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9일 화요일

'학림사건' 31년만의 무죄, 공포의 기억들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6-18일자 기사 ''학림사건' 31년만의 무죄, 공포의 기억들'을 퍼왔습니다.
황우여 등 당시 판사들 사죄 한마디라도

※ 이 글을 보내온 최경환씨는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한 마지막 비서관이었으며, 지금은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으로 있다. 1981년 성균관대학 3학년 재학 당시 ‘학림사건’에 연루돼 43일 동안 대공분실에 불법구금돼 조사를 받았으며, 이 사건으로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31년이 지난, 2012년 6월14일 대법원은 ‘학림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 1980년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저항이 언제 일어날지 두려워했다.

29년만의 ‘최후진술’
2009년 6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전두환 시절의 대표적인 공안사건 중 하나인 1981년 ‘학림사건’을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고 재심, 즉 다시 재판할 것을 사법부에 권고했다. 불법구금과 고문, 가혹행위 등에 대해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고등법원은 재심 재판을 시작했다.
2010년 12월 우리 사건 관계자 25명은 모두 재판정에 다시 출두했다. 우리는 다시 ‘피고인’ 신분이 되었다. 29년전 법정에서 함께 앉아 재판을 받는 풍경이 다시 연출되었다. 재판장은 우리에게 모두 한마디씩 하게 했다. 29년만의 ‘최후진술’이었다. 우리들은 전민학련, 전민노련 활동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있었던 불법감금과 고문, 구타 등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다시한번 상기시켰다. 내 기회가 왔다. 나는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재판부가 우리 사건을 양심에 따라 바르게 재판을 했다면 5년후인 1986년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 대한 살인적인 고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6년후인 1987년 서울대 학생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그곳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재판부의 용기있는 판결을 기대한다.”
나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과 불법감금행위를 재판부가 묵인함으로써 그 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고문의 피해를 보았다는 점을 상기시킨 것이다.
재심 무죄판결, 재판부의 사과, 그러나 검찰의 상고
며칠후 우리는 다시 법정에 모였다. 재판부는 우리의 범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일부 집회시위법에 대해서는 해당 법률 조항이 폐지되었다는 이유로 면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른바 ‘전민학련, 전민노련’, 즉 ‘학림’ 사건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 사건은 12.12군사반란과 계엄령 및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진압을 통하여 집권한 내란주동자 전두환 등 이른바 신군부세력이 자신들의 권력기반의 안정을 기하고 국민들의 저항의지를 꺾으려고 하던 중, 국가보안법을 악용하여 민주화운동세력인 피고인들의 의한 정당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불법강제연행, 장기간의 불법구금, 고문, 협박 등의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반국가단체로 조작하고, 피고인들을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회합하거나 북한에 찬양, 고문, 동조하는 좌익용공세력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 끝을 다음과 같이 맺었다.

“우리 재판부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그리고 피고인들의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여야 할 책무를 다하지 못한 과거 재판부의 과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한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재판부가 과거 재판부의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었다. 언론은 재판부의 반성에 대해 이례적이라고 보도했다. 재판장은 안영진 판사였고, 오상용 판사와 신종오 판사가 배석했다. 우리는 진실을 밝혀내고 자신의 과오를 사과한 재판부에 감사를 드렸다.
검찰의 변명, “우리는 고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은 선배 검사들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했다. 검찰은 당시 고문, 폭력행위는 경찰, 즉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한 것이지, 검찰 조서 작성과정에서는 고문이 없었기 때문에 피고인들의 진술은 유효하다고 상고이유를 주장했다. 여기에 맞서 우리도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했다.
고등법원 판결이 있은 후 1년 6개월이 지난 2012년 6월 14일 오후 우리 동료들은 서초동 대법원 1호 법정에 다시 모였다. 대법원의 최종판결을 받기 위해서였다. 판사는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우리가 이긴 것이다. 대법원이 검찰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이른바 ‘학림사건’에 대한 무죄가 최종 확정된 순간이었다.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피고인이 검사 이전의 수사기관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고 그후 검사의 조사단계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계속되어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하였다면 검사의 조사단계에서 고문 등 자백의 강요행위가 없었다고 하여도 검사 앞에서의 자백도 임의성 없는 자백이라고 보아야 한다.”
대법원은 올바른 판단을 했다. 검찰이 꾸민 조서는 이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과 폭력 속에서 작성된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검찰 조서 작성과정은 대공분실에서 작성한 조서를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당시 검찰이 남영동에서 있었던 고문과 폭력을 모를 리도 없었을 것이다. 후배 검사들은 어떻게든지 선배 검사들이 고문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록에 남겨두려고 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 News1
1981년 6월 21일 새벽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내 자취방에 건장한 체격의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당시 성균관대학 사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으로 서대문구치소 맞은편 언덕 산동네에 조그만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3-4명의 형사들은 잠을 자고 있는 방 안까지 들어와 나를 깨웠다.
형사들은 소리없이 내 방까지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형사들은 내 손을 뒤로 꺾고 머리를 눌렀다. 양팔을 붙잡힌 채 자취방에서 끌려나왔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형사들은 자취방에 있는 책과 노트를 모조리 챙겼다. 새벽잠에서 깨어난 주인 집 식구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나를 쳐다봤다. 형사들은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 끌려나온 나는 독립문 사거리에 있는 파출소로 끌려 들어갔다. 형사들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나의 연행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바로 준비한 검정색 승용차에 나를 태웠다. 얼굴을 옷가지로 덮었다. 
‘왜 그러느냐?. 어디로 가느냐?’
나는 소용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항의를 했다.
‘가만히 있어!’
형사들은 나의 머리를 눌렀다. 공포가 밀려왔다.
차가 어딘가에 멈췄다. 차에서 내려 계속 얼굴을 가린 채 어딘가로 끌려갔다. 형사들은 나의 양팔을 붙들고 있었다. 얼굴에 덮어 씌운 것을 치우자 2평 남짓한 방안이었다. 방음벽으로 된 방이었다. 어떤 기관의 조사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방 한 켠 입구쪽으로 조사용 철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벽쪽으로 침대가 있고, 안쪽에는 욕탕과 변기가 있었다.
나는 이곳이 말로만 듣던 ‘남산’이 아닌가 생각했다.(‘남산’은 박정희 시절의 중앙정보부, 전두환 시절의 국가안전기획부가 위치한 곳으로 서울 남산에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그곳은 민주인사들을 잡아가 고문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안쪽 벽에는 세로로 된 조그만 긴 창문이 나 있었지만 밖을 내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날 아침을 전후로 하여 ‘전민학련’ 사건(‘학림사건’)으로 알려진 조직의 관계자들이 대부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은 훗날, 그러니까 1986년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김근태 민청련 의장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당했고, 1987년 서울대 학생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당해 죽은 곳이었다. 내가 연행된 이후 5, 6년후의 일이다.
“휴전선에서 총으로 쏴 죽이고 월북하는 놈 사살했다 하면 그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빨갱이 새끼!’ ‘이 놈’ ‘개새끼’ 등 갖은 욕설을 들으며 몽둥이 찜질과 발길질 세례를 당했다. 몽둥이도 그냥 몽둥이가 아니었다. 어른 팔뚝만한 두께의 몽둥이로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들은 모두 군화를 신고 있었는데 3-4명이 둘러서서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사정없이 밟고 찼다.

▲ 1981년 새 학기부터 서울지역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전두환 정권은 국면을 전환시킬 구실을 찾고 있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죽일 기세였다. 순간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살려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욕설을 해대며 때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취조가 시작됐다. 주로 이선근 등 ‘전민학련’의 선배들 이름을 말하며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처음에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또 몽둥이 찜질이 시작됐다.
평생에 그렇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옆방에 다 와 있다고 했다. 나는 그때서야 이미 선배들이 모두 연행됐다는 것을 알았다. 몽둥이찜질과 구타는 조사받는 동안 계속됐다. 나는 함께 연행된 이태복, 이선근 등 선배들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훗날 재판과정에서야 알았다.
나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30여일,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10여일간 연행되어 있었다. 물론 불법상태였다. 연행될 때는 물론 대공분실에 조사할 때도 나에게 구속영장을 제시하지도 않았고, 임의연행과 장기 불법구금에 대해 한마디 양해의 말도 하지 않았다. 6월 21일에 연행되고 8월 3일 정식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될 때까지 43일간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불법구금이었다.
당국은 연행 사실을 가족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 가족들은 방학을 앞두고 내가 갑자기 실종되자 어딘가에 끌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내가 연행된 때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때였다. 광주에 살며 광주사태를 직접 경험한 부모님은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캠퍼스에서도 어떤 기관에 끌려간 것 같다는 소문만 돌았다고 한다. 종로경찰서에서도,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이감된 후에도 몇달간 가족면회마저 금지되었다. 모두가 불법이었다. 검찰 조사가 끝나고 재판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서대문 서울구치소로 면회온 어머니는 죽은 자식을 보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에 얼마간 면회실을 들어오지 못했다.
남영동과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43일 동안 오른손 가운데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길 정도로 지겹도록 조서를 꾸몄다. 조서는 나는 사회주의자고, 전민학련이라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 되어 북한을 찬양 고무하는 활동을 했고, 81년 봄 성균관대학에서 일어난 모든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꾸며졌다. 그 과정에서 조사관은 “너 사회민주주의 좋아하잖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써!”라고 하더니 며칠후에 와서는 “‘민주’는 빼고 사회주의자라 하자”고 하며 조서를 다시 쓰게 했다. 그리고 “너희 놈들은 휴전선에 풀어놓고 총으로 쏴죽이고 월북하던 놈 사살했다 하면 그만이다”라며 공갈과 협박을 일삼았다.
공포 속에서 조서 꾸미기
조서 쓰기는 밤낮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른 방에서 조사받고 있는 선배나 동료들과 조서 내용이 틀리다며 또 몽둥이 찜질을 당해야 했다.  담당 조사관은 2명이었다. 교대로 근무하며 함께 생활을 같이했다. 조사관은 밤에도 침대 시트를 내려놓고 옆에서 같이 잠을 잤다. 24시간 철저히 감시 속에서 살았다. 식사는 끼니가 되면 식판에 담겨 들어왔다.
조서는 철저히 꾸며졌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 활동한 성균관대학교 도산연구회에서의 세미나, 엠티 등 서클 활동은 모두 반국가단체 활동을 위한 의식화 교양과 조직화 사업이 되었다. 내가 읽은 각종 책들은 모두 의식화 교양 서적이 됐다. 그 목록에는 (한완상), (E.H. 카), (조용범), (최종식), (송건호), (에릭 프롬) 등의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대학 2학년 겨울 무렵 선배들의 소개로 알게 된 동국대학교의 이종구, 성신여대의 이연미와 ‘민주학우회’라는 이름의 학생모임을 만들었다. 세 사람의 모임은 경기도 대성리 민박집이나 서울 시내의 음식점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겨우 세 사람이 모이는 ‘민주학우회’ 모임은 ‘현저히 사회를 불안하게 할 목적’을 가진 신고하지 않은 불법집회가 되었다.
그리고 1981년 1학기에 성균관대에서 있었던 2~3 차례의 ‘전두환 타도’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주장한 학생시위를 ‘민주학우회’가 사전에 음모하고 내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꾸며졌다. 당시 학생 시위는 1년전 광주에서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을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의식 있는 학생들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 '학림사건'을 다룬 신문기사. 대학 내 비밀조직이 침투해 배후 조종한다는 내용.
학림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조작
밥을 먹은 후 식판을 내놓으며 조사실 밖 복도를 내다볼 때가 있었다. 중앙 복도 양쪽으로 조사실이 연이어 있었다. 내 방 앞방에는 여자 선배 한 분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어느날  담당 조사관과 또 다른 조사관이 키득키득 웃고 좋아했다. 조사관들은 여자 선배에게 목욕하라고 방을 비워주었다. 그리고 밖에서 훔쳐본 것이다. 모든 조사실 방에는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는 렌즈가 달려 있었다. 아파트 안에서 밖 복도를 볼 수 있도록 한 자그마한 렌즈를 밖에서 안을 감시하도록 거꾸로 달아놓은 것이다. 파렴치한들이었다. 인권유린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도 공포에 질리고 무기력에 쌓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선배를 생각하면 항상 미안하고 죄스럽다.
남영동 조사를 받은 지 30여일이 지난 7월 하순경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소식이 들렸다. 옮겨진 곳은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또 다른 대공분실이었다. 조사실은 남영동과 마찬가지로 방음벽 처리가 돼 있었고 4-5평 정도로 컸다. 그곳에서 그 방대한 조서를 다시 썼다.
1980년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저항이 언제 일어날지 두려워했다. 1981년 새 학기부터 서울지역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전두환 정권은 국면을 전환시킬 구실을 찾고 있었다. 여기에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을 이용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과 수사당국은 전민학련을 반국가단체로 크게 선전해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국민들로부터 떼어놓을 계산을 하고 있었다. ‘학림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조작이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민주화운동을 반국가단체 활동으로 조작한 것이다.
그러나 학생, 노동자 등 관계자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정권은 부담을 느꼈다. 수사당국은 기소와 사건 발표에 앞서, 급히 재학중인 대학생들의 조서를 전부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집회시위법 위반으로 다시 작성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옥인동 대공분실로 옮겨 조서를 다시 꾸며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때 잡혀간 선배 그룹들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원이 되고, 나를 포함한 후배 그룹들은 계엄법 위반과 집회시위법 위반이 적용됐다. 이렇게 조서는 자신들 입맛대로 꾸며졌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30여일 넘게 장기간 불법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구속은 되지 않고 석방된 동료, 선배후들도 많았다. 또 연행대상이었지만 끝까지 피신을 하거나 피신중 시위를 주도해 감옥에 들어간 선후배, 동료들도 많았다. 앞에 말한 ‘민주학우회’의 동국대 이종구는 함께 구속되었지만, 성신여대 이연미는 대공분실 조사를 마치고 석방돼 학교에서 유기정학 처분을 받아야 했다. ‘전민노련’ 쪽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이 조사를 받거나 수배를 받았다.
황우여 등 당시 판사들, 사죄의 한마디라도 있었으면…
1981년 8월 3일 정식 구속돼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어 서대문 서울구치소로 이감돼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는 징역 3년 구형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심리후 1982년 5월 22일 징역 1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 판결문에는 ‘전두환 타도’ ‘광주항쟁 만세’ 등의 시위를 주관하고 전국민족민주학생연맹과 관련한 조직활동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시위를 음모, 주도하고 참여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해 8월 25일에는 성균관대학에서 '징계 제적'되었다.
당시 검사는 안강민, 임휘윤, 김경한, 박순용이었고, 1심 재판장은 허정훈 판사였고, 이영애 판사, 장용국 판사가 배석했다. 2심 재판장은 최종영 판사였고, 이강국 판사와 황우여 판사가 배석했다. 최종영 판사는 대법원장을 지냈고, 이강국 판사는 지금 헌법재판소장이다. 황우여 판사는 지금 새누리당 대표를 맡고 있다. 후배들인 재심 판사들은 “책무를 다하지 못한 과거 재판부의 과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한다”고 사죄했다. 그러나 당시 판사를 지낸 분들은 아무 말이 없다.
당시 재판을 우리는 ‘쪽지재판’이라 불렀다. 어디선가 재판부에 전달되는 쪽지를 보고 형량을 정하고 판결을 내린 것이었다.'청부재판'이었다. 재판부는 우리 피고인들의 주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인권변호사 이돈명 변호사, 황인철 변호사 등 변호인들은 우리들의 순수한 민주화 열정, 수사과정의 고문과 불법행위를 용기 있게 지적했지만 재판부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선고 재판 때 판사들은 법정의 피고인들과 눈도 맞추지 못했다. 방청석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숙이며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판결문을 황급히 읽어내려가기에 바빴다. 지금도 그때 판사들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판사들이 지금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씁쓸하다. 그들은 “군사정권 아래서 어쩔 수 없었다. 우리도 피해자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군사정권의 편에 서 있었고, 가해자를 도운 것만은 분명하다.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진실의 규명뿐 아니라 그들의 반성과 사죄가 있어야 한다.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  beyond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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