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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6일 화요일

거짓 목자들, 부자는 구원받기 어려운가?

이글은 대자보 2013-04-13일자 기사 '거짓 목자들, 부자는 구원받기 어려운가?'를 퍼왔습니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성서를 헌금 강요 수단 이용하는 거짓 목자 조심해야

오늘은 제가 기독교에 입문했던 초기에, 제 마음에 큰 부담을 주었던 성서 본문을 하나 선택하여 교우님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겠다고 서약한 때는 35년 전이었습니다.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저는 기독학생회 겨울수련회에서 예수님을 만나 매일매일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과의 데이트’를 즐겼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 감당키 어려운 말씀을 만났습니다.

1.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복음서에는 가끔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모진(?) 말씀으로 좌절감을 안겨주는 글이 등장합니다. 아래 본문도 영생의 길을 묻는 젊은이에게 주님께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셔서 근심하며 돌아가게 하는 이야기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내용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으므로, 시간을 내실 수 있는 교우님들은 마태복음 19:16-30, 마가복음 10:17-31, 누가복음 18:18-30을 모두 읽어보시면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가복음 10:17-31, 공동번역).

그리 길지 않은 이 본문에는, 지금까지 교회 역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교리와 신학의 여러 주제들이 담겨있습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 원죄, 구원의 길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는 복잡한 본문이지만, 여기서는 재산 문제에 집중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재산이 꽤 많은 한 젊은이(마태복음에는 ‘청년’,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리’라고 되어 있음)가 예수님을 찾아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쭙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평이했습니다. “십계명 후반부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젊은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모두 지켜왔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젊은이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며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젊은이는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 말씀은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중심내용의 실천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초창기 예수운동이 얼마나 공정한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는지, 또한 그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강렬하고 과격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에 이런 기록들이 나타나기에, 복음의 원형은 종교적이기보다는 과격한 사회적 성격의 운동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부자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과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로부터 2천년 후에 발생한 공산주의 운동을 연상케 하며, 예수는 급진적인 빨갱이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세심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무조건 싫어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젊은이를 예수님께서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살부살조’와 ‘살예살서’

불교에서는 수행자에게 ‘살부살조’ 정신을 가르칩니다. 부처님이라도 수행을 방해하면 죽이고 조사(또는 선사, 앞서 깨달은 선생)가 방해하면 그도 죽이라는 뜻으로,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이전의 그 어떤 전제에도 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불교의 살부살조 정신을 본받아 우리 기독교도 ‘살예살서’(예수님이 방해하면 예수님을 죽이고, 성서가 방해하면 그것을 넘어서는) 정신을 꼭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이 ‘실제의 예수님’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이 전달 과정을 거쳐 기록될 때는 필연적으로 전달자와 기록자의 시각과 해석이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도 ‘실제의 예수님’이 아니라 ‘기록자에 의해 해석된 예수님’입니다. 하여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기록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하며, 때로는 기록자의 한계와 해석을 넘어서야 될 때도 있습니다.

본문의 기록 안에 담긴 ‘실제의 예수님’은 어쩌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네가 율법을 모두 지켰다면, 그 안에 담긴 실제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지 않겠느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뜻을 너의 삶 전체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굶고 있는 네 이웃을 위해 네가 가진 재산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겠느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예수님은 여기까지입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 정말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야만 나를 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확실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저 역시 본문의 젊은이처럼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록된 예수님’ 안에서 더욱 따뜻하고 넉넉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근심하며 떠나가는 젊은이에게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고 “그 정도도 훌륭하다. 부족한 부분은 나를 따르며 더 배워라. 네가 가진 재산보다 더 크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너에게 알려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제가 만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피하여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고뇌하며 기도하신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소심하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런 저의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고 지금도 항상 저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의 해석에 교우님께서 반드시 동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교우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게 문자에 매이지 않고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을 읽으려 노력하면 우리는 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열린 신앙과 진지한 탐구를 계속 하신다면, 제가 본문에서 찾아내지 못한 더 깊고 중요한 뜻을 교우님께서 읽어내실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본문에서 계속 이어지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자신과 가족은 사랑할 줄 알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계명을 모두 지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행복을 추구하여라. 그래야 진정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3. 본문을 헌금 강요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거짓 목자들을 조심하십시오.

본문에서,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이 교회의 재산 증식과 증축을 위한 수단으로 자주 인용하여 우리 교우님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의 결론에 해당되는 다음 구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이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에게 갈등을 주는 이유는 “신앙이 가정보다 우선한다.”는 전제를 지지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복음서에 기록된 이런 말씀들에 근거하여 우리 기독교는 “교회는 가정 뿐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등 그 어떤 조직체보다 우선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마가복음이 기록된 서기 70년 당시의 정황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로마제국에 체계적으로 저항했던 유다민족의 독립운동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 복음서 기자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표현한 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돌(기초석) 위에 돌(건축물) 하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유대 독립군이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마사다 요새까지 점령되어 유다공동체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한 극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공동체가 붕괴되면 그 공동체 내에서 시작된 예수운동 역시 공동체와 함께 궤멸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어떻게든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지하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가정보다 예수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개인의 안락과 가정의 행복을 유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애국지사들의 선택에 비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의 선택이 극한상황에서는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지만, 평화의 시기에도 변함없이 강조되면 가정과 사회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개인의 꿈과 공동체의 이상이 함께 존중받아야 평화롭고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이 이런 특수한 상황의 산물임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문자 그대로 읽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무모하고 맹목적이 되어 우리의 소중한 가정과 사회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고 가슴 아픈 일은, 본문을 인용하는 설교자 중에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는 말씀에서 “가진 것을 다 팔아”라는 앞부분만 인용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뒷부분을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헌금하라.”는 논리로 바꾸어, 교회를 새로 건축하거나 부흥회를 열 때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우님들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살예살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록자의 의도와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문자 그대로 믿는 신앙이 이렇게 무모하고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문자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문자우상숭배와 ‘기록된 예수’를 넘어서지 않으면 참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 본문을 이용하여 무리한 헌금을 요구하거나 교우님들께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을 요구하는 설교자는 거짓 목자입니다. 그런 자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기꾼일 뿐이니 잘 분별하여 교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가정에 무리가 될 정도로 경제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교회도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교회입니다.

무엇보다 본문 말씀은 개인의 욕심에만 갇혀있지 말고, 다 함께 누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말씀이지 개인의 행복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 조직에 휘둘려 신음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님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교회, 교우님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교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도록 채찍을 들어주십시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퇴출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4. 개인의 기부도 아름답지만, 공정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된 구절이라 하더라도 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성서에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된 구절 중에서 실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리 많지 않고, 전달자나 기록자, 또는 후대의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뛰어난 혜안을 갖고 우리에게 천금 같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예수님 역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당신께서 사셨던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개인의 편견이나 유한성에 갇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께서 편협하고 극단적인 생각의 결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넘어서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후에 본문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개인의 한계와 연약성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걱정하는 제자들의 장탄식에 예수님은 이렇게 시원하게 답변해주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부자가 재산을 내놓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뜻과 힘을 합하면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종교 강요가 없는 세상과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는 한 젊은이의 말이 생각납니다. “혼자 꾸는 꿈은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께 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류상태

2013년 4월 1일 월요일

부활신앙은 ‘몸의 부활’ 믿는 것이었나?


이글은 대자보 2013-03-30일자 기사 '부활신앙은 ‘몸의 부활’ 믿는 것이었나?'를 퍼왔습니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부활한 것은 예수님 몸 아닌 그분의 삶과 정신

오늘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부활신앙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져야 하는지 교우님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1. 몸의 부활을 믿어야 할 것인가?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불과 20~30년 전까지도 기독교인은 화장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셨듯이 우리들도 언젠가 무덤을 열고 부활할 때가 올 텐데 재료가 남아있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매장보다 화장을 선호하는 교우님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관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재료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화장을 해도 우리 몸을 다시 살아나게 하실 수 있으며, 그때 살아나는 것은 썩어질 육신이 아니라 신령한 몸”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몸의 부활에 대한 이런 믿음은 성서의 기록에 의해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네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예수께서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거의 20년이나 앞서 기록을 남긴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예수님 뿐 아니라 신자들의 몸의 부활을 지지하는 글이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부활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몸의 부활에 대해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인데, 썩어질 몸(physical body)으로 심고 신령한 몸(spiritual body)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하여 성서의 기록이 문자적으로 옳다면 ‘몸의 부활’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변화된 몸이기는 하지만 이전과 똑같은 인격체로 다시 살아나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 바울이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질서를 거스르고 역행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한번 죽은 사람이 동일한 인격체로 다시 살아난다는 건 자연 상태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몸의 부활을 믿으려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을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기적이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의 개입에 의해 발생한다면 기적을 일으키는 주체는 그 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서에는 예수 부활 뿐 아니라 수많은 기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런 놀라운 기적 사건을 기록한 동시대의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성서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 기적을 은유나 설화가 아닌 실제 사건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서의 기록과 교리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아,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이집트 탈출) 설화에는 수많은 기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멈추게 하셨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무사히 건너게 하셨는가 하면, 갈라졌던 물이 다시 합쳐지게 하여 뒤따라온 이집트 병사들을 몰살시키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는 파라오의 강퍅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아무 잘못도 없는 이집트 백성들의 맏아들 뿐 아니라 짐승들의 처음 난 새끼들까지 모두 죽였다는 기록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분이 자신이 만든 자연법칙을 스스로 깨뜨려가면서 그토록 무서운 형벌을 이집트의 죄 없는 일반 백성들에까지 내리신 것일까요?

기적 행위의 주체자인 하나님의 무자비한 형벌과 선택받지 못한 백성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이방민족의 고통과 파멸, 그 잔혹한 기록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기독교인들이 겪어야 했던 곤혹스러움과 두려움, 마음의 갈등, 제기되는 의문들을 기독교 전통 신학은 ‘인류의 조상이 지은 원죄 때문’이라는 설정으로 모두 묻어버렸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네 권의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기적적인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기적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오랜 전승 과정을 거쳐 기록된 설화이며, 부활에 대한 기록 역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예수께서 죽으신 후 40년 이상 지나서 기록된 ‘전승설화’입니다.

이제 그 기록들을 대하는 우리는,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그것을 사실이 아닌 설화로 받아들일 것인지, 우리의 이성이 제기하는 의문을 계속 억누르며, 세상과 자연의 법칙과는 따로 움직이는 성서의 문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라 살 것인지 정직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만드신 자연법칙을 스스로 거스르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열린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적 이야기에 대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은유나 설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예수님의 부활 전승에 대해서만은 설화라고 말하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몸이 부활하셨다는 성서의 중심사상을 부정하면 기독교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기독교라는 조직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조직의 근간을 거스를 수 없는 한계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기적설화들은 실제 사건일 수 없지만 예수님의 몸의 부활만은 예외라고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2. ‘지금 이 자리에서’ 보지 말고 ‘그때 그 자리에서’ 보기

예수님이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고,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끝없이 호강을 누리며 살 것이라고 믿었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교우님들과 함께 가상의 타임머쉰을 타고 이천 년 전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이 최소한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겪어왔고 그때 당시에도 조금만 깊이 관찰하고 생각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은 수많은 별들, 그 가운데로 유유히 항해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달, 새벽이 되면 찬란한 빛을 내뿜고 떠오르는 태양, 그것은 너무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존재’를 뚜렷이 보여주는 증표였습니다. 누구나 눈만 뜨면 확인할 수 있는 그 사실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땅 위 저 높은 곳에 아름다운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을 최상위 존재인 하나님을 수호하는 천사로, 또는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신적 존재나 천사로 이해한 것도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와 아울러,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구마을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화산 폭발과 용암의 분출, 지진의 발생 등을 목격한 사람들은 솟구치는 그 불덩어리와 갈라지는 땅을 보며, 땅 속 깊은 곳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며, 거기에는 꺼지지 않는 불로 사람들을 심판하는 신적 존재가 살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천체의 운행, 땅 속 용암의 존재, 지각의 움직임 등을 알 수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세계를 관찰하고 사유한 결과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너무나 정직하고 당연한 결론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우주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천상의 세계를 동경하고, 땅 속 세계를 두려워한 것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념은 이렇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지구마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문제는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이런 원시(무지하다는 뜻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앞선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과학에 의해 투명하게 밝혀진 지금 시대에도 일부 사람들에게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학보다 교리가 옳다는 교회의 오랜 가르침으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어느 시점에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난다거나, 다시 오신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불러 모으고 예수님 좌우에 두 편으로 나누어 한 쪽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하고, 다른 쪽은 지옥에 처해져서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벌을 받게 한다는 신약성서의 기록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우주관을 토대로 우리에게 주신 은유적 교훈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린 아이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금쪽같은 말씀이지만,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셨고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그대로 사실로 믿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면 그 신념은 여러 가지 해로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성서가 묘사하는 신자들의 몸의 부활, 그들에게 약속된 공간적 천국, 그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에게 형벌로 주어지는 지옥의 존재, 그것은 이삼천 년 전 사람들의 원시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믿으면 우리의 이성과 판단력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교우님들이 그 교리적 신념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그 신념이 현대과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과 정면으로 충돌할 뿐 아니라, 우리 교우님들의 삶도 왜곡시키고, 이웃들과의 소통도 불가능하게 하여 여러 가지 갈등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3. 부활한 것은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 그분의 삶과 정신입니다.

지난 편지들에서, 저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여전히 제 신앙의 중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교리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 십자가와 부활의 전승 안에 담긴 소중한 의미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부활신앙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그토록 품고자 하셨던 소외된 민중과 제자들의 가슴 속에 다시 살아난 그 분의 삶과 정신이지 몸의 부활이 아닙니다. 아래 내용은 저의 책 (2007년 7월 7일, 도서출판 삼인 출간)에 실린 내용으로, 교우님들과 다시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나는내 주님의 대속을 믿는다.진실로,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내 죄가 사해졌음을 믿는다.

그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셨기에그 피로내가 구원을 받았다.

나는 또한본 훼퍼 목사님의 대속을 믿는다.

그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기에그 피로오늘의 내가 구원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대속을 믿는다.

많은 의로운 피는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수많은 생명으로 피어남을 믿는다.

나는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내 주님 예수께서무덤의 권세를 깨뜨리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숨 쉬고 계심을 믿는다. 

예수는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계시며 지금도 나에게끊임없이 생명의 말씀을 부어주고 계신다.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그는 진실로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내 마음 가운데살아 숨 쉬고 계신다.   부처, 노자, 공자,짜라투스트라, 톨스토이, 슈바이쳐, 간디, 원효, 유영모, 김교신, 문익환...인류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수많은 성현들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내 마음 가운데 살아 숨쉬고 계시듯이...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의미를 되찾은 민중과 제자들 가운데는 주님의 부활을 저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고 고백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저는 추측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살아계신다.”고 전한 것은 이렇게 자신의 가슴과 삶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20여년이 지난 후 바울의 서신에, 그리고 40년이 지나서는 복음서에 ‘몸의 부활’로 기록되었습니다.  

4. 예수님은 여전히 저에게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어쩌면 그 동안 저를 이해하고 지지해주신 교우님들 중에 크게 실망하신 분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기독교인으로 남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사실 저에게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예수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지금도 저는 누군가 “당신 기독교인이냐?”라고 물으면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라는 전제 아래 묻는 것이라면 저의 대답은 “그렇습니다.”이지만, “기독교인은 반드시 정통 교리에 동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묻는 분들에게는 “아니오.”라고 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내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제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저에게 아내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저와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며, 밥상을 마주하고, 잠자리까지 함께 하는 ‘저의 특별한 사람’은 제 아내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아내는 저에게 이렇게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을 신랑으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하는 글이 종종 등장합니다. 신약성서에도 교회와 신자를 신랑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로 비유하는 글이 발견됩니다. 교리를 통해 이 비유를 읽으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와 신자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권위자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비유를 교리가 아니라 관계성으로 읽습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저와 함께 동행하시며, 저와 함께 먹고 마시는 제 인생의 동반자이십니다. 성서가 제시하는 비유의 틀에 의하면, 저는 제 인생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저의 신랑이며 저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저는 어느 면에서는 예수님보다 부처님을 더 존경합니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새겨듣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매우 답답한 기독교인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부처님은 저의 스승이시며 저에게는 그런 스승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이라 하더라도 스승이 신랑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저에게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제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오셔서 제 손을 잡아주셨으며 저의 눈물을 닦아주셨고, 저는 그분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분과 결혼하였습니다. 지금 그분은 제 안에, 저는 그분 안에 있어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과 맺은 ‘관계’에 의해서입니다. 어쩌면 예수님보다 도덕적으로 더 훌륭한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이 저의 구세주이며 저의 영원한 신랑이십니다.

제가 아직도 기독교 공동체에 남아 있는 이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리스도인으로 남으려는 이유는, 이렇게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도록 안내해 준 기독교가 이웃종교에 비해 ‘객관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저의 아버지보다 훌륭한 분들이 세상에 많다 하더라도, ‘그리운 내 아버지’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5. 예수정신과 예수운동 이어가기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새롭게 살 소망을 주신 그분의 정신과 운동도 중단된 채, 예수사건은 하나의 역사적 이벤트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현실세계에서 이루고자 그토록 애썼던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도 한낱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그분이 기득권 세력에 체포되어 가혹하게 처형된 이후에도 예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신과 삶에 여전히 현존해 계신 ‘살아 계신 주님’을 증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미래의 저 천국’을 그리는 소박한 신앙은 그나마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가게 하는 위로와 소망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예수님 잘 믿어서, 죽은 후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다시는 병들거나 늙지도 않고 죽음도 고통도 없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박한 믿음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리적 부활론은 그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온갖 특혜(?)로 마음의 위로를 주지만, 결과적으로 기독교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을 선포함으로써 이웃종교와 문화를 부정하고 기독교 교리에 순복하기를 내용으로 강요한다는 점에서 매우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반사회적인 교리입니다.

또한 교리적 부활론은 우리 삶을 왜곡하고 예수정신을 거스르며 비현실적인 도피신앙으로 유도하기에, 한국 교회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숙제 중 하나입니다. 하여 이제는 우리 교우님들도 몸의 부활을 믿는 교리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을 이어가는 진정한 예수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가슴과 삶 속에 살아계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전 세계 그리스도교 자매 형제님들과 함께 기뻐하며 찬미합니다. 주일편지를 나누는 교우님들에게도, 우리 주님의 부활의 은총과 인도하심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여,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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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9일 토요일

찬송가 부르고, 선서 요구...어느 중학교의 이상한 입학식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3-03-08일자 기사 '찬송가 부르고, 선서 요구...어느 중학교의 이상한 입학식'을 퍼왔습니다.
예배 형식 입학식 논란...D중학교 "학생들 동의 받아 문제 없다"

최근 서울의 한 중학교가 입학식 때 개신교 종교의식을 강요하고, '기독교 교육방침에 순응하라'는 내용이 담긴 선서를 요구해 논란이 되고 있다. 

D중학교는 지난 4일 입학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찬송가 502장 '빛의사자들'을 부르게 하고 성경책 구절을 읽게 하는 것은 물론 목사가 직접 기도를 하기도 했다. 

이날 입학 설교를 맡은 김아무개 목사는 "여러분이 D중학교에 선택받았듯이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께 선택받았다,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브라함의 예언에 따라, 아랍 여러 나라들을 압도하며 매일 대적하고 있다"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은 이 같이 축복된 것이다"라는 등의 내용으로 10여분 간 설교를 했다. 

해당 학교는 학생들의 선택이 아닌 주거지를 바탕으로 자동 배정되는 곳이다. 따라서 D중학교에는 개신교신자가 아닌 타종교나 무교인 학생들도 배정된다. 특히 이 학교를 졸업했다는 누리꾼은 댓글을 통해 "강제로 헌금을 걷고, 종교 행사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체벌하는 경우도 있다"고 적기도 했다.

공포 1년을 맞은 학생인권조례 16조에는 학생에게도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필자는 '학교가 학생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이유로 2004년 다니던 고등학교측에 소송을 걸어 2010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D중학교 교감 "학생들의 동의 받는다"

이런 지적에 대해 이아무개 D중학교 교감은 지난 6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종교수업을 하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받아 참여 여부를 묻고 있지만 실제 이를 거부하는 학생들이 없었다"며 "학생들의 동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종교수업을 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인근의 지역주민들이 (우리)학교가 미션스쿨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미 이런 교육방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다"며 "만약에 설문조사 결과 종교수업을 거부하거나 받고 싶지 않겠다는 학생이 있을 경우 대체과목을 편성해 종교가 강요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입학식 전에 학생 또는 학부모에게 이러한 종교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동의를 받았는가'라고 묻자 "입학식이나 졸업식 같은 1회성 행사는 따로 동의를 받지 않고 할 수 있어 입학식 자체에서는 동의를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학생인권조례 위반'이라는 지적에 대해 이 교감은 "만약 위반사항이 있다면 검토를 해서 보다 확실하게 동의를 받거나 하는 방식으로 규정을 개선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교감은 "사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학교 등 대부분의 종교기관 설립 학교들이 가끔 이런 갈등이 벌어지는데 마치 D중만 문제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학교의 종교수업은 누군가에게 헌금을 강제로 걷거나 하지 않고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토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만난 재학생들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D중의 한 재학생은 "(학교에서) 아침 예배도 드리고, 성경 공부도 하고, 찬송가도 부른다"며 "일주일에 1~2번씩 예배를 드리고, 전교생이 모여 성경공부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회원인 '테르OOOO'은 "제가 다닐 때는 성경책을 안 들고 왔다고 책상 위에 무릎 꿇고 올라가 당구 큐대로 허벅지를 맞았다"고 밝혔다. 이어 "5월에는 심령수양회라는 것을 하는데 같은 재단인 Y교회로 3일간 등교해 강제로 예배를 보고, 강제로 설교를 듣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헌금도 종종 걷는데 헌금봉투에는 학년 반 번호 이름을 쓰게 했고, 금액도 작성하게 했다"며 "한 번은 예배가 너무 보기 싫어서 매점에 있었는데 학생주임한테 '너는 지옥간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맞아봤다"고 적었다.

반면 종교수업 강요가 사실이 아님을 주장하는 누리꾼들도 다수 있었다. D중학교의 입학식 관련 기사에 댓글을 단 누리꾼 joyl****는 "올해 2월 7일에 D중학교 졸업한 졸업생이다, 헌금 걷을 때 강요하지 않는다"며 "(헌금은)학교에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추수감사절 때 과일도 모두 다 양로원에 기부한다, 원하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이어 "종교가 기독교 아니라서 혼나고 그런 것 말도 안된다"고 덧붙였다. 

"학급비 걷어서 기독교 단체에 헌금을 하기도 했다"

한편, 다른 종교재단의 학교에서도 이같은 종교 의식 강요 행위가 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지난 5일 보도된 '중학교 입학식서 "일생 예수님을 따라서…" 강연 논란'이란 기사에는 몇몇 학교의 종교수업 강요에 대한 댓글이 올라왔다. 

닉네임 '흐OO'은 "자신은 기독교를 믿는데 불교학교인 부산 K중학교를 나왔다"며 "반야심경을 외우게 하고 교양으로 불교를 강제로 듣게 했다"고 썼다.  

닉네임 '마OOOO'은 "전주 S중, 고등학교의 경우 아침 0교시마다 성경책을 펼쳐놓고 읽어야 하며 강제 기도를 시키고, 수요일마다 1~2교시를 예배시간으로 정해놓고 강제로 강당에 감금한 다음 기도를 시켰다"며 "예배에 참석하기 싫어서 튀었다가 두 시간 동안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서울 M고의 종교강요를 서울시교육청에 고발해 참여연대로부터 '의인상'을 받았던 홍서정(18)씨도 "입학식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라며 예배를 하고, 매주 예배를 하고 종교수업도 별도로 했었다"며 "심지어 학급을 위해 쓰겠다며 학급비를 걷어서 그것을 기독교 단체에 헌금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헌금이라는 사실을 듣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강의석(kange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