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대자보 2013-04-13일자 기사 '거짓 목자들, 부자는 구원받기 어려운가?'를 퍼왔습니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성서를 헌금 강요 수단 이용하는 거짓 목자 조심해야
오늘은 제가 기독교에 입문했던 초기에, 제 마음에 큰 부담을 주었던 성서 본문을 하나 선택하여 교우님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겠다고 서약한 때는 35년 전이었습니다.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저는 기독학생회 겨울수련회에서 예수님을 만나 매일매일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과의 데이트’를 즐겼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 감당키 어려운 말씀을 만났습니다.
1.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복음서에는 가끔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모진(?) 말씀으로 좌절감을 안겨주는 글이 등장합니다. 아래 본문도 영생의 길을 묻는 젊은이에게 주님께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셔서 근심하며 돌아가게 하는 이야기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내용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으므로, 시간을 내실 수 있는 교우님들은 마태복음 19:16-30, 마가복음 10:17-31, 누가복음 18:18-30을 모두 읽어보시면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가복음 10:17-31, 공동번역).
그리 길지 않은 이 본문에는, 지금까지 교회 역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교리와 신학의 여러 주제들이 담겨있습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 원죄, 구원의 길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는 복잡한 본문이지만, 여기서는 재산 문제에 집중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재산이 꽤 많은 한 젊은이(마태복음에는 ‘청년’,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리’라고 되어 있음)가 예수님을 찾아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쭙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평이했습니다. “십계명 후반부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젊은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모두 지켜왔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젊은이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며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젊은이는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 말씀은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중심내용의 실천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초창기 예수운동이 얼마나 공정한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는지, 또한 그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강렬하고 과격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에 이런 기록들이 나타나기에, 복음의 원형은 종교적이기보다는 과격한 사회적 성격의 운동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부자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과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로부터 2천년 후에 발생한 공산주의 운동을 연상케 하며, 예수는 급진적인 빨갱이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세심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무조건 싫어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젊은이를 예수님께서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살부살조’와 ‘살예살서’
불교에서는 수행자에게 ‘살부살조’ 정신을 가르칩니다. 부처님이라도 수행을 방해하면 죽이고 조사(또는 선사, 앞서 깨달은 선생)가 방해하면 그도 죽이라는 뜻으로,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이전의 그 어떤 전제에도 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불교의 살부살조 정신을 본받아 우리 기독교도 ‘살예살서’(예수님이 방해하면 예수님을 죽이고, 성서가 방해하면 그것을 넘어서는) 정신을 꼭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이 ‘실제의 예수님’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이 전달 과정을 거쳐 기록될 때는 필연적으로 전달자와 기록자의 시각과 해석이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도 ‘실제의 예수님’이 아니라 ‘기록자에 의해 해석된 예수님’입니다. 하여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기록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하며, 때로는 기록자의 한계와 해석을 넘어서야 될 때도 있습니다.
본문의 기록 안에 담긴 ‘실제의 예수님’은 어쩌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네가 율법을 모두 지켰다면, 그 안에 담긴 실제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지 않겠느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뜻을 너의 삶 전체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굶고 있는 네 이웃을 위해 네가 가진 재산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겠느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예수님은 여기까지입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 정말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야만 나를 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확실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저 역시 본문의 젊은이처럼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록된 예수님’ 안에서 더욱 따뜻하고 넉넉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근심하며 떠나가는 젊은이에게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고 “그 정도도 훌륭하다. 부족한 부분은 나를 따르며 더 배워라. 네가 가진 재산보다 더 크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너에게 알려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제가 만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피하여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고뇌하며 기도하신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소심하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런 저의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고 지금도 항상 저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의 해석에 교우님께서 반드시 동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교우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게 문자에 매이지 않고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을 읽으려 노력하면 우리는 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열린 신앙과 진지한 탐구를 계속 하신다면, 제가 본문에서 찾아내지 못한 더 깊고 중요한 뜻을 교우님께서 읽어내실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본문에서 계속 이어지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자신과 가족은 사랑할 줄 알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계명을 모두 지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행복을 추구하여라. 그래야 진정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3. 본문을 헌금 강요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거짓 목자들을 조심하십시오.
본문에서,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이 교회의 재산 증식과 증축을 위한 수단으로 자주 인용하여 우리 교우님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의 결론에 해당되는 다음 구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이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에게 갈등을 주는 이유는 “신앙이 가정보다 우선한다.”는 전제를 지지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복음서에 기록된 이런 말씀들에 근거하여 우리 기독교는 “교회는 가정 뿐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등 그 어떤 조직체보다 우선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마가복음이 기록된 서기 70년 당시의 정황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로마제국에 체계적으로 저항했던 유다민족의 독립운동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 복음서 기자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표현한 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돌(기초석) 위에 돌(건축물) 하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유대 독립군이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마사다 요새까지 점령되어 유다공동체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한 극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공동체가 붕괴되면 그 공동체 내에서 시작된 예수운동 역시 공동체와 함께 궤멸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어떻게든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지하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가정보다 예수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개인의 안락과 가정의 행복을 유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애국지사들의 선택에 비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의 선택이 극한상황에서는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지만, 평화의 시기에도 변함없이 강조되면 가정과 사회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개인의 꿈과 공동체의 이상이 함께 존중받아야 평화롭고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이 이런 특수한 상황의 산물임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문자 그대로 읽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무모하고 맹목적이 되어 우리의 소중한 가정과 사회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고 가슴 아픈 일은, 본문을 인용하는 설교자 중에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는 말씀에서 “가진 것을 다 팔아”라는 앞부분만 인용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뒷부분을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헌금하라.”는 논리로 바꾸어, 교회를 새로 건축하거나 부흥회를 열 때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우님들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살예살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록자의 의도와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문자 그대로 믿는 신앙이 이렇게 무모하고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문자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문자우상숭배와 ‘기록된 예수’를 넘어서지 않으면 참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 본문을 이용하여 무리한 헌금을 요구하거나 교우님들께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을 요구하는 설교자는 거짓 목자입니다. 그런 자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기꾼일 뿐이니 잘 분별하여 교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가정에 무리가 될 정도로 경제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교회도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교회입니다.
무엇보다 본문 말씀은 개인의 욕심에만 갇혀있지 말고, 다 함께 누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말씀이지 개인의 행복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 조직에 휘둘려 신음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님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교회, 교우님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교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도록 채찍을 들어주십시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퇴출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4. 개인의 기부도 아름답지만, 공정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된 구절이라 하더라도 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성서에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된 구절 중에서 실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리 많지 않고, 전달자나 기록자, 또는 후대의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뛰어난 혜안을 갖고 우리에게 천금 같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예수님 역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당신께서 사셨던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개인의 편견이나 유한성에 갇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께서 편협하고 극단적인 생각의 결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넘어서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후에 본문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개인의 한계와 연약성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걱정하는 제자들의 장탄식에 예수님은 이렇게 시원하게 답변해주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부자가 재산을 내놓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뜻과 힘을 합하면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종교 강요가 없는 세상과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는 한 젊은이의 말이 생각납니다. “혼자 꾸는 꿈은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께 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류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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