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1일 월요일

곽노현·박원순의 교육희망 선언, 진보언론마저 외면하나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5-21일자 기사 '곽노현·박원순의 교육희망 선언, 진보언론마저 외면하나'를 퍼왔습니다.
[권재원의 교육창고] 진보는 도덕적 순결이 아니라 미래의 전망

스승의 날을 하루 앞 둔 5월 14일 역사적인 선언이 있었다. 곽노현 서울교육감과 박원순 서울시장의 ‘서울교육희망선언’이 그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5월 12일에 있었던 통합진보당 중앙위 폭력 사태로 주요 신문의 지면이 가득 덮이면서 이 귀중한 뉴스가 묻혀버리고 말았다.

소위 진보진영에서 일어나는 선정적인 소재라면 불원천리하며 달려가는 조중동이야 딱 좋은 먹이를 찾아 달려가느라 신경쓸 틈도 없었다지만, 소위 정론지를 자처하는 신문들, 진보 언론을 자처하는 매체들의 ‘서울교육희망선언’에 대한 무관심은 의외다.

물론 진보진영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도덕적인 스캔들은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하지만 진보는 돌아보기 보다는 내다 보아야 한다. 자신의 내부를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와 함께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래의 밝은 희망을 보여주는 그런 진보진영의 메시지도 있음을 보여 주었어야 했다. 그것이 조중동과 진보언론의 차이라야 했다. 그렇다면 그 무렵에 “서울교육희망선언”보다 더 좋은 소재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지난 14일 오전 '2012 서울 교육 희망 공동 선언'이 서울시 교육청에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더구나 경향신문 같은 경향은 아이를 살리는 7대 약속인가 뭔가 하는 기획까지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이 7대 약속 기획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이 약속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너무 당연하고 뻔해 보이는 것들이다. 이런 뻔하디 뻔한 약속들에 대한 강조는 교육문제를 교육주체의 문제로 전가시켜 버린다. 또 어른들과 아이들의 약속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교육 전문가인 교사와 일반인인 학부모가 모호하게 일체화되어 버린다. 이런 식의 약속은 안 그래도 신자유주의 시대 들어서서 공교육에서 손 떼려고 하는 국가와 지자체에게 탈출티켓을 진보의 이름으로 선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 식의 접근이 나쁜 것은 교육문제의 해결을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노력과 운동이 아니라 개인적인 진실성과 노력으로 환원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자 열심히 아이들과 함께하는 소박한 활동만으로도 교육개혁을 위해 할 일을 다했다는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천진난만한 착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반대 편향으로 치우쳐서도 안 된다. 그 반대되는 위치에 사회구조 환원론이 있다. 입시문제, 더 나아가 사회 전반적인 불평등 구조가 교육문제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사회개혁이 일어나기 전에는 교육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진보진영에 큰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사실상 교육개혁을 위해 교육주체들은 아무런 할 일이 없다. 사회개혁이 다 되어야 하는데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만약 왜 사회가 개혁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면 사회개혁가들은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아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왜 의식이 바뀌지 않느냐 물어보면 교육이 문제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러니다.

반면 곽노현 교육감과 박원순 시장의 서울교육희망선언은 교육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경향과 더 큰 사회 구조적 문제로 환원하려는 경향을 모두 극복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마을이 학교다”라고 주장하는 박원순 시장과 “학교가 마을이다”를 주장하는 곽노현 교육감이 만난 것이다. 여기서 “마을”의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마을은 도시, 국가처럼 거대하고 추상적인 사회체계의 영역도 아니며, 그렇다고 개인, 가족처럼 사적인 영역도 아니다. 마을은 그 사이의 매개가 되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영역이며, 서로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면서도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다.

그 동안 우리 교육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같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목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세계를 꿈꿀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민족, 국가, 세계와 같이 멀리 떨어진 거대한 전체를 위해 공부해야 했다. 공간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그러하였다. 학생들은 공부를 항상 미래를 위해서 했다. 공부란 자란 다음, 어른 된 다음, 심지어는 노후을 위해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견뎌야 하는 고역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에서 느끼고 마주칠 수 없는 거대한 국가, 세계, 인류 따위를 위해 공부한다는 말은 공허하다. 국가, 세계, 인류를 위해 기여하고 싶어도 구체적으로 기여할 방법과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회를 위해 기여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출세부터 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공허한 목적이기 때문에 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공부는 사실상 이기적인 목적, 즉 자기가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었음을 느끼고 싶어하며,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기여하고 있음을 느끼며 거기에서 존재론적인 안전감을 얻는다. 하지만 국가, 민족, 세계 따위는 그러기에는 너무 거대하며, 만약 거기에서 존재론적인 안전감을 얻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파시즘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따라서 자신이 소속감을 느끼고 기여할 수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커서 추상적이 되어버리지 않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러한 공동체를 가지지 못한 인간은 외롭고, 고독하며, 상실감을 느끼며, 불안하다. 이것이 찰스 테일러가 말한 현대인의 질병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의 만남은 너무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동안 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했다. 교육청은 지방자치단체를 그저 돈이나 주면 되는 존재로 여겼다. 또 반대로 지방자치단체는 교육지원사업을 자신을 폼내는 일로 생각했지 실제 교육적인 내용까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교육청이 해야 할 일,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 그리고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일에 대해 협의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공동의 실천 방안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의 실천방안을 기나긴 토론 끝에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실천할 영역이 문화·예술과 돌봄임을 천명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단위는 “마을”임을 명시했다. 학교는 이 마을의 문화·예술·돌봄의 허브가 되며, 동시에 지방자치단체가 보유하고 있는 시설들은 학교에게 살아있는 삶의 현장을 제공하면서 학생들이 마을에 참여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돌봄이 필요한 학생들은 “마을”이 책임지고 맡아주며, 이들은 마을에서 단지 보살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문·예술·체육 활동을 통해 교육받는다.

이런 꿈 같은 희망을 그려내면서 “서울교육희망선언” 은 지금 여기에서 교육청과 시청, 그리고 교사와 공무원, 학부모와 시민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그저 착하기만 한 경향신문의 일곱 개의 약속이 개인 차원에서, 민간인 차원에서의 약속이라면 이 선언은 실제로 어떻게 돈을 써서 무엇을 세우고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 수준의, 공동체 수준의 약속인 것이다. 개인 수준과 공동체 수준의 약속이 모두 이루어져야 비로소 기성세대는 청소년에게 제대로 된 약속을 한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경향신문의 “교육희망선언”에 대한 외면은 매우 뼈 아프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후 이 선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어 나가는지에 대해서라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도리어 보수진영에서는 이 선언의 진보성과 위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계속해서 비판해 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이러니 진보가 게으르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침묵하지 말라.

참고로 서울교육희망선언의 전문을 여기에 링크한다. 

권재원 풍성중학교 교사 | hagi814@gmail.com  

댓글 없음:

댓글 쓰기