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미디어스 2013-01-13일자 기사 '조선일보의 두 얼굴, 다른 승리자적 관점'을 퍼왔습니다.
편집자 주> ‘말의 힘’이 사뭇 무력하다고 여겨지기 쉬운 시대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을 무기로 휘둘러 제 정파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일 것이다. 아전인수를 위한 편견과 왜곡, 선동이 섞인 아수라장에서 말글은 현실세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데 실패하곤 한다.
그러나 말글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 냉소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일 것이다. 말글에 영향받는 이들이 있고, 그 영향력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존재하는 이상 말글에 대한 평가를 엄정하게 하는 작업은 필요할 것이다. 비평에 대한 비평에 대한 비평의 꼬리 물기가 난무하는 인터넷 시대지만, 이에 미디어스 역시 꼬리 물기에 한 젓가락을 보탠다. 그 대상은 역설적으로 요즘 사람들이 별로 읽지 않는 일간지의 사설 및 기명칼럼이 될 것이다.
모든 평가가 그렇듯이 그 주에 당번을 맡은 기자가 작성하는 이 평가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스는 그 주관성을 흔쾌히 인정한다. 그리고 구미에 맞는 뉴스가 주로 소개되는 이 인터넷 시대에, 주관적 평가가 하나 더해지면서 칼럼 두 편을 더 보게 되고 그 판단 기준을 함께 공유해 보는 일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강변하고자 한다. 앞으로는 매주 월요일을 그 주의 가장 좋았던 칼럼과 가장 나빴던 칼럼을 그렇게 판단한 이유와 함께 소개하면서 출발하게 될 것이다.
대선 이후 ‘51:48’의 엇갈림은 여전히 극명하다. 승리한 쪽의 기세등등함은 극우인사의 전면 기용을 지나 ‘측근 비리’ 사면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반면, 각종 위로와 치유 그리고 반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패배한 쪽의 상실감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을 뿐, 여전해 보인다.
이 극명한 엇갈림 속에서 승리의 본진, 조선일보는 다소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모습은 스스로 ‘킹메이커’의 지위를 만끽하며, 가장 큰 승리를 따냈으니 이제 됐다는 안도감 속에 정국의 속도를 조절해가는 조선일보 특유의 ‘의지적 착각’과 ‘환상적 현실인식’이 겹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승자의 여유, 그런 것 말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조선일보는 여전히 조선일보다. 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혹은 2000년대 중반의 언젠가 만큼은 분명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조선일보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크다. 많은 사람들이 아예 조선일보를 상종조차 하지 않은 지 꽤 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조선일보는 여전히 ‘1등 신문’이며, 특히 정책 결정권자와 정치권에 조선일보가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하다. 복잡해진 여론 지형 속에서 조선일보는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가장 뛰어난 ‘의제 장악력’을 아직도 보여주고 있다.
1월 2주차 '칼럼 Best & Worst'는 모두 조선일보에서 찾아보았다. 조선일보에서 답을 찾았다고 하면 될까. 승리자적 관점에서 정국을 조망하고 있는 조선일보의 관점 속에서 가장 섬뜩한 주장과 그나마 경청할 만한 주장이 있었다.
박정훈, 다시 ‘죽음의 굿판’을 말하다

▲ 박정훈 부국장이 쓴 1월 10일자 조선일보 칼럼 '누가 또 '죽음의 굿판'을 펼치는가'
조선일보 박정훈 부국장 겸 사회부장은 조선일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현재에 가장 충실한 인물로 보인다. 꽤 오래도록 조선일보 사내칼럼인 ‘태평로’의 필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난 광우병 촛불 당시 시위대를 향해서 가장 노골적인 ‘적개’를 보인 기자였고, PD수첩 재판 당시에는 전후 ‘팩트’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제작진을 고발했단 이유만으로 한 작가를 ‘영웅’으로 치부하는 감각을 보여준 ‘정치꾼’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대한문 농성자들을 ‘노동자들에 기생한다’고 묘사하는 등 조선일보의 사회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일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제적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다시 ‘죽음의 굿판’을 꺼내들었다. 박근혜 시대가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시작되고 있단 세간의 언명이 몹시 거슬렸는지 그는 ‘유령처럼 떠오는 순교 예찬의 코드가 있다’며 ‘지금 노동운동권에는 죽은 사람을 열사로 영웅시하며 죽음을 투쟁 동력으로 삼으려는 성전의 문화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을 노동운동권이 하나의 코드로 조장, 활용하고 있단 섬뜩한 주장이다.
박 부국장은 그 예를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 멀리 20년 전 김지하 시인의 논리와 가까이는 노동 운동권과 전혀 상관없는 미네르바의 주장에서 찾았다. 너무나 반인륜적인 주장이 스스로도 조금은 겸연쩍었는지 아니면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중립적인 척을 한 것인지 박 부국장은 ‘특정 집단이 대놓고 죽음을 강요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어물쩍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놓곤 돌연 민주노총의 투쟁 방식을 재차 문제 삼는 논리적 분열증의 모습도 보였다. 박 국장이 보기에 ‘희망버스’는 ‘법과 제도의 틀을 벗어난 경우’였고, 한진중의 복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 농성은 노동자들을 ‘절망적 현실의 벽에 부닥치는 순간’으로 이끈 주장이었다.
그는 ‘농성장에 놓이는 시너와 휘발유통이 죽음의 문화를 상징해준다’며 ‘죽음의 굿판 세력은 법 제도와 노동법규로 싸우는 대신, 단식하고 송전탑과 크레인에 오르는 쪽을 선택한다’고 주장하는 등 용산 철거민을 비롯한 사회 운동 세력 전반을 아예 ‘죽음의 굿판 세력’이라고 칭했다. 이들의 투쟁 방식은 ‘생명을 방패로 내세우는 피를 바라는 ’순교 코드‘’라고 힐난한 박 국장은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 최씨의 자살에 대해 죽음의 굿판 세력은 “박근혜와 조남호가 최씨를 죽였다”고 외치지만 ‘투쟁 세력은 기다렸다는 듯 또 버스 시위대를 현장에 보냈다’며 ‘최씨 죽음에 진짜 책임 있는 사람은 누굴까’를 되물었다.
주요 내용을 옮기면서도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로 단순하고 과격한데다 반인륜적이기까지 한 그의 주장은 활자를 가장한 흉기이자 지면이 그 자체로 날카롭게 누군가들의 가슴을 벨 수도 있겠단 점에서 합법을 가장한 가장 끔찍한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노동운동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사회적 투쟁의 방법론에 대해선 다른 생각을 가감없이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언론인리라면, 그것도 한 언론사의 사회부장을 맡고 있는 이라면 힘없는 자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상황을 두고 최소한 이런 생각만큼은 피해갈 수 있는 사람으로 걸러져야 하는 게 아닐까? 박 부국장의 글은 조선일보가 왜 한국사회의 흉물로 지목되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괴물로 치부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죽음의 굿판’을 운운하기 전에 기자로서 박 부국장이 직접 만나 본 최근의 ‘노동운동권’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박 부국장의 반인륜적 견해는 ‘개혁적 언론계-대다수 지식인-사회 운동 전체-상식적 시민’의 외면 속에 사회적 최상층의 이해관계에만 기여하며 소수의 기득권 ‘연줄 취재’로 세상의 전부를 파악하는 조선일보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는 ‘저주의 굿판’일 뿐이다.
최보식, 우파의 김지하 ‘활용’을 냉소하다

▲ 최보식 선임기자가 1월 11일자에 쓴 칼럼 '김지하에게 '환호'할 수 없는 마음'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가 우파 언론인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김지하 시인의 최근 행보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비쳤다. 김지하 시인의 뜬금없는 행보와 정념어린 언어들이 대선 이후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때에, 최 선임기자는 ‘선거와 정치판에서 잘 싸우는 역할은 그와 같은 시인이 아니어도 할 사람이 줄을 서 있다’고 지적하며 김 시인이 ‘함정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지적했다.
최 기자는 김 시인이 지금 ‘박근혜 당선인의 맨 앞줄에 전사처럼 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며 그가 ‘시대와의 화해를 얘기했지만 현실에서는 불화와 분열을 더 조장할 공산이 높다’고 비판했다. 최 기자는 김지하의 최근 행보에 대해 ‘특정 이념과 정파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노년의 김지하가 왜 저렇게 됐을까”의 목소리는 묻혀있는 것’이라고 냉소했다.
최 기자는 김지하를 비판한 잣대에서 소설가 황석영의 가벼움도 지적했다. 선거 결과에 대한 박탈감과 상실감을 치료해준다는 취지로 ‘힐링 사인회’를 열겠다는 황석영의 행보에 대해 ‘한국 문단에서 수십 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작가가 직접 선거판에 개입한 것은 흔한 구경거리는 아니었다’며 ‘한때 그의 독자들도 즐거운 마음만으로 그의 작품을 읽을 순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지하와 황석영을 향해 모두 균형 있는 비판을 가한 최 기자의 글은 조선일보 특유의 관점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지만 문학전문 기자가 문학인을 대하는 애틋한 마음과 진심이 곳곳에 묻어있다. 특히, 김지하의 행보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노년의 김지하를 활용하고 있는 우파 단체와 언론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이는 우파 매체들이 승리자적 관점에서 그 우월의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장치로 김지하를 이용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간곡하지만 분명한 경멸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태도다. 승리를 만끽하는 것과 패배를 능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인식이다. 최 기자는 최근의 김지하와 황석영을 향해 ‘꼭 정치판에 휩쓸려야 사는 맛이 나는지 묻고 싶다’고 했는데, 확실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 원로를 향해 제정신의 언론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절실한 의문이 아닐까 싶다.
김완 기자 | ssamw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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