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8-27일자 기사 '‘뼛속까지 항일’ 집안의 젊은 신학도'를 퍼왔습니다.
[새 연재] 장준하는 누구인가 (1)

▲ 장준하 선생.
내가 장준하 선생을 처음으로 만난 때는 1974년이 저물어가던 어느날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사 기자로 일하던 나는 서울 종로1가의 조광현 내과에 입원해 있던 그를 취재하려고 병실을 찾아갔다. 문 앞에는 눈매가 날카로운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당시 ‘기관원’이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장 선생에 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사상계)라는 잡지를 통해 치열하게 민주화운동을 해왔고,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체포와 투옥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반독재투쟁을 펼쳤으며, 1973년 말부터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근자에 행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는 사실 정도였다.
내가 등에 꽂히는 수상한 사내의 눈길에 섬뜩함을 느끼면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동아일보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장 선생은 병상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장 선생이 협심증과 간경화 증세가 악화되어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젊은이보다 억센 힘으로 내 손을 잡고 한참 동안이나 놓지 않는 바람에 팔뚝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가 죽은지 37년 '타살' 짙은 유골 공개
그 무렵 동아일보사는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광고 탄압’을 겪고 있었다.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조사와 사법부의 재판에서 드러났듯이, 광고 탄압은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무산시키려고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을 동원해서 저지른 사건이었다.
장준하 선생이 병실에 입원해 있을 무렵 박 정권이 광고 탄압의 강도를 높여가자 재야단체들과 종교계는 물론이고 뜻있는 시민들이 텅 빈 동아일보의 지면을 채우기 위해 ‘격려광고’를 열성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동아일보사 언론인 여러분 덕분에 박정희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13년 동안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용기가 치솟고 희망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눈동자에서는 강렬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장 선생이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뒤 겪은 일들을 자세히 들었다.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장시간 잠을 재우지 않거나 육체적 고통을 주는 고문을 당한 끝에 "헌법 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2월 1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3월 2일 비상고등군법회의가 같은 형량을 선고한 뒤 대법원 형사부는 8월 20일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형을 확정했다.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장 선생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정보기관에서 당한 고문과 감방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심신이 피폐해진데다 모든 신문과 방송이 긴급조치 관련 양심수들과 가족의 참혹한 실상을 하나같이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으나 200명이 넘는 민청학련·인혁당 관련 정치범들은 아직도 차디찬 감방에 갇혀 있었다.
두 시간이 넘게 장준하 선생을 취재하고 병실을 나서려는 나의 손을 그가 다시 굳게 잡고 말했다. “동아일보사 여러분이 가장 큰 희망입니다. 이제 민중이 떨쳐 일어나 유신독재를 무너뜨리는 싸움에 나설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일하세요.”
그는 결국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나 붕괴를 보지 못한 채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아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날부터 37년이 지난 2012년 8월 15일, 광복 기념일에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 의혹’이 짙은 유골을 통해 역사의 현장에 되살아났다.
오는 12월 19일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기까지 박정희 정권이 그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공권력에 의한 ‘타살’로 확정될 경우 1975년 8월 당시 청와대에서 퍼스트레이디로서 공적 업무를 수행했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어떤 견해를 밝히고 박 정권의 책임에 대한 언급을 할는지 유권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책들이 적지 않은데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20대부터 50대 초반까지의 청·장년층 가운데 대다수는 그를 자세히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대통령선거라는 중대한 행사와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다.
항일의식이 투철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장준하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장윤희(1864~1950)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장로님’ ‘학자 어른’ ‘동의보감 할아버지’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선각한 계몽주의자’인 동시에 철저한 ‘배일사상가’였다. 할아버지는 의주에 양성학교라는 사학을 세워 스스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장석인(1901~1966)은 기독교 계열 학교인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를 거쳐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숭실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장석인은 1938년에 일제가 강요하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사직에서 쫓겨난 뒤 삭주의 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그는 6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남한에서 장로회신학대학 강사로 시작해서 서울 연희동교회 목사와 당회장을 지냈다.
장석인의 5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난 장준하는 형이 어릴 적에 숨지자 장남이 되었다. 1933년 15세의 나이에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들어갔다. 1934년 아버지가 선천 신성중학교로 옮겨갔기 때문에 그 학교 2학년으로 전학한 장준하는 졸업반(5학년)이던 1937년 5월 생애 처음으로 항일운동의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일제 경찰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교장 장이욱을 체포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격분한 장준하는 전교생을 이끌고 동맹시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시위 방법이 특이했다. 우선 그는 각 학년의 대표를 불러놓고 전교생 모두가 각자의 책가방에 든 일본어로 된 책을 모두 꺼내 찢어버리도록 한 뒤에 시위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몰려나와 대열을 짓자 장준하가 그 선두에 서서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구호는 “장이욱 교장 선생님을 석방하라!”였다. 그러나 시위 대열은 얼마를 가지 못하여 급히 출동한 일경에 부딪혀 차이고 두들겨 맞으면서 진로가 막혔다.
대열은 무너지고 되밀려 흩어지며 여기저기서 고함과 비명이 터졌다. 장준하는 후퇴하여 쫓기는 대열을 그대로 대목산으로 몰고 올라가 산상의 농성을 폈다. 그리고 일제히 목이 터져라 교가와 아리랑을 번갈아 부르며 발 아래 선천 읍내가 진동하도록 교장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외쳐댔다.(박경수 지음 돌베개, 2007, 57~58쪽)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서 총개머리로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치고 때리면서 주모자를 대라고 압박하자 장준하는 ‘내가 주모자’라고 나섰다. 아래 학년 대표들도 ‘내가 주모자’라고 주장하자 경찰은 장준하와 그들을 연행했다. 유치장에 갇혔다 풀려난 그들의 첫번째 항일투쟁은 패배로 끝났지만 그때부터 장준하는 일제 침략자들과 더욱 치열하게 싸우리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1938년 3월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장준하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그 학교가 곧 폐교되자 정주의 신안소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그는 창고건물이나 다름없이 허술한 학교에서 실질적으로 ‘교장 대행’ 구실을 하면서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다. 5학년 여학생들의 긴 머리채를 가위로 잘라 단발이나 갈래머리로 만드는가 하면 펄럭거리는 치마대신에 블라우스와 통치마를 입게 했다. 보수적인 정주의 어른들이 펄쩍 뛰었지만 그는 ‘학교 근대화’를 꿋꿋하게 밀고나갔다. 그는 6학년 남녀 학생들과 함께 과수원을 뒤엎어 새 교사를 짓기도 했다.
장준하는 태평양전쟁이 터진 1941년 봄 신안소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도쿄에서 곧바로 동양대학 철학과(예과)에 입학한 그는 한 해 동안 거기서 공부한 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일본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때 그 신학교 3년 과정의 본과에는 박영출, 황재경, 오택환 등이, 2년 과정의 예과에는 전택부, 문익환, 문동환, 김관석, 박봉랑 등이 있었다. 예과 학생인 문익환, 동환 형제와 김관석은 1970년대에 장준하와 함께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지가 된다.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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