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5일 토요일

“밥줄 끊고 방송 펑크 내는 게 분위기 쇄신인가”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8-24일자 기사 ' “밥줄 끊고 방송 펑크 내는 게 분위기 쇄신인가”'를 퍼왔습니다.
[PD수첩 역대작가 릴레이 기고 ④] 김미라 전 PD수첩작가

찰랑거리던 긴 생머리를 상큼하게 자른 학생이 다가온다. “어, 머리 잘랐네. 실연의 후폭풍?” “아뇨. 개강도 다가오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여대 교수인 내가 개강 무렵 마주치는 학생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우리는 가끔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머리스타일을 바꾸고, 집안의 가구 배치를 바꾸고, 주머니를 털어 여행을 떠난다. 나에게 ‘분위기 쇄신’이라는 말은 그동안 이런 상황에 주로 쓰는 일상적인 표현이었다. 그런데 고락을 같이 해온 의 작가 전원을 해고하면서 MBC의 한 간부가 처음에 그 이유를 ‘분위기 쇄신 차원’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한국 방송사에 전대미문의 오욕을 남기면서, 방송 제작의 한축인 작가들의 밥줄을 끊고 자존심을 짓밟으며 한 표현치고는 참으로 개념 없고 저열하다.
후배작가로부터 (PD수첩) 전직 작가들의 릴레이 기고에 동참해 달라는 전화를 받고 고민이 깊었다. 방송현장을 떠난 지도 벌써 7년이 넘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15년을 몸담았던 MBC는 밉든 곱든 친정이나 다름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사태의 주범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함께 부대끼며 (PD수첩)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켜왔던 선배이자 동료였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PD수첩) 22년 역사 가운데 6년 10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한 작가로서, 길거리로 내몰린 후배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고 잘못됐다 말하는 것이 지식노동자들의 소임이라면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서있는 학자로서의 길이 또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MBC 사측이 밝힌 (PD수첩) 작가 전원 해고의 ‘진짜’ 이유는 그들이 불편부당성과 중립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공정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파업에 앞장섰던 PD들을 해고하고 비제작부서로 내몰던 명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현장을 떠나있던 나로서는 최근 (PD수첩)의 분위기나 제작과정을 면밀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일련의 사태에 사측이 내세운 명분이 곧 공영방송이라는 MBC가 얼마나 허술한 조직인지, 그 실상을 만천하에 스스로 폭로하는 자충수를 둔 꼴이 됐다는 점이다. 속된 말로 ‘자뻑’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언제부터 일개 PD가, 일개 작가가 프로그램의 전체 방향을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제작 시스템이 되었단 말인가. 

지난 14일 오전 서울 세종로 방송통신위원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PD수첩 작가. 이치열 기자 truth710@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사 조직에는 엄연히 게이트키핑(gatekeeping)이라는 과정이 존재한다. 팀장과 국장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뉴스를 제작하는 보도국이나 (PD수첩)과 같은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만드는 부서에서 게이트키핑 기능은 필수적인 것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일개 PD의, 일개 작가의 개인적인 편향이 그대로 방송 프로그램에 반영되었다면, 공영방송 MBC의 게이트키핑 기능은 사실상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PD나 작가가 아닌 팀장이나 국장에게 먼저 직무유기의 책임을 묻는 것이 누가 봐도 타당하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정확한 단어까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대사가 나온다. 부하 직원에게 폭력을 행사한 클라이언트를 찾아가 계약을 파기한 건축사무소 소장(장동건 분)은 회사의 손실을 염려하는 직원에게 “그건 내 일이야. 내가 너보다 월급 많이 가져가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일 해결하라고 그런 거야…” 라고 말한다. 지위와 권력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방송사가 일선의 제작인력보다 팀장이나 국장에게 더 많은 임금과 대우를 하는 것 역시 그동안의 기여도 있겠지만 그가 안고 가야할 책임에 대한 대가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 자신이 바람막이가 돼 보호해야할 후배PD들이나 비정규직 작가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칼을 쓰는 것은 수치라는 고대 철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PD수첩) 작가 해고사태는 작가들에게 상처만 준 것은 아닌 듯하다. 칼자루를 쥔 그들의 의도는 정녕 아니었겠지만 작가들의 위상과 존재감을 세상에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두 축은 누가 뭐라고 해도 PD와 작가이다. 이것은 드라마뿐 아니라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들이 그렇다.
그런데 그동안 전면에 부상되지 않았던 탐사보도 작가들의 존재가, 역할의 중요성이 불미스러운 사태로 알려진 셈이다. 사측과 보수단체의 주장, 일부 언론보도만 보면 일반인들은 (PD수첩) 작가들이 소위 좌편향의 투사쯤 되는 줄 알기 십상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정규 대학교육을 받고 작가로 입문한 지극히 상식적인, 우리 사회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이들일 뿐이다. 자신이 우측으로 가있는 것을 모르고 중간에 서있는 사람에게 뚜렷한 근거도 없이 너무 좌로 가있다고 비난하는 형국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권력도 조직도 감시와 비판이 없으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특히 언론조직은 내부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다른 의견을 내는 ‘악마의 변론인(devil's advocate)’을 키우고, 그 스스로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 악마의 변론인이 되기를 자처할 때 본연의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도삼이사(桃三李四)’라는 말이 있다. 복숭아나무는 3년, 자두나무는 4년은 길러야 결실을 낸다는 뜻이다. 작가도 다르지 않다. 일정기간 다듬어지고 내공이 쌓여야 비로소 제 몫을 할 수 있다. 방송가에서 (PD수첩) 작가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과 경륜을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짧게는 4년, 길게는 12년을 (PD수첩) 한 프로그램에서 일했던 작가들은 자신들의 노력도 있겠지만 MBC가, (PD수첩)이 길러낸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해 아름드리 재목의 밑동을 스스로 잘라내는 우를 범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을 내친 결과 21일로 예정됐던 은 결국 전파를 타지 못했다. 노조의 파업 때는 그렇게 ‘시청자의 볼 권리’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대표적인 정규프로그램의 결방에는 왜 침묵하는지 묻고 싶다.
정재홍, 장형운, 이화정... , MBC 노조의 파업 이후 벌어지고 있는 살풍경을 지켜본 이들 작가들은 아마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또 누군가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고 이들을 회유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럽고 치사해서 그냥 떠나 버리면 그 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들처럼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야 할 싸움이 있다면 기꺼이 동참할 때 세상은 아주 조금씩이나마 변화하고 진보한다.
지난 21일에 있었던 정책발표회에서 이번 사태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시사제작국장은 다시 되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다. 의로운 일에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소신이지만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아집에 불과하다. 이쯤 되니 문득 고은 시인의 짤막한 시구(詩句)가 떠오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그들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그 의자에서 내려설 때에야 정녕 자신이 밟고 올라간 그 꽃들을 볼 수 있을까. 
(김미라 작가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6년 10개월 동안 (PD수첩)을 집필했으며, 2005년까지 15년을 MBC 전속작가로 활동. 이후 언론학 박사학위를 취득, 현재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 이다.)

김미라·(서울여자대학교 언론영상학부 교수) | jinpress@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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