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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30일 목요일

5.18, 도청 끝까지 지켰던 시민군 이양현의 ‘임을 위한 진혼곡’

이글은 플러스코리아 2013-05-30일자 기사 '5.18, 도청 끝까지 지켰던 시민군 이양현의 ‘임을 위한 진혼곡’'를 퍼왔습니다.
"죽음 몰려와도 도청 버릴수 없었다, 먼저간 이들을 위해”

[광주민주항쟁은 수구언론과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라 불리는 자칭 보수세력들에 의해 왜곡 전파되어 광주민중항쟁에 오점을 남기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작전지휘권은 아직도 미국에 있다. 광주 5.18민중항쟁 당시에도 미군의 명령없이는 실질적인 작전을 할 수 없었다고 군인들은 증언한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의 책임을 묻고 미문화원을 점거한 이들 대부분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의 배신은 5.18 민중항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전시작전권은 미국에 있다. 미국은 5.18 민중항쟁과 관련하여 책임도 사과도 없이 전시작전권을 움켜쥐고 있다.  끝나지 않은 광주민중항쟁은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공동선언, 10.4공동선언을 실천, 이행하여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만이 광주민중항쟁의 진정한 의미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광주시민군출신 이양헌 선생의 광주민중항쟁 회고담을 인용하여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한다. 편집자주]

[플러스코리아-자주역사신보 공유기사]김회정 기자=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시민군들이 계엄군에 진압된 뒤 포승줄에 묶여 끌려나오고 있다(위쪽 사진). 5·18 시민군 출신 이양현 씨가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에서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씨는 아직도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며 5·18은 미완의 역사라고 말했다. <사진,글 동아일보DB·광주>

《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입으로 5·18민주화운동은 비극적 막을 내렸다. 신군부 5·17 비상계엄령 확대조치에 맞선 항쟁의 불꽃은 10일 만에 꺼졌지만 ‘민주·인권·평화’의 5·18 정신은 살아있는 역사가 됐다. 그러나 올해 들어 5·18 정신을 모독하고 왜곡하는 일부의 행태로 인해 5·18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가 새삼 뜨거운 조명을 받았다. 33년 전 오늘 전남도청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죽을 목숨인 줄 알면서도 도청을 지켰던 ‘시민군’ 참가자와 당시 광주 현장을 직접 취재했던 동아일보 기자들로부터 그날의 진실을 들어봤다. 》

‘비상! 비상! 계엄군이 오고 있다.’

1980년 5월 27일 오전 4시경. 전남도청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시민군 기동타격대 차량의 엔진소리가 적막한 광주의 새벽을 깨웠다. “광주시민 여러분.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기 위해 계엄군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도청으로 와주십시오.” 처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도심에 울려 퍼졌다. 외곽지역에서 간헐적으로 울리던 총성이 점점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도청에는 157명의 시민군이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승리의 가능성은 전혀 없고, 이제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자리를 지켰다. 카빈 소총을 든 두 청년이 전남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 창가에 기대섰다. 그리고 서로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저승에서 만납시다. 우리는 영원한 친구이자 동지입니다.”

○ 도청을 지킨 ‘마지막 시민군’ 

당시 항쟁지도부 기획위원이던 이양현(63)씨는 33년 전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하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당시 30세·이 노래는 윤 씨를 추모하는 노래극을 위해 만들어졌음)이였다. 

이 씨는 그날을 다시 떠올렸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을 때 시민군 한 명이 뒤편이 무너졌다며 황급히 뛰어왔다. 계엄군은 후문을 넘어 순식간에 도청 안으로 진입했다. 계엄군 정예 병력인 3특전여단이었다. “어이쿠.” 옆에 있던 윤상원이 옆구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급히 이불을 찾아 깔고 그를 뉘었다. 잠시 뒤 동공이 초점을 잃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 뒤에서 “꼼짝 마, 손들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다리에 힘이 쭉 빠져 주저앉았다. 공수부대원들이 결박하더니 셔츠 뒤쪽에다 매직펜으로 뭔가를 쓰는 것 같았다. 굴비를 엮듯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면서 앞 사람을 보니 ‘극렬분자. 실탄 10발 소지’라고 쓰여 있었다.

이 씨는 광주일고를 다니던 시절 ‘향토반’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 전남대 사학과를 다니던 1975년 학교를 그만두고 청계천 연합노조에 몸을 담았다. 2년 뒤 광주의 조그만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운명의 5월을 맞았다. 18일 강연을 위해 광주에 온 이창복 씨(74·16대 국회의원)를 따라 전남대 인근을 지나다 계엄군의 몽둥이에 무참히 쓰러지는 대학생들을 봤다. 피가 끓어올랐다. 사흘 뒤 금남로에서 시민들과 계엄군이 대치할 때 시위대의 맨 앞에 섰다. ‘계엄철폐’를 외치던 그의 머리 위로 총알이 지나갔다. 시민들은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당시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버스에 타고 있던 무고한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어린아이와 부녀자들까지 조준사격에 희생됐다. 시민들은 손에 총을 들고 금남로에 다시 모였다. 이 씨는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은 계엄군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한없이 두려운 죽음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 “우리의 죽음을 증언해 달라”

26일 계엄군이 최후통첩을 하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무기를 반납하고 사태를 수습할 것이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울 것이냐 논쟁이 벌어졌다. 항쟁 지도부는 이대로는 항복할 수 없다고 했다. 

외곽에 머물던 계엄군이 광주를 죄어오자 그는 26일 밤 시민군들에게 밥을 해주던 아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내는 한사코 같이 있겠다고 했지만 ‘세 살짜리 아들을 누가 키울 거냐’며 화를 내자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항쟁 지도부는 시민군에 자원해 도청 안에 남아 있던 중고교생들을 불러 ‘나중에 우리의 죽음을 증언해 달라’며 도청에서 내보냈다.

‘5월 광주’의 불꽃이 꺼지고 상무대 영창에 끌려가 조사를 받던 이 씨는 내란죄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년 남짓 감옥생활을 하다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지만 세상에 나서기가 부끄러웠다. 저승에서 만나자던 윤상원에게 더욱 그랬다. 이 씨는 윤상원과 노동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치러지던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5·18묘지를 찾았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그곳에서 그는 목 놓아 울었다. 

서울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27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부활제’를 하루 앞두고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그는 아시아문화전당으로 새롭게 꾸며지는 도청 건물을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광주를 품고 있는 무등산은 알고 있을 겁니다. 누가 집단발포 명령을 내렸는지,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5·18은 여전히 미완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마침표를 찍을 수 없어요.”


김회정 기자 

2013년 2월 18일 월요일

국가에 학살당한 그들, 그래도 '애국가'를 불렀다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3-02-17일자 기사 '국가에 학살당한 그들, 그래도 '애국가'를 불렀다'를 퍼왔습니다.
[광주천 따라 걷기⑩] 시민군 사격훈련장이었던 광주공원

 
▲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정자가 석서정. 가운데 있는 다리가 광주교다. 광주교를 건너면 금남로와는 불과 300미터. 광주공원에서 사격훈련을 마친 시민군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 다리를 넘었을까. ⓒ 이주빈

광주천을 가로지르는 광주교를 건너 광주공원으로 향한다. 갈마드는 상념에 걸음은 더욱 느려진다. 바람이 차서가 아니다. 다리를 오갔을 사람과 사람, 사연과 사연의 엇갈림이 시려서다.

광주공원은 1913년 일제에 의해 '지정'된 광주 최초의 도시공원이다. '도시공원'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엽 '근대(modern)'와 함께 등장했다. 광주공원이 조성될 무렵에 만들어진 아시아의 도시공원은 상하이 황푸공원(1886년), 인천 만국공원(1888년, 지금의 자유공원), 서울 탑골공원(1897년), 도쿄 히비야공원(1903년) 등이 있다. 

중국과 조선 등 아시아에서 근대식 도시공원은 서구 열강의 진출과 때를 같이 한다. 황푸공원과 만국공원, 탑골공원의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공공 공원(public park)이라는 형식을 띠었지만 철저히 서구 열강의 힘을 과시하는 서양 근대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주공원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통치하는 '식민지 근대'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광주공원이 조성된 자리는 성거산 일대. 지금이야 사통팔달 길이 열려있어 광주를 드나드는 길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엔 목포나 영산포 등지에서 광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성거산을 거쳐야 했다. 성거산에 도착했다고 해도 광주 시내로 바로 들어오기란 쉽지 않았다. 광주천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일제는 성거산에서 광주 시내로 쉽게 들어갈 요량으로 목교를 가설한다. 그 나무다리가 지금 광주교의 시작이다. 그리고 '조선 정기 말살'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성거산 머리 부분엔 '성거사'라고 하는 오래된 절터가 있었다. 일제는 이 절터에 1908년 한말 의병전쟁 때 죽은 일제 군경과 일제에 부역한 조선인들의 명복을 빈다며 '전남 충혼탑'을 세웠다. 광주 초입에 들어오는 이들은 쉽게 이 탑을 올려볼 수 있는 위치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곤조(根性)'다.

1913년 성거산 일대를 광주공원으로 지정한 일제는 1914년엔 신사(神社)도 지었다. 광주신사는 목포 송도신사, 장성신사와 함께 전남지역 3대 신사로 불렸는데 그 현판을 조선주둔군 초대사령관이자 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썼다. 광주신사는 해방되던 날 광주서중 학생들에 의해 허물어졌다. 신사가 무너진 자리에 다시 충혼탑이 세워졌다. 한국전쟁 중에 사망한 군인과 경찰의 혼을 기리는 탑이다. 

신사가 무너진 자리에 다시 충혼탑이 세워졌다

▲ 광주신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충혼탑. ⓒ 이주빈

▲ 광주공원은 1980년 오월항쟁 당시 시민군들이 사격훈련을 하던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저 계단을 타고 올라가 신사 참배를 했다. ⓒ 이주빈

일제와 한국 정부에 의해 차례로 '충혼탑'이 세워진 광주공원. 충(忠)은 가운데 중(中)자와 마음 심(心)으로 이뤄진 글자다. 사전풀이로는 '임금이나 국가 따위에 충직함'을 이르는 말이다.

언제나 충직함을 강요하는 국가는 항상 정당한가. 늘 충직함만을 강요하는 국가가 배꽃처럼 지순한 국민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광주공원에 서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일어난다.

광주공원은 1980년 오월항쟁 당시 잔인한 국가폭력에 맞서 시민군들이 사격 훈련을 했던 곳이다. 광주교를 건너면 금남로와는 불과 300미터. 파출소에서 가져온 M-1 카빈 소총으로 시민군들은 광주공원에서 사격훈련을 했고, 300미터를 걸어 M-16으로 무장한 정예 공수부대와 싸우러 금남로로 향했다. 

차라리 목총에 가까웠던 카빈 소총을 들고 광주교를 건너던 시민군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뒤로 한 채 건너던 광주교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선(死線) 끝에 선 그들에게 국가는 여전히 충직하게 믿고 따라야 하는 마음의 중심이었을까. 오월항쟁 당시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이 가장 많이 불렀고, 가장 애타게 불렀던 노래는 대한민국 국가 (애국가)였다.

국가는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국가는 오히려 그들을 학살했다. 그들을 지켜준 것은 가난하고 못 배운 그들의 친구. 광주공원 광장엔 지금도 밤마다 포장마차가 들어선다. 광주공원 광장 주변으론 지금도 국밥집이 줄지어 있다. 가장 값싼 음식과 술들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과 동무하며 시대를 나고 있다.

광주공원 광장 주변으론 지금도 국밥집이 줄지어 있다

▲ 광주공원 광장엔 저녁마다 포장마차가 들어선다. ⓒ 이주빈

1980년대와 1990년대. 금남로 전남도청 앞 광장이 경찰에 의해 봉쇄되면 농민, 노동자, 학생이 중심인 시위대는 광주공원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가 끝나면 사람들은 대여섯 명씩 어울려 국밥집이나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윽하게 취기가 오르면 국밥집에서 탁자를 치며, 포장마차에서 나무젓가락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목포의 눈물)이 그치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나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 광주공원 광장에서 왼쪽 산책로를 타고 넘어가면 광주향교가 있다. 길 건너 서현교회와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 이주빈

덧붙이는 글 | 광주천 따라 걷기 4-1 코스는 '광주교-광주광장-광주향교-충혼탑-석서정-광주대교' 입니다.

이주빈(clubn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