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7일 월요일

장준하 죽음 열쇠, 그들이 쥐고 있다


이글은 시사IN 2012-08-27일자 기사 '장준하 죽음 열쇠, 그들이 쥐고 있다'를 퍼왔습니다.
장준하의 죽음에 남은 단서는 뭘까. 사건을 파헤쳐온 고상만씨가 기고를 보내왔다.

8월15일 아침. 과거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서 함께 일했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나에게 대뜸 “장준하 선생 관련 뉴스를 봤냐”라고 물어왔다. 뜬금없는 그의 말에 반문하자 “장 선생님을 이장하기 위해 묘를 개장했는데 두개골에서 타살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뉴스에서 난리다”라고 전했다. 관련 기사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짧은 순간, 많은 감회가 엄습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9년 전 기억이었다.


‘최악의 반유신 인사’ 장준하

2003년 5월 어느 날, 당시 나는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 공채 시험에 응시했다. 다행히 필기와 면접시험을 거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된 조사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나에게 어떤 사건이 배당될까’였다. 어떤 이는 학생운동 출신의 아무개 사건을 꼭 한번 다뤄보고 싶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노동운동 출신 아무개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연합뉴스 2004년 1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장준하 선생의 미공개 유해 사진을 공개했다.

나 역시 꼭 해보고 싶은 사건이 있었다.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사건이었다. 부끄럽지만 내가 처음 장준하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1993년이었다. 당시 SBS 에서 방영된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다룬 2부작을 본 것이 계기였다.

1975년 8월17일. 장준하 선생은 평소 자신을 돕던 호림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포천 약사봉으로 산행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 선생은 계곡에서 쉬는 일행을 두고 혼자 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산으로 올라갔던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사했다는 것이다. 이를 계곡의 일행에게 전달한 이는 자신이 장 선생과 동행했다는 김용환이었다. 

그는 1967년, 장 선생이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자원봉사를 하겠다며 스스로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1971년 장 선생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홀연히 사라졌는데 산행 당일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장 선생이 자신과 함께 하산하던 중 벼랑에서 ‘실족 추락’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호림산악회장 등 일행 몇 명이 추락했다는 계곡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장 선생은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 후 경찰과 검찰은 사건을 목격했다는 동행자 김용환의 주장에 따라 장 선생이 실족 추락사했다고 발표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사상계> 대표 시절의 장준하 선생.

하지만 당시 이러한 수사 발표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게 장준하 선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최악의 반유신 인사’였다.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웠다. 누구처럼 에둘러 비켜가지도 않았다. 공개된 집회에서 그는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의 진짜 주범은 박정희라며 그를 ‘밀수 왕초’라고 표현했다. 이로 인해 ‘국가원수 모독죄’로 잡혀갔지만 그의 반박정희, 반유신 투쟁은 한 번도 굽혀지지 않았다.

1974년 1월. 결국 박정희 정권은 초유의 처방을 내리게 된다. 이른바 ‘긴급조치 1호 및 2호’를 발표한 것이다. 장 선생은 이 조치 발표 후 첫 번째 구속자였다. 민간인 신분으로 군사법정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 관계자의 입을 통해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긴급조치 1호 및 2호가 사실은 “장준하 한 사람을 잡아넣기 위한 조치”였다는 증언이었다. 이처럼 단 한 사람을 잡아넣기 위해 국가가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에게 장 선생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 수 있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조사해보고 싶었던 장준하 선생 사건이 나에게 배당되었다. 그러면서 조사관 두 명을 더 선발해 소신껏 일해보라는 배려까지 받았다. 당시 인력 부족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의문사위의 처지를 감안할 때, 장 선생 사건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 조사에 착수하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의문이 있었다. 지금도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을 만나면 늘 듣는 질문이기도 하다. 바로 “박정희 정권이 장준하 선생을 죽였다면 왜 죽였겠는가”이다. 이 질문에 실마리를 풀어준 이가 ‘법정 스님’이었다. 1976년 장 선생 1주기를 맞아 함석헌 선생이 발행하던 는 추모 특집 기사를 게재했다. 여기에 법정 스님의 추모 글이 실려 있었는데 우리의 눈을 확 끌어당기는 일화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바로 법정 스님을 뵙고자 수소문을 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오대산의 오두막에 기거하던 스님으로부터 면담에 응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며칠 후, 법정 스님은 특유의 평온한 얼굴로 그날의 기억을 차분히 되살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증언한 장준하의 집념

1974년 12월 말경. 당시 젊은 법정 스님은 서울 종로의 조광현내과를 방문했다. 그해 1월 긴급조치로 구속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장 선생이 병보석으로 풀려나 입원하자 문병을 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장 선생을 ‘영원히’ 가둬두고자 했으나 뜻대로 하지 못했다. 

국내외의 비난 여론과 특히 당시 미국 대사였던 하비브의 적극적 역할이 미국 정부를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채 1년도 안 되어 장 선생을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장준하기념사업회가 8월16일 공개한 장준하의 유골 사진(위). 1975년 8월17일 등산 중 추락사한 장준하의 시신을 검시하는 모습(왼쪽).

법정 스님은 석방된 장 선생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어서 몸을 추스르라는 덕담을 건넸다. 그때였다고 한다. 장 선생이 법정 스님에게 부탁이 있다며 베개 밑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건네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 선생이 “누구누구를 만나 그들에게 서명을 받아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그 뭉치가 바로 ‘유신헌법 개정을 위한 제2차 100만인 서명운동’이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 정권이 정말 장준하를 죽였다면 ‘왜 죽였겠는가’라는 의문을 둘러싸고 떠돌았던 추측은 많았다. 어떤 이들은 장준하 선생이 무장 혁명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타도할 계획을 꾸몄다는 주장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그해 8월15일을 기해 모종의 성명을 발표하려 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정확한 증언은 없고 대부분이 추측이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의 증언이 나온 것이다.

이를 재차 확인해준 분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2003년 12월18일. 김대중 도서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면담이 이뤄졌다. 이날 면담의 핵심은 장준하 선생이 사망하기 보름 전인 1975년 7월29일,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에서 장 선생과 나눈 밀담의 내용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로부터 입수한 ‘장준하 관련 행적 일지’를 분석하던 중 확인된 내용이기도 했다.


장 선생의 행적 일지는 매우 놀라웠다. 그야말로 장준하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누구와 몇 시에 어디서 어떤 내용으로 만났고, 집에 출입한 이들은 누구인지, 심지어 장 선생의 안방 대화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바로 그날, 그러니까 1975년 7월29일 기록에는 장 선생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교동에서 만난 사실만 기재되어 있을 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가 없었던 것이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런 민감한 내용을 답해줄지 솔직히 장담할 수 없었다. 많은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응해주시든 아니든 요청이나 해보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의외였다. 공문으로 면담을 요청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김 전 대통령께서도 꼭 전달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다며 흔쾌히 응하겠다는 답변이었다.

약 40분간 이뤄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증언은 매우 유익했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가 궁금해했던 사안을 비롯해 새로운 여러 사실도 적극적으로 밝혀줬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장준하 선생이 계획했던 이른바 ‘거사의 실체’였다. 

“(1975년) 7월 장준하 선생이 찾아오셨어요. 나는 그때 연금당해서 못 나갔는데 내 기억에는 그때 오찬을 하면서 유신 철폐에 대해서 서로 심도 있게 얘기를 하고 그랬죠. 장 선생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있어요. ‘내가 이제 희생을 각오하고 싸우겠다. 그리고 당신한테 얘긴데, 사실은 나도 지금까지 어떤 대망을 가지고 당신에 대해서 라이벌 의식도 가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포기했다. 나는 민주 회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 당신이 움직일 수 없으니까 나라도 움직여서 내가 하겠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일을 해내자.’ 그런 솔직한 자기 심정을 얘기했던 기억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실무적인 일을 장준하 선생이 맡아 하는 것으로 했던 것입니다.”(2003년 12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육성 녹취록 요지)

‘유신개헌 운동’에 대한 공포

유신헌법을 개헌하자는 제1차 100만인 서명운동을 막기 위해 장준하를 잡아넣었으나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던 유신정권. 그런데 그 장준하가 또 다시 굽히지 않고 재차 제2차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공식 선언한다면 이는 박정희 정권 처지에서 정말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큰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신독재 권력이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국회의원 시절의 장준하(오른쪽에서 두 번째). 1967년 장준하는 옥중 출마하여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렇다면 중앙정보부는 장 선생의 이 같은 제2의 개헌 청원운동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까. 의문사위가 입수한 1975년 3월31일자 중앙정보부의 기밀문서에 그 답이 있었다.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라는 제목의 이 기밀문서는 “장준하의 개헌운동 계획을 사전 탐지해 와해, 봉쇄함으로써 조직 확장과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 공작 필요 시 보고 후 실시한다”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작 필요 시 보고 후 실시’한다는 보고서가 작성된 4개월 후 장준하는 죽었다.

장 선생의 두개골에서 확인된 지름 6㎝의 가격흔은 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주는 명백한 증거일 수밖에 없다. 지금에 와서 밝히건대, 사실은 2004년 나는 이 문제를 두고 장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와 수차례 접촉했다. 대구 개구리소년 사건이 타살임을 밝혀낸 경북대 의대 채종민 교수와 협의 끝에 내린 결론이라며 “분묘 개장 후 두개골을 확인하자”라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개골의 가격흔을 확인해보자는 우리의 주장은, 그러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장호권씨는 당시 박정희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과연 공정한 진실이 나올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며 고심했다. 당시 이 같은 유족의 우려는 어쩌면 오랜 피해로 인한 당연한 결론이었는지 모른다.


국정원·기무사에 존안된 자료 공개가 관건

그 후 9년이 흘렀고 나는 매년 장준하 선생의 기일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에 남은 진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이번 장 선생의 타살 의혹을 뒷받침하는 두개골 관련 보도를 읽고 내 마음은 차라리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의문사위 장준하 선생 조사팀장이었던 나는 요구한다. 이제 국가정보원은 사건 당일인 1975년 8월17일, 장 선생의 사망을 알리는 1차 보고 후 이어진 또 다른 추가보고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 

국가정보원만이 아니다. 기무사령부 역시 마찬가지다. 기무사 측은 의문사위 조사 당시 장 선생과 관련한 우리의 자료 제출 요구에 단 한 장의 문서도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 선생과 관련한 문서를 일절 보관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를 직접 확인하겠다며 방문한 우리에게 철문을 걸어 잠갔다.

기무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장 선생이 사망한 다음 날, 당시 보안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독대 면담했다. 이는 장 선생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고 이후에도 역시 없는 일이었다. 기무사의 연관성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장 선생이 사망한 현장 인근에는 보안부대가 위치했다. 우리는 사건 현장에 많은 중정요원이 방문했으니 보안부대장 역시 현장을 방문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1회 조사 시 이를 강력 부인했다. 결국 우리의 집요한 조사 끝에 그가 현장을 다녀갔다는 증언을 확보했고 이를 제시하자 자신의 말이 거짓임을 실토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장 방문 결과를 16절지 절반 분량의 텔레타이프로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진실이 이러한데도 기무사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같은 국가 정보기관의 은폐 및 진실 조작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37년이면 족하다. 국가권력의 범죄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타살되었음을 밝혀줄 중요한 열쇠를 37년 만에 드러내준 장준하 선생. 이제 남은 것은 ‘살아 있는 우리의 몫’이다. 국민의 관심이 마지막으로 남은 ‘비밀의 문’을 열어줄 것을 기대한다.

고상만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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