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미디어스 2013-04-05일자 기사 '친박 이경재 후보자, 5공 때는 박정희 비판'을 퍼왔습니다.
'유신쿠데타', '코리아 게이트' 박정희 비판 서적 경력 사항에서 누락

'유신쿠데타', '코리아 게이트' 박정희 비판 서적 경력 사항에서 누락

▲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 ⓒ뉴스1
방송통신위원장 이경재 후보자가 1980년대 (유신쿠데타), (코리아 게이트) 등의 책을 출간했으나 이를 인사청문요청서 경력 사항에서 제외해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이경재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요청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를 토대로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은 이 후보자에 대한 자질·도덕성을 검증할 예정이다.
하지만 인사청문요청서에 이 후보자가 80년대에 펴낸 ‘저서’들이 누락됐다. ‘저서’는 후보의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으로 후보자 검증에 필요한 자료다.
‘저서’는 후보자의 입장에서도 내세울 만한 이력으로 이를 누락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후보자가 펴낸 저서의 제목을 확인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라는 판단이다. 관련 저서는 (유신쿠데타)(1986년)와 (코리아 게이트: 금한조의 대미로비 공작)(1988년) 등으로 이 후보자가 편집국 기자로 재직할 당시 펴낸 책이다. 는 판금도서로 지정됐다가 1987년 10월 해제됐다.
“10·17 조치는 제2의 5·16쿠데타”
(유신쿠데타)는 10·17조치(10월 유신)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경재 후보는 책을 통해 “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시각, 지방에서 마지막 국정감사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고 기록했다.
“10·17조치는 제2의 5·16쿠데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민주당 내각의 제2공화국이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는 일단의 장교들에 의해 무너졌다면, 박정희 자신에 의해 세워진 제3공화국 역시 박정희 자신과 극소수 측근에 의해 완전히 환골탈태한 새 체제를 낳게 된 것이다”(유신쿠데타, 23P)
이경재 후보는 ‘99.9% 득표의 대통령 선거’ 소제목에서도 “국민투표는 보나마나였다”며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1.9%. 찬성지지율 91.5%라는 기록적인 투표결과로 유신헌법이 탄생했다”고 기록했다. 이어 “100%로 나오지 않은 것은 오히려 지능적이었다”고 꼬집었다.
이경재 후보는 박정희 제8대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됐던 장충체육관에서의 상황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했다.
“사실 대통령취임식은 중앙청 앞 광장에서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경호상의 문제 때문에 실내로 변경되었다. 통일주체대의원과 극히 제한된 인사들만 초청됐고 밖에는 삼엄한 경계가 처졌다. 박대통령이 취임선서를 마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취임사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렸다. 단상 옆에 세워둔 거대한 국기게양대가 흔들흔들하더니 중간에서 탁 꺾여졌다. 태극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취임사를 낭독하던 박대통령이 깜짝 놀라 몸을 피했다. 장내는 잠시 수라장이 되었다. 제4공화국이 출범하는 순간의 이 해프닝은 이를 지켜본 이들에게 상서롭지 않은 조짐으로 새겨졌다”(유신쿠데타, P29)
이경재 후보는 “뒤안길에서는 야당인사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이 진행됐다”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고문을 나찌의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비유한 김영삼 신민당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 양일동 통일당총재의 증언을 책에 담기도 했다.

▲ 이경재 방통위원장 후보자가 5공 때 쓴 '유신쿠데타' ⓒ 미디어스
“박정희, 3선에 그쳐야 했다”
“그의 임무는 3선에서 그쳐야 했다. 그리고 퇴임한 전직 대통령으로서 시정인들이나 농민과 어울려 그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을 보여주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로 길이 기록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신체제를 선택해 그 자신 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 불행의 씨를 남겼고 국가 민족에게는 민주주의의 퇴보와 헌정중단의 악순환을 유산으로 남겼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비극의 길을 선택하도록 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권력의지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겠다”(유신쿠데타, P69)
이경재 후보는 (유신쿠데타)에서 “1979년 10월 26일 저녁 청와대 부근의 궁정동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며 “그 몇 발의 총성은 막강했던 유신체제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동시에 18년에 걸친 박정희통치시대의 종언을 고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데 그 비극의 장소가 유신체제를 탄생시킨 바로 그 산실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인과응보라고 할까”라고 물음표로 남겼다.
이경재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3선에서 그쳐야 했다”며 ‘유신체제’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드러냈다. 특히, “퇴임하고 농민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을 보여주었더라면…”이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여러분이 나를 다시 뽑아주면 이 기회가 나의 마지막 정치연설이 될 것”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방송연설에 대해, 이경재 후보는 “해석여하에 따라 묘한 여운을 남긴다”면서 “‘3선까지만 허용한 헌법에 따라 한번만 더하고는 물러나겠다’는 뜻이겠지만 ‘직선제에 따른 표의 호소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경재 후보는 이어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는 그 후 그의 말대로 직선제에 따른 표의 호소는 하지 않았다. 다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2번이나 더 대통령에 당선됐을 뿐”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메시아적 사명감 투철…독선에 불과”
“박대통령은 그가 착수한 조국 근대화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믿었고 그 자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제단에 바쳐야 할 사람이라고 종종 말해왔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메시아적 사명감이 투철했다. 좋게 말하면 애국심일 수 있으나 그것은 또 독선에 불과할 수 있다…(중략)…박 대통령 자신은 보다 효율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 보다 확고하게 통일과 안보태세를 확립하기 위해 유신체제의 수립이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했으나 사실 그것은 그의 종신집권을 위한 변명에 불과했던 것이다”(유신쿠데타, 69P)
“광주단지난동, KAL 빌딩난동, 실미도난동, 사법파동, 인턴파동, 노사분규 등이 꼬리를 물어다. 박정희 10년 통치로 빚어진 비리와 경제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은 대부분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과 개발위주의 경제정책에서 연유한 것이다”(유신쿠데타, 90P)
이경재 후보는 ‘경제개발계획 추진’, ‘통일·안보태세 확립’ 등 박정희 대통령이 밝힌 유신체제 필요성을 “종신집권을 위한 변명에 불과했다”고 평가했다. 또, 당시 표출된 경제·사회적 문제 역시 박 대통령에서 원인을 찾았다.
이경재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언론탄압에 대해 “왜 이 시기 언론에 대해 가혹했을까”라며 “다음 사태(유신)에 대비한 포석”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경재 후보는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7·4공동성명’을 유신작업을 위한 발판으로 활용했다는 지적도 이어갔다. 그는 책을 통해 “통일이 권력놀음에 이용만 당했다”고 비판했다.
“(7·4공동성명에 대해)비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요란스럽게 통일무드를 조성한 것은 극비리에 추진하던 유신작업이 영글기만을 기다렸다는 뜻이 된다…(중략)…10·17조치 후 제안된 헌법은 바로 통일헌법이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박 정권은 통일과 남북대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헌법통과에 연결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1인종신체의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박정희대통령이 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대통령이 취인한 12월 27일 바로 그날 북한도 제5기 1차 최고인민위원회에서 헌법개정을 공포했다. …(중략)…요컨대 남한의 유신헌법이 통치권자의 권한을 강화하고 종신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때맞춰 개정된 북한헌법도 통치권자인 김일성의 공식적 지위를 높임과 함께 그 체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중략)…민족의 비원이 통치권자들의 권력놀음에 이용만 당한 셈이다. 그 후로 남북한의 대화는 오랜 기간 동면기를 갖게 된다”(유신쿠데타, 210~213P)
“박정희, 영수회담을 통해 공작정치”
박정희 대통령은 통치 18년 동안 5차례의 영수회담을 가졌다. 이경재 후보는 이 영수회담에 대해 “18년 집권을 가능케 한 비법 중 하나”라면서 “박 대통령 개인적으로는 독재와 장기집권의 수단으로 이용한 흔적도 짙다”고 지적했다.
“그는 집권동안에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을 비판하고 자기의 집권기반에 위험이 될 만한 인물 혹은 집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견제하고 거세하려고 했다. 그는 야당에 국한하지 않고 자신이 거느린 여당 내에서도 경쟁적인 대상자의 등장을 끊임없이 경계했다…(중략)…어떤 야당지도자에게 정권인계구상을 상당히 짙게 풍긴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위장에 불과했다. 야당을 종속적으로 존재하는 일종의 악세서리로밖에 그 존재 이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을 인정하는 한 너그러웠고 심지어 정치적 보너스까지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을 넘보는 기미만 보이면 가차 없이 거세하려 들었다. 앞으로 만나고 뒤로 치는 고등 전술이 동원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영수회담은 그의 장기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야당의 분열과 경쟁자를 자멸시키기 위한 대야공작적 측면에서 추진된 듯한 감도 없지 않다”(유신쿠데타, 270~271P)
이경재 후보는 민중당 박순천 당수와 신민당 유진산 당수, 김영삼 총재, 이철승 대표최고위원과의 영수 회담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박순천 당수와의 영수회담으로 한·일협정비준동의안과 월남파병의 국회 승인을 얻어내는 과정과 이를 계기로 강경파였던 윤보선이 의원직을 버리고 민중당을 탈퇴하는 계기가 됐다고 기록했다.
이경재 후보는 “한·일협정문제는 사실 집권당에게는 어려운 시험대였다”며 “그러나 저지투쟁을 앞둔 야당의 적전분열은 여당의 난제를 쉽게 풀어주었다. 박대통령은 여야 첫 영수회담으로 한·일협정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과 함께 야당을 분열시킨 1석2조의 열매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유신쿠데타)에서 (동아일보) 광고사태와 긴급조치9호 발동, 김대중 가택 연금 등이 이어지던 시기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 내용도 흥미롭다.
‘동아일보를 끝내 폐간시킬 작정이십니까?’라는 김영삼 총재의 물음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번쯤 정신차리도록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경재 후보는 김영삼 총재와의 영수회담 결과, “김 총재는 (정부의 일에)어느 정도 협조를 해온데 대한 박 대통령의 보답은 김 총재의 이미지다운을 통한 총재축출과 10·26비극 때까지 계속된 박해였다. 철저한 공작정치의 일면을 보는 것 같다”고 적었다.
권순택 기자 | nanan@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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