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01-11일자 제52호 기사 '‘박근혜 승리’의 정신적 측면'을 퍼왔습니다.
Corée 박근혜는 어떻게 승리했는가

<무제>, 2000-조르주 엘리아드
작고한 역사가 토니 주트는 1989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차를 갈아타면서 체코의 공산주의 체제가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이 이끄는 '시민포럼'의 결정이었다. 이 뉴스를 듣고 프라하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주트는 (포스트 워)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 책에서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은 동서를 갈라놓은 냉전의 종식과 새로운 유럽의 탄생이었다.
2012년 12월 19일 박근혜의 당선 소식을 접하면서 나도 1989년 주트가 느낀 것과 비슷한 감흥에 사로잡혔다. 희망이냐 절망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념의 지형을 구성하던 근본적인 구도가 해체되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대선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보고, 상대방을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기각되어야 한다. 어떤 선거도 전쟁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투표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표출된 결과는 '국민'의 의사를 나타내는 바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나 그렇지 않은 유권자가 모두 이 '국민'의 범주에 속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다고 해서 그를 선택하지 않은 다른 유권자들이 혜택을 누리지 못하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헌법에 기록돼 있는 '공화국'의 원칙이다. 중요한 것은 이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모든 문제를 박근혜 정부로 귀속시켜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근본적 모순의 원인을 대통령이라는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박근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윤리 판단에 근거해서 본다면 박근혜는 '독재자'라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아버지를 두었다. 새누리당은 이 사실에 대한 해석을 반전시키기 위해 '아버지의 잘못을 딸에게 전가하는 행위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연좌제 비판이 여기에 깔려 있다. 정권 유지를 위해 냉전 이데올로기를 십분 활용했던 독재자의 악법이 그 딸을 구명하는 논리로 활용된 것이다.
가치와 사실을 분리해서 전자의 전환을 통해 후자에 대한 판단을 바꾸는 전략이 박 후보의 당선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전략이 훌륭하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직접선거를 원칙으로 하는 한국의 대통령제는 다분히 '민심'이라고 불리는 유권자의 총의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일정한 포퓰리즘은 필수 요소이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노예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체제이다. 소비자는 욕망의 주체이고, 따라서 강압적인 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다.
박정희 체제는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것 같지만 생산력이라는 점에서 그랬을 뿐, 소비주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금욕적이었다. 특히 부유한 계층을 압박해서 너무 많은 재화를 독점하지 못하게 했다. '특권층의 과소비'에 대한 단속은 이 체제가 소비주의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87년 이후 한국에서 전개된 민주화 과정은 소비주의의 확장을 초래했고, '산업역군'을 '소비자'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외식문화가 창궐하고 대중문화에 관심이 폭증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일찍이 지적했듯이, 인터넷 쇼핑몰 문화로 대표할 수 있는 '소비자의 세계'이다.
중도 보수, '안전' 더 원했다
소비자가 요구하는 것은 욕망의 분할이다. 이 분할 방식을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욕망의 향유를 고르게 분배하는 제도가 민주주의이고, 이를 유지·보수하는 게 정치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소비자민주주의'를 안착시켜온 경로였다. 그렇다고 해서 1987년 이후 이루어진 한국의 민주화가 '무늬만 민주주의'라는 의미는 아니다. 엄연히 소비라는 본질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된 욕망의 분배 구조가 바로 소비자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화폐를 매개로 해서 쾌락을 공정하게 교환할 수 있는 체제란 공평한 구매력의 분배를 전제한다. 구매력은 즐거움과 만족의 준거점이다. 소비자민주주의에서 무엇인가를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동시에 만족을 구현하는 행위이다. 원칙만 놓고 본다면 참으로 효율적인 체제이다. 그러나 소비자민주주의에 근거한 쾌락의 분배는 형식적으로 1/n 형태를 띠고 '평등의 고원'을 부정하지 않는다. 고원 위에 거주하는 이들은 고원 아래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세대나 계급 격차의 문제는 일자리의 한계에서 발생한다. 지금까지 정부는 이 한계를 양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일자리 늘리기에 방점을 찍어왔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일자리는 늘어났지만 안정성이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했다. 당연한 일이다. 좋은 일자리 하나를 쪼개어 불안정한 일자리 여럿을 만드는 것은 기업의 처지에서 본다면 생색내기에 좋은 방법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구조는 사회 구성원의 인식에 각인됐다. 지금 현재 한국 사회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갈라놓는 차별의 문제이지, 고용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실업률이 높아서 문제라기보다 비정규직이 많아서 문제인 셈이다. 여기에서 평등의 문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요구로 나타난다.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한 것처럼, 정규직화 투쟁은 "정상적인 방식으로 착취해주기를 바라는 요구"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의 문제가 고용조건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고용조건은 지난 대선에서 이슈였던 경제민주화와 무관하지 않다.
냉정하게 말해서 '민생'과 '서민경제'라는 막연한 개념이 포괄하는 내용은 노동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를 써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산층을 두텁게 만들겠다는 공약이 제시하는 전망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로 표상되던 '박정희 향수'는 더 이상 쾌락을 주지 못하는 자본주의를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는 소망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쾌락의 평등'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것이 '성공의 평등'이다. 로널드 드워킨이 말하듯이, 성공의 평등은 "각각의 사람들이 현재의 삶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합당하게 가질 수 있는 유감의 양 또는 정도에서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공하지 못해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최소화하려는 것이 성공의 평등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성공의 평등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명문대를 다니는 학생과 지방대를 다니는 학생은 자신의 대학을 비교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보다, 같은 대학 내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 동료 학생 사이에 불평등한 처우가 발생했을 때 민감하게 반응한다. 평등의 문제가 복지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런 변화는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평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평등의 관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독재자의 딸'이라는 우려를 뚫고 박근혜가 당선된 것은 성공의 평등보다 쾌락의 평등에 더 관심을 갖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관련 있다. 복지 예산을 마련하는 문제에서도 직접세보다 간접세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이유이다. 쾌락의 평등은 화폐의 축적이다. 화폐의 축적은 자본가의 역량이다. 과거의 자본가가 인색한 부자였다면, 오늘날 자본가는 훌륭한 소비자여야 한다. 자본가야말로 소비자를 이해하는 주체이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상품을 팔아서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개인에게 자본가의 길을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복지의 해결책이다. 50대가 박근혜를 선택한 이유는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막연하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평등의 문제는 성공이나 쾌락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자원의 평등이 중요하고, 이런 까닭에 경제민주화는 중요한 화두로 부상했다. 경제민주화는 자원의 평등을 보장해주는 제도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귀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정치의 담당자를 선출하는 것이 이를테면 지난 대선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가 담당하는 제도의 문제에서 잘 드러나듯이, 자원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주관적인 평등의 태도와 무관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노동'의 의제가 소멸하고 '중산층 복원'이 중요한 문제로 부상한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중산층'이라고 호명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중산층에 합당한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우스푸어'라는 말이 가리키듯이, 성공과 쾌락의 평등에 대한 지향이 이들에게 '중산층 의식'을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중간계급으로서 신분 상승과 소비주의에서 공평한 권리를 요구한다.
박근혜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이런 도시 중간계급의 문제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이념 구도에서 본다면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로서 민주주의의 적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박근혜 지지자들은 이런 약점을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은 과거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를 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중도보수'라는 일정한 의식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중도보수의 증가는 한국 사회가 보수 지배의 지형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상황은 '87년 체제'로 불리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이념 구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1980년대를 통과하면서 형성된 이른바 '민주세력'이 두 번의 집권기를 거치면서 일정하게 제도화한 것과 이 변화는 무관하지 않다. 민주화가 사회운동의 이념으로 작동하기보다 일종의 조건으로 흡수됐다는 생각이 팽배해진 것이다. 민주주의보다 안전에 대한 요구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 것이 박근혜의 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요소였던 셈이다.
페미니즘도 맥 못춘 '여성 대통령'
안전에 대한 요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생'이라는 정서적인 용어법으로 이 문제를 관통한 것이 박근혜의 전략이었다. 이 용어법이 누락시키는 것은 '노동'의 범주이다. 민생은 노동 문제보다 소비 문제를 부각시키는 개념이다. '국민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행복의 내용은 삶의 안정성이고, 안전한 사회이다. 안전사회를 위해 '불량식품'을 척결하겠다는 것을 박근혜가 주요 공약 중 하나로 거론했다는 것은 상징적인 조치였다. 박근혜에 대한 노년층의 지지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 만들어놓은 '흐르는 사회'에 대한 저항감의 표현이었다.
이성의 판단은 감정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다. 이성과 감정을 나누어 서로 대립적인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지만, 실제로 이성의 판단은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박근혜 지지층의 태도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이들의 지지를 단순하게 감정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다. 감정은 이성의 판단에 개입해서 지지 기반을 견고하게 만든다. 감정은 특정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하게 현실화하는 기제이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판타지의 구성물이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그렇게 인식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간섭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감정이다. 그러므로 박근혜에 대한 노년층의 감정은 눈먼 광기나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이 감정은 정확한 논리성을 갖추면서 현실의 쾌락 원칙을 옹호한다.
이 사실은 중·장년층 여성 지지자들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다. 박근혜가 내세운 여성 대통령의 표상에 대항해서 페미니즘은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어쨌든 박근혜에게서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하려 했던 여성 유권자들 때문이다. 이 여성 유권자들은 '엄마-아내-딸'로 살아가면서 느꼈던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처지를 박근혜라는 인격을 통해 보상받으려 했다. 이런 감정적 공명의 과정이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미지를 상쇄시켰던 것이다. 유신과 독재의 기억은 과거의 것이고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를 익숙한 논법으로 '이성의 마비'라고 봐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문제를 환원시키는 순간, 이성과 감정은 대립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성이 옳은 것에 대한 판단이라면 감정은 좋은 것에 대한 판단이다. 감정은 좋은 것을 벗어나서 나쁘거나 괴로운 것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좋거나 나쁜 것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것일까? 뒤집어서 묻는다면, 좋거나 나쁜 것을 판단하는 것과 옳거나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무제>, 2000-조르주 엘리아드
민생, 박근혜 지지의 '합리적 기술'
박근혜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일부 집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맹목성과 관계없는 중도보수가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선동에 넘어가서 좀비가 된 것이 아니라면, 이들은 '합리적 판단'에 근거해 박근혜에게 표를 주었을 것이다. 이 '합리적 판단'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박근혜라는 개인에 대한 동정이나 공감은 현실에 대한 '합리적 판단'이라는 현실성을 구성하는 기제였다. 판타지는 현실이다. 이 현실은 박근혜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박근혜를 통해 구성된 것이다. 이 박근혜의 자리는 누구라도 올 수 있는 장소였다. 행운과 역량을 갖추면 누구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이 직선제의 원리이다.
문제는 그 박근혜의 자리에 민주화세력이 오지 못했다는 것. 박근혜의 역량(또는 미덕)이 왜 이 시점에서 선택됐는지 고민해야 하는 까닭이 이 지점에서 발아한다. 박근혜의 집권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선에서 박근혜는 '민생'이라는 경제적 의제에 집중했다는 사실이다. '경제 대 정치'라는 익숙한 근대 부르주아 국가의 전략이 되풀이된 것이다. 민주화세력은 '어게인 2002년'이었지만, 현실은 2007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 논리로 정치를 억압하는 것이 박근혜의 집권 전략이었다. 정치보다 경제를 우선한다는 것은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정치적 편제를 개혁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정치 개혁이나 쇄신에 대한 요구였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치인이 경제위기 해소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은 과거 박정희가 정치인을 '쓰레기'나 '병균'에 비유했던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먹고살기 위한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다는 믿음이 팽배한 것이다.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된 뒤 문제가 된 국회의원들의 '외유'는 이런 생각을 더욱 강화해주었다.
박근혜는 자본 측면에서 봤을 때 가장 안정적인 후보였다. 한국처럼 대통령의 결정권이 정책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국가에서, 대통령의 성향은 자본 측면에서 본다면 절대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는 필수 요소이다. 문재인은 이 측면에서 과거 참여정부의 문제를 넘어서지 못했다. 박근혜의 안정성은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안전사회를 갈망하는 중간계급의 요구에 부합하는 이미지였다. 최근 두드러지는 변화를 꼽으면, 중간계급이 정상국가보다 안전사회를 요청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둘은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정상국가라면 안전사회를 만들어줄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당위 명제가 두 항목을 하나로 연결해준다.
이들이 원하는 정상국가는 '중립'에 존재하는 국가이다. 어디에도 편향되지 않는 중립적 국가에 대한 요청은 정치를 배제하고 행정 기능만 남겨놓은 정부에 대한 구상으로 이어진다. 전문가주의는 여기에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려는 부르주아 국가의 이념을 지지한다. 노동자를 정치에서 분리시키고 현장을 효율성의 이름으로 통제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요구는 타협주의로 귀결한다. 고용과 해고를 자유롭게 만드는 '규제 완화'는 규제 자체를 없앤다기보다 자본의 축적을 가로막는 장애들, 무엇보다 임금체계를 자본의 논리에 맞춰 개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 지급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용 형태를 다양화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이런 논리의 산물이다.
고용 형태의 변화는 삶의 양식을 바꾸는 근본적 전환을 초래한다. 한국이 보수 지배 사회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까닭다. 보수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 그 이념을 혐오하는 정서이다. 보수는 이념을 가치의 문제로 만든다. 보수의 이데올로기는 가치와 사실을 뒤섞어 전자로 후자에 대한 판단을 뒤집는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은 박근혜가 표상하는 가치와 포개지면서 의미를 잃는다.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그의 과거나 이념에 대한 동의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자본 측면에서 보면 박근혜야말로 경제위기로 인해 동요할 수 있는 정치를 안정시켜줄 리더십의 인물이었다. 문제는 박정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대한 박근혜의 태도가 미지수로 남을 수 있다. 정확하게 이 태도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박근혜의 입장이다.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로 지칭한 은 이에 대한 우려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전략은 자신의 가치를 비서구권에 전파하는 것이었고, 가장 모범적인 국가가 바로 한국이었다. 한국은 경제와 정치 측면에서 가장 미국의 가치에 근접한 결과를 낳은 역사를 보여준다. 문재인이 표상했던 민주화세력은 이런 측면에서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판단이다. 진보 진영을 구성하는 정파는 민족주의, 미국식 자유주의, 유럽식 사민주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지난 총선을 기점으로 민족주의와 유럽식 사민주의는 의회민주주의라는 합의제도 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미국식 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박근혜의 집권은 의회민주주의의 풍경이 두 보수주의로 정리된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두 보수주의 중에서 메시지가 선명하고 경제를 위해 정치를 안정시킬 수 있는 후보에 대한 지지가 더 많이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박근혜는 보수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접점이었을지 모른다.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력과 미국식 가치를 지지하지만 민주화세력이 내세우는 이념에 동의할 수 없는 세력이 박근혜라는 공유점을 찾은 셈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박정희 독재에 대한 박근혜의 입장이었는데, 결정적인 지지 철회의 이유로 작용하지는 못했다.
'소비주의 유전자'의 탄생
박근혜라는 개인의 역할이 기존 질서를 뒤집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여야는 유신과 민주화라는 가치 지향을 가진 것 같지만, 경제정책 측면에서 둘은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박근혜가 집권 가능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유신의 가치를 부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유신의 가치로 중도보수의 합리성을 포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5년을 통과하면서 증가한 부동층은 기존 정치언어로 소통하지 못하는 욕망의 주체성을 의미한다. 이 주체성은 아이러니하게 소비주의로 인해 탄생한 것이다. 좌절과 분노가 이 주체의 정서를 구성한다. 소비주의의 스펙터클은 존재를 현시하면서 만족감을 제공한다. '자랑질'이야말로 소비주의를 밀고 가는 핵심적인 욕망의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이 '자랑질'에 동참하지 못하는 순간, 소비자가 느끼는 불만은 좌절과 분노로 바뀐다. 좌절한 소비자가 소비주의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을 때, 정치는 비로소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소비주의의 한계상황에서 폭력성으로 이행하기보다 윤리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선악의 이분법이 호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상징 행위로서 좌절과 분노를 안기는 대상에게 윤리적 비판을 가하는 것이 이를테면 지금 목격하고 있는 탈정치적 정치의 민낯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치적인 것을 억압하는 윤리적 장치일 뿐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정치적 의제로 나아가지 못할 때, 선거는 두 보수주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전락한다. 민주주의는 누구를 지지하는 문제라기보다,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과정 자체이다. 이런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정치를 통해 만들어진다. '생활세계'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강조하는 것은 향후 5년 뒤 누가 대통령이 될지 다투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박근혜는 이 중요한 의제를 감추기 위한 보수주의의 전략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글 /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영국 셰필드대학 영문학 박사. 저서로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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