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시사IN 2013-04-11일자 기사 '대통령 긴급조치, 39년 만의 위헌 결정'을 퍼왔습니다.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많은 피해자들이 일괄적으로 구제받을 길이 열렸다. 민변 긴급조치변호단은 긴급조치 제4호에 대해서도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통해 위헌 여부를 가를 계획이다.
백기완 선생은 “포악하였던 봉건 치하에서도 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이라는 형식으로 청원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청원하겠다는 것을 15년씩이나 징역을 보낸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나만 남으면 체면이 안 되니 나도 장준하 형님을 따라 형무소에 가겠다”라는 말을 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지 20여 일 만인 1974년 2월1일에 1심이 끝났고, 2개월 만인 3월2일에 항소심이, 8월20일 대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면서 일사천리로 재판이 종결되었다. 장준하 선생은 징역 15년을, 백기완 선생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아직도 기록이 깨지지 않은, 전무후무하게 신속한 재판이었다.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많은 피해자들이 일괄적으로 구제받을 길이 열렸다. 민변 긴급조치변호단은 긴급조치 제4호에 대해서도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통해 위헌 여부를 가를 계획이다.
백기완 선생은 “포악하였던 봉건 치하에서도 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이라는 형식으로 청원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청원하겠다는 것을 15년씩이나 징역을 보낸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나만 남으면 체면이 안 되니 나도 장준하 형님을 따라 형무소에 가겠다”라는 말을 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지 20여 일 만인 1974년 2월1일에 1심이 끝났고, 2개월 만인 3월2일에 항소심이, 8월20일 대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면서 일사천리로 재판이 종결되었다. 장준하 선생은 징역 15년을, 백기완 선생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아직도 기록이 깨지지 않은, 전무후무하게 신속한 재판이었다.

ⓒ뉴시스 3월2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긴급조치 위헌 판결 기자회견’에 참석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가운데)이 소감을 밝히고 있다.
긴급조치 제1호와 제9호는 유신헌법이나 긴급조치를 비방하거나 헌법개정 청원운동을 하거나, 집회 또는 시위를 하면 영장 없이 체포하고 중형인 징역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특히 제1호 위반자는 긴급조치 제2호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 군사법원 재판관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 했고, 장준하·백기완 선생에 대해서는 판사가 아닌 검사가 발부한 구속영장으로 집행하는 희한한 일도 있었다. 가톨릭명동학생시위 사건에서는 판사가 재판정이 아닌 판사 집무실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을 대동하고 판결을 선고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18세 재수생은 노트에 긴급조치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최연소 긴급조치 위반자로서 징역 1년을 살아야 했다.
헌법재판소가 3월21일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한 헌법소원사건(2010헌바70.131.170병합)에서 긴급조치가 입법 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적절성을 갖추지 못했고 참정권, 표현·신체의 자유, 영장주의,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재판관 8인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만시지탄이나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사실 법원은 종래 대법원 판례에 따라 긴급조치가 해제 또는 사실상 폐지되었다는 이유로 면소(기소를 면함) 판결을 해왔다. 오종상 긴급조치 제1호 위반 재심사건에서 서울고등법원(2010. 4.30선고2009재노19)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에 대해서는 실체 심리를 하지 않은 채 면소 판결을 했다. 또한 긴급조치 제4호 민청학련 사건에서도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는 한편, 긴급조치 제4호에 대해서는 면소 판결을 했다. 말하자면 근원적으로 긴급조치에 대한 사법심사를 배제한 유신헌법 제53조 제4항이 아니더라도, 법원은 기존 관행을 답습해 면소 판결로 일관했던 것이다. 결국 법원은 과거 선배들이 긴급조치 사건에 대해 ‘정찰제 판결’을 한 바와 똑같이 긴급조치에 대한 실체적 심사를 외면한 채 ‘정찰제 면소 판결’을 해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대법원이 2010년 12월16일 ‘오종상 형사 재심사건’에서 긴급조치 제1호가 ‘당초부터’ 위헌이라고 선언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국회가 정한 형식적 의미의 법률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 관할을 (헌재가 아닌) 대법원으로 정하고 또한 위헌 판단을 한 것이 의외였는데, 여하튼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 체제의 사법부가 과거사 청산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헌재 결정만 기다린 하급심 법원들
이러한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하급심 법원은 3년여 동안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린다는 이유로 스스로 사법 심사를 하지 않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최근 몇몇 용기 있는 재판부에서 재심 개시 결정과 더불어 무죄선고를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재판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더욱이 검찰은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에 즉시 항고하거나 무죄판결에 항소함으로써 피해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가장 적용자가 많았던)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아직 위헌 판결이 난 게 아니라는 검찰의 주장은 변명을 넘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같은 법조인으로서 피해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 2호 위반으로 군사법정에 선 장준하(맨 오른쪽)와 백기완(오른쪽에서 두 번째).
때늦었지만 해당 원고에게만 판결이 효력이 미치는 대법원 판결과 달리,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인해 많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일괄적으로 피해를 구제받을 길이 열렸다. 유죄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재심 청구를 통해 재심 개시 결정 및 무죄선고, 형사보상 및 국가배상 절차를 밟으면 될 것이지만, 긴급조치에 의해 영장 없이 연행되어 학교에서 또는 직장에서 제적, 해고된 사람들은 국가배상 절차를 통해 구제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아온 이들의 헌신과 희생에 걸맞게 진상규명, 국가배상, 명예회복, 역사적 재평가 작업 등 일련의 과제가 남아 있다.
민변의 긴급조치변호단은 2007년 이래 대법원에서 긴급조치 제1호 위헌과 무죄판결을, 그리고 이번 헌법재판소의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 위헌 결정을 이끌어 냈다. 변호단은 개인의 권리 구제를 위해 재심 청구 등 피해자들을 모집하는 한편, 피해자 설명회(2013년 4월1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13층)를 개최하고, 재심 청구를 비롯한 형사보상 및 국가배상 절차를 진행한다. 또한 대법원에 계류 중인 긴급조치 제4호 위반 사건에 대해서도 조만간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통해 긴급조치 제4호의 위헌 여부를 심판할 것이다. 1970년대 긴급조치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최종 위헌 결정을 통해 긴급조치의 사법적 종말을 고할 계획이다.
유신헌법이 개정된 지 41년, 긴급조치 제1호가 발령된 지 3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천하를 호령하던 기백을 가졌던 청년은 어느덧 50~60대 반백의 중년이 되었다. 어떤 이는 병마와 싸우다 끝내 운명했다. 김근태, 이범영, 박창수, 채광석, 김도연, 유상덕, 이용덕 등. 그리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아니 이름을 드러내지 못했던 많은 민초들이 긴급조치라는 폭압에 맞서 싸웠고 인생의 굴절을 겪어야 했다. 이들은 오늘 살아남은 자들에게 묻는다. ‘그대는 우리의 제단에 무엇을 바칠 것인가.’
조영선 (변호사·민변 긴급조치변호단 간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