 진행하며 만난 이들은 이런 방식에 대해 한결같이 비판적이었다. 학교폭력은 우리 사회와 교육이 앓고 있는 병이 나타내는 증상의 하나일 뿐이라는 게다.

그래서 조금 방향을 바꿔보기로 했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뭘까'라는 질문을 던져봤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떠오른 게 '놀이'였다. 아이들은 충분히 놀아야 하는데, 지금 아이들에게선 놀이가 사라졌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편해문 지음, 소나무 펴냄)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저자에게 인터뷰를 청하게 됐다. 제목 그대로 '아이는 놀이가 밥'인데,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을 밥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셈이다. 병이 드는 게 당연하다.

편해문 : 학교폭력 문제는 주로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얘기되고 있다. 그런데 '놀이'는 그보다 어린 아이들, 초등학생이 중심이다. 이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학교폭력이 불거진다. 중·고등학생들의 폭력 성향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물론, 학교폭력 문제를 이야기할 때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을 딱 잘라서 접근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폭력이 주로 발생하는 특정 시기만 놓고, 해법을 찾는 것은 잘못이다. 아이들이 살아온 내력을 봐야 한다. 유치원, 어린이집, 초등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봐야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 이르는 시기가 아이들이 '놀이'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는 점이다.

"아이들, '짐승의 시기'를 제대로 보내야 사람이 된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쩌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되기 이전, '짐승의 시기'를 보내는 시절이다. 짐승들을 보라. 끊임없이 집어던지고 물고 뛰어내리고 하지 않나. 아이들도 그래야 한다. '짐승의 시기'를 제대로 보내고서야, 아이는 '사람의 시기'로 넘어온다.

어린이집에 가보라. 아이들을 칸막이(또는 교실) 안에 가두어 놓는다. 또 배꼽에 손을 얹게 하고 의자에 앉혀 놓는다. '짐승의 시기'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이 그런 공간에서 견딜 수가 있겠나.

다섯 살짜리 아이와 두어 명 되는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관찰해봤다.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놀자'라고 약속하고 오후 7시 반, 8시가 되도록 놀았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 '오늘 오랫동안 잘 놀았다'라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놀이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밖에서 그렇게 많이 몸을 움직이고도 아이들은 저녁 내내 놀았다. 이런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충분히 놀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놀지 않는 아이'='병든 아이'…어릴 때 못 털어낸 놀이, 언젠가 터져나와"

문제는 사람은 누구나 '짐승의 시기'에 해야 할 것이 있다는 점이다. 소리 지르고 뛰고 달리고 물어뜯고 던지고 등. 이런 걸 충분히 해서 털어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못하게 하면, 그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아이들의 몸 안에 그대로 잠기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때가 되면 이런 것들을 반드시 꺼내기 마련이다. 조금 더 나이가 찼을 때, 몸밖으로 터져 나온다.

아이들이 책을 보고, 교사의 말을 듣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기에 말이다. 제때 털어내지 못한 '놀이'가 뒤늦게 터져 나오면, 당연히 여러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된 아이들을 볼 때, '오늘'만 이야기하는 것은 참 허망한 일이다. 문제가 있다고 한 단면만을 잘라서 보면 안 된다. 아이들이 지나온 놀이의 이력을 봐야 한다. 아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를 거꾸로 살펴야 하는데, 정부와 언론이 이야기하는 학교폭력 대책에는 이 대목이 빠져 있다. 그러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멀쩡하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니까 갑자기 폭력적으로 바뀐 것처럼 비친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놀지 않으면 몸이 부서진다. '아이들이 놀지 않는다'라는 것은 '아이들이 아프고 병들었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닭장에 갇힌 아이들…왕따 가해자, 그들도 살자고 하는 짓"

아이들이 놀아야 하는데 놀지 못하니까, 그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결국 '왕따', '폭력' 등이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왕따', '폭력'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은 그걸 '놀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정상적인 '놀이'를 완전히 막아놓았더니, 아이들은 왕따와 폭력을 '놀이'라고 생각하며 노는 것이다.

학교폭력 사건에서 가해학생만을 나무라는 게 어렵다고 보는 것도 그래서다. 아이들은 놀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도 살려고 하는 것이다. 많은 놀이 중에서도 한두 가지, 괴롭히는 쪽으로 쏠린 것이다. 아이들 입장에선 학교라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닭장에서 닭들이 버티는 방법이 그런 식이다. 그래서 닭이 태어나면 제일 먼저, 부리부터 자른다. 부리로 약한 닭을 쪼아대며 괴롭히기 때문이다. 닭들이 고통을 잊는 방법, 그나마 놀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다. 위에서는 똥과 오줌이 쏟아지고 불은 24시간 켜져 있다. 살 수 없는 환경이다. 닫힌 공간이다.

지금 교실과 꼭 닮았다. 아이들 역시 닭장 속의 닭들과 마찬가지 선택으로 내몰린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닫힌 공간이라는 점이다. 닭장도 교실도 닫힌 공간이다. 그토록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놀이'는 많지 않다.

"아이들이 '싸움' 해봐야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

프레시안 : 잇따른 학교폭력 사건에서 드러난 아이들의 공격성, 가학성에 대한 설명으로 들린다. 어릴 때 충분히 놀지 못해서, 즉 '놀이'를 다 털어내지 못해서, '놀이'가 몸 안에 잠겨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잠겨 있던 '놀이'를 언젠가는 결국 털어내야 하는데,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대부분 닫혀 있다. 닫힌 공간에서 놀이를 털어내는 방식은 제한돼 있고, 그게 결국 폭력과 왕따라는 설명으로 들린다.

편해문 : 여기서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게 있다. 아이들에게 싸움은 필요하다는 점이다. 폭력은 분명히 나쁘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싸움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나는 아이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닐 때라면 거친 싸움을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두들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의 낌새가 보이면 뜯어말리기에만 급급하다. 잘못이라고 본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닐 나이에 싸움을 해봐야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 놀이와 싸움의 경계 말이다. '상대방을 어느 정도 힘으로 밀면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것이구나'라는 것을 아이들이 감(感)으로 알 수 있어야 한다. 이 나이 때 뛰어 놀면서 거친 몸싸움을 해봐야 놀이와 싸움의 경계를 알게 된다. 이런 학습이 되지 않은 채 나이를 먹은 아이들은 힘 조절을 못 한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을 다치게 만든다.

물론,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어른들이 싸움을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안전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 하다.

"어른들이 모든 위험 치워준다?…아이는 놀이도, 세상도 못 만난다"

놀이와 위험과 뗄 수 없는 관계다. 모험과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놀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적당한 위험이 섞인 놀이 속에서 아이들은 '잘못하면 다칠 수 있다'라는 점을 배운다. 이건 어른들이 말로 설명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나서서 위험을 모조리 치워준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놀이도 만나지 못하고, 위험에 대한 경각심도 기르지 못한다. 이는 결국 아이들이 세상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현병호 (민들레)발행인도 '아이들이 싸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나도 깊이 공감한다. 지금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아이들 세계에서 '싸움 놀이'가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본다. 놀이 속에서 싸움을 하며 몸의 힘을 쓰면 초등학교 4학년 정도에는 그 힘이 소진된다. 그런데 이걸 못하게 하니까 '싸움 놀이'가 폭력으로 넘어간다. 어린 시절에 했어야 할 '싸움 놀이'가 결국 시간이 지나 뼈가 굵어진 뒤에 아주 맹렬하게 진행된 것이다. 그게 학교폭력이다.

아이들을 보라. 이유 없이 악을 쓰고 물건을 던지고 뛰어내리곤 한다. 어른이 했으면 크게 다칠 일들이다. 아이들이니까 별 탈 없이 지나간다. 아이들 시기에 이런 식으로 서서히 몸의 힘을 빼야 하는데, 우린 지금 그걸 막아놨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나중에 그걸 한다. 그때는 자기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한다.

"놀이에 굶주린 아이들, '놀이 허기' 채우려 돈 뺏는 '일진' 된다"

프레시안 : 이번에 낸 책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일진들이 연결 고리로 삼는 것은 다름 아닌 '돈'이다. 일진들이 하는 주 업무가 아이들로부터 피라미드 다단계처럼 돈을 상납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왕따'의 최종 목표가 돈 수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왕따'라는 것은 사람 관계보다 경제 관계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37쪽)라고 지적했다. 학교폭력을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는 '일진'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이다.

▲ ⓒ프레시안(이명선)
편해문 : "'일진' 아이들이 하려는 '놀이'가 무엇일까"를 고민해봤다. 놀이의 시기를 놓친 지금 아이들 마음속에는 놀고 싶은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놀이에 대한 허기가 차갑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시기가 지나버렸으므로,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가 놀 수 없다. 사실상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놀이는 끝난 것이다. 예를 들면 비석치기 같은 것을 중고생들이 하고 놀 수는 없지 않나. 공기놀이 역시 못한다. 하지만 놀아야 한다. '논다'는 것은 생(生)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대신 들어선 놀이가 '소비', 즉 '돈을 내고 사는 놀이'이다. 일진 아이들이 돈을 거두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면서 하는 놀이이다. 노는 시기를 놓친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놀이 허기를 채운다.

"'놀이=소비'라는 아이들, '진짜 놀이' 잊어버렸다"

초등학교 5~6학년 아이에게 "쉬면서 너만의 시간을 보내봐라"라고 말해보라. 많은 경우,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에게 '논다'는 것은 '돈을 내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늘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묻는다. "그게 얼마예요?"라고.

어린 시절 '놀이'를 못하게 하면 할수록 아이들이 '돈 내고 사는 놀이' 같은 것으로 넘어오는 시기는 점점 더 앞당겨질 것이다. 요즘 부모들이 제일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무엇을 사줄 때'이다. 아이들 세계에선 돈으로 사주면 '놀이'는 끝난다. 그 뒤엔 '사는 놀이'만 남는다.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경험하는 건 '배반의 연속'"

프레시안 : 부모들은 아이들이 갖고 놀라고 장난감을 사주는데….

편해문 : 아이들이 장난감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배반의 연속'이다. 자동차를 사주면 '어?'하며 금방 반응을 보이지만, 곧 '내가 놀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난감을 통해 만나는 감정은 '놀이'에서 느끼고 싶은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다.

자동차 장난감을 보라.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 딱 네 가지다. 뜯어보면 복잡하지만 기능은 단순하다. 그래서 금세 싫증이 난다. 아이들 입장에선 장난감이 큰 행복을 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배반의 연속'이라는 게다.

아이들에겐 사람과 노는 것 만큼 좋은 게 없다. 엄마하고, 아빠하고 놀고 싶어 한다. 엄마는 소리 지르고 울고 때리고 껴안고 따뜻하고 말하고, 그 기능이 몇 가지인가. 그러나 우리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닌텐도를 쥐여주는 것으로 아이를 만난다.

"텔레비전 꺼도 아이들 머릿속에선 계속 켜져 있다"

▲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편해문 지음, 소나무 펴냄) ⓒ소나무
프레시안 : 책에서 "대한민국 아이들은 놀이와 헤어진 채 손바닥 게임기와 스마트폰을 한 대씩 들고 오갈 데 없이 '어린 난민'으로 떠돈다"(217쪽)라고 지적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요즘 아이 키우는 부모들에겐 스마트폰이 화두다.

편해문 : 스마트폰 쥐어주고, 늘 텔레비전 켜놓고 아이를 키우면, '그 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부모의 이야기를 아이가 들을 수 있는지, 자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지.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 그림책이 36쪽 정도이다. 펼치면 장면이 16개 정도 된다. 자기 전에 엄마가 그림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그걸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잠이 든다. 엄마의 목소리, 그림, 이야기 등 정보의 양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1초 동안에도 수많은 장면이 지나간다. 아이들은 열여섯 장면도 소화하기 힘들어하는데, 텔레비전을 소화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을 끊다고 해도, 아이들 머릿속에선 계속 켜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컴퓨터 게임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겐 눈 앞에서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잠을 제대로 못 잔다. 학교에 가도 몸이 학교에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텔레비전 속 물건 가질 수 없다며 괴로워하는 아이들"

더 큰 문제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완전한 소비자로 키우고 있다. '소비'가 '놀이'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본 수많은 물건들을 가질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진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에게서 '놀이'는 확 사라진다.

앞서 (프레시안)과 인터뷰했던 우치다 타츠루 선생도 "학교와 사회 사이에는 담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옳은 지적이다. 생애 초반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엄마, 아빠와 지내는 가정 역시 바깥에 있는 세상과 구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 구분이 없다면 우리가 왜 엄마이고, 아빠이겠는가. 세상과 가정 사이에서 구분이 되는 강을 만들어줘야 한다. 

물론, 이런 구분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아이들은 결국 바깥 세상을 만날 날이 온다. 또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 생애 초반 시기에는 구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이런 구분을 깬다. 텔레비전이 위험한 이유다.

아이들은 눈앞에 있는 것들을 자연의 속도 그대로 봐야 한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아이들이 자연의 속도를 넘어선 방식으로 보게끔 한다. 정보가 지나치게 집중돼 있고, 또 필요 이상으로 넘쳐난다. 이 역시 위험하다.

"온라인 게임, '중독' 피할 길이 없다…'셧다운제' 소용없어"

프레시안 : 요즘 아이들의 '놀이'를 이야기하려면, 온라인 게임을 빠뜨릴 수 없다. 사실상 온라인 게임이 몸으로 하는 놀이를 대체한 지 오래다. 그런데 온라인 게임을 둘러싼 논의는 좀 더 복잡하게 진행된다. 예컨대 보수언론은 온라인 게임을 학교폭력과 연결짓는다. 학교폭력이 온라인 게임의 선정성, 폭력성 때문에 생겼다는 게다. 이런 식의 단순 논리는 분명 잘못이다. 온라인 게임을 규제한다고, 학교폭력이 사라질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을 무작정 옹호하는 것도 위험해보인다.

편해문 : 한마디로 말하자면, 게임은 끝났다. 아이들의 '놀이'를 둘러싼 싸움에서 게임업자들이 완전히 승리했다는 말이다. 이쪽은 완전히 참패했다고 본다. 싸움의 전선도 형성되지 않은 채 졌다.

지금 게임 중독 상태인 아이들이 아주 많다. 셧다운제(16세 미만의 청소년에게 심야시간의 인터넷 게임을 차단하는 제도-편집자)나 인터넷 종량제 얘기가 나오지만, 게임 사업에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을 게다. 이제는 게임을 들고 다니면서 하는 세상이 됐다.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니 말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이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게임을 들고 다니면서 하는데 부모가 언제까지 아이들을 단속할 수 있겠는가.

게임 상품이 출시될 때도 중독을 전제로 한다. 뇌가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 한마디로 '머리 나쁜 아이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만든 게임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중독되지 않고서는 배겨낼 길이 없다. 셧다운제 등으로 규제한다 해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나쁜 '진짜 이유'…'싸움의 시기'에서 영영 졸업 시키지 않는다"

학교폭력과 게임을 연결시키는 쪽에서는 게임의 폭력성을 문제 삼는다. 단순 논리를 피하려면 좀 따져봐야 한다. 아이들은 실제로 폭력적이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싸움의 시기가 필요하다. 어릴 때 이 시기를 거치면서 몸에서 힘을 털어내야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싸움의 시기에서 졸업한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온라인 게임이 진짜 나쁜 이유는 이 대목이다. 온라인 게임은 아이들이 싸움의 시기에서 영영 졸업하지 않게끔 한다. 도무지 졸업을 시켜주지 않는다. 온라인 게임은 대부분 폭력을 써서 남을 죽이면 자신의 점수가 올라가는 구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높은 점수'에 상당한 가치를 둔다. 그러니까 게임이 주는 쾌감을 끊기 힘들다. 아이들 입장에선 남을 죽이는 나쁜 짓을 했는데, 사회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높은 점수'를 얻으니까 혼란스러다. 적당한 때 이런 혼란에서 '졸업'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아이는 영영 '싸움의 시기'에 갇혀 있게 된다. 게임 콘탠츠의 선정성, 폭력성이아니라 이게 진짜 문제다.

"놀이 허기 못 채운 아이들, 온라인 게임에 '빛의 속도'로 빠져든다"

프레시안 : 보수 언론이 온라인 게임의 폐해를 콘탠츠의 선정성, 폭력성에서 찾는 것과는 다른 지적이다. 아이들이 영원히 '싸움의 시기'에 머물게 하므로 온라인 게임이 나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대책이 뭘까. 아이들이 온라인 게임에 중독된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편해문 : '놀이'에 대한 허기가 진 상태에서 아이들이 온라인 게임을 만난 순간, 빛의 속도로 빠져 들어간다. 온라인 게임은 몸으로 하는 놀이는 아니지만,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쌓인 허기를 채우게 된다. 이런 아이들을 부모들이 PC방에서 끌고 나온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놀이에 대한 허기, 굶주림은 금방 채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도 방법이 없다.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세상이다. 정부 역시 온라인 게임을 문화산업으로 보고 지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가 막는다고 아이들이 게임을 끊을까. 그렇지 않다. 아이들이 게임 중독으로 가는 길이 뻥 뚫려 있다.

"'놀이밥' 꼬박꼬박 먹고 자란 아이들, 좀이 쑤셔서 게임 중독 안 된다"

▲ ⓒ프레시안(이명선)
그런데 이런 대한민국에서도 게임에 중독이 안 된 아이들이 있다. 어떤 아이들일까. 어린 시절, 대략 초등학교 4학년 정도까지 '놀이밥'을 꼬박꼬박 먹은 아이들이다. 드물지만 이런 아이들이 있다.

부모들이 '나도 어릴 때는 실컷 뛰어놀며 자랐는데'라는 생각으로 뛰어놀게끔 한 아이들이다.

물론 이런 아이들도 게임을 접하면 좋아한다. 그리고 열심히 한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해 왔던 놀이와는 다른,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니까.

하지만 '놀이밥'을 충분히 먹고 자란, 이런 아이들이 게임을 대하는 모습은 꽤 다르다. 이 아이들은 게임을 해도 두세 시간을 못 버틴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이들을 '산 목숨'으로 키울 건가, '죽은 목숨'으로 키울 건가"

프레시안 : 밖에서 노는 게 더 재미있어서?

편해문 : 몸이 근질근질해서, 좀이 쑤시기 때문이다. '짐승의 시기'를 보내는 아이들을 의자에 딱 붙여 놓고 있으니 못 견디는 것이다. 밖에서 몸짓을 하면서 놀았던 아이들인데, 게임을 하기 위해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니 곤욕인 것이다. 머리가 아닌 몸이 근질거리고 좀이 쑤셔서 못 앉아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야말로 '산 목숨'이라고 본다. 결국 밖에서 인라인스케이트라도 타고 와야 한다. 이렇게 밖에서 하는 놀이도 재미있고, 안에서 하는 놀이도 재미있다는 균형이 생겨야 한다. 이런 균형을 아이들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 중독 등 여러 문제를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아이들은 밤새도록 게임한다고 의자에 앉아 있어도 불편을 못 느낀다. 이런 아이들은 '죽은 목숨'이다. 그래서 부모들에게 묻고 싶다. 아이들을 '산 목숨'을 만들 것이냐, '죽은 목숨'을 만들 것이냐. 

"'놀이 수업' 끝난 아이 '선생님, 이제 놀아도 돼요?'"

프레시안 : 학교폭력 대책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문예체(문화·예술·체육) 교육을 권장한다. 교실을 벗어나 바깥 활동을 하라는 말인데, 이런 교육에 대해 어떻게 보나. 

편해문 : '놀이'에서 굉장히 중요한 국면이다. 아이들을 놀게 하겠다는 것인데, 그 시간(문예체 교육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놀았니?'라고 물으면 대부분 '안 놀았다'라고 답한다. 문예체 교육의 일환으로, 비석치기 등 전래놀이를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아이들에게 그건 '놀이'가 아닌 것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보면 놀이방, 놀이교육, 영어 놀이 등 '놀이'가 붙은 과정이 많이 있다. 그런데 거기서 하는 게 진짜 '놀이'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교사에게 '아이들이 뭐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면 '놀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종이접기한 것을 교사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이제 놀아도 돼요?"

결국 아이들 입장에서 이런 놀이들은 '가짜 놀이'라는 것이다. '가짜 놀이'와 '진짜 놀이'가 있는데,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배치돼 있는 '놀이'나 유치원에서의 '놀이'를 아이들이 '진짜 놀이'로 보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들에게 '정규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을 제발 놔둬라'라고 말하고 싶다.

"'놀이 본능'에 칼질하는 어른들…아이에게 '멍 때릴' 시간을 줘라"

'가짜 놀이'는 결국 한 명의 교사가 여러 학생들을 모아놓고 하는 수업일 뿐이다. 교사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지금 저 모습이 아이들이 진짜 노는 것인지. 아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가한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한가한 시간을 줘야 한다.

"애들아, 이제 놀이를 시작하자"라는 말은 필요 없다. 연극 놀이하자고 한들, 아이들이 눈치 못 채겠는가. 진짜 노는 것과 노는 시늉을 하는 것은 다르다. 아이들이 '진짜 놀이'를 언제 시작하는지 다시 눈여겨봐야 한다.

'놀이'는 어른들이 '하자', '저기 가서 해라'라고 말한다고 시작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심심해야 '놀이'를 한다. 아이들이 심심하게 놔둬야 한다. 한가하게 멍 때리는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멍 때릴까봐 시간을 촘촘하게 채우려고 한다. '놀이'를 다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놀이 본능에 칼질하는 것이다.

"함께 놀 아이가 없다?내 아이가 놀이터에 나오는 첫 번째 아이가 되게 하자"

프레시안 : 아이들이 심심해 할 시간, 일종의 여백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시간과 공간의 여백 말이다. 빈 시간, 빈 공간. 그런 게 참 없다. 그런데 설령 이런 여백을 만들어도 여전히 없는 게 있다. 함께 놀 아이들이 없다. 텅 빈 운동장에 아이를 내놓으면, 그 아이 혼자뿐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조리 학원에 있다.

편해문 : '아이를 놀게 해주려고 밖에 데리고 나왔더니 아이들이 한 명도 없다'라고 한다. 참 논리적인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한번 따져보자. 이런 말은 어른들이 자기 생각만 하는 경우다. 어른들이 그동안 아이를 놀지 못하게끔 여러 군데로 빼돌리는데 깊이 공모한 결과다. '아이를 여기저기(학원 등에) 보낼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의 근거로 '우리 아이가 밖에 나왔더니, 아이들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아이를 동네 놀이터에 나올 수 있는 첫 번째 아이로 만들어야 한다. 내 아이가 먼저 나오게끔 하지 않으면서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한국에는 용기 있는 부모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아이들을 밖에 나가서 놀게끔 하는 용기 말이다.

ⓒ프레시안(이명선)

"'즐거웠던 어린 시절' 기억 없이 어떻게 힘든 어른 시절을 견뎌내겠나"

프레시안 : '놀이밥 삼촌' 또는 '놀이 운동가'라는 호칭을 쓴다. 조금 낯선 표현인데, 계기가 있나.

편해문 : '평화운동가', '인권운동가' 등과 마찬가지다. 평화나 인권 등은 우리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가치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인 가치를 억누르는 구조가 있다. 이에 맞서서 평화, 인권을 지켜내려니까 '평화운동가', '인권운동가'가 되는 것이다.

놀이도 마찬가지다. 평화, 인권 등과 마찬가지로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밥과 다를 게 없다. 밥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면, 죽거나 병이 드는데 놀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밥심'으로 산다고 한다. 어릴 때 충분히 놀면서, 그렇게 기른 흥겨움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다.

청소년 시기를 보내는 게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면 더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된다. 그런데 어른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기마저도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도록 강요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시절에 행복한 기억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청소년 시기와 어른 시기에 앞선, 어린이 시기는 그나마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시기이다. 세상과 담이 쳐진 상태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때다. 아이들이 이때를 돌아보며 '노느라고 참 좋았어'라고 할 수 있어야 이후 두 시기를 지나갈 수 있다.

"놀이는 나의 힘"

논다는 것은 행복을 만나는 것이다. '즐겁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라는 느낌을 새기는 것이다. 청소년 시기, 어른 시기는 이런 느낌을 찾아가는 과정인데, 없는 느낌을 어떻게 찾아가겠나. 누구나 청소년, 어른 시기에 힘든 일을 겪는다. 즐겁다는 느낌을 아는 사람은 힘든 시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반면, 그걸 모르면 시련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유혹을 받는다.

요즘 왕따, 학교폭력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청소년 시기에만 겪는 게 아니다. 어른 사회에선 따돌림과 폭력이 없나. 그렇지 않다. 다만, 이런 문제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청소년들이 나타나니까 유독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다른 청소년들도 돌아봐야 한다. 그들에겐 문제가 없을까. 당장은 멀쩡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놀이에 대한 허기가 채워지지 않은 채 자란 아이들은 언젠가는 문제가 생긴다. 사람은 허기를 반드시 채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뒤늦게 허겁지겁 놀이 허기를 채우는 과정에서 결국 탈이 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힘들 때가 있었다. 돌아보니, 그 시기를 버티게끔 한 힘은 결국 어릴 때 즐겁게 놀았던 기억에서 나왔더라. 내가 '놀이운동가'로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다.

"놀이 통해 한번 죽는 게 끝 아니라는 걸 배운다"

놀이가 지닌 힘은 이밖에도 많다. 어릴 때 했던 놀이를 떠올려 보라. 대부분 금을 밟으면 죽는 식이다.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은 '죽었다, 살아났다'를 되풀이한다. 이런 경험이 소중하다. 한번 죽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익혀야 한다.

비석치기나 공기놀이를 처음 하면, 누구나 못 맞추고 못 꺾는다. 그러면 보통 누나나 형들이 '깍두기'를 시켜준다. 계속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워 준다. 놀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진짜 살벌한 경쟁에선 이런 일이 없다.

우리 편에서도 하고, 상대 편에서 해보면서 계속 꺾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된다. '자꾸 하다 보면 결국 되는구나'라는 경험은 도서관의 책 만 권을 읽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게 바로 긍정의 힘이다. 어른들이 '하다보면 된다. 용기를 가지고 해봐라'라고 흔히 말하지만, 그건 그냥 말일 뿐이다. 몸으로 경험하는 게 진짜다.

"마음껏 놀며 자란 아이는 함부로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놀면서 벽을 넘어간다. 많이 놀면, 이런 경험이 쌓인다. 그래서 마음껏 놀며 자란 아이는 함부로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정말 힘든 순간이 와도 결국에는 긍정적인 선택을 한다. 놀이를 하면서 벽, 싸움, 낭떠러지를 감당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힘을 키우지 못한 아이들을 그저 앞으로만 내몬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기운, '긍정'이라고 할 수 있는 힘, 한마디로 생기가 필요하다. 이런 것 없이 싸움터로 내몰린 아이들이 나쁜 감정과 만났을 때 뛰어내릴 곳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너무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막아야 한다. 아이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하라. 한가한 주문이 아니다. 절박한 외침이다."한 그릇 '놀이밥'"

1. 아이에게 한가한 시간을 줍니다.2. 아이와 함께 놀 수 있는 이웃 동무를 만듭니다.3. 아이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4. 학습이나 창의력 등을 놀이와 연관 짓지 않습니다.5. 하루에 두세 시간씩 '놀이밥'을 꼬박꼬박 먹입니다.

놀이를 살려 아이를 살리는 어린이놀이운동을 감히 제안하며 여러 해 고민한 다섯 가지 실천안을 내놓는다. 늘 아이들 가까이 두고 마음을 다잡았으면 한다. 아이들이 놀아야 자고 놀아야 먹는다. 그리고 아이들 문제는 어쨌든 놓아야 풀린다. 이게 순리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정성스레 따듯한 '놀이밥' 한 그릇을 퍼줄 때이다.

-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178쪽 - '학교폭력'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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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 기자,성현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